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의 공부 - 완벽한 몰입을 통해 학문과 인생의 기쁨 발견하기
오카 기요시 지음, 정회성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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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수학자 오카 기요시(岡潔: おか きよし, 1901 1978)수학자의 공부는 자연과학과 인문학, 이성과 정서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책이다. 1부 수학을 배우고 즐기는 삶, 2부 학문의 중심은 정서다, 3부 내가 사랑하는 예술로 이루어진 이 책은 곰에서 왕으로를 쓴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가 해제(解題)를 썼을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의 책이다.

 

자신을 단지 수학을 배우는 기쁨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 뿐이라 소개한 저자는 봄 들녘의 제비꽃은 제비꽃으로 피어 있으면 그 뿐이듯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종교인이 겪음직한 집중과 깨달음의 순간을 몇 차례 경험했음을 밝힌다.

 

생각이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모이는 느낌이 들더니 점점 구체화하기 시작했다(22 페이지), 어려운 문제를 생각하며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숲을 빠져나와 넓게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생각이 한 방향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28 페이지), 밤에는 아이들과 함께 골짜기에서 반딧불이를 잡았다가 놓아주곤 했는데 그러는 사이 갑자기 어려운 문제가 저절로 풀렸다(29 페이지) 등이다.

 

저자는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연습이 학습의 근본이라 주장한다.(105 페이지) 저자는 에세이 작가로도 명성이 자자했던 프랑스의 대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가 수학적 발견 과정에 대해 썼을 뿐 기쁨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았음을 의아하다고 말하며 정서(情緖)가 깊을수록 경지(境地)가 넓어진다고 결론짓는다.

 

정서를 강조하는 저자의 지론은 책 전편을 통해 일관되게 제시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 마쓰오 바쇼 등을 가장 사랑하는 문학가이자 예술가로 소개(190 페이지)하는 저자는 작가 소세키와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 등을 정서가 깊을수록 경지가 넓어진 사례로 설명한다.(30 페이지)

 

이 밖에 저자는 베토벤을 좋아하지만 그보다 슈만을 더 좋아해 그의 음악을 피히테의 철학에 견주어도 손색 없을 만큼 뛰어나다고 말한다.(188 페이지) 저자가 좋아하는 작가는 앙드레 지드, 도스토예프스키 등이다.(196 페이지) 좋아하는 화가는 고흐, 피에르 라프라드, 요코하마 다이칸 등이다.(196 페이지)

 

물리학과에 들어간 뒤 물리가 싫어져 수학과로 전과(轉科)(43 페이지)한 저자는 (이론) 물리학자를 소목장이에, 수학자를 씨 뿌려 곡식을 수확하는 농부에 비유한다.(8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물리학자가 다른 사람이 만든 재료를 조합하여 뚝딱 다른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수학자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사람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저자는 학문의 세계에서 어느 스승한테서 배우는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47 페이지) 정서를 강조하고, 기쁨을 안 뒤 슬픔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에 걸맞게 문학, 예술 등에 남다른 조예를 드러낸다. 저자에게 수학은 매혹적인 바다이고 수학의 본질은 조화(調和)이다. 저자는 조화를 추구하는 예술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예술과 가까이 하면 아름다움의 조화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상에 앉아 책만 보고 공부하기보다는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마음으로 수학을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한다.(73 페이지) 여러 말이 인상적이지만 글쓰기와 관련해 참고할 말이 있다. 공식을 쓰면서 답을 구하기보다 머릿속에서 충분히 정리한 후 한 번에 써 내려가는 편이 좋다는 말이다.(77 페이지)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저자는 명암을 집필하던 중 세상을 떠난 소세키의 삶을 나름대로 괜찮은 삶이었다고 표현한다.(81 페이지..소세키는 50의 나이에 위장 건강 탓에 타계했다.) 선사(禪師)의 느낌이 드는 부분이다. 정서 중심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쉽게 부패한다(84 페이지)고 말하는 저자는 적절할 때 행하지 않는 선행은 선행이 아니라고 본 공자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한다.(88 페이지)

 

