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최은미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문학의 설레는 이름, 최은미가 선사하는 깊은 아름다움

"두려움을 껴안고서라도 마주 보길 바랐다"

예전엔 책에 쓰여있는 소개문구를 통해 그 책의 선택여부가 정해지곤 했는데 언제가부터 그 책을 소개한 누군가의 문장으로 인해 책을 읽게 되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관심있어 하던 소설가가 추천하는 작품이라면 일단 믿고 읽어보고 싶어진달까. 조해진 소설가는 이 책에 대해 '<마주>는 소중히 읽혀야 한다' 라고 했다. 그 한 문장으로 나는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결혼식 전날 밤, 내 전생의 마지막 날이자 현생이 시작되기 직전의 밤 (p. 18)' 이라던가 '나는 포토라인 앞에 선 적이 있다. 평일이었고 대낮이었다. 눈앞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p. 11)' 라는 식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초반부는 있지도 않았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시작해서 이 책이 판타지 장르인가? 의심하게 했고,

"얘가 그 비탈과수원집 딸? 참하게도 생겼네. 천상 여자네, 천상 여자야 (p. 23)" 라던가 '나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여자답다는 말을 들었고 아무리 귀엽게 보이고 싶지 않아도 이미 생긴게 귀여워서 어쩔 수 없이 귀여워지곤 했다 (p. 24)' 라던가 '내가 다가가보고도 싶었던 학교 내 모 단체의 여학우들은 이런 나에게 어떤 틈도 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내가 타도해야 할 여성성의 재현물 그 자체인 것처럼 대했다. (p. 51)' 라는 식의 문장을 보면 이 소설은 여성성을 주제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이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었고 지극히 인간애적인 인간애를 다루고 있었다. 묘하게 비껴나가게 읽혀지긴 하지만;;;

그리고 의외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자여자하고 소설의 화자이기도한 나리도 아니고 나리가 줄창 얘기하는 수미도 아니었다.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인물은 '만조 아줌마'라고 할수 있었다. '마주'함을 알려준 인물, 만조 아줌마.

이웃해 산다는 심리적 가까움 때문인지 내 부모는 부근의 어떤 과수원보다도 만조 아줌마에게 많은 걸 의지했다. 남한테 신세를 지거나 폐가 되는 걸 어지간히 싫어했던 아빠도 만조 아줌마한테만은 조언도 구하고 부탁도 했다. 내 눈에 과수원에서의 대장은 누가 뭐래도 만조 아줌마였다. (p. 32)

결핵을 앓은 적이 없는데 병원에선 예전에 결핵을 앓은 적이 있는 폐라며 잠복결핵균 보균자임이 확인된 나리, 호흡기의 주요 기관인 폐에 문제가 없었음에도 호흡에 문제가 생긴 나리 그 중심에 '수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딸 은채와 나리를 걱정해주는 남편 오종수와 가족을 이루고 있던 나리는 캔들 공방을 하고 있었고, 바야흐로 기침 한번 잘못하면 눈총을 사던 코로나시국 초반이었다. 하지만, '"그럼 엄마는 알고 있었단 말이야?" "뭘" 무언가를 계속 튕겨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뭔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뭘 물어야 할지 모른채로 전화를 끊었다. (p. 34)' 라는 문장처럼 소설은 왠지 무언가를 계속 튕겨내는 것처럼 읽혀져서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무엇을 읽고 있는 건지 잘 모르는 상태가 되어갔다. 어쨌든, 중요한 사람은 만조 아줌마였다.


나는 감각을 죽이고 사는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살다보니 죽었지만 다시 살릴 엄두를 못 내는 것들, 다시 살릴 의욕도 기력도 없는 것들. 언젠가부터 접어두고 사는 것들. 잊고 사는 것들. '생기'라고 말해지는 것들.

수미는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죽이고 사는 감각 하나가 깨어나 무언가가 열리면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듯 견뎌온 것들을 더는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이 깨어나 삶에서 다시 무언가를 바라게 된다면 겨우 살아내고 있던 하루가 뒤집힐 수도 있다. (...) 나는 그런 여자들을 알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여자들. '니가 아니면 이게 다, 무슨 의미니?' (p. 86)

나리가 '전생'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결혼전, '현생'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결혼후 의 시기를 일컫는 것 같다. 전생때 나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만조 아줌마 였고 현생에서 내내 나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인물은 수미였다. 결혼후 자리잡고 살게 된 기정시에서 딸 은채의 놀이터 친구로 수하를 자주 만나게 가까어진 수하의 엄마인 수미.

