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이야기 멈퍼드 시리즈 2
루이스 멈포드 지음, 박홍규 옮김 / 텍스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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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처럼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우도 있고, 말년에 접어든 노인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듯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수능시험과 대학입학이라는 고지를 넘어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청소년들도 있고 공무원시험이나 대기업 취업, 창업이나 노래실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아이들의 분유값과 유치원비, 사교육비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택대출 원리금을 갚거나 새로 오픈한 커피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살아가기도 한다.
즉, 사람들이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살아갈 희망'을 간직하면 하루하루의 즐겁거나 힘든 과정을 겪어나간다. 살아갈 이유나 희망이 없으면 인간은 좌절할 뿐 아니라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 품은 개인적인 꿈과 희망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왜소해지거나 포기하게 되고 주어진 현실과 조건에 만족하거나 불만족스럽더라도 '살아갈 이유'가 있거나 '희망'이 있으면 사람들은 힘든 오늘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현실에서 '희망'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개인이 사회적인 꿈을 꾸기도 쉽지 않은 일이고...
 
우리사회에서도 언젠가부터 꿈과 희망이 금기어가 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잦아들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헛된 꿈이었고 이데올로기이자 선전에 불과했던 "부자되세요" 마저 이제 사람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가족, 친지 중에서 그리고 지인이나 이웃 사람들 중에서 이전보다 삶이 나아진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학부모가 된 어른들은 사교육비와 주택대출금에 쪼들리고, 실업과 폐업의 고통에 시달리고, 젊은이들은 학자금 대출상환과 비정규직, 구직난, 전세난, 육아의 두려움 속에서 짖눌려 살고 있다. 양극화와 빈부격차는 피부로 절감된다. 이러한 정황은 각종 통계수치에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왜냐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할 정치권과 정부, 언론, 지식인들이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있으며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기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무기력해지고 좌절하고 있고 사회는 전체적으로 활력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할 이유'는 남아있지만 '살고 싶은 희망'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희망과 비전을 새로 만들고 제시하고 외치고 싸워야할 젊은이들과 체제 저항세력이자 대안세력들마저 그 희망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내 대안세력이라고 할 만한 집단은 정치분야와 사회,학문분야에 일부 존재한다. 경제분야와 문화분야에는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분야의 대안세력이라 할 만한 통합진보당은 최근 당 내분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고, 한동안 회복기가 필요해 보인다. 사회분야의 각종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20세기보다 존재감이 더욱 사그라든 채 '존재감'만 남아있다고 생각된다. 언론과 학계에는 대안세력이라고 불러줄 만한 집단이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이미 실패가 검증된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고 사회주의와 비슷한 또 다른 '주의'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다. 관념화된 단어와 개념을 붙잡고 버티는 이들도 있고 가야할 길을 잃어버려 방향을 서서히 유턴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내가 현재의 상태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불의와 부정에 저항하는 개인과 집단이 여전히 다수 존재한다. 그들은 양심적이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희망적인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컨대 그들은 비판적이고 저항적이지만 대안을 제시하고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비전과 정책은 말과 자료집 속에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시도되지도 검증되지도 못하고 있다. 그들은 모여서 논의하기 보다 흩어져서 서로 싸우기에 바쁘고 공통점을 가지고 무언가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보다 상대방의 시도를 폄하하기에 바쁘다. 과거의 이념과 방식을 못벗어나고 있고 자그마한 권력을 놓고 서로 옹졸하게 다투고 있다. 구체적인 현실과 사람 속에서 대안과 비전을 만들기보다 말과 주장으로서, 힘과 권력을 먼저 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스스로 먼저 성찰하고 상대방을 포용하려 하기보다 상대방의 잘못을 꾸짖고 욕하고 제거하고 주도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내가 부정적인 것이다.
 
