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카프카 전집 3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저, 이주동 역 < 소송 >을 읽고 / 2005. 12., 301쪽, 도서출판솔

카프카 문학의 특징을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 인간 존재의 불안과 좌절, 소외를 날카롭게 통찰하여 현대인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하는 것이라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카프카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꿈과 현실, 잠과 깨어남, 그리고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상태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실종자>보다 1년 뒤인 1915에 완성되었다.

은행 대리인인 요제프 K는 자신의 30세 되는 생일날 아침, 자기 침대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체포당한다. 그는 처음엔 이 일을 직장 동료들의 장난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든다. 요제프 K는 끝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법원(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끝까지 밝히지 못한 채 두 명의 사형집행인에 의해 "개처럼" 처형된다.
출판사의 소개대로 이 책은 '기괴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 세계로 끊임없는 상상력의 나래를 펴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닥친 소송을 '꾸며낸 장난'이나 '일종의 은행 사업'으로 생각하여 뇌물로 법원에 속한 자들의 환심을 사려 하거나 법원 관리들과 가까운 여인들을 자기 소송 목적이나 성적 수단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는 겸허함보다 명망을 중시하고, 의무보다 승진을 생각하고, 자신의 출세랄 위해서 기만과 거짓을 일삼고 있으며,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위선적이고 비열한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실종자>에서는 카프카의 '고독 3부작'으로서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제대로 느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고독과 소외의 측면보다 현상적인 목적과 소유만을 갈망하면서 정신적, 영혼적 세계 또는 존재의 본질적인 목적을 잃어버린 삶의 마지막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작품의 끝부분에 살려 있는 짤막한 비유설화 "법 앞에 서서"는 알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법원(법)'과 그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주인공과의 미묘한 관계를 하나의 압축한 모델 형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작품인데도 21세기에 사는 내가 낮설지 않다. 깊게 공감할 수 있었다. 현대인들 역시 지금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처없이 하루하루를 사고 있지 않은가. 문득 어느 날 자신에게 문제가 닥치면 요제프 K처럼 좌충우돌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개처럼"...

[ 2012년 11월 29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종자 카프카 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한석종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저, 한석종 역 < 실종자 Der Berschallene >를 읽고 / 2003. 01., 341쪽, 도서출판 숲


오랜만에 공부모임 교재로 선택되는 덕택에 현대 서구 문학작품을 읽었다.(어제 세미나에서는 참석하지 못했지만...ㅋ)
서구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카프카의 '고독 3부작(실종자,(성), 소송) 중 <실종자>와 <소송>이다. 카프카 문학은 무엇보다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 인간 존재의 불안과 좌절, 소외를 날카롭게 통찰하여 현대인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 <실종자>는 1914년 작이고 1927년 처음 출간되었다.

출판사는 이 책 내지에 '기괴하고 수수께끼 같은 작품 세계로 끊임없는 상상력의 나래를 펴게 하는, 신비하고도 난해한 작가'라고 카프카를 소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출판 당시 서구의 문학의 어떤 주제와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출판사의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작가의 '고독 3부작'은 '인간의 고립과 소외'를 다루고 있다고 평가된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많은 인간들을 만나고 인간 사회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인간적 관계의 단절을 느끼며 소외와 고립의 희생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경우에도 주인공 카알 로스만은 부모로부터 미지의 세계 아메리카로 추방당하고 아메리카에서는 친지로부터, 공동사회로부터 계속 추방당한 나머지 인간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존재 자체가 실종되어 버린다. 그는 인간의 공동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추방당해 어느 곳에서도 소속을 가지지 못한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뉴욕항이 눈 앞에 보이는 배의 갑판 위에 서있는 카알 오스만는 만15세다. 체코 보헤미아 프라하에서 독일-유대계로 태어났으나 하녀와 동침하여 임신시킨 것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미지의 세계인 뉴욕으로 ?i겨났다. 우산을 선실에 놓고 왔음을 깨달은 카알은 항해 중에 알게된 친구에게 트렁크를 맡기고 우산을 찾으러 선실로 내려갔으나 길을 잃는다. 우연히 기계실에서 근무하는 화부를 만난 카알은, 화부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선장에게 함께 항의하러 간다. 선장실에서 카알은 우연히 외숙부인 야콥 상원의원을 만난다. 외숙부는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하여 뉴욕 고충빌딩 집으로 카알을 데려간다. 외숙부의 도움으로 현대적 시설, 피아노, 영어, 승마를 배우던 그는 외숙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피워 외숙부 친구 폴룬더씨의 교외 별장에 초대된다.
뉴욕 교외의 별장을 간 카알은 자신의 고집을 후회하면서 외숙부에게 돌아가고자 했으나 플룬더씨와 그의 딸 클라라, 친구 그린, 하인 등에게 방해만 받은 후 자정에 그린씨로부터 외숙부의 추방 편지를 전달받는다. 트렁크만 손에 들고 뉴욕을 떠나 람세스로 향하던 카알은 길거리에서 로빈슨과 들라마르쉬를 사귀었으나 다툰 후 헤어지고 옥시덴탈 호텔 여주방장의 도움으로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로 취직한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옛친구 로빈슨이 만취한 상태로 찾아와 그를 도우려던 카알은 실수를 하게 되고 웨이터장과 수위장의 압력으로 호텔에서 ?i겨난다. 상처를 입은 로빈슨을 그이 거처로 데려다 주려고 간 외진 교외에서 카알은 그만 들라마르쉬에게 붙들린다. 들라마르쉬의 애인인 여가수 브루넬다의 고층 임대아파트에 갇힌 카알은 로빈슨이 그곳에서 하인 취급받는 것을 알고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만 로빈슨과 들라마르쉬에게 폭행당한 후 체념한다. 카알은 하인이 되기를 결심하고 실천하다. 다시 몇 개월 후 들라마르쉬에게 버림받은 브루넬다를 도운 후 카알은 길 모퉁이에서 발견한 클레이튼의 오클라하마 극장의 채용 벽보를 보고 찾아간다. 경마장에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볼품 없는 기능직으로 채용된 후 그는 이틀 밤낮 기차를 타고 서부로 간다.
이 작품은 카프카가 결말까지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다. 카프카는 이 작품의 결말을 비극으로 끝내려고 했다고 전해진다. 

