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전 -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개정판
왕스징 지음, 신영복.유세종 옮김 / 다섯수레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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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스징(王士菁) 저, 신영복/유세종 역 <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를 읽고 / 2007. 09., 471쪽, 다섯수레


루쉰의 작품은 나 머리 속 깊이 남아 있다. <광인일기>의 '식인'과 <아큐정전>의 '정신승리'는 차갑고 똑똑히 각인되었다. 다른 작품 역시 비록 작품의 배경은 중국 근현대사였지만, 나에게는 21세기에 접어든 한국사회에 적용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가 활동한 때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루쉰은 이미 시대를 달리하고 공간을 달리해서 후세대들에게 끊임없이 읽히고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루쉰은 중국 뿐 아니라 전세계 문학계에서 <아큐정전>과 <광인일기> 등 충격적인 작품으로 중국 근대문학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저자 왕스징은 그가 천재적 문학성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1920~30년대 중국의 암흑기를 정면에서 감당하며 자기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고 간 ‘실천적 지식인의 초상’이라 평가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루쉰의 유년기를 부드럽게 묘사하고, 루쉰의 생존 당시 중국 사회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생생한 뉴스처럼 전달하며, 개인적 좌절과 사상 변화 과정을 성실하게 분석한다. 왕스징을 통해 작품으로만 상상하던 루쉰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함으로써 그런 작품이 어떤 과정에서 창작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옮긴이의 글'에 루쉰의 아들이 왕스징의 책을 여러 루쉰 평전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라한 말을 덧붙였다. 목차를 보면 5부 제목이 '한 사람이 조국과 민중을 위해 얼마나 일할 수 있는가'이다. 이 표현은 한 인간에 대한 그리고 한 혁명가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아무래도 루쉰의 장점만 다루었거나 일방적으로 호의적인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룬 평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여러가지로 신경쓰면서 읽어야하는 부담도 있었다.(작년에 읽었던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위화가 제시한 '열 개의 단어'에 루쉰이 포함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중국 근현대사에서,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루쉰이 '교조화' '우상화' 되어 오히려 당시 학생들이 루쉰에 대한 좋지않은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다소 부풀려진 평가를 제외하더라도 루쉰의 삶은 전세계 위대한 혁명가나 사상가에 못지 않은 것 같다. 한국 현대사로 보면 함석헌 선생이나 리영희 선생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절망 같은 어둠 속에서도 늘 '희망'을 꿈꾸고 애기했다. '어둠 속을 밝히는 한 줄기 빛'처럼...

루쉰은 중국 인민들이 이뤄낸 최초의 혁명인 신해혁명(1911~2년)이 고스란히 위안스카이 군벌정부에 넘어갔을 때, 좌절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무쇠로 지은 방’에 대해 말한다. ‘무쇠로 지은 방 안에서 잠을 자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굳이 깨워서 고통 속에 죽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는 혁명의 열매를 군벌의 손에 가볍게 넘겨준 민중들에 대한 절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루쉰은 결코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을 지켜나간다. 앞날의 희망을 위해 루쉰은 자신의 무기, 붓을 들기로 결심하고, 첫 단편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루쉰은 낡은 예법과 도덕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어 ‘사람을 잡아먹는’ 봉건사회의 추악한 전통을 고발하면서, 민중들에게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5·4운동의 대오에 적극 동참하기를 호소한다. 그 자신도 어둠 속에서 전투의 빛을 발하는 비수 같은 ‘잡문’들을 통해 조금도 주저함 없이 신문화운동에 참가한다.
당시에 소설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은 나에게도 깊이 기억된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루쉰이 잡문에 발표한 글 중에서 또 인상적인 것은 혁명이나 대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나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문장을 집단주의, 당위주의 문화가 강한 21세기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이나 진보진영, 시민사회운동 단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이 희생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권리도 없다. (중략) 희생을 선택하는 이 문제는 개인에 관련된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도둑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 도둑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루쉰을 "평생을 전선의 앞이 아닌 뒤에서 하지만 전선의 맨 앞에서 전진하는 전사처럼 살다갔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루쉰에게 긴장을 풀어주는 벗은 ‘청년들’이었다. 루쉰이 수많은 잡문을 통해 연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들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와 닿는 한 단어는 ‘희망’이다. 루쉰은 그 희망을 청년들에게서 발견하고, 스스로 희망이자 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생을 새겨놓았다. "아이가 밥을 헛되이 땅에 버렸다고 해서 농부가 그것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루쉰의 잡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 (루쉰의 시 <자조(自嘲)>에서)
왕스징은 청년들에 대한 루쉰의 헌신적인 사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샤먼에서, 광저우에서 상하이에서, 베이징에서 루쉰이 청년들과 나눈 우애는 나이를 초월한 헌신적 만남이었다. 특히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루쉰이 살던 베이징 집은 당시 문학을 좋아하는 청년들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본래 가로등 하나 없이 적막하고 쓸쓸하던 골목이었는데, 루쉰이 이사 온 뒤로 날이 갈수록 많은 청년들이 찾아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 루쉰은 손수 남포등을 들고 나가서 그들을 맞았다. 루쉰은 ‘호랑이 꼬리’라고 부르는 서재에서 현대평론파를 향해 날카로운 잡문을 쓰거나 청년들을 접대했는데, 몇 시간씩 계속되는 대화에도 청년들은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청년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것은 루쉰이 평생 동안 하고자 한 중요한 일이었다. 청년들이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으면 루쉰은 그들에게 무슨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긴 것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고 한다.


