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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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정기용 저 < 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을 읽고 / 2008. 10. 15., 382쪽, 현실문화연구


건축 일반에 대해 그리고 공공건축물과 공간계획에 대해 독자들이 자신의 '관점'을 갖출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책...


이 책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만 10년간 돈벌이 보다 농촌과 마을 공동체를 고민하면서 면사무소부터 납골당까지 크고 작은 30여 개의 공공건축물 설계작업을 진행했던 '무주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건축가 정기용, 즉 정기용 선생의 건축 활동 내지 건축에 대한 철학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저자 정기용의 건축에 대한 철학은 말 그대로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농촌의 공동체 계획과 건축 계획을 준비할 때 그는 가장 먼저 '농촌'을 고민했다. "아직도 농촌을 '개량'의 대상이나 구제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한 아무 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제 농촌은 없다. 우리들의 소중한 국토가 있을 뿐이며, 농촌과 도시 사이만 있을 뿐이다."(p.7~8)


건축을 어떤 전문가들만의 유희나 시혜가 아니라 '공공서비스'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 역시 신선하고 정확했다. "주민들에게는 면사무소보다 더 필요한 것이 면 단위의 공중목욕탕이라는 것을 소위 공간의 전문가들이란 사람들만 알지 못한다. 아주 사소한 이런 것들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일이 전문가들과 공공의 서비스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p.9)

 

도시나 농촌 등 공동체의 공간과 건축을 대할 때 역사적인 식견과 관점을 가지고  거주 문제와 지역 문제, 도시 문제와 주택 문제들이 서로 연동되는 종합적인 사고와 대처가 필요함을 지적하는 지점에서는 감탄이 절로 난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 다른 질문을 던질 것이다. 도시냐 농촌이냐도 아니고, 전원주택이냐 아니냐 하는 상업적 용어에 매몰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디에서 나는 자연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하는 점으로 이행할 것이다. '인간답게'란 혼자 외롭게 자기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따로 또 같이'의 가치관을 다시 공유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유목민은 다시 인간이 될 것이다."(p.11)


그런 관점과 태도를 유지한 채 무주군청과 군민들이 요청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였으니 각각의 공간 계획이나 건축이 자연과 호흡하고 이야기를 지니게 되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환기의 공공시설을 고민했던 진도리 마을 회관과 안성면/적상면/주남면/무풍면 주민자치센타, 사람의 삶과 자연의 삶을 고민하여 시대가 원하는 건축을 시도했던 공설운동장과 무주군청 뒷마당 리노베이션, 그리고 무주시장 현대화 프로젝트, 건축을 총체적으로 접근했던 청소년 수련관과 청소년문화의집, 곤충박물관과 향토박물관, 그리고 천문과학관과 버스정류장에는 그의 철학과 고민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또한 농촌의 문제를 넘어서는 접근이 돋보였던 농민의 집과 된장공장, 그리고 전통문화공예촌, 지속 가능한 사회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보건의료원 리노베이션과 종합복지관, 노인전문요양원과 무주공설납골당 프로젝트는 소위 '농촌문제'를 넘어서는 대상 프로젝트를 주어진 한계와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미래의 세대에게 기회와 가능성을 제공하려던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특히 나는 '면 단위의 공중목욕탕'과 '공설운동장'에서 나타나는 "주민이 원하는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공공건축과 공공서비스의 가장 근본적인 태도와 접근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몇 개 건축물 설계에 실무자로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지난 수십 년간 세금을 쏟아 부으며 건축된 수많은 관공서와 공공건축물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건축과를 졸업했다는 것이 그리고 그 건축물을 설계한 이들 중 상당수를 내가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자부심이 아니라 굴욕이고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지역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건축문화와 공간문화가 크게 개선되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시점에 이 책은 '공공건축을 통한 지역발전의 모색'이라는 특수하고, 유용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건축계에서는 두루 회자되고 있다고 들린다.


건축설계를 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면 상당수 전문가들이 이 책을 읽은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정기용의 깊은 고민과 노력, 성과와 한계를 이해하거나 공감한 사람은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다. 건축계 대부분이 '성공'과 '성장', 돈벌이와 기득권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현재 시점으로는 공공기관과 건축 전문가들이 몇 가지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와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는 데 만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공감대의 확산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고질적인 한국 지식인층의 문제라 생각한다. 한국의 학벌주의와 엘리트주의의 최고봉인 서울대를 졸업했음에도 건축학과가 아닌 미술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건축학계 주류와 건축설계 업계를 장악한 서울대 건축과 출신들에게 '왕따'당한 정기용 씨...

