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다츠루는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의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말의 주고받음을 음악에 비유해 설명한다.

재즈의 즉흥 연주에 가깝다는 것이다. 분석가와 피분석가의 대화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하는 바 그것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악곡(樂曲)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처럼 현실의 재현도 상기(想起)도 진실의 개시도 아닌 하나의 창조행위라고 그는 덧붙인다.

다츠루가 말하는 내용은 정신분석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면 심리상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내담자는 치료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보이기도 한다.

만남을 끝내고자 하나 그럴 경우 자신을 보살피던 사람들과 헤어질 것을 두려워 하는 한편 낫는다 해도 극적으로 변하는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최옥정 님의 ‘글쓰기 수업‘이란 책에서 만난 니체의 말을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가장 위대한 일은 방향을 결정하는 일‘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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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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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다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구조주의 해설서이다.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프랑스 현대 사상 등을 공부한 다츠루는 입문서와 전문서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으며(6 페이지) 입문서는 전문서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만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고 말한다.(8 페이지)

 

자신을 초보자에 불과하다(10 페이지)고 소개하는 다츠루는 구조주의라는 사상이 아무리 난해해도 그것을 세운 사상가들이 인간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까?‘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11, 12 페이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약한 사상가들이다. 푸코는 역사가, 바르트는 언어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자, 라캉은 정신분석학자이다. 저자가 말했듯 시스템, 차이, 기호, 효과 등은 구조주의의 주요 용어들이다. 저자는 지금은 구조주의가 종말을 맞고 있다고 말한다.(23 페이지)

 

구조주의적 사유란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지역,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사유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27 페이지) 저자는 마르크스를 구조주의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 본다.(30 페이지)

 

마르크스는 인간은 행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그 창조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며 생산관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을 매개로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알아차린다는 기본적 인간관을 가졌다.(31 페이지)

 

주체성의 기원은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는 것이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공유하는 기본적 전제이다.(35 페이지) 프로이트도 구조주의의 원류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은 자기 정신생활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가정이다.(37 페이지)

 

마르크스는 인간은 계급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했고 프로이트는 인간은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37 페이지) 프로이트는 인간은 억압된 존재라는 견해를 가졌다.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는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거나 이를 기초로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고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공통의 견해를 가졌다.(43 페이지) 니체 역시 인간의 사고가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44 페이지)

 

니체는 동시대인들이 억측에 의한 판단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고 단정했다. 니체가 말한 동시대인들에는 우리도 포함된다.(49 페이지) 니체의 사상은 푸코에 의해 계승된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사상사적으로 구조주의를 시작한 사람이다.(66 페이지) 소쉬르의 언어학이 구조주의에 안겨준 가장 중요한 견해는 언어란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66 페이지) 저자는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음으로써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72 페이지)

 

소쉬르가 가르쳐준 것이란 어떤 것의 성질이나 의미, 기능은 그 사물이 그것을 포함한 관계망이나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차후에 결정되는 것으로 사물 자체에 생득적이거나 본질적인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77 페이지)

 

저자는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습득한 언어 규칙, 내가 몸에 익힌 어휘,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읽은 책의 일부가 말하는 것이라 말한다.(79 페이지) 이는 내가 타인의 말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80 페이지) 소쉬르가 타격을 가한 것은 자아중심주의이다.(81 페이지)

 

구조주의란 언어, 문학, 신화, 친족, 무의식 등 다양한 인간적 제도에서의 역사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더럽혀지기 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가공 전 상태인 영도(零度)를 탐구하는 것이다.(87 페이지) 푸코는 인간주의적 진보사관에 이의를 제기했다.(8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나란 존재는 역사의 무수한 분기점이나 어느 방향이 어쩌다가 선택되어 출현한 것에 불과하다.(91 페이지) 저자는 푸코가 니체의 계보학적 사고를 계승해 고찰 주체인 자신을 스스로 괄호 안에 넣고 역사적 사상 그 자체와 정면에서 마주한다는 지적 금욕을 스스로 부과했다고 말한다.(93 페이지)

 

푸코는 정신질환에서 건강/ 이상(異相)의 경계라는 개념을 전복시켰다.(94 페이지) 푸코는 광인이 단단하게 격리되다가 부드럽게 격리되는 과정에서 의료와 정치의 결탁 즉 지()와 권력의 결탁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근대 국가는 예외 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며 조작 가능한 관리하기 쉬운 형태로 두는 것 즉 순종적인 신체를 조형하는 것을 정치적 과제 가운데 최우선으로 내걸었다.(112 페이지) 신체를 표적으로 하는 정치기술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단지 신체의 지배만이 아니라 신체의 지배를 통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었다.(113 페이지)

