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데부 - 이 광막한 우주에서 너와 내가 만나
김선우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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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는 일이 즐겁지 않았어."
학교를 졸업한 후 빨리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 성급하게 그림을 그려냈고, 그것들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외부 세계를 위한 ‘적당하고 착실한‘ 그림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녀는 바로 활동을 접고 작업실에 틀어박혔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릴 다음 그림이 나 스스로도 궁금하지가 않았어. 이러다가는 작가로서의 수명이 곧 끝날 것 같았지."
자신만의 방식과 거기에 적합한 표현 방법을 찾아내기까지
‘증발‘할 수밖에 없었고, 수많은 방황과 실험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야 겨우 다시 세상에 나올 용기가 생겼다고, 그녀는 담담하게털어놓았습니다.

‘증발‘ 이후 열리는 그녀의 두 번째 개인전 작품들을 보고 저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작품 속 소녀와 풍경들이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기가 넘쳐 보였습니다. 그림에서는 작업의 고단함보다는 작가가 느꼈을 창작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전시의 타이틀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서툰 행복‘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다는 건 그 일이 더 이상 개인적인 취미의 영역에 머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정의하는 ‘직업‘이란, 좋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생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외부의 무수한 평가 속에서 납득 가능하고 타당한 책임을 담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인정받는 것, 직업인으로서 예술가의 딜레마는 꽤나 복잡합니다.

"보는 사람들도 행복했으면 해."
저는 그 서툰 대답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얼핏 상투적인 표현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그 짧은 문장에는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본 사람만이 꺼낼 수 있는 친절함과 따스함이 담겨있었습니다. 비로소 밝은 햇살을 마주했을 때의 기쁨을 사람들과공유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진실한 마음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술 행위란 어차피 처음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존재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표출되어 나올 수밖에 없고, 그것을 솜씨 좋게 처리해내는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바로 작가입니다."
다시 말해, ‘독소‘가 내재되지 않고는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루키는 그 ‘독소‘에대항할 수 있는 행위로 달리기를 포함한 철저한 루틴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방법론보다 쉬우면서 동시에 어렵고, 가장 효율적이고 만족감을 주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하루키본인에게만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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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순수함‘에 대한 정의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고, 여기에대해 어떤 답을 내리거나, 맞다, 틀리다를 다투는 일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치열한 논쟁이 오간다 한들, 결국 창작물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오롯이 창작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삶을살아가며 ‘하고 싶은 일‘을 더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의 비율을 필사적으로 줄여나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원하는 일‘과 ‘현실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책임을 담보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직업적 순수성‘의 척도란, 자신의 일을 대하는책임감의 크기와 그 정교함의 정도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일‘
이 ‘업‘이 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작품이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동시에 지극히 사회적인 산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공감과 위로를 얻고, 때로는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라는 강력한 연대의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명‘이라는 광막한공백의 영역에 자신의 이름을 존재하게 만들었을 때 예술가는비로소 유명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예술가가 번듯한 이름을얻는 일의 의미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
그렇게 살아남는 일이 이름이 없는 채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왔던 저를,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저를 지탱해주는 신념입니다.

오래전부터 동물 중에서도 새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날개가상징하는 자유로움을 언제나 갈망해 왔습니다. 학창 시절 제가가장 공감했던 단 하나의 문장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자신의자유의지로 자기의 자유의지를 포기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
이었습니다. 미술대학에 진학한 후 저는 갑갑한 현실을, 자유로운 새가 날개를 잃고 인간의 몸속에 갇힌 ‘새 인간‘의 형상으로표현했습니다. 그 작품들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의 전시제목은 <새상>이었습니다.

