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 2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제국의 시대 - 로마제국부터 미중패권경쟁까지 흥망성쇠의 비밀
백승종 지음 / 김영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마제국부터 미중패권경쟁까지 흥망성쇠의 비밀

역사를 움직이는 힘과 원리를 찾아서

저자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김경집 교수의 추천사를 믿고 궁금해진 책이다. 동서양의 역사를 넘나들며 현재를 분석해 줄 수 있는 우리사회의 학자가 있다는 발견은 큰 기쁨이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고 세계사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누가 누구를 지배했는가 즉 제국의 역사를 배워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역사시대 이후 시간의 흐름은 어느 한곳에만 집중적으로 흐른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각 시대별로 집중적인 시간대의 역사를 배운다. 그것은 때론 효율적이기도 하고 때론 불가피하기도 하기에 그중에서도 더욱 집중적으로 추린 이 '제국의 역사'는 대중교양서로 읽기에 쉽고 간결하여 좋은 책이었다.

세계사를 제국의 역사로 간략하게 추리면 로마제국 → 몽골제국 → 오스만제국 → 대영제국 → 독일제국 → 현대의 세계제국들 (미중소) 순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딱 이 순서로 전개되며 현대에 와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삼국을 함께 다루는데 세계제국의 역사에 깊게 관여된 것이 근현대 이기에 이또한 자연스러운 전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장에서는 그 제국의 역사를 간단히 요약하고 현재시점에서의 논평도 곁들임으로써 역사를 과거로도 현재로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역사를 읽는 이유가 바로 그때문일 테니까.

이 세상에 좋은 역사책이 얼마나 많은가. 매달 쏟아져 나오는 책만 해도 몇십 권일 것이다. 그러니 굳이 나까지 제국의 흥망을 다룬 책을 쓸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한 번도 세계를 호령한 적이 없는 우리 한국인의 눈으로 제국의 역사를 바라보면 어떨까. 영국이나 미국, 독일과 일본 같은 강대국의 입장과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고, 한국 시민의 눈으로 여러 제국의 과거를 응시하자고 다짐하였다. 역사란 매우 복잡한 입체여서 바라보는 각도와 방향이 달라지면 제국의 후예들이 그린 역사의 풍경화와는 다른 그림이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일었다. (p. 12)

저자의 말마따나 세상엔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은가 또 매일 쏟아져 나오는 책이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책을 읽자고 들면 사실 그 많은 책들이 다 양질의 책들은 아니기에 때론 정말 꼭 필요한 책이나 읽고 싶은 책은 없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잘 몰라서일수도 있지만 내가 봤을땐 역사책도 그 수많은 종류중에서 한국인 저자의 한국인의 관점으로 분석한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외국인들이 쓴 벽돌같은 역사서들을 읽을때마다 늘 세계사를 한국인의 관점으로 분석한 책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저자는 로마제국 쇠락이 준 교훈으로 포퓰리스트가 판을 쳤던 것을

몽골제국 쇠락에서는 '몽골은 대칸이 살아 있을 때는 후계 문제를 결정하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그로 인하여 후계를 둘러싼 분쟁이 거의 언제나 반복되었다. (p. 112)' 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배층의 내분을

오스만제국에서는 '이슬람화가 깊숙이 진행되자 학문과 예술이 도리어 낙후하였다. 여기에 군주들의 정복욕이 지나쳐 군사 비용을 과도하게 지출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지배층의 내분이 겹쳤다. 같은 시기 이웃한 유럽 대륙에서는 각종 혁명이 일어나 사회가 날로 혁신되었으나 오스만제국은 도리어 침체에 빠졌다. (p. 131)' 에서 느껴지듯이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짚어준다.

근현대로 올수록 복잡해지는 사회만큼 쇠락의 원인도 복잡다단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모순적 상황에 가끔 쓴웃음을 짓게 되곤 하는데 내겐 영국이 가장 그랬다.

초서의 시에서 보듯 영국인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돈에 관한 욕망을 자유롭게 말하였다. 상업과 수공업이 무척 발달한 나라였다는 말이다. (p. 170)

대영제국이라고 말하였는데, 제국이라면 보통 한 명의 군주 또는 지배 집단이 여러 언어를 사용하거나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다민족을 다스리는 국가다. 제국의 맨 꼭대기에는 흔히 '황제'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대영제국은 황제 국가를 자칭한 적이 없었다. 대영제국은 '모국'인 영국과 그 통치를 받는 여러 식민지로 구성되었(중략)다. (p. 171)

영국의 대학은 산업 현장과 긴밀하게 공조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지 못한 채 퇴조를 겪었다. (p. 227) 전성기인 19세기에 지나치게 넓은 식민지를 획득한 것이, 영국에는 도리어 감당할 수 없는 큰 짐이 되었다. 그러나 대제국의 수도 런던은 19세기부터 세계 각지에서 자본을 끌어들였다. 결과적으로 런던은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p. 228)

세계사에서 '제국'이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나라였던 영국은 산업혁명과 과학혁명과 의회제등 현대사회적 요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태동한 곳이지만 여전히 왕실이 존재하고 귀족문화가 우대받고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가장 돈에 관한 욕망이 집중적인 곳이기도 하다. <부의 흑역사> 나 <머니랜드> 같은 책을 보면 세계 곳곳의 온갖 불법적인 돈들이 어떻게 영국에서 합법화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데 가장 상류층의 문화를 고수하는 나라에서 가장 저급한 돈을 취급한다는 아이러니가 어찌보면 너무 자연스러운 결합이라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독일제국의 역사를 불가사의하다고 표현하는데 '그들은 근대국가를 너무 늦게 출범하였기 때문에 민주적인 의회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뒤늦게 산업화를 맹목적으로 추진하다시피 하여 부작용이 숱하게 발생하였다. (p. 284)' 라며 정치적 낙후를 원인으로 꼽는다. 하지만 사실 독일에 제국이라는 호칭을 붙이는것부터가 논란의 주제일 수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독일이 '제국'이었나? 왜 제국인가? 로마나 이슬람 영국처럼 전세계적 영토를 지배한 적도 없고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네덜란드 처럼 근대 식민지를 많이 개척한 나라에 무조건 붙이는 호칭이 제국은 아닌데 왜 독일제국 이라 하는가? 아마도 로마제국이후 로마황제의 관이 신성로마제국으로 연결되고 교황과의 권력다툼이 주로 일어난 곳이었기에 독일제국이라고 부르는 것 같긴 하지만 독일을 제국으로 부르는 역사가 세계대전으로 쇠락한 독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 맥락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 것은 좀 아쉬웠다.

