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으로부터 쉽게 밀려나는 것은 몸이 아니라 관념이다.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우리의 몸은 '늙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결국 보이지도 않는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리게 되겠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당신의 켸켸묵은 생각이나 고루한 사고가 젊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습득된 도덕 관념이나 사고 체계는 이러한 비난이나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좀체 바뀌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꼰대' 취급을 받는다. 그것이 지금 유행하는 젊은 사람들의 사고 체계로부터 멀리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지표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어쩌면 하도 단단하여 바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제는 도저히 젊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겠구나 판단되는 시점에 이르면 자신이 마치 어떤 유혹이나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살만 루시디와 같은 인물인 양 착각하거나 자신만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주의자 혹은 유일한 보수주의자인 양 거들먹거리곤 한다. 그런 모습은 천박하다기보다는 짠하고 안쓰럽다. 그들은 자신의 추락한 자존심을 붙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오늘 김제동의 1인 시위를 비난하는 윤 모 만화가를 보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데 참 불쌍하지 않은가. 예전에 했던 이 사람의 행적을 보면 가관도 아니다. 노출이 심한 슬립 원피스를 입은 소녀들이 엎드려 과거시험을 보면서 화선지에는 '지지지...'라는 글이 적혀 있고 '숙녀시대 새해맞이 단체로 떡치는 사진'이라고 했다나 뭐라나. 그는 성적인 표현만이 젊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인 양 믿었을 게다. 내 판단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인해 대한민국은 얻은 게 하나도 없고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손실만 있었고 앞으로의 손실은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득을 본 사람은 (윤 모 만화가를 포함한)우둔한 국민들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인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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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6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없던 욕구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중독이라면 '활자중독'뿐 아니라 '작가중독'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물론 애연가의 흡연욕구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마냥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니어서 (중독이 된)그 작가의 글을 읽지 않고 일정 시간이 흐르면 어느 순간 '이제는 정말 XX 작가의 책을 읽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군.'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구를 무시한 채 좀 더 오래 버티게 되면 제 아무리 재미있다는 책을 읽어도 그저 시큰둥할 뿐 별다른 감흥이 없고, 몸속의 열의란 열의는 모두 사라진 듯한 느낌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손을 떤다거나 조급해하면서 쉽게 짜증을 내는 식의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무시하고 모른 척하기에는 뭔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제 더 이상 못 배기겠는 걸.' 하는 생각이 들라치면 작가가 한참 전에 쓴 낡고 오래된 책이라도 빌려 읽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정말 금단현상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그 단계까지 가 본 일이 없어서 진짜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독자의 이런 심정을 알고 있는 작가라면 적어도 글을 쓰기 싫어 농땡이를 부리거나 책의 출간 시기를 저울질하며 차일피일 미루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쉼 없이 작업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작가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간 시기를 알 수 없어 이제나저제나 애태우다가 포기하고 이제 막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기우는 독자들이 하나 둘 늘어날 즈음 기다리던 작품이 비로소 나오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제게도 그런 작가가 몇 명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 중 한 명입니다. 한동안 다른 작가의 작품에 빠져 지내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죠. '아직 신간이 나오려면 멀었으니 아쉽지만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도 한 권 다시 읽어야겠군.'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퇴근 후 발걸음은 항상 도서관으로 향하게 됩니다. 비록 작가로서 하루키는 상당히 성실한 편에 속하고 독자들의 심정을 나몰라라 하는 작가도 아니지만 근래에 들어 그의 작품은 상당히 부정기적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제가 엊그제 읽었던 책은 <슬픈 외국어>입니다. 신간이 보이지 않을 때 제가 취하는 선택 기준은 전적으로 감에 의존하게 되는데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고른 걸 보면 엊그제 도서관에 갔을 때의 제 느낌은 '약간 슬펐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더 슬펐더라면 저는 어쩌면 <노르웨이의 숲>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정도까지 슬퍼지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는다면 그 우울하고 탁한 기분이 적어도 한 달쯤은 계속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사물을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몸을 움직여서 생각하고,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되도록 많은 나라의 말을 배워, 되도록 많은 나라에서 살거나 여행하며 작품을 쓰는 까닭은, 보다 참된, 그리고 보다 인간적인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p.201)

 

사실 이 책은 제목만 제외하면 '슬픔'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체류하면서 그가 받았던 미국 체험의 느낌과 자신의 지난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18편의 에세이가 이 책의 구성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책이 그가 쓴 다른 에세이들과 확연히 구별된다고 느끼는 점은 하루키 특유의 유머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인 체험을 통한 삶과 세계관, 그리고 국제 관계와 문학 등에 관한 에세이'를 비교적 진지하게 쓰고 있습니다.

