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다. 환자식이 아니라 흔한 집밥을평범하게 먹고 싶다. 혼자서 쓸쓸하게 먹는 게 아니라 많은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먹고 싶다. 기저귀에 싸기는 싫다. 대소변은 화장실에서 스스로 시원하게 보고 싶다. 부탁하지도않은 재활은 하기 싫다. 누군가 맘대로 만든 일정표 때문에내 생활 리듬이 흐트러지는 게 싫다. 그보다는 낮잠을 즐기고 싶다. 입 안 가득 과자를 먹고 싶다. 옛날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날씨가 좋으면 훌쩍 나가서 계절의 흐름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익숙한 동네에서 마지막까지 나답게 살고 싶다. 모르는 장소에서 쓸쓸하게 죽기보다 낯익은 사람들이 많아 안심할 수 있는 곳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고 싶다. 만약 ‘요리아이‘에 이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이처럼 당연한 바람과 생활을 ‘가능한 지원하는 것이겠습니다. 우리는 고령자를 부담스러운 짐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격리하지 않습니다. 구속하지 않습니다. 약에 찌들게 하지 않습니다. 노화의 시간과 리듬에 어우러지며 고립되기 쉬운 어르신및 그 가족들과 함께합니다."
더 이상 손 쓸 수단이 없어졌을 때야말로 자유롭게 해방되었습니다.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르신과 나, 두 사람의 ‘바람‘이 성취되지 않을 때, 그 너머에서 ‘해주다‘와 ‘받다‘를 뛰어넘어 서로 돌보는 상황이 태어나는지도 모릅니다.
어르신들을 돌보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세계와 개념이 일치하는 순간. 실천과 언어가 동기화된다고 하면 될까.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내 기술이 향상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 느낌은 때로 나를 ‘다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공부한 지식에 어르신을 끼워 맞춰서 내가 다 이해한다고생각했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태도는 어르신들에게 있는 ‘저항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알아주면 좋겠다. 하지만 너무 쉽게 알아서는 안 된다‘ 어르신들에게는 그런 감정이 있는 것 같았다. 닥치는 대로 ‘이론‘을 머릿속에 담으면서 ‘육성‘으로 부딪쳐본다. 내게 돌봄이란 그런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간섭을 받는 할머니는 점점 이상해졌고, 간섭하는 나 역시점점 이상해졌다. ‘사람을 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다. ‘나 역시내 뜻대로 할 수는 없다. 상냥하게 대하고 싶지만, 상냥해질수 없다. 느긋하게 대응하고 싶지만, 마음이 조급해진다. 내속에 숨어 있던 폭력성이 드러날 것 같아서 스스로가 무서워진다.
나는 점점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 나를억제한 것은 할머니의 슬픔 가득한 말이었다. " "내게도 아직,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왜...왜...." 할머니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호흡에 맞춰 훌쩍거리는 콧물. 할머니는 점점 리듬감 있게 훌쩍거렸다. 리듬은 허밍으로 바뀌었고 허밍은 소프라노의 멋진 노랫소리로 변화해갔다. 할머니는 자신의 노랫소리에 힘을 얻었다. 슬퍼하던 표정은 후련해졌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겨우 몇 분동안 벌어진 일은 나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때껏 나는 재택 돌봄을 하려면 일종의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바로 혼자 죽을 각오다. 당사자와 돌보는 사람, 모두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그렇지만 최근 들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죽을 때는 언제나 혼자다. 혼자 죽는 건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제어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집에 돌아가니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이 문장에는 사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지 않은가. 나 자신이 홀로 생활하는 어머니를 돌보게 되면서 생각이바뀌었다. 좀더 마음 편하게 집에서 죽어도 된다고.
할머니는 ‘죽음‘과 맞바꿔서 마스크를 벗은 게 아니었다. ‘연명‘을 원하지 않아서 산소마스크를 벗는 선택을 했다고는생각할 수 없다. "아무튼, 싫어."라고 했던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싫어‘를 따르는 결정이 있었던 것 같다. 그 결정은 ‘미래‘로부터 ‘지금‘을 생각하지 않는, ‘지금‘으로부터 ‘미래‘를 예상하지 않는, ‘지금‘만을 붙잡으려하는 육체에서 비롯된 염원 같았다.
‘노화=부자유‘라는 등식이 뇌리에 새겨졌다. 내 착각이었다. 입보다 유창하게 말하는 눈빛.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동자.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무당과도 같은 말솜씨. 독창성넘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의력.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혼란. 자신의 위기를 남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감각. 신념으로 가득한 주관. 추종을 불허하며 뻗어나가는 사고. 순발력 있는 지성. 체력과 비례하지 않는 지속성. 시간과 공간을뛰어넘는 도약력.
앞선 문단의 내용은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노쇠한 사람의모습을 긍정적으로 바꿔서 적어본 것에 불과하다. 노쇠한 몸에는 우리에게 없는 약동이 있다. 그 약동은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은 개념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 같다.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준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나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딘지 모르면 상황에 맞춰 언행을 주의해야 한다는 규율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설령 누워서만 지내게 되어도 정신까지 그 자리에 묶여 있지는 않는다.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림으로써 부모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선하다. 분노와 증오에서 잘 벗어나게 되고, 기쁨을 느끼기 쉬워진다. 내가 지니고 있던 자기 개념이 무너지는 동시에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했던 규범에서 해방된다. 나라면 이래야 한다는믿음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변화하여 새로운 ‘나‘로 바뀔 뿐이다. 돌봄이란 그 과정을 함께하는 일이 아닐까.
몸이 점점 자유롭지 않게 되면서 사회의 개념적인 것에서점점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늙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쇠의 세계란 과연 어떤 곳일까. 그곳이 어떤 곳이든 ‘늙음‘이란 ‘노쇠=기능 저하‘라는 등식에 전부 담을 수 없는 생기 넘치는 과정이다. 호들갑스럽게말하면 번데기 속에서 몸이 걸쭉하게 녹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듯한, 그런 역동적이고 극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어르신들이 돌봄을 기꺼이 받지는 않았다. 돌보는나도 돌봄을 기꺼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일이었다. 노쇠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몸에 손대게 한다. 그 몸을 맡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손을댄다.
그렇지만 나는 바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다는 점이 우리를구제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떠한 방책도 남지 않았을 때 시작되는 협력 관계와도 비슷하다. 잘난 체라고는 하지 않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서로 협력한다. 서로에게 큰기대를 품지 않은 채 당면한 일과 마주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에는 수용이나 공감과는 다른 긍정이 존재한다.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안녕히‘라며 작별조차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음. 둘이서 하나의 행위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합의‘하는 것부터 시작하는게 마음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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