작품은 20세기 초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말해주는 듯 하다. 인간의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간 존재가 불안하고 좌절을 겪는다는 것을,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의 인간의 고독과 소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업튼 싱클레어(Upton Sinclair)의 작품 <정글 The Jungle>(2009, 페어퍼로드)에서 묘사하는 20세기 초 시카고 시의 현실과 비슷하다. 다만 싱클레어는 주인공이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서 미래의 희망을 찾는 것으로 결말을 제시하는 것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문학계에 끼친 카프카의 영향력은 옥스퍼드 사전에 '카프카적' 이라는 단어가 실린 것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사전에서는 그 의미를 '섬뜩한, 우연히 등장하는, 실제를 넘어서는, 현실적이지 못한, 프란츠 카프카가 쓴 사실들이나 감정 상태와 비교될 수 있는' 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출판사는 카프카의 문학을 '일상적이면서도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다'고 말한다. 또 불가사의한 사건을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인 묘사로 이끌어 나가며,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이 '그로테스크(부조화스럽고 괴기하다)하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이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지난 20세기 초 미국사회의 모습이라고 쉽게 느낄 수가 없었다. 바로 한국사회의 모습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는 권력이나 부를 가진 이들로부터 추방되고 소외되어 불안하고 좌절을 느끼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현상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5대 불안'이니 '3무 세대'가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다.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당사자들은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외로움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매달린다. 하지만 부모나 가족, 국가와 조직, 언론과 정당으로부터의 추방, 공동체에서의 소외와 추방, 고립과 배제, 불안과 좌절이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전반에서 노골적으로 진행된다. 신자유주의라는 거창한 담론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현실이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어디선가 <실종자>의 카알처럼 비극을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 2012년 11월 27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 배관표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버트 달은 평생 민주주의 연구에 헌신해 온 미국의 21세기 대표적 정치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법인 자본주의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진단에 그치지 않고, 법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정교화하려 하고 있다.
사유재산권을 절대 불가침의 자연권으로 정당화하는 법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법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보겠다고 선언한 저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국가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던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를 기업에 대해서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기업은 민주화할 수 없는가?" 무엇이 미국 정치학계의 주류에 우뚝 선 노학자에게, 퇴직 이후 발간한 첫 책에서, 이토록 대담한 주장을 하도록 만든 것일까? 
이 책과 함께 읽은 김상봉 교수의 <누가 기업의 주인인가>에서는 철학적 분석을 통해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와 정당성을 논증했다면, 이 책에서는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노동자 경영권'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역설한다. 두 사람은 논증의 출발점과 구조는 다르지만 결론은 동일하다. 다만, 김상봉 교수가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반면 로버트 달은 '자치 기업'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작년(2011년) 7월 28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자산 기준 5조 원 이상 55개 상호출자 제한기업집단의 주식 소유 현황 등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조사 결과 38개 재벌그룹 총수 일가의 평균 지분율은 4.47%로 나타났다. 특히, 이 가운데 총수가 있는 38개 재벌그룹을 보면, 에스케이그룹(0.79%)과 삼성그룹(0.99%)은 총수 일가가 1% 미만의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수 개인으로 보면 구자홍 엘에스(LS)그룹 회장이 0.04%,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 0.05%의 지분율로 그룹을 지배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지분율도 0.54%에 불과하다. 평균 5%도 되지 않는 주식 소유로 수백조 원대의 기업들을 한 가족이 또는 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 한진 중공업 경영진은 경영 실적 악화를 이유로 170명을 정리해고한 다음날, 176억의 배당금을 나눠 가졌으며, 20억 원을 들여 용역을 투입,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최근 6대 재벌기업에 정치인을 할당해 집중 로비를 벌이도록 한 전경련의 문건이 공개되어 새삼 충격을 던져 주었다. 여기에는 정치권을 향한 재계의 공공연한 로비뿐만 아니라 최고 경영자의 국회 청문회 불참까지 공모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21세기 법인 자본주의의 얼굴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과연 이와 같은 법인 자본주의에서 재벌 총수와 노동자는 정치적으로 평등하며 똑같이 정치적, 경제적 기본권을 보장받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2012년 들어 정치권에서 난무하는 '경제 민주화'가 실제로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로버트 달이 책의 1장에서 토크빌을 빌어 지적하는 것 역시 바로 위와 같은 현실이다. 1831년 아메리카 대륙의 평등한 조건 속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바라보았던 토크빌은 평등이 자유를 위협할 것이라고 진단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다. 법인 기업의 자유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이것이 정치적 자원의 불평등에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민주주의가 허울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버린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달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불평등을 초래한 자유는 경제적 자원을 무제한으로 축적할 자유와 경제활동을 위계적 통치 구조를 지닌 기업으로 조직화할 자유이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운명은 법인 기업의 자유에 맞서 평등을 보호할 대안을 모색하는 데 달려 있다. 

