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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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저 기만의 바탕에는 사실
‘자발적인 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사르트르 Jean-Paul Sartre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재미있는 예를 소개한다. 한 여인이 누군가 전화를 걸어 명령을 내린다고 호소한다. "그는자기가 하느님이래요!" 그녀는 하느님의 전화를 받고 하느님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중이다. 누가 신의 명령을 거역하겠는가? 그녀가 신의 명령에 따라 설령 살인을 했다 한들, 누구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으리라. 신 앞에서 감히 그녀는 어쩔 수가 없었을 테니까. 과연 그럴까?
그녀는 이런 의구심을 품을 수 있으리라. 전화를 걸어온 자는 정말 하느님일까? 혹시 장난 전화였다면? 아니, 정말로 내가 전화를 받기나 한 걸까? 하느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착각한 것은 아닐까? 이런 의혹에 대해 답해줄 수 있는 자는오직 한 사람, 그녀 자신이다.

중요한 점은 사회를 절망에 빠트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많은 상황들은 바로 이런 자기기만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정치의영역에서 불의를 목격하고, 또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음모를 목격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명백히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양심이 알려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정의에헌신하는가?

카인은 타인을 지키는 자가 되지 않기로 결단했듯, 반대로타인을 지키는 자가 되기로 결단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못하는 것처럼 처신하는 이상 그는 자기기만적 의식의 화신이다. 인류가 이런 카인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라는 의식의 비열한 환부를 인간의 근본에서 발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이 찾아낸 그 환부를 죽음에이르도록 방치하지 않고 치료할 수도 있으리라.

날씨는 위대한 대왕을 무시하고 제 할 일만 할 뿐이며, 날씨를 굴복시키려 할수록 인간은 자신의 미련함만을 뽐내게 될 뿐이다.
《삼국지》가 종말을 향해 치닫는 103회는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갈량은 상방곡 전투에서 비로소 위나라 사마의에게마지막 승리를 빼앗을 기회를 얻는다. 골짜기 깊은 곳으로 사마씨 삼부자를 유인하고 불 공격을 하자 사마의와 두 아들은 부둥켜안고 우리 삼부자가 오늘 여기서 죽는구나 하며 통곡한다.
그때 소나기가 퍼부어 불을 꺼주고 삼부자는 달아날 수 있게된다.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결론은 날씨가 내린다.

삼국지》의 이 진리는 이후 모든 세대의 소풍과 야유회와 운동회가 늘 절실하게 확인한다. 날씨는 인간이 동원하는모든 계산으로부터 달아나 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고삐 풀린 말이다. 오랜 경전도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날씨의 이 비밀을 잘 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요한〉,3:8, 공동번역). 우리는 날씨에 대해서 뭘 어쩔 수 없다. 날씨를정확히 예측하는 일조차 영원한 좌절을 친구로 삼는다.

내 마음은 어둠 속에서도 햇살처럼 켜져야 하며, 가뭄 속에서도 그토록 좋아하는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우산 아래의 원형 극장을 만들어야 한다. 진정 모든 변화는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생각의 눈은 삶에서 어디에 햇살이 깃들고 어디에 반가운 여름비가 오는지 찾아주어야 한다.

《아이네이스》의 후반부는 정복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고,
전반부는 보트피플의 방황 이야기이다. 그래서 후반부는 전쟁의 서사시인 <일리아스》를 모범으로 삼고, 전반부는 바다에서의 방황 이야기인 <오뒷세이아》를 모범으로 삼는다. 작품의 골격은, 트로이 멸망 후 여신 비너스의 아들이자 트로이왕족인 아이네아스가 트로이 유민들과 함께 온갖 방황을 거쳐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의 선조가 되는 이야기이다. 작품중간중간 아이네아스와 그 후손인 미래 로마의 율리우스 카

토착민의 이름과 이방인의 피가 한데 섞여 새로운 세계가탄생한다는 것이다. 바로 ‘로마‘ 말이다. 아시아의 해안(트로이)과 유럽의 해안(이탈리아)은 각자 순수한 정체성을 고집한채 서로를 외면하고 있지 않다. 아이네아스라는 보트피플의항해와 정착이 알려주듯, 이질적인 자들에 대한 환대가 있고,
이 환대 속에 새로운 문명과 국가의 탄생이 준비된다.

