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북 시리즈 10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김양미 옮김, 김지혁 그림 / 인디고(글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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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에게 메그는 속내를 털어놓는 친구이자 조언자였고, 성격이 정반대인데도 불구하고 온화한 베스에게는 조가 그런 존재였다. 수줍음이 많은 베스는 조에게만 제 생각을 털어놓았으며, 덤벙대는 조에게 가족 중 그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두 언니들은 사이가 정말 좋았지만 동생들을 한 명씩 맡아 보살필 때는 제 나름의 방식을 고수했다. 자기들끼리 '엄마 놀이'라고 부르면서 버림받은 인형을 보살피듯 타고난 모성본능을 발휘해 동생들을 돌보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p.107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 시리즈 그 열 번째 책은 <작은 아씨들>이다. 1868년 처음 발표된 이래, 수차례 영화로 리메이크되며 오래도록 사랑 받고 있는 작품으로, 내년 2월에 엠마 왓슨 등 화려한 캐스팅으로 새롭게 만들어져 개봉될 예정이기도 하다. 허영심이 있지만 책임감이 강한 첫째 메그, 열정적인 성격에 작가를 꿈꾸는 둘째 조, 얌전하고 속 깊은 셋째 베스, 사고뭉치 귀여운 막내 에이미, 이들 네 자매가 풀어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나 보자.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고전 명작' 시리즈답게 인디고의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도 새롭게 읽는 즐거움을 안겨 준다. 정말 어릴 때부터 읽었던 작품이라, 이번에 섬세하고 서정적인 일러스트들과 함께 '다시 읽는 시간'이 기대가 되었다.

 

자매들에겐 의지가 되는 큰언니이자 엄마에겐 믿음직한 큰딸인 메그,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경으로 자매들 중 가장 개성이 강한 작가 지망생 조, 몸은 허약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넓은 셋째딸 베스, 그리고 아름답고 귀여운 용모에 다소 엉뚱한 면도 가지고 있는 사랑스런 막내 에이미. 마치 가문의 사랑스런 네 자매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여전히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재미를 안겨 준다.

 

 

그것은 차라리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자매들은 햇살과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나무 그늘에 앉아 향기로운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뜨거운 뺨을 식히고 있었다. 숲 속 작은 동물들도 그들이 이방인이 아니라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겁 내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메그는 방석에 앉아 하얀 손으로 곱게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분홍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초록 물결 사이에 핀 장미처럼 싱그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베스는 근처 소나무 아래에 잔뜩 쌓인 솔방울을 주워서는 예쁜 물건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에이미는 양치식물 덤불을 그렸고, 조는 큰 소리로 책을 읽으며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p.320~322

 

낡은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갖고 싶은 예쁜 물건들을 아쉬워하는 메그, 오래 전부터 정말 갖고 싶었던 책을 살 수 없어 투덜거리는 책벌레 조, 새 악보를 사고 싶은 베스와 멋진 상자에 든 파버 표 색연필을 사고 싶은 에이미까지.. 이번 크리스마스엔 선물 없이 지내자고 한 엄마 때문에 이들 자매는 볼멘소리를 내는 중이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즐기는 데 돈을 쓰지 말자는 엄마의 말은 이해하지만, 이제 열 몇 살인 소녀들에게 크리스마스란 선물과 함께 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네 자매의 일상은 잔잔하게 흘러가기도 하고, 좌충우돌 사건들이 이어지기도 하며 다채롭게 펼쳐진다.

