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글맞던 더위가 한풀꺽이고 시끄럽던 매미 울음소리가 사그라들면, 간간하게 불어오는 찬 바람과 속삭이듯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정겹고도 반갑게 느껴진다. 높디높고, 맑디맑은 청명한 가을 하늘은 지난계절 굼뜬마음을 씻어주는듯, 주변을 산책하고 싶은 마음을 일게하는 마력이 있다. 청명한 하늘과 풀내음 가득한 가을 바람에 이끌려 나온 산책길에 이름모를 꽃들과 잡초들이 정말 싱그러워 보인다.

 

 

 

견물생심!(見物生心). 눈으로 보니 마음이 일어난다는 뜻의 사자성어만큼 가을에 딱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봄 못지않게 지천으로 피어나는 꽃들과 작은 바람결에도 우수수 떨궈내는 낙엽비는 가을이 아니고선 감상하기 힘이든데, 우리네 시선은 늘 작은 휴대폰속에만 머물고 있으니 어찌 가을의 정취가 마음속에 깃들 수 있을까!

그래서 서정주 시인은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 가을이면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했는지 모른다. 한바탕 꿈같이 잠시 왔다가는 가을의 아쉬움을 이렇게 담아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푸른날 -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그리운 사람들을 하나 하나 떠올려보니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그리워진다. 또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보니 지난 계절 무심했던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오늘 편지 한통 보내고 싶다.  이 눈부신 계절에 그대 오늘 행복했느냐고 정채봉 시인의 시를 빌려 묻고싶다.

 

' 오늘 - 정채봉'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잊은 시간 이였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사랑하는 그대, 지난계절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따사로운 가을볕에 바짝 말렸는가. 그대 저기 저 가을 볕에서 피고지는 이름모를 꽃들이랑 눈인사 나눴는가. 그대 하늘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따라 고민이랑 아픔이랑 흔들어버리고 눈속에 마음속에 마음껏 담아두었는가 라고.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 했는가. 나는 그냥 가을. 가을이고 싶다.

 

 

 

 

   이 시집은 이경철 저자가 중앙일보에서 연재한 72편의 시를 묶어놓은 것이다. 적막해진 마음에 시를 한 모금 마시며 하루를 맑고 향기롭게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선별된 시들이 인상적이다. 시는 정제된 언어의 결정(結晶)과 같아서 풀어쓴  문장과는 격이 다르며, 시가 가진 절제미와 압축미야 말로 문장이 갖춰야할 최고의 선'이라던 조경국저자(소소책방 책방일지)의 이야기 마져 떠오르게 만들던 시집이였지만, 이경철 저자가 시에 곁들여 놓은 이야기들이 가끔 시의 의미를방해하는것 같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아래에는 좋았던 시를 더 담아놓는다.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가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 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 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 앞에 있다.

                               

' 오수(午睡) - 김춘추 '

 

청개구리

토란 잎에서 졸고

해오라기

깃털만치나

새하얀 여름 한 낱

고요는

수심(水深)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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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9-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맨 위 사진 속의 저 꽃이 말씀하셨던 ˝꽃범의 꼬리˝ 인가요?
점심 먹고 산책까지 잘 마치고 와서 제 식구들은 지금 저만 제외하고 수심보다 깊은 오수를 즐기고 있는 중이랍니다 ^^

해피북 2015-09-24 09:36   좋아요 0 | URL
네! 저번에 말씀해주신 `꽃범의 꼬리`가 맞는거 같아요!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똑같은거 같더라구요 ㅎㅎ
그런데 hnine님은 어쩜 그렇게 잘 알고 계세요?

점심 먹고 즐기는 오수! 정말 꿀맛이죠! ㅋ
어서 주말이 왔으면 좋겠는데 이번 주말은 추석이라서
오수를 즐길수있는 시간은 없을거 같아요 ㅎㅎㅎ

후애(厚愛) 2015-09-22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스모스 꽃이 볼수록 예쁘고 볼수록 기분좋아집니다!!!!^^
코스모스 꽃말이 궁금해서 검색하니 `순정`이에요. ㅎㅎ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되세요.*^^*

해피북 2015-09-24 09:37   좋아요 0 | URL
오홋!! 코스모스 꽃말이 순정이였군요^^
햇님을 향한 순정일까요?
가을을 향한 순정일까요 ㅎㅎㅎ
이쁘네요 순정,
비오는 목요일이지만, 후애님두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보슬비 2015-09-2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자연...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조합 같아요. ^^

