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 창밖을 내다보니

바깥은 한낮의 시간처럼 여전히 파랗고 밝고 맑았다.

마치 자신은 전혀 어두워질 생각조차 없다는 듯이.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은 푸른 어둠이 잦아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온통 강렬한 빛이 가득할 따름이다.

계절은 여름을 향해 달려간다.

그에 따라 낮의 길이도 점점 길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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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그림에 대해 잘 모르니까,
같은 맥락으로 명화에 대해 잘 알고 싶다는 이유로 그에 관련된 책을 열심히 읽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원래 뭐든 그렇다. 지식적으로 다가가면 그만큼 지루하고 어렵고 하기 싫어진다.
알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뭔가 부담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든다고나 할까.
그러다 문득 명화를 패러디한 그림책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나 재미있어서 빠져들게 되었다.
거기서는 명화가 주인공이 아니라 모험 가득한 배경이 되어있었고,
주인공을 도와주는 하나의 요소였으며,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라 즐겁고 신나는 일이 가득한 하나의 멋진 세상이었다.
게다가 때로는 익살스럽게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숨은 그림 찾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책 속의 주인공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만지지 마시오, 기대지 마시오, 사진 찍지 마시오 삼종 세트에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떠밀려 제대로 작품을 보기 힘들 때도 많다.
그러나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명화 속에서 마음껏 뛰놀고 뒹굴고
나무에 매달려도 보고, 해변에서 모래성 쌓기도 가능하며,

강가에서 햇볕을 쬐며 낮잠을 즐기기도 한다.
그림 속을 마음껏 누빈다는 점도 멋지지만 그 안에서 뭐든 가능하다는 점도 참 매력적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림책으로 명화를 즐긴다.
여전히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어디선가 봤고 아는 그림이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시대적으로 유행했던 화풍, 그림을 그리는 작가만의 특성,
그림 속에서 인물, 옷차림, 사물이 상징하는 의미나 그 구도를 몰라도 뭐 어떠랴.
그냥 재미있게 즐기면 되는 것을!!
만약 명화가 지루하고 어렵고 재미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책들을 추천해본다.

 

 

 

1. 캣츠 갤러리 - 수잔 허버트


이 책은 고양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미술작품, 연극, 오페라, 그리고 영화 속의 유명한 장면들을 재현하고 있다.
크게 <미술작품의 주인공이 된 고양이들>, <무대 위 배우가 된 고양이들>, <영화에 캐스팅된 고양이들> 로 분류되고 있는데

귀여운 고양이들 모습이 한가득이라 보는 내내 만족스러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결혼>

 

피터르 브뤼헐 <농가의 혼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2. 명화 대소동 - 데청 킹

 

이 책은 글 없는 그림책이지만 그 어떤 책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은 대강 이러하다.
도둑이 그림을 훔쳐 가자 동물 친구들이 모두 나서서 그림 도둑을 쫓아간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도둑을 쫓느라 숲과 바다 등등 그들이 지나치는 장소들이 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명화라는 점!
마치 이리저리 명화에서 또 다른 명화로 거침없이 넘나들며
속도감 있게 보여주는 신나는 모험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각각의 장면 속에서 동물들이 보여주는 모습도 나름 에피소드를
담고 있으며 다음 장면에서 그 내용이 이어지므로 이 책은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아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책 처음과 끝에는 어떤 명화들이 등장했는지 안내와 설명이 나와 있는데
아는 작품은 눈에 쉽게 보여서 반갑고, 몰랐던 작품은 새롭게 알게 되는 재미가 쏠쏠하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다시 그 부분을 찾으며 다시 한 번 책을 펼쳐봐도 좋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3.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생쥐를 찾아라! - 스테판 밀르루 글 | 키트리 라보르드 그림


 

 

 

 

어느 깊은 밤, 생쥐가 외쳤어요.
"여기서는 도저히 못 자겠어!" 

 

뭉크의 <절규>가 떠오르는 첫 페이지.
그 이유는 다음 페이지에 나온다.


「생쥐는 정말이지 지칠 대로 지쳤어요.
아랫집에서 아이들이 와글와글 떠들고, 쿵쿵 뛰고,
우당탕 싸우는 소리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거든요.」라고.

 


아,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층간 소음의 고통이여!
이게 꼭 윗집이라고 시끄러운 게 아니라 공동주택이라면
아래층, 대각선의 집에서 떠들어도 그 주변 집은 소음을 겪을 수밖에 없다.
생쥐의 절규가 이해되고도 남음이다.
그리하여 생쥐의 새 보금자리 찾기가 시작되는데...

 


이 책의 삽화는 그림작가가 유명한 화가들

(고흐, 해링, 몬드리안, 마티스, 칸딘스키, 모리소, 클레,

미로, 클림트, 피카소, 쇠라, 아르침볼도, 워홀)의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어 패러디했다고 한다.
따라서 페이지마다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을 구경할 수 있는데
생쥐 역시 그에 따라 개성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책 마지막에는 <생쥐와 함께 떠나는 명화 여행> 코너가 있어,
각 그림마다 누구의 작품이고 어떻게 그려졌는지 설명이 이어진다.

