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사람의 길 - 下 - 맹자 한글역주 특별보급판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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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 원문은 어렵다. 서양의 고전이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이기 때문에 어렵다면, 동양의 고전은 한문로 쓰여졌기 때문에 어렵다. 실제 나도 그렇고 내 주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맹자(孟子)>를 비롯하여 우리 세대에게 잘 알려진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어보고 싶어했다. 그런데 시중의 소설책처럼 <맹자>를 읽어보려고 손을 대지는 않는다. 왜 그런가?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질 않기 때문이다. 한문은 본래 단음절로써 의미의 단위가 이루어졌고 그 사이의 전치사나 접속사, 그리고 자세한 배경설명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한문을 아무리 잘 번역해도 그 본래의 뜻이 다 드러나지 않는다.


맹자는 공자(孔子) 에게 사숙을 받았다고 스스로 말한다. 공자와 맹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차이가 약 150년이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의 핵심을 승계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과 학문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君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지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그 꿈이 정리되어 있는 책이 바로 <논어(論語)>다.

맹자의 사상은 '왕도정치(王道政治)'와 '민본주의(民本主義)'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왕도정치의 핵심적 내용을 인정(仁政)으로 파악하고, 그 인정이 가능한 근거를 성선설(性善說)에서 찾았다. 즉 군주가 어진 마음으로 은혜를 널리 펴나가는 정치를 할 때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선성()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인()을 실현하고 도()를 깨달아 왕도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맹자는 인간이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음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주창한 셈이다. 그리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정전제(井田制)의 시행, 1/10의 가벼운 세금, 노동력 수탈의 완화, 고의성이 없거나 무지에서 비롯된 죄를 가볍게 처벌하는 등의 양민정책을 시행하는 것,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덕규범을 가르치는 교화(敎化)를 들었다. 왕도정치는 힘과 무력으로 통치하려는 '패도정치(道政治)'와 상반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민본주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으로 표현된다.
이 책을 번역하고 주해를 단 도올 김용옥 교수는 인류역사에서 순결한 도덕주의, 진정한 인문주의는 모두 맹자에 근원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서양의 도덕은 결국 신화적 뿌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21세기에 도덕의 회복을 외친다면 누구든지 <맹자>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일방적인 말씀의 모음집이 아니라 치열한 쌍방적 대화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대화의 기록 속에는 맹자와 그 학단의 투쟁의 역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맹자의 희망과 좌절, 기쁨과 눈물, 회한과 절규가 절절이 배어있다."

맹자의 '성선설'에서  유학(儒學)의 '사단(四端)'이 도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단이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 羞惡之心), 사양지심( 辭讓之心), 시비지심( 是非之心)을 말한다. 측은지심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을, 수오지심은 나쁜것을 멀리 하려는 마음으로 의()를, 사양지심은 남을 배려하여 양보하는 마음으로 예()를, 시비지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으로 지(智)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 시간이나 도덕 시간에 배운 '인의예지신(信)'은 애초의 공맹사상이 아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은 12세기에 지배자들의 통치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교(성리학 性理學)에서 처음 나타난다.

김용옥 교수는 책 속에서 자신의 동양학 연구 성과를 풍부하게 반영하여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고대 중국사에 대한 선입관을 흔들고 있다. 예를 들어 '요순(堯舜)시대'에 대한 여러 고전들을 비교하면서 '왕도정치가 구현되었던 요순시대'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맹자가 활동하던 전국시대의 주류적인 요순시대의 해석은 일반의 '설화'와는 달리 평범하고 잔인한 무력전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난 다만 맹자가 강력하게 사상과 학문을 세우고 교육하면서 후대에게 당시의 통념을 버리고 요순시대가 왕도정치, 도덕정치의 모범이었음을 받아들이게끔 했다고 주장한다. 요순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가치를 구현시킨 것이다. 이런 맹자의 요순의 가치 구현에 대해 그는 역사적 사실(史實)은 결국 '역사에 대한 해석'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맹자, 사람의 길 上>이 맹자의 정치철학과 정책, 왕도정치 등을 주로 다루었다면, <맹자, 사람의 길 下>는 맹자의 철학세계와 세계관, 그리고 당대의 다른 학자들과의 논쟁을 깊이 다루고 있다.

저자 도올 김용옥은 현재 한신대학교 석좌교수로서 기독교장로회의 목사들을 배출하는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맹자'를 강의하고 있다. 그리고 <맹자>를 출간함으로써 도올 김용옥은 이미 출간된 <논어>, <대학>, <중용>의 한글역주와 함께 사서(四書)를 완역하였다. '도올사서'는 12세기 주희의 <사서집주> 이래 가장 독창적인 한국인의 “우리사서”라 할 수 있다. 
 
[ 2012년 9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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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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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과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부시가 당선되었다. 부시는 보수파가 아니라 우파 내지 극우파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당시 대선의 결과는 20세기와는 다른 특성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51개 주 중에서 갠자스 등 전반적으로 '가난하다'고 평가받는 미 본토 중서부 지역에서 부시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잘 사는 지역인 본토 좌우 주에서는 민주당이 승리했다. 
캔자스 주 출신 언론인이자 정치평론가인 저자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캔자스 등 미국 중서부 지역은 20세기ㅡ초반부터 1960~70년대까지 진보적, 좌파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2000년 대선 결과가 나타난 이유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의 고향인 캔자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기 때문인걸까? 책의 제목인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는 역자와 출판사가 한국어로 번역하고 출간하면서 마케팅을 위해 작명한 것으로 보인다.

