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전 -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개정판
왕스징 지음, 신영복.유세종 옮김 / 다섯수레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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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왕스징(王士菁) 저, 신영복/유세종 역 < 루쉰전,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를 읽고 / 2007. 09., 471쪽, 다섯수레


루쉰의 작품은 나 머리 속 깊이 남아 있다. <광인일기>의 '식인'과 <아큐정전>의 '정신승리'는 차갑고 똑똑히 각인되었다. 다른 작품 역시 비록 작품의 배경은 중국 근현대사였지만, 나에게는 21세기에 접어든 한국사회에 적용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가 활동한 때로부터 100년이 지났지만 루쉰은 이미 시대를 달리하고 공간을 달리해서 후세대들에게 끊임없이 읽히고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루쉰은 중국 뿐 아니라 전세계 문학계에서 <아큐정전>과 <광인일기> 등 충격적인 작품으로 중국 근대문학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저자 왕스징은 그가 천재적 문학성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1920~30년대 중국의 암흑기를 정면에서 감당하며 자기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고 간 ‘실천적 지식인의 초상’이라 평가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루쉰의 유년기를 부드럽게 묘사하고, 루쉰의 생존 당시 중국 사회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생생한 뉴스처럼 전달하며, 개인적 좌절과 사상 변화 과정을 성실하게 분석한다. 왕스징을 통해 작품으로만 상상하던 루쉰의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함으로써 그런 작품이 어떤 과정에서 창작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옮긴이의 글'에 루쉰의 아들이 왕스징의 책을 여러 루쉰 평전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라한 말을 덧붙였다. 목차를 보면 5부 제목이 '한 사람이 조국과 민중을 위해 얼마나 일할 수 있는가'이다. 이 표현은 한 인간에 대한 그리고 한 혁명가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아무래도 루쉰의 장점만 다루었거나 일방적으로 호의적인 부분만 집중적으로 다룬 평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여러가지로 신경쓰면서 읽어야하는 부담도 있었다.(작년에 읽었던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위화가 제시한 '열 개의 단어'에 루쉰이 포함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중국 근현대사에서,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루쉰이 '교조화' '우상화' 되어 오히려 당시 학생들이 루쉰에 대한 좋지않은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렇게 다소 부풀려진 평가를 제외하더라도 루쉰의 삶은 전세계 위대한 혁명가나 사상가에 못지 않은 것 같다. 한국 현대사로 보면 함석헌 선생이나 리영희 선생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절망 같은 어둠 속에서도 늘 '희망'을 꿈꾸고 애기했다. '어둠 속을 밝히는 한 줄기 빛'처럼...

루쉰은 중국 인민들이 이뤄낸 최초의 혁명인 신해혁명(1911~2년)이 고스란히 위안스카이 군벌정부에 넘어갔을 때, 좌절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무쇠로 지은 방’에 대해 말한다. ‘무쇠로 지은 방 안에서 잠을 자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굳이 깨워서 고통 속에 죽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는 혁명의 열매를 군벌의 손에 가볍게 넘겨준 민중들에 대한 절망이 담겨 있다. 하지만 루쉰은 결코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을 지켜나간다. 앞날의 희망을 위해 루쉰은 자신의 무기, 붓을 들기로 결심하고, 첫 단편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했다. 이 글을 통해 루쉰은 낡은 예법과 도덕에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어 ‘사람을 잡아먹는’ 봉건사회의 추악한 전통을 고발하면서, 민중들에게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5·4운동의 대오에 적극 동참하기를 호소한다. 그 자신도 어둠 속에서 전투의 빛을 발하는 비수 같은 ‘잡문’들을 통해 조금도 주저함 없이 신문화운동에 참가한다.
당시에 소설 속에 담긴 그의 마음은 나에게도 깊이 기억된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땅 위에 난 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실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

루쉰이 잡문에 발표한 글 중에서 또 인상적인 것은 혁명이나 대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나 문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문장을 집단주의, 당위주의 문화가 강한 21세기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이나 진보진영, 시민사회운동 단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이 희생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권리도 없다. (중략) 희생을 선택하는 이 문제는 개인에 관련된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도둑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 도둑이라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루쉰을 "평생을 전선의 앞이 아닌 뒤에서 하지만 전선의 맨 앞에서 전진하는 전사처럼 살다갔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루쉰에게 긴장을 풀어주는 벗은 ‘청년들’이었다. 루쉰이 수많은 잡문을 통해 연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들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와 닿는 한 단어는 ‘희망’이다. 루쉰은 그 희망을 청년들에게서 발견하고, 스스로 희망이자 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생을 새겨놓았다. "아이가 밥을 헛되이 땅에 버렸다고 해서 농부가 그것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루쉰의 잡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는 쌀쌀하게 눈썹 치켜세워 응대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머리 숙여 소가 되리라(橫眉冷對千夫指, 俯首甘爲孺子牛)." (루쉰의 시 <자조(自嘲)>에서)
왕스징은 청년들에 대한 루쉰의 헌신적인 사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샤먼에서, 광저우에서 상하이에서, 베이징에서 루쉰이 청년들과 나눈 우애는 나이를 초월한 헌신적 만남이었다. 특히 1923년부터 1926년까지 루쉰이 살던 베이징 집은 당시 문학을 좋아하는 청년들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본래 가로등 하나 없이 적막하고 쓸쓸하던 골목이었는데, 루쉰이 이사 온 뒤로 날이 갈수록 많은 청년들이 찾아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 루쉰은 손수 남포등을 들고 나가서 그들을 맞았다. 루쉰은 ‘호랑이 꼬리’라고 부르는 서재에서 현대평론파를 향해 날카로운 잡문을 쓰거나 청년들을 접대했는데, 몇 시간씩 계속되는 대화에도 청년들은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청년들을 가르치고 기르는 것은 루쉰이 평생 동안 하고자 한 중요한 일이었다. 청년들이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으면 루쉰은 그들에게 무슨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긴 것 아닌가 하고 불안해했다고 한다.