왕스징은 초기에 진화론에 입각해 청년들을 바라보던 루쉰의 의식이 1927년에 광저우에서 벌어진 ‘피의 유희’로 인해 서서히 변화해간다고 설명한다. "다 같은 청년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투서로 밀고하고 관원을 도와 사람을 체포하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치열한 계급투쟁이 루쉰의 머릿속에 있던 소박한 진화론적 세계관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리하여 1927년 이후, 루쉰은 변화된 현실과 혁명 세력의 구국운동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진화론자로부터 혁명적 계급론자로 완만하게 옮겨갔다고... 

전해진 기록에 따르면, 루쉰은 평생에 걸쳐 청년들 500여 명을 친히 접대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2,200여 명의 청년들이 보내온 편지를 손수 읽어보고 3,500여 통의 답장을 썼다. 소설 3권, 산문회고록 1권, 산문시 1권의 합계가 약 35만 글자에 이르고, 잡문 16권이 650편에 135만 자에 이른다고 한다. 그 이외에 중국 고전문학 작품 연구저작, 외국 작품 번역, 희곡 2권, 문예이론서 9권, 단편 논문 50편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구체적인 작품의 권 수와 글자 수까지 따지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루쉰이 평생에 걸쳐 청년 5백 명을 만나 이야기하고 2천2백 명의 청년과 편지를 교류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 수치와 작품의 양이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과 중국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후 중국 현대 문학계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이 없다. 
따라서 나는 저자 왕스징이 중국 현대문학과 혁명운동에 대한 루쉰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부풀리기 위해 무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속에는 문학작품들과 더불어 논적의 심장부를 향하는 비수와도 같은 잡문들이 등장한다. 몇 가지를 예를 들어보면, 1925년에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이 계속 확대되고 전국 각지에서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제국주의자들은 총칼로 시위에 나선 군중들을 쓰러뜨렸으며 제국주의와 봉건군벌 편에 선 부르주아 문인들은 그들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이때 루쉰은 몹시 격분해 그들을 규탄한다. 
"상하이의 영국 경찰이 시민들을 학살하는데도, 중국의 총을 가진 계급 중에 이를 항의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거의 없다. ……감히 말하건대 중국 사람 가운데 다른 나라 사람보다 더 음흉한 눈길로 성실한 청년들을 노려보는 자들이 있다. ……중국을 좋게 만들려면 다른 일도 해야 할 것이다!"

베이징여사대의 치열한 투쟁이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폭넓은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마침내 학생들의 승리로 끝나자, ‘온화’하고 ‘공정’한 얼굴로 교육 당국이 이미 패배한 마당에 ‘물에 빠진 개를 때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문인들이 있었다. 루쉰은 이에 대해 ‘물에 빠진 개를 끝까지 때릴’ 것을 완강하게 주장했다. 
"혁명당에도 온통 새로운 풍조가 나타났는데, ……우리더러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말고 그것들이 제멋대로 기어 올라오도록 내버려두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놈들은 기어 올라왔고, 민국 2년 하반기까지 숨어 있다가 2차 혁명시기에 갑자기 뛰어나와 위안스카이를 도와 숱한 혁명가들을 물어 죽였다. 그리하여 중국은 날로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 때문에 그 뒤 각성한 청년들이 암흑에 반항하기 위해 더 많은 기력과 생명을 허비하게 되었다."

1924년 2차 내전 뒤에 우위를 차지한 돤치루이 군벌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펑위샹의 국민군을 공격하면서 통치기반을 유지하고자 한다. 1926년 3월 18일 제국주의에 무력하게 대처하는 행정부에 맨손으로 청원하러 간 군중과 청년 학생들에게 돤치루이는 사격을 명령한다. 순식간에 국무원 문 앞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그 자리에서 4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민국 이래 가장 캄캄한’ 이 날에 루쉰은 더없는 분노를 느끼며 붓을 들었다. 
"범과 이리가 중국을 제멋대로 뜯어먹어도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 상관하는 사람은 몇몇 나이 어린 학생들뿐이다. 만약 당국자들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끝내 그들을 학살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진 일은 한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한 사건의 시작이다. 먹으로 쓴 거짓말은 결코 피로 쓰인 사실을 덮어버리지 못한다. 피로 진 빚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한다. 빚이란 오래 미룰수록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 2013년 3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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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 평전
쉬딩바오 지음, 양휘웅 옮김 / 돌베개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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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쉬딩바오(徐定寶) 저, 양휘웅 역 < 황종희 黃宗羲 평전 >을 읽고 / 2009. 02., 656쪽, 돌베개


공부모임 교재로 알게된 17세기 중국 정치사상가 황종희에 대한 중국인의 평전이다. 공부모임에서 이 교재를 선택한 배경이 아마도 평전의 주인공 황종희가 살던 혼란한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평전 안에 ‘천붕지해(天崩地解)’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점령하는 시대적 상황이 260년간 명맥을 유지했던 명나라를 '세계의 전부' 또는 '조국'으로 생각한 이들로서는 당연한 표현일 것이다. 요즘 한국식으로 말하는 '멘붕'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단어일 것이다. 세미나 참가자들이 작년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실패한 이후 앞으로 어떤 자세와 태도로 5년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황종희의 일대기가 궁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제가 교재 선택에 참여하지 못해서...^^)

