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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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상실의 시대를 고등학교때 읽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대부분의 다른 고등학교들처럼 야간자습이 있었고, 어느 야간자습처럼 야간자습시간에는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약간은 모범생이었으나, 모범생이라고 해서 딴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도리어 모범생처럼 보이는 학생일수록 감독 교사의 눈초리를 쉽게 벗어나서 딴 짓을 하기가 편하다. 나도 일종의 그런 학생이었고, 몰래 판타지 소설을 책상 서랍에 숨겨서 읽거나 혹은 일본 소설책들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각종 소설을 섭렵하던 어느 날, 어느 학생이 쉬는 시간에 이 상실의 시대, 를 꺼내놓고 읽는 거지. 주워들은 지식으로 저 책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 와 그리고 책에 대해서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 학생에게 다가가서는 말했다. 너도 하루키를 아냐고. 그 학생은 당연히 안다는 듯 자신의 책을 들어보이고는 말했다. 이 책 완전 야설이라고 말이지. 그때만 해도 그저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제대로 읽지는 않았던 나는 야설이라는 말에 애매하게 동의를 표하면서 이 책을 혹시 빌릴 수 없냐고 물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책을 빌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하루 동안 나는 이 상실의 시대, 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고야 말았다.

 

그날 새벽을 기억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무래도 좋은 대학교에 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다른 고등학생들처럼 야간 자습이 끝나도 집에 와서 조금은 공부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었다. 물론 반은 일종의 강제성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렇게 앉아있는다고 해서 내가 공부를 그리 많이 하는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시간은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보내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었지만 그날 새벽에는 달랐다. 나에게는 그날의 야간자습시간을 지겹지 않게 보낼 수 있었던 책, 상실의 시대, 가 있었고 아직 뒷 부분은 덜 읽은 상태였다. 그래서 밤에 몰래 책가방에서 이 책을 몰래 꺼냈고, 뒷부분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결국 끝까지 다 읽고나서는 이상한 허무함에 사로잡혀서 잠이 들었고, 그리고 그 다음날 원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어때, 정말 야하지? 라고 묻는 그 학생에게 나는 와, 정말 야하더라, 라는 말로 대신하고 다시금 자리에 와서 앉았다. 확실히 성적인 묘사가 많기는 많은데.. 그리고 주인공의 여성편력이 부러운 수준을 넘어서 무슨 종마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마음 어디선가는 그날 새벽에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느꼈던 허무함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생물 수업을 들을 때, 조별로 모여서 모형을 만들 일이 있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위하여 모인 자리에서 어느 순간 하루키의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하루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했다. 그때 나는 계속 처음 나에게 책을 빌려주었던 학생의 야설이다, 라는 평가에 신경쓰고 있었는지, 정작 하루키라면 별로 신경도 안 쓸 부분에 도리어 내가 변명을 하면서 하루키의 작품의 대단한 것은 분명 성애 묘사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 부분들이 어느 하나도 빠질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앞 뒤 문맥과 흐름을 따져보면 그 성에 관련된 부분이야말로 진실로 20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그런 부분이라고 말이지. 그런데 사실 말하는 나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 당시에는 몰랐다. 갓 대학교에 들어온 내가 20대의 상처와 방황이 무엇인지 알게 뭔가. 게다가 그 방황의 끝에 어떤 성적인 것이 있을 거라니. 내가 말해놓고도 참 뻔뻔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말은 완전히 그르지는 않았다. 대학교에 진학하면 그 전까지의 자신을 쇄신하겠다는 듯이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노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진학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부류도 있는 법이다. 대부분은 도리어 후자쪽에 더 가까웠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수업을 듣고 밥을 먹으며 지내게 된다. 그저 탐색해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몇 몇 그룹도 생기게 되고 동아리에도 들게 되고 그렇게 되지만 끝내 그룹이나 동아리에도 들지 않는 학생은 그야말로 뿌리 뽑힌 풀처럼 휘적 휘적 캠퍼스를 걸어다니게 되는 것이다. 전자라고 해서 딱히 스스로가 쇄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 을 읽으면 주인공인 이명준은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게 되는데,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세계, 그러니깐 남한도 북한도 아닌 곳에 간다고 해서 내가 나 아닌 그 무엇인가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대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환경에 처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 전에 살아갔던 것 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비록 어느 정도의 변주가 있더라도.

 

나는 후자였고,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하지만 결국에는 동아리든 뭐든 아무것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멍하니 도서관 정문 계단에 앉아서 캠퍼스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도서관에 있지 않으면 보통은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이랍시고 만들어 둔 공간에서 드러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이런 나의 활동은 일종의 '어쩔 수 없음' 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한편으로는 외로움에 시달려야했다. 사실 손만 뻗으면 바보취급을 받든 똑똑한 사람취급을 받든 어떻게든 다른 학생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일들이 나에게 이르게 되면 모두 무의미한 것 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아무런 시도를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 이르면 그랬다. 하지만 무의미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나에게 어떤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외로웠다.

 

어느 새 나는 저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와타나베를 닮아갔다. 적당히 냉소적이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그리고 귀찮음을 못이겨 아무 책이나 펴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그런 학생 말이다. 성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제법 많이 닮았을 것이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것도 그렇고. 아, 그렇다. 이상한 말투는 책을 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문어체를 괜히 쓰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와타나베가 마의 산, 위대한 개츠비, 를 들고 읽을 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선, 을 펼쳐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점차 이런 생각이 든거야. 이런 게 20대의 방황인가, 하고. 음.. 20대의 상처나 방황이라고 하면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는데 점장에게 돈을 제대로 못받았다거나, 돈이 없어서 휴학을 한다거나, 여자친구랑 사귀다가 결국에는 헤어지거나. 그런데 사실 이런 구체적인 것들만 20대의 상처는 아닐 것이다. 도리어 좀 더 포괄적으로, 그 어떤 상황이든지 외부의 어떤 상황과 본인의 생각의 엇갈림이 가장 주요한 상처로 작용할 것이다. 혹은 자신의 내재적인 성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근원적인 고독감.. 그 언저리를 엿보는 것도 상처로 작용할 수 있겠고. 이런 상처들이 실제로 상실의 시대, 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알 수 없는 조급함과 방황의 근원이 될 것이며 그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어떤 자기 파괴적인 성애에 몰두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며 나의 상처의 근원이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될 때 적어도 순간적으로는 고독과 허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테니까. 그때서야 왜 와타나베가 그렇게 성애에 몰두했을까, 이해가 갔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와타나베의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와타나베와 같은 학생은 실제론 인기가 별로 없다, 풋. 설령 내가 인기가 좋았더라도 저런 방식을 따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의외로 순정파거든, 하하. 어쨌든, 와타나베의 옆에는 나오코와 미도리가 등장하지만 내 옆에는 그녀들 중 어느 누구도 등장하지 않았고.. 그 후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대학교로 떠나게 된 후에도 별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잃으며 살아갔다. 여전히 나는 허무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끔 카페에서 다리 꼬고 책을 펴고 읽으면서. 그런 공허감에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이끌리기도 하지만, 알잖는가, 아무리 빛나는 별이라도 가까이 가서 보면 가스덩어리거나 혹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나는 내 허무함을 가슴 한 구석에 안으며, 하지만 지나치게 의식하지는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삶을 살아가기에 잃어버린 것들을 추억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젊은 애가 벌써부터 이런 허무주의에 빠져서야 쓰겠냐, 라는 말을 할 지도 모르겠다. 외롭다고? 그럼 밖에 나가서 친구를 사귀어라. 술도 마시고 어울려 놀면 되지 않느냐. 너만 바뀌면 되는 거잖아. 애인을 사귀고 싶다고? 소개팅, 아니 헌팅이라도 하고 그런 말을 하는게 어때, 등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삶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 가끔은 사무치는 근원적인 고독에 몸부림치지만, 그런 고독이야말로 내 삶을 단련시켜주는, 그리고 마음 속 비원에 끊임없이 연료를 제공하는 불과 같은 것이기에. 너무 현실에 매몰되지 않게 나를 잡아주는 방향틀이기에 말이다. 사람들은 쉽게 너만 바뀌면 된다, 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를 바꾸는 게 무엇보다도 어려운, 그리고 내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릴케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그의 말테의 수기, 에 적은 바에 따르면 지금의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르다면 이전의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와는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미 바뀐 사람일테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굳이 말을 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앞으로도 내가 바뀔 거라면,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르는 사람이 될 터인데, 뭐하러 수고스럽게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들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미도리나 나오코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사회나 학교에서 만난 인간관계 모두를 포기할 정도로

소중한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너무 늦지는 않게.

 

 

 

 

 

 

 

 

 

 

덧.