과거에 보였던 것 같은 희망이 이제 잘 보이지 않는다. 아득하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무엇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 그리고 희망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책이 도움이 되었다.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동양식 개념과 사고방식이 강한 우리들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물론 저자가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유토피아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존에 서구에서 논의되고 존재해왔던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 책은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휴머니스트로 알려진 루이스 멈퍼드(1895~1990)의 처녀작(1922녀누초판 발간)이자 94년 평생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도시학자, 역사학자, 문예 비평가, 건축 비평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현대인에게 진정한 유토피아의 비전을 제시했고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했던 멈퍼드의 총 28권 저작을 일관하는 주제가 문명의 비판과 현대 사회의 개혁이라면 이 책은 그런 멈퍼드의 사상을 집약한 책이기 때문이다. 멈퍼드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쓴 이 책을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뒤에 초판의 내용 그대로 재간행을 승인한 것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멈퍼드는 "유토피아란 인간이 처한 환경에 대한 반응이자, 주어진 현실을 인간적 형태로 바꾸려는 시도이며, 언젠가 구현될 미래에 대한 예견"이라고 정의한다. 그가 분류하는 유토피아에는 도피 유토피아와 재건 유토피아가 있다. 저자는 서구 유토피아의 전통에서 두 가지 유형의 유토피아를 모두 다루되 플라톤에서 H.G.웰스에 이르는 도피 유토피아의 고전적인 예들을 설명하고, 재건 유토피아를 사회적 신화와 사회이론가들의 당파적 유토피아로 구분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인 1922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이 책은 인류가 공통의 목표를 위해 이기적 쾌락을 거부하고 거대도시의 혼란을 지역주의 질서로 재건해 나아가야 한다는 멈퍼드의 시대를 향한 열망을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과 모어 등 대표적인 유토피안들은 한낱 몽상가나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당대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한 '현실주의자'들이자 '현실적 불만분자'들이었으며, 특히 이들은 대단히 구체적으로 대안적 유토피아의 지리적, 제도적 조건을 제시하면서도 전체 인간 사회의 조화를 으뜸으로 하는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의 소유자들이었다.
전후 재건의 의지와 희망에서 출발한 이 책의 유토피아 과거 읽기와 미래 전망이 2010년을 사는 우리에게 유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명화와 함께 날로 심화되어 온 세분화와 전문화 그리고 편파성으로 인해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더 이상 통합적으로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현대인은 멈퍼드가 선별한 유토피안들의 전체론적 시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인간 생활을 '잡다한 우연사의 혼합'으로 보고 상호 관련되는 유기체적 전체로 보지 못한다면 진정 더 좋은 삶,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현실의 이상적 비판'과 '미래의 현실적 구상'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니까...
 
인류의 대다수에게 가혹했던 20세기 주류 문명, 21세기 들어와서도 한국에 엄청난 질곡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자본주의의 극복과 또 그 대안으로서 21세기의 새로운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인상 깊은 문장 :
 
- 플라톤의 <국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나타난 사회적 붕괴의 시기에 쓰였다. 그 신랄한 어투는 필경 플라톤의 눈에 비친 희망 없는 상황에서 나왔으리라. 토머스 모어가 상상의 나라를 위한 기초를 세운 시기도 마찬가지로 무질서와 폭력의 시대였다. 즉 유토피아는 낡은 질서인 중세와, 새로운 관심이자 체제인 르네상스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자 만든 다리였다. (p.27)
 
- 모어는 인간의 본능에 자기주장이나 과시욕이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영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귀금속을 경멸했다. 황금은 변기나 노예의 쇠사슬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진주는 아이들에게 주어 어릴 때는 그것을 자랑하거나 즐기도록 하되 그 뒤에도 인형이나 장난감으로 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유토피아에서는 화려한 옷이나 보석이 유행이 지난 것으로 취급됐다. (중략)
단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땅을 경작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고 마시며, 명성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고 꿈꾸며 창조하는 것, 즉 살아 있는 현실을 붙잡고 환상을 물리친다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 사람들이 취하는 생활방식의 본질이다. 권력과 부와 권위와 명성은 추상적인 것이고, 사람들은 그 추상적인 것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이러한 신세계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괴물이 되는 기회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인간의 주된 목표는 인간으로서 최대한 성장하는 것에 있다.(p.86)
 
