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집을 나서는데 경비아저씨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가을은 이래저래 청소와 연관된 사람들이 수난을 겪는 계절이다. 청소를 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금세 새로운 낙엽으로 뒤덮이니 말이다. 낙엽이 시간에 맞춰 떨어질 리도 만무하고, 쌓여가는 낙엽을 보면서도 청소를 무작정 미룰 수도 없는 일이니 참으로 난감할 밖에. 열심히 비질을 하던 아저씨는 잊었던 것이라도 문득 생각 난 듯 하던 일을 갑자기 멈추고 감나무 끝을 쳐다보았다. 몇 개 남지 않은 감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었다. 아저씨는 손에 들린 대가 긴 빗자루를 이용하여 감나무 잎을 떨어뜨리려나 보았다. 손에 들린 빗자루를 길게 뻗었는데도 거리가 조금 부족했던지 까치발까지 세운 채 말이다. 그러나 우듬지에 단단히 매어달린 이파리는 팔랑팔랑 춤을 출 뿐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할 일 바쁜 아저씨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몇 번을 그렇게 헛손질을 하던 아저씨는 제 풀에 지쳤는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공연히 헛심만 쓴 꼴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눈이 내렸다. 올 겨울 들어 처음 보는 눈이었다. 아저씨는 여전히 비를 들고 계셨다. 나뭇가지에는 소복소복 눈이 쌓이고 바닥에 떨어진 눈송이는 금세 녹아버렸다. 내 인사를 듣지 못했었는지 아저씨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눈 내리는 풍경에 빠져 있었다. 어느 젊은 날의 첫사랑이라도 추억하는지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마저 어려있었다. 볼에 와 닿는 쌀쌀한 바람도 아저씨를 그 하염없는 추억의 늪에서 건져내지 못했다.

 

어제와는 새삼 달라진 오늘. 사람들은 어제보다 십 분쯤 더 여유로워졌고, 그리움이 한 뼘쯤 더 깊어졌고, 세상은 얼었던 마음들이 1킬로그램쯤 녹아내렸고, 떨어진 낙엽만큼 하늘은 조금 넓어졌다. 어제와는 달라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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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대학생활의 가장 큰 로망은 역시 미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는 여학생과 나란히 걷기만 해도 징계를 받던 시대였으니 대학생이 되기 전에 이성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종례시간에 반 아이들의 가방을 조사하기도 했었죠. 어느 때였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제 친구 중 한 명은 가방에 무심코 넣어두었던 연애편지가 발각되어 일주일 동안 반성문을 쓰기도 했었습니다. 이성에 대한 열망이 가장 왕성한 시기의 아이들을 그렇게 가두어 둔 덕분에 그나마 대학 문턱을 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남녀교제 자체를 철저히 막아놓았던 걸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그랬으니 아이들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미팅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고, 맘만 먹으면 주말마다 미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를 잔뜩 품고 나갔던 미팅은 실망만 가득 안고 돌아오기 일쑤였고 그 횟수가 거듭될수록 열기는 시들헤져만 갔습니다. 그때 속담처럼 성행하던 말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혹시나' 했던 일들이 '역시나'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많은 국민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명분으로 국정화를 고집하는 정부와 그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정말로 떳떳하다면 집필진의 이름을 밝히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집필진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신념대로 떳떳한 일을 하는 거라면 정부가 비공개 원칙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자진하여 밝히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정부는 내년 3월 원고 초안이 나올 때까지 집필진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을 모양입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인 셈이죠. 익명으로 댓글을 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인터넷 실명제를 운운하던 작자들이 이제는 그 중요한 역사 교과서를 쓰는 것에도 익명으로 하자고 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역사 교과서가 인터넷 댓글만도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입니다. 부끄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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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동안 남들이 흔히 말하는 '사랑해!'라는 말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

