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百의 그림자>를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지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황정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한 권 더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단지 생각뿐이었지 인기가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정신을 팔다 보니 나는 그만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채 '황.정.은'이라는 이름 석 자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도 너무한 일이었다.

 

내가 <百의 그림자>에 매료되었던 건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시적인 문체와 리듬감 때문이었다. 낯선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첫 번째 소개팅을 앞둔 대학생 새내기의 심정으로 두근대거나 설레었던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확인했었다. 황정은, 황정은, 황정은... 그러다 '황'으로 시작되는 다른 작가의 이름과 혼동되기도 했다. 황정은, 황경신, 황하영, 황현진, 황희, 황석영... 아, 황석영은 남자였나?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소설이었다. 소설의 문체나 리듬감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데 소설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는 욕설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고 소설 속에서 마치 일상어인 양, 보통명사인 양 쓰이고 있었다. 이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과격한 용어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전보다 비유가 강해지고 스토리의 생략과 도약이 빈번하여 소설의 흐름을 쫓아가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실성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밤낮없이 호미를 들고 다니며 파고 파고 또 파다가 시신이 나오면 아들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아들이 아니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고 도로 묻어주었다. 아니 그 수고를 뭘 그렇게까지 했느냐면 내 큰아버지라서 할말은 아니지만 죽창을 가지고 이웃들을 막 찌르고 다녔던 개망나니 같은 놈이라도 지 어미한테는 그렇게 귀하고 가치 있는 놈이었던 거야. 알겠냐. 이 나이 되도록 인생을 살고 보니 그렇더라. 사람이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네 어미도 그렇고 다 그렇게 귀하고 불쌍한 거지. 세상 나고 자란 목숨 가운데 가치 없는 것은 없는 거다." (p.52)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은 고모리에 산다. 말하자면 제 어미의 학대와 폭력 속에서 두 형제가 견딘다. 그들의 어머니도 부친의 학대 속에서 성장했다. 앨리시어 어머니의 아버지, 앨리시어의 외할아버지로부터 전해졌을 폭력의 연결고리가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에게 이르러서도 녹슬지 않고 작동하는 것이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는 재개발 보상금에만 눈이 멀었을 뿐 폭력에 시달리는 제 자식의 문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폭력은 제 스스로 자가증식을 한다. 고모리에 사는 앨리시어의 친구 고미네 집에서도, 그리고 폭력을 수수방관하는 고모리 주민 전체로, 앨리시어와 고미가 폭력을 신고하기 위해 구청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담당 공무원도 폭력을 옹호하거나 못 본 척 외면한다.

 

노인의 후처로 들어간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아직은 젊고 힘이 세다. 앨리시어는 감히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집을 나가라는 고미의 권고에 앨리시어는 결혼을 하여 따로 사는 이복 형과 누나에게 딱 한 번 전화를 한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처지를 말하지 못한다. 고미의 아버지는 고물상을 한다. 고물상을 하면서 노인들에게 사기를 치고 고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고미가 맞던 어느 날 앨리시어는 고미의 아버지를 공격한다. 그 후 고미네 고물상은 문을 닫는다. 그 일이 있던 날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못에 발이 찔리고 형을 찾아 나섰던 앨리시어의 동생은 하수처리장 웅덩이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날도 폭력이 있었다. 아니,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저능한 새끼에서, 저능한 것도 모자라 난폭한 새끼가 된다. 저능한 것도 모자라 난폭한 새끼는 좋다. 저능하지도 않으면서 난폭하거나, 무능한데다 난폭하지도 못한 새끼보다는 좋다고 앨리시어는 생각한다. 가시처럼 뾰족한 인간이 되어 고모리를 돌아다닌다." (p.116)

 

어른이 된 앨리시어는 어느새 제 어미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앨리시어는 '폭력 보균자'가 된 것이다. 아직 발병하지 않은 채 가능성만 지닌. 그렇게 떠돌다가 가장 약하고 치명적인 대상을 만나면 앨리시어의 망령은 누군가에게 스며들어 폭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작가의 머릿속에는 우리 사회에 바이러스처럼 떠도는 '폭력 인자'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소설은, 또는 현실은 '폭력 인자'에 감염된 죽음의 현장만 목격하는 셈이다.

 

"……이제 막 지나가려는 버스를 향해 뛰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이제 앨리시어도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까."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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