해피북 2015-09-24 09:39   좋아요 0 | URL
캬~ 그렇쵸. 시와 가을은 찰떡 궁합인거 같아요.
호숫가를 걸어도 절로 시심이 일어나고 ㅎㅎㅎㅎ
저는 아무래도 가을뇨자인가봐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햇살이 좋고, 하늘이 좋고, 나무가 좋고,
자연이 좋아지는걸 보니 말이죠 ㅋㅋㅋ
어릴때 엄마가 나무나 꽃보고 감탄하면 저는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더라구요.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가봅니다 ㅎㅎㅎ
 
심야식당 6
아베 야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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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읽은 책. 스토리가 반복적인거같아 신선한 느낌을 받지 못했지만, 차밥이랄지 생강구이 정식, 고등어 된장찜이나 오징어다리튀김등 다양한 음식 이야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읽어야 했어요 ㅋㅁㅋ이 책이 컬러로 나오지 않은게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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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9-1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띄엄띄엄 봐야 그 진가가 보이는 것 같아요. ㅎㅎ 잊을 만하면 보고~ ㅎ

해피북 2015-09-19 10:19   좋아요 0 | URL
지금 행복하자님 말씀이 진리인거 같아요 ㅋㅋㅋ
도서관에 9권까지 밖에 없었는데 요근래에 14권이던가.. 까지
들어온거 같더라구요. 막 빌려오려다가 띄엄 띄엄 보기 위해서
6권만 읽고 왔어요. 앞으로 도서관에 가면 한 권씩 읽고오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거 같아요 ㅎㅎ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북깨비 2015-09-19 0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심야식당은 드라마로만 봤어요. 밤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이죠. 저는 음식 만화중에 오무라이스 잼잼을 제일 좋아합니다. 올컬러라 더 맛있어 보이고요. ㅎㅎㅎ

해피북 2015-09-19 10:20   좋아요 0 | URL
오! <오무라이스 잼잼>이란 만화가 있군요! 거기다 올컬러라면 ㅎㅎㅎ 읽을때 정말 힘들겠는걸요!
한번 살펴봐야겠어요 ㅋㅋ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북깨비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
장-폴 디디에로랑 지음, 양영란 옮김 / 청미래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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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름을 부여받고 36년동안 투명인간처럼 살아야했던 남자가 있다. 길랭 비뇰(Guylain Vignolles)은 빌랭 기뇰(Vilain Guignol- 심술쟁이, 꼭두각시)가 되어 갖은 놀림에 시달린 남자. 거기다 소심한 성격인지라, 부모님께 말 한마디 못해본 길랭 비뇰.

 

' 서른여섯 해를 사는 동안 그는 남의 눈에 띌때마다 터져나오는 웃음과 놀림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잊혀진 존재,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으로 사는 방법을 익혔다.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뚱뚱하지도 비쩍 마르지도 않은 남자. 그저 시야 언저리에서 언뜻 보일락 말락 하는 희미한 실루엣, 아무도 찾지 않은 외딴 곳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할 정도로 주변 풍광과 하나가 되어버린 사람, 한마디로, 그 긴 세월동안 길랭 비뇰은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 살아왔다"p9

 

이런 길랭 비뇰에게도 세상에서 온전하게 존재하는 시간이 있다. 6시 27분이면 플랫폼에 들어오는 지하철 보조의자에 앉아 낱장으로된 종이를 가죽가방에서 꺼내들고 낭독하는 시간이야 말로 길랭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가 낭독하는 종이는 일정치가 않았다. 어떤날은 요리책, 어떤날은 탐정소설, 어떤날은 역사책등 두서없이 잡히는 낱장대로 읽곤했지만, 언제나 그가 낭독하는 시간이면 함께 탑승한 승객들은 조용히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가 다니는 회사는 엉뚱스럽게도 책을 파쇄하는 공장이다.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오는 수만톤의 책을 '체르스토르 500'이라는 기계에 쑤셔넣고 하루종일 파쇄하는 날이면, 그는 알수 없는 슬픔과 그의 오래된 친구 주세페를 떠올린다. 한때 자신과 함께 공장에 일했지만, 파쇄기의 오작동으로 두 다리를 잃게된 주세페. 그를 떠올릴때면 길랭은 이 체르스토르라는 거대한 기계가 단순히 종이를 파쇄하는게 아니라 뭐든지 먹어치우려는 욕망으로 꿈틀대고 있음을 느끼며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가 다니는 회사 '스테른 컴퍼니'에는 아주 독특한 인물과 괴롭히는 상사와 직원이 있다. 12음절 정형시로만 대화하는 경비원 '이봉 그랭베르'는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길랭의 작은 쉼터가 되어주지만, 세상을 이분법적 잣대로 쪼개보는 건방진 아첨꾼 '브뤼네르'와 자신의 유리왕국에서 공장 내부를 훤히 내려다보며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참견하는 공장장 '펠릭스 코왈스키(100킬로미터의 거구라 사람들은 '뚱뚱이'라고 부른다)'는 시시때때로 길랭의 일에 간섭하거나 참견하며 짜증스럽게 만들곤 하는 여느 직장생활의 모습과도 똑같은 모습을 엿보게된다.

