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서평] 홍기빈 저 <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를 읽고 / 2011. 10., 400쪽, 책세상


복지국가 스웨덴의 정치적,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낸 20세기 초 스웨덴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에른스트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1881~1977). 그를 중심으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1930년대 대공황의 어둠이 세계를 덮쳤을 때, 세계 자본주의 변방의 빈국이었던 스웨덴은 복지 국가 모델을 실현하고 이후 수십 년 동안 황금시대로 이어진 경제·사회적 기획과 정치연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는 스웨덴의 재무부 장관이자 사회민주당 최고 이론가로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스웨덴 복지 국가 모델을 설계한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32년부터 17년 동안 스웨덴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스웨덴의 정치경제 모델을 주도적으로 건설했다. 대공황기에 세계 최초로 케인스주의적인 대안적 경제 모델을 제시해 1932년 총선거에서 사민당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해부터 44년간 이어진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적극적인 수요창출 정책을 통해 공황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묄레르 등과 더불어 복지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은퇴한 후에는 더욱 급진적인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꿈꾸며 1970년대에 시도될 ‘임노동자 기금’ 정책에 대한 영감을 제시하기도 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서 대안적 정치경제학의 전망을 제시해온 저자 홍기빈은 이 책을 통해 비그포르스의 이론과 실천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잠정적 유토피아’를 중심으로 그가 일생 동안 전개한 활동과 사상을 재구성하며, 스웨덴 복지 국가 모델이 어떻게 형성되어 무엇을 실천했는지 살펴봄으로써 지금 여기에 필요한 대안적 담론과 복지 국가의 정치경제학을 모색한다. 더불어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가 장악하고 있던 세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곤경과 대안적 흐름, 1930년대 대공황 상태에서 기존 정치 이념과 노선이 빠져 있었던 마비 상태, 세계 금융위기를 비롯한 21세기 초입의 현실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을 덧붙임으로써 비그포르스의 중요성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의 진보적인 학자 및 정치인,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또는 '노동중심성'이나 '노동자 정치'라는 구호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이 책은 유럽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운동, 정치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2013년의 한국과 스웨덴을 무작정 비교하는 것은 부러움과 한숨만 가져올 뿐 그다지 실천적인 아이디어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재벌과 기득권 집단의 경제적 독주로 인한 삶의 황폐화, 총체적 해법을 담은 미래상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정당 정치의 무능력, 그리고 금융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파국이라는 지구적 구조 변화를 마주한 한국인들에게 21세기 스웨덴 복지 국가 모델은 '무릉도원'에 가깝다. 
하지만 적어도 19세기말 ~ 20세기 초 스웨덴의 상황은 21세기 한국의 상황과 비슷한 부분도 많은 것 같다. 스웨덴 사민당과 노동운동 세력이 20세기 초의 역경을 딛고 집권당으로 당당하게 나선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진보진영과 진보정당에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줄 것이다. 
민주진보진영과 정당들이 한 두번의 정치적 패배로 좌절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찰과 외부의 사례를 통해 환골탈태하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있어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참고로 조선일보 시각으로 보면,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강령과 정책은 현재 한국의 민주통합당은 커녕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보다 더 극좌이념에 가까울 수 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44년 장기집권의 비밀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비밀의 핵심을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 (provisoriska utopier / provisional utopia)'는 20세기 초엽의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적 파산’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변증법적 과학’에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던 ‘윤리적 당위’와 ‘과학적 진리’를 재정립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도그마를 극복하고자 했다. 윤리와 과학의 분리, 즉 사회과학은 가치판단을 떠나 객관적 과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사람들의 집단적 정치 기획은 이들이 현실에서 어떤 세상을 열망하는가라는 윤리적 판단에 기초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통해 스웨덴 사회와 민중에게 상상이나 '먼 미래의 꿈'이 아닌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을 개선해나가고자 했다. 즉 구성원들이 지향해야 할 미래 사회의 총체적 모습을 제시하되, 혁명의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개량의 한계에 봉착하는 대신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절실한 쟁점을 포착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의 이상은 현실에서 ‘나라 살림의 계획’이라는 경제사상과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룬 복지 국가 모델로 구현되었다. 실현 가능한 꿈이지만 개혁 과정에서 본질적인 가치들을 구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해줄 만큼 급진적인, ‘길잡이’로서의 잠정적 유토피아. 그것은 종착점이 아니라 진행형의 작업가설이며, 따라서 스웨덴 복지 국가 모델 또한 그것을 넘어 더 멀리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잠정적 유토피아'와 더불어 스웨덴 사민당이 집권당으로 자리잡고 장기집권을 이어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핵심 이유를 나는 이 책을 통해 '정치적 지도력'이라고 읽었다. 스웨덴 사민당의 대중적이면서도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정치적 지도력'은 페르 알빈 한손 총리를 말한다. 페르 알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국민의 집'이라는 슬로건으로 중산층과 민중들을 집결시켰고, 1931년 비그포르스를 둘러싸고 당내 분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비록 한쪽 정파의 견해가 올바른 것이고 당 전체의 입장이 될 수 있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당의 통합이 깨어진다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라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당을 갈등을 극복했다. 2012년 한국 내 민주진보 진영의 연이은 패배는 페르 알빈과 같은 리더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 정도의 '정치적 지도력'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집권, 즉 총선이나 대선에서의 승리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스웨덴 사민당이 20세기 중반이라는 사회경제 현실에서 추진한 국가정책과 운영방식이 21세기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이 지금 처한 현실과 20세기 중반의 스웨덴의 처지가 많이 다를 뿐더러 스웨덴 사민당과 한국의 민주진보 정당도 전통과 주축세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 결정적으로 한국은 스웨덴에는 없는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의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민주진보 정당들에게 스웨덴 사민당과 같은 '잠정적 유토피아'의 비전도 없고 '정치적 지도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이나 노무현 전대통령을 한 단계 뛰어 넘는 지도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비전이 없다는 것이 민주진보 진영 내부의 개인과 세력들이 연대하기 보다 갈등하고 분열하는 이유 중 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 2013년 02월 0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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