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희 평전
쉬딩바오 지음, 양휘웅 옮김 / 돌베개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서평] 쉬딩바오(徐定寶) 저, 양휘웅 역 < 황종희 黃宗羲 평전 >을 읽고 / 2009. 02., 656쪽, 돌베개


공부모임 교재로 알게된 17세기 중국 정치사상가 황종희에 대한 중국인의 평전이다. 공부모임에서 이 교재를 선택한 배경이 아마도 평전의 주인공 황종희가 살던 혼란한 시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평전 안에 ‘천붕지해(天崩地解)’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점령하는 시대적 상황이 260년간 명맥을 유지했던 명나라를 '세계의 전부' 또는 '조국'으로 생각한 이들로서는 당연한 표현일 것이다. 요즘 한국식으로 말하는 '멘붕'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단어일 것이다. 세미나 참가자들이 작년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실패한 이후 앞으로 어떤 자세와 태도로 5년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황종희의 일대기가 궁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제가 교재 선택에 참여하지 못해서...^^)

하지만 이 책은 공부모임 참여자들의 기대와는 조금 어긋난다. 저자는 19세기 황종희가 서구사회에서 민주정치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장 자크 루소보다 1세기나 앞서 중국에서 '주권재민'을 제시했다는 것으로 책의 전반적인 방향이나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황종희는 몰락한 왕조 명(明)의 ‘유민(遺民)’으로서 청(淸) 왕조에 출사를 끝내 거부하면서도 지식인으로서 할 말과 할 일을 다 했다고 전해진다. '천붕지해' 즉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던 때. 명나라가 망하고 청 왕조가 들어서던, 그 시대를 살았던 황종희는 당대의 정치, 역사, 경제에 대해 그리고 정치인과 지식인의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황종희라는 이름이 21세기 중국사회에 다시 등장한 이유가 있었다. 10년 전에 입었던 옷을 지금도 입고 다닌다 해서 중국인 사이에 청렴결백한 정치가로 알려진 원자바오(溫家寶) 전 중국 총리가 명말청초의 유학자 황종희에 심취해 있다는 내용이 중국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리고 20세기 초 중국사회에서 삼민주의로 유명한 손문(孫文)은 일본 망명 시절 혁명 단체인 '흥중회'를 결성하면서 이 책을 선전 팸플릿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사상가 양계초(梁啓超)는 <중국근삼백년학술사>에서 이 책을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비유하고 황종희를 중국의 루소라 불렀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황종희가 나름 역사적인 인물인 셈이다.

황종희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저자에 따르면 그의 부친 황존소는 동림당(東林黨)이라는 학문적, 정치적 붕당의 일원으로, 소년시절에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모진 탄압으로 옥사했다. 이런 성장 환경 탓에 명 말기의 극도로 불안한 정국 속에서 황종희의 삶과 사상은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청년이 된 그는 문학 결사인 '복사'(復社)에 참가하고 정의로운 선비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청군이 침입하자 그는 향리의 자제들을 규합하여 항전했지만 실패했고, 그후에도 반청 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청 왕조의 중국 지배가 확립되고 명 왕조가 부활할 가능성이 사라지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끝까지 명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고 강희제가 탁월한 선비들을 회유하기 위해 마련한 박학홍유(博學鴻儒 황제의 정치자문 역할)로 추천되었으나 거절했고 명사관(明史館 명나라 역사 저술을 책임지는 직책)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았다.
부친의 유언에 따라 유학자 유종주(劉宗周)의 학문을 개인적으로 연구하여 양명학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공리공론을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을 중시했다. 또한 사학에도 전심하여 경학과 사학을 함께 연구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을 개발하여 청대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저서로 <명이대방록 明夷待訪錄>, <명유학안 明儒學案>, <송원학안 宋元學案>, <역학상수론 易學象數論> 등이 있고, 그가 창시한 '절동학파(浙東學派)'에서 중국 근현대 사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는 만사동(萬斯同), 전조망(全祖望), 장학성(章學誠) 등의 우수한 역사학자가 나왔다.
역자는 황종희의 사상과 학문적 흔적이 조선 후기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이 중국에서 들여온 물품 중 '경세치용'과 '실사구시'를 담은 개혁 서적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

실제 많은 글과 저작 속에서 황종희는 전통적인 봉건정치체제에 대해 깊이 반성했으며, 봉건정치체제의 부패와 죄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격렬한 규탄을 가했다. 그러나 분명히 봉건적인 군주제도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황종희가 반대하고 질책한 것은 군주제도 내의 전제적인 형태와 군권의 남용과 집중이었지, 결코 군권 자체의 합리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황종희는 군주제도에서 군권이 운영되는 정상적인 질서를 수립하려 노력했다. 그는 이를 통해 주권이 백성에게 있다는 의식, 정치체제를 감독하려는 의식, 공업과 상업이 모두 근본이라는 의식 등 근대의 민주계몽의 색채를 띤 일련의 정치적 주장을 제기했다. 저자는 봉건적인 전통체제에 대한 그러한 황종희의 반성이 거대한 사상적 가치를 드러내고, 그로 인해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내가 평전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쨎든 황종희는 260년 역사의 자신의 조국이 멸망하는 와중에 격렬하게 반청 군사행동을 했으면서도 나중에 '청나라의 지배'라는 현실을 인정했고, 국정에 협력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학문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와 정부는 그런 황종희의 존재와 삶을 인정했다. 중국의 땅 떵어리가 한국과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사회문화나 역사적 배경이 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런 정치와 문화, 역사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유지시키는 배경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 2013년 02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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