문명 자체의 성격이 그렇다. 한 문명이란, 또는 문명의 울타리가 되곤 하는 국가란 순수한 혈통도, 순수한 전통도 담고있지 않으며, 이질적인 것들의 마주침만을 담고 있다. 예컨대니체는 ‘독일인‘이란 그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고민해본다는의미라고 말한다. 독일인의 순수한 정체성, 단일한 역사적 기원 같은 것은 없는 까닭이다. 마틴 버낼 Martin Bernal이 쓴 흥미로운 역사서 《블랙 아테나>의 메시지 역시 유럽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럽의 탯줄인 찬란한 그리스는 그리스땅에서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타자의 도래, 즉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도래를 통해 가능했다. 아테나는대리석처럼 하얗지 않고, 검은 피부의 유전자를 혈액에 간직한 여신이다.

일생의 부부 생활을 통해서, 한 번도 그녀가 진정으로그의 것이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그녀를 가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 그는 눈꺼풀이 감긴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이상한 미소는 폴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미소는 폴이 모르는 어떤 이에게 보내는 거였다. 그는 그 미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두 남녀의 관계는 실패한 것인가? 아니, 오히려 저 구절은 남녀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준다. 남녀관계속에서 인간은 결코 상대방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줄곧 상대방을 위해 미소 짓지도 않는다. 각자는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더 많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이며, 전체 그림 같은 것은 결코 맞추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길은 무엇인가? 오로지 상대방의 고유성, 서로 다름, 하나의전체로 합일하려 하지 않는 상대방의 필연적인 고집을 존중하는 길밖에 없다.

이 두 남녀의 관계는 실패한 것인가? 아니, 오히려 저 구절은 남녀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준다. 남녀관계속에서 인간은 결코 상대방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줄곧 상대방을 위해 미소 짓지도 않는다. 각자는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더 많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이며, 전체 그림 같은 것은 결코 맞추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길은 무엇인가? 오로지 상대방의 고유성, 서로 다름, 하나의전체로 합일하려 하지 않는 상대방의 필연적인 고집을 존중하는 길밖에 없다

성 안토니우스는 교회에 사람이 없자 물고기들에게 가서설교했던 인물이다. 이 풍자적인 가곡 속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 어떤 설교도 물고기들을 이토록 즐겁게 해주진못했네!" 물고기들은 뻐끔거리면서 열심히 설교를, 그러니까신의 법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다. 그러나 마지막이 중요하다.
"설교는 잊어버렸네! 설교는 그들을 즐겁게 했고, 그들은 다시 그전처럼 되었네!" 괜히 물고기가 아니다. 새와 더불어 위대한 망각의 동물인 물고기는 설교를 잊는다. 그냥 성자의 말씀을 ‘생깐다!‘ 동물들은 설교를 즐겁게 듣지만, 설교에 따라신의 법 아래 복종하는 일은 없다. 설교는 그저 즐겁게 들었으면 됐고, 그들은 돌아서서 그냥 하던 대로 한다. 생명이 허용한그대로, 잉어는 포식하고 뱀장어는 사랑을 즐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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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신체장애 때문에 자유롭지 않거나 고생하는 점이있을 것이다. 하지만 히사요 씨는 눈과 귀 대신 손발과 코로세계를 인식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물건을 소유하는 방식이 달랐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타인과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랐다.

신체장애 때문에 특정 행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방식이 바뀌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말하면 신체장애가 없는몸과 신체장애가 있는 몸에는 각각의 몸에 맞는 활동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메쓰 부부가 가르쳐주었다.