나는 공간과 건축 문화의 답보상태가 한국사회만의 독특하면서도 강력한 문제,  즉 '실력' 보다 '학벌'이 기득권 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수의 양심적인 건축가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 건축과 나 ---


나 역시 대학에서 건축을 배우고(?) 설계사무소에서 5년 가까이 실무를 했다. 건축 설계나 건설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대학 선후배, 동기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기도 했고 업무 진행을 위해 미팅도 자주하고 여러 자리에서 정보도 듣고 의견도 나누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가 건축가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건축업계에 종사한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물론 '범 건축계'에 종사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작년에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면서 이십 몇년 전 대학 새내기 시절이 생각났는데, 특이했던 점은 내가 공부할 때 영화 속에서 교수가 '건축학 개론'을 강의하던 식으로 건축에 대해 접근하는 교수는 전혀 없었다. 영화 첫 장면을 보면서 "아! 건축을 저렇게 자신이 사는 동네와 지역과 연관지어서 접근시키면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겠다."라고 느꼈다.

내 기억으로는 6 ~ 7명 정도 되던 건축 전공 교수들은 세부전공이 건축계획이나 건축설계 또는 건축구조나 건축사이던 간에 그냥 국내외 교과서나 참고서, 또는 오래된 '강의 노트(?)'를 가지고 거창한(그렇지만 결국 단순한) 개념이나 이론을 가르치는 정도였다.


분명 그 당시에도 새내기들 중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해 뭔가 잘 알거나 어려서부터 적성으로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탐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학력고사 점수에 맞추어 입학한 경우가 다수였음에도 교수들과 대학은 그런 새내기들의 조건과 처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강의를 할 뿐이었다. 물론 몇몇 교수는 몇 년이나 된 너덜너덜한 강의노트를 강의(수업)시간에 들고 왔고.(덕분에 '족보'라는 말도 배우고...ㅋㅋ)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고 서로의 관심사를 가지고 이야기하기보다 주어진 강의시간에 출석하려 일방적인 설명을 듣고 때 되면 시험치르고 설계숙제(테크닉을 가르치는)을 제출하면서 한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졸업을 하는 구조...

건축이라는 학문에 대한 교수들의 지식과 시각 속에는 도시도, 농촌도, 근대화도, 지본도, 산업도, 문화도, 사회도, 그 어떤 사람사는 것과도 관계없는 '순수학문(?)'이었습니다. 철학의 고사하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최소한 양심도 책임도 지혜도 상실하였지만 기득권은 쥐고 있는 '지식 소매상'들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교사들의 수업에서 배우기보다 스스로 원리를 깨닫고 공부방식을 터득하고 암기하는 데 익숙한 새내기들은 고등학교보다 난이도가 조금 높은 것 말고는 차이가 없는 대학 강의와 수업에 대해 탁월하게 적응해 갔다. 다행인 것은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간의 공부모임이나 의견교환을 '커닝' 비슷한 분위기로 몰고 갔지만 대학은 학생들의 어떠한 공부방식에 대해서도 '자유방임'했다는 것...^^


지금 대다수의 40~50대 건축사, 건축과 교수, 건축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은 아마도 나와 비슷하게 대학을 보내면서 스스로 공부하고 인맥을 쌓고 진로를 개척했을 것이다. 대학은 그냥 간판만 필요했던 셈이다. 물론 대학을 졸업한 후에 명문대학 중심의 학벌체제의 위력과 공고함에 놀라기는 했겠지만...


그럼에도 정기용 씨의 무주 프로젝트 이야기를 읽으면서 9학기 동안 다녔던 대학 생활에 대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컸다. 대학과 학과, 교수들 탓만 하면서 중,고등학교 때부터 '꿈'이었던 '건축'을 내 스스로 깊이 고민하고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잘 몰랐던 건축의 '진가'를 대학을 떠난 후 20여년 만에 이 책에서 발견한 셈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경작지는 있으나 농민이 드물고, 사람의 기척은 있으나 동질적 농촌 공동체는 사라지고 있으며, 농업은 있는 듯하나 몰락하는 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농촌과 농업은 국가의 '골치 아픈 영역'이다. 그러나 의외로 앞으로 쓸 예산은 많다. 바로 이런 것이 문제다. 이런 상황 속애서 아직도 농촌을 '개량'의 대상이나 구제해야 할 문제로만 바라보는 한 아무것도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잘못된 질문을 바로잡아야 한다. 농촌을 타자화하는 버릇을 버려야 하고, 세계시장 속에서만 바라보는 농업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농촌은 없다. 우리들의 소중한 국토가 있을 뿐이며, 농촌과 도시 사이만 있을 뿐이다. 농촌을 늘 변방으로 보고 자신의 일부를 식민지 경영하듯 하는 자가당착을 벗어던져야 한다.