그때까지도 나는 '딴산'이라는 지명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만조 아줌마의 발효 항아리와 여안의 비탈밭을 여름내 떠올리면서도 여안을 전부 떠올리지는 못했던 것이다. (p. 98)

코로나시국의 초반 상황이 나리를 긴장시키는 사이사이 나리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나리의 표현대로 하자면) '전생과 현생'은 자주 교차된다. 그때 여안에선 나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지금 기정시에서 나리가 갑자기 여안의 기억을 만조 아줌마에 대한 기억을 자꾸 떠올리려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상관이 있길래?

종수랑 결혼을 해서 평생 단짝이 되면 나는 지겹고 불편했던 여자들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고 맛집에 가는 것들을 종수랑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종수가 나를 사랑해주는데 다른 여자들이 내게 뭐라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종수랑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자 내 앞에 펼쳐진 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촘촘한 여자들의 세계였다. 나는 이제 내 아이까지 옆에 세운 채 다시 그 세계를 뚫고 들어가 자리를 틀어야 했다. 여자들과 좀 멀어지고 싶어 종수랑 가까워졌는데 그게 빼도 박도 못하도록 나를 다시 여자들한테로 데려갔던 것이다. 종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종수랑 있고 싶어서 종수랑 살기로 한 건데, 종수는 간데없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키 크고 눈을 잘 안 맞추고 슬랙스가 잘 어울리는 어떤 어려운 여자와 롯데월드 투썸 테이블에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p. 151)

그 어색하고 어려운 여자가 수미였고 은채와 서하가 함께 노는 시간이 잦아질수록 둘도 자주 만나고 길게 만나게 되었다. 수미를 보면서 나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뭔가 현생의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을 놓치고 살았다는 것을 점점 더 느끼게 되고 점점 더 과거의 기억을 더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기억이 났던 것이다. 만조 아줌마라는 인물과 딴산이라는 장소가.

나리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만조 아줌마를 현생으로 등장시키고 수미와 함께 찾아가면서 '딴산'도 세상으로 불려나와지게 된다. 하필 코로나 시국에.

그들은 하나만을 알았다. 어떤 이유로 들어왔든 딴산에 들어왔다는 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겐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한 몸을 누일 장소가 없었다. 있을 자리가 없었다. 죽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딴산으로 들어갔다. (p. 224)

수미는 만조 아줌마한테 물었다. 이웃집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마음일 수 있었는지. 그런 친절은 어떨 때에 가능한지. (p. 282)



만조 아줌마는 딴산에 사는 그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노력했다. 만조 아줌마가 이웃집 나리에게 '그런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었던 것처럼 (p. 262)' 수미와 서하 사이에 그런 시간과 공간을 경유하게 해주고 싶었던 나리는 삼십년이 지난 후에도 만조 아주머니의 항아리를 통해 또다시 예전의 '그런 시간과 공간'을 느끼고 깨닫는다. '아이를 낳은 날짜가 적힌 항아리 옆에 앉아서야 나는 그 말이 지난 삼십년간 내 어딘가에서 숨죽인 채 살아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p. 255)' 잠복결핵균처럼. 전염성이 있지만 잠복기에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숨죽인 잠복결핵균처럼. 그런 시간과 공간의 따스함또한 숨죽인채 나리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그랬기에 수미와 수하 모녀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만조 아줌마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서하를 보고 있는 어른이 너뿐이 아니라고, 너만이 아니라고, 가족이어서 해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고, 가족이 아니어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믿어보라고, 가족 아닌 그이들이 저기 있다고, 수미가 체감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말해줄 수 있었다.

