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의 공원에는 다른 나무들과 더불어 감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곳의 감나무에는 제법 탐스런 감이 해마다 열리는데 여름내 농약을 친 탓에, 또는 시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그 감을 따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저 바라보고 즐길 뿐이다. 말하자면 관상용의 감나무인데 올해도 어김없이 제법 실한 감들이 조롱조롱 열렸다. 아직은 잎과 과일의 색깔이 초록으로 한 색이어서 구별이 쉽지 않지만 말이다.

 

다른 나무들도 많은데 내가 굳이 감나무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요즘처럼 타는 듯한 더위에도 푸르고 반짝이는 생명력을 잘 유지하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제법 소슬한 추위가 느껴지는 늦가을까지 갈색의 잎과 주홍빛으로 농익은 과일을 그대로 매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매년 감나무를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감나무는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계절 알리미'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도시에서 산다는 건 계절의 변화에 점차 무감각해지는 삶을 선택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연일 폭염에, 열대야에 시달리다 보면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1년 전체에서 요즘과 같은 혹서기는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지구온난화로 전지구의 기온이 매년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올해 1년 전체를 통틀어서 보면 가장 기온이 높은 해가 된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얗고 노랗던 감꽃이 어느새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열매로 자라난 것처럼 시간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쉼 없이 흐르고 매섭던 더위도 시나브로 사그러들 것이다.

 

밖에는 오늘도 여전히 무덥다. 도시의 더위는 끈적끈적할 뿐 아니라 사람의 기분을 종일 우울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마치 더위 속에 우울한 기분을 슬쩍 찔러넣은 것처럼 말이다. 에어컨 바람을 쏘여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다만 이 더위를 쫓기 위해 매미 혼자서 열심히 울어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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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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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계절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카슨 매컬러스의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로 말하자면 여름보다는 겨울에 더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네 영혼이 푸른 빛깔로 맑게 되살아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열다섯 살에 열병을 앓은 이후 수차례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른 살 무렵에는 걷기조차 힘들었다는 작가는 그런 불편한 몸으로도 결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빛깔로 밝게 빛이 납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시달리면서도 '창작이란 신을 찾는 길'이고 '쓸 수 없다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작가의 창작열을 생각하면 나는 이따금 숙연해집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자본주의가 불러온 폐해는 우리의 몸을 살찌우는 대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카슨 매컬러스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갈수록 몸은 약해졌지만 그녀의 영혼은 더욱더 밝아졌으니까요.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대체로 겉으로 드러난 것만 중시하는 까닭에 사랑도 주로 선남선녀의 결합이나 조건 대 조건의 만남만 생각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에 오염된 사랑을 진실한 사랑인 양 믿는 것이지요. 소설 속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인공은 대부분 예쁘고 멋지게 묘사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주목할 필요도 없거나 그들이 하는 사랑은 사랑도 아닌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것처럼 매컬러스가 창조한 세계에는 착각에 빠진 상처 입은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개인적인 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고독, 고립, 소외의 감정이 그녀의 작품 속에서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까닭이겠지요. <슬픈 카페의 노래>에 등장하는 세 사람도 그러합니다. 매컬러스는 인간은 사랑의 감정을 줄 수는 있지만 사랑의 감정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는 될 수 있어도 사랑받는 존재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은 타인의 사랑을 완벽하게 느끼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신체적 기형도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사랑을 남에게 줄 수는 있어도 되돌려 받지 못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작품의 줄거리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미스 아밀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료 가게를 운영하면서 돈 버는 일에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만들어 팔거나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등 손재주가 뛰어난 반면 마을 사람들에게는 인색하기 짝이 없고 말조차 어눌하여 사교성은 없었습니다. 작가의 묘사에 따르면 아밀리아는 키가 6척 장신이고, 몸무게는 70킬로에 육박하며, 창백한 얼굴에 회색빛 사팔눈이 너무 심하게 가운데로 쏠려 있고, 골격이나 근육도 마치 남자 같고, 짧은 머리는 뒤로 빗어 넘겼고,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과 핀곤함이 감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여자로서의 매력은 눈곱만치도 없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밀리아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니 마을에서 괴팍하기로 소문이 난 마빈 메이시였습니다. 얼굴이 번듯하고 방직공장에서 수리공으로 일했던 그는 아밀리아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성격도 온순하게 바뀌는 등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결혼합니다. 그러나 마빈 메이시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아밀리아로부터 밀주일만에 쫓겨났고 복수를 다짐하며 마을을 떠납니다. 전 재산을 그녀에게 주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아밀리아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꼽추 '라이먼'이었습니다. 거지나 다름없는 차림새로 자신이 아밀리아의 사촌 오빠라고 주장하는 '라이먼'을 그녀는 극진하게 대합니다.