자 이제 익숙한 시대인 근현대에 이르렀다. 저자는 100년전 동아시아 삼국의 엇갈린 운명이 일본은 어떻게 승승장구 했고 청나라와 조선은 어떻게 쇠락했는지 살펴본 후 현대의 세계제국들이라 할 수 있을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중국에 초점을 맞춘다.

'혹자는 소련이 종말을 맞게 된 원인을 조지H.W.부시 대통령에게서 찾는다. 1980년댕 고르바초프는 조지H.W.부시 대통령과도 협력적 관계가 이어지기를 소망하였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빠졌을 때 부시 대통령은 철저히 외면하였다. (p. 392)' 를 읽으며 부시 대통령 부자가 세계사에 악영향을 끼친게 참 많구나 싶었다. 최근 이슬람역사 관련 책을 읽었는데 중동분쟁의 가장 큰 원인도 따지고 보면 미국이라고 할 수 있있다.

'오늘날 미국의 보호주의자들은 미국의 경제성장은 관세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그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p. 401)' 과거엔 중국이 조선에게 대국이었다면 지금은 미국이 한국에게 대국의 이미지가 있지 않나?! 그러나 미국에 대해 우리가 정말 제대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세계정세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핵심적 요인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푸틴은 2020년 초 그들의 복고적 정서를 이용하여 영구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는 2036년까지 권좌를 지킬 수 있다. 그보다 2년 앞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자신을 종신 주석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들은 현대의 차르와 황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평생 집권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독재자의 운명이란 갑자기 종말을 맞을 수가 있다. (p. 411)

미국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19세기의 최강대국 영국이 걸어간 길을 미국도 답습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를 보면 모든 강대국의 운명이 그러하였다. 정점을 지나면 얼마 후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p. 412)

제국이라는 호칭을 땅덩어리 크기로 붙인다면 현대의 제국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미국이 맞을 것이다. 땅덩어리 크기가 군사력이나 자본력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늘 비슷하게 여겨졌던 것도 같다. 제국이라하면 일단 커야 하니까?! 그래서 지금도 각자의 영토와 영해를 넓히려고 전쟁을 불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제국들이 각자의 독재로 방향을 잡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를 지배하려면 보편적 이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p. 413)' 라면서 저자는 과거의 제국이 평화를 구축했던 시기를 회상하기도 하지만 글쎄... 각박해져가는 현실에서 그게 될 수 있으려나...

유럽은 날이 갈수록 더 미국식 경제 관념에서 이탈하고 있다. 게다가 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입지는 미국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 심각한 갈등 요인을 갖고 있지 않다. (p. 415) 중장기적으로 보면 초강대국의 역할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덩치가 큰 근대적 민족국가는 국제 무대에서 별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한계는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중략) 그들은 구시대의 유물이다. (p. 466) 장차 스위스, 네덜란드, 스웨덴과 노르웨이, 한국 등의 역할에 주목하는 시대가 반드시 올것이다. 이들 강소국은 국제무대에서 노골적으로 자국의 지배적 위치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기술과 혁신을 토대로 역사의 첫길을 열어가는 그야말로 '스마트'한 나라가 아닌가. (p. 467)

저자는 제국의 시대를 살펴보면서 한국의 미래를 밝게 점치며 책을 마무리 한다. 나도 그러한 희망에 기대보고 싶지만 지난 선거는 미국의 트럼프 시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기에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한 시민들이 흔들리는 이 사회를 잘 지탱해주기를 바란다. 제국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제국이기에 쇠락했을 수도 있다. 한국은 제국이길 바랐던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다행일 수 있다. 우리는 작은 만큼 빠르게 스마트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제국이 아니기에 쇠락을 견디고 건강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파 - 조선의 마지막 소리
김해숙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02년 대한제국 최초의 국립극장에 올라 소리판을 뒤흔든

여성 소리광대 허금파 실화소설

실화 주인공을 다룬 역사소설이다보니 책날개의 저자 소개 아래에 인물소개가 실려 있었다.

허금파 1866?? ~ 1949??

여자는 소리를 할 수 없었던 조선 후기, 금기를 깬 최초의 명창 진채선 이후 두 번째로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여성 소리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연희극장 협률사 무대에 올라 창극 <춘향전>의 월매 역을 맡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예술 활동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서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철종 또는 고종 재위 무렵 김천에서 태어나 고창 동리정사에서 소리선생 김세종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20대에 관기였고 후처가 된 후 뒤늦게 동리정사에 들어가 한성으로 올라갔을 무렵이 이미 30대였던 그는 소리에 대한 꿈을 결코 놓지 않는 예인이었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전국의 소리꾼들과 함께 자리를 겨루던 때에도 남성 중심의 소리판에서 주역을 맡아 권력에 승복하지 않으면서 하층민의 삶을 대변하는 월매로 무대에 선다. 진채선의 명성에 힘입지 않고 스스로 최고에 오르고자 했던 그의 소리 인생은 세상을 떠난 지 70여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소설의 줄거리는 저 위에 적힌 삶 그대로 재현된다.

부족한 자료로부터 한 인물의 인생을 풍성하게 살려낸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이겠으나 다큐가 아니라 소설이니까 허구적 요소가 이미 들어가는 장르이므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낼법도 했으련만 좀 부족하게 느껴졌다. 금파의 인생사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아서 심정적 공감이나 몰입이 잘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시대사가 잘 풀어진 것도 아니어서 뚝뚝 끊기면 끊기는 대로 그냥 읽어야 하는 소설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독자의 상상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구멍이 나면 구멍이 난대로 대충 건너뛰어가며 읽으면 그만인 전개라 딱히 인상적인 장면도 남는 문장도 없었다. 소설을 읽으며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었는데 이러한 생경함은 작품뒤에 실려있는 '심사평'에서 좀 설명이 되는 듯 하다. (이 작품은 '제1회 고창신재효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뒤에 심사평이 실려있다.)