2000년과 2004년 공화당 부시 정권의 탄생은 클린턴 정부 시절 잠시 주춤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이 더욱 확대, 심화되도록 하였고 결국 2008년 미국민들에게 서브프라임을 시발로 하는 경제위기를 가져다 주었다. 부시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 뿐만 아니라 부자감세와 기업 이익 증대로 이어졌고 미국 내 사회적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그렇다면 왜 가난한 사람이 부자 증세를 반대하고 기업인들의 이익을 늘리는 정책에 몰두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걸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미국에서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은 민주당이다. 그러나 캔자스를 비롯한 낙후된 지역이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부자들의 정당 공화당을 지지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했는가?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여 우파의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정치조작의 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캔자스 주를 중심으로 정치가와 풀뿌리 운동가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하나 밝혀 나간다. 토마스 프랭크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여러 풍경들을 면밀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민중의 착란현상을 조장하는 보수 우파의 교묘하고 은밀한 집권 전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 책은 2004년 미 대선을 앞두고 발간되었는데, 당시 토마스 프랭크가 걱정스럽게 짐작했던 부시의 승리도 적중했다. 이 책은 발간된 후 장기간"뉴욕타임스"베스트셀러였으며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획기적으로 선거를 대비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애국심에 불타는 건장한 공장노동자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암송하면서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른다. 가난한 소농들은 자신들을 땅에서 내쫓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표를 던진다. 가정에 헌신적인 가장은 자기 아이들이 대학교육이나 적절한 의료혜택을 결코 받을 수 없는 일에 조심스레 동조한다. 중서부 도시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자기가 사는 지역을 ‘몰락한 공업도시’로 만들며 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날릴 정책들을 남발하는 후보자에게 압승을 안겨주며 갈채를 보낸다. 그곳이 바로 캔자스다."
저자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캔자스 주를 중심으로 정치가와 풀뿌리 운동가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하나 밝혀 나간다. 그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여러 풍경들을 면밀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민중의 단순화, 우익화를 조장하는 보수 우파의 교묘하고 은밀한 집권 전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 책은 2004년 미 대선을 앞두고 발간되었는데, 당시 토마스 프랭크가 걱정스럽게 짐작했던 부시의 승리도 적중했다. 이 책은 발간된 후 장기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였으며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획기적으로 선거를 대비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라고 하다.

저자는 ‘두 개의 미국’ 담론을 통해 공화당으로 상징되는 '빨간색 미국'의 특성이 어떻게 조작되었고 그것이 결국 어떻게 부시의 손을 들어주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본래 캔자스는 미국 내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지역이었다.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도시가 있었고 미국에서 가장 큰 좌파 운동이었던 민중주의가 전역을 휩쓴 곳이기도 하다. 이런 지역이 보수의 중심으로 돌변한 과정을 돌아봄으로써 보수화로 치닫는 미국 정치의 단면을 짚어준다 그리고 미국 내에 기독교적 가치가 강조되면서 현실의 경제적 문제가 은폐되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수 정치가와 자본가는 기독교적 가치를 역설하면서 당면한 현안에 빗겨가는 전략을 취하는데, 이것이 민중들에게 그대로 먹혀들여간다는 것이다. 결국 민중들은 자신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규제 철폐와 민영화를 비롯한 여러 자유방임 정책에 속수무책이 되고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미국과 많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 내 보수 기독교 집단의 정치개입과 정치선동 역시 우려할 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저자는 보수 우파를 진정으로 신앙심 깊은 보통 민중과 기회주의자로 나눈다. 보수 우파에게 순교는 애국심과 동일 선상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울러 보수 우파 지도자들의 명백한 위선적 언행에 대한 일반 보수주의자들의 무관심은 보수대반동이 보여주는 놀라운 문화적 현상이라는 점을 비판한다.

"보수 반동의 지도자들이 말로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행동은 기업을 위할 뿐이다. 가치는 유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보수파가 선거에서 이기는 순간 전통적 가치들보다 돈이 더 중요해진다. 이것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현상의 기본적 특징이다. (중략) ‘레이건은 자신을 전통 가치의 수호자라고 자처했지만... 그가 정말로 주목한 것은 20세기의 규제 받지 않는 자본주의의 부활, 뉴딜정책의 폐기였다."

2000년 미국에서 보수대반동을 일으켰던 공화당의 주도 세력은 과거 전통적인 미국의 보수 중도파와 달리 '네오콘(NeoCon)'이라 부르는 기독교 우파였다. 이들은 중도파와 자유주의 성향의 보수파조차 민주당의 하수인으로 매도할 정도로 극우적 성향을 띤다. 보수대반동은 이런 기독교 우파들의 '문화전쟁'을 바탕으로 격렬하게 진행되는데, 그들의 문화전쟁은 낙태와 동성애, 진화론, 총기 소지 문제와 같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화현상에 민중의 분노를 집중시킨다. 떠들썩한 그들의 주장 속에서 민중들의 삶과 지역의 피폐함이 경제구조와 그에 따른 계급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은폐하게 만든다. 가치를 내세우면서도 수많은 사람의 목을 조르는 규제 철폐와 노동 유연화를 비롯한 자유방임 정책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하는 것이다.
기독교 우파의 문화전쟁은 격렬하게 진행되지만 현실적으로 미국 내에서 실질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연방대법원에 십계명 비석을 세운다거나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다거나 하는 것은 실제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 그들이 주도하는 문화전쟁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그건 가치의 실현이라기보다 민중의 도덕적, 종교적 감정을 정치적 분노로 만들어 선거에서 자유주의 세력을 공격하는 용도로 활용된다. 문화전쟁으로 얻은 것은 단지 보수 우파의 정치적 승리일 뿐이며 그것은 부자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안겨줄 뿐이다.
캔자스의 문화전쟁에서 분수령을 이룬 것은 위치토에서 일어났던 낙태 반대 운동인 1991년 ‘자비의 여름Summer of Mercy’이었다. 이 운동이 성공을 거두면서 캔자스는 급격하게 우경화되고 보수 반동의 기운이 맹렬하게 힘을 갖게 된다. 보수 반동의 문화전쟁은 미국 내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낙태 문제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낙태 반대를 제기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헤프닝들은 광기를 동반하기도 하면서 시끌법썩하게 진행되며 기독교 우파의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이런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반드시 부자들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부유하지 않지만 자신들의 많은 것을 내놓고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풀뿌리들이 많다. 이들의 적극적 활동은 결국 공화당의 승리로 귀결되지만 자신들이 비판했던 대부분 기업가인 공화당 중도파에게 실질적 이익을 안겨준다.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들이 만들어지는 역설적 상황을 저자는 심각하게 지적한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단시간에 지금처럼 보수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뉴딜 정책 이후 미국에서 보수 우파의 입지는 좁아졌는데 대중의 지지를 잃고 언론의 비판 대상이 된 보수 우파가 다시 권력을 되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뉴딜 이후 잃어버린 대중의 지지를 되찾기 위해 그들은 1960년대부터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영향력 있는 언론매체를 장악하고 보수 기독교와 '가치의 연합'을 구축하는 데 적어도 한 세대의 시간을 보냈다. 공화당은 보수 교회의 가치에 편승해 기독교 신자를 공화당 유권자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독교 보수세력을 끌어들인 것은 보수의 큰 소득이었다. 최근 보수대반동 상황의 문화전쟁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어 구호만 난무한 가치의 문제가 전면으로 이슈화되고 현안이 되어야 할 보다 실질적인 경제 문제가 뒤로 처지게 되어 보수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선거결과가 발생했다. 2000년 대선의 승리는 실로 그들이 갈망했던 뉴딜의 완전한 폐기가 가까워지고, 장기간에 걸친 노력이 제대로 성과를 맺는 사건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보수 우파의 집요한 노력에 비해 민주당과 미국 내 진보세력은 여러 면에서 안이했고 실책을 범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그는 특히 1996년 중간선거 패배 이후 클린턴과 민주당이 선택한 '삼각화 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전략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인 노동자, 농민, 서민층을 버리고 일부 중도 성향의 보수파와 지식인들을 포섭하려고 했다. 삼각화 전략은 오히려 민주당이 스스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들의 가장 든든한 지지층은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부자들에게 유리한 경제노선으로 돌아서고 자신들조차 경제 문제를 정치 의제화하지 못한 것은 크나큰 오류였다. 저자는 민주당이 비록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그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으며 어리석은 결정이었다고 지적한다. 그의 지적대로 민주당의 오판은 2000년, 2004년 대선의 패배로 이어졌다.