당시 공모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는 우연히 도도새에 대해알게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인근 모리셔스라는 작고 아름다운섬에 살던 도도새는 천적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날아야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결국 날지 못하는 새로 퇴화해 버렸습니다. 때문에 포르투갈 선원들이 그 낙원에 발을 들여 놓았을때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인은 그들에게 ‘도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도도‘는 ‘바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681년, 최후의 도도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 그들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건 모리셔스의 포트루이스 자연사 박물관에 박제된 도도새의 뼈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분명한 과정과 목적이 있는 길을권하고 때로는 강요합니다. 하지만 모리셔스에서의 모험은 ‘유익한 방식의 방황‘ 역시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와 새로운 가능성을찾는 좋은 방법이 될 거라는 확신을 제게 갖게 했습니다. 이 세상을 정글에 비유한다면, 살아갈 수 있는 방법 또한 셀 수 없이 많지 않을까요?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우리는 길 위의 인간이며,
언제나 길 위에서 떠나고 돌아오는 동안 성장과 변화의 기쁨을맛보아 온 존재이니까요.

"사람은 오직 혼자 있을 때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고, 고독을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유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금언처럼, 수다스럽지 않은 시간들은 우리에게 종종 더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입니다. 때문에 자발적인 고독은 분주하고 천편일률적으로 흘러가던 일상의 시간에서 한 발 뒤로물러나 자신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의 차이는 거기에서 옵니다. 자발적인 고독속에서 잠시나마 은자가 되는 경험은 우리의 삶에 어떤 화두를

어쩌면 살아간다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건 수많은 선택들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조금씩 의연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게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의연해지되 무뎌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 괜찮을 거야‘라는 막연하고 성의 없는 위로나 툭툭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선택의 번민 속에서 선뜻 제게귀를 열어주고, 손을 잡아준 이들과 함께 삶을 발견해 나가는 기쁨을 느끼고 싶습니다.
확신이라는 말이 좀처럼 어려운 이 세상 속에서 저는 그런 방식으로 믿어보고 싶습니다. 나 스스로를, 그리고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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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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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급하다. 그래서 남이 찾은 답안을 빌려서 빨리 사용해보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성공적인 사업의 해답, 공부의 해답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그런데 남들이 찾아낸 해답이 자기 자신에게도 꼭 맞던가? 얼마간 참고는 될지몰라도 결코 자신을 위한 해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해답이란 그 해답을 얻어낸 질문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있으며, 따라서 활짝 핀 꽃송이를 꺾어 가지듯 해답만을 똑따낼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해답이란 문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이다.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가 해답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는 각자가 앓는 저만의 질병처럼 각자의 삶으로부터만 피어오른다.

가령 프랑스 작가 클로드 시몽 Claude Simon은 자신의 문체에대한 고민에 빠졌을 때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 William Faulkner의 소설을 접하고서 어떻게 문체를 구사해야 하는지 해답을찾았다. 포크너의 소설은 클로드 시몽 이전에도 읽혔고 그 이후에도 읽히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의문제를 품고 있던 시몽에게만 해답이 되어준 것이다. 러시아민요 또한 많은 사람의 귀에 울려 퍼졌지만, 교향곡을 작곡하며 악상에 대한 고민에 빠졌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에게만해답이 되어 민요조의 분위기를 지닌 <7번 교향곡>의 4악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해답은 널려 있지만, 제대로된 문제를 가진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는빈털터리가 그것을 집어 들면 그저 돌멩이, 아니면 영문 모를 ‘42‘라는 숫자로만 나타난다.

소설로 돌아가보자.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
이 문제이기나 한 것인가? 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는 모든 것을 노력 없이 단번에 알아내겠다는 미련한 욕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마치 전혀 공부하지 않은 이가 침대에 빈둥거리며 누워 내일 시험에서 백점 맞을 궁리를 하는 것처럼. 저질문의 정답은 확실히 ‘42‘이다. 그러나 질문을 자신의 삶에서절실하게 피워내지 못한 이에게 질문은 추상적인 남의 질문이며, 따라서 해답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저 거대한 문제가 제대로 된 질문의 모습이 되기 위해선, 의미심장하게도 ‘지구‘라는 컴퓨터가 자신의 장구한 전 역사를 조금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하나 몸소 체험해야 했다.

