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신체장애 때문에 자유롭지 않거나 고생하는 점이있을 것이다. 하지만 히사요 씨는 눈과 귀 대신 손발과 코로세계를 인식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물건을 소유하는 방식이 달랐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타인과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랐다.
신체장애 때문에 특정 행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방식이 바뀌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말하면 신체장애가 없는몸과 신체장애가 있는 몸에는 각각의 몸에 맞는 활동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메쓰 부부가 가르쳐주었다.
‘할 것‘이나 ‘해야 하는 것‘으로 머리도 몸도 가득해지면 어르신들의 몸이 내는 미약한 신호를 받아들일 여백이 생겨날수 없다. 목적, 가치, 의미로 빈틈없이 메워진 돌봄에는 어르신들을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측면도 있다. 자동차의 핸들에 놀이 요소가 있듯이, 돌보는 사람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
돌보는 사람의 몸에 여백을 기르려면 때로 멍하니 있을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멍하니 있으면 감각기관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단 감각이 열리면 주위의 온갖 것들과 교감할수 있다. 그렇게 하면 노쇠한 몸의 소리 없는 목소리가 돌보는 사람의 몸에 축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