"좌파들이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며 자신들이 잘났다고 만족해하는 동안 우파는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부지런히 그 일에 몰두했다. 보수주의 ‘운동문화’의 거대하고 복잡한 구조를 주목하라... 위치토의 코크 일가가 운영하는 것과 같은 재단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돈은 최고 수준의 정치 투쟁에 흘러들어가고 자유시장 경제학을 가르치는 대학과 잡지, 그리고 버넌 L. 스미스와 같은 사상가들을 매수한다. 그리고 후버 연구소나 미국기업연구소 같은 싱크탱크들은 앤 쿨터나 디네시 드소우자 같은 우파 전문가 집단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그들이 계속해서 책을 쓰고 언론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또 그들을 지원하는 전문 로비스트 집단과 몇몇 잡지와 신문들, 그리고 출판사 한두 곳도 있다. 그리고 밑으로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웃들을 조직하고 심지어 보수 반동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기 집까지 저당 잡히는 마크 기첸과 팀 골바, 케이 오코너와 같은 헌신적인 풀뿌리 조직가들도 있다."

저자의 이야기 속에서 한국의 정치를 돌아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저자의 이야기는 지난 4월 11일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와 관련해서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번 총선거는 2008년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한 현 집권 여당인 보수세력의 경제 정책 실패와 각종 비리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당의 승리를 점쳤다. 게다가 야당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시민운동 세력과 통합하고 진보정당과 연대하여 야권후보 단일화도 이루어냈다. 그러나 결과는 야당의 패배였고 다가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도 야권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2012년 한국의 총선 지도는 2000년 미국의 대선지도처럼 빨갛게 변해버렸다. 한국의 정치상황이 저자가 분석한 미국적 상황과 온전한 비교가 가능할 수 없을 테지만, 보수진영의 교묘하고 집요한 정치 조작술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핵심적 현안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 문제를 전면으로 부상시켜 유권자들을 헷갈리게 한다거나, 삽시간에 당명까지 바꾸어 탈바꿈하는 보수의 놀라운 힘에서 미국 보수집단과 한국 보수집단의 동일한 메커니즘이 작용한다. 미국 보수진영의 '문화전쟁'은 한국 보수진영의 '이념전쟁'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낙후된 지역에서 보수정당인 공화당에 더 많은 표를 던지듯 한국사회의 적지 않은 저소득층이 보수정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지역주의 투표 형태를 감안하더라도...)
 
결국 이 책은 "정치란 결국 민심의 마음을 어떻게 얻는가"가 관건이라는 점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보수정당의 뛰어난 정치 조작술과 자기 계급적 이해와 상관없는 투표행위와 관련해서 우리의 정치적 현상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보수우익 진영처럼 비열한 꼼수를 쓰고 계급적 이해관계를 벗어던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보수우익 진영의 그러한 방법과 전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원칙적이고도 유연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정치 상항에서 생각해보면, 민주통합당과 진보정당이 새누리당의 이념적 공세와 언론조작을 극복하고 좀 더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동자, 농민, 서민, 사회적 약자 편에 굳건히 서야 함을 의미한다.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놀아나지 않고 민주진보세력이 연대의 위력을 공고히하면서 유권자들의 마음과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과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인상적인 문장 :

- 보수 반동의 지도자들이 말로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행동은 기업을 위할 뿐이다. 가치는 유권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지만 보수파가 선거에서 이기는 순간 전통적 가치들보다 돈이 더 중요해진다. 이것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현상의 기본적 특징이다. (중략) "레이건은 자신을 ‘전통 가치’의 수호자라고 자처했지만 (중략) 그가 정말로 주목한 것은 20세기의 규제 받지 않는 자본주의의 부활, 뉴딜정책의 폐기였다." (p.16)

- 미국인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중을 선동해서 공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이익만 주는 반란을 경험했다. 우리가 캔자스에서 본 것은 이런 수수게끼 같은 현상의 극단적인 모습이다. 오늘날도 엄청나게 많은 성난 노동자들이 오만한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거리에서 행진하고 있다. 그들은 특권층의 후손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그들은 리우드에 사는 상류층들이 보내는 작은 호의를 비웃고 있다. 그들은 미션힐스의 대저택들 앞을 지나면서 조기를 게양한다. 그들은 백만장자들이 떠는 동안 자신들의 끔찍한 요구 사항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그들이 외치는 구호는 결국 “우리는 당신들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해 여기에 있다”라는 말이다. (p.142)