보라고, 서하는 해변에 가려 한다고. 마음을 접어버리지 않았다고. 너한테 계속 자기 자신을 얘기하고 있다고. 너한테 순응하지 않았다고.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p. 304)

아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그런 마음들이 소설 곳곳에 있었다. 또한 '엄마'의 마음이라고 좁히기보다는 그런 마음을 넓혀서 '연대'의 마음으로 가고자 하는 것또한 어렴풋이 느껴졌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건 '나리' 였다. 철부지에서 성인으로 엄마의 역할에서 엄마의 마음으로 나리는 자라고 있었고 그 과정을 든든이 지켜주는 존재가 만조 아줌마 였다. 그 만조 아줌마에게는 술항아리가 있었다.

통기성이 있는 항아리나 참나무통에 술을 넣어놓으면 술은 그 안에서 조금씩 증발된다. 증발된 술이 날아올라 공간을 채우고, 밖으로 새어나가 그곳 일대의 허공에 흩어진다. 그렇게 날아간 술을 천사의 몫이라고 한다고, 그래서 양조장 근처에 사는 천사들은 다 조금씩 취해 있다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p. 243)

코로나 시대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균 때문에 온 사람이 죄다 숨죽이며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들숨과 남의 날숨이 섞이는 것에 공포를 느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결국 사람은 따로 떨어져 살수 없었다. 사회라는 관계는 끊어질 수가 없었다. 그 삭막한 공기 속에 누군가 살짝 술을 뿌려놓았다면 그래서 누군가 살짝 기분 좋은 취기를 뿌려놓았다면 그랬기에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던 그 시절도 그럭저럭 덜 삭막하게 넘길 수 있었던 거라면 우리는 과연 서로를 '마주'했던 것일까. 어디선가 그런 술항아리를 숙성시키고 있을 그이들을 응원하고 싶다...

<마주>는 202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여기 우리 마주>에서 출발했다. (p. 317) 횡단보도에서 사람들과 무심코 스쳐지나가다가 뒤를 돌아볼 때가 있다. 건물과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과 마주칠 때면 거기 있는 모두가 2020년을 겪고 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문득문득 놀라기도 한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의 오늘에, 내일과 모레에, 이 소설이 못 다한 이야기처럼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p. 318) -작가의 말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기독교에서 유다는 악마가 되어야만 했나?

유다 또한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유다는 정말 예수를 배신했을까?

아무도 들려주지 않은 유다의 진실을 찾아간다!

기독교를 아는 사람이라면 "유다"라는 이름을 모를 수 없을 것이고,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유다"라는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을 만큼,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의 다른이름같은 고유명사에 오래도록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왜 의문을 품지 않을까? 유다라는 존재에 대하여 과연 그가 배신했는가 라는 지점에 대하여 정말 그랬나? 하며 왜 아무도 따져보지 않는 것일까? <유다>라는 소설을 읽고나서 나는 '유다'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옥성호 라는 저자를 알게 된 후 그의 주장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에 대해 검색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옥한흠의 장남이자 비기독교인이며 그의 아버지 옥한흠은 한국 기독계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옥한흠은 '사랑의 교회' 창설자이며, '사랑의 교회'는 국내 대표적인 메가톤급 거대교회이다. 또한 거대교회 목사들이 대부분 편파성을 드러내어 비기독교인들에겐 좀 안티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없잖아 있는 것에 비하여 드물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아울러 존경받을 만한 목회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교회들이 무슨 왕위 물려주듯이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시키는 것에 비해 옥한흠 목사는 후임 목사에게 교회를 맡겼다. 이는 아들 옥성호가 종교인의 걸을 걷지 않은 것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아들을 종교인으로 키워내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옥성호가 아버지의 길을 걷지 않은 것에 이어 기독교의 논리 및 부패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심장하다. 저자의 행동이 아버지가 이룬 업적?에 어떤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르지 않을 것임에도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그만큼 자신있다는 것 아닐까? 그러니 그의 주장들에 한번쯤이라도 귀기울여 봐야 하지 않을까? 그 시작으로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존재인 '유다'에 관련한 해석들을 읽는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일 수 있다. 더구나 '음모론'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이야기들은 얼핏 스릴러소설을 읽듯이 새로운 지점이 밝혀질때 느낄 수 있는 재미를 주기까지 한다.