왕스징은 초기에 진화론에 입각해 청년들을 바라보던 루쉰의 의식이 1927년에 광저우에서 벌어진 ‘피의 유희’로 인해 서서히 변화해간다고 설명한다. "다 같은 청년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투서로 밀고하고 관원을 도와 사람을 체포하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치열한 계급투쟁이 루쉰의 머릿속에 있던 소박한 진화론적 세계관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리하여 1927년 이후, 루쉰은 변화된 현실과 혁명 세력의 구국운동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진화론자로부터 혁명적 계급론자로 완만하게 옮겨갔다고... 

전해진 기록에 따르면, 루쉰은 평생에 걸쳐 청년들 500여 명을 친히 접대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2,200여 명의 청년들이 보내온 편지를 손수 읽어보고 3,500여 통의 답장을 썼다. 소설 3권, 산문회고록 1권, 산문시 1권의 합계가 약 35만 글자에 이르고, 잡문 16권이 650편에 135만 자에 이른다고 한다. 그 이외에 중국 고전문학 작품 연구저작, 외국 작품 번역, 희곡 2권, 문예이론서 9권, 단편 논문 50편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구체적인 작품의 권 수와 글자 수까지 따지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루쉰이 평생에 걸쳐 청년 5백 명을 만나 이야기하고 2천2백 명의 청년과 편지를 교류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 수치와 작품의 양이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과 중국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후 중국 현대 문학계에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분석이 없다. 
따라서 나는 저자 왕스징이 중국 현대문학과 혁명운동에 대한 루쉰의 영향력을 과도하게 부풀리기 위해 무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속에는 문학작품들과 더불어 논적의 심장부를 향하는 비수와도 같은 잡문들이 등장한다. 몇 가지를 예를 들어보면, 1925년에 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이 계속 확대되고 전국 각지에서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제국주의자들은 총칼로 시위에 나선 군중들을 쓰러뜨렸으며 제국주의와 봉건군벌 편에 선 부르주아 문인들은 그들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이때 루쉰은 몹시 격분해 그들을 규탄한다. 
"상하이의 영국 경찰이 시민들을 학살하는데도, 중국의 총을 가진 계급 중에 이를 항의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거의 없다. ……감히 말하건대 중국 사람 가운데 다른 나라 사람보다 더 음흉한 눈길로 성실한 청년들을 노려보는 자들이 있다. ……중국을 좋게 만들려면 다른 일도 해야 할 것이다!"

베이징여사대의 치열한 투쟁이 각계각층 사람들에게 폭넓은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마침내 학생들의 승리로 끝나자, ‘온화’하고 ‘공정’한 얼굴로 교육 당국이 이미 패배한 마당에 ‘물에 빠진 개를 때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문인들이 있었다. 루쉰은 이에 대해 ‘물에 빠진 개를 끝까지 때릴’ 것을 완강하게 주장했다. 
"혁명당에도 온통 새로운 풍조가 나타났는데, ……우리더러 물에 빠진 개를 때리지 말고 그것들이 제멋대로 기어 올라오도록 내버려두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놈들은 기어 올라왔고, 민국 2년 하반기까지 숨어 있다가 2차 혁명시기에 갑자기 뛰어나와 위안스카이를 도와 숱한 혁명가들을 물어 죽였다. 그리하여 중국은 날로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 때문에 그 뒤 각성한 청년들이 암흑에 반항하기 위해 더 많은 기력과 생명을 허비하게 되었다."

1924년 2차 내전 뒤에 우위를 차지한 돤치루이 군벌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펑위샹의 국민군을 공격하면서 통치기반을 유지하고자 한다. 1926년 3월 18일 제국주의에 무력하게 대처하는 행정부에 맨손으로 청원하러 간 군중과 청년 학생들에게 돤치루이는 사격을 명령한다. 순식간에 국무원 문 앞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그 자리에서 40여 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민국 이래 가장 캄캄한’ 이 날에 루쉰은 더없는 분노를 느끼며 붓을 들었다. 
"범과 이리가 중국을 제멋대로 뜯어먹어도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 상관하는 사람은 몇몇 나이 어린 학생들뿐이다. 만약 당국자들이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양심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끝내 그들을 학살하고 말았다. ……지금 벌어진 일은 한 사건의 결말이 아니라 한 사건의 시작이다. 먹으로 쓴 거짓말은 결코 피로 쓰인 사실을 덮어버리지 못한다. 피로 진 빚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한다. 빚이란 오래 미룰수록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 2013년 3월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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