- 기업계는 인류가 자유시장 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로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어떤 주장도 결국에는 (중략) 인간의 오만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반지성주의를 이용한다. (중략) 공화당은 그 지긋지긋한 박사들과 그들의 훌륭한 연구, 그리고 그들의 정부기관들을 비난하기 위해 보통 사람들을 규합할 때 여러 가지 합리적이고 심지어 고결하기까지 한 반지성주의 전통들을 강요했다. 그러한 반지성주의의 첫 번째 주자가 바로 개신교 복음주의다. (중략) 보수주의자들은 20세기의 모든 개혁 노력을 인간이 자유시장의 또 다른 이름인 하느님이 부여한 불변의 질서를 억누르고 자기 멋대로 바꾸려는 강제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p.243~245)

- 텔레비전과 영화가 우리의 삶과 상상력을 지배하는 미국에서 자유주의가 우리를 지배한다고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략) 그러나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문화사업도 기본적으로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있는 것이지 민주당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이러한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보수 반동 세력을 뒷받침하는 힘의 원천이다. (p.287~288)

[ 2012년 7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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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 -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
안병길 지음 / 동녘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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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교재로 만나게 된 이 책은 먼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이라는 제목에 끌렸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아! 제목에 낚였다...ㅠ"라는 느낌이 얼핏 들었지만 기존의 정치학자나 이론가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방식과 조금 다른 관점과 방향을 제시한 것은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은 도입부도 조금 혼란스럽다. 저자 안병길은 이 책의 서문을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벗깁시다!"라면서 시작한다. 그는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소모적인 보수/진보, 좌파/우파 싸움"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이 '그 망국적인 싸움을 자유민주주의라는 준엄한 칼로 잠재워 버리'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권위주의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곧바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그래서 떨떠름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의 도입부를 쉽게 수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 자유민주주의와 대립하는 것인가? (결국 저자 자신도 책의 본문에서 주장하듯이) 자유민주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것은 권위주의와 독재(파시즘)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와 파시즘은 한마디로 말해 상대방의 존재와 의견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주장을 떠나서 상대방의 존재를 지워버리려 하는 이념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나 좌파와 우파의 싸움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인념대립 문제의 성격은 '대립과 싸움'이 일정 정도의 선을 넘어서 상대방의 존재를 억압하고 지우려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며, 더 나아가 보수와 우파가 권위주의와 파시즘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과 이명박, 그리고 그들의 일당독재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을 공권력으로 짓누르면서 진보적인 세력과 좌파진영을 국가보안법과 형법, 각종 악법으로 탄압했다. 조중동을 비롯한 우익언론과 우익세력은 진보와 좌파진영을 포함한 비판세력에 대해 친북이니 종북이니, 빨갱이라고 매도하면서 남북분단 상황을 악용하여 비판세력 전체를 늘 공식적인 공간에서 지우고 없애버리려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 반면에 김대중과 노무현,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으로 대별되는 진보세력과 좌파진영, 그리고 비판세력의 경우 지난 10년간 정권을 잡은 기간 뿐 아니라 그 전후 기간에도 우익세력이나 우파진영을 '없애버리려고' 공권력을 동원한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사회 내의 진보, 보수세력의 태도와 입장에 대한 저자의 선입견, 혹은 대전제에 대한 비판은 이 정도에서 끝내고 저자가 제기하려는 '자유민주주의'의 본모습을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과거 독재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을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자유민주주의는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였다"고 규정한다. 반공만이 자유주의라고 강변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정파만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이상향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진보세력과 좌파진영을 향해 제기한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주의에 기초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보편적 정치,사회 이념"이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책의 본문에 들어간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의 주장은 이렇다. 권위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가 ‘맞짱’ 토론을 하면 권위주의자가 이길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럴까? 권위주의자는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유민주주의자는 상대방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자의 주장이 깊어질수록 자유민주주의자는 지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전체 사회로 확대해 보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권위주의자의 공격에 약자들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지금 권위주의자들이 우리의 일상과 정치에서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강자로 군림하면서 수많은 억압을 행하고 있다. 자신들이 하는 것이 오로지 선이고, 민주적이라며 거짓말까지 일삼고 있다. 사회적 약자는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권위주자의자에게 늘 당하기만 한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쳐 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럴 때 자유민주주의의 속성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자유민주주의자가 많아야' 한다. 힘을 합치지 않으면 권위주의자들의 폭압에 심하게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권위주의자에게 저항해야 하고, 사회에 참여해 발언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이런 자유민주주의가 잘 작동되기만 하면 약자가 충분히 강자를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바로 지금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적인 권위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자유와 민주가 제대로 정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저자의 전략과 방법이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저자 스스로 우리 사회에 자유민주주의자가 많지 않다고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왜곡되어 있으며, 잘 구현되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말대로 상당수 시민들이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개념부터 시작해 자유민주주의가 우리의 일상과 정치에 적용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합리적 선택 이론, 맞대응 전략, 게임이론 등을 활용하며 약자가 어떻게 강자에 맞서 이길 수 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저자는 우익단체에서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권위주의'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의견과 다르면 상대방을 일종의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각을 권위주의적이라고 정치학에서는 말한다. 반공은 선, 공산주의는 악, 그런 식이다. 따라서 반공만 자유주의라고 고집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시각이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권위주의이지 절대 반공이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권위주의자의 '엉터리' 자유민주주의 가면을 벗기자고 권하고 있다. 시민 스스로 자유민주주의 기본을 깨우치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저항하고 투쟁해야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 헌법에는 분명히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가정, 직장, 인터넷 공간, 정치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보수우익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처럼 어느 누구도 이 용어의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상태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저자는 우선 도덕, 윤리 교과서부터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개인의 권리보다는 공동체, 국가가 더 소중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자유민주주의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는 이타주의와 공동체를 너무 강조한다. 애매모호한 공동체 잣대를 들이밀면서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착하게, 바르게, 관용을 베풀면서, 전체를 위해 살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공동체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마치 전체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조장하기도 한다. 이런 분위기는 오히려 권위주의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이 되려면 반드시 교과서 내용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교과서에서 강조하듯 법과 질서는 시민이 지켜야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개인주의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교과서가 설명하듯이, 그 존재 자체가 모호한 공동체를 위해서 지키라고 하면 감동이 일어나겠는가?"