아니,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뭔 의문을 갖고 뭔 음모냐 할 수도 있지만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라, 아마 혹 하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부터 헐, 정말 그럴듯한데?! 싶어질수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로 시작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유명하다. 하나님의 사랑, 그런데 사랑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구원교리, 죄 없는 이가 무고한 피를 흘려서 죄 있는 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하고 불합리하다 사랑이 아니라 불의한 폭룍이다. 그건 희생양에게도, 수혜자에게도 공정하지 않다. 어쨌거나 기독교의 희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예수 하나로 끝났다면 문제 될 게 없다. 예수의 희생은 해피엔딩이니까.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예수처럼 찬란한 보상을 받은 희생양도 없으니까. 문제는 갸롯 유다, 그리고 그로 상징되는 유대민족이라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진짜 희생양.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다. (p. 22)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을 배반할 제자가 유다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에게 깨달음을 주거나 뒤늦게라도 회개시켜주거나 하기는 커녕 마지막까지 저주를 퍼부었다. 왜 유다는 구원하지 않았을까? 세상 모두를 구원해야 하는 사랑의 종교라면서. 어쩌면 예수는 유다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에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성경은 예수가 직접 쓴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쓰여졌다는 점이다.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이, 후대에 쓰여진 기록은 쓰여진 사람과 시대적 배경에서 무관하게 쓰여질 수 없다. 그렇다면 쓴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을 시대적 배경을 당연히 캐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누구도 감히?!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희생양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시대를 2천년 거듭했어도 유다같은 존재가 없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가? '가록 유다가 아니었다면, 예수의 십자가가 불가능했을까요? 왜 십자가 구원에 유다의 배신이 필요했지요?' (p. 24) 더구나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마다 십자가와 유다의 관계성에 대해 말하는 바가 다르다. 무엇이 진실인가?

신앙 여부를 떠나서 성서를 연구하는 거의 모든 학자가 인정하는 예수에 관한 유일한 역사적 팩트를 딱 하다만 꼽자면, 단연 십자가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 십자가가 무엇인가? 페니키아인의 잔인한 고문방식이다. (...) 역사상 십자가형을 받은 로마 시민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이 형벌은 오로지 반역자에게만 시행했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은 그 자체로 메시지를 갖는다. 반로마라는 정치성이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p. 29)

바울이 선교할 때만 해도 굳이 나올 필요가 없었던 예수의 '구체적 생애', 복음서 집필이 절박한 당면 과제가 되었다. 예수의 삶과 어록이 아예 없는 바울의 일방적인 교리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시대가 끝났다. 교리를 뒷받침하는 예수의 구체적인 인간됨이 필요했다. (p. 31)

복음서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번째로 평화주의자 예수를 강조했다. 두번째로 예수를 죽인 게 악마의 하수인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 그래서 예수를 유대민족과 대적하고 로마를 사랑한 인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p. 32)

본토 유대민족은 이미 전쟁에 패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이야말로 무슨 말로 해도 괜찮은, 뒤탈 걱정이 없는 희생양이었다. 그래서 유대민족을 상징하는 인물로 가록 유다가 선택되었다. 이게 이른바 복음서라고 불리는, 신약성서의 문을 여는, 예수의 생애를 담은 네 권(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의 정체다. '복음', 즉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일 수 있겠지만, 유대민족에게는 날조와 저주로 가득한 기소장이다. 결과적으로 완전범죄를 노리며 증거를 지운, 살인자의 진실 은폐 기록이다. 역사는 진실 여부에 관심이 없다. '언제나' 승리자의 편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서구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복음서가 은폐한 범죄현장은 아예 성지로 탈바꿈했다. (p. 33)

성서는 기독교의 교리를 담은 핵심 서적이므로 그저 종교적인 해석만 하면 되지 않냐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성서는 역사서로서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의 기적이고 그 기적이 그저 신화가 아니라 실재적으로 일어난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상 성경에 쓰여진 기록은 역사적으로 진위를 따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거대종교가 된 이후로 감히 누구도 의문을 표현할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희생양의 범위는 점점 넓어져서 결국 세계대전에서 학살까지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닐까. . '로마를 사랑하고, 유대민족을 저주하는 예수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핵심주제다. (p. 46)' '살아남아야만 했던 기독교인에 의해서 그나마 예수와 관련한 '유일한' 역사성, 십자가가 왜곡되었다. 그 결과 한 민족을 향한 집단적 증오라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비극이 탄생했다. (p. 47)' 로마시대의 역사서로서 성경을 파고든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논리들은 굉장히 타당하게 이해되어지는 면이 컸다.