지금 농촌은 최후의 보루처럼 남아 있다. 살기는 모두 도시에 살면서 늙은 부모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 그 후손은 전 국노를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농촌 식당에서도 미국산 수입쇠고기 태우는 냄새가 진동한다. 모든 농촌은 '도시화'의 후유증에 앓로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화의 여파에 시달리는 중이다. 따라서 이제는 형식과 구호에만 머무는 '마을 만들기'식의 사고에서 탈피해 농업과 농촌의 문제를 전 국토의 공간 재편 문제와 함께 생각할 때가 온 것이다."(p.7)


"사실 농촌에서 개발의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농촌 주민들도 개발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 이 어려운 농촌에서 해방될 것인가가 그들의 당면 문제였으며, 여기에는 또한 그들의 미래가 달린 것이다.

한국에서 농촌의 개발이란 무엇보다도 땅값을 올리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개발론자들은 개발을 위해 땅이 필요하고, 오랫동안 땅을 섬기고 살았던 농민들은 그 땅을 지키려 한다. 그 팽팽한 긴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종종 충돌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결국 한국의 많은 농촌 거주민들은 '높은 가격으로 땅을 파고 농촌을 탈출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자본에 굴복하게 된다. 그래서 이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지속적으로 잉태한다. 모든 농촌을 자본의 논리로 개발한다면 누가 남아서 오래된 땅을 지키고 살아갈 것인가?"(p.29)


"오늘날에도 여전히 붕괴되고 있는 농촌사회를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자부심과 정체성을 이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농촌에서 살아가는 것에 조금이라도 자부심을 느낄 때, 농촌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런 모든 것을 탐색하고, 또 사람들을 세살과 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하느 것고 건축가의 몫임을 필자는 무주에서 배웠다."(p.43)


[ 2013년 5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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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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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최재천 저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을 읽고 / 2007. 01., 378쪽, 궁리출판사

국내 동물행동학 분야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학자인 최재천 교수. 최 교수는 에드워드 윌슨의 <지식의 대통합, 통섭 Consilience : The Unity of Knowledge>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했고 나는 그 책을 통해 최 교수를 처음 알게 되었다. <통섭>은 사회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소개했고, 인류의 모든 학문이 생물학으로 수렴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학문의 '통섭'을 주장한 책이다. "결국 모든 학문은 자연과학(특히 생물학)을 통해 풀어낼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자연과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과학이 드러난 사실을 기초로 무언가를 따지고 밝히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실험을 통해 검증 가능하고 반증을 허용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연구를 통해 계속 변화하고 진화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은 인간이 미리 설정해 놓은 개념과 정의를 토대로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제를 해석하거나 주장하는 '사변적'인 학문이라 신뢰도가 떨어진다. 대신 인문사회과학은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해, 인간이 모인 사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시비와 유불리를 따지면서 화해와 조화를 이루어가는 특성 때문에 좋아한다.

