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삶 - 무엇을 선택하고 이룰 것인가
미로슬라브 볼프.마태 크러스믄.라이언 매컬널리린츠 지음, 김한슬기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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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선택하고 이룰 것인가

그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평범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질문은 아마도 '삶'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드는가? 그래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꼭 필요한 질문이지만 솔직히 왠만하면 하기 싫은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질문은 왠지 늘 무언가를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가 포기가 아닐때 가치를 찾게 되는 것이겠지...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질문을 하기도 전에 우린 알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되고... 그러나 그것이 '가치'에 그것도 '삶의 가치'에 연결되는 문제이니 언제까지 안 할 수도 없고... 그러다 이러한 제목의 책에 드디어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가서 읽게 된다면 그때그순간 이 질문이 꼭 필요해서이리라. '그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부처가 되기 전, 고타마 싯다르타의 삶은 평범함이라는 기준에서 썩 괜찮게 흘러가고 있었다. (p. 15)

초대 교황이 되기 전까지 시몬은 거대한 제국의 변두리에 자리한 작은 영지의, 작은 호숫가에, 작은 마을의, 작은 집에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내였다. (p. 16)

흑인과 여성에 대한 차별에 맞서 싸운 위대한 영웅 아이다. B. 웰스(1862~1931)는 해방 운동을 이끌기 전까지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삶을 꾸려나가는 평범한 젊은 여성이었다. (p. 18)

평범한 왕자, 평범한 어부, 평범한 여성 이라면서 세 사람을 예시로 이 책의 프롤로그는 시작한다. '이 책이 당신의 삶을 바꿔놓을 것이다' 라면서.

전혀 다른 세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형태에 의문을 품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에게는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 질문처럼 다가왔다. 세 사람 모두 무언가, 어쩌면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고 느겼다. 싯다르타, 베드로, 웰스는 지나치게 근본적이기에 명확하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의문을 품었다. (p. 21)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인가? 무엇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가? 인간다운 가치를 품은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한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옳고, 진실하고, 선한가? 어떤 질문도 세 사람이 품은 의문을 완벽히 표현하지 못한다고 애초에 어떤 말로도 의미를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의문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덜 진실하거나 덜 중요하지는 않다고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의문'은 우리의 삶을 관통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평범하다고 생각하던 삶에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위의 세 사람은 성인이자 영웅이자 감히 넘볼 수 없는 삶을 산 분들이니 그런 분들이나 '의문'에 다가가는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에 의문을 가진다고 해서 누구나 위 세 사람처럼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고 잃어가며 '가치'에 몰두하는 것은 아니므로 '의문'을 갖는 것이 너무 실행하기 어려운 궁극의 어떤 모습을 지향하는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진 말자. 삶에 대한 의문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나의 삶의 가치'에 대한 의문일 수 있고 사실 그래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세 명이고 모두 예일대학교 신학관련 교수들이다. 예일대학교에서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엮인 이 책은 긴 프롤로그를 통해 삶에 대한 의문이 왜 필요하고 무엇을 목표로 하며 그래서 이 책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상세히 설명하며 시작한다. 각 챕터마다 질문들을 모아놓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건 이 책은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1부 뛰어들기 - 2부 심해 - 3부 해저면 - 4부 한계를 마주하기 - 다시 수면으로 라는 소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을 읽으며 질문을 하나하나 음미해가는 과정은 마치 잠수하러 물에 뛰어들었다가 바닥을 찍고 다시 위로 헤엄쳐 오르는 과정과 닮아 있다. 삶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인가 보다. 일단 뛰어들고 더 깊이 더더 깊이 파고들어가다가 한계점을 찍고 다시 돌아오는 그런 것인가 보다. 아마도 갈때와 올때가 다르겠지?!

앞으로의 본문은 깊은 바다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예정이다. 2장부터 12장까지 각 장에서는 자기 초월 질문을 하나씩 제시하고 여러분이 직접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동료를 소개하겠다. 그리고 13장부터 15장까지는 수면으로 돌아오며 자기 초월과 자기 인식을 지나 진저응로 가치 있는 삶을 향한 실천에 이르기까지 진로를 계획하는 방법을 나누려고 한다. (p. 63)

삶에 대한 질문이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라는 소제목에서처럼 막막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해 저자들은 즐겁게 안내한다. '고난의 길에 들어선 것을 환영한다. (p. 81)' 라는 문장을 읽다보면 왠지 큰웃음을 짓고 두팔벌려 환영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이 종교관련 교수들에 의해 쓰여졌다고 해도 이 책은 영성이랄까 신학적인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는 하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루었기에 느껴지는 진중함일 뿐이니 종교성을 의식하거나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종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게 될 법한 생각거리를 만나게 되기도 하니.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잘 사는 삶이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했다. (p. 154)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명령 또는 의지에 따르는 삶에 큰 비중을 둔다. (p. 155) 이런 삶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미리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즉, '비결과주의자'가 될 수 있다. 어떻게 행동해야 최선의 결과를 낳을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그저 계율을 따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뜻에 맡겨놓으면 된다. 많은 현대인이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신의 뜻에 따르는 삶은 엄청난 자유를 선사한다. (...)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주어진 자유는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독단으로부터 자유, 즉흥적 결정에서 비롯되는 찜찜함으로부터 자유를 뜻한다. (p. 156)