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곧 자유주의에는 자유, 권리, 그리고 저항이라는 개념이 작동하고 있고, 민주주의에는 단순과반수 원칙, 주권재민, 평등이라는 개념이 작동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를 견제하기도 하고,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우리의 생활과 정치에 작동하고 있다. 저자는 독재와 권위주의의 망령이 끊임없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국가가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지만, 이것이 잘되지 않을 때는 시민과 개인이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잘 작동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개인 스스로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남의 자유와 스스로의 자유를 잘 지켜야 하며, 부당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저항을 해야 조금이라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4대강,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 문제, 촛불시위 등 정치적 이슈를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으로 분석한다. 과연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걸맞게 자유민주주의적으로 일을 처리했을까? 저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밀어붙인다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운하나 4대강 살리기도 마찬가지이다. 추진하는 쪽은 항상 공공복리를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공공은 애매하지도 않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과반수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공의 이익이라고 하지 말고, 아예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는 권위주의적 주장을 했다면 알량한 일관성이나마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또 촛불시위 때 '정권 퇴진' 구호가 난무했다고 해서 집회가 순수성을 잃고 변질되었다고 비난했는데, 저자는 정권 퇴진 구호는 자유민주주의 속성상 하나도 문제가 될 게 없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시민이 정권에 대해서 정치적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운동도 합법적으로 조직할 수 있다. 
진보, 중도, 보수라는 이념 스펙트럼도 자유민주주의 안에서 논의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사상의 자유와 정당 설립의 자유가 보장되므로 공산주의 정당도 원칙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헌법 어디를 뒤져 봐도 공산당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조항은 없다. 그러나 분단국가라는 구조 때문에 공산주의 정당이 우리나라에 발을 붙이기 힘든 것이지 공산주의 정당이 불법인 것은 아니다. 민주적이라는 조건만 충족시키면 공산당도 우리나라에서 허용된다고 봐야 한다. 곧 자유민주주의 국가에는 어떤 이념도 허용되며, 서로의 이념을 바탕으로 공정한 경쟁을 치를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제도가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시하는 원리인 '단순과반수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아직까지 민주화 이후 과반수 유효득표를 한 대통령 당선자가 없었다. 공공선택이론 관점에서 보면 이런 선거제도는 결정정인 결함이 있는 제도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단순과반수를 적용할 수 있고, 우리나라 정치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역구도의 정치 틀이 깨질 수 있고, 중도나 진보정당의 활동 폭이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 대통령 선거제도뿐만 아니라 지역주의 완화를 위해 국회의원 선거제도도 개선하자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일상과 인터넷에서 자유민주주가 더 잘 구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생활화되어야 사회나 정치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더 잘 작동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야 약자가 강자에 맞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 일상과 인터넷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사회 개선을 위한 성냥불 운동'을 제안한다. 이것은 "작은 곳에서, 가능성이 큰 것부터 시작해서 더 큰 부문으로 옮겨 가는 방식"이다. 곧 개인부터 잘하자는 운동이다. 조그마한 자유민주 성냥불들이 모여서 자유민주주의를 더 밝게 비추는 큰일을 해내는 것이 현실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혁명적인 변화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 지키기에 최선을 다하면 더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를 더 빨리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시기입니다. 국가와 정치인의 방종에 경계선을 그어 주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자유민주주의 참여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아울러서 더 많은 시민이 국가의 간섭이 필요 없는 인터넷 자유공간을 지키기 위한 조그만 성냥불을 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2012년 7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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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이야기 멈퍼드 시리즈 2
루이스 멈포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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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우도 있고, 말년에 접어든 노인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듯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수능시험과 대학입학이라는 고지를 넘어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청소년들도 있고 공무원시험이나 대기업 취업, 창업이나 노래실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아이들의 분유값과 유치원비, 사교육비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택대출 원리금을 갚거나 새로 오픈한 커피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살아가기도 한다.
즉, 사람들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살아갈 희망'을 간직하면 하루하루의 즐겁거나 힘든 과정을 겪어나간다. 살아갈 이유나 희망이 없으면 인간은 좌절할 뿐 아니라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품은 개인적인 꿈과 희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왜소해지거나 포기하게 되고 주어진 현실과 조건에 만족하거나 불만족스럽더라도 '살아갈 이유'가 있거나 '희망'이 있으면 사람들은 힘든 오늘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현실에서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개인이 사회적인 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우리사회에서도 언젠가부터 꿈과 희망이 금기어가 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잦아들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헛된 꿈이었고 이데올로기이자 선전에 불과했던 "부자되세요" 마저 이제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가족, 친지 중에서 그리고 지인이나 이웃 사람들 중에서 이전보다 삶이 나아진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학부모가 된 어른들은 사교육비와 주택대출금에 쪼들리고, 실업과 폐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젊은이들은 학자금 대출상환과 비정규직, 구직난, 전세난, 육아의 두려움 속에서 짖눌려 살고 있다. 양극화와 빈부격차는 피부로 절감된다. 이러한 정황은 각종 통계수치에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왜냐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할 정치권과 정부, 언론, 지식인들이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으며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기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무기력해지고 좌절하고 있고 사회는 전체적으로 활력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할 이유'는 남아있지만 '살고 싶은 희망'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희망과 비전을 새로 만들고 제시하고 외치고 싸워야할 젊은이들과 체제 저항세력이자 대안세력들마저 그 희망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내 대안세력이라고 할 만한 집단은 정치분야와 사회,학문분야에 일부 존재한다. 경제분야와 문화분야에는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분야의 대안세력이라 할 만한 통합진보당은 최근 당 내분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고, 한동안 회복기가 필요해 보인다. 사회분야의 각종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20세기보다 존재감이 더욱 사그라든 채 '존재감'만 남아있다고 생각된다. 언론과 학계에는 대안세력이라고 불러줄 만한 집단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이미 실패가 검증된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고 사회주의와 비슷한 또 다른 '주의'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다. 관념화된 단어와 개념을 붙잡고 버티는 이들도 있고 가야할 길을 잃어버려 방향을 서서히 유턴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내가 현재의 상태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불의와 부정에 저항하는 개인과 집단이 여전히 다수 존재한다. 그들은 양심적이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희망적인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컨대 그들은 비판적이고 저항적이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비전과 정책은 말과 자료집 속에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시도되지도 검증되지도 못하고 있다. 그들은 모여서 논의하기 보다 흩어져서 서로 싸우기에 바쁘고 공통점을 가지고 무언가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보다 상대방의 시도를 폄하하기에 바쁘다. 과거의 이념과 방식을 못벗어나고 있고 자그마한 권력을 놓고 서로 옹졸하게 다투고 있다. 구체적인 현실과 사람 속에서 대안과 비전을 만들기보다 말과 주장으로서, 힘과 권력을 먼저 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스스로 먼저 성찰하고 상대방을 포용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의 잘못을 꾸짖고 욕하고 제거하고 주도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내가 부정적인 것이다.
 