저자 최재천은 동물행동학이 "동물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How' 문제를 세분화하고 구체화하여 생물리학과 생화학적 메카니즘으로 환원주의적 접근 방법을 적용하고 동시에 '왜 Why' 문제를 종합적인 관점, 진화적인 관점으로 풀어내는 것"이라고 조금 복잡하게 정의한다.
쉽게 말하자면, 동물행동학의 유용성은 통해 인간과 인간 집단이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행동의 모습과 원인을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물들의 여러 재미있는 행동 양태를 소개한다. 개미가 진딧물을 바로 삼키지 않고 살려놓은채 조금씩 단물을 빨아먹는 행동, 일부일처제로 널리 알려진 원앙새가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모습, 겉모습과는 달리 침팬지 사회에서 실질적인 권력은 암컷이 쥐고 있다는 것, 딱정벌레 애벌레가 개미의 암호를 도용하여 개미의 힘으로 개미집에 자리를 잡은 후 개미의 새끼를 먹고 자라나는 과정 등이 그것이다.
그는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 얼핏 인간만의 특성으로 보이는 여러 행동 패턴이 대부분 이미 동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독자들이 생명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사실 지구와 생명체의 역사를 본다면 인간의 태어난 지 몇 초 밖에 안 되는 갓난 아이에 불과하다. 게다가 몇 초 안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이 생물학자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인류 역사보다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오랜 기간 동안 지구상에서 살아온 생명체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함을 지적한다.
자연을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알고 배우다 보면 인간은 자연과 생명체, 인간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 밖에 없는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동물행동학이나 사회생물학을 통해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연(생명체)과 인간의 공존 뿐 아니라 인간사회를 위해서도 다양성과 차이의 중요성, 강자와 약자의 공존, 조화와 평등이 꼭 필요하다는 점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된다"라는 말은 자연 세계뿐 아니라 인간 사회 내의 다른 사람, 다른 계층, 다른 집단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당될 것이다.

[ 2013년 4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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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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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 버거(John Berger) 저, 김우룡 역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Hold Everything Dear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를 읽고 / 2008. 04., 159쪽, 열화당


저자 존 버거는 지구를 지배하는 독재와 전체주의는 물론 그에 저항하는 집단 속에서 자칫 무시될 수 있는 개개인의 슬픔, 희생, 욕망, 기억을 이야기하며, 그 제목처럼, 세상 구석진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심지어 나귀 한 마리, 풀 한 포기까지에도 세심하게 눈길을 돌린다. 육성급 호텔 안에 갇혀 세계평화를 이야기하는 엘리트들과는 달리, 작가는 스스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인간적인 삶에 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9·11 테러,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독재 행위들을 통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는 부정의(不正義), 거짓 희망,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고발하고, 나아가 이러한 전제주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꿈꾸고 있다. 


미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보지 않았던 사람들,  미국과 한국의 언론 권력이 제공하는 정보만을 접한 사람들, 한국에서 한미동맹과 자유민주주의와 진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진정으로 진보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존 버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념과 정치세력화와 정치에만 매몰된 사람들도 그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


9 ·11 테러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세계는 더욱 극심한 물질적 탐욕과 정신적 구속의 양극단을 달리고 있다. 미래를 약속하던 정치적인 슬로건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경제적인 독재가, 다른 한편에서는 군사적인 독재가 오늘의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는,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고 탐욕만을 부추기는 '지구적 전제주의'에 다름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경제적 시스템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9.11 이후 서구에서 오늘날의 가장 시급한 질문은 "테러리스트는 과연 왜 생겨나며 그 극단적 형태인 자살 순교자는 도대체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테러리스트는 '절망 때문에'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테러는 어떤 초월의 길이자,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절망을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순교자는 그런 초월을 통해 커다란 승리감을 맛본다. 그러므로, 자살이라는 단어는 어느 면에서는 적절치 않다. 

"무엇에 대한 승리일까. ... 절망의 어떤 켜에서 비롯된 수동성과 비통함,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제일세계의 사람들이 그런 절망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절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곬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고통의 조건들과 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십 년간 난민캠프에 수용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이런 절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자신의 삶과, 또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느낌. 여러 다양한 켜들에서 이런 것이 느껴지다가, 이윽고 그 느낌은 삶 전체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전체주의에서처럼 의문을 용납지 않는다."


저자는 강자와 약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조작된 희망과 화려함에 눈먼 현 세대의 맹목을 비판한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고통을 흔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일례로 그는 9 ·11 테러와 2차대전 당시 일본 원폭 투하 사건을 비교하면서 강자(가해자)의 승리 속에 감춰진 약자(피해자)의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강자의 이데올로기와 거짓 희망으로 사람들이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척 가장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치지도자들, 특히 오늘의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극소수의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일례로, 200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태풍 카트리나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것은 부시를 비롯한 지도자들의 무관심, 오직 물질적인 이익에만 가치를 두는 권력자들의 방치 때문이었다. 이는 '이익의 추구'가 인류의 교조(敎條)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광신주의이며, 권력자들이 미화하는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은 실상 두 광신 집단 간의 전쟁과 다르지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와 현대사회의 냉혹함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영화감독 파솔리니에게 찬사를 보내거나, 약자의 삶, 투쟁과 저항을 노래한 여러 시인들을 추억하며 그들의 시를 인용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작가가 꿈꾸는 '연대'의 한 형태로, 새로운 형태의 독재에 저항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 저항의 힘이 되기도 한다. 감옥에 다녀오는 것을 통과의례처럼 여기고, 자식들의 안위를 불안해 하면서도 그들의 결단에 동의를 표하고, 하루에 고작 이 달러도 안 되는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 가는 그들, 그런 그들로 하여금 죽지 않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힘은 바로 '지독한 절망'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모든 불의와 독재 권력들은 이러한 저항을 가장 두려워한다.