무릎을 탁 쳤더랬다. 아하아... 종교에 순종하는 삶이 자유로울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런식으로 생각해보니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삶을 선택하는지 조금은 알것도 같았다.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듯, 모든 것을 나의 뜻대로 나의 결정대로 내가 책임져 가는 삶이 실은 더더더욱 어려운 삶이었다니. 제대로 된 자유란 역시 쉽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이상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이상을 실천하는 삶을 살려면 (1)'의문'에 대한 광범위한 대응에 이상을 포함하고 (2)삶이라는 거대한 천에 이상을 수놓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할 것인지, 죽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길 것이닞, 실패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와 같은 고민은 모두 번성하는 삶에 대한 비전의 일부를 구성한다. 이는 태피스트리를 완성해가는 실이자, 시를 써 내려가는 시구이자, 레시피를 만들어가는 재료와 같다. 따라서 일부가 변화하면 다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사실상 삶 자체가 '의문'에 대한 대응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p. 338~339)

책 속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위인일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아는 사람일 때도 있고 모르는 사람일 때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의 일화들을 그 사람들의 삶의 줄거리를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삶의 방식'에 대한 힌트를 준다고나 할까. 그러니 이 책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의문'에 대해 너무 거창한 질문 아니냐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나'로서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궁극적으로는 '나의 가치'를 향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 따듯한 누군가가 부드럽게 건네는 조언인듯 그렇게 이 책을 읽으면 될것 같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노력이다.

노력을 멈추지 말라. '의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고요한 순간을 찾아라. 소리조치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소란이 잦아들기 시작한 늦은 저녁, 잠시 할 일을 내려둔 일과 한가운데, 언제라도 좋다. 어떻게든 '의문'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라. 소중한 사람과 소중한 가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길 두려워하지 말라.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찾은 것 같다면 그곳으로 돌아가 보물을 발굴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가라. (p. 401) 끊임없이 '의문'을 추구하라. 가장 중요한 가치를 위해 살아라. 여러분의 인생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p. 402)

하지만 보물이 괜히 보물이겠는가, 찾기 어려우니 보물인 거다... 하지만 보물이 존재함을 알게 된 이상 누가 포기하겠는가, 끊임없이 보물을 찾아다니겠지... 중요한 것은 꾸준한 노력이다. 그러한 노력이 쌓여 삶에 해답을 녹여내고 있기를... 인생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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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 이야기 - 모험하고 싸우고 기도하고 조각하는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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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박물관에서 드라마에서 오늘의 우리를 사로잡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중세 유럽인을 만나러 가다

역사를 이야기로 접할때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게 읽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더욱 역사를 이야기로 접할 경우 이야기를 누가 하는지는 중요하다. 그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도 되느냐아니냐의 기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더욱 반갑다. 믿을만한 역사 스토리텔러 주경철 교수가 다른 시대도 아닌 중세 시대 이야기를 들려준다니, 중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새록새록 자리잡아가는 요즈음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꽤 오래 한 일간지에 오늘을 돌아보게 하는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연재했다. 그 가운데 중세 역사와 관련된 글들만을 모아 새롭게 분류하고 의미를 덧대 한 권의 책으로 구성했다. 유럽 근대사의 인물들을 소개한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에 대한 일종의 '프리퀄'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다. 흥미로운 인물들을 주인공 삼아 유럽 사회와 문화의 다채로운 면을 분석한다는 성격은 이전과 같다. 다만 상대적으로 더 짧고 간결한 형식이다보니 빠른 호흡으로 더 다양한 몀모들을 그림으로써 중세사의 모자이크화가 만들어졌다. 그동안 유럽 중세는 암흑시대라는 잘못된 이미지가 덧칠되어 있었다. (p. 5) 이와 같은 구닥다리 설명은 하루 빨리 잊어먹는 게 좋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전혀 다른 중세의 상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제 암흑의 중세가 아니라 총천연색의 화려한 중세사를 마주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중세를 살았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p. 6) -머리말 中-

머리말 첫문장에서 저자는 이 책이 한 일간지의 연재글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저자의 이름과 제목 그리고 초반에 글들을 읽으며 느꼈던 친숙한 문장표현들이 아마도 그동안 간간이 일간지면에서 기사로 내가 이미 접했던 내용들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연재글이 보완되어 한 권의 책으로 나왔을 경우를 보면 대개가 일단 가독성이 좋다. 문장이 술술 읽히는 것에 더해 충분한 자료가 덧대져 있는 한 권의 책은 그 충실도 만큼 독서의 만족도를 올려주곤 한다.