 

실은 10000명 방문 기념으로 만 명이 모이면 마왕이 소환되지, 라는 제목의 페이퍼로 질의응답이나..[...] 해볼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런 질문도 안달리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게다가 내가 무슨 질문이든 다 답할 수 있을 거라는 장담도 못하겠으니. 언제나 넷에서 글을 쓸때는 현실에서 내가 뭘하며 살고 있는지는 가리게 된다. 신비주의라면 신비주의겠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나와 여기 서재에서 끄적거리는 내가 다른 사람은 아니다. 어쨌든 만 명이다. 얼마나 오래 서재에 글을 올릴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많이 찾아와주는 것은 썩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래서 이 글로 이기적인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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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24 19:55   좋아요 0 | URL
가연님. 마침 책을 사려고,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한 편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과연 나와 맞을까 생각하던 차에 가연님께서 <상실의 시대> 리뷰를 써주시니 저는 감사하며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겠습니다. 저는 야자 시간에 아주 당당하게 소설을 꺼내놓고 읽습니다.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는 수준은 아니지만 삐딱하게 읽고 있어도 아무 말도 안 하셔요. 감독 선생님께서 국어 선생님이어서 그런가. 야자를 많이 빼먹어서 그렇지, 야쟈시간에는 항상 책만 읽습니다. 심각합니다. 시험 한 주 전에도, 아니 하루 전에도 책만 읽습니다. 공부를 안하는 거예요. 이젠 <상실의 시대>를 대놓고 읽어야 겠네요.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표지가 좀 더 세련되게 재출판(?) 되었으면 좋겠어요. 신경숙의 옛 소설들과 하루키의 옛 소설들은 표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미루고 미루네요.

그런데... 가연님 남자이십니까? 와타나베... 하면 남자 이름일텐데요. 음.

가연 2012-06-24 20:10   좋아요 0 | URL
ㅎㅎ 리뷰가 아니라 일종의 이기적인 잡담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책에 얽힌 저의 이야기랄까. 아무래도 그냥 잡담하는 것은 어색하니깐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네요. 음..ㅎㅎ 지금 나이때에 읽으시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이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답니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작정하고 서평을 못쓰게 되는 그런 책이 되었네요. 하하, 시험 공부를 그렇게 안하시나요ㅎㅎ 음.. 어서 공부를 하세요,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을 듯 합니다만..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릴 입장이 못되는 편이라..ㅎㅎㅠㅠ 저 스스로가 딱히 공부를 별로 안하는데 다른분보고 공부를 하라고 할 수는 없네요, 아하하. 지금도 이렇게 놀고 있는데ㅠㅠ 그래서 소이진님께 조언을 하는 것은 다른 분들의 역할로 맡기고, 풋. 저는 개인적으로는 표지가 저 상태 그대로였으면 좋겠네요.

저는 남자랍니다. 가연이라는 넷에서 쓰는 이름때문에 여자로 오해를 많이 받지만.. 몇 번이고 글들에서 밝혔던 것 같은데..ㅎㅎ 바로 아래에 썼었던 현대 물리학에 관한 책의 글에도 밝히기도 하였구.. 한 두번은 대놓고 밝히기도 하고... 혹시나 다른 분들이 오해하실까봐 성별은 꼭 밝히는 편이에요. 그런데 쓰다보니깐 본의아니게 소이진님께 낚시를 한 기분인데요, 풋. 죄송하네요.

이진 2012-06-24 20:16   좋아요 0 | URL
낚시까지는 아니고 말입니다.
글을 너무 잘 쓰셔서 남자라곤, 아 닉네임 때문이었나 ㅎㅎ
다락방님과도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걸 보고는 여자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흠. 밑에 노란띠만 없으면 괜찮을 거 같긴 한데 말입니다.
요새는 리뷰가 써지는 책을 만나질 못하고 있네요.
확실히 신간평가단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니 아예 리뷰를 안 써버리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후후. 알라딘에 리뷰 기능이 있던가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2-06-24 22:06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저는 남자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곤 합니다. 그걸 더 좋아하기도 하고....쿨럭.....( ") 소이진님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잖아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

가연 2012-06-25 10:2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ㅋㅋㅋ 남자도 글잘쓰는데요, 뭐ㅎㅎ 소이진님도 남자 아니십니까, 풋. 닉네임때문에 아마 여자로 착각하셨을듯. 다락방님..은 아래에도 쓰셨듯 스스럼없이 대화많이하시는데요 뭐ㅎㅎ

노란띠는 벗겨낼 수 있을거에요ㅎ 즐겁게 읽으세요.


다락방님//ㅋㅋㅋ 왜요, 저는 제가 특별하여서 저랑 스스럼없이 대화한다고 은근히 좋아했는데, 풋. 전혀 특별한 게 아니었군요. 여, 역시 인기쟁이 다락방님[...] 아하하하하하하

프레이야 2012-06-25 10:24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표지가 그런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한 명이에요^^
한참 세월지나 요즘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저도 제 자신이 궁금해지네요.
아무튼 가연님께 너무 늦지는 않게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가연 2012-06-25 10:31   좋아요 0 | URL
ㅎㅎ언젠가 오겠죠? 풋.

저는 정말 많이 읽었는데.. 항상 같은 기분으로 마무리짓게 되더군요. 좀 더 지나서 읽으면 다른 기분일까요. 이건 여담인데 최근의 1Q84빼고는 가장 잘 쓴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다락방 2012-06-25 11:04   좋아요 0 | URL
1. 가연님 특별한거 맞아요.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2. 저도 아웃사이더 서재가 더 좋아요.

3. 배고프네요. ㅜㅡ

2012-06-26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티티카카 2012-06-25 13:5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닉네임이 아니라 문체 때문에 여성분이신 줄 알았어요..허허
제가 지금 안고 있는 고민과 비슷해서 덧글로 인사 남겨봅니다~
하루키 잡문집 보고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는데 들어오길 잘했네요 후후

이진 2012-06-25 18:19   좋아요 0 | URL
티티카카님, 나두나두!
문체가 여성스럽잖아요.
왠지 이런 문체보면, 수다쟁이님도 그렇고, 여성스러워요.
뭐랄까 남성스런 투박함이 없는 세련된 문체랄까요. ㅎㅎㅎㅎㅎㅎ

가연 2012-06-26 00:4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아하하ㅋㅋ 사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로서는 어째 성차별적인 말씀이 아닌가, 하고 지적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네요, 푸하하. 아, 농담이에요. 하지만 저로서는 글을 쓸 때 정말 작정하고.. 필요할 때에 사용할 경우가 아니면 기교를 여간하면 빼고 쓰고 싶어서..ㅎㅎㅎ 굳이 문체에 대한 평을 듣자면 담백하다는 말을 듣고 싶긴 한데.. 세련된 문체라는 말씀에 감사드리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구만요, 쿡.



티티카카님//제 문체가 그런 경향이 있나요ㅎㅎ 사실 저도 애써 부정하지만 좀 여성스러운 문체같다는 생각을 가끔은 해보긴 하는데, 문체가 좀 본인의 성향과 약간 닮는 부분도 좀 있으니.. ㅎㅎ 아무래도 이십대나 삼십대초반에는 이런 저런 고민이 생기게 되지요.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키잡문집은 정말 빠심[..]을 모아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2012-06-29 21:55   좋아요 0 | URL
너무 늦지는 않게.. 란 말이 와 닿네요.^^

가연 2012-06-30 04:48   좋아요 0 | URL
요즘 쫌 외롭나봅니다, 푸하하하하. 쓰는 글마다 마지막에는 애인있었으면, 이런 식으로 끄적거려놓으니, 지금 와서 읽으니 매우 부끄럽네요.

風流男兒 2012-07-02 23:34   좋아요 0 | URL
아흐, 이 글 좋아요. 흐흐.
연애는 언제나 옳은 건데, 아흑. 뭘 생각해도 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찌릿하고 짜릿했던 감정들이 막 떠올라요.

어서 하세요 ㅋㅋㅋ 길던 짧던. 푸핫 ;;;;;;;;;(가관인 결론을 용서하세요 ㅎㅎ)

가연 2012-07-03 10:44   좋아요 0 | URL
하하, 연애는 언제나 정의인가요? 풋. 감사합니다, 곧 하겠죠 푸하하.

희선 2013-02-22 01:20   좋아요 0 | URL
아무리 빛나는 별이라도 가까이 가서 보면 가스덩어리거나 혹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멀리서 보며 좋아하는 거 괜찮지 않을까요, 그 반짝임이 좋으니까


상실의 시대는 남자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와타나베는 남자니까^^
저도 이 책을 읽었지만, 겨우 한번밖에 안 봤습니다(여러 번 읽은 책이 그렇게 많지도 않군요) 그걸로 다 알지도 못했고...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작가 가운데 가장 처음 알았기 때문에
그냥 관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책도 여러 권 사기도 했고...

다른 말을 더 쓰고 싶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좋은 말은 없지만 여기까지입니다


희선

가연 2013-02-22 01:38   좋아요 0 | URL
아하하.. 저 문맥에서 스스로를 별에 지칭한 것 같기는 한데... 생각해보면 저는 가스덩어리라기보다 블랙홀이라... 푸핫. (사실은 블랙홀이 더 마음에 든다는게 함정)

옳은 말이세요, 와타나베는 남자니까ㅎㅎㅎ 저는 이번에도 또 봤어요. 읽을 수록 중반까지는 막 가슴졸여가며 읽는데 그 이후에 그냥 화악... 가라앉아버리는 기분이에요

여자입장에서는 이런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책이 뭐가 있을까요?
 