'제1회 고창신재효문학상'은 제한이 있다. '산·들·강·바다가 조화를 이룬 천혜의 자연환경과 고인돌 문화와 마한 문화를 꽃피운 한반도 고대 문화의 중심지요, 유구한 역사를 통해 세계유산을 창조한 자랑스러운 땅 고창! 우리 고창의 이야기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담을 수 있는 장편소설' 한마디로 '고창의 역사·자연·지리·인물·문화등을 소재와 배경으로 한 작품'이어야 한다. (p. 251)

그러니까 제한요소가 너무 많은 상태에서 추렴된 작품이다보니 이조건저조건에 맞추려다 소설적 '맛'이 별로 없는 작품만 가능했던게 아닐까 싶은...

문학상에 대한 엄청난 자긍심도 그렇고 심사평에서의 엄청난 미사여구도 그렇고 좀 과하다 싶다. 좀더 독자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작품으로 누구나 인정할 만한 문학상으로 기억되려면 지나친 허세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 헤어웨어 이야기 - 신화에서 대중문화까지
원종훈.김영휴 지음 / 아마존북스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머리카락에서 헤어웨어까지, 욕망의 역사를 훑어본다

역사의 재미는 이런저런 풍속과 문화의 이야기에서 찾아지는 경우가 많다. 머리카락의 역사라니 있을 법한 주제라는 생각에 구미가 당겼다. 그런데 헤어웨어? 언어의미적으로 볼때 가발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정확히 뭘까;;;

헤어웨어는 신어이다. Hair+Wear=머리카락을 입다 의미로 볼 때 맞지 않는 표현이다. 그래서 낯설고 생경한 말이다. 헤어웨어는 21세기 초반에 씨크릿우먼이라는 기업이 최초로 만든 용어이다. 현대에 들어와 가발이 부족한 머리숱을 감추기 위해 쓰는 용도로 선호되었다면, 헤어웨어는 아름다움을 연출하기 위해 입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p. 28)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은 '씨크릿우먼'이라는 외사의 대표이고 이 책의 부제는 '씨크릿우먼 헤어웨어 창립20주년 기념작품' 이다. 저자와 부제를 보건대 한 회사의 역사와 너무 밀접한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수도 있지만 책의 내용에서 '헤어웨어'가 두드러지진 않는다. 저자의 말마따나 '머리카락은 가늘고 긴 세계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인류의 각양각색 문화가 채색되어 있다. (p. 31)' 라는 생각은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하나의 주제가 될 법했고 가발관련 회사의 대표가 이렇게 자신의 아이템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찾아봤다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보여졌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들만한 책이었다.

기원전 3000년경,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처름으로 가발을 애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가발 탄생의 배경에는 이집트의 기후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집트는 덥고 건조한 아열대기후에 속한 탓에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이 많았다. 이러한 기후를 이기기 위해 고대 이집트인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발을 착용했다. 이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면서, 가발은 차츰 부와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바뀌었다. 다시말해, 지리환경에 영향을 받은 발명품에서 문화적인 의미를 띠는 대상으로 변모해 간 셈이다. 또한 지중해 문명권인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에서도 가발을 즐겨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p. 25)

이집트인들의 그 머리모양새가 가발이었구나~ 그런데 가발쓰면 덥지 않나?? 하지만 뒤에서 다시 언급되는 이집트인들의 가발문화를 보면 그들에게 가발은 일종의 모자였던 것 같다. 역사의 시작은 신화이기 마련, 이집트 뿐만 아니라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등 다양한 신화 속에서 때로는 익숙하고 때로는 신선한 머리카락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루살카는 오늘늘 중부유럽과 러시아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슬라브 신화 속 여인이다. 루살카와 거의 흡사한 이미지의 여인으로는 그리스로마신화 속 세이렌이 있다. 그러나 루살카는 기괴하고 저주스런 이미지로 나타나지 않는다. 달콤함으로, 유혹의 그림자로 다가와 손을 내민다. (p. 49)

켈트족에게 머리는 가장 신성한 신체부위였다. 부연하면, 중세 시대 웨일즈에서는 상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행위를 개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가장 큰 경멸과 죄악으로 여겼다. (p. 53)

헤라가 이리스를 보내 디도가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이리스는 단검을 들어 디도의 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냈다. 그제야 디도의 영혼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유로워졌다. (p. 75)

메가라의 통치자는 니소스 왕이었다. 그리고 그의 딸이 스킬라였다. 니소스는 미노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스킬라는 짝사랑 앞에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다. (중략) 니소스 왕의 머리카락은 온통 백발인데 정수리 부위에만 보랏빛 머리카락 몇 올이 자라 있었다. (p. 84)

포세이돈은 손자의 머리에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황금머리카락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프테렐라오스의 딸 코마이토가 적군 테베의 장수 암피트리온에게 사랑에 빠진 나머지 아버지를 배신한다. (p. 102)

압샬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로서, 길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지닌 출중한 외모의 인물이었으리라. (p. 103) 도주하던 중, 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뒤어이며 허공에 매달리는 신세가 된다. (p. 104)

신화 속에서 머리카락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은근히 많았다. 이러한 머리카락에 대한 관심이 아마도 가발의 역사또한 일찍부터 시작하게 한건지도 모르겠다. 머리카락의 신화가 인간의 가발로 발전되었을때 가발은 미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게 가발은 사치스러운 물품이었고, 그러다 악마의 물품이 되버렸다. 다종다양한 문화가 기독교문화로 수렴되어가던 로마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내린 후에도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지속적으로 금지령을 내렸던 것이 가발 이었다.