책의 구성은 크게 다섯 파트로 구분되어 있다. 바이킹의 시대 - 십자가와 왕관 - 권력, 사랑, 믿음 - 중세의 마음 - 근대를 향한 여정 이라는 타이틀에서부터 이미 그 분위기를 조금 느낄 수 있을 듯 한데, 이 책은 기존에 알려졌던 중세의 이미지들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접근 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을 이야기함으로써 그동안 비워져 있던 중세의 이미지를 메꾸고 있다. 바이킹이 파괴자의 대명사이기만 한것은 아니며 십자가와 왕관 속에 이슬람과 민중이 있고 중세스타일이란 어떤 것이며 종교로만 규정짓기 어려운 마음들도 있었기에 근대가 르네상스로부터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를 통해 이미 그 여정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드문드문 조약돌을 놓아가며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하나의 새로운 중세이야기길을 만들고 있다고나 할까.

세계사를 이야기할때 유럽사만 말하면 안되듯이 중세 유럽인을 이야기할때 주요 영국,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등 주요 국가들만 언급하면 분명히 채우지 못하는 구멍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크고 굵직한 사건들만 이야기하다보면 그 사건들을 연결지을만한 소소한 이유들이나 그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이후 과정들에 대해 간과하게되기 쉽기 마련이다. 이 책이 들려주는, 어찌보면 소소하고도 작은 이야기들은 모이고 모여 생각보다 큰 관점을 깨우치게 해준다. 예를 들어 제목 처럼, 중세유럽인에 대해 '모험하고 싸우고 기도하고 조각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기존의 어두운 이미지와 다른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처럼 말이다. 더욱이 이 책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될 조선시대의 지도는 중세의 유럽과 한반도를 연결짓고 있다. 우리는 모르는듯 서로를 인식하고 살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하튼, '중세는 아주 먼 시대이지만, 그 시대의 결실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p. 6)'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지금 사는 곳곳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먼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지금 다시 되새기고 새로 쓰는 가운데 현재와 미래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p. 7)'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솔직히 현재를 보고 싶지 않아서 더욱 역사이야기를 찾아 읽게되는 요즘이다. 역사를 읽다보면 사실 지금의 현실이 더 쓴맛으로 느껴질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읽다보면 잊혀진 희망을 다시 찾아 읽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는 언젠가 과거가 되고 역사가 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과거 속 희망을 찾아 부여잡기 위해서라도 역사 읽기는 꾸준히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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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매스 - 세상을 바꾼 천재 지식인의 역사
피터 버크 지음, 최이현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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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융합형 인재, 폴리매스

한계를 넘어 지식의 최전선에서 역사를 새로 쓴 천재들의 연대기

다빈치, 수전 손택, 천재, 지식인 ... 새롭지 않은 명사들이다. 그런데 폴리매스? 시대를 앞서간 융합형 인재라... 천재와 다른 말인가? '폴리매스'라는 생소한 단어에 흥미를 느꼈다. 사전상의 의미로는 '박식가, 박식한 사람' 이다. 이러한 폴리매스들에 대한 책이라... '세상을 바꾼 천재 지식인의 역사' 라는 부제에도 끌렸다. 나는 연대기적 역사읽기를 참 좋아하므로. ㅎ

저자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미술사·사회학·영문학·불문학 협동과정을 가르쳐온 교수이다. 교수시절 강의를 하면서 학문의 큰 그림과 세부 사항을 비롯해 한 학문에서 익힌 사상과 경험을 해석하거나 다른 학문으로 전달하는 데 관심이 있는 개인과 집단에 관한 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바로 이 책이 그 결과물이라고 한다. 저자는 또한 '들어가는 글'에서 '폴리매스는 그들이 이룬 많은 업적 중 단 한가지 혹은 몇 가지 성과로만 기억된다. 이제는 오해를 바로잡을 때다. (p. 20)' 라고 말한다. 대체 폴리매스가 어떤 사람들이고 무슨 일을 했기에 저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미국 폴리매스 연구회라는 독립 연구자 모임에서는 폴리매스를 '많은 주제에 관심을 갖고 배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과거에 학식으로 알려진 학문적 지식에 집중할 것이다. 즉, 지적 '과정'이나 '교육과정' 전체 또는 적어도 주요 범위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백과사전적' 관심을 가진 학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p. 21) 이 책은 주로 인물 연구에 기반을 두었다. 15세기부터 21세기까지 서구 사회에서 활약했던 500명을 선정해 그 명단은 뒤에 따로 정리했다. (p. 24)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단히 매력적이기는 하나, 나는 이 책이 단지 초상화 전시장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 이 책의 한 가지 주된 목표는 지적·사회적인 경향을 파악해 박학다식해지려는 노력에 호의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사회 조직의 형태와 여론이 무엇인지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p. 25)