강자가 약자를,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두려움이다. 돌멩이, 모래주머니, 구식권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토마호크 미사일, F16 전투기 등 최신식 무기로 상대하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러한 극심한 차이를 작가는 장벽에 비유한다. 이 '장벽'(특히 팔레스타인의 장벽)은 모든 것을 양극단으로만 구분하는 흑백논리와 자신과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획일화한 전체주의의 상징물이다.


이는 [두 여성 사진가 자세히 보기]라는 글에서 소개되는 아흘람 시블리의 '추적자' 연작을 통해서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추적자'란, 적군인 이스라엘군에 자원 입대하여 동족을 추적하고 죽이는 팔레스타인 병사들을 이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이들은 명백히 배신자지만 그저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를 시블리의 사진을 통해 말하고 있다.


책 속에서 저자는 '절망의 일곱켜'라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절망'을 노래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문장 하나, 구절 하나에서 가슴 깊이 파고드는 아픔과 절망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국사회 주류에서 배제된 소수 집단과 단체, 해고자, 비정규직, 실업자, 극빈층, 저소득 장애인, 다문화가정에서도 똑 같은 '절망'을 느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할까...


< 절망의 일곱 켜 >


"또 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부스러기를 찾아 헤매야 하는

매일의 아침.


눈을 뜨면

이 합법의 황야 어디에서도

생존의 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깨달음.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나아지는 것 없이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삶의 경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아무리 진력해도

또 다른 궁지에 닿기만 하는, 굴욕.


지켜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피해 가기만 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약속에의 경청.


조각조각 산산이 깨지면서 보여주던

저항자들의 본보기.


드러나려 애쓰는 순수를

영원히 눌러 두기에 충분한

우리 스스로의

그 숱한 몸들, 무게들."


저자 존 버거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힌다. 그는 평소 세상에 팽배한 불평등과 억압받는 자들의 삶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2006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으로 죄 없는 민간인들이 죽어 가자, 그 무도한 폭력과 서구세계의 외면을 강력히 비난하는 글을 기고하고 레바논을 위한 '게르니카'를 그리기도 했다.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를 모사한 이 그림이 책 앞머리에 실려 있다.

팔순을 넘긴 작가의 눈은 때로는 날카롭게, 또 때로는 따뜻하게 지금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열여섯 편의 글은 세상의 독재와 부정의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지켜내기 위한 하나의 저항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오후의 벽돌이 여행의 장밋빛 열기를 품을 때


장미는 숨 쉴 푸른 공간을 싹 틔우고

바람처럼 꽃 피울 때


듬성한 자작나무들이 트럭 안의 급한 마음들에게

바람의 은빛 애기를 속삭일 때


울타리 나뭇잎들이 한순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던

빛을 간직할 때


그녀의 손목 맥박이 공중을 맴도는 굴뚝새의 가슴처럼 고동칠 때


대지의 합창단이 하늘에서 자신들의 눈을 발견하고

밀밀한 어둠 속에 서로의 눈을 뜨게 할 때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개리스 애번스)


[ 2013년 3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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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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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존 버거(John Berger) 저, 최 민 역 <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 >를 읽고 / 2012. 08., 192쪽, 열화당


'상식' 또는 '평론가식 태도'에서 벗어나 미술품, 사진 그리고 광고의 이미지를 보고 해석하는 기존 관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통적인 미술사나 미술평론에서는 보통 미술작품을 볼 때 작품을 감상하는 이상적인 방식이나 태도가 있다고 가정한다. 마치 어떤 정답과도 같은 감상법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존 버거는 이러한 감상법이 어딘가 잘못된 또는 편협한 방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복제 기술로 인해 이미지가 어떤 식으로 변용되었는지, 누드화에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시선의 정체가 무엇인지, 실제처럼 보이는 유럽의 유화에 담긴 소유관계와 무의식적으로 노출되어 온 광고 이미지의 본질 등을 톺아보며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지고 있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사회 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적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p.36)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p.56)