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전현희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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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에 이벤트 호라이즌, 이라는 영화가 개봉한 적이 있다.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은 블랙홀의 사상의 지평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바로 그 용어를 차용한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얼핏 보면 SF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고어한 호러영화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 2040년에 이르러 우주 워프를 실험 중이던 어느 우주선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후 7년 뒤에 갑자기 해왕성 부근에서 그 워프 우주선이 등장한 거야. 우주선에서는 잡음에 섞여서 여러 전자파들이 날아왔는데,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Liberate me나를 구하라'라는 문장 뿐이었고, 구조해달라는 그 말에 따라서 구조선을 보내어 워프 우주선을 도우려고 했는데..

 

실상은 그 워프 우주선은 지옥에 워프하였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구조선의 승무원들은 워프 우주선에 오르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사악한 환영에 시달리면서 미쳐가고 있었는데, 겨우 그 워프 우주선의 항해 일지를 되살리는데 성공하고는 함께 보고 만다. 그런데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정말 끔찍한 일들이었다. 머리에 입으로부터 쇠꼬챙이를 찔러넣거나, 채찍으로 두들겨 상처를 내거나, 서로 잡아먹고 혀를 뽑는 등.. 수많은 끔찍한 일들을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워프 우주선의 승무원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선장이 자신의 눈알을 도려내어서 들고는 히죽 웃으며 구조선의 승무원들에게 말한다.

 

Liberate tetume ex inferis지옥에서부터 네 자신을 구하라

 

지구에서는 잡음 때문에 Liberate (tetu)me (ex inferis)라고 들렸던 것이다.

 

***

 

  우습게도 나는 이 책, '우주로부터의 귀환' 을 읽으면서 저 영화 이벤트 호라이즌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호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대부분의 호러영화는 그저 눈을 감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는 제목에 낚여서 잠깐 보고 말았다. 그렇다고 끝까지 다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잔인한 부분은 그냥 뛰엄뛰엄 보았다. 하지만 저 장면의 임팩트는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실제로 근미래에 워프 기술이 개발된다면.. 저 영화의 상상처럼 워프를 통해서 인간의 지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절대악으로서의 지옥에 이동해버리는 경우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가치가 깨어지고 능욕당하는 그런 곳 말이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절대악이라던가, 절대선이라는 말과 같은 가치는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곳에서라도 물리법칙이 다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그런 가능성은 분명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로 남길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나는 불가지론자는 아니지만 불가지론에 대해서 긍정적이다.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언가, 신, 악마 등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들을 존중한다.

 

우주로부터의 귀환, 은 특히나 이런 불가지론쪽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원래 매우 박학 다식한 사람이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책들을 써내려가는데, 그 분야는 단순히 물리학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뇌사' 와 같은 저서에서 볼 수 있듯 생물학까지도 이르며, 과학 분야 전반에 걸쳐 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과학 분야의 저술이 그의 본령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인문학 전반과 정치에 관한 글들도 많이 써내려갔으며, 본인의 다양한 독서 편력에 대해서 책을 낼 정도로 박람강기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쓴 이 책은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우주비행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에 우주로 진출하였던, 그리고 달에 발을 디뎌본 그런 우주비행사들을 인터뷰하여, 지구와 비교했을때 우주의 느낌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우주에서 느낀 점은 없었나, 등에 초점을 맞추어 쓴 책이다.

 

인터뷰에 응한 우주비행사들이 거의 모두 공통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첫째로 지구는 그야말로 우주의 오아시스같은 존재이며, 우리가 이 곳을 벗어나서 살기란 힘들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며, 둘째로 우주에서 바라보았을때 지구의 환경오염이 정말 심각해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환경오염 이야기에 덧붙이면서 인간이 만드는 환경오염은 생각보다 크게 차지 하지 않고, 자연 그 자체의 위력으로 인하여 수많은 환경오염이 생길 수 있으니 무분별하게 환경절대론을 내세워서는 안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사실 우리가 인식하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이들이 우주에서부터 지구를 바라보았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우주, 라고 말을 하기에는 애매할지도 모른다. 전 우주적인 수준에서 본다면, 이들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았다, 라는 이야기는 집 근처 5분 거리의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마을을 조감하였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또한 책에서 보면 귀환한 우주비행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우주경험이 정말 유니크했다, 나가보지 않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등의 자신들의 경험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또한 정말 우리가 나가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인간의 인식을 너무 낮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 우주에서는 유일하게 지구가 오아시스이다, 환경 오염이 심각하더라, 등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는 없는 노릇이다. 책에서 인터뷰에 응한 한 우주비행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주비행을 다녀오기 전의 나는 rotten son of bitch였지만, 지금의 나는 그냥 son of bitch다.' 이 말은 거칠게 표현되어있지만 우주비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수 없다, 라는 말과 동일하다. 각 개인이 어떤 사건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인상은, 그리고 경험의 총체는 모두 다를 수 있을 것이지만 우주에 나가면, 그 무한한, 도저히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칠흑, 아니 칠흑이라는 말도 부족한 심연의 어둠을 마주하게 된다면 분명 자신의 내부에 그 칠흑에 대항하여 침잠할 수 밖에 없으리라. 침잠의 끝은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주비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 후에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신의 존재를 강하게 믿게 되어 전도를 다니고, 어떤 사람은 초능력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고, 환경 보호 재단을 설립하는 등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들 내부의 진실된 욕구를 따라서.

 

사실 자신 본인의 내부에 이미 속해있는 것을 끄집어 낸다는 것은 이전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좀 부족할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우주 경험이 본인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주에 다녀와서 전도를 하게 되었다, 환경 보호를 하게 되었다, 등의 일들은 그들이 원래 그런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내부에 이미 그런 마음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다녀오면서 목적 의식이나 방향성의 상실 이후에 찾아온 것이라고 말이다. 나도 이들의 말에 동감한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쫓는 것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구에서의 '나' 는 수많은 환경과 인습에 얽매여 나 자신 내부에 속해져 있는 것마저도 온전히 끄집어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타인의 욕망이며, 사회 문화적으로 터부시되는 것은 제한되며, 허용되는 것을 더욱 더 바라게 된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원하는 것은 명예인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충족되어지는 그 무엇인가? 하지만 우주공간에서는 그런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된다. 조금만 자칫 잘못하면 칠흑에 삼켜져버리기 때문에 그 어느때보다도 본인의 보존욕구가 강해지는 시점일테고, 그 어느때보다도 스스로 내부에 침잠하는 시기일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분명, 우주에 다녀오게 되면 그 전의 나와, 그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우주비행사들에게 저자는 끊임없이 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원래는 기독교 신자였던 사람들이 우주를 다녀와서는 대답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며 말이다. 우주비행사들은 이야기한다. 어느 신이든 우리의 인식이 달라서 여러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실제로는 하나의 존재일 것이다, 혹은 인격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는 이야기까지도 하였다. 그들의 대답은 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장, 진여와 생멸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진여, 진실된 자신과 생멸, 세속에 오염된 자신은 여래장 속에서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하나가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하나가 아니다. 이를 확대시켜서 전 인류는 각각 연결되어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가 아닌 개개인의 특성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우주의 시작에 관련된 그 무엇인가에 연관을 가진다는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우주비행사들의 대답은 위의 대답과 비슷했지만 어느 우주비행사는 이야기한다, 달에 착륙했을때 자신은 분명 신의 인도를 느꼈으며, 그 어느때보다도 신의 답을 잘 들을 수 있었노라고. 결국 그는 돌아와서 전도사가 되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조금 당황스러운 부분이 있다. 달과 지구가 다른 점은 많지만 아무래도 달은 중력도 적고 대기도 없다. 그렇다면 그의 신은 대기나 중력이 약해야 더 쉽게 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신이라고 불릴 수 있겠는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충하는 신이 과연 신인가? 신이 꼭 인격신이어야 하는가? 칼 세이건이 말한 것 처럼 자연 법칙을 신이라고 일컫는 것이 차라리 맞는 말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그 신이 우리 인간에게 호의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좀 더 나아가서, 비단 이 전도사가 된 우주비행사뿐만 아니라 다른 우주비행사들이 느꼈던 어떤 초자연적인, 신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한 어떤 존재는 과연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우리의 인지를 벗어난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을 무너뜨린다는 이야기이고, 무슨 짓을 해도 우리로서는 짐작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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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벤트 호라이즌, 에서 워프 우주선의 선장이 이 지옥에서부터 너를 구해라, 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영화에서는 끝까지 저 '지옥'이 무엇인지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직 절대악으로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종종 현실을 두고 '이 지옥같은 세상' 이라고 이야기한다지만, 그런 악은 저런 절대악에 비하면 그야말로 가소로운 수준일 것이다. 우리의 본능이 무한정으로 뻗는, 그리고 우리의 욕망들, 성욕과 살인욕구, 자살욕구 등이 무한정으로 치달리는.. 그런 곳에 비하면 이런 저런 금제가 현실에 걸려있다는 것이 그야말로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열릴 우주시대가 한편으로는 걱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에 발을 딛으며 영위하는 사람들과 우주에서부터 돌아온 사람들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칠흑같은 무한한 공간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들 내부의 진실된 무엇인가를 찾아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할 것인데.. 모든 사람의 마음 속의 욕구가 건전한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편의상 절대악이라고 규정했지만 그런 인간이 떠올린 가치는 전체 우주에서 본다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르고.. 그 우주의 본령에 따라서 인간의 어떤 인습과 상충되는 일이 생긴다면.. 이런 것들에 따르는 문제점들도 생길 수 있지 않겠는가.