 

구스타브 클림트 <생명의 나무>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4. 모나리자를 찾아라 - 마이컨 콜런 글 | 니키 티오니슨 그림


다섯 명의 도둑이 모나리자 그림을 훔쳐 도망가고 있고,
쥐 경찰관과 늑대 경찰관이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다.
각 페이지는 유럽의 여러 도시의 모습을 담아냈는데 상징적인 건축물이나 문화재도 함께 그려져 있어 볼거리가 무척 풍부하다.

무엇보다 도둑들이 들고 간 모나리자 그림이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므로 어디에 있나 숨은그림찾기 놀이도 가능하다.

 

 


모나리자 외에도 다른 명화들도 등장하는데 이 책에서 명화들은
작은 사진으로 등장한다. 그림과 사진의 조합. 그 점도 신선하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명화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는 동물들도 있으니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재미라 할 수 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

 

앙리 마티스 <춤>


 

 

5. 미술관에 간 윌리 - 앤서니 브라운

 

침팬지 윌리는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그림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각각의 명화는 주인공 입장에서 재미있게 패러디 되었는데
독자는 마치 그림일기를 보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림에는 윌리 외에도 밀리, 악당 벌렁코가 등장해 함께 장면을 꾸밀 때도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어떤 명화들이 등장했는지 설명이 나와 있다.

 

 

조르주 피에르 쇠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

 

얀 베르메르 <화실의 화가> +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정오>
얀 반 에이크 <아르놀피니의 약혼> + 뭉크 <절규>

 

 

 

6. 잃어버린 천사를 찾아서 - 막스 뒤코스

 

소년 '엘루아'는 반 친구들과 미술관에 가게 되고,
프랑수아 부셰의 <비너스의 잠>의 여인에게서 아기 천사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미술관 곳곳을 누비며 아기 천사를 찾는 엘루아.
미술관이 배경이라 그런지 다양한 명화 작품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책이 흥미로운 점은 아기 천사를 찾기 위해 엘루아가 때로는 그림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조각상이 엘루아를 도와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조각상마저도 알고 보면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걷고 있는 남자>라는 작품이다.


페이지 맨 뒷면에는 그림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참고할 수 있도록
그림과 함께 간단한 설명이 되어 있다.

 

피에트 몬드리안 <구성 A>

 

알베르토 자코메티 <걷고 있는 남자> + 잭슨 폴록 <연자주빛 안개>

 

 

7. 김홍도와 브뤼헐 - 이명옥

 

동서양 작가가 함께 나와 있는 책들도 그림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다.
조선의 대표 풍속화가 김홍도.
그리고 아이들의 모습이나 농민들의 잔치 풍경 등 시골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즐겨 그렸던 피터르 브뤼헐.
두 사람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렸다는 점, 또한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표현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중 씨름>

 

피터르 브뤼헐 <농가의 혼례>


 

 

8. 그림의 힘 - 김선현


요즘에는 그림과 심리가 결합해 그에 관한 책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이 책은 미술치료를 해온 저자가 임상현장에서 효과가 좋았던 명화들을 엄선해 그림의 힘에 대해 알려주는 책으로,

작가와 작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림의 색과 구도에 따라

그 자체를 즐기게 해준다는 점이 좋았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편안하게 하고 그림의 어떤 부분이 스트레스를 줄여주는지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데, 그림이 주는 그대로의 느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1권은 크게 <일, 사람 관계, 돈, 시간, 나 자신>이라는 주제로 나누어 명화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그네>라는 작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소개된다.

 

「행복하면 ‘핑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어떤가요. 보기만 해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풍족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지요?
레이스며 리본이 달린 드레스, 사랑하는 왕자님과 개인 정원까지,
돈이 있으면 갖출만한 것들을 전부 갖췄으면서, 또 거기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느낌도 줍니다. 그네라는 것을 통해서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나무와 풀숲의 어두운 배경과 대비된 핑크색이 더없이 돋보입니다.
(그림의 힘1권-164p)」

 

핑크는 선천적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색이라고 한다.

 

 

 

<- 한편, 그림의 힘 2권에서는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들을 엄선해 집중력을 높인다던가 마인드컨트롤 혹은 슬럼프에 빠졌거나 우울할 때 보면 좋은 명화들을 담아 몸과 마음을 최고의 컨디션으로 만들 수 있게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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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밤공기에서 은은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아카시아 향이었다.
어둠을 잘 포개 봉투에 넣은 뒤, 생각나는 이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도 기분 좋은 밤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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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의 발견
이원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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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의 발견』은 시인 이원의 자신의 인생 그리고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의 이야기, 나아가 다른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아우르며 삶의 순간순간들을 담아낸 산문 책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순간주의자’라고 말한다. 너무 먼 시간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집중해서 잘 살자는 의미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마치 미래가 없을 것처럼 오늘을 마음대로 소비하자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세상, 태생적인 겁 많음과 어렸을 적 겪은 가족의 죽음. 그녀는 어쩌다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까지 몸을 확장시키면 금방 불안해진다고 털어놓는다. 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한 건 아닐까. ‘최소의 발견’을 자신의 중심으로 삼아 일상의 어떤 순간이나 거기에 존재하는 감각, 꼭 필요한 하나에 집중하기로 한 것 말이다. 그러나 ‘최소’라고 해도 절대 얕봐서는 안 된다. 작가에게는 바로 이 ‘최소’는 곧 최대를 지탱시키는 마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지만 역시 그녀의 인생에 있어 ‘시’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서울 예대 2학년, 용기를 내어 가족사에 대한 시를 썼는데 그 과정을 통해 그 누구에게서도 받지 못했던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작가에게 시는 낯선 세상 속 불안을 가라앉혀주고 어딘가와 닿게 해주는 연결고리다. 그리고 그녀는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살아 있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작가에게 있어 시가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생동감을 주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삶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한없이 달래고 쓰다듬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그렇듯이 비명 지르고 싶은 시간들이 내게도 있지만 바로 그 순간 비명을 몸 안으로 넣고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비명이 삶을 일으켜 세워 준다는 것도, 비명이 내 날개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 나는 이제 삶이 그리 비장하지 않은 것임을 안다. 시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p.35)