초판본에 따르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잡고 탑 꼭대기로 올라온 남자들은 왕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후에 다시 출간된 라푼젤 이야기는 순화되어 왕자만 등장한다. (p. 115)

클로비스1세는 사자의 갈기 같은 긴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이는 메로빙거 왕조의 전통이었다. (p. 137) 왕의 긴 머리는 곧 왕의 권위와 권력을 의미했다. (p. 138)

시프의 머리카락은 온몸을 휘감을 정도로 길고, 황금빛이 눈부시게 감돌았을 것이다. 시프의 머리카락은 여신임을 증명하는 상징물인 셈이다. 또 하나의 의미가 숨어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추수를 앞둔 잘 여문 곡식이 자라는 황금 들판을 상징한다. 그래서 시프가 풍요와 수확의 여신이었던 것이다. (p. 143)

삭발례를 하면 정수리의 머리 모양은 원형과 십자가를 띤다. 십자가는 '신과 기독교, 그 자체'를 상징한다. (중략) 원형의 머리모양은 '그리스도가 스스로 죽음을 향하던 최후의 순간에 쓴 가시관'이었다. (p. 153)

유럽의 중세 여성들은 일평생 머리를 길러야 했다. (p. 162) 애냉의 기본형인 뽀족한 모양은 고딕 건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세인들은 교회에 하늘을 향해 높게 치솟은 뾰족한 첨탑을 설치하여,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신의 영광을 숭배하고 영원한 생명을 기원했다. 이런 의식이 애냉에게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에냉을 통해,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을 기원했고, 저 높은 하늘을 향한 간구와 영원을 기원했던 것이다. (p. 166)

대부분의 설화와 동화의 원작은 잔혹하기 마련인데 머리카락의 대명사적 동화인 라푼젤 또한 그러했다. 로마제국 시대까지 유행했던 가발문화는 프랑크왕국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본인의 머리카락의 길이로 상징이 바뀌었나 보다. 북유럽 여신 시프는 긴 머리카락을 자랑했고 프랑크 왕국의 왕들또한 사자갈기 같은 긴 머리를 자랑했다. 하지만 중세여인들의 긴 머리카락은 감추어져야 했으니 고깔 모양의 모자같은 에냉으로라도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지금 보면 좀 우습기도 한 수도사들의 둥글게 다듬은 헤어스타일까지도 저런 종교적 의미가 있었을 줄이야. 머리카락은 늘 어떤 식으로든 상징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줄리엣과 데스데모나를 이탈리아 태생으로 설정한 이유가 명확해졌다. 중세인들이 금발머리에 대한 동경과 부러움을 멈추지 않았던 반면, 적갈색 머리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시선으로 대했다. 금기시하는 분위기마저 강했다. 적갈색 머리에서 강력한 냄새가 풍겨서 강렬한 내부열기로 가득한 존재하고 생각했고,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는 적갈색 머리를 악의 의미로 보기까지 했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여성의 오염된 월경의 피가 뒤엉킨 것으로 연상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두 여인의 금발머리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망하는 르네상스 시기의 풍속이었다. (p. 173)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과 오델로의 데스데모나 가 금발이었구나;;; 사실 그리스로마인들은 금발이 아니었다. 그래서 포로로 잡아온 북방사람들의 금발로 가발을 만들어 쓰곤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금발에 대한 숭상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다 켈트족이 유럽사회의 권력을 차지하면서 금발이 곧 권력자의 머리색이 되었던 걸까 거기에 종교적 의미까지 더하고 황금에 대한 욕망까지 더하고 하면서 금발에 대한 판타지를 점점 더 키워나갔던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늘 갖지 못한 것에 대해 더 큰 욕망을 가지는건지;;;

한때 루이14세는 가발 금지를 지시한 적이 있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 가발금지령을 내려 루이13세 때부터 궁중에서 유행하던 가발착용을 금지했다. 그는 숱이 많은 자기 머리를 좋아했고 가발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중략) 루이14세의 머리에는 지루성 낭포라는 혹이 있었다. 머릿속 혹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항상 가발을 착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략) 루이14세는 침실 옆에 가발 전용 방까지 두었는데, 때와 장소에 맞춰 다양한 색깔의 가발을 애용했다. (중략) 국왕의 애용 덕분에 헤어패션의 유행이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 일었다. (p. 189)

그렇게 유럽 귀족사회에서의 가발은 이런저런 변천사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의미에 대해 읽어도 나는 여전히 영국 법정에서의 가발이 우스워보일 뿐이다. 프랑스에서 시작했으나 정작 프랑스에서는 사라지고 영국에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가발뿐만은 아니지만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귀족문화를 고수하는 영국사회가 다시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동서양 미인의 조건은 머리 모양에 있었다. 최대한 화려하고, 관능적으로 풍만하고, 가급적 높이 치솟은 상태로 치장하는 것,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인은 가늘로 긴 머리카락을 어떻게 꾸미는지가 중요했다. 18세기 조선, 일본 에도시대, 프랑스 절대왕정, 그때를 살던 미인들은 자신들의 머리카락에 온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예술적 감각을 발휘하는 데는 화가들보다 못지않는 솜씨를 지녔다. (p. 217)

가발의 변천사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서양이야기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책속에는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되는 헤어스타일부터 조선시대 가채까지 그리고 몽골식이나 일본식 헤어스타일 까지 동양의 머리카락 이야기도 종종 등장한다. 동양과 서양은 따로따로 역사를 만들어온 것 같지만 한걸음 떨어져 보면 비슷비슷해 보인다. 18세기에 이르러 더욱 비슷해진 문화스타일을 엿볼 수 있었는데, 가발을 쓰던 가채를 쓰던 헤어스타일은 점점 더 크고 풍성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면 대중문화로서 더욱 다양한 상징과 스타일을 선보이게 된다. '앤디워홀의 은발머리가 가발이라는 사실, 앤디 워홀은 20대부터 탈모가 심해져 자연스럽게 은발머리가발을 착용했고, 은발머리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과감히 살렸다. (p. 252)' 처럼 흥미로운 스타의 헤어스타일 이야기부터 '가수는 입과 뇌와 눈빛과 몸짓과 의상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그 노래를 완성한다. (p. 255)' 처럼 헤어스타일에 따른 상징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소설과 영화속 캐릭터와 인형의 머리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개된다. 저자는 '헤어웨어가 보편적인 패션의 장르로 정착될 것이다. 생물학적인 머리카락에서, 사람의 손길로 치장된 머리 모양과 헤어스타일로, 그리고 옷의 형태로 한 차원 더 진화한다는 의미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와 속성으로 또다시 변신할 것이다. (p. 303)' 라며 헤어웨어에 대한 호기심을 남기며 책을 마무리한다. 머리카락과 가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역사적 맥락이나 문화적 분석 같은 전문적인 해석은 없었지만 하나의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채집한 저자의 노력엔 박수쳐줄만 하다. 별생각없이 잡지처럼 가볍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보하는 마음부터 항해하는 용기까지,