저자의 독서 지론(持論)도 흥미롭다. 즉 책을 마구 읽는 것은 이곳저곳에 씨앗을 뿌리는 일과 비슷한 것으로 봄이 씨앗을 뿌리는 계절이듯 이 시기에는 우리 마음 밭에도 생각의 씨앗을 뿌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126 페이지) 인간론도 그렇다. 동물성이라는 나무에 인간성이라는 나무를 접붙여 생긴 나무가 인간이라는 것이다.(134 페이지) 저자는 동물성이라는 싹을 너무 빨리 성장시킨 결과 청소년 범죄가 갈수록 무자비해지고 잔인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137 페이지)

 

저자에게 정서란 남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이자 수학적 자연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이다.(146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공부의 핵심은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158 페이지) 또한 하나를 듣고 암중모색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다.(164 페이지)

 

저자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리 없기 때문에 배우기 어렵다는 말을 한다.(157 페이지) 저자는 요즘 소세키의 소설을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자극적인 소설을 찾고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 추정하는 등 문학, 예술, 인문학론에 두루 능하다.

 

남성이 자신의 정서에 이는 파도를 가라앉히지 않은 채 여성을 바라보면 여성의 정서에 일렁이는 파도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저자의 글도 흥미롭다.(199 페이지) 저자는 뉴턴이 입자로, 호이겐스가 파동으로 본 빛에 두 속성이 모두 있다고 말함으로써 논쟁을 마치게 한 루이 드 브로이를 예로 들며 문학에도 파동형과 입자형이 있다고 말한다.(213 페이지)

 

입자형은 직관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뜨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한편 프랑스 유학 시절 쥘리아 선생님께 수학에도 리듬(운율)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226 페이지)는 저자의 말은 최근 시의 리듬을 공부하려는 나에게 큰 단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해제에서 나카자와 신이치는 수학은 인간의 뇌에서 만들어지고 수학을 이루는 수와 논리는 인간의 신체를 매개 삼아 살아 간다고 설명한다.(233 페이지) 인간의 구체적 경험이 없었다면 수학도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정서라는 저자의 말에서 정서는 자본의 반대어이다. 요즘 보기 어려운 독특하고 따뜻하고 역동적이고 인간적인 수학자의 공부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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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은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울프가 유일하게 질투심을 느꼈다는 뉴질랜드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의 ‘일기‘라는 작품을 읽고 쓴 작품이다.

맨스필드는 5년의 고투(폐결핵) 끝에 육체적 건강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질병이 정신에서 온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영적 형제애를 추구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지와 바다와 태양과 그것의 경이로움들과 긴밀한 접촉을 통한 충만하고 성숙하며 살아 숨쉬는 삶으로 이끄는 힘을 건강이라 썼다.

질병 즉 건강 이상이 정신에서 오는 것이라는 맨스필드의 생각은 정서를 남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물론 수학적 자연을 창조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 일본의 수학자 오카 기요시의 생각(‘수학자의 공부‘ 146 페이지)을 연상하게 한다.

또한 정서가 학습을 지배하며 정서와 인지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논의(하버드대 교육학과 커트 피셔 교수)를 떠올리게도 한다.

오카 기요시는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배우기 어렵다는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리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토요일 나는 나를 겸손하다고 말한 분께 아, 저는 자랑도 많이 하고 아는 척도 많이 합니다라는(겸손하지 않습니다라는) 답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분은 내가 수행하는 수불석권의 자세 즉 쉼 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자세 자체를 겸손함의 증거로 보신 것 같다.

관건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에서 나아가 내 이야기를 충분히 해야 의미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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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준비하다가 옛 생각을 떠올렸다는 문장을 만났다. 이 문장은 자연스러운 문장이다. 재판을 준비한 사람도 나고 옛 생각을 떠올린 사람도 나이기 때문에 '옛 문장을 떠올렸다' 앞에 나는이라는 말을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재판을 준비하다가 옛 생각이 떠올랐다는 문장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재판을 준비한 사람은 나고 떠오른 것은 옛 생각이기 때문 즉 주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주목할 부분은 떠올렸다는 말은 타동사이고 떠올랐다는 말은 자동사라는 점이다.