저자는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제시한 시대적 조건과 문제의식을 기초로 토크빌이 고민하던 시대에서 270년이 지난 현대사회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그 때 당시 토크빌은 미국 시민들의 '평등한' 정치적, 경제적 수준이 오히려 '다수에 의한 소수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가져올 위험을 우려했다. 하지만 토크빌의 우려와 달리 미국의 상황, 그리고 자본주의의 상황은 꺼꾸로 진행되었다. 특히 '사적 자유'를 근거로 무한하게 확대된 '기업의 자유'는 경제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자본과 경영자의 독재를 정당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기업의 '무한 자유'는 왜곡된 경제적 자유를 통해 '시민들의 정치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불평등과 자원의 불평등을 심화,확대시켰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기업의 소유와 통제로 인해 나타나는 불평등을 줄임으로써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를 강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안적 경제구조의 가능성을 모색하였고, 결론으로 '자치 기업'을 제시한다.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 그리고 경제적 자유에 대한 논증과 민주적인 경제 질서, 그리고 기업 내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의 측면에서 자신의 논증을 펼친다.
저자는 '사적 자유'로부터 출발한 '사유재산권'이 기본권이라는 기존의 주장이 논증의 근거가 부족하거나 권리의 범위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해 부적절함을 논리적으로 비판한다. 사유재산권은 최소한의 자원, 특히 생활에 필수적인 자원 채집, 자유와 행복 추구, 민주적 절차 그리고 기본권 실현에 필요한 자원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의 대표들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 공정성, 효율성 등의 가치를 추구하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함양하며,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개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기업을 어떻게 소유하고 통제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가능한 대안으로써 '기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치하는 기업 체계', 즉 '자치 기업'을 제안한다. 그는 자치 기업이 "정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신장시키는 데 공헌하고 시민들 간의 이익, 목표, 관점, 이데올로기 등의 대립을 일소해 주지는 못하지만, 이익 갈등을 줄여주고 모든 시민들이 국가 통치에서 정치적 평등과 민주적 제도들을 유지하는 데 대한 동등한 이해관계를 갖도록 해줄 것이고, 공정성의 기준에 대한 좀 더 확고한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업 내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라는 측면의 논거는 단순한 논리로 출발한다. 그것은 "만약 국가 통치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기업 통치에서도 역시 그 정당성을 인정해야 하며, 기업 통치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국가 통치에서도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p.120)"이다. 