열광어린 수집부터 여가와 여행의 역사까지,

혼자라는 세계를 누비는 모험의 연대기.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낭만과 은둔이 어울리는 단어일까? 낭만은 고독에 가깝고 은둔은 고립에 가깝다. 그렇다면 고독이 과연 낭만스러운가?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고독은 때론 외로움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A History of Solitude' 라는 원제 그대로 '고독의 역사'라고 제목을 다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혼자있는 시간에서 낭만을 찾는다면 고독이 될 것이고 혼자 외로이 은둔한다면 외로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독과 외로움은 다른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왜 다른가? 사실 이 책은 이 고독과 외로움을 구별짓는 과정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다. 혼자 살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사람은 모순되게도 지극히 오랜 세월 고독을 추구해왔다.

1791년, 400년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의 '혼자 있기'를 고찰한 전례 없는 책이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고독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스위스 철학자 게오르그 치머만 Johann Georg Zimmermann (1728~1795, 철학가이자 조지3세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 주치의)이 집필한 네 권짜리 책이었다. (중략) 책은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두어, 매년 많은 판본과 우수한 번역본들이 나오면서 1830년대까지 중쇄를 거듭했다. 요한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는 이후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책 자체로 문화적인 주제가 될 정도였다. (p. 12) 그래서 이 책의 서장에서는 '고독에 관한 세기의 고전'이 다룬 18세기와 이전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치머만은 책 전반에 걸쳐 '혼자의 장점들'과 '집단의 편리성과 축복'사이 균형을 잡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중략) 지난 세기 동안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대했는지 파악해볼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겪는 '외로움이라는 병'과 대인관계에 대한 불안은 사실 2,000년 넘게 시와 산문에서 나타난 딜레마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p. 13)

저자는 '서장'에서 외로움에 대한 불안이 2천년간 지속되어 왔다고 말했지만 책의 본문에서는 18세기와 19세기를 주로 고찰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집단 이 개인보다 더 중심이 됐던 사회였다가 개인이 집단 보다 더 중심이 된 사회로 변한 것이 확실해진 후에야 '고독'이라던가 '외로움'이라는 개념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그런것 같다. 책의 초반부터 언급한 <고독에 관하여> 는 저자의 논리에서 상당한 근거가 되고 있는데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된 것이 없었다. 더군다다 '게오르그 치머만'에 대한 검색에서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고독에 관하여> 라는 치머만의 책에 대한 오마주 같은 이 책을 읽고 나면 <고독에 관하여> 라는 책이 정말 궁금해지는데 읽을 수가 없다니... 이런... ㅠㅠ

18세기에는 과학, 문학, 철학의 확실한 경계가 없었기에 치머만은 <고독에 관하여>에 유명 의사로서 바라본 멜랑콜리는 다룬다. 멜랑콜리는 지난 2,000년 동안 질병으로 분류된 용어로 슬픔, 두려움, 우울함을 아우른다. 18세기에도 마음 상태가 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는 의학적으로 점점 뒷받침되기 시작했다. (p. 17~18) 치머만으로 대표되는 18세기 계몽주의 감수성과 뜨거운 신앙의 충돌은, 프랑스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의 1760년 소설 <수녀>에도 나타난다. (p. 19)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가 독창적인 이유는 첫째, 혼자있는 상태가 아니라 혼자 있는 이유에 집중했다는 데 있다. 고독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결정하는 요소는 자신을 은둔하게 만든 심리상태였다. (중략) 둘째, 치머만은 '혼자vs집단'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둔과 사회생활의 균형을 강조했다. (p. 21) 책 속에서 느껴지는 그의 절박함은, 당시 은둔과 사회생활의 균형이 몹시 불안정하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과도해진 도시 문명 속 엘리트 문화는 은둔을 지향할 위험이 있었다. 치머만은 이런 흐름에 공감하면서도 결과를 염려했다. (p. 22) 산책은 '낭만적인' 은둔을 실행하는 주된 방식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p. 23)

계몽주의 개인주의 도시화 등등의 문제로 '낭만적 은둔'이 선호되던 18세기와 코로나비대면 개인주의 도시화 등등의 문제로 '은둔적 고립'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시대에 <고독에 관하여> 같은 책이 왜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는지 더더욱 이해가 안된다. 외로움을 우울로 받아들여 온갖 힐링과 치유서들은 넘쳐나면서 왜 '고독'에 대한 책들은 없는 것일까? 고독이야 말로 낭만적 은둔과 동의여라고 할 수 있는건데... 흐음... 여하튼, 고독의 대표적 행위는 '산책'으로 나타났다.

도보는 사람들을, 특히 북적대는 집을 피할 가장 간단한 수단이었다. 동시에 강렬한 문학적 경험이기도 했다. 산책자들은 한적한 곳에서 읽을 책을 소지해 다양한 도보 문학에 기여했다. (p. 34) 혼자 도심을 걸을 때 받는 의심을 피할 최고의 해결책은 동물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개 산책은 도심의 전형적인 관행이 되었다. (p. 63)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단독 여행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하루치 준비물을 챙겨 왕복 기차표를 사는 것과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 없이 인적 없는 야생으로 걸어가는 것은 달랐다. (p. 83)

이 책이 영국학자의 책이긴 하나 '산책' 이야기가 나오고 나니 '플라뇌르' 라는 불어단어가 생각난다. 나는 불어를 전혀 모르지만 '플라뇌르'라는 남성명사에 대응할 여성명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산책은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그러한 산책조차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남성들은 산책을 넘어 더극한 고독감을 쫒아 오지탐험까지 나서는 시대에도 말이다. 저자는 여성들이 산책 대신 찾아낸 '여가활동' 에 대해 설명한다. 바느질, 수집, 카드놀이, 독서 등등등 하지만 '실내에서 혼자 즐기는 여가는 대부분 취향이 깃든 호사였다. 집단에서 분리되려면 기본적으로 돈, 시간, 실내 공간이 필요했다. 하류층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p. 113)' 그렇다면 하류층에게 가능했던 '혼자'는? '독방'에서 가능했다. 수도원이나 감옥 같은 곳의 '독방' 말이다.