 

자동사인 떠올랐다를 쓰려면 재판을 준비하는데 옛 생각이 떠올랐다고 하면 된다. 문제는 재판을 준비하다가 옛 생각이 떠올랐다는 문장은 이상한데 재판을 준비하는데 옛 생각이 떠올랐다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반대로 재판을 준비하는데 옛 생각을 떠올렸다는 말은 어떤가? 이 경우도 이상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왜 이상한지 모르겠다. 이 경우는 어떤 이가 재판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내가 옛 생각을 떠올렸다는 의미로 보아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재판을 준비하는 사람 즉 주어를 명기해야 하리라.(두서 없는 생각이리라 여겨지지만..) 해박한 분들의 조언을 바라며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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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 ‘시인/ 평론가‘라 할까? 장석원 ‘평론가/ 시인‘이라 할까?

김수영 문학관에서 진행된 장석원 님의 ‘김수영 시의 난해와 감동‘이란 강의를 듣기 전 내가 한 생각이다.

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오늘 강의에서 시인과 평론가의 면모 가운데 어떤 점이 두드러지는가에 따라 ‘시인/ 평론가‘라 할 수도 있고 ‘평론가/ 시인‘이라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늘 강의는 강연자의 김수영 체험기를 시작으로 철학자들의 김수영 선호 등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강연자는 논자들이 김수영 시에서 자신의 논의를 뒷받침해주는 부분만을 토막내 이용하는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고 강신주 철학자가 국문학을 전공한 자신들도 간파하지 못한 부분을 캐치해냈다는 점을 지적하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는 진솔한 이야기도 했다.

결론은 강연자가 시인과 평론가의 면모를 조화롭게 보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장석원 님이라 해야 옳다.

나는 ‘등나무‘란 시를 인접성의 관점으로 보라는 강연자의 말이 시를 환유적으로 보라는 것인가 물었고 김수영 시인이 읽었으리라 추정되는 논어나 주역을 참고하되 지적 재단이 아닌 감성을 활용한 공감의 시각으로 분석 대상인 김수영 시인의 시를 나누지 않고 전체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물었다.(두 물음 모두 긍정하는 답을 들었다.)

장석원 님의 평론집(‘김수영 시의 수사학‘)과 시집(‘역진화의 시작‘)을 읽어야겠다. 이 부분은 물론 미래 기약에 속하는 부분이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강의 들은 두 분과 인사동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커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사실이다.

이 두 분은 지난 1월에서 4월 사이 종로 50 플러스 센터에서 함께 한 분들이다.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은 약 네 시간이었다.

헤어지는 악수를 청하는 두 분에게 나는 오늘 즐거웠습니다란 인사를 드렸다.

아, 참 식사중 나는 두 분 중 한 분에게 ˝제가 선생님 좋아하잖아요......˝란 말을 드렸고 이에 그분은 웃음으로 답하신 것이 하이라이트라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내가 한 즐거웠다는 말씀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니 심리상담사에게 하듯 깊은 내면의 말을 많이 한 날이었으니 의미 있는 날이었다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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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숙(1918 - 1993) 작가 자료를 정리하다가 작가가 스물 일곱에 교통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아들 용기(1944- 1970)씨를 애통해 하며 쓴 소설 ‘우리 사이 모든 것이‘를 읽었다.

의학도였던 용기씨는 바쁜 시간 틈틈이 최선을 다해 첼로도 연주하며 교향악단과 협연을 하기도 한 분이다.

그는 보케리니의 곡을 자주 연주했고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헨델의 수상 음악도 연주하곤 했다고 한다.

작가는 그래서 보케리니 곡도, 바흐 무반주 모음곡도 아프고 용기씨가 형에게 원거리 전화를 걸어 수화기에 대고 연주했다는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는 더욱 아프다고 말한다.

작가는 시인 폴 발레리의 ‘풍부한 부재‘를 이즈음처럼 절감한 때는 없었다고 말한다.

˝너는 가고 없지만 너의 추억은 충만해 있˝고 ˝너는 무가 아니고 부재˝한다는 의미이다.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죽은 아들을 살리는 약을 찾아다닌 끝에 그것이 허망한 꿈임을 알아차린 야윈 고타미의 깨달음이 극적이고 은유적이라면 한무숙 작가의 것은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다.

˝너 까닭에 이 괴로움, 이 아픔을 갖지만 너는 태어나야 했고 많은 추억을 남겨주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슬픔과 아픔도 남겨야 했다.

그것은 섭리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신의 섭리에 간섭해서는 안되는 것이다.˝(‘우리 사이 모든 것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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