‘할 것‘이나 ‘해야 하는 것‘으로 머리도 몸도 가득해지면 어르신들의 몸이 내는 미약한 신호를 받아들일 여백이 생겨날수 없다. 목적, 가치, 의미로 빈틈없이 메워진 돌봄에는 어르신들을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측면도 있다. 자동차의 핸들에 놀이 요소가 있듯이, 돌보는 사람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

돌보는 사람의 몸에 여백을 기르려면 때로 멍하니 있을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멍하니 있으면 감각기관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단 감각이 열리면 주위의 온갖 것들과 교감할수 있다. 그렇게 하면 노쇠한 몸의 소리 없는 목소리가 돌보는 사람의 몸에 축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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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동기화, 자유 - 자유를 빼앗지 않는 돌봄이 가능할까
무라세 다카오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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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다. 환자식이 아니라 흔한 집밥을평범하게 먹고 싶다. 혼자서 쓸쓸하게 먹는 게 아니라 많은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먹고 싶다. 기저귀에 싸기는 싫다. 대소변은 화장실에서 스스로 시원하게 보고 싶다. 부탁하지도않은 재활은 하기 싫다. 누군가 맘대로 만든 일정표 때문에내 생활 리듬이 흐트러지는 게 싫다. 그보다는 낮잠을 즐기고 싶다. 입 안 가득 과자를 먹고 싶다. 옛날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날씨가 좋으면 훌쩍 나가서 계절의 흐름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익숙한 동네에서 마지막까지 나답게 살고 싶다. 모르는 장소에서 쓸쓸하게 죽기보다 낯익은 사람들이 많아 안심할 수 있는 곳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고 싶다.
만약 ‘요리아이‘에 이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이처럼 당연한 바람과 생활을 ‘가능한 지원하는 것이겠습니다.
우리는 고령자를 부담스러운 짐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격리하지 않습니다. 구속하지 않습니다. 약에 찌들게 하지 않습니다. 노화의 시간과 리듬에 어우러지며 고립되기 쉬운 어르신및 그 가족들과 함께합니다."

더 이상 손 쓸 수단이 없어졌을 때야말로 자유롭게 해방되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르신과 나, 두 사람의 ‘바람‘이 성취되지 않을 때, 그 너머에서 ‘해주다‘와 ‘받다‘를 뛰어넘어 서로 돌보는 상황이 태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어르신들을 돌보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세계와 개념이 일치하는 순간. 실천과 언어가 동기화된다고 하면 될까.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내 기술이 향상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 느낌은 때로 나를 ‘다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공부한 지식에 어르신을 끼워 맞춰서 내가 다 이해한다고생각했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태도는 어르신들에게 있는 ‘저항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알아주면 좋겠다. 하지만 너무 쉽게 알아서는 안 된다‘ 어르신들에게는 그런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닥치는 대로 ‘이론‘을 머릿속에 담으면서 ‘육성‘으로 부딪쳐본다. 내게 돌봄이란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간섭을 받는 할머니는 점점 이상해졌고, 간섭하는 나 역시점점 이상해졌다.
‘사람을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다. ‘나 역시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상냥하게 대하고 싶지만, 상냥해질수 없다. 느긋하게 대응하고 싶지만, 마음이 조급해진다. 내속에 숨어 있던 폭력성이 드러날 것 같아서 스스로가 무서워진다.

나는 점점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 나를억제한 것은 할머니의 슬픔 가득한 말이었다.
"
"내게도 아직,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왜...왜...."
할머니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호흡에 맞춰 훌쩍거리는 콧물. 할머니는 점점 리듬감 있게 훌쩍거렸다. 리듬은 허밍으로 바뀌었고 허밍은 소프라노의 멋진 노랫소리로 변화해갔다.
할머니는 자신의 노랫소리에 힘을 얻었다. 슬퍼하던 표정은 후련해졌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겨우 몇 분동안 벌어진 일은 나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때껏 나는 재택 돌봄을 하려면 일종의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바로 혼자 죽을 각오다. 당사자와 돌보는 사람, 모두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그렇지만 최근 들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죽을 때는 언제나 혼자다. 혼자 죽는 건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제어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집에 돌아가니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이 문장에는 사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나 자신이 홀로 생활하는 어머니를 돌보게 되면서 생각이바뀌었다. 좀더 마음 편하게 집에서 죽어도 된다고.