 

무엇보다 제법 두툼한 이 책의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일러스트들이 너무 예뻐서 설레이는 마음을 안겨주고, 그림만 따라가면서 읽어도 한 편의 스토리가 완성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리커버 시리즈는 클래식한 프레임에 좀 더 커진 판형으로 가독성을 높였다. 그래서 소장용으로도, 선물용으로도 너무 예쁘고 실용적인 책이기도 하다. 외모도, 성격도 너무 다른 네 자매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투명한 수채화의 담백한 일러스트와 만나 더 뭉클하게 보여지는 작품이라 다시 읽으면서 설레이는 마음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잊고 있었던 당신에게,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 속의 자신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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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 가이거 지음, 김주희 옮김 / 파피펍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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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은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거뒀다. 리무진 좌석의 온도 조절 버튼을 만지작대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한다. 사과는 했다. 이제 대화를 마쳐야 한다. 계정을 닫아야 한다. 증거를 없애야 한다. 혹시 누가 자칫 알아내기라도 하면 끔찍한 사태가 일어날 거다. 하지만 이건... 너무도 혹하게 하는 제안이었다. 완벽했다. 자기도 모르게 한 기도에 응답이 온 것만 같다. 이 여자애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처음 보는 계란 계정. 그런데도 대화를 하자고 한다. 사람 대 사람으로. 순수한 친절함 외에 다른 동기는 없이.   p.110~111

 

테사는 지난 6월 청소년을 위한 창의적 글쓰기 8주짜리 여름 캠프에 참가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고, 결국 프로그램을 반이나 남긴 채 자신의 안정한 방으로 도망쳐왔다. 그리고 여름이 거의 다 끝나가는 지금까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공황 장애 혹은 광장공포증으로 인해 24시간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셀프 감금 상태인 것이다. 그녀의 유일한 출구는 아이돌 스타 '에릭 쏜'을 추종하는 온라인 팬덤 활동이다. 그리고 이번 주에 갑작스럽게 그녀의 트위터 계정에서 난리가 난다. 에릭에 관해서 주말에 글을 하나 올리며 #에릭쏜중독, 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는데 유명한 에릭 쏜의 팬들이 리트윗을 시작하며 삽시간에 확 퍼져 현재 팔로워가 3만이나 된 것이다.

 

열여덟 살의 팝스타 ‘에릭 쏜’은 지난 6월 보이밴드 멤버였던 도리안 크롬웰이 여성 팬에게 살해당한 사건 이후로 심한 불안과 공포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에릭의 트위터에 있는 천사백만 팔로워들 대부분이 그에게 열광적인 여성 팬들이라, 도리안에게 벌어진 일이 자신에게 생기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한참 온라인 상을 달구고 있는 #에릭쏜중독, 이라는 해시태그 또한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음악을 하고 싶었을 뿐이고, 여성 팬들은 그의 음악보다는 그의 외모에 더 집착하고 있었다. 급기야 그는 팬들이 #에릭쏜중독에 반발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이름이 트렌딩 순위 1위에서 내려가게 만들기 위해 익명의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 스스로의 안티팬이 되기로 하는데.. 상황은 그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테사의 신경을 다른 곳을 돌리려는 테일러의 뻔한 수법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재미있다. 테일러는 테사가 오늘 밤에 왜 자기를 만나는 데 동의했는지 아직 완전히는 모른다. 에릭 쏜 때문인 줄만 알지. 자신의 아이돌 스타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집 밖으로 나갈만한 충분훈 동기가 될 거라고 보는 거다. 물론 테사는 에릭을 사랑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다. 판타지와 현실의 차이는 테사도 안다. 에릭 쏜은 그냥 판타지다. 하지만 테일러는.... 테일러는 현실이다.    p.280

 