해방 후 70년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한 상류층 기득권자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맹목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추종해 마지 않는 미국 민주주의의 내용과 역사를 알기 위해 참고할 만한 책은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다. 그래서 로버트 달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자신의 논증을 위한 자료로 선택했다는 것은 한국의 주류 기득권층이나 주류학자들에게 의미가 있다.
토크빌은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 자유가 미국이라는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 네 가지가 요인을 강조했다. 네 가지는 "1. 경제적 풍요나 물질적 번영의 확대, 2. 권력과 사회적 기능들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다수의 결사체, 조직, 그리고 집단으로 분산되는 것, 3. 헌법에 의한 권력 집중의 제한, 4. 사람들의 관습 및 문화(p.55~58)"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취약한 이유는 아마도 네 가지 모두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토크빌이 제기한 두 번째, 즉 '독립된 다수의 결사체'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에서 반드시 환기시켜야 할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종교적인 부분이나 동창회, 향후회 같은 학연, 지연을 제외하고는 정치, 직업, 경제, 사회, 문화 부분에서 '독립'된 '다수'의 '결사체'가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강화시키려면 자발적인 독립 결사체로써 정당, 후원회, 노동조합, 농민회, 직업조직, 직능조직, 계급조직, 계층조직, 시민단체, 문화단체 등에 대한 국가적, 제도적 지원이 훨씬 강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인 요즘, '빅3'로 불러지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정책과 공약을 살펴보면 토크빌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조건'에 한참 밑도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토크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종류의 평등을 강조했다. 그것은 '정치적 자원의 평등'과 '권력의 평등'이다, 토크빌이 말하는 정치적 자원의 평등은 "정부에 대한 시민으로서 법적 권한 뿐만 아니라 지식과 부, 소득,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평등한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정치적 자원들이 어느 정도 평등하게 분배된다면 권력 배분, 즉 정부를 통제하는 권력의 배분에 있어서도 대체로 평등해질 것"(p.18)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사회경제적 평등의 달성 정도가 정치적 평등의 달성 정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요즘 한국 정치계에서는 투표시간 연장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억압적인 기업문화와 열악한 노동조건, 자영업자 등을 고려할 때 투표시간 연장은 충분히 필요하고 의미있는 조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유권자가 누구를, 어떤 정당을 자신의 어떤 판단과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히면 투표시간 연장은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까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권자들, 고용과 소득이 불안정한 비정규직들, 정보와 언론에서 소외되는 저소득층은 투표시간을 몇 시간 추가로 보장해 준다고 하여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정치적 입장이나 의견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투표권만 주어지면 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 얼마나 부족하고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경제적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내용과 관련이 있다.

아무튼, 김상봉 교수의 '노동자 경영권'이나 저자의 '자치 기업'이 당장 한국 경제영역에서 거론되기 어렵지만 앞으로 꾸준하게 문제제기하면서 일반적인 '상식'과 '인식'을 고쳐가야 할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 토크빌과 그 이전 사람들이 미래에 나타날 새로운 경제 질서가 어떤 모습일지 제대로 예상했더라면, 평등과 자유의 문제를 아마도 다르게 보았을 것이다. 과거의 시각에서는 시민들 사이에서의 평등이 자유를 위협했다면, 새로운 현실에서는 법인 기업의 자유가 오히려 시민들의 정치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자원의 불평등을 조장했기 때문이다.(p.11) 

- 미국인들은 법인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이 과거 민주주의에 헌신했던 자신들의 삶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끈기 있게 자문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p.85) 

- 기업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정치 체계다. 그렇다면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업 내의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관계도 민주적 절차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맞지 않을까?(p.124)

- 기업이 쇠퇴할 때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할 고통이 투자자들이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돈 많은 투자자들이 시황에 따라 주식시장을 드나드는 것보다 노동자가 한 직장을 그만두고 구직 시장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손해도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을 내다보는 눈이 웬만큼 있는 노동자라면 합리적인 투자자나 경영자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장기적인 효율성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p.132)

- 어떤 소유 형태가 좋을지 판단하기 전에 그것이 자본주의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부터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질문일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소유 형태에 어떤 꼬리표가 붙어 있는지가 아니라 그 소유 형태가 사람들이 자신의 기본 가치를 실현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이다. 자본주의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자치 기업 체계가 자본주의로 분류되지 않으면 자치 기업 체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굳이 그렇게 단순하고 융통성 없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따지자면, 협동조합 소유는 이쪽에 속할 수도 있고, 저쪽에 속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양쪽에 속할 수도 있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다.(p.161)