희생양이라는 원시 시스템, 누군가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내가 산다는 구원의 교리로 움직이는 기독교는 언제라도 새로운 가롯 유다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도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희생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DNA다. 인류 문명을 거스르는 상상을 하나 해보자. 행여 기독교의 손에 과거 서구세계를 지배하던 무소불위의 중세시대 권력이 다시 쥐어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21세기라고, 이단사냥, 마녀사냥이 없을까? (p. 49)

선입견만 벗어던질 수 있다면, 1장에서 소개한 내용만으로도 복음서가 어떤 책인지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종교 관성에 맞서서 이성과 논리가 승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성과 더불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텍스트가 분명하게 드러내는 진실 앞에서, 2000년 권력의 아우라가 만든 사랑의 예수와 거룩한 정경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정직해야 한다. (p. 50)

이 무슨 불경한 소리냐고 버럭하기 전에 정말 자신의 믿음에 자신이 있다면 왜 이런 소릴 하는지 꼼꼼이 따져보는 게 올바른 태도 아닐까? 복음을 전파하는 다양한 모습들 중 좀 괴이하다 싶은 사람들을 거리에서 볼 때마다 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저 사람들 중 과연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까?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고민하고 해석해본 사람이라면 단 몇문장에 의지해 저런 행태들을 보일 순 없지 않을까? 그러니 저자의 논리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채 집어던지지 말고 숙고하며 읽어본 후 반박하는 성숙한 모습을 가져볼 것을 권한다. 1부와 2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2부는 4종류의 복음서 내용을 바탕으로 심층적이면서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따져묻고 있기에 그 하나하나에 제대로 조목조목 대응해 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나같은 비종교인조차 기독교에 성심을 다해 반하게 되지 않을까.

오로지 예수의 죽음만이 인류의 구원을 가져온다고 치자. 구원자답게 죽는 방법이 배신당해 죽는 길밖에 없었을까? 그것도 배신자를 향해 저주하며 죽는 방법밖에 없었을까? 예수가 정녕 구원자라면, 거기에 걸맞은 죽음은 수도 없이 많다. 인류를 위한 금식기도를 하다가 굶어 죽는 것,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유대 땅을 해방하라며 외치다가 순교하는 것, 훨씬 구세주다운 죽음 아닌가?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이 선택한 방법은 한때 선택했던 민족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잠시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와 비교도 안 되는 '진짜 희생'을 치르도록 만들었다. 마비된 이성을 흔들어 깨워, 정신을 차릴 수만 있다면, 이 모든 건 증오에 눈이 먼 누군가의 창작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비극은 역사가 되어 버린 증오의 창작이 인류의 재앙을 불렀다는 것이다. (p. 275) 이 책은 독자가 이야기를 이야기로, 신화를 신화로 보도록 하는 데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다. (p. 276) -에필로그 中-

그야말로 가시밭길일 것 같은 저자의 걸음걸음이 분명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에게 의미있을 것이기에 앞으로도 당당한 행보를 이어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가들의 마스터피스 - 유명한 그림 뒤 숨겨진 이야기
데브라 N. 맨커프 지음, 조아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작품이 가진 예술성 너머의 기록

유명한 그림 뒤 숨겨진 이야기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 그 생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이른바 명화 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대할때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왜 이 작품이 세계적 명화인걸까 하는... 우리는 그렇게 그 명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질문을 살짝 바꿔본 듯 하다. '명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명화의 조건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수함을 나타내는 명화라는 표식은 그 작품이 해당 분야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단언한다. (...) 그러나 작품이 가진 위대함에 감탄하는 일만으로는 그것이 '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지 충분한 해답을 얻기 힘들다. 모든 작품 뒤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유명한 그림 뒤의 이야기들은 그 그림이 명화로 불리게 된 이유에 작품이 가진 예술성 너머의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p. 6) 이 책에서는 그림이 가진 위대한 요소를 분석하고 묘사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위대하다는 인식을 만들어낸 프레임 밖의 상황에도 주목해, 이젤에서 대중의 환호 속으로 가는 여정이 명화 그 자체만큼이나 매력적일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p. 7) -서문 中-