 

우주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구해야 할 지옥이 될지, 아니면 이 지구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구해야 할 지옥이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우주가 지옥이 되는 것보다 지구가 전쟁과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지옥이 될 가능성이 더 높아보이지만.. 아니, 우주는 영혼의 지옥이 되고, 지구는 육체의 지옥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류에게 꿈이나 희망은 없는 그런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가 도래하는 거겠지. 그야말로 러브크래프트가 그의 저서에서 이야기한 크툴루가 깨어나서 전 세계를 뒤덮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일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판도라는 본인의 상자에 희망은 남겨두었다. 전 우주의 의지, 그리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무한히 많은 영역에 존재하는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손에 붙여져있다. 지금껏 인류는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며 꼴 사나운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 원시시대에서부터 한 발걸음씩 진보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이성과 과학은 진보해가고 있다. 과학 만능주의는 물론 경계하여야 할테지만, 그리고 이성이 어디까지 진보할 수 있는가, 에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우리 인간이 앞으로 진보를 더 이룩한다면 그 힘은 이성과 과학에 힘입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 이성과 과학이 인류 전체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인다면 분명 어떻게든지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주가 영혼의 지옥에 이를 정도의 상황이 된다면, 아무리 분열을 좋아하는 우리 인류라 할지라도 공동으로 머리를 싸매지 않을 수 없을테니 말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낀다. 우주 공간을 눈으로 직접 볼 때에 그 심연은 우리의 인식으로는 꿰뚫기가 쉽지 않기에 때로는 공포를 느끼고, 때로는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인들이 주술을 사용하여 날씨를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알 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든 아는 범위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 공포는 조금씩 맑게 개일 것이다. 이벤트 호라이즌, 의 지옥이 만약에 우리가 말로 서술할 수 있는 그런 지옥이라면 공포감이 덜할 것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극한의 공포를 영화의 주인공들은 느끼는 것일테고. 그렇다면 우리가 이 지옥에서 우리 자신을 구하는 방법으로는 인식을 다듬고 알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만이 남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의 인식과 백년 뒤의 우리의 인식은 분명 다를 것이다. 설령 우리가 당장은 고대인들처럼 알지 못하는 것들을 어떻게든지 인식의 범위 안에 구겨넣는것처럼 진행을 하더라도, 현대 과학이 '왜?' 라는 질문을 '어떻게?'로 병치시키며 그 답을 쥐어짜내는 것의 수준에 그칠지라도 그 언젠가는 우리가 왜, 에 대한 답에 그 진정한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 인류는 어떻게든지 살아남지 않을까. 무한한 칠흑에 맞서서, 지옥에서부터 스스로들을 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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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6-11 16:08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주인을 제대로 찾아갔네요. 훗 :)

가연 2012-06-11 20: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풋.

transient-guest 2012-06-12 07: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트란입니다. 다른 분 서재에서 보고 넘어왔네요.
이 책의 저자와 제목을 보고 바로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님의 리뷰를 보고나니 더욱 더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가연 2012-06-13 18:0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저자가 정말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저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며 읽다가 알아보았지요.

2012-06-17 0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17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3-10-17 01:01   좋아요 0 | URL
그 영화 무서울 것 같군요 도와달라고 해서 갔더니 지옥에 갔다 온 우주선이었다니... 도와주러 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살아서 돌아갔나요 그런 일 언젠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우주는 알 수 없으니까

우주에 갔다 온 사람과 갔다 오지 않은 사람 다르기는 하겠죠 언젠가 그렇게 되는 때가 올지도 모르겠네요 지구와 같은 환경을 가진 별도 찾아 낸다면 좋을 텐데... 지구도 별이기에 언젠가는 사라지잖아요 그때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지구와 같은 별이 아닐지라도 우주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혹시 바퀴벌레만 살아남는 것은 아닐지...^^


희선

가연 2013-10-22 12:46   좋아요 0 | URL
아주 잔인한 영화죠.. 무서운 영화라기보다는ㅎㅎ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일테니까 말이죠ㅠ 지구와 같은 환경을 가진 별이 있으면 어떨까, 싶지만 잘 모르겠달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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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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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요즘 세상은 정말 어려운 세상입니다. 여러 가치가 뒤섞이고 하나의 의견과 그에 반대되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명확한 기준도 설정되어있지 않지요. 사실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는 기준 따위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많은 사람들 모두에게 명확하게 적용되는 전가의 보도와 같은 기준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 자체가 어쩌면 오만일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것은 사회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어려워집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어떤 상황이 눈 앞에 닥쳤을 때 주의 깊게 생각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불가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하는데, 그 팔정도에는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넘어서, 바르게 보다, 바르게 생각하다, 와 같은 말들은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근본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와 같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이 바르게 본다, 바르게 생각한다, 와 같은 말에서 ‘바르다’ 라는 의미는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바르다, 와 같은 말이 상당히 애매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각 종교들에서는 자신들의 교리를 따르고 계율을 지키는 것, 혹은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종교를 믿지 않는, 그리고 설령 믿더라도 그런 종교의 역할이 아무래도 직장생활등과 같은 세속적 삶들 때문에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기가 어려워진 현대 사회인들에게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들릴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조금 진행시켜보면, 우리는 하나의 의미가 확실히 저 ‘바르다’ 라는 말의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면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지는 말자, 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복잡한 시기에 이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 출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 에서 이미 그의 현대 사회의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및 문제 제기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었지요. 하지만 그의 전작에서는 이런 저런 질문만 던져두고는 제대로 된 결론을 맺지 않았다, 라는 비판도 분명 있었지요. 이번에 나온 이 책에서도 여전히 확답은 내리고 있지 않지만, 이번 책은 전작과는 다르게 충분히 저자 본인의 의견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그 무게를 어디에 더 두고 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자는 비시장적인 영역이었던 새치기나 불임시술, 대리 사과 서비스와 같은 문제들, 그리고 생과 사의 문제에까지 자본주의가 침투한 현상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저런 문제들이 정말 팔 수 있는 물건들인가? 라고 말입니다. 저자 본인은 아무래도 전체적인 맥락으로는 팔 수 있는 물건이라고 보기 어렵다, 라는 입장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합니다만, 이는 그저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 와 같은 그런 고집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견에 대하여 합리적인 반박과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충분히 상대편 의견을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의지를 여러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표명하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 제기는 마이클 샌델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가 그의 저저 ‘거대한 전환’ 에서 팔 수 없는 물건, 그 중에서도 가장 존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인간이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전락해버린 그런 상황에 대해서 개탄한 적이 있지요. 이미 예전부터 팔 수 없는 물건과 팔 수 있는 물건에 대한 논의는 경제학계에서 있어왔던 것입니다. 이전에 출간된 ‘인지자본주의’와 같은 책들도 큰 틀은 그에 대한 논의였지요. 인간의 정동마저도 종속되어 자본의 지배하에 놓은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이 그와 같은 논의들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은 쉽게 어디서나 생각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가져왔다는 점이겠지요. 인간의 정동의 종속에 관한 문제나 팔 수 없는 물건인 인간이 상품이 되버렸다, 등의 논의는 좀 더 다듬어질 필요가 있으며, 단편적인 몇 부분의 예(스튜디어스가 미소를 ‘파는’ 등의 예)를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이 다가가기에는 좀 추상적이다, 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 다루고 있는 영역은 새치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인센티브, 결혼식 축사를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등의 영역이며, 매우 구체적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지요. 당신이 이제 결혼을 하는데, 당신의 친구에게 축사를 부탁했다. 당신의 친구는 매우 열심히 준비 하려고 했는데, 시간에 쫓기거나, 혹은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들만 생각이 나서 결국 인터넷으로 감동적인 축사를 구매했다. 축사를 받은 당일 당신은 너무 멋진 축사에 감격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친구가 인터넷으로 축사를 구매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의 기분은 어떨 것인가? 좋다면 왜 좋은가? 나쁘다면 왜 나쁜가? 이런 일이 허용되어져야 할까?