- 일터에서의 자치 문제는 그 결과를 보고 정당성을 찾을 필요도 없으며 국가 통치에서 자치가 당연한 권리이듯 일터에서도 자치는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것이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 통치에서 민주적 절차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버리고 수호자주의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이듯이 기업 통치에서 민주적 절차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수호자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p.163) 

- 경제적 자유도 여타 자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경제적 자유가 개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재산권도 포함한다고 이해해 왔다. 소유권을 기업에 적용해 보면, 이는 국가가 정해 놓은 한계 내에서 기업을 통치할 권리를 수반한다. 과거 농장과 소기업의 운영을 정당화하던 소유권의 논리는 규모가 큰 법인의 통치에까지 확장되어 비민주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합법화했으며, 이는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권위의 지배 아래 일하는 모든 이들의 대부분의 삶에 깊숙이 침범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국가 통치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던 통치 체계를 기업 통치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p.172)

[ 2012년 11월 02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김상봉 지음 / 꾸리에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12월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큰 정책화두 중 하나가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말과 행동에 언론과 사람들이 휩쓸려 다닌다.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치민주화가 정치 영역에서 '주권재민'과 자유, 평등, 절차 공정성이라면, 경제민주화는 경제 영역에서 동일한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 대선에서 거론되는 경제민주화는 추상적인 재벌개혁이나 사회적 안전망, 공정경제나 상생경제 수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정치민주화 관점을 적용한 경제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책과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경제민주화의 본질 중의 하나인 주식회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저자는 원래 '서로주체성'에 관한 담론을 재기해 온 철학자이다. 그는 <학벌없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학벌체제를 폐지하기 위해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번 책에는 마찬가지 '서로주체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기업 형태인 '주식회사'를 분석하였다.
 
저자는 "왜 경영자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대통령을 뽑듯이, 대학의 총장을 학교의 구성원들이 뽑듯이 회사 사장도 노동자들이 뽑으면 안되는가를 묻는다.
그는 개인기업은 기업주의 사적 소유재산이므로 그것의 운영권 역시 당연히 소유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옳지만, 주식회사는 원래 주인이 없는 기업이므로 얼마든지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저자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법 조항을 상법애 신설하자고 주장한다.(대신 경영진을 감시할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는 것으로...)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 모두 '소유'를 기준으로 한다. ... 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로 오해했기 때문이다."(p.104) "하지만 자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데 존립한다"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p.105)
 
저자의 추론을 요약하면 이럴다. 저자는 자유와 소유에 대한 근본개념을 비판하면서 경영권을 다룬다. 자유의 전제가 소유는 아니다. 사람이 소유의 대상일 수 없듯이 권력도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식회사 법인은 법에 의하여 경제 영역에서 사람과 같은 '인격'을 부여했기 때문에 특정인의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주의 유한책임과 주식양도 자유의 원칙 등을 고려할 때 주주는 주식에 대한 소유권과 배당권을 가질 뿐 경영권을 가질 근거가 없다. 또한 국가마다 주식회사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구조가 다르다. 경영권은 소유권이 아니라 권력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기업경영을 칸트의 유기체 개념으로 추론한다면 관료적이고 독재적인 기업조직은 기업의 구성원들의 서로주체성을 침해할 수 밖에 없다. 경영진을 종업원 총회에서 선출하는 것은 서로주체성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권력은 사물적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소유권이 아니라 정당성만이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p.120)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다른 어디도 아니고 사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뒤섞어버린 데서 비롯된다"(p.130)
 
주식의 소유와 주식회사의 소유의 본질과 차이점, 경영권의 독자성과 특별함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법적 해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법인 역시 그 자체로서는 인격이 아니지만 법에 의해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법적인 권리주체로서 인정된 인격이다"(p.151)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회사의 본질상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소유권 자체가 어떤 근원적 불안정성 속에 있기 때문에 경영권 역시 동요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p.171)
"하나의 주식 속에 주식회사에 대한 어떤 소유권도 들어있지 않다."(p.175)
"주식회사의 주주는 주주의 유한책임의 원칙에 기대어 경영의 실패에 따른 무한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바로 이 무책임성 때문에 주식회사는 아무리 한 사람이 모든 주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참된 의미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p.177)
"주주들은 기업경영에 대해 관심도 책임도 없다. 오로지 배당과 주가상승만을 원한다. 불만이 있으면 처분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무책임성이 주식회사의 본질적 특성이다. ..... 따라서 주주총회에서 선출되는 이사회는 주주들의 대표기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소유의 주체는 될 수 있지만, 소유의 대상은 될 수 없다"(p.179)
 