하지만 이 책은 공부모임 참여자들의 기대와는 조금 어긋난다. 저자는 19세기 황종희가 서구사회에서 민주정치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장 자크 루소보다 1세기나 앞서 중국에서 '주권재민'을 제시했다는 것으로 책의 전반적인 방향이나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황종희는 몰락한 왕조 명(明)의 ‘유민(遺民)’으로서 청(淸) 왕조에 출사를 끝내 거부하면서도 지식인으로서 할 말과 할 일을 다 했다고 전해진다. '천붕지해' 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던 때. 명나라가 망하고 청 왕조가 들어서던, 그 시대를 살았던 황종희는 당대의 정치, 역사, 경제에 대해 그리고 정치인과 지식인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황종희라는 이름이 21세기 중국사회에 다시 등장한 이유가 있었다. 10년 전에 입었던 옷을 지금도 입고 다닌다 해서 중국인 사이에 청렴결백한 정치가로 알려진 원자바오(溫家寶) 전 중국 총리가 명말청초의 유학자 황종희에 심취해 있다는 내용이 중국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리고 20세기 초 중국사회에서 삼민주의로 유명한 손문(孫文)은 일본 망명 시절 혁명 단체인 '흥중회'를 결성하면서 이 책을 선전 팸플릿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사상가 양계초(梁啓超)는 <중국근삼백년학술사>에서 이 책을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유하고 황종희를 중국의 루소라 불렀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황종희가 나름 역사적인 인물인 셈이다.

황종희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저자에 따르면 그의 부친 황존소는 동림당(東林黨)이라는 학문적, 정치적 붕당의 일원으로, 소년시절에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모진 탄압으로 옥사했다. 이런 성장 환경 탓에 명 말기의 극도로 불안한 정국 속에서 황종희의 삶과 사상은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청년이 된 그는 문학 결사인 '복사'(復社)에 참가하고 정의로운 선비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청군이 침입하자 그는 향리의 자제들을 규합하여 항전했지만 실패했고, 그후에도 반청 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청 왕조의 중국 지배가 확립되고 명 왕조가 부활할 가능성이 사라지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끝까지 명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고 강희제가 탁월한 선비들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한 박학홍유(博學鴻儒 황제의 정치자문 역할)로 추천되었으나 거절했고 명사관(明史館 명나라 역사 저술을 책임지는 직책)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았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유학자 유종주(劉宗周)의 학문을 개인적으로 연구하여 양명학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공리공론을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을 중시했다. 또한 사학에도 전심하여 경학과 사학을 함께 연구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을 개발하여 청대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저서로 <명이대방록 明夷待訪錄>, <명유학안 明儒學案>, <송원학안 宋元學案>, <역학상수론 易學象數論> 등이 있고, 그가 창시한 '절동학파(浙東學派)'에서 중국 근현대 사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는 만사동(萬斯同), 전조망(全祖望), 장학성(章學誠) 등의 우수한 역사학자가 나왔다.
역자는 황종희의 사상과 학문적 흔적이 조선 후기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 중 '경세치용'과 '실사구시'를 담은 개혁 서적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실제 많은 글과 저작 속에서 황종희는 전통적인 봉건정치체제에 대해 깊이 반성했으며, 봉건정치체제의 부패와 죄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격렬한 규탄을 가했다. 그러나 분명히 봉건적인 군주제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황종희가 반대하고 질책한 것은 군주제도 내의 전제적인 형태와 군권의 남용과 집중이었지, 결코 군권 자체의 합리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황종희는 군주제도에서 군권이 운영되는 정상적인 질서를 수립하려 노력했다. 그는 이를 통해 주권이 백성에게 있다는 의식, 정치체제를 감독하려는 의식, 공업과 상업이 모두 근본이라는 의식 등 근대의 민주계몽의 색채를 띤 일련의 정치적 주장을 제기했다. 저자는 봉건적인 전통체제에 대한 그러한 황종희의 반성이 거대한 사상적 가치를 드러내고, 그로 인해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내가 평전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쨎든 황종희는 260년 역사의 자신의 조국이 멸망하는 와중에 격렬하게 반청 군사행동을 했으면서도 나중에 '청나라의 지배'라는 현실을 인정했고, 국정에 협력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학문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와 정부는 그런 황종희의 존재와 삶을 인정했다. 중국의 땅 떵어리가 한국과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사회문화나 역사적 배경이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런 정치와 문화, 역사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유지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 2013년 02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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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지의 철학 - 존재와 세계의 위기에 대한 전면적인 철학적 응전
박이문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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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이문 저 < 둥지의 철학 : 존재와 세계의 위기에 대한 전면적인 철학적 응전 >을 읽고 / 2010. 02., 292쪽, 생각의나무


"철학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저자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철학이 '존재 위기'를 넘어서 '해체 위기'에 처해있다고 진단하면서 자신만의 철학적 담론을 제시한다. 저자가 책의 초반부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수고>처럼 양적으로 작지만 핵심적인 철학적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책 속에 각주나 철학자들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철학에 관련된 쟁점과 이견을 논리적이면서 쉽게 풀어나가려고 한다. 수많은 철학자의 이름이 인용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철학적 업적을 소홀히 해서가 아니라 "중요한 것들이 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철학'은 '쓸모' 이전에 '철학'이라는 단어나 개념이 사람들을 겁먹게 하고 피하도록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 역시 철학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궁극적으로 모든 현상, 모든 사실, 모든 경험을 총체적으로 단 하나의 총제적 대상으로 삼고, 그러한 대상에 대한 총체적 명제를 도출하는 학문"으로 대답하는데, 그 답문을 읽으면 '명제 덩어리'이고 '개념 덩어리'일 수 밖으니 웬만한 대졸자라도 머리 아플 수 밖에 없다.