할머니는 ‘죽음‘과 맞바꿔서 마스크를 벗은 게 아니었다.
‘연명‘을 원하지 않아서 산소마스크를 벗는 선택을 했다고는생각할 수 없다. "아무튼, 싫어."라고 했던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싫어‘를 따르는 결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결정은 ‘미래‘로부터 ‘지금‘을 생각하지 않는,
‘지금‘으로부터 ‘미래‘를 예상하지 않는, ‘지금‘만을 붙잡으려하는 육체에서 비롯된 염원 같았다.

‘노화=부자유‘라는 등식이 뇌리에 새겨졌다.
내 착각이었다.
입보다 유창하게 말하는 눈빛.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동자.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무당과도 같은 말솜씨. 독창성넘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의력.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혼란. 자신의 위기를 남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감각. 신념으로 가득한 주관. 추종을 불허하며 뻗어나가는 사고. 순발력 있는 지성. 체력과 비례하지 않는 지속성. 시간과 공간을뛰어넘는 도약력.

앞선 문단의 내용은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노쇠한 사람의모습을 긍정적으로 바꿔서 적어본 것에 불과하다. 노쇠한 몸에는 우리에게 없는 약동이 있다. 그 약동은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은 개념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 같다.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준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나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딘지 모르면 상황에 맞춰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규율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설령 누워서만 지내게 되어도 정신까지 그 자리에 묶여 있지는 않는다.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림으로써 부모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선하다. 분노와 증오에서 잘 벗어나게 되고, 기쁨을 느끼기 쉬워진다.
내가 지니고 있던 자기 개념이 무너지는 동시에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했던 규범에서 해방된다. 나라면 이래야 한다는믿음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변화하여 새로운 ‘나‘로 바뀔 뿐이다. 돌봄이란 그 과정을 함께하는 일이 아닐까.

몸이 점점 자유롭지 않게 되면서 사회의 개념적인 것에서점점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늙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쇠의 세계란 과연 어떤 곳일까.
그곳이 어떤 곳이든 ‘늙음‘이란 ‘노쇠=기능 저하‘라는 등식에 전부 담을 수 없는 생기 넘치는 과정이다. 호들갑스럽게말하면 번데기 속에서 몸이 걸쭉하게 녹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듯한, 그런 역동적이고 극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어르신들이 돌봄을 기꺼이 받지는 않았다. 돌보는나도 돌봄을 기꺼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일이었다. 노쇠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몸에 손대게 한다. 그 몸을 맡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손을댄다.

그렇지만 나는 바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다는 점이 우리를구제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떠한 방책도 남지 않았을 때 시작되는 협력 관계와도 비슷하다. 잘난 체라고는 하지 않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서로 협력한다. 서로에게 큰기대를 품지 않은 채 당면한 일과 마주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에는 수용이나 공감과는 다른 긍정이 존재한다.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안녕히‘라며 작별조차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음. 둘이서 하나의 행위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합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게 마음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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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 김창완 에세이
김창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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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생활이란 것도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기분은 날씨 같은 것이라고

어떤날은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지는 게 힘이 펄펄 나는가하면 또 어떤 날은 몸이 진흙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때가있습니다. 몸이 힘들면 마음이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날씨 같은 거라고 여기면 되는 거예요. 바람 불다,
비가 오다 그러다 햇살이 비추기도 하는 거거든요. 또 그러다 흐리기도 하고.

잡초에 관한 얘기였는데요. 고려대 강병화 교수가17년간 전국을 다니며 채집한 야생 들풀 100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종자 은행을 세웠다고 소식을 전하면서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이런 말을 덧붙였더라고요. 그러니 스스로 잡초라 할 일이 아니네요. 용기를 갖자고요.