독방 감금은 수감자에게 가장 자비로우면서 가장 심한 징벌이 혼합된 조치였다. 수감자는 사회에서 안정된 부유층만 누릴 수 있는 지속적인 사색의 기회를 얻었다. 동시에 장기적인 강제 분리는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수감자는 신에게 의탁할 터였다. (p. 164) 강제 독거의 경우 체계적으로 기록된 모든 면이 실패였다. (p. 177) 재소자들의 독방 감금 경험은 현대 연구자들에게 치밀한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난제를 남겼다. 사회격리, 일상생활 통제력 상실, 환경적 자극 부재의 영향을 수검자들의 다양한, 때로는 극심한 질병률의 맥락으로 평가해야 했다. (p. 179) 징벌로서 단독 감금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영국에서 더 오래 시행되었지만 (중략) 1,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독방 제도가 아예 없어졌다. 죄수를 신앙적으로 갱생시킨다는 개념은 그보다 더 오래전에 사라졌다. 19세기 중반, 장기 사색을 통한 도덕심 회생이라는 열망은 약화되었다. (p. 181)

자발적인 사색과 강제적인 분리는 분명 다른 생각을 하게 할 것이다. 그저 '혼자'를 유지시켜주는 것만으로든 그 무엇도 해결하거나 향상시킬 수 있는게 없었다.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의 차이가 비단 '독방'문제 뿐만은 아니겠지만 그런면에서 인간은 분명 '독립적'인 존재임이 재확인되는 듯 했다.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독립적이랄까. 달리 말하면 개성이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개성적 독립적 개인적 인간의 성향은 20세기 들어 다양한 '취미'활동으로 이어진다.

혼자 시간을 보낼 기회가 많아지면서 점점 취미가 전문화되었다. (p. 203)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소비의 역사와 겹쳤다. (p. 223)

사실 '혼자' 를 즐긴다는 것은 예로부터 '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먹고살기 힘든달면 왠 산책이고 여가이겠는가. 문학청년들이 산책할때 그 길을 노동자들은 새벽에 일터로 나갈때 걸었다. 귀부인들이 손뜨개로 '혼자'인 시간을 나름 꾸며볼때 그 집의 하녀들은 쉴새없이 집안일을 해야 했다. 산업화가 되고 노동자들의 삶에도 즐길만한 '취미'활동이 생겨났을 때에도 그 질적 차이는 결국 '소비'와 연결되어 있었다. 너무 계급차별적 시선인 것일까? 자본을 떠나서 '혼자'를 생각하려면 종교적 으로 갈수밖에 없는데 앞서서 종교와 감금의 연결은 실패했었다. 하지만 저자는 영적'회복'에 대해 다시 살펴본다.

20세기가 되자 종교 권위자나 진화론과 무관한 새로운 혼자만의 길이 모색되었다. 혼자 은밀히 떠나는 순례와 점차 형성되고 있던 대중매체 사이에 다시 균형이 잡혔다. (중략) 이 장에서는 현대 사회의 압박감에 맞서 계속 '혼자 있기'에 끌리는 요인을 다섯 가지 맥락에서 살펴볼 것이다. (p. 231)

이런저런 맥락을 따져봐도 결과는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영적 회복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할만한 마음챙김도 '개인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보조제로 홍보된다. 마음 챙김 명상의 수행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불공정한 구조의 관계 탐구는 기껏해야 선택사항에 그치고 있다. (p. 275)' 그렇게 '혼자 있기'는 현대시대에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으로 돌아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지만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는 외로움을 걱정하는 현상의 본질이다. 외로움은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실패로 여겨지는 듯 하다. 인구 통계, 정치, 문화, 사상, 의학 부문의 요소들이 더해져 외로움이라는 경험의 범주를 만들었다. 그 범위는 20세기 전부터 광범위하게 전개된 우울증만큼이나 넓다. (p. 280) 집단에서 소외되는 두려움은 20세기와 21세기 초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으로 자리 잡았다. 두번째 의문은 외로움과 고독의 확실한 경계로, 이 장 마지막 부분의 주제이기도 하다. (p. 281)

외로움과 고독의 경계가 자주 흐려지는 점을 고려할 때 결론을 두 가지로 맺을 수 있다. 첫째, 외로움은 가까운 시기의 실패가 낳은 산물만은 아니다. (중략) 둘째, 외로움을 후기 근대화의 결점과 관련 짓는 것은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더 뚜렷해진) 부의 불평등과 국가 재정 부족 때문이다. (p. 305) 개인과 집단의 경제력이 추락하면서 외로움을 억누르며 고독을 즐기기는 어려워 졌다. (p. 306) 외로움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 시대 사회적 관계의 모순이 아니라 부의 분배와 공공 서비스 공급의 긴박한 위기다. (p. 307)

외로움은 문제이고 고독감은 어느정도 필요하다고 이해되어 진다. 지금의 현실을 봐도 그렇다. 코로나 이후 휴교에 재택에 온 집안 식구들이 하루종일 함께 있는 나날이 길어질 수록 저마다 속으론 '제발 좀 혼자 있고 싶다' 외치고 있지 않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하지만 가족 중에 한명만 걸려서 방 하나 차지하고 며칠을 집안에서 쟁반으로 끼니만 받으며 생활한다고 했을때 과연 그 '혼자'가 좋겠는가? 외로움과 고독감은 마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혼자'있는 것이 때론 외롭게 느껴지고 때론 고독하게 즐기게 되기도 하는 것은 그러나 결국은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다. 저자가 지적한 경제력의 측면에서의 인식은 '고독'의 관점에도 꼭 필요한 것이다.