그러니까 폴리매스는 단순하게는 박학다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저자는 역사 속에서 뚜렷한 학문적 성과를 남긴 사람들 중에서 다방면에 걸친 사람들을 추렸고 그 사람들이 어떤 사회분위기 속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나를 살펴보면서 지금 이 시대에 폴리매스라 불릴 만한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봐야 할지를 시대흐름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이 책의 주된 관심은 전문화가 확대되는 문화 속에서 폴리매스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다. (p. 26)'라는 말처럼 현대적 폴리매스 존재를 새삼스레 강조하고 싶어한달까. 왜냐하면 시대적 천재라고 하면 항상 존경받았던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의외로 많았었기 때문에...

다빈치는 회화·물·해부학·광학·비행·역학 등에서 저술 계획을 세웠지만 그중 어느 것도 완성하지 못했으며 어떤 글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역대 최고는 아니라도 당대 위대한 예술가 중 하나였던 다빈치는 40대 후반에 '붓놀림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수많은 폴리매스가 분산된 관심과 에너지 때문에 작업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레오나르도 증후군 이라는 용어를 만들게 된 이유다. (p. 81)

'천재'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가장 흔하게 떠올려지는 사람 중 하나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일 것이다. 하지만 따져들어가 보면 다빈치의 완성작은 회화를 비롯해서 그닥 많지 않다.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던 만큼 이거하다저거하다 하느라 뭐하나 제대로 완결짓지는 못했다. 그래서 저자는 벌려놓은 일은 많은데 마무리는 못하는 모습에 '레오나르도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 폴리매스들의 특징 중 하나로 이 레오나르도 증후군 적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만능인' 처럼 보였는데 실상은 '박학다식한 괴물' 일수도 있었달까.

17세기를 폴리매스의 황금기로 부르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그 자신도 학문에 정통했던 헤르만 부르하버가 '박학다식한 괴물들'로 표현한 사람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많은 책을 썼다. (p. 102) 17세기는 광범위한 지식과 독창적 기여라는 상반된 요구가 비교적 힘의 균형을 이룬 시기였다. 출판되는 책이 늘어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한다는 압박도 커짐에 따라, 1700년 이후에는 폴리매스가 되기 점점 어려워졌다. 이미 몇몇은 힘의 균형이 조금씩 깨지면서 지식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p. 128)

사실 폴리매스들의 연대기를 읽어가는 과정은 지식의 분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대시절 학문별 이름도 없고 철학이자 수학이자 과학이자 역사학이자 수사학이었던 그 모든 과정을 그저 뭉뜽그려 하나로 배울 수 있던 시절에서 지식이 쌓이고 발견이 늘어나면서 모두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는 시대가 되어갔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넘쳐났고 각각의 분야로 전문성을 띠어갈 수밖에 없었다. 즉 전문가의 시대는 다른 말로 지식의 파편화를 가중시키는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 분야에 정통하지 못하고 잡다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 폴리매스 들에 대한 평가는 점점 더 야박해졌다.

지식 폭발에 대한 주요 대책은 지식을 전문화해서 필수 정보의 양을 줄이는 것이었다. 전문화는 정보의 홍수를 막는 제방으로 일종의 방어책으로 간주되었다. (p. 205)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들기 어려워지면서 학문에 파벌과 영역이 생겨났다. 이것은 지식이 영역화되고 있다는 신호이며 '내 분야' 혹은 역사가의 경우 '내 시대' 같은 포현들의 사용이 증가했다. 일부 학계는 경쟁자들로부터 자신의 분야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극도로 예민해졌다. (p. 209)

하지만 지식이 점점 더 전문화되었다고 해서 폴리매스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문화 시대에 폴리매스에게 주어진 역할은 임시적이거나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학문을 창시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당연히 다른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역성의 시대에 새로운 학문은 순차적 폴리매스, 즉 유목민형 학자가 필요하다. (p. 231)' 폴리매스들은 늘 있어왔다. 새로운 학문을 개척하고 나면 그 분야는 전문화가 진행되고 그러고 나면 또다른 폴리매스들이 새로운 학문을 창안해 왔달까. 이러한 과정은 물론 폴리매스라 부를 만한 한 개인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적 집단적 대중적 다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했다.