 

약한 몸이었지만 교활하고 말주변이 좋은 '라이먼'의 의견에 따라 사료 가게는 카페로 변합니다. 그날이 그날 같았던 마을 사람들에게 아밀리아의 카페는 그야말로 깊은 위로와 위안을 주는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도질을 하다 교도소에 갇혔던 마빈 메이시가 가석방이 되어 마을로 돌아옵니다. 마빈 메이시와 아밀리아의 관계를 알 리 없었던 라이먼은 마빈 메이시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왜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작가가 말하듯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이먼은 갈 데 없는 마빈 메이시를 카페로 불러들입니다.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셈이지요.

 

"다른 사람과 한 번이라도 같이 살아 보고 난 후에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지독한 고문이다. 난롯불만 타고 있는 방에서 갑자기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멈출 때 느껴지는 정적과 텅 빈 집 안에 너울거리는 그림자 - 이런 혼자라는 공포와 마주하기보단 차라리 철천지 원수를 들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p.112)

 

아밀리아가 라이먼을 끔찍이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토록 싫어했던 마빈 메이시를 집에 들인다는 것은 그닥 내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라이먼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녀는 마빈 메이시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마빈 메이시와의 결투를 선택한 아밀리아는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마빈 메이시 또한 그에 대비합니다. 어느 날 카페에서 두 사람의 결투가 시작되었고 승기를 잡았던 아밀리아는 결국 그녀가 사랑했던 라이먼에 의해 패하고 맙니다.

 

"삶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졌고, 값을 치르지 않고 얻어진 것이다. 그러면 삶의 가격은 얼마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때때로 삶이란 전혀 가치 없거나 만약 있다고 해도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내가 처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 자신이 결국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밀려오지 않는가." (p.102)

 

마빈 메이시와 라이먼은 아밀리아의 전 재산을 파괴한 후 귀중품만 챙겨 달아납니다. 아밀리아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랑받는 일을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나아가 사랑받기를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이지요.

 

언젠가 카슨 매컬러스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고독은 거대한 현실, 사랑은 거대한 필수, 사랑이란 하나의 특수한 학문"이라고 말이지요. '고독이 거대한 현실'이라는 말을 요즘처럼 절실하게 느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눈만 뜨면 자살 소식을 듣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고독은 이미 오래된 지병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학문을 처음서부터 새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누구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면, 사랑은 거대한 필수가 아니라 사랑은 거대한 현실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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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학력 붕괴 시대의 내 아이가 살아갈 힘 - 인생을 개척하는 강인함을 기르기 위한 인간주의 교육의 제시
텐게시로 지음, 장현주 옮김 / 오리진하우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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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할런지 모르겠지만 학부형의 연령은 아이의 나이에 비례하여 결정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결혼을 늦게 하는 바람에 제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아이의 나이가 어리다면 동창회에 나온 친구들로부터 한참 어린 후배쯤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비교적 학교일에 간섭을 하지 않는 남자들과는 달리 전업주부인 여자들은 '녹색 어머니회'다 '반 모임'이다 해서 학부형들끼리 모이는 경우도 많지만 '급식 당번'이며 '도서관 사서'며 '환경 미화'등 학교측의 요구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서 자신의 나이가 어떻든간에 그들과 어울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둔 부모 중에 '반장 엄마', '부반장 엄마', '미화부장 엄마'를 '불쌍한 엄마 3종 세트'로 꼽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아이를 둔 죄인의 심정으로 그런 모임에 여러 번 참가하다 보면 나이 구분은 온 데 간 데 없고 '몇 학년 몇 반 아무개 엄마'라는, 서열을 따로 물을 필요가 없는 모호한 지위만 남게 마련이고, 사회 생활에서도 아이의 학년에 따라 그렇게 엄마의 서열이 정해지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합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이 그와 같은 모임에 나가는 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정보의 교환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이의 학교 성적에 의해 엄마의 위신이나 체면이 서는 까닭에 성적은 아이의 학년과 더불어 엄마의 서열을 매기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모임에 참가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고급(?) 정보가 교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이에 대한 교육열 하나는 단연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개나 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들 경험해 본 것일 테지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년쯤 지나면 '학력 붕괴의 시대가 온다.'라거나 '성적보다는 인성'과 같은 말에 솔깃해지는 게 사실이다. 지쳤기 때문이다. 부모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르게 행동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런 생활을 몇 년쯤 하게 되면 아이는 숫제 자식이 아니라 웬수로 보이게 마련이다. 아무튼 내가 <2030년 학력 붕괴 시대의 내 아이가 살아갈 힘>을 읽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의 미래를 심히 걱정하는 까닭에.