이제 와서 대부분의 것들이 사고 팔 수 있는 물품으로 변해가는 경향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현대사회는 어쩌면 이런 경향이 가속화되면 가속화될 것이지, 절대 줄어들지는 않겠지요. 앞서 현대사회는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이 팽팽히 대립한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돈을 잘 버는 것이 자신의 가치관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서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고, 심지어 그동안 팔 것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것 마저 팔 것으로 만들어 파는 현상에 대해서 감히 옳다,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다른 것이 ‘틀린 것’ 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대로 놓아두어야 할까요? 여기서 마이클 샌델은 두 가지의 반박 기준 틀을 제시합니다. ‘공정성의 문제’ 와 ‘부패의 문제’ 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자신이 가져온 다양한 예시에 대하여 저 두 가지 기준틀을 날카롭게 들이댑니다. 공정성의 문제는 과연 각 상황들이 정말로 공정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선택이 내려진 것인가? 그 선택이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일종의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줄서기와 새치기에 대한 문제를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과연 돈을 주고 먼저 목적지에 가는 것이, 즉 새치기가 얼마나 공정할 수 있을까요? 혹은 마약에 중독된 여자들의 불임시술에 대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마약을 찾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돈을 줄 테니 불임시술을 받으라, 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강요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부패의 문제는 공정성의 문제보다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정의하는 부패의 의미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부패는 ‘뇌물이나 불법 거래 그 이상의 것으로 사회적 관행이나 재화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가치를 합당한 수준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것에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것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지요. 앞서 친구의 축사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구가 인터넷에서 축사를 구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분명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축사를 돈을 주고 구매한 행위가 그 축사의 가치를 저평가시키게 되었기 때문에, 즉, 부패시켰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예로 드는 교황 집전 미사에 몇 배나 가격이 오른 암표를 주고 참가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과연 교황 집전 미사가 가지는 그 신성한 의미가 전혀 부패되지 않았다, 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앞서 바르다, 라는 말을 이야기하면서, 그 기저에 인간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를 꺼낸 바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가치, 라는 단어도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이 몇 번이고 앞의 두 문제들, 공정성의 문제와 부패의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저 인간의 가치, 라는 개념을 어떻게든 구체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사고 파는 순간 (생명보험이나 책에서 언급한 말기환금보험과 같은 경우) 과연 스스로가 존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신의 친구나 가족들과 맺어진 유대관계를 판매하는 순간 (결혼식 축사나 사과를 대신 해주는 서비스, 선물이 현금으로 건네어지는 경우) 과연 인간은 사회적으로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가 존엄하지도 않고, 사회로부터도 유리된 삶을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은 자신이 가치가 높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로서는 아마 아닐 것이라고 여기지만, 또 다르게 생각을 가지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금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과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가, 라고 말이지요. 그동안 경제학계에서는 도덕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부분이 점차 곪아서 드러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도덕과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경제학 부분에서도, 단순히 철학의 영역이라고만 단정 짓지 말고, 깊은 논의가 필요할 때가 다가온 것이겠지요.

 

  이 책의 제목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입니다. 원제인 What money can't buy를 그대로 옮긴 제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번역을 하였을 때 우리나라 말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중의성이 생겼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은 말 그대로 돈으로 구매할 수 없는 것들, 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돈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들, 이라는 의미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돈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으로 친구나 가족의 유대관계를 구매했다고 해서 과연 그 유대관계가 오래갈까요? 부패시킨다고 앞서 말했지요. 부패의 끝은 결국 삭아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돈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제가 이전에 읽은 ‘부채 그 첫 오천년’ 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경제학자가 아닌, 인류학자가 인류학적 접근으로 경제사를 조명한 책인데, 이 책의 결론은 원래 부채는 인간 저마다가 가진 고유한 특질에 따라 맺어진 자유로운 약속이었으니, 이제 그 의미를 회복할 때가 찾아왔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지는 부채를 ‘인정하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채가 인간성의 회복에 기여한다는 주장은 일견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서로 서로 상대방에게 감정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부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상대방의 감정이나 유대관계, 그리고 심지어 그 생명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팔 것으로 취급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각 개개인의 가치를 보존함과 동시에 상대방과의 (현대의 타락한 의미로의 부채가 아닌, 자유로운 약속이었던) 부채, 라는 이름의 유대관계까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면 갈수록 복잡해지는 이 현대 사회를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상대방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만큼,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스스로의 존엄성도 (동일한 인간이기에) 증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끝내 현대의 상품화의 가속화되는 경향에 휩쓸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외면한다면, 우리 자신도 이윽고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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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6-03 01:11   좋아요 0 | URL
이 책도 전작인 [정의란 무엇인가]만큼 재미있어 보여요. 일전에 경향신문에서 이 책의 리뷰를 보았었는데 그때도 그 리뷰 읽고 꼭 봐야지 꼭 봐야지 했었거든요. 가연님의 리뷰를 보니 또 불끈불끈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게다가 좀전에 경향신문에 무려 마이클 샌델 인터뷰가 실린게 아니겠습니까. 어제 연세대에서 있었던 그의 강연이 아주 좋았다는, 그런 기사와 함께 말이죠. 아..그러나 저는 이 밤, 몽실언니를 마저 읽고 자야겠어요. 그런데 몽실언니 슬퍼요. ㅜㅜ

가연 2012-06-03 13:23   좋아요 0 | URL
오늘 한 시, 지금 하고 있겠네요, 우리 마이클형이[..] 강남교보문고에서 선착순 백명의 싸인회를 하고 있을 것 같은데ㅎㅎ 저는 사람 많은 것은 별로 안좋아해서 가지는 않았습니다만ㅎㅎㅎ 연세대에서 강연을 했었죠. 인터넷으로 몇 몇 부분만 잘라서 봤는데, 음,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ㅎㅎ 마이클형이 우리 나라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것이 아니라서.. 학생들과 엇나가는 부분도 있는 것 같더군요.
어쨌든 이 책은 괜찮은 책입니다. 사실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 를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는 않았는데.. 이 책은 좋게 읽었습니다ㅎㅎ 지금은 몽실언니를 벌써 다 읽으셨을테구.. 음.. 저는 슬픈 책을 읽고 나면, 혹은 애잔한 결말이 나는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찡해서 걍 누워서 잠만 자면서 상상력을 발휘.. 하는 경우가 많은데ㅎㅎ

희선 2013-09-30 00:45   좋아요 0 | URL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마음...^^
어떤 사람은 그것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부채 그 첫 오천년’ 본 적 있는데, 저는 말 그대로 더울 때 부치는 부채로 생각했습니다
빚이군요 그것을 읽어봤다면 벌써 알았을 텐데... 언젠가 읽어봐야겠군요
다른 것도 천천히...^^

정말 지금 시대는 많은 것들에 값을 매깁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연 님이 말한 것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희선

가연 2013-10-03 21:11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에 저도 이 리뷰를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1년 후에 읽으니 기분이 뭐랄까, 내가 이런 글도 썼구나, 싶은 기분이 드네요.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김수영을 위하여.

 

 

 

 

1.

 

 