책의 제목, 그리고 자신의 철학을 ‘둥지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은 우주 전체를 자신의 철학인 동시에 그 속에서 감성적으로나 지적으로 편안하고 따듯함을 느낄 수 있는 둥지이며, 그러한 둥지의 건축은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리모델링 작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박이문은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거처가 집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관념적 건축물이 바로 지식”이라고 한다. 그에게 철학은 관념적 집으로서의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으며 많은 분과적 학문들이 동시에 거주할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 "둥지는 존재의 토대인 자연과 우주에 거스르지 않는 건축물이며, 끊임없이 리모델링이 가능한 생태적 존재"인 것이다.

저자는 '둥지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과감하게 기존의 철학관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 가운데 ‘존재-의미 매트릭스(The Onto-Semantical Matrix)’를 제시한다. ‘존재-의미 매트릭스’라는 잣대로 인간과 그 밖의 모든 것들 간의 존재론적인 동시에 의미론적인, 육체적인 동시에 관념적인, 연속적인 동시에 단절적인, 전일적인 동시에 분석적인 관점에서 관념적-언어적으로 ‘세계’라는 둥지로 재구성된 자연-우주-존재를 철학이라 한다면, 철학은 영원히 역동적으로 지속되는 세계관으로서의 둥지의 리모델링 작업이 된다는 것이다. 
‘존재-의미 매트릭스'는 한마디로 세계란 인간에 의해 언어적으로 구성되는 매트릭스라는 얘기다. 저자는 세계가 주관의 구성물이라는 칸트의 구성주의,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언어철학, 세계가 일종의 매트릭스, 즉 프로그램이라는 보드리야르의 사상으로 엮은 사유의 구성물이라고 덧붙여 설명한다.

출판사는 저자의 철학을 "실존철학과 분석철학을 아우르는 과감한 철학적 시도이며 박이문 철학의 결정판인 ‘둥지의 철학’은 한국철학의 자생성과 독창성을 위한 디딤돌이자 이정표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내 수준에서는 출판사의 서평에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 전공 여부를 떠나서 철학사 한 번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서양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한국철학에 대해서도 문외환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간략하게 다루고 평가하는 노자의 <도덕경>, 플라톤, 푸코의 <말과 사물>, 헤겔의 <정신현상학>, 하이데거의 <숲길>,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니체의 <비극의 탄생>과 <도덕적 계보>, 그리고 칸트나 프레게, 데리다의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따라서 내가 저자의 논리를 따라 읽어가는 데 있어 전제는 기존 철학자와 그들의 '이론'에 대한 저자의 '평가'와 '판단'을 인정하는 것에 기초해서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논리와 주장의 기본적인 근거와 방식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동의한다. 특히 지각과 인식, 존재와 세계에 대한 저자의 규정이 그렇다. 그는 인식은 "어떤 대상의 관념적 재현이 아니라 재구성이며, 모든 재현과 재구성은 언어적 재구성이며, 언어적 재구성은 인식자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어떤 인식의 선험적 틀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고 정의한다. 우리의 지각은 "대상과의 감각적 접촉이 아니라 이미 하나이 해석"이며, 인식은 "일종의 사진이라는 영상 촬영이 아니라 상상 속의 건축"인 것이다. 즉 '진리'라고 믿는 세계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로서의 인식대상들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발견과 소유대상물"이 아니라, "각자 우리 자신이 창의적으로 상상하고 설계해서 세운 예술작품 같은 언어적 구조물'인 것이다. 인식은 선천적으로 주어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구성된 구조물이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각 인식주체의 교육적,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따라 상대적이어서 가변적이며 그 구조물의 자재, 자료는 의식이 아니라 언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하는 '자연, 우주, 존재'는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인간적 으미를 지닌 세계로 변신한 것이다. 즉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언제나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인간적 주체에 의해 개념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분절, 분류되어 재구성된 주관적 세계일 뿐인 것이다.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존재의 객관적 속성에 대한 언급은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그냥 '존재'는 '세계'로 변하고, 모든 문제는 자동적으로 오로지 그리고 언제나 세계 안에서 사는 인간에 의한 인간적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저자는 우주의 구조적 모태를, 인간의 모든 지적 문제는 근본적으로 '존재-의미 매트릭스'라는 개념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존재-의미 매트릭스' 개념으로 존재의 범주, 진리의 보편성과 존재의 객관성, 우주의 본질, 인류의 존재양식으로서의 윤리적 규범, 가치로서의 윤리를 풀어나간다.

* 참고로 [기독교 사상]이라는 잡지의 2009년 7월호에 정기기획물 '이 사람의 서가'에 '철학자 박이문 교수'라는 제목으로 대담이 실려 있다. 관련 글은 링크(http://blog.daum.net/boguses/8578652) 참조...