 

"규칙을 잘 지키고 매너도 좋으며 얌전하고 말귀를 잘 알아들으며 친구와도 잘 지낸다. 특별히 커다란 트러블도 없고, 언뜻 보기에 별 탈 없이 자라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적 가치, 적극성이나 바이탈러티가 부족하고, 독창성도 없으며, 자기 부정이 강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좌절한다. 이것이 「살아갈 힘」이 약한 아이의 특징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 (p.186)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아이들이 정말 수도 없이 많은 게 사실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일관되고 명확했다. '국가주의 교육'이 아닌 '인간주의 교육'을, '주는 교육'이 아닌 '끌어내는 교육'을 통하여 '오래된 뇌'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아이와 학부모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뇌신피질을 향상시키는 지식 위주의 '주는 교육'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이것이다. 이와 같은 책이나 강연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지만 돌아서면 금세 마음이 변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학력 붕괴의 시대가 온다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좋은 대학, 좋은 학벌은 아직 무시할 수 없는 성공 조건이기 때문이다.

 

"3장에서 「살아갈 힘」의 요소로 '의지력', '결단력', '하고자 하는 마음', '자기를 긍정하는 힘', '창조력', '감성' 등을 제시하였고, 7장에서는 서드베리 교육을 소개하면서 '인간적 매력', '적극성', '행동력' '바이탈러티', '교섭력' 등에 대해 다루었다." (p.105)

 

사실 아내와 나는 하나 있는 아들의 교육에 대해 여러모로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내나 나나 공부만 강요하는 호랑이 부모는 절대 아니다. 아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싫다는 건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또래들에 비해 여유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레고를 하거나 영어 동화를 들었다. 영어 학원을 잠시 다니기는 했지만 제 스스로 영어 원서를 읽고 이해하는 수준까지 실력이 향상된 건 순전히 아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결국 공부를 강요하지 않고, 대자연 속에서 실컷 놀게 하고, 충분히「몰입」을 체험시키면 아이들의「살아갈 힘」은 신장되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다. 아이들을 책상에서 일어나게 하고 대자연 속으로 데려가 실컷 놀게 해보자." (p.226)

 

저자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한민국 부모의 심정을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여자 친구와 밤을 같이 보내고 싶은 젊은이가 '손만 잡고 잘게.' 라고 약속은 하지만 막상 나란히 누웠을 때 밤새 그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인내력이 필요하거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약속을 어기는 그런... '마찬가지로 학력 붕괴의 시대가 온다'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조언에 초연해야 하고 아이가 좋은 대학, 좋은 성적을 받음으로써 부모로서 으쓱해지는 그런 느낌을 향유하고자 하는 유혹을 과감히 뿌리쳐야만 한다는 말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공감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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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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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1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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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또래의 남자들 중에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있기나 할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아무 탈 없이 제대로 성장한 걸 보면 아무튼 난 무엇엔가 단단히 빚을 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의 성교육이라는 게 또래 중 조숙한 아이가 들려주는 근거도 없는 허황한 이야기가 대분분이었지만 이따금 친구의 부모님이 안 계시는 틈을 노려 어둑하고 습습한 친구의 방에서 몰래 보았던 불법 비디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그 불법 비디오로부터 그 시절의 남자 아이들은 성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성교육의 '성'자를 꺼내기 싫어했으니까.

 

요 근래에 들어 전에 비해 성범죄와 관련된 뉴스들이 부쩍 늘었다는 느낌이 든다. P모 가수를 비롯하여 Y모 개그맨, L모 배우 등 연예인 관련 성범죄뿐만 아니라 K모 야구선수 및 지금은 의식불명의 상태에 있는 S그룹의 회장에 이르기까지 그 직업군도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사드와 같은 다른 소식을 스크린 하기 위하여 이런 반갑지도 않은 소식을 중점적으로 보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주로 남자가 되겠지만)의 성도덕이 땅에 떨어졌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나는 그런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같은 남자로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절제력도 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대한민국의 앞날이 심히 걱정스러워지기도 한다. 개 돼지와 다름없는, 오직 본능과 쾌락에만 의존하여 살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을 내가 사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현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오직 돈과 권력을 최상의 도덕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현실에서 돈이나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 무분별한 쾌락에 도취되는 것도 과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오늘은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기에 이 법이 썩어가는 우리 사회를 정화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를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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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0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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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4: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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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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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의 그림자>를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지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황정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한 권 더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단지 생각뿐이었지 인기가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정신을 팔다 보니 나는 그만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채 '황.정.은'이라는 이름 석 자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도 너무한 일이었다.