"유럽의 누드 예술 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서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손거울, 화장대, 화장실의 거울, 쇼윈도우 앞의 여성처럼...)"(p.75)

이 책은 세미나 교재였다. 세미나에 참여하다 보면 이렇게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접하기도 한다. 그것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세미나의 장점이다. 40년전 존 버거와 스벤 블롬버그, 크리스 폭스, 마이클 딥 그리고 리처드 홀리스가 참여한 영국 BBC TV 시리즈를 엮은 것이다.

저자를 통해 광고에 대해 그동안 내가 지니고 있던 의혹과 용도와 배경과 광고주의 목적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함께 탄생하고 성장한 광고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상품 선택의 자유'라는 광고의 이면에 숨어 있는 본질을 폭로한다. 

"광고의 내용을 보면 이 화장품과 저 화장품, 저 자동차와 이 자동차 중에서 고를 수는 있으나 한 시스템으로서의 광고 자체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은 채 오직 한 가지 제안 밖에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인가를 더 사들임으로써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생활이 변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또한 광고는 우리가 비록 돈을 써 버려서 가난하게 되더라도 우리가 조금 더 사들인 바로 그것들이 다른 면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해줄 것이라고 애기한다."

저자는 광고가 사람들의 어떤 욕망을 자극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이미지를 조작, 조절하는지 말해준다. 

"광고는 겉보기에 전과 딴판으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한 변화의 결과로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남을 사로잡는 매력이란 곧 선망의 대상이 되는 데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광고는 이러한 매력을 제조해나가는 과정이다. 광고는 쾌락을 찾으려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일깨워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광고는 쾌락의 실체적인 대상을 제공할 수 없다. 어떤 쾌락을 얻는 본래의 방식을 떠나서 정말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쾌락이 아니란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인 것이다. 광고는 한 여인으로 하여금 그녀가 그 상품을 구입하면 자신이 선망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광고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애정을 슬쩍 훔쳐내어선 광고 상품의 구입 대가로 그 애정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다."

미술품, 명작과 광고의 관계는 소비자들의 소유욕과 비위를 자극하는 것이다.

"광고에 미술작품을 '인용'하는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즉 미술은 풍요의 상징이며 훌륭한 생활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이다. 미술은 세상 사람들의 부와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마련한 장식의 일부다. 따라서 광고에 인용된 미술작품은 거의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애기할 수 있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것을 한꺼번에 의미한다."

"사실상 광고는 대부분의 미술사가들보다 더 철저하게 유화의 전통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광고는 미술작품과 그 관객(소유자) 간의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아차렸고, 그 점을 이용하여 광고를 보는 관객(구매자)을 잘 설득하고 비위를 맞추어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영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소비사회와 광고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신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적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만일 그가 광고하는 물품을 구입한다면 그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애기한다.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상태를 제시한다."

"광고는 '만일 당신이 아무 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라는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이를 이용한다. 광고의 선전에 따르면, 돈을 쓰는 능력을 잃으면 문자 그대로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능력이 있어야 사랑받알 수 있게 된다.
광고는 원칙적으로, 그 광고가 팔려고 하는 특별한 상품의 기능을 통해 딴 사람으로 변신하려는 기대를 갖고 있는 노동자 계층에게 호소한다.(신데델라) 중류층에게 광고는, 그러한 상품들을 구입하면 전체적으로 조화가 잘 된 분위기를 통한 상호관계의 개선을 약속한다.(요술 궁전)"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광고가 현대사회에서 노동자, 소비자들의 자각과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부정적이다.

"(산업사회에서)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용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차 살아가야 한다.
의미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의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 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적인 항동에 의해 대체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무엇을 먹을까,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차를 탈까 하는 선택은 의미있는 정치적 선택을 대치하고 있다.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은폐해 준다."

광고에 대한 저자의 결론 역시 아주 부정적이고 시니컬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이래 몇 십년 동안 광고를 정점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보여준 모습은 저자의 결론을 전적으로 긍정하도록 한다.