명화가 저마다의 개성이 있듯 명화가 되기까지의 여정도 저마다 제각각의 히스토리가 있었다. 저자는 12개의 명화를 골라 각각의 그림들이 어떻게 명화가 되었는지 그 이유들을 살펴본다. 즉 명화는 그저 그림을 잘 그려서 명화가 된 것이 아니라 명화로 만.들.어.진 배경이 있었다. 따라서 'Making a Masterpiece - 명작 만들기' 라는 원제는 저자의 질문을 압축하고 있고, 'the stories behind iconic artworks - 상징적인 예술 작품 뒤에 숨겨진 이야기들'이라는 부제는 그 답들을 압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저자는 12개의 명화를 골랐고 저마다의 히스토리를 시작하기 전 제각각 다른 의문점을 제시하거나 제각각 다른 가치를 분석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는 소수 엘리트 관람자의 흥미를 모으는 일에서 시작한 그림이 어떻게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명화가 되었는가?

다빈치의 <모나리자>에는 그림 자체가 지닌 우수성과 수세기에 걸친 찬사와 해석중 무엇이 명화를 만드는가?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는 작품이 성별보다 예술적 역량의 맥락에서 보이도록 어떻게 눈을 돌리게 했는가?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는 그림에 대해 알려진 면보다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유명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호쿠사이의 <거대한 파도>만큼 예술 작품과 대중적 이미지 양측면에서 모두 동일한 수준의 찬사를 받은 작품이 있었던가!

고흐의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는 단순히 꽃이 아니라 예술적 이상과 포부를 담은 힘 있는 주제로 해바라기를 선택했던 게 아닐까!

클림트의 <황금 옷을 입은 여인>은 그림이 의뢰된 순간부터 몰수와 다시 돌려받기까지의 여정이 본래의 역할도 회복시켜 준 것이 아닐까!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은 국가가 정체성의 위기와 경제 위기에 직면했을때 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논의되던 시기였기에 미국인적 표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게 아닐까!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관람자로 하여금 기존의 전통적 서사와 비유가 지닌 평온하고 지적인 영역 너머의 세계를 보고 느끼도록 한 작품이 아닐까!

칼로의 <가시 목걸이와 벌새가 있는 자화상>는 전통적인 도상학 대신 시적 상징들로 구성된 레퍼토리를 그림에 담은 것이 가치를 얻은 게 아닐까!

워홀의 <캠벨 수프 캔>는 작품을 명화로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 아닐까!

에이미 셰럴드의 <미셸 오바마>는 아직 명화라고 부를 수 없을지라도 명작이 될 요소를 지닌 작품이 아닐까!

저자가 제시한 질문 혹은 분석 지점에 관심이 가거나 궁금증이 인다면 책을 펼쳐 읽어보면 된다. 큼직한 그림과 길지 않은 해설로 짧고 굵게 명화 속 비하인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때론 고개 끄덕여 가며 때론 갸우뚱해가며 유명한 명화들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 은근 재미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이야기라는게 뒷담화가 더 재미날때가 있지 않은가? 그림도 그렇다. 아무리 유명한 명화라 할지라도 말이다. 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함규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역사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때로는 테마역사서를 가볍게 읽는 것도 좋아한다. 특히나 한국사는 조선시대 역사 외에는 딱히 통사로 읽을 만한 책을 찾는 것이 은근 어렵기 때문에 더욱 통사가 아닌 다른 분류로 묶일 만한 책들을 읽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30개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도시를 가도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읽거나 듣게 되지 않나? 그런 이야기 속에는 고대의 설화부터 현재의 산업과 인구동향까지 두루뭉술하게 다 섞여 있기 마련이니 그 도시들의 이야기를 묶어내면 결국 '한국사'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약간 잘 설명된 관광안내서를 읽는다는 마음으로 책을 받아들었을 때 예상외의 상당한 두께감에 놀랐는데 몇 장 읽고 보니 두께에 대한 부담은 바로 쑤욱 내려갔다. 만약 정통 역사서로 700여 페이지의 책을 읽는다 생각하면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읽게 되겠지만 이 책은 (편집 의도인지는 모르겠는데) 글자간 간격도 넓고 줄간 간격도 넓어서 그야말로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는 데다 사진 자료도 많은 편이라 별 내용 안 읽은 것 같은데 어느새 많이 넘어가 있는 페이지를 보며 독서의 양적 뿌듯함을 주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긴 편집의 의도일수도 ㅎㅎ)