-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역과 자연스럽게 집단화된 사람들 대신, 국가주의 유토피아는 측량 기사가 그은 선에 따라 국토라고 하는 영역을 확립하고 그 영토의 주민을 모두 국민이라는 단일한 불가분의 집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 국민이란 권리와 권력의 측면에서 다른 모든 집단에 우선하는 집단이라고 가정됐다. (중략)
달리 말하면 국경선은 그 주민이 국민으로 행동하는 한에서, 주민이 세관, 이민국, 국경 경비대, 교육제도를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지불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러한 상상의 경계선을 허가 없이 넘고자 하는 다른 집단을 죽여서라도 저지하려는 경우에만 존속된다. (p.229)
 
- 당파적 유토피아(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최종적 비판, 즉 일방적 개혁운동의 치명적인 결점은 바로 일방적이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당파성은 개별 계획안의 토대가 되는 여러 사실과의 관계나, 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 태도에서 나타난다.
당파성의 근본을 이루는 심리는 법정에서 변론하며 그 논증을 뒷받침하는 사실을 찾는 변호사의 심리와 유사하다. 이러한 정신적 태도는 말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설령 공동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가 생긴다 해도, 사실에 대한 개인의 태도가 사실 그 자체보다도 중시되고, 마침내 사실이 무시되는 정도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미국 남부의 일부 백인 집단은,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진위를 따지지도 않고 그 흑인 남성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러한 집단 행동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잔인한 측면을 부각한다. 인간은 본래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하는 쪽이 먼저다. 왜냐하면 심리학자가 말했듯이 생각은 억제된 행동이고, 태어나면서부터 억제란 우리와 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한 분노에 몸을 맡겨 장애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장애로부터 후퇴하여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우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인가 하는 어려운 선택에 부딪힐 때, 우리의 본능적 충동은 전자를 따르게 된다.
이는 자본가 조직의 성장에 수반한 인간의 무서운 고뇌를 보고 사회주의자들이 소유와 이윤이라는 문제에만 관심을 쏟고, 그 결과 사회주의화 계획에 의해 개선이 가능한 조직과 분배, 그리고 관리하는 산업 현장의 구체적 문제를 무시했다는 예를 보면 알기 쉽다. 이처럼 한 문제의 특정한 면에 관심이 집중되면, 특정한 해결책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문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게 된다. 인생은 짧고 목전의 필요는 더욱 크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해결이나 치유는 더욱 급박하게 되어 각 당파의 활동가들은 사실을 완벽하게 확인하고 자료를 철저히 조사하는 대신 너무나도 안이하게 '상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결점은 인간의 거의 본능적인 당파적 성향에서 비롯되고 당파성을 유지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중략) 당파성에 따르는 두번째 결함은 공동체를 수직적으로 분할하고, 인간 생활 속의 수평적 연대와 충성심에 대립하는 가공의 적대감과 동족의식을 조장한다는 점이다.(중략)
당파적 인간이 간과하는 것은 저속한 생활에도 인간으로서의 확실한 기쁨이 있고, 대다수 인간에게는 결국 그것이 실천할 수 있는 생활일 뿐만 아니라 본래적으로 충족된 좋은 생활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존 어빈의 희곡에 나오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대신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기병대와 인디언, 사회주의자와 자본가, 금주법 지지자와 반대자를 대치해도 결과는 유감스럽게도 마찬가지다. 복잡하게 얽힌 인간의 생활은 사실 그러한 범주를 넘는 여러가지 관계로 성립한다. 그러나 당파의 인간은 유토피아 사상과 대조적으로 이러한 사회 일반의 관계를 경시하고, 사회를 '주의'에 봉사하게 하며, 사회관계를 무시하여 '운동'에 몸을 바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당파주의의 가장 큰 죄악이다.(p.258~261) 
 
[ 2012년 7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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