사진을 힐끗보니 가슴에 또 틈이 벌어집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다시웃습니다. 왜냐면 막내는 아직 저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인디언의 지혜에서 빌려 왔습니다. 인디언들은 진짜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이 죽을 때라고 믿는답니다. 그분이 할머니를 잊지 않는한 할머니는 그분 가슴에 살아 있는 것이지요. 우리 또한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면 하늘나라로 간다 해도진정으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사람을 애태우며 잊으려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향기로운 그들을 가슴에 품고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살아가면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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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기업, 환경문제 간의 지정학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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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는 날로 커져만 가는 기술의 힘과그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의 지혜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될 것이다."
스티븐 호킹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이러한 일상이 1829년 10월 6일에 대전환을 맞는다. 그날, 영국 출신 기술자 조지 스티븐슨이 설계한일종의 로켓, 그러니까 증기기관차가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이어주는철로 위를 시속 40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림으로써 우편마차와 중소형쾌속 범선들을 사라지게 한 것이다. 기차는 전신기, 비행체 등과 결합하면서 우리가 시간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기 시작했다. 인간과상품은 물론, 아이디어조차도 항구와 공항, 송신탑 등을 연결해주는전 지구적인 운송망을 타고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속도로 세계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1971년 10월 2일, 미국 출신 공학도 레이 톰린슨이 과학자들과 미국 군인들 사이에서 애용되던 정보통신망 아르파넷Arpanet‘을통해 최초의 이메일을 보낸다. 이로써 인류는 급작스럽게 즉시성의 시대로 들어선다. 오늘날 모든 것은 (거의) 빛의 속도로 교환되고 달라진다. 우리는 고대의 포석 깔린 도로, 산업화 시대의 철도를 지나 이젠또 어떤 기초 설비가 우리의 일상적인 디지털 행위를 가능하게 해줄지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이 한 통의 이메일을 보내거나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엄지 척‘(그 유명한 ‘좋아요‘)을 누를 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수십억 번의 클릭은 어떤 지리적 분포양상을 보이며, 그것들의 물질적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은 어떤 생태적 · 지정학적 위협을 가하는 걸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질문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아르파넷은 이제 디지털 선사시대의 유물에 속하며, 그것을 탄생시킨 설계자들, 즉 정보과학계의 선구자들은 우리의 머나먼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한 족속처럼 여겨진다.

이와 관련된 숫자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세계 디지털 산업은너무도 많은 물과 자재,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에 이것이 남기는 생태발자국은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가 남기는 생태발자국의 세 배에이른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전기의 10퍼센트를 끌어다 쓰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거의 4퍼센트를 차지하는데,이는 세계 민간 항공업 분야 배출량의 두 배에 약간 못 미치는 양이다." "디지털 기업들이 그들을 규제하는 공권력보다 더 힘이 세질 경우, 그들이 생태에 끼치는 영향을 우리가 더는 통제하지 못할 위험이있다"고, 스카이프 공동 창업자이자, 기술의 윤리 문제를 연구하는 생명의미래연구소Future of Life Institute 창립자인 얀 탈린은 경고한다." 우리는 확신한다. 디지털 오염은 녹색 전환을 위험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향후 30년을 뜨겁게 달굴 도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미 경주는 시작되었다. 한편으로, 디지털 기업들은 인터넷을 비롯하여 스마트폰, 심지어 본사 건물을 에워싼 잔디밭마저도 ‘녹색‘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가진 막강한 재무 역량과 혁신 기량을 총동원할 것이다. ‘친환경적‘이면서 ‘책임감 있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디지털 산업의 목표가 오늘날 업계의 최대 관심사인데, 이는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클릭하기를 계속하고 마음껏 ‘좋아요‘를 보낼 수 있기때문이다. 디지털 업계의 선두를 달리는 GAFAM‘은 더 나아가 그들이 바친 기막힌 물질적 조공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어떻게 해서든 유지하고자 기를 쓴다. 우리가 상시적으로 들여다보는 화면 안 어디에나 깔려 있으나 우리를 둘러싼 대지에서는 좀처럼 실체를 파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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