저자가 자신의 논증을 하는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대부분 저자의 논증에 결정적인 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결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저자가 말한 '국가권력이 기업을 통제하지 못한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이처럼 기업이 세계화를 이끄는 주체인 까닭이다"(p.39) 국가권력이 기업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느냐의 문제인데,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도 노동자 경영권도 물거품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이 어떤 세력구도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 측면에서는 미국,영국과 유럽 국가가 다르고 한국과 일본이 다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참된 '만남'을 방해하는 지배체제는 결국 자유를 열망하는 인간의 손에 해체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엄연한 철칙이다"(p.41) '고대 로마제국 이후 중세 유럽의 종교권력의 장악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전형적으로 서구식 세계관과 역사관의 결정론적 함정이라 생각한다. 자유와 '만남'의 힘과 억압과 지배의 힘은 유동적이다. 지난 5천년간 인류의 역사는 지배세력이 거의 주도했고 가끔 자유와 '만남'이 주도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기 위해 대영도서관을 소유할 필요도, 멘델스존이 교향악을 작곡하기 위해 교향악단을 소유할 필요도 없다", "노동자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기업을 반드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라는 표현도 동의하기 어렵다. 노동자가 자유를 위해 기업의 소유권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마르크스, 멘델스존의 경우는 연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맨델스존은 노동자처럼 누구에게 구속,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이용'하는 것이고 교향악은 '관람'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이 타당함과는 별개로 노동자 경영권의 현실적인 제약조건도 많을 것임을 느낀다.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노동자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p.75)
그동안 자본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 백년 동안 이어져온 초과이윤 착취를 욕망해왔다. 그 욕망이 자본가와 자본주의, 주식회사를 자탱해 온 '본질'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구조적으로 차단한다면 자본가의 창업이나 자본주의 자체의 유지가 가능할까? 자본가는 기업을 설립하거나 기업에 투자하지 않을 우려도 있다. 소위 자본 파업이 성립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가 독일의 노사결정제도(직장평의회, 감독이사회), 미국의 주주자본주의, 일본의 종업원 중심주의와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를 비교한 대목이 있다. 독일과 미국은 제도적으로 운영되고 일본은 사회적 관습과 문화로 유지되고 있지만, 모두의 공통점은 '공공성'이다.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에는 손톱 만큼의 공공성의 흔적도 없다. 삶의 질이나 국가의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라 무지 우울했다.
 
[ 2012년 10월 30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멘토의 시대 - 강준만이 전하는 대한민국 멘토들의 이야기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경구가 있다. 이 문장을 정치사상적인 관점에서 풀면 "극좌는 극우와 통한다"가 된다. 이 표현이 모든 세상에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이 표현에 해당하는 사례를 접할 수 있다.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적은 당연히 '공동선'이거나 '민중들의 자유와 행복'일 것이다.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이나 '목적'은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되면 그 사회는 십중팔구 전체주의나 소수 독재체제로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이 극좌 또는 극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극좌와 극우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이분법'이다.


강준만 교수는 '이분법'을 무지하게 증오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강 교수가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안철수 후보가 이분법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라고 애기할 정도다. 그는 모든 사람이나 사건은 속성상 '명암'이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지고지순한 선(善)도 악(惡)도 없다는 말이다. "매사에는 장단점이 있다"는 속담과도 같다. 그의 그런 생각은 그의 최신 저서인 <안철수의 힘>에서도 명쾌하게 드러나 있다.

따라서 이 책 역시 '멘토'를 무조건 지지하지도 비판하지도 않는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사회에 불고있는 '멘토 열풍'에 주목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멘토로 인정받는 인물 열두 명을 논의 대상으로 삼고 유형을 규정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멘토 열풍에 빠진 이유를 탐색한다. 그는 멘토 열풍의 핵심 코드로 ‘위로’를 언급한다. “그까짓 위로로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폄하하는 식자들도 있지만,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로는 그 어떤 사회과학적 메시지보다 값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위로를 넘어 재미까지 추구하는 ‘멘토의 제도화’를 통해 지속가능한 멘토링을 구현하자고 제안한다. 