 

저자는 푸코가 권력 비판 이론을 세웠다고 보는 것은 푸코가 진정으로 원한 일이 아니라 말한다. 그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121 페이지)

 

제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제도적인 지()로 의심받는 그 제도에 속한다는 불쾌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을 활기차게 노래하는 우둔한 학자나 지식인에 대한 모멸감, 이런 불쾌한 일들에 조종당하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기 언급이 푸코가 보여준 비평의 핵심이다.(121, 12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상징과 기호는 다르다.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크든 작든 어떤 현실적인 연상으로 결합되어 있다. 기호는 어느 사회 집단이 인위적으로 약속한 표시와 의미의 결합이다.

 

둘 사이에는 자연적, 내재적 관계가 없다. 장기에서 졸이 하나 없을 때 귤껍질로 대신했다고 하자. 이때 귤껍질이란 인위적 표시는 시니피앙, 그것이 의미하는 졸의 작용은 시니피에라 한다.(126, 127 페이지)

 

우리는 어느 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규칙과 습관의 집합체인 랑그, 쓰는 사람의 영광, 뇌옥(牢獄), 고독인 개인적이고 생래적인 언어 감각인 스틸을 선택할 수 없다.(132 페이지)

 

물론 그 안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다. 이 언어 사용이 에크리튀르이다. 스틸은 개인적인 선호이지만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이다.(132 페이지)

 

바르트는 에크리튀르가 자유로운 것은 선택할 때뿐이며 그것이 지속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고 설명했다.(134 페이지) 바르트는 카뮈의 이방인의 문체를 이상적인 문체라고 극찬했다.(147 페이지) 이 소설은 저자가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모두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자제한 작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카뮈의 에크리튀르를 아름다운 모범으로 받들기 시작하면 그 또한 제도적인 어법이 되어 순수한 에크리튀르가 될 수 없다.(147, 148 페이지)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특정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의미이다.(155 페이지)

 

이런 기초적 이해에 대해 구조주의자도 별 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양자가 대립하는 것은 논쟁이 주체나 역사와 관계될 때이다. 앙가주망이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선배 세대들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이 지금의 나에게도 결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주체는 주어진 상황의 결단을 통해 자기형성을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는 차이가 별로 없다. 하지만 상황 속에서 주체는 늘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정치적 올바름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는 단계에 이르러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는 다른 길을 걸었다.(159 페이지)

 

사르트르는 역사를 궁극적 재판소라 보았고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가 나는 생각한다는 생각에 갇혔다고 말했다.(162 페이지)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은 세 가지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한다고 보았다.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경제활동), 메시지의 교환(언어활동), 여자의 교환(친족제도) 등이다.(178 페이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은 푸코와 통하는 탈인간주의의 징후를 보여준다.(181 페이지)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의 그런 점이 인간의 존엄이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여러 구조주의 사상가들 중 가장 난해한 사람이 라캉이다. 이는 라캉이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이에 대해서는 홍준기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을 참고할 것) 저자는 거울 단계 이론과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한다. 거울 단계란 일종의 자기동일화로서 주체가 어떤 상을 받아들일 때 주체의 내부에 일어나는 변용이다.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가정하는 것에 의해 나를 형성한다는 외상(外上)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189 페이지) 나의 기원은 내가 될 수 없는 것에 의해 담보되어 있고 나의 원점은 나의 내부에 없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무의식의 방에 갇혀 냉동보존된 기억을 해동하면 과거 그대로의 기억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말한다. 기억은 그처럼 확실한 실체가 아니라 늘 생각해내면서 형성되는 과거이다.(195 페이지)

 

저자는 정신분석적 대화는 피분석자의 본적(本籍)을 그의 내부에서 분석가와 피분석자가 함께 만들면서 구축한 이야기의 내부로 옮기는 호적 이전 작업과 비슷한 것이라 말한다.(197 페이지) 저자는 어떤 병적 증상을 경미한 다른 증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실리적으로 볼 때 치료의 성공이라 말한다.(198 페이지)

 

저자는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의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말의 주고받음은 음악적인 비유로 말하면 재즈의 즉흥 연주와 가까운 것이라 말한다. 분석가와 피분석가의 대화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하는 바 그것이 목적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처럼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니고 하나의 창조행위이다.(200 페이지)

 

라캉은 자아를 말로 할 수 없지만 말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자기장(磁氣場) 같은 것으로 분석가와 피분석가의 대화의 목적은 자아가 있는 것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다.(202, 203 페이지)