너무도 흔해빠져서 그 가치마저 사라진 듯한 그 말을 무에 생각할 게 있다고 그렇게 오래 생각했느냐 하겠지만 나는 그래서 더 오래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대충 생각한 게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아주 열심히,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정말 열과 성을 다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었다. 나란 놈, 내가 생각해도 참 유별나고 별난 놈이다. 그냥 '사랑해!'라고 말하나 보다 생각하면 그만인데 그걸 한사코 끄집어 내어 뒤집어도 보고, 나누어도 보고, 말하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여 정량화를 하고 싶으니 말이다. 시쳇말로 "노답!!"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것 하나를 알게 되었다. 진행형의 구분이 애매한 우리말에서 '사랑하다'는 진행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한 시점에 정지된 상태로 읽는다는 걸 알고 조금 놀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사랑은 연속적인 시계열의 진행이지 한 순간에 들었던 심리 상태만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말이다. 예컨대 나는 '지금' 널 무지무지 사랑하지만 조금 지난 '다음 순간'에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그 강도가 때에 따라 점층적이거나 점강적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의 그 순간의 마음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 또는 책의 주인공이 그 말을 하는 순간의 심리로만 읽는다는 것은 진행형으로 읽었을 때와 상당한 의미 차이가 난다. 지금껏 나만 그렇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동안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 저 사람이 지금 나를 사랑하는구나'쯤으로 생각했다. 사랑하는 감정은 결코 순간적으로 들었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혹시라도 나처럼 '사랑해'라는 말을 순간적인 심리 상태로 받아들였던 분이 있다면 의식적으로나마 진행형으로 생각할 것을 권한다. 그래야만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다. 삶을 사랑의 과정으로 볼 때 사랑이 순간적이라면 그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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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볼 때가 있다. 내가 실시간 검색어를 신경써야 할 연예인도 아니고 일부러 주목하여 보는 건 아니지만 자동적으로 시선이 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그 검색어 순위 안에 '허경영' 씨가 올라왔다. 그가 리스해서 타고 다니는 롤스로이스의 책임보험료가 미납되어 적발됐다는 기사와 함께. 여담이지만 그가 타는 롤스로이스의 한 달 리스비가 800만 원이라니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능력이 좋은 사람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따금 특이한 행동과 허무맹랑한 대선 공약으로 웃을 일 없는 우리를 즐겁게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제 연예인 다 되었군' 하고 생각했는데 그는 실제로 연예인 맞다. 그의 프로필에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가수이며 소속은 '본좌엔터테인먼트'로 되어 있다. 그는 아마도 19대 대선에도 출마할 모양인데 페이스북에 발표한 그의 대선 공약을 보면 이렇다.

1. 이명박 구속

   (사랑의 열매 1조 기부시 면책)

 

2. 박근혜 부정선거 수사

   (결혼 승락시 면책)

 

3. 새누리당 해체 및 지도부 구속

   (소록도 봉사 5년시 집행유예)

 

4.UN본부를 판문점으로 이전

 

5.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건국수당

   매월 70만 원씩 지급(어버이 연합 제외)

 

6. 결혼수당 남녀 각 5000만 원씩 지급

   (재혼시 1/2지급, 삼혼시 1/3)

 

7. 출산수당 출산시마다 3000만 원씩 지급

 

8. 국회의원 출마자격 고시제 실시 -

   국회의원 1/3로 감원

 

9. 정당정치 해산하고 국회의원들은

   무보수 명예직으로

 

10. 몽골과 국가 연합

 

11. 바이칼 호수물 서울시 공급

 

12. 만주땅 국고 환수

 

13.독도 간척사업으로 일본 근해

   500미터 앞까지 영토 확장

 

그의 공약이 이루어질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암튼 속은 시원하다. 그는 정말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안 될 연예인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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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내일처럼 오늘을 맞는다.

새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숲은 어둑신했고, 한 발 들여놓기도 꺼려질 정도로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밤이 길어진 요즘 새벽 등산길은 언제나 힘이 든다. 어디서 불이라도 난 것인지 소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쪽 끝으로 내달렸다. 늘 잠에 목마른 회사원들의 아침잠을 방해하면서. 등산로는 낙엽으로 가득하다. 나와 같은 등산객을 놀래킬 생각이 영 없었던지 영민한 청설모가 기척을 했다.

 

낮에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잠시 걸었다. 소화도 시킬겸 겸사겸사 나선 길이었다. 공원 한 귀퉁이에서 할머니 한 분이 단감을 팔고 있었다. 잘 익은 담감을 비닐 봉지에 가득씩 담아 산책로를 따라 주욱 늘어놓고는 벤치에 앉은 또 다른 할머니 몇 분과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을 천천히 지나치는데 행색이 초라한 할아버지 대여섯 분이 우루루 몰려와서는 다짜고짜 단감이 얼마냐고 물었다. 한 봉지에 만 원이라는 말에 할아버지 한 분 왈 "하나 사서 안주 삼아 술이나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같이 온 할아버지들이 너도 나도 "하나 사 봐." 하면서 부추겼다. 할 일은 없고, 주머니 사정은 어렵고, 그러면서도 뭔가 재미있는 일을 찾던 그들에게 '술'이라는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나 보다.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낮게 드리운 하늘.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우울한 날씨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국정화 교과서를 밀어부치는 정부 여당은 마치 이것이 마치 국민과의 한판 전쟁이라도 벌이는 것인 양 연일 떠벌리고만 있다. "이거 지면 우리나라 망한다." 고 하는 놈이나 서울시 교육청의 친일인명사전 배포 계획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은 반대한민국적, 반교육적인 이런 결정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놈이나 다 그놈이 그놈이겠지만 이런 미친 놈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꼬라지가 이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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