강 교수가 책 속에 다룬 한국의 대표 멘토는 안철수, 문재인, 박원순, 김어준, 문성근, 박경철, 김제동, 한비야, 김난도, 공지영, 이외수, 김영희 등 12인이다. 그는 멘토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과 철학을 집중 분석하면서 그들이 왜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논한다. 눈여겨볼 점은 강준만식 인물비평이 늘 그래왔듯이, 각각의 인물을 통해 한국 사회의 뜨거운 이슈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해부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안철수 현상', 김어준과 '는 꼼수다' 열풍, 공지영과 이외수를 둘러싼 트위터 논란, 이익공유제와 관련된 이건희와 박경철의 입장 차이, 문성근의 100만 민란 주장과 미국의 무브온 모델 분석, 김제동의 웃음과 상처의 의미, 김영희 PD와 '나는 가수다'의 대중문화 현상 등이 그것이다.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로 깊이와 차원이 다른 인물 비평과 사회 비평의 정수를 보여주는 '강준만식 글쓰기'는 이 책에서도 계속된다.


왜 한국사회에 '멘토 열풍'이 부는가? 강 교수는 "위로라도 갈구하는 '88원 세대'의 고통이 첫째 이유이지만, 동시에 이 세대가 맞은 디지털 시대의 하이테크가 남긴 하이터치 욕구가 청춘 콘서트로 대변되는 새로운 유형의 멘토링을 성장시킨 또 다른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디지털 시대에는 청춘이 권력이나 인정 욕구 충족의 원인이라는 점도 멘토 부메 일조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보면 대표적인 멘토로 불리는 이들은 예외 없이 청춘 콘서트, 또는 비슷한 형식을 애용하고 있다.


"강준만의 안철수 지지 선언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인물은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다. 아마 최근 그의 뜨거운 인기를 반영했을 것이다. 강 교수는 이문열의 “안철수는 언론이 키운 아바타”라는 말에 반박하며, 안철수 인기의 비결을 10가지 코드로 해석한다. 엔터테인먼트 소통 코드, 분배 양심 코드, 엄친아 성공 코드, 정의?공정?공생 코드, 안전 개혁 코드, 이념 양극화 혐오 코드, 뚝심/책임 윤리 코드, 디지털 혁명 코드, 특별한 역사적 기회 코드, 패러다임 비전 코드 등이 그것이다. 

강 교수는 특히 “엔터테인먼트 소통 코드를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안다는 점에서 안철수는 다른 대선 후보들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말한다. 이념 양극화에서 탈피했다는 점도 안철수의 매력으로 본 강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실 안철수를 두고 좌우니 진보-보수니 하고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아니 그런 구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실업자로 사느니 교도소 가겠다’, ‘우리에게 애국(愛國)은 없다. 우리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나라는 애국받을 가치조차 없다’고 절규하는 청춘에게 무슨 얼어죽을 좌우며 진보-보수 타령이란 말인가. 일관되게 청춘의 고통을 위로하며 일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안철수가 대다수 청춘에게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여겨진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리라.”(p.52)


<안철수의 힘>(2012. 7)에서 이미 안철수 원장을 공개 지지했지만, 강 교수의 안철수 지지의 가능성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도 복선을 깔았다. 강 교수는 2011년에 출간된 화제의 책 <강남 좌파>를 논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즘 정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분법적 조악함이 너무도 한심하고 답답해 대표적인 강남 좌파일망정 이분법에서 해방된 강남좌파인 안철수의 명(明)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글을 쓰고 싶은 생각도 있다.”(p.9)


이처럼 강 교수는 대한민국의 대표 멘토 열두 명이 우리 사회에서 왜 열풍을 일으키는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깊이 있게 분석했다. 책 제목처럼 가히 ‘멘토의 시대’라 할 만하다. 사람들이, 특이 왜 20~30대 청춘들이 멘토를 갈구하는지에 대한 현상 분석과, 더 나아가 그 현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이 필요한지도 제시한다. 

그는 문재인 현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를 '인격,품위형 멘토'로, 박원순 서울시장를 '순교자형 멘토'로, 김어준 총수를 '교주형 멘토'로, 문성근 의원을 '선지자형 멘토'로, 박경철 원장을 '멀티,관리자형 멘토'로, 방송인 김제동씨를 '상향 위로형 멘토'로, 여행가 한비야씨를 '자유,개척형 멘토'로, 김난도 교수를 '경청,실무형 멘토'로, 소설가 공지영씨를 '열정형 멘토'로, 소설가 이외수씨를 '자유,도인형 멘토'로, 김영희 PD를 '재미계몽형 멘토'로 분류한다. 물론 강 교수는 각 멘토에 대한 속성 분류와 동시에 개별 멘토의 한계나 부족한 부분에 대한 비판적인 지적도 놓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할 때, 강 교수가 '한국의 대표적인 멘토'로 지목한 이들 중, 문재인 후보와 문성근 의원은 의외다. 두 사람의 멘토 분류 내용은 인정하지만, 솔직히 말해 문재인 후보와 문성근 의원이 최근 몇 년 동안 20~30대 청춘들과 소통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재인 후보는 노무현 전대통령 사후 '노무현 재단'의 이사장으로서 관련 업무에 치중했고, 정치활동을 주로 했기 때문이다. 몇 차례 김인회 변호사와 <검찰을 생각한다>를 발간하여 콘서트를 열기는 했지만... 문성근 의원 역시 오랫동안 '국민의명령'이라는 야권통합 운동을 벌였고, 정치 콘서트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청춘 세대와 소통은 아니었다.