과거에 보였던 것 같은 희망이 이제 잘 보이지 않는다. 아득하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그리고 희망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책이 도움이 되었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동양식 개념과 사고방식이 강한 우리들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물론 저자가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유토피아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존에 서구에서 논의되고 존재해왔던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책은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알려진 루이스 멈퍼드(1895~1990)의 처녀작(1922녀누초판 발간)이자 94년 평생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도시학자, 역사학자, 문예 비평가, 건축 비평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유토피아의 비전을 제시했고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했던 멈퍼드의 총 28권 저작을 일관하는 주제가 문명의 비판과 현대 사회의 개혁이라면 이 책은 그런 멈퍼드의 사상을 집약한 책이기 때문이다. 멈퍼드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쓴 이 책을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에 초판의 내용 그대로 재간행을 승인한 것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멈퍼드는 "유토피아란 인간이 처한 환경에 대한 반응이자, 주어진 현실을 인간적 형태로 바꾸려는 시도이며, 언젠가 구현될 미래에 대한 예견"이라고 정의한다. 그가 분류하는 유토피아에는 도피 유토피아와 재건 유토피아가 있다. 저자는 서구 유토피아의 전통에서 두 가지 유형의 유토피아를 모두 다루되 플라톤에서 H.G.웰스에 이르는 도피 유토피아의 고전적인 예들을 설명하고, 재건 유토피아를 사회적 신화와 사회이론가들의 당파적 유토피아로 구분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인 1922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이 책은 인류가 공통의 목표를 위해 이기적 쾌락을 거부하고 거대도시의 혼란을 지역주의 질서로 재건해 나아가야 한다는 멈퍼드의 시대를 향한 열망을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과 모어 등 대표적인 유토피안들은 한낱 몽상가나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당대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현실주의자'들이자 '현실적 불만분자'들이었으며, 특히 이들은 대단히 구체적으로 대안적 유토피아의 지리적, 제도적 조건을 제시하면서도 전체 인간 사회의 조화를 으뜸으로 하는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의 소유자들이었다.
전후 재건의 의지와 희망에서 출발한 이 책의 유토피아 과거 읽기와 미래 전망이 2010년을 사는 우리에게 유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명화와 함께 날로 심화되어 온 세분화와 전문화 그리고 편파성으로 인해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더 이상 통합적으로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현대인은 멈퍼드가 선별한 유토피안들의 전체론적 시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인간 생활을 '잡다한 우연사의 혼합'으로 보고 상호 관련되는 유기체적 전체로 보지 못한다면 진정 더 좋은 삶,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현실의 이상적 비판'과 '미래의 현실적 구상'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니까...
 
인류의 대다수에게 가혹했던 20세기 주류 문명, 21세기 들어와서도 한국에 엄청난 질곡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자본주의의 극복과 또 그 대안으로서 21세기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인상 깊은 문장 :
 
- 플라톤의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나타난 사회적 붕괴의 시기에 쓰였다. 그 신랄한 어투는 필경 플라톤의 눈에 비친 희망 없는 상황에서 나왔으리라. 토머스 모어가 상상의 나라를 위한 기초를 세운 시기도 마찬가지로 무질서와 폭력의 시대였다. 즉 유토피아는 낡은 질서인 중세와, 새로운 관심이자 체제인 르네상스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자 만든 다리였다. (p.27)
 
- 모어는 인간의 본능에 자기주장이나 과시욕이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영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귀금속을 경멸했다. 황금은 변기나 노예의 쇠사슬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진주는 아이들에게 주어 어릴 때는 그것을 자랑하거나 즐기도록 하되 그 뒤에도 인형이나 장난감으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에서는 화려한 옷이나 보석이 유행이 지난 것으로 취급됐다. (중략)
단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경작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고 마시며, 명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고 꿈꾸며 창조하는 것, 즉 살아 있는 현실을 붙잡고 환상을 물리친다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 사람들이 취하는 생활방식의 본질이다. 권력과 부와 권위와 명성은 추상적인 것이고, 사람들은 그 추상적인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이러한 신세계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괴물이 되는 기회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인간의 주된 목표는 인간으로서 최대한 성장하는 것에 있다.(p.86)
 
-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역과 자연스럽게 집단화된 사람들 대신, 국가주의 유토피아는 측량 기사가 그은 선에 따라 국토라고 하는 영역을 확립하고 그 영토의 주민을 모두 국민이라는 단일한 불가분의 집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국민이란 권리와 권력의 측면에서 다른 모든 집단에 우선하는 집단이라고 가정됐다. (중략)
달리 말하면 국경선은 그 주민이 국민으로 행동하는 한에서, 주민이 세관, 이민국, 국경 경비대, 교육제도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지불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러한 상상의 경계선을 허가 없이 넘고자 하는 다른 집단을 죽여서라도 저지하려는 경우에만 존속된다. (p.229)
 