기식자의 행동 방식을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다. 아들, 딸, 아빠, 엄마 등 차례로 나타나는 기생충들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거짓말이라는 ‘소음‘
을 만들어내어 숙주에게 진짜 정보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기생충들은 말(거짓말)을 통해 숙주 속에 침투한다. 기존의 메시지를 차단하는일종의 ‘소음 만들기‘가 기생충이 숙주에 침입하는 방식인 것이다. 기생충 서사는 많은 경우 숙주의 관점에서 공포 이야기로 만들어졌지만(‘에일리언‘ 시리즈), 기생충의 관점에선 정보를 속이고 숙주 속에 들어앉는 즐거운 이야기가 된다.

말이 통하지 않게 하는 소음을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인물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리스도이리라. 헤롯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왕국에 침투해 숙주의 왕 자리를 차지하려는 명백한기식자, 박멸의 대상이다. 결국 이 기자가 한 일은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라 불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소음을 만들어 기성 종교와 사람들 사이의 정보 체계를 차단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 기식자는 지금껏 없었던 하나의방향을 창조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식자라는 개념을 숙주의 관점에서 박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 개념의 더 넓은 가능성에 대해 눈감는 일이다. 기자는 숙주를 새로운 차원에, 새롭게 창조된 길 위에올려놓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생리학자 레리슈René Leriche의말은 매우 흥미롭다.

질병은 인간에 붙어살고 있는 기식자, 그것이 탈진시키는 인간을 뜯어먹고 살아가는 기식자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생리학적인 질서의 일탈, 처음에는 미미한 그런 일탈의 결과를 본다. 질병은 결국하나의 새로운 생리학적인 질서이다. 치료학은 병에 걸린 인간을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적응시켜야 한다."

이 말이 단지 생리학에만 해당하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기생충이 한국 사회에서 가리켜 보이는 지점 역시 저 말에포개진다. 우리의 사회적 벽들은 타인(기식자)의 개입을 통해부서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침투는 방어되거나 거부될 문제가 아니라, 침투받은 자를 변화하게 만드는 문제, 새로운 신체와 질서를 탄생시키는 문제이다.

단지 예술작품만이 반복을 기둥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반복은 우리가 살아가는 근본적인 방식이다. 불쾌한 것을 피하고 쾌락을 좇는 우리의 성향을 배신하는 우리의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나쁜 일을 겪으면 잊기보다는 맛난 먹이처럼 되새김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며, 한밤중이불킥을 하면서 낮의 실수를 계속 반추한다. 프로이트SigmundFreud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적절히 분석했듯, 이는 우리에게 침투한 자극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한 행위다. 어떤 문제 때문에 악몽을 계속 꾼다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그 문제의 자리로 돌아가 해결해보기 위해서다.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에 있었던 자신의 실수를 끊임없이 반추한다면, 그문제를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변명해 실수의 비극적 충격을완화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우리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반복을 한다.

철학은날씨를바꾼다한스도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쇼샤는 한스가 초등학교 시절 호감을 품었던 히페라는 소년과 닮았다. 한스는 동성인 히페를 연인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런데 히페에 대한호감은 히페를 닮은 쇼샤에 대한 사랑이 탄생하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과거의 히페는 현재의 쇼샤에 대한 사랑속에서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어떤 것이 동일한 모습으로다시 찾아온다는 뜻이 아니다. 즉 히페는 히페로서 반복되지않는다. 히페가 쇼샤로 변신하고서 반복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반복은 서로 다른, 즉 차이 나는 것들(히페와 쇼샤)사이에서 생긴다.