오늘날은 집단과 개인 모두에게 상황이 복잡해졌다. 지금 우리는 분과 학문간 학제간 융합이 공존하는 시대, 혹은 단순한 실존보다 상호작용의 의미를 강조한 스페인어 단어를 사용해서 좀 더 정확히 표현해서 그 두가지가 공동 생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구획이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학과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캠퍼스에서는 학과 옆에 수많은 학제간 융합 연구소가 세워졌다. (p. 351)

얼마전부터 가장 핫한 단어 중 하나가 '융합'이 아닐까 싶다. 대학학과만 보더라도 전통적인 학과들이 사라지고 생전 처음 보는 듣보잡 학과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 중심에 '융합'이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과잉의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은 뒤쳐지기 십상이다. 지식이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시대이지만 이런 시대에 다시한번 폴리매스 존재들을 상기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연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열 명 이상의 몫을 할 수 있다. (p. 360)' 라는 저자의 말에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만 제대로 알기도 힘든데 만능이 되야 살 수 있는 시대라니 참 먹고 살기 힘든 시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뭐 모두 다 천재일 수 없는 것처럼 모두 다 박학다식할 수도 없다. 다만 노력형 천재라 할 수 있는 폴리매스에 좀더 긍정적인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라는 식으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ps. 저자가 앞서 밝혔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500명의 폴리매스는 모두 서양인이고 특히나 영프를 중심으로 한 유럽인들이다. 하지만 천재가 어디 유럽에만 있었으랴. 폴리매스가 어디 서양인만 있겠는가. 우리가 얻어야 할 메시지는 그저 융합형 인재, 박학다식형 인재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라는 걸 인지하는 정도이면 될 터이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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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의 기원 - 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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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책을 읽다보면 역사라는게 지금부터 과거로 쫓아 올라가게 되기도 하고 과거 어느 시점부터 현재로 따라 내려오게 되기도 하는데 그모든 방향에서 종국에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분야가 고고학인것 같다. 신화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시대에 대하여 구체적인 물증으로만 밝혀내는 고고학적 사실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건들을 중심으로 한 역사들과는 좀 다른 기분으로 읽게 되기도 한다.

여하튼, 이런저런 역사책들을 읽다가 고고학적 책들도 좀 읽게 되었는데 그러다 만난 책이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이었다. 아! 이 한권만으로도 나는 단박에 강인욱 님의 팬이 되었다. 국내에도 이런 고고학 학자분이 계셨구나 알게 되어 너무 반갑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강인욱 님의 글은 남다르다.

[ 강인욱 교수는 고고학자로서 발굴과 연구뿐만 아니라 대중과 교감하는 강연과 글쓰기에도 적극적이다. 이는 우리나라 학문 풍토에서 드문 일인데 실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진정한 대중성이란 낮은 수준의 전문성이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을 대중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또 다른 노력과 능력이 있어야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라는 유홍준 교수님의 추천사는 아주굉장히딱! 적당한 추천사다. 정말이지 강인욱 님은 진정한 대중성과 진정한 전문성을 두루 갖춘 고수 중의 고수! 다. 그러니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어찌 손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집필 과정이 굉장히 자유로웠습니다. 어떤 체계적인 틀을 잡고 시작했다기보다 '기원을 알려주는 유물 이야기'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잡은 뒤, 여기에 걸맞은 자료나 주제가 보이면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글을 써나갔습니다. (...) 이 책에서는 서른두 가지의 유물을 '잔치', '놀이', '명품', 그리고 '영원'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나누었습니다. 각각의 키워드는 우리 삶의 커다란 네 가지 축인 '먹고' '즐기고' 욕망하고' '죽음을 대하는' 모습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한 것입니다. 고고학 유물들과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오래전 사람들도 오늘날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음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p. 8,9) - 프롤로그 中-

프롤로그에서 잘 설명되고 있듯이 이 책은 크게 네 파트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서 먹고 즐기고 바라고 떠나는 인간의 생이 다 들어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자연스럽게 먹고 있는 음식과 술이 과거 그 옛날 역사시대 이전의 고고학적 시대에도 먹고 즐겼다는 사실 그 자체도 신선할 수 있지만 그 사실들을 뛰어넘어 인류를 하나로 묶어내는 통찰력어린 관점까지 깨닫고 나면 아하! 무릎을 치며 이 쉽고 재밌게 읽히는 글이 얼마나 깊이 있는 글인지 새삼 깨닫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뒤로 이어지는 좀더 고고학적인 이야기들 속 인간의 놀이와 유희와 죽음이 어떤 기원들에서 지금으로 이어져왔는지 더욱 빠져들어 읽게 되어 그때나지금이나 하는 심정이 자연스레 공감되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의 동물입니다.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내다보기 때문이죠.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과거 주가의 등락을 근거로 앞날을 예측합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릴 때 반드시 이전 판례를 참고하고 현재 상황을 고려합니다. 의사도 진찰과 치료를 할 때 이전의 임상을 토대로 삼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미래를 판단하고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바로 우리가 지나온 과거입니다. (p. 10)

흔히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고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고학자는 과거를 발굴하지만, 그 목적은 단순한 과거 자료의 수집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있습니다. (p. 345) 객관적인 과거는 변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대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느끼고 배우는 과거는 변합니다. (p. 346)