"광고는 획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자본주의 문화 안에서 그와는 다른 종류의 희망이나 만족감 또는 쾌락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 광고는 이 문화의 생명이고 - 광고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 동시에 광고는 이 문화의 꿈이다.
"자본주의는 다수의 관심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에 가두어 놓음으로써 그 생명을 이어 나간다. 이것은 한때, 일단은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수탈로 달성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발전된 국가들'에서 무엇이 바람직한 것이고 무엇이 바람직하지 않은가에 잘못된 기준을 부여함으로써 이를 달성하고 있다."

 

한국은 적어도 광고의 목적과 효과라는 측면에서 이 '발전된 국가'의 범주 안에 속할 것이다.


[ 2013년 3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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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 루쉰문고 3
루쉰 지음, 공상철 옮김 / 그린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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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루쉰 저, 공상철 역 < 외침 吶喊 >을 읽고 / 2011. 07., 216쪽, 그린비


왕스징이 출간한 <루쉰전>(2007 다섯수레)와 함께 읽었다. <광인일기> 등 작품 속에 들어있는 단편소설은 거의 대부분 작년에 읽은 <루쉰 소설 전집>(2008 을유문화사)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번 작품 <외침>은 루쉰의 인생역정과 반제반봉건 활동과정, 그리고 잡문과 격문 등을 <루쉰전>을 통해 알게된 후에 읽었기에 지난 번 작품과 다르게 다가왔다.

자신이 기대를 걸었던 신해혁명이 실패하고 이후 일본에 건너가 유학시절 동안 열성적으로 노력한 반일반봉건 활동마저 실패한 후에 루쉰은 처절하게 무너지면서 스스로 중국 역사와 중국 인민, 그리고 다른 세상의 이론 등을 공부했다. 몇 년 동안 누가 자신을 부르기 전에 스스로를 갈고 닦은 셈이다. 그런 연휴에 처음 쓴 작품이 <광인일기>였다는 것은 1910년대 말의 루쉰은 중국 인민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했음을 보여준다.

<외침>에는 1918~22년 사이의 소설 14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 단편소설들은 중화민국 시기에 중국인들이 체험한 고통과 혼란, 무지몽매한 민중의 모습을 보여 준다. 중국인의 삶을 해학적으로 푸는 루쉰의 소설을 통해 그의 생애에 걸쳐 나타나는 민중에 대한 애정과 번민, 자유를 향한 의지와 희망을 읽을 수 있다.

루쉰은 스스로 자신의 소설에 대해 “나는 병적인 사회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글의 제재를 많이 얻었다. 그 목적은 병의 원인을 드러내어 치료에 주의하도록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힌 바 있다. 예컨대 <광인일기>는 식인(食人)의 공포 속에 사로잡힌 광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광인은 “30여 년 미몽(迷夢) 속을 헤매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고, 5000년 식인의 역사를 꿰뚫고 있다. 근대의 함정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식인의 고리를 깨기 위해 움직인다.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하며.

루쉰은 중국인을 각성시키기 위해 기본적으로 무지몽매한 민중을 형상화하고 있다. ‘식인’의 공포 속에 정신병을 앓고 있는 광인, 문자를 쓸 줄 알지만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쿵이지, 화(火)가 금(金)을 억누르고 있다 하여 결국 죽게 되는 아기의 엄마 단씨댁 <내일>, 변발을 자른 것으로 심리적 고초를 겪는 N과 칠근 <두발 이야기>와 <야단법석>, 애들은 줄줄인데 흉년과 기근, 가혹한 세금으로 신음하는 룬투(<고향>), 권세와 혁명에 일희일비하는 군중들 <아Q정전>. 이들은 모두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중국인, 치료를 받아야 할 병리적 모습의 중국인을 보여 준다. 루쉰은 이렇게 병적 현실을 드러내어 중국 민중의 ‘각성’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출판사는 루쉰이 '중국 현대문학의 기원'이라고 평한다. 나는 중국 근대문학도 현대문학도 잘 모르기에 출판사의 평가에 선뜻 공감할 수 없다. 그러나 <광인일기>, <쿵이지>, <아Q정전>, <고향> 등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 작품들이 중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을 정도의 작품은 될 것임을 느낀다. 
그리고 루쉰은 문학의 틀을 넘어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 권력에 대한 풍자, 약자를 향한 희망을 보임으로써 20세기 초반 식민지 봉건사회였던 중국의 어두운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과 인민들에게 구원의 등불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에 동의한다. 물론 중국 이외의 다른 국가들의 운동가들과 민중들에게 있어 '인류의 스승'이라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 2013년 3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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