 

 

이런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지하철 낭독시간으로 풀고있던 길랭은 어느날 우연히 자신이 늘 앉던 보조의자에서 떨어진 usb를 줍게 되고 그 속에 72개의 문서파일을 발견하며 한 장씩 읽게된다. 그 문서의 주인공은 28살의 '쥘리'라는 여성의 일기임을 알아챈다. 그 일기에 흥미를 느낀 길랭은  매일 조금씩 지하철 안에서 낭독하게면서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되는데......(책을 읽을분들을 위해 뒷이야기는 남긴다.)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와 대사가 맛깔스러워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 재밌게 읽었다. 그렇다고 빵빵터지는 웃음을 기대하지는 마시길. 소소하게 큭큭 거리며 즐길 수 있는 소설임을 밝힌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늘 길랭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에 놓이게 된다는것을 깨닫는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과 만나 일을 해야 하며, 듣기 싫은 잔소리속에 살아가야하는. 그래서 늘 숨고 싶은 '투명 인간'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길랭과 우리의 다른 모습이라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그 일을 하기 위해 하루를 기쁨으로 보낼 수 있다는것, 우리에겐 그런 일이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그런 길랭의 긍정적인 마음에 이끌려 다른 긍정적인 일들이 생겨나는 모양새가 영 나쁘지 않게 다가온다. 다만 결말 부분이 아쉽게 끝나는게 안타까웠지만, 길랭과 주세페의 남다른 우정이 뭉클했고,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쥘리)을 통해 길랭은 미쳐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명쾌하게 해결해가는 과정을 느끼며 점점 쥘리에게 이끌리는 길랭의 모습도 나쁘지 않아 참 마음에 드는 소설 한 권을 읽어 기분 좋은 밤이였다.

흑과 백 사이에는 아주 밝은 빛깔에서 시작해서 아주 어두운 빛깔에 이르기 까지 무수히 다양한 뉘앙스의 회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려고 온갖 수사를 동언하기도 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p26

` 잊지 말게, 애송이. 우리와 출판 업계의 관계는 똥구멍과 소화의 관계야! 전혀 다르지 않다고!`

공중 화장실을 관리하는자는, 그것이 어떤 화장실이건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려서 일기를 쓰리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ㄹ질을 하고, 금속 부품의 광을 내고, 바닥을 문지르고, 때를 빼고, 헹구며, 화장실에 화장지나 채워놓는 일이나 할 줄 알지, 그 외 다른 일은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하지만 내가 락스로 뭉개진 손가락으로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려 나의 생각을 기록한다고 하면, 그 대목에서는 상당한 이해심을 필요로 한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 마저 보낸다, 마치, 대단한 오해 내지는 캐스팅 실수가 이닌지 의아해 하는 것이다... 이 지구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28년 동안 산 경험을 토대로 얻은 교훈이라면, 옷이 신부를 만든다는 것이며 사제복 밑에 무엇이 숨어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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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9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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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언젠가 통화중에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 아빠가 없을때 말야....'라고. 그때 나는 앞뒤 생각도 없이 반사적으로 그런소리하지 말라고 덜컥 화부터 냈다. 하지만, 엄마는 초연해진 음성으로 '언젠가 겪게될일 너도 이제 생각해야 한다'던 말에도 소리 소리를 지르며 말문을 막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게 있어서는 안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규정짓고 강력하게 항의했던 순간들이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으며 문득 깨닫는다. 나는 이제껏 한번도 경험해본적 없는 '죽음과 이별'이라는 감정을 엄마는 이미 오래전에 엄마의 엄마로부터, 혹은 엄마의 아빠로부터 이미 경험했노라고. 그 지옥같았던 순간들을, 예고없이 찾아오는 악몽같은 순간속에 남겨질 자식들에게 엄마 스스로 삶을 정리하듯 이야기하며 일찍 노출시키는 것임을 깨닫는다.

