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8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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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비슷한 것'은 한 달 가량 계속 됐다. 한 달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잠을 맞이하지 못했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이제 자볼까 생각한다. 그러면 그 순간 마치 조건반사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되레 잠이 깼다."      

 

여자는 지금 17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병원에 가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가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치과의사인 남편과 초등학생인 아들은 그녀가 한잠도 못 잔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고, 그녀는 이건 혼자서 처리해야 할 종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술을 마시고, 과일을 먹고, 책을 읽는다. 긴 러시아 소설이 읽고 싶어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를 꺼내 든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기에, 그녀는 한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날이 밝으면 다시 평범한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냈다.

 

 

그녀는 매우 신속하고 기계적으로 집안 일과 할 일을 마치고, 틈만 나면 <안나 카레니나>를 집어 들었다. 10시가 되자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 함께 자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렇게 연속되는 각성이 2주째에 접어들자 불안해졌지만, 이상하게도 피부가 전에 비해 훨씬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있었으며, 몸에서도 터질 듯한 생명력이 넘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지만, 점차 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녀는 도서관에 가서 잠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무덤덤하게 기계적으로 이런저런 가사 작업을 하고, 일주일에 걸려 <안나 카레니나>를 연속으로 세 번 읽는다. 과거에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온갖 발견과 수수께끼들, 그리고 톨스토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가 한눈에 내다 보였다. 그녀는 점차 점차 잠 못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번에 다시 읽고 알았는데,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을 거의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기에 있었을 감정의 떨림이며 흥분의 기억은 어느새 모두 스르르 빠져 나가고 없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 내가 책을 읽으며 소비한 막대한 시간은 대체 뭐였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이 프랑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와 만나 근사한 그래픽 노블로 재탄생했다. 아홉 편의 작품 중 <잠>은 <TV피플>이라는 소설집에 수록되었고, 카트 멘쉬크의 일러스트레이션과 함께 아트북으로도 출간된 적이 있다. 평범한 가정 주부가 어느 날 가위눌림과 기분 나쁜 꿈을 꾼 뒤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딘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열린 결말로 긴 여운을 남겨 준다.

 

잠을 자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이 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를 되짚어 보게 만든다. 이상하게도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어떤 책이든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어떤 난해한 대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본연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잠을 버림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확대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깨달음이었고, 당연히 그녀의 삶은 그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는 독창적 이미지 연출을 선보이면서도 원작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 대사 등을 왜곡 없이 담아냈다. 덕분에 원작의 문장들을 고스란히 보면서도, 창의적인 컷 분할과 디테일한 그림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굉장히 하루키스러우면서도, 또 반대로 완전히 낯선 느낌이 공존하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텍스트로 읽으면서 상상했던 공간과 배경, 인물들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구체화시켜서 볼 수 있다는 매력과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촘촘히 글자만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도 너무 좋고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하루키 단편 만화선은 <빵가게 재습격>,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 <셰에라자드>, <버스데이 걸>, <사랑하는 잠자>,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일곱 번째 남자>, <잠>, 그리고 <타일랜드>까지 아홉 편이다. 세트로 구매해도 소장용으로 좋을 것 같고, 원하는 작품만 개별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하루키의 작품을 색다른 분위기로 만나면서 단편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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