우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누군가 스타가 되기도 하고, 팬덤문화가 뉴스에 보도되기도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이 작품은 한번쯤 자신만의 아이돌 스타에 빠져본 경험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온라인 상에서 '익명'으로 만나 인간적 신뢰를 쌓고, 우정을 만들어 가는 과정 또한 우리에게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고, 연예계의 이면, 극성팬의 심리, 그것을 바라보는 팝스타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을 담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스타들이 심한 우울증으로 활동을 중단한다거나, 공황장애를 겪거나, 극단적인 경우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비극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 온라인 상의 악플 등에 의해 젊은 연예인들의 피해 사례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비보가 들려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이 작품을 쓴 작가 A.V.가이거의 이력도 흥미롭다. 전염병학자이자 작가인 그녀는 연예인 팬픽으로 글쓰기를 시작했고, 작품 대부분이 온라인 팬 문화에 관한 본인의 경험을 담고 있다고 한다. 여가시간 대부분을 소셜미디어에 쏟아 붓고, 모든 업무가 끝난 밤에는 여전히 맹렬한 덕질로 바쁘다고 하니, 이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디테일한 심리묘사와 생생한 현실감이 상상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게다가 단순히 팬과 스타의 만남을 그려내는 오글거리는 판타지 로맨스가 아니라, 실제 범죄가 벌어진 다음에 이야기가 시작되어 경찰 조서, 트윗, DM 등의 형식을 고스란히 차용해 과거와 현재가 교차 진행되며 탄탄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는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상당히 모호하게 마무리되는 엔딩 또한 테사와 에릭의 다음 이야기를 고대하게 만든다. 물론 작가가 이 작품의 2권을 집필하겠다는 말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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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빗 - 내 안의 충동을 이겨내는 습관 설계의 법칙
웬디 우드 지음, 김윤재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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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기억은 쉽게 가동된다. 매일 똑같은 결정을 내릴 때 습관 기억이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준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정보를 일관된 전체로 묶는 과정을 '덩이 짓기'라고 부른다...습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저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정해진 반응이 튀어나온다. 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치켜들지 않고도 일이 처리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도 똑같은 방식으로 형성된다.    p.86~87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의욕에 불타는 시기가 바로 요즘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돌아보고, 연초에는 새해의 계획을 세우며 올해는 좀 달라진 자신을 상상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당신에게 매우 유용한 조언을 안겨 준다. 30여 년간 인간 행동의 근원을 연구한 웬디 우드는 금세 고갈되어 사라질 의지력 대신 주변 상황의 조건을 살짝 바꿔 저절로 목표를 달성하는 ‘습관 과학’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녀는 이 책에서 뇌 과학과 심리학을 접목해 습관의 형성 원리와 작동 방식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 노력과 투지로 환경을 이겨낼 수 있다고 몰아붙이는 세상 속에서, 거꾸로 상황에 집중해 애쓰지 않고도 자동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검증된 습관 설계 법칙이 있다면 어떨까. 30여 년간 인간 행동의 근원을 탐구해 온 저자가 수천 건의 실험과 수십만 명의 피험자로 밝혀낸 대답은 매우 흥미롭다.

 

가장 흔한 습관은 샤워, 이 닦기, 옷 입기, 취침, 기상 등이다. 이러한 일상적 행동의 88퍼센트는 의식적 자아의 개입 없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일과 관련된 행동 중에는 55퍼센트가, 격한 신체 활동에서는 44퍼센트가, 휴식과 관련한 행동에서는 48퍼센트가 습관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실험을 통해 저자가 밝혀낸 사실은, 우리 삶에서 습관에 지배되는 행동의 비율은 개인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삶에서 습관이 차지하는 비율은 평균적으로 43퍼센트를 넘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에서 습관이 관여하는 영역이 이토록 크다는 점에서 깜짝 놀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무려 43퍼센트나 되는 행동이 습관적으로, 의식적 자아의 개입 없이 수행된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 행동을 좀 더 체계적인 습관으로 재창조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마음만 먹으면 삶의 43퍼센트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57퍼센트 영역도 습관이라는 시스템으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습관이 설계되는 원리는 명백하다. 특별한 계획이나 심사숙고 없이 어떤 행동을 반복적으로 지속할 때 습관은 형성된다. 상황에 통제권을 넘겨주면 행동(반응)은 신호에 자동으로 반응하게 된다. 삶의 다양한 상황에서 마찰력을 적절히 배치하고 제거하면 좋은 습관은 촉진되고 나쁜 습관은 억제된다. 결국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건강한 음식을 먹고, 제시간에 일을 끝마치고, 가족에게 스스럼없이 마음을 표현한다. 이것이 방치된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습관 설계의 법칙이다.    p.233