 

 

나는 아직 '죽음'에 대한 느낌을 이해하지 못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적 의미 즉,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나 가족에게서 나타날 수 있고 그 고통스런 터널은 끝이 없음을 머리로만 이해 할뿐이다. 그런데 롤랑 바르트의 일기를 읽으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란,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하면 끝내 살아갈 수 없는 처연한 고통의 실체임을 느낀다.

 

 

' 애도: 그건 (어떤 빛 같은 것이) 꺼져 있는 상태, 그 어떤 '충만'이 막혀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애도는 고통스런 마음의 대기 상태다: 지금 나는 극도로 긴장한 채, 잔뜩 움크린 채, 그 어떤 '살아가는 의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p90

 

'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들로 바라본다. 그런데 그 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결코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p62'

 

 

나는 책을 읽기 전부터 단단히 마음에 빗장을 걸어 잠궈뒀다. 이 책은 롤랭 바르트라는 사람이 자신의 엄마를 애도하기 위해 작성된 일기일뿐이라고,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나의 엄마와 아빠는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갈꺼라는 헛된 꿈을 간직한채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그의 처연한 슬픔을 조금씩 들여다보며, 그가 느끼는 슬픔에 조금씩 침몰하며 이미 정해져있는, 인간으로써 거스를수 없는 굴레가 있음을, 그 굴레가 언젠가는 찾아오게 되리라는 슬픈 예감에 전율하게된다.

 

 

' 슬픔 '

우울을 앞세워 무거운 마음을 약물에게 맡겨버리는 짓은 있을 수도 없는 천박한 짓거리다. 마치 이 무거운 마음이 무슨 병인 것처럼, 무슨 '집착'인것처럼. 그건 모두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자기 방기일 뿐이다. 이 무거운 마음이야말로 나만이 알고 있는, 나만이 갖고 있는 나의 재보임에도 불구하고...."p173

 

그리고 또 깨닫는다. 그런 슬픔에 침몰하는것은 어떤 병적인 집착도 의미도 아니라는 것을. 온전히 슬픔 앞에 벌거벗겨진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그런 의미에서 롤랑 바르트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뒷면에 실린 '해설'편에 '바르트의 슬픔'이란 제목의 글에 서글픔을 느낀다. 한 인간으로써, 평생 끊을수조차 없는 탯줄로 연결된 자식과 어미의 순수하고 순결한 마음을, 프로이트의 이론을 들어 낱낱이 해부해내는 '현대'인들의 시각이란 무엇인가. 그가 고통을 거스를 수 없는 한 인간으로써 처절한 슬픔과 고통의 아릿함을 우리는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현대'라는 잣대는 이렇게도 잔인스럽게 한 사람의 인생을 마음대로 조각 조각 내며 뭔가 끊임없이 갈구하는 탐욕적인 시선으론  절대로  롤랑 바르트의 슬픔에 침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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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여행 - 내가 꿈꾸는 강인함
정여울 글.사진, 이승원 사진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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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 근래에 알레르기성 결막염으로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물었다. 성인은 이렇게 시력이 떨어질 일이 없는데 왜 이렇게 떨어지는거냐고. 지난번보다 조금 더 시력이 떨어진 모양이였다. 의사선생님은 시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컴퓨터와 휴대폰 사용때문이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아니라는 대답을 하면서도 차마 책때문이라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무슨 고시공부를 하는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책을 보느라 시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비웃을까? 걱정스런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으면서도 나는 차마 손에서 책을 완전히 놓아버리진 못했다. 처음엔  그저 재미있어서 시작된 독서가 이젠 습관이 되어버렸고,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나는 나를 지탱해주는 습관이 독서와 글쓰기임을 얼마 전에 알았다. 아무리 힘들 때도, 아무리 아플 때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습관이 몸에 젖어버렸다. 예전에는 그것이 '좋아서하는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단계를 넘어 글 읽기와 글쓰기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만약 여러 가지 이유로 글을 쓸 수 없다면, 글을 쓸 수 없을 체력과 영감이 소진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독자로서의 삶은 버릴 수 없을것만 같다. 열렬한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삶의 희열까지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살아있는 느낌'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p182"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독자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정여울 저자의 말처럼 나 역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 좋은 독자로서의 삶을 평생 포기할 수 없을것만 같다. 삶은 내가 나를 데리고 가는 '그림자 여행'이라던 그녀의 속삭임처럼, 삶을 이끌어가는 내가 선택하지 못한 수 많은 일에 대한 불안감이 소망으로 변절되어 더 많은 집착과 간절한 소망들로 뒤바뀔지라도. 