  이 책의 첫 부분, 프롤로그의 첫 장을 넘기며 저는 솔직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2011년에 어느 대학에 강의를 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시를 낭송합니다. ‘김일성 만세’. 그 후 강연장을 훑어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이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다고 느끼고는 다음과 같이 사유를 펼칩니다. 김수영이 시를 쓴 지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은 곧 50년 전의 화장만 바꾼 체제 논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 내면에 ‘모종의 검열 체계가 작동’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아직도 ‘정권을 공격하면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여기고 있다고 저자 강신주는 단언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렇게 주장하기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굴이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라는 말은 일단 저자 본인이 느낀 주관적인 감정이고 실제로 설문조사를 익명으로 진행하지 않는 이상 객관적인 근거는 될 수 없겠지요. 여기서 저자는 상당한 비약을 저지릅니다. 백번 양보해서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듣고 불쾌하게 느꼈다고 합시다. 그럼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이 불쾌하게 들렸다. 체제 논리가 여전히 청중들 속에 숨어있다. 청중들은 내면의 검열을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와 같은 흐름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김일성 만세, 라는 말을 듣고 실제로 내면의 검열 체계가 작동했는가, 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김일성이 실제로 싫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내면의 검열 체계의 문제다, 라고 보아야 할까요? 우리가 만들어진 이미지를 보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면 검열 체계의 문제로 볼 수 있겠지만 실제 나쁘게 볼 만한 상황을 겪고 난 뒤에 느끼는 감정은 내면의 검열과는 상관없는 부분이 분명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처음부터 당황스러웠던 감정은 글을 읽는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저자가 김수영을 좋아하는, 아니 ‘사랑’ 하는 것은 잘 알겠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이 굳이 다른 시인들과의 비교로 이루어져야 할까요? 저자에게 있어서 다른 시인들, 서정주나 노천명은 ‘인문정신의 차원에서는 구원될 수 없’ 으며 반면에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자유를 깨달은’ 성자와 같은 시인입니다. (물론 서정주가 권력의 편에 서서 안위를 도모한 것이 잘했다, 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김수영과 동시대에 글을 썼던 모더니즘의 기수들, 김춘수나 박인환도 강신주의 화살을 비켜가지 못합니다. 강신주에게 있어서 그들은 ‘내용 없이 이미지의 시만 남발하는 테크니션’에 지나지 않으며 김수영은 ‘혼자서 도는 힘을 획득한’ 존재입니다. ‘시의 모더니티가 시적 테크닉이 된 것이’ 과오로 여기는 사람이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날 선 비판을 하면서 김수영에게는 따뜻한 시선을 감추지 않습니다. 김수영의 트라우마로 아내 김현경을 지목하면서, 김현경이 김수영을 ‘배반’ 한 뒤(김수영이 죽은 줄 알고 김수영의 친구와 살림을 꾸린 일, 그리고 다시 합치자는 김수영의 말을 거절한 것 등)에는 더 이상 김수영은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김수영의 ‘아내에 대한 폭행’ 이나 ‘건강한 연애를 못’ 하는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앞의 김춘수나 박인환을 비판한 것은 그들의 시를 비판한 것이지, 그들의 삶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을 들을 수 있겠습니다만, 시인에게 트라우마는 그의 시작(詩作)에 있어서 큰 사건입니다. 그 트라우마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데 어찌 제대로 된 시의 평가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저 옹호글만 남을 뿐이지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언어의 위상, 이라는 말이 중간에 나옵니다. 모든 저작이 동일한 위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엄마를 부탁해, 와 같은 가벼운 소설, 무소유, 와 같은 수필 등이 바로 읽히는 작품이며, 카프카와 같은 소설가의 작품이나 진정한 시인의 대부분 시와 같은 작품이 바로 읽히지 않는 작품들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폐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소유, 의 저자인 법정 스님이나 엄마를 부탁해, 의 저자 신경숙은 진정한 수필가나 소설가가 아니란 말일까요? 위상이라는 말은 본디 높낮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사실은 격, 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지요. 보통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간의 관계에서 가지는 위치나 상태를 뜻하는 경우가 많으며 좀 더 확장된 의미를 살펴보아도 수학적으로는 어떤 국면에서의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책에서 쓴 ‘이런 작품들은(앞서의 카프카의 작품이나 진정한 시인들의 시) 이해는 힘들지만 내면을 뒤흔든다’ 와 같은 서술은 마치 그 이전에 언급된 무소유, 와 같은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상, 낮은 격을 가지는 것처럼 읽히게 만듭니다. 엄마를 부탁해, 나 무소유, 에 실린 수필을 읽고 분명 내면이 뒤흔들린 사람들도 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이 책은 이런 연유로 감히 말하건대, 그동안 강신주가 그의 저작들(철학 대 철학,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에서 보여 왔던 많은 오류들의 집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하지만 이런 당황스러움이 극적으로 반전하게 된 것은 부록으로 나누어준 시의 김수영의 사진을 본 뒤였습니다. 보통 글을 쓰면서 사진이나 다른 매체를 함께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김수영의 이 사진만은 이 글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의 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먼저 눈부터 살펴볼까요. 어딘가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입니다. 그러나 저 눈빛은 망상에 빠진 사람의 눈빛이 아닙니다. 의지를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쳐다보고 있는 무엇인가를 지상으로 끌어내리겠다는 결의가 담긴 눈빛이지요.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온 코는 저 코의 소유자가 고집이 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한 쪽 귀는 열려있지만 다른 쪽 귀 부분에는 손을 괴고 있지요. 손을 괸 부분과 얼굴이 만나 이루는 주름은 복합적인 감정, 짜증이 될 수도 있겠고, 고난을 뜻할 수도 있는, 혹은 타협하지 않는 성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아래의 팔자주름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깎지 않은 사자수염은 그 소유자가 자신의 외모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그리고 어쩌면 사납기까지 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전체적으로 저 사진에서 볼 때 이렇게 말하는 듯 합니다. '너는 한 번 그렇게 살아봐라, 내가 지금 널 지켜보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남자는 40을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된다는 말이 있던가요, 실제로 저 사진을 찍을 때 김수영이 40이었든 아니든, 자신의 외모에는 자신의 삶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 사진에서 드러나듯이 김수영은 진실로 다른 사람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굳건히 살아간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는 먼 곳을 쳐다본 것 처럼 자유라는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동시에 그 자유를 거짓된 자유가 만연하는 이 지상에 끌어내리겠다고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김수영은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주위의 다른 시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완성해나갈 때, 김수영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온몸으로 밀고 나갑' 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코처럼,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생각은 끊임없이 실천적 전망을 찾아나서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 문인들에게 때로는 사나워 보이는 표정 그대로 비판도 가하며 정권과도 끝끝내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런 그에게는 그의 시 폭포, 에서 볼 수 있는 부정적인 시어인 '나타와 안정' 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저 사진의 입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웃음을 짓는 듯 합니다. 비웃는 웃음과는 다른 건강한 웃음이 입가에 걸려있지요. 이는 자신처럼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격려가 아닐까요. 그리고 여기에 김수영을 닮아 그 자신의 힘으로 돌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발버둥을 쳐왔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이지요.

 

 

4.

 

 

  이 저작을 김수영에 대한 평전과 같은 종류의 책으로 본다면 분명 저자로서의 강신주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저작이 김수영에 대한 저자 강신주의 일종의 고백, 자신의 삶을 맡겨왔던 존재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고뇌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면 앞서 보였던 많은 오류들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그 수많은 오류를 이제 털어버리겠다, 라는 지향점의 표명이라고 말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김수영 혼자가 아닙니다. 시인 김수영과 그를 멘토로 생각해왔던 저자 강신주 모두가 이 책의 주인공이 되는 셈이지요. 강신주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삶에 김수영을 그동안 투영해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철학과 대학원 생활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담은 글이 좋은 평가를' 받는 생활이었고 자신이 생각을 말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실제로 강신주의 삶이 그랬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단순한 자기 위안으로 그치기 전에 강신주는 자신과 김수영의 공통점을 가져옵니다. 문단에서 벗어나 꼿꼿히 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주었던 김수영을 말이지요. 이 때 김수영은 강신주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지금 너는 스스로 도는 힘을 기르는 기로에 서' 있다고. 거기에 용기를 받은 강신주는 이 책의 끝마무리,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김수영을 만나지 못했다면 철학도, 글쓰기도 접었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강신주의 김수영에 대한 일견 지나칠 정도로 보이는 사랑은 그 자신의 삶에 대한 끌어안음이며, 김수영의 트라우마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그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지금에 이르러서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증명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김수영이 막상 지금의 강신주의 이 책을 본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신주가 스스로 생각한 것 처럼 그를 보고 자신의 길을 잘 따르고 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거릴지는 모를 일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마치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 과 같이, 꿈을 오랫동안 쫓아온 사람이 얼마나 그 꿈에 가까워 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겠지요. 큰 바위 얼굴, 의 어니스트가 이윽고 큰 바위 얼굴에 가까워졌듯이, 강신주도 이윽고 스스로의 발로 딛고 서게 된 것이지요. 그렇기에 강신주가 지금에 이르러 김수영를 떠나보내기로 한 것은 그야말로 올바른 선택으로 보여집니다. 자신의 멘토였고, 스승이었고, 닮은 꼴이었던 그를 떠나보냄으로서 이제야말로 저자 강신주는 온전하게 자신의 힘만으로 몇 번이고 이 책에서 그 스스로가 강조했던 단독성을 획득하게 된 것일테니 말입니다. 앞으로 혼자서 자전하게 된, 그리고 이윽고 혼자가 됨으로써 대가에 이르게 된 강신주의 다른 책들이 어떤 씨앗을 품고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그래서 강신주가 에필로그에서 굿바이, 라고 말할 때 저도 함께 같이 나직히 발음해보았습니다. 강신주에게는 굿바이 김수영이었으며, 저에게는 제가 의지하는, 그리고 스스로를 투영해보는 존재에게 언젠가 굿바이라고 말할 날이 올 테니.

 

굿바이, 굿바이.

 

 

 

 

 

 

 

 

 

 

 

 

 

 

 

 

p. s. 김수영 사진의 출처는 로쟈님 블로그.

       구글에서 검색했는데 마침 로쟈님 알라딘 서재가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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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29 18:40   좋아요 0 | URL
와- 정말 근사한 리뷰에요.

가연 2012-05-29 19: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꾸벅. 사실 방금전까지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고 있던 터라, 아하하.. 부끄럽네요, 풋.

웽스북스 2012-05-29 21:07   좋아요 0 | URL
정말 멋진 리뷰네요. 잘 읽었습니다.

가연 2012-05-31 08:44   좋아요 0 | URL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괜찮게 쓸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일개미 2012-06-03 04:00   좋아요 0 | URL
많은면에서 공감합니다. 굿굿!

가연 2012-06-03 13:18   좋아요 0 | URL
ㅎㅎ 아하하.. 부끄럽습니다. 일개미님께서는 어떤 리뷰를 쓰실지 궁금하네요.