[ 2013년 02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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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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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홍기빈 저 <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를 읽고 / 2011. 10., 400쪽, 책세상


복지국가 스웨덴의 정치적,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낸 20세기 초 스웨덴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에른스트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1881~1977). 그를 중심으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1930년대 대공황의 어둠이 세계를 덮쳤을 때, 세계 자본주의 변방의 빈국이었던 스웨덴은 복지 국가 모델을 실현하고 이후 수십 년 동안 황금시대로 이어진 경제·사회적 기획과 정치연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는 스웨덴의 재무부 장관이자 사회민주당 최고 이론가로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스웨덴 복지 국가 모델을 설계한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32년부터 17년 동안 스웨덴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스웨덴의 정치경제 모델을 주도적으로 건설했다. 대공황기에 세계 최초로 케인스주의적인 대안적 경제 모델을 제시해 1932년 총선거에서 사민당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해부터 44년간 이어진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적극적인 수요창출 정책을 통해 공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묄레르 등과 더불어 복지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은퇴한 후에는 더욱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꿈꾸며 1970년대에 시도될 ‘임노동자 기금’ 정책에 대한 영감을 제시하기도 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서 대안적 정치경제학의 전망을 제시해온 저자 홍기빈은 이 책을 통해 비그포르스의 이론과 실천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잠정적 유토피아’를 중심으로 그가 일생 동안 전개한 활동과 사상을 재구성하며, 스웨덴 복지 국가 모델이 어떻게 형성되어 무엇을 실천했는지 살펴봄으로써 지금 여기에 필요한 대안적 담론과 복지 국가의 정치경제학을 모색한다. 더불어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가 장악하고 있던 세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곤경과 대안적 흐름, 1930년대 대공황 상태에서 기존 정치 이념과 노선이 빠져 있었던 마비 상태, 세계 금융위기를 비롯한 21세기 초입의 현실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을 덧붙임으로써 비그포르스의 중요성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의 진보적인 학자 및 정치인,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또는 '노동중심성'이나 '노동자 정치'라는 구호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이 책은 유럽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운동, 정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2013년의 한국과 스웨덴을 무작정 비교하는 것은 부러움과 한숨만 가져올 뿐 그다지 실천적인 아이디어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재벌과 기득권 집단의 경제적 독주로 인한 삶의 황폐화, 총체적 해법을 담은 미래상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정당 정치의 무능력, 그리고 금융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파국이라는 지구적 구조 변화를 마주한 한국인들에게 21세기 스웨덴 복지 국가 모델은 '무릉도원'에 가깝다. 
하지만 적어도 19세기말 ~ 20세기 초 스웨덴의 상황은 21세기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부분도 많은 것 같다. 스웨덴 사민당과 노동운동 세력이 20세기 초의 역경을 딛고 집권당으로 당당하게 나선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진보진영과 진보정당에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민주진보진영과 정당들이 한 두번의 정치적 패배로 좌절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과 외부의 사례를 통해 환골탈태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있어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참고로 조선일보 시각으로 보면,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정책은 현재 한국의 민주통합당은 커녕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보다 더 극좌이념에 가까울 수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44년 장기집권의 비밀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비밀의 핵심을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 (provisoriska utopier / provisional utopia)'는 20세기 초엽의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적 파산’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변증법적 과학’에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던 ‘윤리적 당위’와 ‘과학적 진리’를 재정립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도그마를 극복하고자 했다. 윤리와 과학의 분리, 즉 사회과학은 가치판단을 떠나 객관적 과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사람들의 집단적 정치 기획은 이들이 현실에서 어떤 세상을 열망하는가라는 윤리적 판단에 기초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통해 스웨덴 사회와 민중에게 상상이나 '먼 미래의 꿈'이 아닌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을 개선해나가고자 했다. 즉 구성원들이 지향해야 할 미래 사회의 총체적 모습을 제시하되, 혁명의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개량의 한계에 봉착하는 대신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절실한 쟁점을 포착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의 이상은 현실에서 ‘나라 살림의 계획’이라는 경제사상과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룬 복지 국가 모델로 구현되었다. 실현 가능한 꿈이지만 개혁 과정에서 본질적인 가치들을 구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해줄 만큼 급진적인, ‘길잡이’로서의 잠정적 유토피아. 그것은 종착점이 아니라 진행형의 작업가설이며, 따라서 스웨덴 복지 국가 모델 또한 그것을 넘어 더 멀리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잠정적 유토피아'와 더불어 스웨덴 사민당이 집권당으로 자리잡고 장기집권을 이어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핵심 이유를 나는 이 책을 통해 '정치적 지도력'이라고 읽었다. 스웨덴 사민당의 대중적이면서도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정치적 지도력'은 페르 알빈 한손 총리를 말한다. 페르 알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민의 집'이라는 슬로건으로 중산층과 민중들을 집결시켰고, 1931년 비그포르스를 둘러싸고 당내 분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비록 한쪽 정파의 견해가 올바른 것이고 당 전체의 입장이 될 수 있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당의 통합이 깨어진다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당을 갈등을 극복했다. 2012년 한국 내 민주진보 진영의 연이은 패배는 페르 알빈과 같은 리더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 정도의 '정치적 지도력'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집권, 즉 총선이나 대선에서의 승리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스웨덴 사민당이 20세기 중반이라는 사회경제 현실에서 추진한 국가정책과 운영방식이 21세기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이 지금 처한 현실과 20세기 중반의 스웨덴의 처지가 많이 다를 뿐더러 스웨덴 사민당과 한국의 민주진보 정당도 전통과 주축세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결정적으로 한국은 스웨덴에는 없는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의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민주진보 정당들에게 스웨덴 사민당과 같은 '잠정적 유토피아'의 비전도 없고 '정치적 지도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이나 노무현 전대통령을 한 단계 뛰어 넘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비전이 없다는 것이 민주진보 진영 내부의 개인과 세력들이 연대하기 보다 갈등하고 분열하는 이유 중 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 2013년 02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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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
하수정 지음 / 폴리테이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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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수정 저 < 올로프 팔메 Olof Palme, 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를 읽고 / 2012. 12., 386쪽, 폴리테이아