또한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30개 도시의 이야기이므로 책 전체를 통사로 구성할 수 없이 각각의 도시 이야기들로 따로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도시 이야기를 먼저 골라읽어도 상관이 없고 전체의 도시 이야기를 다 읽었어도 한국사를 통사로 이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한국사 라는 역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30개 도시로 초점을 두어 가볍게 읽으면 된다는 말이다.

각각의 도시 이야기 라면 굳이 뭐 책으로 읽을 필요 있나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싶기도 하겠지만 이 책에는 좀 색다른 도시들도 실려 있음이 관심을 갖게 한다. 이 30개 도시에는 한국의 도시외에 일본의 대마도, 중국의 단둥, 지안, 룽징, 닝안 까지 함께 실려 있어 한국 역사에 대한 잡지식을 좀더 풍성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도시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이런 내막이 있었어? 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있어서 숨은 역사 읽기 처럼 새로운 재미도 선사한다.

따라서 국내 여행한다 하는 마음으로 읽어도 좋고 역사를 어렵지 않게 접하고 싶다하는 마음으로 읽어도 좋고 한국사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읽어도 좋다. 어떤 식으로 읽든 무거운 기대 없이 가벼운 흥미로 읽는다면 의외의 보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 휴먼스 랜드 창비청소년문학 120
김정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3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대상 수상작

천선란, 이다혜 강력 추천

창비에서 나오는 소설Y시리즈가 어느새 8번째 작품이 나왔다. 첫번째 작품인 <나나>부터 계속 읽어오고 있는데 매번 참신하고 재밌어서 읽고나면 금새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그러니 이제는 영어덜트 소설분야에서 믿고볼수 있는 시리즈로 자리잡은 것 같다.

영어덜트 소설 중에서도 소설Y시리즈는 SF 인데, 대부분의 SF가 그렇듯이 소설Y시리즈도 대부분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영어덜트 특유의 따듯한 해피엔딩이 있어서 매 작품마다 뒷끝없이 깔끔한 결말도 마음에 든다. 또한 매번 새로운 작가의 작품이다 보니 낯선 작가의 작품세계를 경험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번 <노 휴먼스 랜드> 는 김정 작가의 데뷔작인듯 한데 첫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탄탄하다. (그래서 대상을 받은 거겠지^^;;;) 한국형 기후재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노 휴먼스 랜드'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땅, 바로 미래의 서울이다.

어느새 나는 두려움에 익숙해졌다. 두려움은 한번 익숙해지고 나니 별거 아니었다. 할머니의 예고에서 무엇도 느낄 수 없게 된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하기도 했다. "그래서 얼마나 남았는데? 오십 년? 백 년?" 그러니 마침내 숨을 거둔 할머니를 발견했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이 슬픔이 아니라 의심이었어도 이상할게 없었다. 오랜 세월 할머니는 내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의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그에 비하면 실제 마지막은 너무나 조용하고 은밀하게 찾아와서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았으니까. (p. 10)

전세계적인 기후재난으로 지구상엔 사람이 살수 있는 땅보다 사람이 살수 없는 땅이 더 많아진 상태가 되었다. 낯선 타국에서 난민으로 할머니와 둘이 지내던 미아는 '올해가 마지막인것 같구나' 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마지막을 수없이 상상하다가 어느새 두려움은 옅어지고 할머니의 '마지막'이라는 말에도 무감해지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무감해진 상태일때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이번엔 정말로.