꽃도둑 2012-06-18 13:50   좋아요 0 | URL
가연님. 아니 대장님!
저 리뷰 연장신청합니다~~ 무기한은 안되겠죠?...ㅋㅋ
이번 주는 도저히 시간 내기가 힘들 것 같고요 다음 주중에 올릴게요.
수욜이나 목요일 까지는 꼬~오~옥!(혹시 메일을 써야하는 건가?....)

아 그리고 리뷰 정말 디테일합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6월 선정도서 어쩌다가....가 되었네요....ㅎㅎㅎㅎ

가연 2012-06-18 18:22   좋아요 0 | URL
ㅎㅎ 메일쓰셔도 좋지만 여기다가 달아주셔도 괜찮죠. 그냥 가연이라고 불러주셔도 되는데ㅋㅋ 대장님이라니깐 기분이 묘하구먼요, 푸하하.

꽃도둑 2012-06-26 23:13   좋아요 0 | URL
대장님,ㅎㅎㅎ 리뷰 올렸어요..
늦어도 목요일 까지는 올리려고 했는데 오늘 필 받는 바람에...
대장, 수고가 많삼~ ^^

가연 2012-06-28 10:57   좋아요 0 | URL
확인했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ㅎ
 
현대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
션 캐럴 지음, 김영태 옮김 / 다른세상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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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 만난 여학생은 일종의 심해공포증과 우주공포증이 있더랬다. 깊은 심해나 우주 공간을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혼자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는 그런 공포증이란다. 나는 사실 심해나 우주 공간을 보면 항상 공간에서 내가 자유롭게 움직여가는.. (실제로 그렇게 움직였다가는 당장 이승을 하직하겠지만) 그런 상상을 자주 품었기에 바로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왜 우주가 두렵지? 왜 심해가 두렵지?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분명, 우주나 심해와 같은 공간을 두려워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공포증에는 여려가지 종류가 있잖는가. 뱀 등의 특정 사물을 무서워 할 수도 있고, 광장을 두려워할 수도 있으며 외국인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품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고소공포증이 없는 사람이 나를 보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인 이야기이다. 우주나 심해도 분명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리고 저 소개팅은 결국 잘 안풀렸다. 저 여학생이 저런 공포증이 있다는 말에 괜스레 호감이 안 간 것은 아니고, 내가 그저 너무 서투른 탓이다. 잘 될 수도 있었는데.. 라는 말은 항상 후회만 남긴다. 사실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 구석의 알 수 없는 망설임이 나를 성급하게 떠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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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책을 거의 안읽다가 요즘 들어서 다시금 책을 집어서 읽고 있는데, 사실 최근에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다큐멘터리 시청이 바로 그것이다. 칼 세이건의 유명한 다큐멘터리인 코스모스, 에서부터 우주의 끝을 향한 여행, 블랙홀의 수수께끼.. 뭐 대략 이런 제목이 붙은 다큐멘터리들을 섭렵하고 있다. 우주의 비밀을 찾아서, 라던가, 대충 저런 제목이 붙은 다큐멘터리들도 보고 말이지. 제목들만 봐도 알겠지만.. 그렇다, 나는 우주가 너무 좋다. 왜 학과를 물리학과나 천문학과를 택하지 않았을까, 주변 사람들이 의심을 품을 정도로 우주와 법칙을 좋아하지만 아쉽게도 수능을 칠 당시에는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던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진짜 경황이 없던 상태였기도 했다. 그리고 물리학과나 천문학과를 택한다고 해서 별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천문학과의 경우 그래프를 더 많이 본다. 천문관측을 절대 더 많이 하지 않는다, 던가)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현재 물리학과나 천문학과를 택하는 것은 그야말로 부모님의 가슴에 말뚝을 박는.. 그리고 본인의 미래에도 여간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한, 그리고 정말 유명한 대학을 가지 않는 한.. (설령 그런 유명한 S라던가 K라던가 Y 등을 간다고 하더라도) 쫌 흐린 구름이 드리워지는 상황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기에 아예 학과를 고를 때 생각에서 벗어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쩌면 내가 현재 우주나 물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저 내가 지금 속한 상황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만약 물리학과나 천문학과를 진학했다면 도리어 내가 지금 전공하고 있는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난 O이 제일 좋아'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쨌든, 설령 위에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분석한 것이 다 맞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금 물리학과 우주를 좋아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항상 나를 환상에 젖게 만드는 것은 일종의 꿈이다. 그러니깐 정말로 네 가지 힘이 통합된 만물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쿼크에 관련된 이론을 초기에 정립했던 머리 겔만은 이 말보다 Basic Theory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주장했고 나도 그의 말에 동감하지만..)이 만들어질까, 라는 그런 꿈말이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들도 우주에 관련된 것들을 쳐다보고, 시간이 나면 넷에서 양자론에 관련된 글들을 읽거나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수식을 살펴본다. 살펴본다고 해서 당장 내가 뭔가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책들도 이런 류의 책들을 읽게 된다. 당장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인 현대 물리학, 시간과 우주의 비밀에 답하다, 도 마찬가지의 책이고 말이지. 그러고보면 사실 이 책의 저자인 숀 캐럴은 정말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들, 스티븐 호킹이나 브라이언 그린, 미치오 카쿠의 대중적인 인기에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다. 나도 사실 이 책을 집어들고 저자의 소개글을 보면서 이 사람을 내가 어디서 본 적이라도 있던가, 라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으니 말이다. 최근에야 이 사람이 미국의 대학교에서 강의한 동영상을 조금 훑어보고는 유명한 사람이구나, 라고 깨달았으니 말 다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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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에 있어서 몇 가지 난제가 있다면 위의 통일장 이론이 그 첫번째 난제에 해당하겠고, 그 다음으로 시간의 화살, 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왜 시간은 미래로만 흐르는가? 한 번이라도 그것에 대해서 의심해본 적이 있는가? 왜 우리는 레너드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 이나 지금 끄적거리고 있는 이 책에서 말하듯 '미래를 기억할 수 없는가?' 물론 인간의 의식을 이론의 중심에 놓는다면, 문제들이 좀 풀려나갈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이미 종교나 철학을 통해서 찾아나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그리고 나같은 얼치기 과학자들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인간의 의식이 문제의 중심에 놓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물론 불가지론자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주장하고, 도저히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의 말이 그르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계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철학적인 견지에서야 자기 자신마저 부정되는 그런 회의주의의 극한에 이른다면 분명 이성의 한계가 찾아올 수 있겠지만 과학적인 견지에서의 한계는? 그야말로 블랙홀의 내부를 상상하는 것 정도가 한계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부분은 그저 한계로 내버려둘 것인가? 만약에 그렇게 한계로 내버려두었다면 스티븐 호킹이 그 유명한 호킹 복사, 블랙홀도 결국에는 증발할 것이다, 라는 발견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시간의 화살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의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현대 물리학의 여러 이론들을 집대성하여 대중들에게 접하기 좋게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여겨진다. 저자는 그야말로 종횡무진으로 고전역학에서부터 초끈이론에 이르는 길들을 달려나간다. 물론 결론은 없다. 가설은 있지만 그 가설을 뒷받침할 수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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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간 부분에 우주의 팽창에 대하여 다룬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블랙홀 전쟁, 이라는 책과 함께 읽는다면 많은 이해가 될 테지만.. 여기서 끄적거리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니구.. 우주의 팽창이나 생명체를 생각할때면 나는 동시에 항상 먼 곳에서, 정말 먼 곳.. 우주의 끝에서부터 막 생성된 천체가 내뿜는 빛이 달려오는 것을 상상한다. 지금 허블망원경으로 최대 100억광년 전에서부터 달려온 빛들을 찾아내었다던가. 원시성단들과 원시은하계에서 달려온 빛들 말이다. 우주배경복사를 요리조리 잘 해석하면 현재 우주의 끝은 137억광년 정도 된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우주 초기에서 달려온 빛을 잡아내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은 어떤 연구결과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100억광년이나 137억광년이나, 그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빛들이 달려오는 것이다. 그래,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그 과거로부터 빛들이 달려오는 것은 아닐까? 지금 바로 여기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그 옛날에서부터 빛들이 달려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생각들을 (엄밀히 말하면 더 복잡하지만) 더 체계화시켜서 (강한, 약한) 인간원리, 라는 이론이 있기도 하지만.. 솔직히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이런 이론에는 좀 회의적이긴 하다. 의식이, 자각하는 의식이 물리계에서의 중심축을 담당하다니. 우리 인간 존재가 자연을 설명한다는 이야기는 정말 낭만적이지만, 동시에 석연찮다. 하지만 말야, 그렇게 내심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생각의 낭만성에 한껏 빠져보는 것이다. 그 유인원에서부터 진화한 우리 인간이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우주를 향해 관심을 가지고  지금 저 과거로부터 온 빛을 느끼고 손을 뻗어 잡고 있다. 우리가, 바로 그 빛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괜스레 가슴 한 구석이 찡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의 기념비적인 작품의 도입부에서 유인원이 던진 뼈다귀가 마치 우주선이 된 것 처럼. 비록 나 자신은 인간원리를 그다지 믿지도 않지만 (초끈이론으로 예측한 10^500개의 상태 중 우리 인간이 이 상태에 존재하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니..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말이다. 설령 나를, 우리를 위해서 그 먼 곳에서 달려온 것이 아니라도 좋다. 하지만 그저 스쳐지나가는 빛에 불과할지라도 그 먼 곳을 여행한 빛들에게 묘한 감정을 품지 않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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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실로 별의 아이들Starchildren이다. 미치오 카쿠가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에서 몇 번이고 강조했듯이 우리는 진실로 별의 아이들이다. 별은 마치 인간처럼, 혹은 인간이 별을 닮은 것이든, 나이를 먹고 자라서 노쇠해지고 이윽고 죽음을 맞이한다. 누구나 죽음은 공평하지만, 그 죽음의 순간은 공평하지 않은 것 처럼 수많은 별들도 마찬가지로 어떤 별들은 곱게 식어서 죽기도 하고, 몇 몇 별들은 초신성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폭발을 한 후, 중성자별이나 이윽고 블랙홀과 같은 모습으로 남기도 한다. 별들이 초신성 폭발을 할 때 수많은 원소가 생성되고, 그 수많은 원소들은 무한한 시간의 순환을 거치고 수많은 여행을 거친 끝에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니 나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은 한때 저 넓은 우주에서 빛을 발하던 초신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몸에는, 혈관에는 별의 심장이었던 것이 아직도 뛰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의 집합이 곧 나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그랬다면 중세의 연금술은 벌써 성공하고도 남았을 것이겠지. 그러나 하나의 죽음으로 하나의 생명이 탄생한다. 저 빛나는 별의 죽음으로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별의 생명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한 때 별이었고, 지금은 '나'이다.