- 당파적 유토피아(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최종적 비판, 즉 일방적 개혁운동의 치명적인 결점은 바로 일방적이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당파성은 개별 계획안의 토대가 되는 여러 사실과의 관계나, 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 태도에서 나타난다.
당파성의 근본을 이루는 심리는 법정에서 변론하며 그 논증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찾는 변호사의 심리와 유사하다. 이러한 정신적 태도는 말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설령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가 생긴다 해도, 사실에 대한 개인의 태도가 사실 그 자체보다도 중시되고, 마침내 사실이 무시되는 정도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미국 남부의 일부 백인 집단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진위를 따지지도 않고 그 흑인 남성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러한 집단 행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잔인한 측면을 부각한다. 인간은 본래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하는 쪽이 먼저다. 왜냐하면 심리학자가 말했듯이 생각은 억제된 행동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억제란 우리와 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한 분노에 몸을 맡겨 장애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장애로부터 후퇴하여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우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인가 하는 어려운 선택에 부딪힐 때, 우리의 본능적 충동은 전자를 따르게 된다.
이는 자본가 조직의 성장에 수반한 인간의 무서운 고뇌를 보고 사회주의자들이 소유와 이윤이라는 문제에만 관심을 쏟고, 그 결과 사회주의화 계획에 의해 개선이 가능한 조직과 분배, 그리고 관리하는 산업 현장의 구체적 문제를 무시했다는 예를 보면 알기 쉽다. 이처럼 한 문제의 특정한 면에 관심이 집중되면, 특정한 해결책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문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게 된다. 인생은 짧고 목전의 필요는 더욱 크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해결이나 치유는 더욱 급박하게 되어 각 당파의 활동가들은 사실을 완벽하게 확인하고 자료를 철저히 조사하는 대신 너무나도 안이하게 '상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결점은 인간의 거의 본능적인 당파적 성향에서 비롯되고 당파성을 유지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중략) 당파성에 따르는 두번째 결함은 공동체를 수직적으로 분할하고, 인간 생활 속의 수평적 연대와 충성심에 대립하는 가공의 적대감과 동족의식을 조장한다는 점이다.(중략)
당파적 인간이 간과하는 것은 저속한 생활에도 인간으로서의 확실한 기쁨이 있고, 대다수 인간에게는 결국 그것이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일 뿐만 아니라 본래적으로 충족된 좋은 생활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존 어빈의 희곡에 나오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대신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기병대와 인디언, 사회주의자와 자본가, 금주법 지지자와 반대자를 대치해도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인간의 생활은 사실 그러한 범주를 넘는 여러가지 관계로 성립한다. 그러나 당파의 인간은 유토피아 사상과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회 일반의 관계를 경시하고, 사회를 '주의'에 봉사하게 하며, 사회관계를 무시하여 '운동'에 몸을 바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당파주의의 가장 큰 죄악이다.(p.258~261) 
 
[ 2012년 7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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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 갈색 눈 - 세상을 놀라게 한 차별 수업 이야기
윌리엄 피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968년 4월 4일은 미국인들이 절대 잊지 못하는 날이다. 당시 미국사회에 만연해 있던 흑인 차별에 대항해 싸우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해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의 담임선생이었던 제인 엘리어트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다는 것을 느꼈고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여 거의 밤을 세웠다. 그녀가 아이들과 처음 시작한 '차별 수업'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 책은 그녀가 담임을 맡고 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체적 차이에 따른 차별을 경험하게 했던 유명한 실험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그녀는 눈동자 색으로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첫 날 '갈색 눈'의 학생들이 '푸른 눈'의 학생들보다 ‘우월하다’고 선언하고 특혜를 주었다. 갈색 눈의 학생들은 쉬는 시간을 5분 더 가질 수 있었고, 점심을 먼저 먹으러 갔으며, 음식도 더 먹을 수 있었다. 교실 앞쪽에 앉는 것도, 줄반장을 하는 것도, 놀이 기구를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놀 수 있는 것도 갈색 눈의 아이들이었다. 또한 푸른 눈의 아이들은 갈색 눈의 아이들에게 초대받지 않으면 갈색 눈의 친구들과 놀 수도 없었다.
다음 날, 푸른 눈의 학생들과 갈색 눈의 학생들의 역할은 뒤바뀌었다. 푸른 눈의 학생들은 전날 갈색 눈의 아이들이 받은 특혜를 받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은 학생과 교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틀간 ‘열등하다’는 딱지가 붙은 아이들은 정말로 열등한 학생들의 태도와 행동을 보였고, 성적도 형편없었다. ‘우월한’ 학생들은 성적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이전까지 친구였던 아이들을 차별하는 데 즐거움을 느꼈다.
‘차별의 날’ 첫 번째 수업 이후 아이들은 이렇게 다양하고 솔직하게 ‘차별’에 대해 정의하는 글짓기를 했다. 아이들은 글짓기에서 자시들이 스스로 경험한 차별을 통해 차별이 얼마나 또 어떻게 나쁜지에 대해 강렬한 느낌을 받았는지 말한다. 또한 이 실험 후에 그녀는 '편견은 차별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인식했다. 혐오스럽긴 할지언정 둘 중 훨씬 덜 해로운 것은 편견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녀는 편견은 주로 사람들의 삶을 그들이 살아가는 그대로 제한하고, 시야를 좁히며, 세계를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반면에 차별은 다른 사람들의 삶, 수백만 명의 삶을 불구로 만든다. 마틴 루터 킹도 편견이 아니라 차별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삶을 학생들이 단 하루라도 살아보길 바랐다. 그리고 그 하루의 고통이 그들로 하여금 이후 평생에 걸쳐 단 한 사람에게라도 비슷한 종류의 고통을 끼치기를 거부하도록 돕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 하루의 연습은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차별 수업을 통해서 그녀의 3학년 학생들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눈의 색깔 때문에, 목에 두른 깃 때문에, 또는 피부색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격리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배웠다. 교사인 제인 엘리어트가 이 실험을 진행하면서 비록 일시적이나마 학생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끼칠 위험, 그리고 학부모와 동료 교사의 분노를 감수하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와 헌신이 필요했다. 그러나 실험 결과와 이후 일어난 일들은 그 모든 것이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며, 한 교사가 인종차별주의로 아이들의 마음이 불구가 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사실 그녀가 차별 실험 수업을 시작한 뒤 몇 년간, 그녀의 네 자녀는 한 번 혹은 그 이상 다른 학생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당하는 희생자가 되었다. 그녀의 3학년 학생들이 당했던 것처럼, 자녀 역시 종종 ‘깜둥이 애인들’이라고 불렸다. 결국 제인 엘리어트의 가족은 라이스빌을 떠나 가까운 마을로 이사를 갔고, 그녀의 아이들은 다른 학군에서 공립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엘리어트는 1970년대 중반 시카고에서 살해 협박을 당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흑인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을 탈출하기도 했고, 살해 위협도 여러 차례 받았고, 교육 도중 백인 남자에게 칼로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최근까지도 기업, 정부 기관, 대학에서 다양성 교육을 해오고 있다.
 