 

정신분석의 목적은 증상의 참된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는 것이다. 치료란 커뮤니케이션 부조(不調)에 빠진 피분석자를 다시 그 회로로 돌아오게 하는 것,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재화와 서비스를 나누는 증여와 답례의 왕복운동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215 페이지)

 

결론 삼아 말하자면 내게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사상은 정신분석이다. 참으로 묘하고 독특한 사상이고 때로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 난감하지만 매혹적이다. 다른 구조주의 책들을 더 읽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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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로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오직 머리가 좋아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기억력이 즣아질 수 있고(컨텐츠가 늘어나니 기억력이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 읽은 내용을 서평으로 연결짓는 과정을 겪으면 기억하는 게 많아지니 사람들에게는 기억력이 좋은 것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서평을 쓰면 단편적인 내용들이 아닌 덩어리 형태의 의미 있는 지식들을 기억할 수 있다.

저자의 문장들을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 문제의식에 맞춰 글을 쓰게 되면 문장력도 좋아지고 기억력도 좋아진다.

김종갑 교수의 ‘생각, 의식의 소음‘을 완독 4개월만인 어제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펼쳤는데 기억나는 것도 있었지만 생소하기까지 한 것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점에서 서평을 쓰는 것이 중요한데 서평이 아닌 잡글의 형태로라도 책 내용을 반영하는 글을 쓰는 것도 의미 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이 글감이 될지 신경쓴다면 기억력을 좋게 할 수 있다.

결국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지금까지 이렇게 기억력을 좋게 하는 법에 대해 말했지만 나는 사실 기억력보다 창의력을 더 높게 본다.

물론 창의력을 훼손시키지 않는 한 기억하는 게 많은 것이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기억은 정체성과도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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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의식의 소음 마이크로 인문학 1
김종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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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갑의 생각, 의식의 소음은 생각을 많이 할수록 행복할까? 묻는 책이다. 이 물음은 도전적으로 들린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에 그렇다. 저자는 생각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식 내용으로 설명한다.(14 페이지)

 

저자는 생각이 행복에 백해무익하다고 믿는다. 이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피노자와 니체의 저술들을 저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읽으면서 얻어낸 결론이라고 한다. 저자는 생각의 99퍼센트가 삶의 소음이라 생각한다.(17 페이지)

 

저자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예로 든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란 구절이 있는 이 시는 님의 생각이 목젖으로 올라올 정도로 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화자에 대한 시이다.

 

이런 면모는 김소월의 못잊어의 정서와도 통한다.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란 구절이 그 점을 말해준다. 이 두 시인과 대조적인 시가 박재삼 시인의 아득하면 되리라이다.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 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걱정은 없어라

 

이 시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 후에 쓴 시이지만 분위기는 다르다. 저자는 득도한 스님 같다고 화자를 표현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의 스트레스가 투입되지 않으면 부재하는 님이 현존하는 님 생각으로 승화되지 않생각으로 님을 초혼(招魂)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더욱더 님의 부재를 의식하고, 더욱더 눈물을 흘리며, 더욱더 불행해져야 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잊을 것을 주문한다. 이는 떠난 님에게 작별을 고하지 못하는 님의 침묵이나 못잊어의 화자와 사뭇 다른 면모이다.(42 페이지) 저자가 건네는 또 다른 주문은 자신의 불행 속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명상 시간에 배워 아는 바이지만 생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 명상을 해야 하는가?

 

부재하는 대상을 현재의 공간에 불러들이면 문제가 발생한다. 현실을 놓치기 때문이다. 저자는 나무와 꽃을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으며 지각하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46 페이지) 그는 현재를 즐길 뿐이다.

 

저자는 감정은 생각(이라는 음식)을 먹고 증식하는 생명체라 말한다. 아사(餓死)시켜야 하는생각에게 계속 먹이를 제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6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마음이나 생각은 주어진 환경 변화에 인류가 적응하기 위해 발달시킨 생존의 부산물이다.(74 페이지)

 

짝짓기가 본능이라면 더 좋은 조건의 짝짓기를 하려는 것이 욕망이고 그런 욕망을 따르거나 거부하는 능력이 의지이고 욕망과 의지에 대한 의식이 생각이다.(74 페이지)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그것도 아름답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생각한다.(76 페이지)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한 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능력이 생각인바 그것은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인데 생각이 발전을 거듭하다 보면 자율적으로 진행되는 메타 단계로 접어든다.(76 페이지)

 

니체에게 생각은 순수한 자기실현의 동력이 아니라 원한(resentment)이나 증오와 맞물려 있다.(80 페이지) 니체에게 생각은 행동과 반비례하는 것이다.(82 페이지) 여기서 귀족과 사제의 차이가 생긴다. 귀족은 모욕당할 경우 즉각 응수하지만 사제는 약자이기에 마음으로 분을 달래고 삭이게 된다.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마음에 담아두고서 수시로 상처 입은 감정을 은밀하게 꺼내보며 복수를 꿈꾸는 것이다.(82, 83 페이지) 문제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반동적이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이다. 자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욕과 상처에 의해 생각하도록 강요받는 것이 문제이다.