디지털 혁명은 사회적 교류와 동시에 사회적 교류 단절을 추구하는 흐름의 극치다. (p. 310) 소유욕이 강한 개인주의가 장기간 계속되면서, 현대사회에서 물리적 고립의 역할이 복잡해졌다. 한편으로는, 소비와 통신이 발달하면서 계층과 상관 없이 누구나 혼자 있기를 경험할 수 있게 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혼자 있기를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응이 되었다. 과소비와 과열된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새로운 매력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은둔을 수용하고 지원하는 기관이나 시설은 영향력을 많이 잃었다. (p. 318~319) 고독은 여전히 계량되지 않는 반면, 외로움은 디지털 미디어처럼 계속 숫자로 해석된다. (p. 321) 온갖 논의가 있어도, 극단적인 은둔과 집단성에 큰 변화가 생겨도, 고독의 경험과 실행에는 뚜렷한 핵심이 남아 있다. 1791년 요한 치머만이 고독을 두고 '자기 회복과 자유롭고자 하는 경향'이라고 한 정의는 우리 시대에도 유효하다. (p. 323)

이러니 치머만의 <고독에 관하여> 가 정말 궁금해지는 것이다. 내가 영어능력자라면 원서라도 찾아서 읽어보 터인데 영어무식자인것이 이렇게 또 한계를 맞닥뜨리게 하는 구나;;;

여하튼, '혼자'있는 것을 즐기는 편인 나로서는 '낭만적 혼자 있기'의 역사가 궁금해서 읽어본 책이었는데 그러한 '낭만'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예전에 다른 책에서 '론리니스loneliness 와 솔리튜드solitude' 의 차이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원제도 A History of Solitude 인 것을 보면 저자는 Solitude 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은 loneliness 일것 같다. 그러니 관점을 조금 달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말이다. 그러면 '혼자 있기'가 좀더 낭만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사회적으로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식의 역사 - 음식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
윌리엄 시트웰 지음, 문희경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대 폼페이부터 현대적인 고급 요리까지,

외식 문화와 레스토랑의 사회문화적 변천사를 읽는다

시간이 멈추는 법은 없고 따라서 역사가 없는 분야는 없다. 그래서 역사는 늘 무궁무진하고 늘 다채롭기 마련이고 그런 역사를 종류별로 읽어나가는 것은 책을 읽는 중에도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코로나시대가 되면서 외식보다는 배달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또한 외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밖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 바깥 음식을 먹는다는 것 그러한 문화가 배달이라는 방법을 만났을 뿐이므로. 여하튼, 모든 역사읽기가 그러하듯이 외식의 역사 또한 단순한 외식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외식의 역사는 정치, 공포, 용기, 광기, 행운, 혁신, 예술, 사랑, 그리고 묵묵히 성실하게 쌓아올린 노력에 관한 이야기다. 남다른 열정과 예지력으로 참신한 레스토랑을 내거나 새로운 주방을 만들거나 사람들의 식문화를 바꾸는 새로운 서비스나 요리를 내놓는 사람들만 연구해도 외식의 역사가 나온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인물들을 만나본다. (p. 7) 이 책은 역사상 최고의 레스토랑이나 최고의 요리사나 최고의 화덕이나 가장 혁신적인 주방 기구를 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맛있는 뒷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오늘의 모습으로 만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p. 11) -서문 中-

저자는 영국의 유명한 음식작가라고 한다. 세계의 많고 많은 유명한 요리들 중에서 영국의 요리는 사실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영국의 전통요리? 하고 되묻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러한 영국과 요리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이 책은 비웃음을 얻고 있는 영국의 식문화에 대한 저자의 항변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서양역사의 시작은 대부분 로마제국이곤 하는데 외식의 역사 또한 그 시작은 로마제국, 폼페이에서 출발한다.

로마의 주점은 역사상 다른 모든 주점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사회적 평등을 조장하던 곳이다. (p. 24) 유골은 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한 부류는 돈과 보석을 소유하고 다른 한 부류는 가진게 아무것도 없다. 노예와 상류층이 나란히 죽었고 두 부류의 유골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없다. 노예가 영양이 부족했다는 증거도 없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관한 일반적인 가정의 근거가 될 만한 증거가 전혀 없다. (p. 25)

전 세계를 아우른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것은 로마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이라고 하면 계급과 권력이 먼저 생각나지만 사실 제국의 초기는 굉장히 평등한 계층적 면모를 보였다 제국의 황제는 스스럼없이 대중목욕탕에 갔고 대중들이 드나드는 주점에 들렀다. 폼페이에 묻힌 유골에선 계층의 차이가 영양상의 차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부분 비슷한 걸 먹었고 비슷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폼페이가 백년후에 터졌더라도 상황은 몹시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될 때는 '근대화'가 화두였다. 그래서 터키는 오스만 제국의 음식전통마저 멀리했다. 터키의 요리사들은 오히려 프랑스를 선망했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에 형성되었지만 그 600년 역사는 배타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정치 이념이 정신을 지배하지만 음식은 다르다. (중략) 오스만 제국의 음식도 마찬가지다. 서양이 21세기의 첫 4분의1을 향하는 지금도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오스만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p. 27)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음식을 파는 시설이 늘어나자 규제도 생겼다. 술탄이 음식을 나눠주는데 누군가는 음식을 팔아 돈을 벌었기에 가격 정책이 도입되고 식품 위생 기준도 생겼다. (중략) 16세기와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음식점에서 파는 인기 요리의 조리법을 통제했다. (p. 36)

신석기혁명만 동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자연스럽게 취하고 있는 음식을 즐기는 문화 또한 동쪽에서 온 것이 참으로 많았다. 지금의 서양에는 말이다. 제국의 초기에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환대'의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와 제국의 성격이 그 역사를 달리하면서 환대나 접대는 사라지고 외식의 필요성이 생겨났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 범위가 넓어지면 당연히 그들도 먹어야 했으니까. 여하튼, 오스만 제국의 중앙통제는 외식의 분야까지 뻗쳤고 그덕분에?! 청결하고 깔끔하게 유지되는 음식점들의 문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스만제국은 서양에 '커피'를 전수시켰다.