 


서로 한없이 달래고 쓰다듬어 주라는 말이 인상 깊다. 그러다 보면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 슬픔은 어느새 자신 편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 역시 남에게만 친절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본인을 좀 더 챙길 일이다. 앞으로는 자신에게 상냥하고 너그럽게 대하기를. 그리고 자신의 아픔이나 약한 부분도 달래고 쓰다듬으며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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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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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이나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을 만나면 거의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아, 저 사람은 왠지 나와 닮았구나, 하고.
  어쩌면 남자주인공 ‘정안’도 그러한 이유로 그녀에게서 더욱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관람객 중 유독 시선이 가며 어딘가 위태롭고 이상해 보였던 그녀. 그리고 왠지 모르게 죽음의 냄새가 났던 그녀.
 

 

  그녀(오상아)는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 관련된 일을 하는 공무원이다. 새벽 야간근무에는 전화 상담을 하고, 자살이나 재해가 생기면 직접 현장에 나가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유가족을 만난다. 그리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일도 그녀의 업무 중 하나다. 그런데 그녀는 생존자들의 몸속에서 죽음에 대한 욕망과 목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만 같아 무척 힘겨워한다. 죽음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했고 자꾸만 옭아매는 기분이다. 본인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 그 말들을 뿌리치고 도망치며 자신을 붙잡고는 있지만 어쩐지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듯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궁박물관 미라 특별 전시실에서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정안은 고궁박물관에서 문화재를 보존하고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와 같은 유전병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최근에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고 몸 상태도 점점 안 좋아지면서 이제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그런데 전시실에서 절박한 표정의 그녀를 발견하게 되었고,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어떤 비슷한 파장을 그녀에게서 감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닮았다. 정안에게 어두운 전시실은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 자신의 시력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자꾸만 죽음을 향해 여기저기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감추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p.88)는 곳이었다.
  한편 그녀에게 전시실은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곳, 고된 삶과 죽고 싶은 욕구에 대해 듣지 않아도 되는 곳,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의 어둠은 빛이 사라진 뒤의 어둠과는 다르게 편안함과 부드러운 촉감, 배려를 가져다주는 어둠이었다.

 


  오래된 유물 역시 그와 그녀에게는 위안이 되는 요소다. 정안은 작업에 매달릴 때만큼은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었고, 자신이 죽어도 자신이 작업한 유물들이 이 세상에 남는다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그녀는 미라를 보며 ‘더 이상 자신에게 매달리며 죽고 싶다고 속삭이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지금 그녀가 위로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건 이미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자신이 왜 죽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미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p.72)을 하게 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들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바로 서로의 존재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지금 말을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 있기 힘들 것 같’(p.130)은 심정인 순간 그를 떠올려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그 즉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부터 그녀를 벗어나게 해준다.

 

그는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어둡고 음습한 기운으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 쏟고 있는 중이었다. (p.142)


그는 벌써 여러 번 스스로 견고하게 쌓아왔던 원칙과 약속 들을 어기고 있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고, 누군가가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p.143)


 


  정안과 그녀 사이에 자주 연락이 오간다거나 만남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의 축적 없이도 이처럼 마음이 상대에게 향하고 행동할 수 있음이다. 정안은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데 듣는 내내 그 어떤 참견도, 섣부른 단정도 하지 않는다. 다 들은 후에 그녀를 안아줄 뿐이다. 그녀 또한 정안을 마주 안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따뜻한 온기와 교감의 순간들. 그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정안에게도 깊은 위안과 충족감을 안겨주는 시간으로 서로에게 각인된다.

 


  자신을 다독여 주는 힘이 되고, 동시에 삶을 대하는 시각마저 변화시켜 어떤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하는 ‘위안’. 그런데 이 위안이라는 것이 그렇더라. 멋지고 좋은 말로 긍정적 사고를 강요하는 사람보다는, 적어도 비슷한 상처로 아파본 사람이 자신의 상처와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때 더 위안이 된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을 가슴 한편 깊숙이 놓아둔 채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 그런 우리 모두에게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위안이 함께 하기를 바라며,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충분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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