 

내가 <百의 그림자>에 매료되었던 건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시적인 문체와 리듬감 때문이었다. 낯선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첫 번째 소개팅을 앞둔 대학생 새내기의 심정으로 두근대거나 설레었던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확인했었다. 황정은, 황정은, 황정은... 그러다 '황'으로 시작되는 다른 작가의 이름과 혼동되기도 했다. 황정은, 황경신, 황하영, 황현진, 황희, 황석영... 아, 황석영은 남자였나?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소설이었다. 소설의 문체나 리듬감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데 소설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는 욕설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고 소설 속에서 마치 일상어인 양, 보통명사인 양 쓰이고 있었다. 이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과격한 용어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전보다 비유가 강해지고 스토리의 생략과 도약이 빈번하여 소설의 흐름을 쫓아가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실성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밤낮없이 호미를 들고 다니며 파고 파고 또 파다가 시신이 나오면 아들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아들이 아니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고 도로 묻어주었다. 아니 그 수고를 뭘 그렇게까지 했느냐면 내 큰아버지라서 할말은 아니지만 죽창을 가지고 이웃들을 막 찌르고 다녔던 개망나니 같은 놈이라도 지 어미한테는 그렇게 귀하고 가치 있는 놈이었던 거야. 알겠냐. 이 나이 되도록 인생을 살고 보니 그렇더라. 사람이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네 어미도 그렇고 다 그렇게 귀하고 불쌍한 거지. 세상 나고 자란 목숨 가운데 가치 없는 것은 없는 거다." (p.52)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은 고모리에 산다. 말하자면 제 어미의 학대와 폭력 속에서 두 형제가 견딘다. 그들의 어머니도 부친의 학대 속에서 성장했다. 앨리시어 어머니의 아버지, 앨리시어의 외할아버지로부터 전해졌을 폭력의 연결고리가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에게 이르러서도 녹슬지 않고 작동하는 것이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는 재개발 보상금에만 눈이 멀었을 뿐 폭력에 시달리는 제 자식의 문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폭력은 제 스스로 자가증식을 한다. 고모리에 사는 앨리시어의 친구 고미네 집에서도, 그리고 폭력을 수수방관하는 고모리 주민 전체로, 앨리시어와 고미가 폭력을 신고하기 위해 구청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담당 공무원도 폭력을 옹호하거나 못 본 척 외면한다.

 

노인의 후처로 들어간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아직은 젊고 힘이 세다. 앨리시어는 감히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집을 나가라는 고미의 권고에 앨리시어는 결혼을 하여 따로 사는 이복 형과 누나에게 딱 한 번 전화를 한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처지를 말하지 못한다. 고미의 아버지는 고물상을 한다. 고물상을 하면서 노인들에게 사기를 치고 고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고미가 맞던 어느 날 앨리시어는 고미의 아버지를 공격한다. 그 후 고미네 고물상은 문을 닫는다. 그 일이 있던 날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못에 발이 찔리고 형을 찾아 나섰던 앨리시어의 동생은 하수처리장 웅덩이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날도 폭력이 있었다. 아니,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저능한 새끼에서, 저능한 것도 모자라 난폭한 새끼가 된다. 저능한 것도 모자라 난폭한 새끼는 좋다. 저능하지도 않으면서 난폭하거나, 무능한데다 난폭하지도 못한 새끼보다는 좋다고 앨리시어는 생각한다. 가시처럼 뾰족한 인간이 되어 고모리를 돌아다닌다." (p.116)

 

어른이 된 앨리시어는 어느새 제 어미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앨리시어는 '폭력 보균자'가 된 것이다. 아직 발병하지 않은 채 가능성만 지닌. 그렇게 떠돌다가 가장 약하고 치명적인 대상을 만나면 앨리시어의 망령은 누군가에게 스며들어 폭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작가의 머릿속에는 우리 사회에 바이러스처럼 떠도는 '폭력 인자'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소설은, 또는 현실은 '폭력 인자'에 감염된 죽음의 현장만 목격하는 셈이다.

 

"……이제 막 지나가려는 버스를 향해 뛰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이제 앨리시어도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까."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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