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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평점 :

우리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이나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람을 만나면 거의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아, 저 사람은 왠지 나와 닮았구나, 하고.
어쩌면 남자주인공 ‘정안’도 그러한 이유로 그녀에게서 더욱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관람객 중 유독 시선이 가며 어딘가 위태롭고 이상해 보였던 그녀. 그리고 왠지 모르게 죽음의 냄새가 났던 그녀.
그녀(오상아)는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 관련된 일을 하는 공무원이다. 새벽 야간근무에는 전화 상담을 하고, 자살이나 재해가 생기면 직접 현장에 나가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유가족을 만난다. 그리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방법을 찾는 일도 그녀의 업무 중 하나다. 그런데 그녀는 생존자들의 몸속에서 죽음에 대한 욕망과 목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만 같아 무척 힘겨워한다. 죽음은 자신을 끌어당기는 듯했고 자꾸만 옭아매는 기분이다. 본인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해 그 말들을 뿌리치고 도망치며 자신을 붙잡고는 있지만 어쩐지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듯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궁박물관 미라 특별 전시실에서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정안은 고궁박물관에서 문화재를 보존하고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와 같은 유전병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최근에는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고 몸 상태도 점점 안 좋아지면서 이제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그런데 전시실에서 절박한 표정의 그녀를 발견하게 되었고,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어떤 비슷한 파장을 그녀에게서 감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닮았다. 정안에게 어두운 전시실은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곳, 자신의 시력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자꾸만 죽음을 향해 여기저기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감추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p.88)는 곳이었다.
한편 그녀에게 전시실은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곳, 고된 삶과 죽고 싶은 욕구에 대해 듣지 않아도 되는 곳, 그냥 가만히 있어도 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의 어둠은 빛이 사라진 뒤의 어둠과는 다르게 편안함과 부드러운 촉감, 배려를 가져다주는 어둠이었다.
오래된 유물 역시 그와 그녀에게는 위안이 되는 요소다. 정안은 작업에 매달릴 때만큼은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었고, 자신이 죽어도 자신이 작업한 유물들이 이 세상에 남는다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그녀는 미라를 보며 ‘더 이상 자신에게 매달리며 죽고 싶다고 속삭이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지금 그녀가 위로받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그건 이미 죽은 지 수백 년이 지난, 자신이 왜 죽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미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p.72)을 하게 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들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은 바로 서로의 존재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지금 말을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 있기 힘들 것 같’(p.130)은 심정인 순간 그를 떠올려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그 즉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그곳으로부터 그녀를 벗어나게 해준다.
그는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어둡고 음습한 기운으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나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 쏟고 있는 중이었다. (p.142)
그는 벌써 여러 번 스스로 견고하게 쌓아왔던 원칙과 약속 들을 어기고 있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고, 누군가가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p.143)
정안과 그녀 사이에 자주 연락이 오간다거나 만남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의 축적 없이도 이처럼 마음이 상대에게 향하고 행동할 수 있음이다. 정안은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데 듣는 내내 그 어떤 참견도, 섣부른 단정도 하지 않는다. 다 들은 후에 그녀를 안아줄 뿐이다. 그녀 또한 정안을 마주 안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따뜻한 온기와 교감의 순간들. 그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정안에게도 깊은 위안과 충족감을 안겨주는 시간으로 서로에게 각인된다.
자신을 다독여 주는 힘이 되고, 동시에 삶을 대하는 시각마저 변화시켜 어떤 전환점이 되어주기도 하는 ‘위안’. 그런데 이 위안이라는 것이 그렇더라. 멋지고 좋은 말로 긍정적 사고를 강요하는 사람보다는, 적어도 비슷한 상처로 아파본 사람이 자신의 상처와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때 더 위안이 된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을 가슴 한편 깊숙이 놓아둔 채 하루 그리고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 그런 우리 모두에게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위안이 함께 하기를 바라며, 자신 역시 누군가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충분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