1986년 2월 28일,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 도심에 울려 퍼진 두 발의 총성. 그 총성은 스웨덴인이 사랑했던 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의 비극적인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짧았지만 빛나는 삶을 살았던 그를 한국에 소개했다. 그는 현대 스웨덴의 보편적 복지의 틀을 매듭지은 사민당 총리로, 미소 열강 사이에서 약소국이 운신할 틈을 만들며 ‘중립 노선’을 새롭게 정의한 외교가로, 그리고 정치인의 신념과 정치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매력적인 정치가로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나는 내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그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부고에 뭐라 쓰일지를 신경 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긴다. 용기가 사라진다. 생명력을 잃는다. 그 생각이 내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도록 당신도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 1969년 올로프 팔메는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정치인의 신념에 대해 담담히 밝힌 이 발언은 그의 느닷없는 죽음을 한층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아직 한국에 온전하게 소개된 바 없는 그의 삶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1927년 태어나 198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개인이자 정치인으로서 그의 일생을 20세기 스웨덴의 근현대사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은 격동기에 나라를 이끈 지도자를 다루며 정치와 정치가의 모델을 보여 주는 설명서이자, 스웨덴 정치와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다. ‘낯선 정치인’을 우리 관점에서 돌아보게 함으로써 좋은 정치인, 좋은 시민, 좋은 사회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는 점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올로프 팔메를 국내 저자가 직접 다룬 데서 이루어진 성과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 직전에 읽었던 강준만 교수의 <강남 좌파>와 비교하면서 의미를 찾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의 '강남 좌파'가 위선과 엘리트주의의 상징이었다면, 앞으로 올로프 팔메처럼 강직하게 원칙과 철학을 가지고 올바른 사회를 위한 정치를 펼쳐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올로프 팔메를 한국식으로 부르자면 '강남 좌파'였다. 그는 스톡홀름 외곽의 외스테르말름의 출신이다. 스웨덴에서 그곳 출신은 '부유한 집안이며 보수 성향'이라는 의미로 통했다. 그는 한국식으로 보면 70~80년대 한남동이나 평창동의 부유한 가문의 대저택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럼에도 팔메는 학창 시절 이미 노동자당인 사민당에 가입했고, 사민당 출신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총리로 곱힌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그 폐해를 지적하며 세금을 올리고 규제를 강화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도 잇달아 도입했다.