 

"한없는 그런 거리와 자연의 끝없는 연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산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문득 빠지게 된다. 그런 무력감은 미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다. 유럽에서도 맛볼 수 없고, 일본에서도 맛볼 수 없는, 절대적인 아메리칸 오리지널이다." (p.192)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감정이나 사생활을 솔직하게 내보여야만 하는 어떤 순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면으로든 인터뷰를 통한 방송으로든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말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 과거의 모습 등 어쩌면 밝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아주 솔직하게 쓰고 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가장 기뻤던 건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업 작가가 되면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오히려 생활 쪽을 조정하면 해결될 일이다. 이만큼 내게 잘 맞는 생활도 없기 때문이다. 처음 몇 년 간은 여러 가지로 시행 착오를 겪었지만, 그러는 사이에 점점 익숙해져서 내 나름대로의 작가 생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시스템의 근본 사상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하고 싶은 일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한다"는 한마디로 설명이 다된다." (p.235~p.236)

 

작가는 <슬픈 외국어>라는 책의 제목이 '절실한 울림을 갖고 다가온다'고 쓰고 있습니다. 막연히 무엇인가 쓰고 싶었던 작가는 카페를 운영하던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몸을 통하여 생각하는 경험을 했고 야구장에서 문득 소설을 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미래는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습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요행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불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불행했다고 하여 내일 또 불행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매일매일은 모두가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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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뭣할까. 처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처신을 잘 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안하무인의 개망나니를 찾는 게 훨씬 빠를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알게 된다고. 정말 그럴까? 오히려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자신이 해야 할 도리 또는 도의를 제대로 갖추어 지키지 못할 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상하를 구분하고,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가려 하며, 격식을 갖춘 행동을 몸에 익히는 것은 젊은이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것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서 질서의 차원일 뿐 유교사회에서 강조하던 공경의 문제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나는 지역사회가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었다. 엄연히 참가비가 있는 대회이니 만큼 내가 자발적으로 참가할 리는 만무했었다. 오히려 내게 돈을 쥐어주면서 제발 참가해달라고 사정을 해도 나가지 않을 판인데 돈까지 내가면서 고생을 사서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랬던 게 일이 틀어지느라고 그랬는지 어쩔 수 없이 참가하게 되었다.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암튼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꼴로 5킬로미터 단축 마라톤에 참가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5킬로미터를 완주했다. 그것도 간신히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했던 체력장의 오래 달리기 이후 그렇게 긴 거리를 정식으로 달려본 건 처음이지 싶었다. 올해 초에 담배를 끊은 덕분인지 호흡이 심하게 가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1킬로미터도 채 뛰지 않았는데 종아리 근육이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매일 아침 산행을 했으니 다리 근육은 크게 약해지지 않았으려니 생각해왔는데 의외였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오기로 조금 더 뛰니까 그제야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나는 암튼 내 자신의 체력에 대해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이제 제 몸 하나 운신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요즘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려 노력한다. 하루에 적어도 2시간 이상은 걸어야겠다 결심했다. 처신을 잘한다는 건 운신을 잘하는 데서 비롯된다. 운신도 못하는 처지에 이른 사람이 처신인들 제대로 할 리 없다.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국회의원들의 막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곧 죽을 몸이 되어,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에게 처신을 잘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정화를 반대하고 검인정제를 옹호하는 이들이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을 대비해 미리 교육을 시키려는 것 아니냐”고 한 어처구니없는 말도, 야당을 '화적떼'라고 폄훼하는 말도 다 운신도 못하는 노인네들의 안타까운 신음일 뿐이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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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보도에는 새로 생긴 물웅덩이와 그 위를 덮은 낙엽들이 이 즈음의 중첩된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컨대 스산한 바람이 부는 오늘과 흐린 가을 하늘에 그려지는 옛추억의 풍경이 번갈아가며 펼쳐지는 것입니다. 비에 젖은 비둘기떼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갑니다. 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오후에는 비도 그치고 색이 바랜 희미한 해가 무표정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를 힘없이 주물렀습니다. 의무를 다하려는 듯 말이지요. 어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안톤 루빈슈타인의 '멜로디 F장조'를 들었습니다. 성글게 짜여진 하루의 시간들이 피아노 선율을 따라 가볍게 흔들립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 속의 긴 그리움처럼 가없는 세상으로 나를 데려갈 듯했습니다.

 

계절은 오늘을 축으로 빙글 돌아 겨울 쪽으로 향하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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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비가 조금 내렸다. 색이 변한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지고 보도에는 이내 가벼운 우울이 서너 겹 깔렸다. 우산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보도 위의 싱거운 우울을 밟고 지나쳐간다. 휴일이 주는 둔탁한 질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낮고 어둡고 농도가 짙은 우울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허무맹랑하지만 겉보기에 화사한, 그늘이 없는 기대는 휴일 오전에 그들이 갖는 보편적인 느낌이리라.

 

텔레비전을 틀자 '역사 교과서', 국정화' '좌편향', '올바른' 등 뉴스에는 그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이 의미도 없이 흩어졌다. 교과서의 소비 주체인 학생들의 의견은 도외시 한 채 자기네들 멋대로 결정하고, 멋대로 뜯어고치면서 그것이 옳다고 믿는 돌대가리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소름이 돋는다. 그들도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이 다할 테고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그 시간의 어둠과 우울은 가을 휴일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꺼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오늘자 조간신문을 잘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혹은 텔레비전 아침 뉴스를 잘 이해하거나. 그러나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목적이 따로 있는 듯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대한민국의 과거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보다 화려했으니 현재에 대한 불만이 더러 있더라도 참고 견디었으면 좋겠다는 뜻일 게다. 즉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다. 어디서 많이 듣던 문장이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문장도 아마 그것일 게다. "가만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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