기후위기도 비슷한것 같다. 기후위기가 기후재난이 되고 그런 재난을 여러차례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언젠가부터 두려움보단 무감해진 상태가 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무뎌지고 무뎌지다가 엄청난 기후재난이 닥쳤을때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되버리진 않을까... 그래서 서울이 정말로 노휴먼스랜드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여하튼 홀로 남겨진 소녀 미아는 다른 난민촌에 있는 엄마에게 가기위해 돈이 필요해졌고 그래서 타인의 이름으로 비밀임무를 감춘 채 노휴먼스랜드조사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사단원은 총 5명이었다. 파커대장, 한나, 크리스, 아드리안, 시은(=미아)

노휴먼스랜드 운영을 골자로 하는 오클랜드 협약에 조사단 관련 내용도 명시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연구 목적 출입은 십여 개의 지정된 관찰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노휴먼스랜드이긴 하지만, 우리한테는 외진 곳에 있는 연구실이나 다름없었어. 매년 똑같은 곳들만 돌았으니까" 파견지 제한 규정이 사라진 건 불과 삼년 전이라고 했다. 빠르면 향후 십년 안에 지구의 평균 온도가 하락세로 돌아설 거라고 전망하는 보고서가 발표되어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 과학자들이 보다 적극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UNCDE가 이를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조사단은 '진짜' 노휴먼스랜드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p. 22)

할머니가 그리워하던 땅 서울에 처음 발을 내디딘 미아는 모든 것이 익숙한듯 신기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위해 조사단원들과 그닥 친분을 쌓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질 않았다. 조를 나누어 첫 관찰을 떠난 날 아드리안이 실종되더니 곧 사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있던 크리스는 당황하며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가 '커다란 새'이야기를 했다가 횡성수설했다. 분명한건, '여기 우리 말고 누군가가 있어. (p. 37)' 를 남은 조사단원들이 깨달았다는 것.

할머니는 박사 과정을 관두고, 대학원을 다니며 진행하던 프로젝트로 창업을 했다. 회사 이름은 '이터널 플랜드',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탄소를 포집하는 작품을 개발하는 바이오 스타트업이었다. 때마침 유전자 변형 생물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던 시기였다. 이터널 플랜트는 식량 위기와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기업으로 주목받아 여러 벤처투자사로부터 대규모의 투자를 받았고, 정부 기관에서도 연구 개발 자금을 지원받았다. (p. 50)

미아는 할머니로부터 '이터널 플랜트'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곤 했다. 낯선 땅 서울에서 '이터널 플랜트'라고 씌어진 플라스틱 조각을 발견했을때 감회가 남다르기도 했다. 하지만 신비로운 모험과 추억 가득한 경험을 하기엔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아드리안의 사건에 이어 크리스의 플래그리스 고백 그리고 파커가 총으로 위협하더니 무언가에 의해 크리스가 납치됐다. 이대로 복귀할 순 없었다. 남은 세명은 크리스를 찾아나서기로 한다. 낯선 곳을 헤매며 깨닫게 된건 '노휴먼스랜드'가 노 휴먼스 랜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저기.

"이곳에 들어온 이상 나갈 수는 없어요. 보안이 중요한 시설이라서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p. 146)

크리스를 찾아 헤매던 그들이 위험을 겨우 헤쳐나왔을 때 낯선 이가 나타나더니 따라오라고 한다. 어차피 짐도 식량도 다 잃은채 맨몸뿐이었던 조사단원들은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연구소였다. 그리고 그 연구소의 소장은 미아의 할머니와 이터널 플랜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제는 왜 몰라봤을까... 나, 모르니? 나 앤이야. 이터널 플랜트 김 대표님의 후배, 비서, 앤" (p. 166) 앤은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미아에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한다.

"플론은 그냥 잡초가 아니야. 내 인생을 바쳐 만들어 낸 모두의 미래야." (p. 190)

앤은 할머니와 의기투합해서 스타트업 회사를 발전시켰지만 어느 순간부터 방향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이 노휴먼스랜드로 지정되었을때 앤은 여전히 서울에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앤을 찾아왔고 앤인은 일생을 건 연구를 시작한다. 그 결과물이 '플론' 이었다. 하지만 앤의 설명을 들은 미아는 경악하게 된다. 앤의 계획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남은 기간은 고작 일주일 뿐이었다.

다른 소설Y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노 휴먼스 랜드>도 눈앞에 장면이 그려지는 듯한 선명한 몰입감을 선사해주는 작품이었다. 다 읽고 나면 긴박한 모험 영화를 VR로 한바탕 제대로 체험하고 난 기분이랄까. ㅎ

기후재난후 세계의 모습이 어떨지,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소녀의 결단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직접 작품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누구든 푸욱 빠져들어 재미와 감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