 

당신이 만약, 매주 3회 이상 헬스장에 가는 행동을 시작하고, 저녁으로 치킨 대신 고구마와 샐러드를 먹는 행동을 시작했다고 치자. 중요한 것은 시작이 아니라 그것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더 이상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지 않을 때까지이다. 바로 그때 습관이 형성되며, 1년 뒤 우리는 달라진 자신의 몸을 보고 흡족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그러한 마법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시작된다. 단,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경 네트워크와 기억 시스템에 습관이 정착되기 전까지는 의도적으로 새로운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그 반복은 습관을 낳고 우리의 제2의 천성이 되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삶이 자동조종 모드로 운전을 시작할 때까지 대체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저자는 인내심이 부족한 독자들이 궁금해할 그 '횟수'나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 런던대학교 학생 96명에게 40달러씩 주고 3개월간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어떤 행동이 자동화됐다고 느낄 때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66일'이었다. 즉, 새로운 행동을 두 달 조금 넘게 반복하면 습관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생각이 너무 많다. 저자의 말처럼 지나치게 많은 생각은 불안을 낳고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고 삶은 금세 헝클어지게 마련이다. 과거에 얽매이거나 다가올 미래를 앞서 고민하지 말고 '지금' 그리고 '여기'에 집중하기 위해 가장 자연스럽고도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습관'이다. 습관적 마음은 철저하게 무심한 마음이다. 나 역시 너무 생각이 많은 인간이라, 이 책을 읽으면서 올해는 조금 더 단순해져야겠다고 마음 먹어 본다. 그리고 습관이 더 나은 삶으로 이끈다면,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좋은 습관을 형성하도록 노력해봐야겠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특정 행동이 저절로 일상에 뿌리내리도록 유도한 ‘습관 설계 법칙’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생각보다 거창하거나 어려운 것들이 아니어서 더욱 와 닿았던 것 같다. 자, 그럼 의지박약과 노력만능이라는 거짓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습관 과학'에 대해 만나 보자. 어쩌면 올해에는 나도, 당신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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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뉴욕
이디스 워튼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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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어머니가 얼버무리고 은근히 암시하다가 체념의 미소와 함께 전해주는 성서 구절, 결혼식의 화려함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순종하라”는 당부를 상기시키는 구절이 있었다. 한 주 또는 한 달간 이어지는 화끈거리는 고통과 혼란, 부끄러운 쾌락, 그리고 습관이 되어 어느덧 잠잠해진 당연한 행위, 커다란 흰 침대에서 깊이 잠든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고는 아기들이 태어났다. "모든 것을 보상"할 것 같았던 아기들은 그런 보상을 주지 않았다. 아기들은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사람들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보상받아야 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노처녀' 중에서, p.89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한 이디스 워튼의 단편집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번역본 네 편이 담겨 있는 책이다. 위선과 허위로 가득 찬 당시 뉴욕 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보여주었던 <순수의 시대>, 20세기 초 뉴욕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신데렐라를 꿈꾸었던 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그렸던 <기쁨의 집>, 그리고 최근에는 <기도하는 공작 부인>과 <밤의 승리>라는 고딕 소설 두 편을 통해 이디스 워튼의 작품을 만났다. 이디스 워튼과 호러 문학이라니 다소 낯설기도 했지만, 역시나 고딕 소설에서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사로잡힌 여성한테 결혼 생활이 얼마나 큰 공포가 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여성의 이야기'를 너무도 섬세하게 잘 그려내는 것은 여전했다.