고고학은 은근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학문 분야이다. '그때는 맞았으나 지금은 틀리다' 라는 말을 새로운 유물이 발굴되고 새로운 해석기법이 발달하면서 자꾸 하게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건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유물들은 얼마나 제대로 분석해낼 수 있는 기술이 있느냐에 따라 좀더 일관적이면서도 단단한 무언가, 인간 자체에 대한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다. 과거는 변하지 않지만 그 과거를 제대로 알아내는 과정은 결국 인간의 기원에 한걸음씩 다가가 인간적 프레임을 새롭게 다시 제시해줄 수 있다. 그러니까 고고학은 생각보다 굉장히 미래적인 분야랄까?! ㅎㅎ

'너 내가 누군줄 알아'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꼰대라며 비웃는 경우가 많지만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기원을 생각하다보면 '너 네가 누군줄 알아' 라며 도찐개찐이라는 심정으로 좀더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허허 웃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수천년간 굉장히 많이 변해온것 같지만 인간은 그 기원부터 지금까지 수천년간 그닥 변한게 없다. 그 사실이 이 시대에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될 수 있는 역사읽기가 널리널리 많이 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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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 역사, 형식, 이론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1
한스 포어랜더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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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체(政體)가 무엇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도 거의 무의식적이다할만큼 자동적으로 민주주의다 라고 모두들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잠깐 멈추어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가? 하면서 의문점이 꼬리를 남기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과연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시대인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일단 민주주의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너무나 근본적 질문 같지만 혼란스러울 수록 다시 근본부터 차근차근 따져봐야 하니까.

민주주의 시대는 1989, 90년에야 진정으로 시작된 듯 보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주의는 개가를 불렀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모델은 체제 경쟁에서 경쟁자를 물리친 듯 보였으며 많은 이들이 보기에 이데올로기적 논쟁의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 했다. 현실 사회주의 독재가 종식되면서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와 같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홉스봄)로 만든 역사적 대안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개선 행진은 멈출 수 없었다. 민주주의 정부 형태는 몇 차례의 물결 속에서 반대자들에 맞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p. 5) 하지만 이 같은 양상은 최근 퇴색되었다. -서문 中-

'민주주의 정부 형태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이 문장에서 눈길을 끈 것은 과거형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란 얘기, '서문'에서 제시한 몇몇의 사례들 만으로도 그 승리감은 '퇴색된'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가 과연 올바른 방향이었나? [플라톤에 따르면 아티게 민주주의가 그토록 위대했을지언정 소크라테스 한 사람도 감내하지 못했다. 아티케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p. 8)]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무엇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는가? [고대로부터 제기되어온 오래된 문제가 근대에 새롭고도 더욱 시급하게 떠올랐다. 민주주의란 모든 시민이 정치의 심의, 결정, 집행 과정에 포괄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의미하는가? (p. 11)] 민주주의는 사실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그러니 이제라도 우리는 되짚어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가'

도시에 독재자보다 더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네.

무엇보다도 그런 도시에서는 공공의 법이 없고,

한 사람이 법을 독차지하여 자신을 위해 통치를 하기

때문일세. 그리고 그것은 이미 평등이 아닐세.

하지만 일단 법이 성문화되면 힘없는 자나

부자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네.

그러면 부유한 시민이 나쁜 짓을 할 경우

힘없는 자가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약자도 옳으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네.

자유란 이런 것일세. "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공론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이 나라의 독재자요?'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탄원하는 여인들]> 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18 (<민주주의> p. 17)

위와 같은 테세우스의 웅변에 테바이에서 온 전령은 아래와 같이 군주정에 대한 찬가를 부른다.


(...) 나를 보낸 도시에서는 군중이 아니라

단 한사람에 의해 통치권이 행사되며, 허튼소리로

우롱하며 순전히 제 이익을 위해 도시를 때로는 이리로,

저리로 끌고 다니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 제대로 연설도 할 줄 모르는 주제에

백성들이 어떻게 도시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겠어요?

지식이란 단기간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지요. 설사 가난한 농부가 멍청한 바보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에 쫓기다 보면 정치에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지요. (...)

[에우리피데스는 테바이 전령을 민주주의 비판의 대변자로 삼았다. 인민은 '천민'으로, 민주주의는 선동가와 수다꾼들의 행사로, 평범한 사람은 정치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p. 19)] 테세우스의 말도 테바이 전령의 말도 다 논리적이지 않은가? 이래서 어떤 사상이나 개념에 대한 근본부터 차근차근 짚어보려면 고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하지만 아테나이에 거의 200년 동안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주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테바이인의 몰이해로 바뀌지 않는다. (p. 19)] 라고 말하지만 글쎄... 요즘 사람들은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들에 피곤이 쌓인 요즘 사람들은 어느 쪽에 더 마음이 갈까? 나는 왠지 테바이 전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시대가 민주주의도 아닌 독재도 아닌 어중간한 폭력의 시대로 변해가고 있는게 아니겠는가... 흉악범죄가 늘어나고 있다는건 그런 죄를 저질러도 아니 그보다 더한 죄를 저질러도 아무 처벌 받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렇다면 나도 혹은 나쯤은 하며 범죄를 저지르는게 아닐까... 범죄의 악순환이 시작된거 같아서 무서운 시대가 되버렸다. 요즘은...