이런 까닭에 현대의 중요한 반복의 사상가 들뢰즈GillesDeleuze는 반복을 ‘차이의 반복‘으로 정의했던 것이다. 히페는쇼샤라는 가면으로 위장하고서만 반복되고, 히페에 대한 소년의 호감은 쇼사에 대한 이성적 애정으로 둔갑하고서만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잘 보존된 집안의 보물이 상속되듯 동일성을 유지한 무언가가 되돌아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복의 다른 이름은 변신이며, 그런 까닭에 반복이 이루어짐에도새로운 무엇인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반복은 새로운 것이 출현하기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과거의 것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속에서 과거의 것을 반추하며, 이를 통해 비로소 제대로 과거의 의미를 이해한다. 이런 이해 방식의 비밀을 잘 보여주는 오래된 문헌 가운데 하나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 《고백록》이다.

(...) 당신은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않았습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당신(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늦게 이루어지는 반추속에서다. 배움이란 늘 늦게 되새겨보는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고, 과거는 현재에 반복됨으로써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반복의 체험을 우리는 프루스트 Marcel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유명한 마들렌 과자 체험에서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마들렌 체험은 어른이 된 후반복한 마들렌 체험 속에서야 비로소 그 행복한 비밀을 알려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어떤 것을 겪을 당시엔그 의미를 모르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반복할 기회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된다.

과거란 먼지 쓴 유물처럼 사망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함을 통해 현재에 반복된다. 과거를 다시 시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오늘을 위한 역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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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체험은 계획적인 공부거리가 될 수 없다. 세계안에 나 있는 심연들 때문에, 우리가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의 모습은 없고 파편들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세계의 탐색자를 재촉하기보다 여기서 그냥 쉬라고 말한다. 보라, 세상은깨어졌다. 그 파편들이 아름다우니, 이제 조개껍데기들이 빛을 반사해 우주로 돌려보내는 아침이면 하나씩 주워보자. 그리고 조각들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보자. 하나의 세계가 당신의 손안에서 꼬리가 아름다운 별처럼 태어나 바람을타고 움직이며 기분 좋은 궤도를 만들 때까지. 그 별이 궤도를 다 돌면 하루가 지나는 이 세계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다.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희망하는 ‘읽기‘이다.

아득한 옛날 우주에서 두 번째로 똑똑한 컴퓨터인 ‘깊은 생각‘에게 사람들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컴퓨터는 750만 년 동안 연산한뒤 답을 주면서 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답은 ‘42‘. 해답은 얻었지만 도무지 왜 ‘42‘가 해답인지 이해할수가 없다. 컴퓨터는 말한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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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高不用鐫頑石명고불용전완석路上行人口是碑노상행인구시비

이름이 높으면 돌덩이에 새길 필요가 없다.
오가는 사람들의 입이 바로 비석이다.

조선 중기 선비인 박수량(朴良, 1491~1554) 묘소 앞의 비석은 어떤 글자도 새기지 않았던 까닭에 백비(전남 기념물 제198•호,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소재)라고 불린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그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기념물이라 하겠다. 조정에서 참판, 판서 등으로 38년이나 근무했지만 자기 집 한 채 없었고, 죽은 후에는 장례 비용이 모자랄 정도였다. 게다가 유언마저도 청백리답다.
"내가 외람되이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로 묘비를 세우지 말라."

긴 시도 있고 짧은 시도 있었다. 그럼에도 한 편의 시 속에서절창(絶唱: 가장 잘된 부분)은 결국 한두 줄이다. 나머지는 절창을위한 수식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속에는 그 한두 줄만 남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한두 줄은 단순한 한두 줄이 아니라 그 시의 전부인 셈이다. 따라서 광장의 글판 역시 두 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山不在高有仙則名산부재고유선 즉명水不在深有龍則靈수부재심유용즉

신선이 산다면 명산이요
물이 얕아도 용이 머문다면 명천이다.

어떠한 두려움도 갖지 말고 홀로 우뚝 설 것이며 세상에나가지 않고 숨어 있어도 번민하지 말라는 "독립불구 둔세무민"을 21세기에 좌우명으로 실천하고 있는 이가 조용헌 선생이라 하겠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얽매여 살지 않기 때문에 자기 할 말은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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