제인 엘리어트는 읽기를 배우는 데 뒤쳐져서 특별지도가 필요하다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두 번째로 이 차별 실험 수업을 진행했으며, 세 번째 진행한 수업(학급 아이들의 여덟 명은 푸른 눈이었고, 또 다른 여덟 명은 갈색 눈이거나 녹색 눈이었다. 첫날 차별을 받는 갈색 눈의 아이들은 목에 깃을 하나씩 둘러 멀리서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했고, 다음 날에는 푸른 눈의 아이들이 목에 깃을 둘렀다.)은 저명한 상을 받은 ABC TV 다큐멘터리 [폭풍의 눈(The Eye of the Storm)]에 담겼다. 이 책 안에는 다큐멘터리를 찍을 당시의 제인 엘리어트와 아이들 모습, 촬영하는 모습, 동창회 모습 등이 담겨 있다.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인종이나 피부색 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동남아, 조선족, 중앙아시아 출신 외국인이나 혼혈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의식과 행동이 자주 기사화 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한국전쟁 후 미국식 문화가 주로 수입된 영향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인종차별 또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은 독특하다. 흑색이나 유색인종은 차별하면서 미국인이나 유럽인과 같은 백색인종에 대해서는 선호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2012년 5월 현재 130만 명 이상의 외국인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출생하는 아이 100명 가운데 4명은 다문화가정 출신이라는 통계가 발표된 바 있다. 2010년 국내에서 결혼한 부부 열 쌍 중 한 쌍이 다문화가정일 정도로 이민자와 이주자 수가 늘어나고 있고, 2011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피부색, 인종, 민족, 종교, 출신 국가 등 다문화적 요소를 이유로 차별당했다며 진정을 제기한 사례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두 배로 급증했다. 또 2012년 4월 여성가족부가 성인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발표한 ‘다문화 수용성 조사’에서 ‘다양한 인종, 종교, 문화가 공존하는 것이 좋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36퍼센트였다. 이는 유럽 18개국의 평균 찬성 비율인 74퍼센트의 절반 이하다.
이런 한국의 실정과 다문화가정에 대한 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번역자인 김희경 씨가 해설 및 옮긴이 후기에서 자세하게 들려준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차별이 어른들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가 극복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문제는 공동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고 세대와 세대가 거듭될 때마다 반복해서 아이들에게 교육하고 일부러 깨우쳐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의 공동체가 계속되는 한 끝나지 않는 숙제와 같다는 것을.
 
사실 우리 사회에서 '차별'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피부색이나 인종에 의한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차별'이란 단어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사회는 상당히 많은 '차별'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과거에 출신 지역에 대한 차별(지역차별)로 존재해왔고 자산의 정도에 대한 차별로도 존재해왔다. 지금까지도 재능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오로지 시험성적만으로 대우하는 교사와 학교도 아이들을 차별하고 있는 것이며, 대학 졸업장 유무에 의해 취업과 승진에 차별을 두기도 했다. '학벌(독점)만능주의'는 실력과 경쟁력이 아니라 서울대 등 일부 명문대 졸업장만으로 사회의 요직을 독점하여 전사회적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있고, 차별을 억압하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재벌과 기득권에게 차별적인 혜택을 주어왔다. 동일한 업무와 동일한 업무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임금과 복지에 차별을 두는 기업들의 행태는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고 상대방을 정치적, 문화적으로 차별하고 '종북'이나 '좌파'라는 식으로 억압하려는 정치권과 기득권자들의 모습은 차별이 우리사회 전체에 뿌리깊게 박혀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 인상 깊은 문장 :

“지금 당신의 손에 이 책이 들려 있게 된 사연은 열한 살 소녀가 서툰 솜씨로 그린 한 장의 그림에서 시작되었다. 도화지의 위쪽 절반에는 주먹만 한 글씨로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하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다. 그 아래엔 덩치 큰 아이 세 명이 나란히 서서 혼자 동떨어진 작은 아이를 향해 소리친다, “저리 가! 너는 우리랑 달라!” 작은 아이는 이 세 명의 아이에게 맞서는 모양새로 이렇게 항변한다. “아니야! 나는 너희와 같아.” 작은 아이의 모델이자 그림을 그린 소녀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다. ‘다문화’라고 놀림 받는 게 얼마나 가슴에 맺혔던지 그림을 그리고도 모자라 도화지 오른쪽 위 귀퉁이에 별표를 치고 ‘중요’라고 적어놓았던 소녀가 맺어준 인연이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끈을 통해 다가온 당신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제인 엘리어트의 실험이 21세기 한국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차별은 오로지 나쁜 환경의 영향에서 비롯된 삐뚤어진 마음일 뿐인가? 나는, 그리고 당신은 차별 따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왜 차별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제인 엘리어트가 스무 명 남짓한 아이를 대상으로 ‘차별의 날’ 수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고심을 거듭하고 번민했던 흔적이었다. 스스로 여태까지 해본 일 중 가장 불쾌한 경험이었다고 말하면서도, 한 번의 실험이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바꿀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면서도, 가족이 폭력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텅 빈 교실에서 혼자 울지언정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삶을 아이들이 단 하루라도 살아보게 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한 집단을 향한 다른 집단의 무분별한 차별과 증오의 두터운 관념에 균열을 내고 싶었던 그녀의 의지가 놀라웠다." 
 
[ 2012년 7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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