'강남 좌파'로 태어나 자랐지만, 사회민주주의자로 변화해간 팔메의 청춘시절도 서구적이면서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팔메는 자유에 대한 동경으로 찾아간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미 대륙을 히치하이크로 횡단하며 여행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노력에 따른 결과나 선택이 아니라 피부색이나 타고난 가난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미국의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확인한 젊은 시절의 경험, 그리고 스웨덴 총합생연합에서 펼친 국제적 활동은 2~4장에서 소개된다. 이를 통해 보수당의 대표적인 정치인이 되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부유한 가문 출신인 팔메가 사민당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총리로 자리매김하고, 약소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가로 활동하게 된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다. 1953년 타게 에를란데르(23년간 총리로 재임)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래,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이후 행적까지 소개한 부분에서는 정치가 팔메의 삶을 따라가는 한편, 그가 총리로 있을 때 도입한 제도들을 비롯해 그 바탕에 놓인 이론적인 고민과 당시 사회상, 사민당을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 활동 등을 엿볼 수 있다(5~8장). 
한국과 스웨덴을 비교하기에 너무 많은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격차가 크긴 하지만, 그가 학창시절과 청춘을 보내면서 경험하고 고민했던 지점과 방식은 열정이 넘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충분히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팔메가 총리가 되어 집권한 시기(1969~76, 1982~86)는, 스웨덴 사민당과 전국노동조합연맹(LO)의 강력한 연합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이어지던 복지국가의 전선에 균열이 생겨남과 동시에, 스웨덴 복지 제도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 기점으로 평가받는다. 스웨덴 사민당에 사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비그포르스의 오랜 염원인 '기업 민주화'의 정책 중 하나가 '임금노동자 기금'이었다. 오랜 산고 끝에 도입된 임금노동자 기금이 이에 반대하는 기업인과 보수당의 거센 저항 끝에 결국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면서, 사민당과 LO의 관계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한편, 이 시기 스웨덴의 지니계수는 눈에 띄게 낮아졌고, 부모 육아휴직 제도가 개혁되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었으며, 보육 시설과 교육 기회가 확충되는 등 양성평등 지표는 높아졌다. ‘국민의 집’으로 일컬어지는 기존의 스웨덴 복지 제도가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까지 포괄하며 사회 안전망을 한층 더 촘촘하게 한 결과, 현재의 보편적 복지의 기틀이 완성된 시기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44년간 이어져 온 사민당의 장기 집권이 팔메의 첫 번째 총리 임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 뒤 1982년 팔메가 다시 총리가 되었다가 1986년 암살당하는 것으로 마감된 두 번째 임기를 포함해, 지금까지도 스웨덴에서는 보수 연합과 사민당이 번갈아 집권하고 있다. 이 시기에 복지국가 스웨덴의 전망이 어두워졌다는 이들도 있었으나, 복지 제도 및 실태가 후퇴했다는 명백한 지표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권당의 부침 및 교체와 무관하게 스웨덴의 복지 제도가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는 징표로 해석되고 있음에 주목한다면, 오늘날의 스웨덴 복지 제도와 정치 지형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은 팔메가 총리로 있던 10년, 즉 스웨덴의 복지에 근대성이 가미된 그 시기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올로프 팔메는 약소국의 외교와 평화에 대한 전략과 태도라는 측면에서 한국 정치인에게도 귀감이 된다. “평화가 위협당하고, 정의가 거부되고, 자유가 위기에 처하는 곳마다. 그곳이 중동이든, 중앙아메리카든, 남아프리카든, 핵무기 사용이 논의되는 곳이든, 팔메는 그곳을 찾아 중재를 이끌었다.” 미국의 국무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1986년 3월 팔메의 장례식에 참석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선보인 팔메의 역할을 이와 같이 기렸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중립 노선을 견지하며 국가 안보를 지켰던 스웨덴이 국제 무대에서 가장 돋보인 시기는 팔메 집권기였다. 이는 학문적으로 팔메를 다룬 연구들이 대부분 그의 외교정책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립은 침묵을 의미하지 않는다.”라는 팔메의 말은, 당시 미소 열강 사이에서 약소국이 운신할 틈을 만들어 낸 그의 외교적 역량과 의지를 잘 드러낸다. 1970년 영국의 "더 타임스"는 “스웨덴은 오히려 국제 정세에 깊게 관여하기 위한 시발점으로 중립을 활용하고 있다.”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1968년 2월 21일,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대 앞에서 팔메는 미국을 맹렬히 비판했다(270-273쪽). 이후 스웨덴과 미국의 관계가 1년 넘게 단절되기도 했는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연설이 있고 나서 몇 달 뒤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 때였다. 그날 저녁 침공에 반대하고자 모여든 10만여 명의 스웨덴 시민 앞에서 연단에 오른 팔메는 의도적으로 베트남전 반대 연설을 그대로 차용해 국가 이름만 ‘미국’에서 ‘소련’으로 바꿔,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잔인한 공격을 비난했다. 이후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분쟁을 적극적으로 중재하거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는 데 목소리를 내는 등 스웨덴식 중립이 “어떤 세력을 향해서든 자유롭게 자신의 신념을 드러낼 수 있는 적극적 중립”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팔메가 기여한 바는 컸다. 팔메의 죽음을 다룬 이 책 1장에서,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암살의 배후를 손꼽을 때 극우 세력, 쿠르드노동자당, 군수산업, 남아공 인종 분리주의자 등이 포함되었다는 점도 팔메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의 부록에는 스웨덴의 정치와 사회를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본 항목들과, 한국과 스웨덴 사회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는 지표를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스웨덴은 전세계인이 부러워할 정도로 복지체계와 높은 일인당 국민소득, 낮은 소득불평등, 높은 민주주의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 정치인들이 스웨덴의 사례를 제시하곤 한다. 그런데 정치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작년 대선 선거운동 초반 안철수 후보가 '정치개혁'을 화두로 던졌을 때, 한국 정치권과 유권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다. 당시 나 역시 안 후보의 제안 중 일부는 반대하고 일부는 찬성하는 의견이었는데, 대선이 끝난 후 여야 정치권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치개혁'은 실종되었고, 오히려 새누리당은 이동흡 헌재소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통랍진보당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자격 심사'라는 정치 공세를 펼친 바 있다. 두 의원에 대한 검찰의 '먼지털이 수사'가 이미 작년에 강력(?)하게 진행되어 김재연 의원에게는 아무런 '먼지'도 발견하지 못한 채 끝났고, 이석기 의원에게도 고작 '먼지 수준'의 혐의를 가지고 무리하게 기소한 바 있다. 그럼에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데올로기 공세를 하는 정치권의 후진성은 여전하다.

'정치개혁' 또는 '정치쇄신'이라는 말이 나오고 보니, 이 책의 부록에 저자가 한국과 스웨덴의 정치 분야중에서 여러 특징을 정리, 비교해 놓은 부분이 있어 소개한다.

1. 스웨덴 의회 (스웨덴은 인구 950만명입니다. 기타 비교 통계는 아래 사진에...) : 스웨덴은 1866년 입헌군주제 헌법을 만들고 양원제 의회를 구성했습니다. 의원내각제죠. 상원의원 155명과 하원의원 233명(총 388명)이었습니다. 1970년에 헌법을 수정하여 한국과 같은 단원제 총 349명으로 변경
=> 스웨덴과 한국의 산술적인 인구 대비로 생각하면 한국 국회의원은 5배인 1,750명이 되어야합니다. 즉 의원의 숫자는 국가마다 의무와 역할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2. 민주주의 수준 : 2011년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167개국의 민주주의 지수에서 스웨덴은 10점 만점에 9.5점으로 4위, 한국은 22위입니다.(평가 항목은 선거 절차 및 다원주의, 시민의 권리, 정부의 기능, 정치 참여, 정치 문화 등 5가지) '제도가 보장하는 절차'에서는 한국도 9점대라 하네요.

