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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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다츠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구조주의 해설서이다.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프랑스 현대 사상 등을 공부한 다츠루는 입문서와 전문서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으며(6 페이지) 입문서는 전문서보다 근원적인 물음과 만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고 말한다.(8 페이지)

 

자신을 초보자에 불과하다(10 페이지)고 소개하는 다츠루는 구조주의라는 사상이 아무리 난해해도 그것을 세운 사상가들이 인간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까?‘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11, 12 페이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약한 사상가들이다. 푸코는 역사가, 바르트는 언어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자, 라캉은 정신분석학자이다. 저자가 말했듯 시스템, 차이, 기호, 효과 등은 구조주의의 주요 용어들이다. 저자는 지금은 구조주의가 종말을 맞고 있다고 말한다.(23 페이지)

 

구조주의적 사유란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지역, 사회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사유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27 페이지) 저자는 마르크스를 구조주의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 본다.(30 페이지)

 

마르크스는 인간은 행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그 창조물이 그것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며 생산관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것을 매개로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알아차린다는 기본적 인간관을 가졌다.(31 페이지)

 

주체성의 기원은 주체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있다는 것이 모든 구조주의자들이 공유하는 기본적 전제이다.(35 페이지) 프로이트도 구조주의의 원류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은 자기 정신생활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 프로이트의 가정이다.(37 페이지)

 

마르크스는 인간은 계급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했고 프로이트는 인간은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37 페이지) 프로이트는 인간은 억압된 존재라는 견해를 가졌다.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는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거나 이를 기초로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고 욕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공통의 견해를 가졌다.(43 페이지) 니체 역시 인간의 사고가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을 가졌다.(44 페이지)

 

니체는 동시대인들이 억측에 의한 판단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고 단정했다. 니체가 말한 동시대인들에는 우리도 포함된다.(49 페이지) 니체의 사상은 푸코에 의해 계승된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사상사적으로 구조주의를 시작한 사람이다.(66 페이지) 소쉬르의 언어학이 구조주의에 안겨준 가장 중요한 견해는 언어란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66 페이지) 저자는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음으로써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72 페이지)

 

소쉬르가 가르쳐준 것이란 어떤 것의 성질이나 의미, 기능은 그 사물이 그것을 포함한 관계망이나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차후에 결정되는 것으로 사물 자체에 생득적이거나 본질적인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77 페이지)

 

저자는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습득한 언어 규칙, 내가 몸에 익힌 어휘, 내가 듣고 익숙해진 표현, 내가 읽은 책의 일부가 말하는 것이라 말한다.(79 페이지) 이는 내가 타인의 말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80 페이지) 소쉬르가 타격을 가한 것은 자아중심주의이다.(81 페이지)

 

구조주의란 언어, 문학, 신화, 친족, 무의식 등 다양한 인간적 제도에서의 역사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더럽혀지기 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가공 전 상태인 영도(零度)를 탐구하는 것이다.(87 페이지) 푸코는 인간주의적 진보사관에 이의를 제기했다.(8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나란 존재는 역사의 무수한 분기점이나 어느 방향이 어쩌다가 선택되어 출현한 것에 불과하다.(91 페이지) 저자는 푸코가 니체의 계보학적 사고를 계승해 고찰 주체인 자신을 스스로 괄호 안에 넣고 역사적 사상 그 자체와 정면에서 마주한다는 지적 금욕을 스스로 부과했다고 말한다.(93 페이지)

 

푸코는 정신질환에서 건강/ 이상(異相)의 경계라는 개념을 전복시켰다.(94 페이지) 푸코는 광인이 단단하게 격리되다가 부드럽게 격리되는 과정에서 의료와 정치의 결탁 즉 지()와 권력의 결탁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근대 국가는 예외 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며 조작 가능한 관리하기 쉬운 형태로 두는 것 즉 순종적인 신체를 조형하는 것을 정치적 과제 가운데 최우선으로 내걸었다.(112 페이지) 신체를 표적으로 하는 정치기술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단지 신체의 지배만이 아니라 신체의 지배를 통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었다.(113 페이지)

 

저자는 푸코가 권력 비판 이론을 세웠다고 보는 것은 푸코가 진정으로 원한 일이 아니라 말한다. 그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121 페이지)

 

제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제도적인 지()로 의심받는 그 제도에 속한다는 불쾌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을 활기차게 노래하는 우둔한 학자나 지식인에 대한 모멸감, 이런 불쾌한 일들에 조종당하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기 언급이 푸코가 보여준 비평의 핵심이다.(121, 12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상징과 기호는 다르다.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크든 작든 어떤 현실적인 연상으로 결합되어 있다. 기호는 어느 사회 집단이 인위적으로 약속한 표시와 의미의 결합이다.