 

이번에 만나게 된 소설집에는 <헛된 기대>, <노처녀>, <불꽃>, <새해 첫날>이라는 네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네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노처녀>와 <새해 첫날> 이었다. 우선 <노처녀>에서는 옛 뉴욕에서 성실하고 부유한 몇 개의 가문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속해 있는 랄스턴 가문도 그중 하나였다. 델리아 로벨은 스무 살에 제임스 랄스턴과 결혼했고, 스물여섯 살에 제대로 기반을 잡았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남편에게 후한 용돈을 받았으며 모두가 인정하듯이 가장 멋지고 가장 인기 있는 '젊은 부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델리아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촌 샬롯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처녀인 샬롯이 몰래 낳은 아기를 아동보호소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기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샬롯은 남자가 아기에 관해 알지도 못하며, 자신은 그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졌을 때 델리아는 더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샬롯의 딸이 성인이 되고 결혼식을 하루 앞둔 어느 날까지 이어진다.

 

 

그녀는 몇 년의 과부 생활 끝에 남편이 그토록 힘겹게 제공하고 싶어 한 모든 호사를 누릴 만큼 많은 재산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유혹의 위험이 다 지나간 뒤에 유혹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기이한 역설이었다. 장담하건대 그녀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호사를 누리기 위해 남자에게 손을 내민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돈 자체를 소중히 여기지는 않았더라도 돈의 위력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고독을 달랠 수도 그 고독을 사소한 오락거리로 채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위력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했을 것이다.    -'새해 첫날' 중에서, p.324

 

<새해 첫날>은 호기심으로 남들의 신파적인 관계에 대해 시시콜콜 떠드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녀는 항상 행실이 나빴지. 그들은 5번가 호텔에서 만나곤 했어.” 누군지는 알지만 그들에 대해서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나쁜 행실이나 과거를 폭로하는 것은 사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당시 열세 살이었던 그 날의 일을 기억의 한 지점에서 찾아낸다. 새해 첫날, 마침 방학 기간이라 집에 와 있던 나는 가족들과 함께 오찬 식탁에 앉아 평화롭게 식사 중이었다. 그때 하인이 달려 들어와 5번가 호텔에 불이 났다고 말했고, 그들은 길 건너편에서 신년 파티에 참석했던 이들이 혼비백산해서 뛰쳐나오는 모습을 구경한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황급히 뛰쳐나오던 여자의 이름은 리지 하젤딘, 그리고 뒤따라 나온 남자는 뉴욕의 미혼 여성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던 헨리 프레스트였다. 리지가 유부녀였기에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만남을 불륜으로 치부하고, 뉴욕의 보수적인 사교계는 오랜 시간 그녀를 배척한다. 나는 여러 해가 지난 뒤 우연한 기회에 그 장면 이전에 일어난 일과 이후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디스 워튼은 뉴욕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작품 속에서 당시 상류사회를 상당히 현실감 있게 묘사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상류사회의 부조리함과 위선 등을 비판적 측면에서도 곧잘 묘사하고 있어 읽다 보면 통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던 대목들이 많다. “모든 처녀들이 언니 말처럼 다 참한 건 아니야.”(p.144) 라든지, 사람들은 마흔다섯 살에 용감한 일을 하는 게 스물다섯 살에 하는 것보다 끔찍하게 더 힘들다는 걸 죽어서야 깨닫는다죠.”(p.158), “오래된 과거는 죽은 것으로 여기는 거 말일세. 과거는 죽었어. 지금 우리에게 그런 건 아무 쓸모가 없네."(p.220), “어쩔 수 없지만, 사실이에요. 여자는 아주 쉽게 그럴 수 있어요. 남자들은 종종 그런 사실을 잊더군요. 당신은 나를 사랑에 우는 정부로 여겼고 나는 값비싼 매춘부였을 뿐이에요.”(p.304) 등의 대사에서도 보여지듯이 욕망과 도덕, 이성과 감정, 전통과 변화 사이를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디스 워튼의 전작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이번 작품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전들은 딱딱하고 고루하다는 편견과 달리 매우 현대적으로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그려내고 있어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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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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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강력한 이야기꾼이다. 무의식은 렘수면 동안 뇌줄기가 무작위로 내보내는 신호를 연결하고 얼기설기 엮어 기이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시각장애인의 무의식은 다른 감각까지 동원해 공간 지각을 재구성하고, 심지어는 인간방식의 반향정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중에 시력을 잃은 사람들, 특히 일곱 살 이후에 시각 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사물이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기억하며 장면을 상상하고 꿈을 꿀 수도 있다. 일곱 살 이후에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꿈에서 '진짜로' 앞을 본다.   p.74~75