아테나이의 폴리스 집회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도 아니었고 현대 민주주의국가들과 같은 정당 민주주의도 아니었다. 폴리스 민주주의의 중심에는 논쟁, 즉 숙의 행위를 통한 결정의 저울질이 있었다. 따라서 숙의 민주주의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을 통한 그 르네상스가 시사하는 것처럼 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자기 이해와 작동 방식을 나타낸다. (p. 45)

저자는 민주주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아테네 민주주의부터 차근차근 설명한다. [아테나이인들이 이해한 평등은 개인적 권리, 특히 인격적으로 이해된 권리의 평등과 동일할 수 없었다. 개인은 아테나이 폴리스의 구성원으로서 정의되었으며 폴리스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했다. (p. 50)] 폴리스 민주주의는 경계가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발전에 이바지하는 많은 조건이 전제되어 있었다. (p. 52)] 수천년전의 정체와 지금의 정체가 '민주주의'로 퉁쳐질 수 있는 게 아님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민주정과 과두정의 결정적 차이는 민주정은 빈민의 지배를, 과두정은 부자의 지배를 반영했다는 데 있다. (p. 57)] 지금 시대가... 과두정인줄 ㅋ 여하튼,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매 시대마다 그 모습을 변형시켜왔다. 하지만 그 어느 시대에서도 최선의 혹은 최고의 정치체제로 인정받지는 못한것 같다. 고대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혼합정체를 제안했다. 민주주의는 태동부터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정체였다. 그러니 고대그리스 이후 민주주의 맥이 끊겼다가 새롭게 다시 등장한 근대 민주주의 시대가 되어서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마 자체는 민주정이 아니었다. 공화정 시대의 정치에서 시민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로마공화정은 귀족 지배라기보다 과두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p. 60)] 미국은 로마의 공화정을 이은 것처럼 보이던데... 역시 지금 시대는 과두정이었나...ㅋ

공화정은 무엇보다도 제후의 지배와 군주정에 대한 제한 및 반대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그 자체로서 합의에 의해 보호되는 시민 통치라는 중세 말의 이상을 가리켰다. 그것은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에 기반한 통치였다. 한편으로는 군주의 통치를 받지 않고 제후의 군주적 개입으로부터 독립성을 지키고자 하는 자유국가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시민의 자치를 의미했다. 이 두 가지가 자유로운 삶이라는 이상에서 결합되었다. (p. 70)

루소는 폴리스 정통을 이어받았으며 사회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자신의 공동체를 '공화국'개념으로 정립했다. 민주주의 개념의 역사에서 아이러니는 이처럼 근대 민주주의를 확립할 때 민주주의가 실제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p. 75)

[르네상스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 뿐만 아니라 특히 표현 예술을 통해 이미 낡은 세계상을 뒤흔들어놓았고, 개인을 그의 자연적, 정치적 환경의 형성자로 보는 새로운 이해의 단초를 마련했다. (p. 81)] 민주주의 발전사에서도 르네상스는 획기적 변혁의 시점이었다. [모든 정치 질서, 특히 민주적 질서는 이제 개인과 그 자유의 관점에서 사유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개인들의 다양한 이해 관계와 가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p. 82)] 그랬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 관점에서만 다뤄질 수 없었다. 바야흐로 상업의 시대가 오고 있었고 그렇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로 함께 설명되어질 수밖에 없는 시대로 되어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제 그 경계가가 불분명해 보인다...

북아메리카에는 아테나이의 모범에 기초한 집회 민주주의인 '순수 민주주의'가 아니라 온건한 대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다른 체제가 확립되어야 했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온건한 옛 공화주의 전통 안에 서 있었다. (p. 95)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공동 이익을 우선시하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직접적인 인민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의제 기구와 '이중으로 안전한' 수직적, 수평적 권력분립 체계를 통해 해결하려 했다. '야망을 상쇄하기 위해서 야망이 만들어져야 했다.' (p. 98) 연방주의자들은 견제와 균형의 체계, 즉 연방 수준 개별 기관들 사이의 그리고 연방 국가와 연방주들 사이의 권력 억제와 권력 균형의 체계를 고안했다. (p. 100)