강 교수의 의견에 대체로 공감이 되면서도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박원순 시장에 대해 비판한 대목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박원순 시장이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최열이나 한명숙씨 등과 마찬가지로 시민단체의 회원들, 지지자들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개인적인 '결단'으로 '선택'했던 모습을 못내 아쉬워 한다. 그리고 시민운동가들이 대거 정치권에 뛰어든 2011년 하반기의 모습은 국가 - 시민사회 - 시장 사이의 상호견제라는 현대적인 질서가 '한국적 정치만능론' 때문에 위협받고 있음을 지적한다. "'박원순 이후'의 시민운동이 순수성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게 돼버렸다. 참여 민주주의의 대의를 앞세운 현실 정치 참여가 오히려 시민운동을 이기에 빠뜨리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p.121)

박경철 원장의 경우는 '안철수 후보의 경제 멘토'라는 별칭 때문에 관심 깊게 읽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 보다 재벌과 자본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눈에 띄었다. 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이 책을 읽다가 박경철 원장의 책을 신청했다.

김제동씨에 대해 강 교수가 배려하는 대목에서는 나 역시 크게 공감되었다. "(김제동씨의) 연락은 그만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김제동은 연락이 오면 갈 수 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 즉 옮은 말만 해야 한다는 강박, 그건 그의 상식이 강제하는 것이며, 그 상식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초능력적 기억과 그에 따른 실천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김제동에게 연락하더라도 정치적 당파성이 없는 자리에만 부르자. 아니 모시자.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사회가 김제동이라는 탁월한 재능을 오랫동안 향유해야 하기 때문이다."(p.216)

김영희 PD에 대한 강 교수의 설명에서 진보 정당에 대해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비판도 발견된다. "사실 김영희는 진보 정당이 사부로 모셔야 할 멘토다. 진보 정당의 치명적인 약점이 재미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우월감만 하늘을 찌를 뿐, 여전히 눈에 핏발 선 이미지다. 그를 멘토로 모셔가는 단체가 제법 있는 걸 보니 시민단체들은 이미 김영희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눈치 챈 것 같다."(p.314)


책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강 교수가 진보세력 또는 '운동권' 출신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꼬집는 글이었다. 아래 글은 강준만 교수가 2006년에 쓴 칼럼 중 일부다. 그런데도 어제 일에 대해 애기하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하게끔 한다. 대통령 선거를 100일 남짓한 한국사회에서 야권 내의 민주진영, 진보진영을 자처하면서도 인간애가 실종되고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자주 겪에 된다. 특히 SNS 상에서... 나 역시 SNS에서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면서 언어폭력을 가한 게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없는 메마른 개혁-진보 담론은 자신의 출세나 인정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일지 모른다. 스티븐 룩스는 <마르크스주의와 도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망친 건 도덕의 부재라는 걸 시사했다. 마르크스주의든 개혁주의든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망이 강하거나 그런 열망으로 포장한 권력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인간적 도덕'이 결핍되기 쉽다. 나도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기에 자기비판을 하는 심정으로 말씀드려보겠다. 

인간적 도덕이라 함은 정실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자기 성찰이다. 역지사지 능력이라 해도 좋겠다. 물리적 폭력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폭력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둔감하기에 하는 말이다. 과거의 동지를 비난하고 상처를 주더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은 있는 법이다. 가학의 쾌감을 느끼려는 게 아니라면, 무엇보다도 상대편의 말과 글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왜곡까지 하는 것은 해선 안 될 일이다.

"자신 있는 자만 돌을 들어라"라는 말은 보수 이데올로기로 악용될 수도 있지만, 참뜻은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뜻이다. 자신의 흠과 추태에 대해선 무한대로 관대할 뿐 아니라 모두 좋은 뜻이었다고 미화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남의 행태에 대해선 성난 얼굴로 비난만 해서야 쓰겠는가? 남들도 자신만큼 지능과 선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자세가 아쉽다."(p.254)


[ 2012년 10월 02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