 

모든 별들이 쌍성을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몇 몇 별들은 (몇 몇 별들이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지구상의 인류의 수보다는 많을 것이다.) 쌍성계를 이루기도 한다. 아까 말한 초신성은 타입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타입이 Type Ia이다. 이 Type Ia는 백색왜성을 포함한 쌍성계에서 일어나는데, 백색왜성이 상대편 별의 물질을 흡수하다가 찬드라세카 한계에 도달하는, 태양 질량의 1.4배에 이르게 되면 이윽고 폭발이 일어나는 그런 초신성이다. 자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 때 나는 별이었다. 그리고 별의 죽음으로 나는 태어났다. 그렇다면 나를 마주보는 내 쌍성은, 내 상대편 별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늘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았고, 이윽고 그녀와 함께 종말을 맞이했다. 내가 이윽고 다시 태어났다면, 이 세상 어딘가 나의 상대편 별이 분명 태어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에 태어났었을지도 모르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에 그녀의 생명이 안겨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주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시간선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강하게 느낀다. 분명 지금, 현재 어딘가에 내 맞은 편 별이었던 사람이 지금 나처럼 헤메고 방황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내 쌍성을 만나기 전까지는 계속 마음 한 구석에 망설임을 품게 되는 것이다. 계속 운명적인 예감을 찾아서 다시금 헤메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면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대는 내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고.

지금 이렇게 만난 것은 수많은 기적의 중첩 속에 이루어진 운명이라고.

너는 나와 함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시공간을 보내왔던 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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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5-25 08:40   좋아요 0 | URL
우와- 일단 추천 하고, 이렇게 이과적인 책에서 이토록 감상적인 글이 나올수가 있다니. 완전 반했어요, 가연님.

그런데요, 가연님, 그 운명이란거요.
가연님은 상대를 보고 운명이라고 확신하는데, 상대는 가연님에게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질 않는다면, 그렇다면 상대를 설득시키거나 확신시킬 자신이 있나요?

영화 [스틸 브리딩]에 보면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보고 자신의 운명의 상대임을 확신해요. 그런데 여자에겐 갑자기 이 남자가 이러는 것이 미친(?)것처럼 보이는거죠. 그래서 쌀쌀맞게 대하기도 하고 화도 내고 그러거든요. 결국 영화는 해피한 엔딩을 맞이하긴 하지만요,
'나'는 상대로부터 어떤 운명의 느낌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데 '상대'는 내게 너는 나의 운명이야 난 그걸 강하게 느껴, 라고 한다면 그도 참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사랑을 믿지 않는건지 혹은 세상일에 너무 많이 찌들린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누군가 제게 나타나서 갑자기 '너는 나의 운명이야' 라고 한다면 갸웃, 할 것 같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라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마지막 세 줄을 자꾸 읽게 되네요. 만약,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면, 하고 말이지요. 어쩌면 내가 세워놓은 기준은 흔들릴 수도 있고 내 중심축도 이동할 수 있고 나를 둘러싼 공기도 달라질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 것도 같아요, 저 세 줄이라면 말이죠.

가연 2012-05-25 09:46   좋아요 0 | URL
ㅋㅋ그래서 어제 쓰면서 고민한 것이, 밑에다가 '이 책은 절대 여기다가 쓴 것 처럼 낭만적이지도 않고 감상적이지도 않습니다아'라고 쓸까, 하는 것이었지요. 사실 이 글이 거의 리뷰를 빙자한 잡담이라서.. 책 자체는 사실 좀ㅎㅎ 내용이 축약된 부분도 많고 그래서 쫌 다가가기 힘들 수 있는 책이죠.

그리고 다락방님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자면, 사실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나만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거라면..ㅋㅋ 그러니깐 저런 대사는 완전히 사귀게 된 상태에서 상대방 손을 감싸서 쥐고는 눈을 바라보면서..ㅎㅎㅎㅎㅎㅎ 이는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고, 그런 거라면 불가능한데, 이 글을 끄적거릴때 아예 생각한 것이, 양 쪽이 모두 서로를 운명으로 여기는..ㅋㅋ 그런 관계였으니깐.. 이러다 저 결혼 영영 못하는 거 아닌가요??ㅠㅠ 풋, 그리고.. 설령 운명이라고 해서 궤도가 어긋나지 말라는 법은 없고.. 별을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쌍성계가 붕괴할 가능성도 분명 있을 수 있는 거니깐..ㅎ 그런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절대적으로, 내 반대편 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에 나오는 것 처럼, 백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것에 관하여, 였던가요?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서 서로를 영영 못알아볼 수도 있을테고..ㅋㅋ 그런 것 까지 모두 포함해서 저는 운명이라고 일컫고 싶네요.

이건 여담인데, 갑자기 '너는 나의 운명이야' 라고 말을 들어도 갸웃, 거리지 못하는 때가 분명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저만 그런걸까요? 저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생각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상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은 갸웃거렸다가도.. 말씀처럼 무언가 축이 바뀌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새벽에 끄적거린 글이라ㅎㅎ 지금 보니깐 쫌 부끄럽구먼요. 글이니깐 운명이라고 끄적거리지..ㅋㅋ 만약에 누군가를 만났다고 가정했을때, 그 사람 앞에서 저런 말을 정말 할 수 있을까요?ㅠㅠㅠㅠㅠ 아니, 나라면 가능할지도?ㅎㅎ

희선 2013-08-27 01:20   좋아요 0 | URL

별들의 신호는 몇 만 광년 걸린다죠?
우리 삶은 그리 길지 않으니,
언젠가 당신에게 가 닿겠죠


다는 아니고 한 부분입니다 언젠가 끄적거린... 유치한...
다르지만, 그냥 떠올랐습니다

반대편이라고 하니 저는 평행선이 생각나는군요 만날 수 없는 게 평행선이지만, 바로 옆에 있으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 않을지... '...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는 말도 있잖아요

어쩐지 운명은 나중에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로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렵지 않을까요 시대가 다른 때 태어난다면... 그러고 보니 어떤 책에서는 자신이 운명이라 여긴 사람이 태어나면 늘 찾기도 했군요 그리고 어떤 만화에서는 언제나 한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알아본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천년의 사랑>(양귀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군요^^


희선

가연 2013-08-28 00:24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바로 옆에 있으면 더 평행선 같지 않나요? 저 글을 쓸 때 계속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친구라면 같은 곳을 바라보는게 좋을지 모르겠지만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그런... 생각이겠죠 아하하하하하

희선 2013-08-29 00:09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생각했어요 서로 바라보는 것, 반대쪽에 있으면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그런데 바라보기만 하면?(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알겠지만, 같은 곳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라기보다 생각(이상)이죠 친구 같은 사이도 좋지 않나요(이것은 시간이 좀 흘러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말하지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도 있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쩐지 운명에서 멀어진 듯합니다 만난 뒤의 일을 말한 것인지도...

본래 제목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인데 '운명의 사람'(시라이시 가즈후미)으로 바뀌어서 나온 책 있어요 또 생각난 책, 운명의 사람은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운명이라 여겼지만 벌써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엇갈린 사람도 나온답니다 그럴 때는 참 마음이 아프겠습니다 서로가 운명이라 여길 수 있는 게 가장 좋을 텐데...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