시각장애인이 꿈속에서 앞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사물의 생김새를 기억한다. 안타깝게 실명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나 물건의 모습을 그대로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양쪽 눈의 시각 신경이 없어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면 색깔을 본 적도 없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꿈 속에서 사방이 온통 모래인 해변에서 멋진 금발의 잘생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꿈속의 정신은 어떤 특별한 것이 있기에 시각장애인에게도 시력을 제공하는 걸까?

 

 

노화로 생기는 실명의 흔한 원인인 환반변성으로 시력을 잃은 여든일곱 살 노인은 요즘 집 안에서 사람들을 본다. 지난 주에는 곰 한 마리가 부엌을 어슬렁거렸고, 거실에서 풀을 뜯는 소들도 종종 보았다. 하지만 그는 치매가 아니었고, 찰스보닛증후군의 환각 증상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보는 모습이 실제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증상은 왜 생기는 걸까?

 

이 책은 젊은 신경과학자 엘리에저 스턴버그의 세 번째 책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뇌과학과 의학 지식 위주로 다루고 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술과 뇌과학의 방대한 연구 분야를 한 권에 담으려는 대담한 시도가 실현된 결과물인 이 책은 '뇌의 모든 영역을 한 권에 담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우리는 감정을 발산한 순간을 기억한다. 9/11 테러 공격 뉴스를 들었을 때 카푸치노를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장본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세계를 격동시킨 뉴스를 들었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의 인생사에 한 축을 차지했다. 그날 그의 하루에서 스타벅스에 있었던 것은 중요한 요소였던 반면, 세계무역센터가 정확히 몇 시에 공격당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p.184

 

30대 초반에 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민간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오래 사귄 여자 친구도 있었던 남자의 일생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상황이 바뀐다. 그는 친구와 가족을 멀리했고, 직장에서 해고당했으며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그는 공과금을 내지 못했고, 차와 아파트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과거사에 대한 기본 정보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전부 기억하는 것처럼 굴었다. 오늘 날짜를 몰랐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 이름은 뭔지도 몰랐지만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 끝도 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대체 그의 기억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이 책은 결핍된 뇌를 통해 고작 1.4킬로그램의 무게로 하루 섭취 열량의 20퍼센트를 독식하는 뇌가 어떻게 한 사람의 세계를 구축하고 지켜내는지를 알아가면서, 신경계 환자들의 특별하고 기묘한 경험담을 통해 우리 뇌의 논리와 패턴에 대해 명쾌하게 이야기해준다. 뇌의 전체 영역과 기능을 함께 살펴보고 최신 뇌 연구 결과까지 두루 다루고 있어, 뇌과학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신비한 현상은 물론, 아주 일상적으로 내리는 결정의 밑바탕에도 뚜렷한 신경학적 회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정을 내리는 작동방식은 무엇인가? 정신질환은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와 뇌 사이에 벌어지는 상호작용은 무엇이며, 뇌는 어떻게 해서 우리라는 사람을 만들어내는가? 이 책에는 이렇듯 질문이 많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을 따라가다보면 지각, 습관, 학습, 기억, 언어, 그리고 자아와 정체성의 존재가 지니는 신비에 이르게 된다. 외계인 납치, 거짓 미소 간파, 조현병 환자의 실화에서 몽유병 살인자, 스포츠팬의 뇌, 간지럼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온갖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게 뇌과학과 신경과학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는 뇌의 법칙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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