겉으로만 봐서는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의 정치체제가 다 비슷비슷해 보였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연방제는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민주주의 역사를 훑어오는 이 책에서 미국의 연방제가 왜 그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나 역사를 알아야 정치든 철학이든 경제든 뭐든 역사를 통해서야 이해가 된다. 미국 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대표격이라 할만한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민주주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나라별로 살펴보니 이또한 역시 케바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민주주의라고 하나로 그저 퉁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코뱅의 '덕'의 테러는 독일의 많은 사람이 프랑스식 급진적 민주공화주의와 거리를 두는 이유가 되었다. 독일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p. 112) 독일에서는 공화주의를 반군주정 통치의 한 형식이 아니라 개혁적이고 합법적인 정부 운영 방식으로 이해하는 길이 구상되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칸트는 '진정한 공화주의'의 합법적 정부와 전제정치 사이의 오래된 구분을 다시 채택한 급진적 민주공화주의의 완화된 버전을 표명했다. (p. 113)

미영프에 이어 독일에서의 민주주의가 설명되어질 때 저자가 독일학자라서 그런건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개인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의 관계가 구성적이었지만 독일에서는 그것이 해체되었다. 북아메리카에서 특징적이었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에는 법치국가가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없었다. 독일 신민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누렸지만 국가권력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p. 119)] 독일에서의 민주주의가 따로 다루어져야 했던 이유는 히틀러라는 독재자의 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변화를 독일은 보았다. 그 장단점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바이마르헌법은 위기에 대비하여 대통령 독재의 예비 헌법을 준비해두었다. 이러한 대통령식 해법은 반의회적이고 반정당 국가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위기 시 정부를 구성하는데 주요 의회 정당들이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p. 125)] 나라를 자꾸 위기에 처해있다고 설파하는 대통령은 그렇게 독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나라도 맨날 위기라고 하지 않나? 그렇다면? ㅎㄷㄷㄷ

민주주의가 정당 민주주의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사회문제의 정치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정당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갈등 상황을 정치체제 수준에서 묘사한다. (p. 129)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의 민주주의국가들은 장기적으로 안정화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에 기여한 것은 유럽 분할의 결과로 서유럽 자유민주주의와 동유럽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재 사이에서 발생한 거대한 권력과 안보의 갈등이었다. (p. 137)

서구 민주주의국가들은 20세기 후반에 경제적, 정치적 주변 조건들을 통해 진전된 내적, 제도적 안정성을 발전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생활방식, 가치관, 정치적 방향을 둘러싼 상당한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고 예전에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었던 문화적, 인종적, 소수자들을 통합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 문화적 역동성도 발전시켰다. (p. 140) 민주주의는 일반적으로 수용된 정부 형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이 되었다. (p. 141)

안정화된 서구의 민주주의는 사실 반대편의 불안정한 체제들의 덕을 보고 성장한 셈이었다. 민주주의는 정부 형태일 뿐만 아니라 생황양식이 되었지만 이러한 민주주의에는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고대그리스식 민주주의에 필요한 전제조건과 다를지라도 조건은 필요했다. [안정적이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는 사회에서의 다원성, 문화에서의 다양성 그리고 경제에서의 경쟁이다. 이 사회 영역들의 광범위한 자율성, '국가로부터의 거리' 역시 자주 언급되고 있다. (p. 153)] 하지만 요즘 시대는 어떤가? 다원성, 다양성, 공정한 경쟁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세계화'는 자국의 경제를 더욱 봉쇄화 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인터넷발달에 따른 무분별한 미디어의 정보들은 더욱 시대적 위기를 커지게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위기일까?' (p. 184)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1947년 11월 11일에 하원 연설에서 했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민주주의는 모든 정부 형태 중 최악이지만 그보다 나은 형태도 없다"

민주주의가 차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매우 많은 장점을 겸비하고 있기에 알려진 최선의 지배 형태라고 할 수도 있다. (p. 194)

[시민이 정치체제 자체를 제거하지 않고도 통치자를 제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배 형태가 민주주의이다. (p. 196)] 라는 저자의 문장에 희망을 갖고 싶지만... 요즘 시대 굴러가는 걸 보면 솔직히 좀 절망적이다... [민주주의의 모든 질병은 어쩌면 더 많은 민주주의에 의해 치료될 수 있을지 모른다. (A. 스미스) p. 205] 라는 옮긴이의 말에도 여전히 그리 희망이 생겨나진 않는다. 하지만 [현대민주주의가 마주한 도전과 위기 상황을 성찰하기 위해 역사의 여정에서 구성되어온 민주주의의 이상과 가치들을 검토 (p. 206)] 저자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은 있다. [<민주주의>에서 포어랜더가 개관한 민주주의의 개념사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능과 작동 조건에 관한 분석은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독자에게 제공해줄 것이다. (p. 207)] 라는 역자의 말에 그나마의 기대를 걸어본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과 독자가 아닐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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