 

저자는 잔걱정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사소한 것을 가지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등이 굽은 사람들을 소인배라 칭한다.(92 페이지)

 

새겨 들을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생각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마태복음 627)는 성경 구절도 같은 차원의 말을 하는 것이다. 저자는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소인배의 고해성사 같은 시로 파악한다.

 

왜 나는 조그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 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째 네 번째/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시의 화자는 지식인이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그는 생각을 곱씹는다. 그런데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화자를 소인배라 말할 수 있는가? 김수영이기에 높은 기대를 갖고 보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우리에게는 지각해야 할 것을 생각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114 페이지) 이런 대표적인 예가 영화 토탈 리콜이다. 이 영화에는 몸으로 체험하는 여행이 아니라 컴퓨터 정보로 여행을 하는 상품이 나온다.(116 페이지)

 

생각을 내려놓으면 무념무상의 경지에 접어든다.(117 페이지) 이런 저런 걱정, 근심 등에 사로잡히면 하늘이 하늘로 보이지 않고 바람이 바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117 페이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려면 생각하는 대신 지각해야 한다.(118 페이지)

 

지각이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것이라면 생각은 신경세포를 거쳐 전달된 정보를 처리하는 것 즉 사후처리장치이다.(118 페이지) 생각은 지각보다 한발 늦게, 언제나 상황이 종료된 뒤에 등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 같은 사람이 지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골방에 칩거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다.(119 페이지)

 

저자는 생각에도 중독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124 페이지) 저자는 생각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몸의 하녀라고 말해야 옳다고 말한다.(130 페이지)

 

저자는 가장 많은 생각의 노력이 요구되는 대화도 사실은 흐르는 물처럼 저절로 행해진다고 말한다. 상대와 호흡이 잘 맞으면 내가 생각해서 의식적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미노처럼 상대의 말에 자극되어 나의 말이 저절로 이끌려 나오는 듯 느껴진다는 것이다.(131 페이지)

 

아무리 자유로운 사람도 생각이 자유롭지 않다. 생각으로 생각을 극복하거나 물리칠 수 없다.(139 페이지) 생각도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데 너무 많아지면 삶이 생각으로 대체되고 그러다가 생각의 홍수에 빠져 익사할 수 있다.(141 페이지) 물론 화음(和音) 같은 생각도 있다.

 

내 경우 명상 스승으로부터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사실을 알아차리라는 말을 듣곤 했다. 생각을 하는 것에도 적용될 말이다. 그러면(알아차리면) 멈출 수 있다. 생각을 알맞게 할 수 있다. 명상에서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현재에 머물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도 없는 것(과거, 미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현실)을 감각적으로 즐기라는 말을 한다.(145 페이지) 예컨대 어떤 일을 두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찾아 없애거나 해결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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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연천을 漣川이 아닌 蓮川으로 써 현판을 내건 예술 단체가 있습니다.

무슨 국악단체인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단순 착오이기보다 연(lotus)을 좋아해 그렇게 쓴 것이라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니 어쩌면 실제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호기심 탓이지만 蓮川이란 지명을 제가 사는 곳이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해 보았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꽤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 방문 5년만에 강화 고려산 적석사 인근의 한 수행자께 전화를 했습니다.

지난 2013년 8월 1일 엄청난 폭염을 뚫고 다녀온 곳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제 수행 외의 상담은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들은 말은 수행하라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저에게만 내려진 말은 아니었을테니 상담을 접은 사연이 짐작됩니다.

어떻든 다녀오는 길에 강화 선원사의 연꽃도 보려 했는데 아쉬움이 큽니다.

남양주의 김명리 시인께서 인근 봉선사의 연꽃을 보시고 시를 써 페북에 올리신 것을 보고 더욱 연꽃을 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선택지는 남양주 봉선사 말고 없는 것일까요? 강화가 수행자 말고 만날 일이 없는 곳이 아니니 여전히 갈 수 있는 곳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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