서양상서는 마르코 폴로를 가장 위대한 여행자로 꼽는다. (중략) 역사학자들이 바투타 여행기의 일부 내용에 대해 진위를 따지듯 폴로도 오류와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중략) 폴로는 1271년부터 1295년까지 여행하고 이븐 바투타가 고향을 떠난 해보다 1년전 (1324년)에 사망했다. 폴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투타에게 대장정의 바통을 넘겨준 셈이다. 바투타는 정확성과 연대기 두 가지 모두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중략) 하지만 그의 여행기를 당대의 다른 문헌과 대조한 분석에서는 놀랄 만큼 정확한 기록인 것으로 드러났다. (p. 43) 술탄이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로마인들이 나그네에게 정원을 열어주었듯이 이븐 바투타도 낯선 이의 친절에 의지하면서 여행을 이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점대에 관한 초기의 기록과 오늘날의 접대 문화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 (p. 45)

32년간 당시로서는 거의 전세계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비하자면 한참동안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그의 여행기가 출간되고 500여년간은 아무도 읽지 않았던 책... 그 책이 재발견되었어도 마르포 폴로의 입지에 비하자면 거의 무관심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여행은 외식과 불가분의 관계다. 따라서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다른 지역의 일상과 문화와 그리고 음식을 알게 해준다. 더구나 돈한푼 없이 홀홀단신 세계여행이 가능했던 시절의 여행기라니 꼭한번 읽어보고 싶다. 상인집단으로 사막을 건너 중국을 다녀온 것만으로 허풍을 떠들어댄 여행기와는 분명 크게 다를 것 같다.

흥미롭게도 웨스트민스터가 고급 식당의 시초라고 정확히 짚어서 말할 수 있다. 모든 의회의 어머니인 웨스트민스터가 런던의 레스토랑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p. 61) 이런 음식점이 번창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런던의 성벽 너머는 시 당국과 시내의 모든 장인과 상인을 규제하고 독점하고 보호하는 강력한 상인 조합인 길드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p. 62)

책의 제목이 '외식의 역사'라고 했지만 사실 식문화라는 것이 유적으로 남아 있기가 어렵다 보니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것은 폼페이와 이슬람의 문화를 살짝 들여다보는 정도이고 책의 대부분은 근대를 전후한 영국의 식문화 형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서양역사라는 것이 어느 한 나라만 콕 집어 따로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서로가 엮이고 엮이는 관계이다 보니 영국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프랑스와 인도와 미국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 책의 주요 줄거리는 '영국의 레스토랑 역사' 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여하튼, 예나지금이나 가진것도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창업할 수 있는 분야는 외식분야인 것이다.

헨리8세가 로마와 결별하고 스스로 영국 국교회를 장악하려 하면서 그 유명한 수도원 해체령이 나왔다. (중략) 갑자기 전통적인 접대의 통로가 끊겼다.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다른 교회에서 시도때도 없이 열리던 축제를 공격했다. (p. 65)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춤추고 술마시고 싶을때 갈 곳이 없어졌다. 더이상 교회가 그런 장소와 구실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심각했다. 화형당하지 않은 수도원 사람들에게는 일할 곳이 필요했다. 여행자들에게는 머물 곳이 필요했다. 지역민들에게는 여유롭게 쉬면서 함께 어울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주점을 차리자 지역민과 여행자들이 모여들었다. (p. 66)

무상으로 제공되던 것들이 유상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시대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기 전부터 상업이 사회의 가장 큰 부를 제공하는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은 돈으로 연결되었다. 다른 계기였지만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혁명은 궁정을 없앴으나 레스토랑을 창조했다. 여하튼 외식사업은 환대가 아니라 사업이었으므로 식문화에도 급격히 돈이 침투하게 된 것이다.

바스티유를 습겨한 날 프랑스에는 약200만 명의 하인이 있었떤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2800만명이었으니 남자든 여자든 열두명에 한명꼴로 어느 집안의 하인으로 일한 셈이다. 일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은 공곡의 영역에서 일자리를 구하려 했다. 지방 저택의 주방에서 일하던 수많은 실업자가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올라왔다. 그리고 요리의 성격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정치적·사회적 격변의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파리로 올라오면서 레스토랑들이 문을 열었다. (p. 88)

프랑스는 귀족문화가 사치에 정점을 찍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으로 그 문화가 대중화가 된 셈이었다. 시민혁명이 귀족문화를 퍼트린 셈이라니 역사는 역시 아이러니 투성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영국에서는 반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산업혁명으로 가내수공업이 사라지면서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다른 곳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자리를 찾으므로 결과적으로 사교 활동도 다른 데서 일어났다. (p. 103) 노동자들이 사는 빈민가의 집들은 비좁고 답답했다. 침대 하나에서 다같이 자고 느긋하게 쉴 공간이 없었다. 적어도 고된 노동을 마친 뒤 돌아가고 싶은 편안한 집이 아니었다. 미혼 남자들은 하숙집에서 눈이나 겨우 붙일 뿐이었다. 따라서 남자들이 일을 마치고 여관이나 새로 생긴 클럽에 모이는 것도 놀랍지 않았다. 클럽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노동자들을 위한 장소였다. (p. 130)

영국의 외회제도와 커피하우스 문화발달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자들을 상대로 하는 주점(펍)문화로 이어졌다. 나중에 고급 클럽들이 생겨났다고는 하나 영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외식산업이 노동자들의 펍 문화였다면 프랑스에서는 고급 레스토랑이 주를 이루었다. 이게 아이러니인 것이 노동자중심 사회로 토대가 닦인 영국에는 귀족이 남아있고 귀족중심 사회로 토대가 닦인 프랑스에는 시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귀족이 펍을 즐기고 시민이 레스토랑을 즐긴달까. '영국에서 프랑스어로 메뉴를 적는 관습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버킹엄 궁에서는 아직도 이 전통을 고수한다. (p. 174)' 라는 것을 보면 역사란 참 오묘하다는 것이 다시금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고대나 오래전 역사이야기는 사실상 드물 수 밖에 없는 분야가 '외식'이다 보니 책은 근대 외식의 역사가 주 내용을 이룬다. 간략하게 보자면 친절하게도 앞 페이지에 연대표로 한눈에 정리도 잘 되어 있다. 오래전 역사일 수록 '외식'은 문화의 한 분야였다면 근대로 오면서 '외식'은 산업의 한 분야가 된 것 같다. 그러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외식의 역사로만 읽히지 않는다. 사람의 이야기가 결국 역사이고 한 분야에 분투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다단한 감정들을 느끼게 하다보니 그러한 감정들은 결국 현재를 다시보게 만든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역시 늘 참 좋은 것이다. 그나저나 맘편히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는 외식의 시간이 어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21 | 22 | 23 | 24 | 25 | 26 | 2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