3. 정당 지원 제도 : - 원내 정당의 경우, 기본 지원금과 의석당 지원금 외에 여당에는 의석당 270만원, 야당에게는 의석당 400만원을 배정한다네요. 이것은 한 정당의 독주를 막고 다양성을 장려하기 위한 스웨덴 정치계와 사회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봅니다. 원내 교섭단체에게도 여당보다 야당의 지원금이 두 배입니다.
=> 한국의 경우, 18대 국회 의석을 기준으로 새누리당이 전체 국고보조금의 46.4%를, 민주통합당이 36.7%를, 자유선진당이 6.9%를, 통합진보당이 6.4%를, 창조한국당이 2.1%를 배정받았죠. 새누리당은 249억이나 됩니다.
=> 스웨덴은 경제사회 뿐 아니라 정치분야에서도 독식과 독점을 방지하고 다양성을 키우려는 취지이고, 한국은 부익부 빈익빈 식으로 순환되어 정당 구성을 고착화시키고 다양성의 싹을 잘라 버립니다.

4. 의원 급여 등 : 스웨덴 의원의 월급은 약 924만원이고 한국은 1,031만원입니다. 의원 연금은 12년 이상 의원직을 유지해야 받을 수 있다네요. 스웨덴 의회는 공무상 해외 출장비를 임기 내에 825만원을 한도로 규정하고 사용내역도 공무상으로 제한하여 한국 국회의원보다 까다롭습니다. 스웨덴은 의원당 보좌관 고용지원액이 연간 1억3백만원으로 연간 3억2천만원을 받는 한국보다 적습니다. 스웨덴 의원의 일주일에 평균 66간 일하고 일 평균 6.5시간 수면을 취한다네요. 스웨덴 노동자의 일주일 평균 노동시간이 30시간이니 엄청나게 일하는 것이죠. 한국의 경우 진보정당 의원들과 민주당 일부 의원 정도가 그 정도로 일하겠죠? ^^
=> 의원들에 대한 급여,복지도 역시 단순 비교는 어렵습니다. 인구 기준 국회의원 수는 스웨덴이 5배 이상이 되고, 의원의 급여는 한국이 조금 많을 뿐이며 보좌관은 3배 정도이니까요. 다만 통계치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의원들의 부정부패와 무능, 게으름 등을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겠죠?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제도와 자질, 능력,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5. 선거제도 : 스웨덴은 대선거구제이고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입니다. 그래서 2012년 현재 원내에 진출한 정당이 무려 8개라고...ㅋㅋ 투요용지가 3장이라네요. 정당별 후보 명단에 표기할 수도 있고, 직접 이름을 쓸 수도 있고, 특정인을 뽑지 않고 정당에만 투표할 수 있다고...
=>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선거관리위원회나 정당의 편리함이라 유리함이 아니라 유권자의 선택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노력이라고 느껴집니다. 정당이 정한 후보 중에서 무조건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낙선시킬 수 있는 장식이라 매력적으로 느껴지고요..^^
- 그럼에도 스웨덴의 투표율은 보통 80% 중반이고 가끔은 90%를 넘는다고 합니다. 물론, 투표는 일요일에 실시합니다. 투표 시간이 밤 몇 시까지인지는 모르겠고요...

6. 정치박람회 : 굉장히 독특하고 신선하다고 느낀 것 중의 하나가 '알메달렌'이라는 이름의 정치박람회였습니다. "정치가 일상의 담론이 될 때 정치라 좋아진다"는 독일 사회학자 하버 마스의 말을 실천하고 있다는 저자의 평가... 매년 의회가 회기를 종료하는 마지막 주 8일(일요일~일요일, 원내 정당이 8개라서)에 스웨덴 알마달렌이라는 공원에서 매일 정당 하나가 정책설명회와 연설, 세미나, 청문회, 파티, 문화행사 등 각종 행사를 통해 정당을 홍보하고 유권자와 소통을 넓히는 것입니다. 요일을 추첨으로 정하고, 정당 뿐 아니라 각종 연구소, 단체, 학회 등 전국의 정치와 관련한 주체들과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정치에 대한 소통'을 집중적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2011년에는 8백개 조직이 참여했고 공식 등록 행사만 1,476였다네요. 하루 평균 행사가 300개인 셈이죠. 유권자나 관중을 제외한 참가자(주최 또는 주체)만 1만 4천명이었다는... 950만명 인구 중에서... 정치박람회는 1970년 들어 시작, 정착되어 1991년부터 공식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이러니 정치 참여가 생활화되고 정치 담론이 일상이겠죠.
=> 무지무지하게 부러운 방식이고 한국 정당도 선관위의 지원과 협력으로 몇 년 안에 진행했으면 합니다.
=> 물론, 스웨덴 유권자의 정치박람회 참여에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소득격차 축소, 적은 노동시간, 노조 조직율 71%, 합의에 기반한 정치문화 등이 없으면 불가능했겠죠...ㅠㅠ 그렇다고 애써 무시하기에는 정치박람회의 가능성과 장점을 무시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 2013년 02월 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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