 

둘 사이에는 자연적, 내재적 관계가 없다. 장기에서 졸이 하나 없을 때 귤껍질로 대신했다고 하자. 이때 귤껍질이란 인위적 표시는 시니피앙, 그것이 의미하는 졸의 작용은 시니피에라 한다.(126, 127 페이지)

 

우리는 어느 시대의 글을 쓰는 사람 전원에 의해 공유되는 규칙과 습관의 집합체인 랑그, 쓰는 사람의 영광, 뇌옥(牢獄), 고독인 개인적이고 생래적인 언어 감각인 스틸을 선택할 수 없다.(132 페이지)

 

물론 그 안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다. 이 언어 사용이 에크리튀르이다. 스틸은 개인적인 선호이지만 에크리튀르는 집단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는 선호이다.(132 페이지)

 

바르트는 에크리튀르가 자유로운 것은 선택할 때뿐이며 그것이 지속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고 설명했다.(134 페이지) 바르트는 카뮈의 이방인의 문체를 이상적인 문체라고 극찬했다.(147 페이지) 이 소설은 저자가 주인공의 행동이나 발언을 모두 안다는 식으로 설명하거나 주인공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을 자제한 작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카뮈의 에크리튀르를 아름다운 모범으로 받들기 시작하면 그 또한 제도적인 어법이 되어 순수한 에크리튀르가 될 수 없다.(147, 148 페이지)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특정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의미이다.(155 페이지)

 

이런 기초적 이해에 대해 구조주의자도 별 다른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양자가 대립하는 것은 논쟁이 주체나 역사와 관계될 때이다. 앙가주망이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선배 세대들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이 지금의 나에게도 결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주체는 주어진 상황의 결단을 통해 자기형성을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는 차이가 별로 없다. 하지만 상황 속에서 주체는 늘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정치적 올바름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인식을 전제해야 한다는 단계에 이르러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는 다른 길을 걸었다.(159 페이지)

 

사르트르는 역사를 궁극적 재판소라 보았고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가 나는 생각한다는 생각에 갇혔다고 말했다.(162 페이지)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은 세 가지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한다고 보았다.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경제활동), 메시지의 교환(언어활동), 여자의 교환(친족제도) 등이다.(178 페이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인간이 되는 것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생각은 푸코와 통하는 탈인간주의의 징후를 보여준다.(181 페이지)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의 그런 점이 인간의 존엄이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여러 구조주의 사상가들 중 가장 난해한 사람이 라캉이다. 이는 라캉이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이에 대해서는 홍준기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을 참고할 것) 저자는 거울 단계 이론과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한다. 거울 단계란 일종의 자기동일화로서 주체가 어떤 상을 받아들일 때 주체의 내부에 일어나는 변용이다.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가정하는 것에 의해 나를 형성한다는 외상(外上)을 깔고 인생을 시작한다.(189 페이지) 나의 기원은 내가 될 수 없는 것에 의해 담보되어 있고 나의 원점은 나의 내부에 없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무의식의 방에 갇혀 냉동보존된 기억을 해동하면 과거 그대로의 기억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말한다. 기억은 그처럼 확실한 실체가 아니라 늘 생각해내면서 형성되는 과거이다.(195 페이지)

 

저자는 정신분석적 대화는 피분석자의 본적(本籍)을 그의 내부에서 분석가와 피분석자가 함께 만들면서 구축한 이야기의 내부로 옮기는 호적 이전 작업과 비슷한 것이라 말한다.(197 페이지) 저자는 어떤 병적 증상을 경미한 다른 증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실리적으로 볼 때 치료의 성공이라 말한다.(198 페이지)

 

저자는 분석가와 피분석가 사이의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말의 주고받음은 음악적인 비유로 말하면 재즈의 즉흥 연주와 가까운 것이라 말한다. 분석가와 피분석가의 대화는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하는 바 그것이 목적하는 것은 악곡이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의 재현이 아닌 것처럼 현실의 재현도 상기도 진실의 개시도 아니고 하나의 창조행위이다.(200 페이지)

 

라캉은 자아를 말로 할 수 없지만 말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자기장(磁氣場) 같은 것으로 분석가와 피분석가의 대화의 목적은 자아가 있는 것을 찾고 그 작용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다.(202, 203 페이지)

 

정신분석의 목적은 증상의 참된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는 것이다. 치료란 커뮤니케이션 부조(不調)에 빠진 피분석자를 다시 그 회로로 돌아오게 하는 것,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재화와 서비스를 나누는 증여와 답례의 왕복운동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215 페이지)

 

결론 삼아 말하자면 내게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사상은 정신분석이다. 참으로 묘하고 독특한 사상이고 때로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 난감하지만 매혹적이다. 다른 구조주의 책들을 더 읽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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