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한번쯤 시외버스를 타보았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거나 그것도 비즈니스석을 타지않는 이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통수단 탑승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외버스 좌석에 앉아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있다고 의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시외버스 탑승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외버스에는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차표를 사도 버스를 탈 수가 없다. 타인은 갖지 못하고 나는 가진 어떤것, 여기서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가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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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둘러싼 말과 생각들을 하나하나 훑는 작업은 마치 세상을다시 배우는 느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신화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평등하게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건 나의 무의식까지 훑어보는 작업을 거친 후에야 조금이나마 가능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일 말이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착각과 신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고도 자신이 차별을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어떤 사람들은 성소수자를 향해 ˝사랑하니까반대한다˝고 외치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그것을 사랑의 표현이자 정의라고 믿는다. 당신이 하는 행동이 동료 시민의 존재를 부정하는인격적 모욕이며 폭력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듣지 못한다.
이 끝도 없는 평행선을 어찌하면 좋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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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당하는 차별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예전 직장 사무실에 있던 명패 같은 것 말이다.
다시 나는 비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의 사무실 문에는보라색 종이를 코팅한 명패가 붙어 있었다. 정규직 직원 사무실 문에 붙어 있던 명패는 나무색 판에 흰색 글씨였다. 2년 반쯤 지나 정규직이었던 한 동료에게 이 차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는 명패가 다르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보이지않는 이 사소한 차이가 나에게는 출근부터 퇴근까지 문을 열고들락거리는 매 순간 나의 신분을 각인시켜주는 주홍글씨 같았다.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이게 어떻게된 걸까? 산술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차별을 당할 때가 있다면, 할때도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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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자체는 죄가 없다. 그것은 생명의 토대이자 동력이므로
다만 그것이 향하는 방향과 속도는 알아차려야 한다. 생명이라는토대를 벗어날 때, 그것은 과속으로 치달린다. 치달리는 순간 방향이 어긋난다. 이때 해야 할 일은 이 어긋남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더욱 치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무지야말로 폭력이자 반생명이다. 생각에 생각을 더했는데, 결국은 무지에 도달한다는 이 우주적 역설, 그 역설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돌원숭이가삼장법사와 함께 서쪽으로 간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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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이 아닌 분별, 공감이 아닌 대립이 더 우세해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분별과 대립이 강화될수록 몸은 뻣뻣해진다. 가질수록 헛헛하고 누릴수록 막막해진다. 그럴 때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메아리친다. 다시 ‘처음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매 순간 만물과 교감하고 싶다고. 예수, 니체, 이탁오 등 동서양의 현자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하라고 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쓰기의 원리도 그러하다. 사물을 ‘처음처럼‘ 만나고, 매 순간 차이를 발명해 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것, 이것이 글쓰기의 동력이다. 인류가 처음 천지 사이에‘ 우뚝 섰던 태초의 신비로 돌아가는 길이자 갓난아기가 처음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을 일깨우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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