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김상봉 지음 / 꾸리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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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2월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큰 정책화두 중 하나가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말과 행동에 언론과 사람들이 휩쓸려 다닌다.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치민주화가 정치 영역에서 '주권재민'과 자유, 평등, 절차 공정성이라면, 경제민주화는 경제 영역에서 동일한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 대선에서 거론되는 경제민주화는 추상적인 재벌개혁이나 사회적 안전망, 공정경제나 상생경제 수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정치민주화 관점을 적용한 경제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책과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경제민주화의 본질 중의 하나인 주식회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저자는 원래 '서로주체성'에 관한 담론을 재기해 온 철학자이다. 그는 <학벌없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학벌체제를 폐지하기 위해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번 책에는 마찬가지 '서로주체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기업 형태인 '주식회사'를 분석하였다.
 
저자는 "왜 경영자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대통령을 뽑듯이, 대학의 총장을 학교의 구성원들이 뽑듯이 회사 사장도 노동자들이 뽑으면 안되는가를 묻는다.
그는 개인기업은 기업주의 사적 소유재산이므로 그것의 운영권 역시 당연히 소유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옳지만, 주식회사는 원래 주인이 없는 기업이므로 얼마든지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저자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법 조항을 상법애 신설하자고 주장한다.(대신 경영진을 감시할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는 것으로...)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 모두 '소유'를 기준으로 한다. ... 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로 오해했기 때문이다."(p.104) "하지만 자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데 존립한다"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p.105)
 
저자의 추론을 요약하면 이럴다. 저자는 자유와 소유에 대한 근본개념을 비판하면서 경영권을 다룬다. 자유의 전제가 소유는 아니다. 사람이 소유의 대상일 수 없듯이 권력도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식회사 법인은 법에 의하여 경제 영역에서 사람과 같은 '인격'을 부여했기 때문에 특정인의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주의 유한책임과 주식양도 자유의 원칙 등을 고려할 때 주주는 주식에 대한 소유권과 배당권을 가질 뿐 경영권을 가질 근거가 없다. 또한 국가마다 주식회사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구조가 다르다. 경영권은 소유권이 아니라 권력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기업경영을 칸트의 유기체 개념으로 추론한다면 관료적이고 독재적인 기업조직은 기업의 구성원들의 서로주체성을 침해할 수 밖에 없다. 경영진을 종업원 총회에서 선출하는 것은 서로주체성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권력은 사물적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소유권이 아니라 정당성만이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p.120)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다른 어디도 아니고 사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뒤섞어버린 데서 비롯된다"(p.130)
 
주식의 소유와 주식회사의 소유의 본질과 차이점, 경영권의 독자성과 특별함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법적 해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법인 역시 그 자체로서는 인격이 아니지만 법에 의해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법적인 권리주체로서 인정된 인격이다"(p.151)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회사의 본질상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소유권 자체가 어떤 근원적 불안정성 속에 있기 때문에 경영권 역시 동요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p.171)
"하나의 주식 속에 주식회사에 대한 어떤 소유권도 들어있지 않다."(p.175)
"주식회사의 주주는 주주의 유한책임의 원칙에 기대어 경영의 실패에 따른 무한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바로 이 무책임성 때문에 주식회사는 아무리 한 사람이 모든 주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참된 의미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p.177)
"주주들은 기업경영에 대해 관심도 책임도 없다. 오로지 배당과 주가상승만을 원한다. 불만이 있으면 처분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무책임성이 주식회사의 본질적 특성이다. ..... 따라서 주주총회에서 선출되는 이사회는 주주들의 대표기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소유의 주체는 될 수 있지만, 소유의 대상은 될 수 없다"(p.179)
 
저자가 자신의 논증을 하는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대부분 저자의 논증에 결정적인 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결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저자가 말한 '국가권력이 기업을 통제하지 못한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이처럼 기업이 세계화를 이끄는 주체인 까닭이다"(p.39) 국가권력이 기업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느냐의 문제인데,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도 노동자 경영권도 물거품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이 어떤 세력구도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 측면에서는 미국,영국과 유럽 국가가 다르고 한국과 일본이 다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참된 '만남'을 방해하는 지배체제는 결국 자유를 열망하는 인간의 손에 해체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엄연한 철칙이다"(p.41) '고대 로마제국 이후 중세 유럽의 종교권력의 장악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전형적으로 서구식 세계관과 역사관의 결정론적 함정이라 생각한다. 자유와 '만남'의 힘과 억압과 지배의 힘은 유동적이다. 지난 5천년간 인류의 역사는 지배세력이 거의 주도했고 가끔 자유와 '만남'이 주도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기 위해 대영도서관을 소유할 필요도, 멘델스존이 교향악을 작곡하기 위해 교향악단을 소유할 필요도 없다", "노동자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기업을 반드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라는 표현도 동의하기 어렵다. 노동자가 자유를 위해 기업의 소유권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마르크스, 멘델스존의 경우는 연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맨델스존은 노동자처럼 누구에게 구속,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이용'하는 것이고 교향악은 '관람'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이 타당함과는 별개로 노동자 경영권의 현실적인 제약조건도 많을 것임을 느낀다.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노동자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p.75)
그동안 자본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 백년 동안 이어져온 초과이윤 착취를 욕망해왔다. 그 욕망이 자본가와 자본주의, 주식회사를 자탱해 온 '본질'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구조적으로 차단한다면 자본가의 창업이나 자본주의 자체의 유지가 가능할까? 자본가는 기업을 설립하거나 기업에 투자하지 않을 우려도 있다. 소위 자본 파업이 성립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가 독일의 노사결정제도(직장평의회, 감독이사회), 미국의 주주자본주의, 일본의 종업원 중심주의와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를 비교한 대목이 있다. 독일과 미국은 제도적으로 운영되고 일본은 사회적 관습과 문화로 유지되고 있지만, 모두의 공통점은 '공공성'이다.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에는 손톱 만큼의 공공성의 흔적도 없다. 삶의 질이나 국가의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라 무지 우울했다.
 
[ 2012년 10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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