 

 

' 오직 달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오래전 칠흑 같은 밤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나는 오로지 캄캄한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꽃들의 사생활을 목격했다. 달빛 아래 고요히 드러난 처연한 낙화의 풍경은 할로겐 조명 아래 다이아몬드 보다 더 눈부셨다. 그때 나는 눈을 아프게 하는 압도적인 불빛이 아니라, 사물이 지닌 본래의 빛깔을 끌어내는 '어둠속의 빛'을 보는 법을 배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어엿한 빛깔이 있었다"p175

 

' 가장 알찬 여행 준비 중 하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고향을 고른 뒤, 그의 작품을 차분히 읽는 것이다. 어떤 여행 준비보다 값진 마음에 워밍업이다. 프라하에 가기전 카프카를 읽고, 런던에 가기 전 디킨스를 읽고, 파리에 가기전 위고를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여행은 더욱 풍요롭고 따스해질 것이다. p171'

 

그녀가 읽은 책들, 그녀가 걸었던 산책길들, 그녀가 여행하며 느낀 낯선 공기들의 나라를 나도 꿈꾸게 되는 간절한 소망들. 그런 소망 앞에 밤길이 두려워 산책을 나서지 못하고, 낯선 공기가 두려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내게 그녀의 그림자는 너무 아름답고 찬란하고 멋져보였다. 그 자유로운 그림자 속에서 스스로 옥죄고 있던 걱정과 불안들로 점철된 내 그림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내가 하지 못할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는 기준은 온전히 내가 정하는 것임에도 마치 다른 기준이 있는냥 핑계대고 숨어버리는 못난 내 모습들.

그러니 소망한다. 나를 옥죄는 나로부터 벗어나 무한한 세계를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작가의 집을 찾아가고, 좋아하는 밤산책을 다녀오고, 좋아하는 책들을 마음껏 읽고 마음껏 느끼게 될 수 있기를.

 

 

실은 정여울 저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던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 작은 편견 때문에 이렇게 좋은 이야기들을 놓칠뻔한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한 마음이 든다. 인생 도처에 고수가 있다던 유홍준 교수님의 말씀처럼, 그녀역시 그녀가 살아내는 삶에 있어 누구보다 훌륭하고 멋진 고수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 작가 너무 좋아~' 라는 외침을 자제하자고 생각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좋아지고 닮고싶은 작가가 너무나도 많은고로 너무 헤퍼보이는 독자는 되지 말자고, 소리없이 묵묵히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듬직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열렬한 독자가 되어보자고  생각해본다.  무튼 그녀가 꿈꾸는 노년의 모습까지도 닮아가고 싶은 나는 그녀의 이야기로 마무리 한다.

 

 

 

' 저 모습이 내 30년 후였으면' 하고 꿈꾸게 만드는 얼굴들이 있다. 자기 안의 세계에 깊이 침잠한 얼굴로 책을 읽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무턱대고 닮고 싶어진다. 나도 저렇게 고요하게 늙어가고 싶다. 나도 저렇게 당당하게 늙어가고 싶다. 책을 읽는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떤 고결함과 위엄이 뿜어져 나온다. 세상 누구도 그녀만의 책 읽는 시간을 방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깨달았다. 강인함이란 곧 고결함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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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9-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건강 조심하셔야 됩니다. 저는 군대 가기 전만 해도 밤새서 책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새벽에 책을 읽으면 눈이 피로해져요. 그래서 눈 건강을 위해서 수면을 일찍 취하는 편입니다.

해피북 2015-09-16 18:10   좋아요 0 | URL
맞아요 cyrus님!! 이젠 나이를 무시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예전에는 늦게까지 읽어도 종이에 눈이 부셔보이거나 하진 않았는데 요즘은 좀 피곤하다 싶으면 눈이 먼저 반응하는거 같아요 ㅜㅜ 수면을 일찍 취하신다니 저도 수면시간을 조금 앞당겨봐야겠어요 ㅎㅎ 그리고 cyrus님두 결명자나 블루베리 많이 챙겨드세요 ^~^

프레이야 2015-09-15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솔하고 멋진 리뷰에요 해피북님. 담아갑니다. 표지도 참 단정하니 좋습니다. 저도 요새 눈이 부쩍 피로해요. 컴과 폰 영향이 크겠지요. 간이 나빠져도 그렇다고합니다

해피북 2015-09-16 18:1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칭찬해주시니 부끄러워요 꺅~~!! ㅎㅎ
아무래도 책을 읽고 컴퓨터와 폰 사용이 잦다보니 눈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거 같아요
간이 나빠도 시력이 나빠질 수 있다니 ㅜㅜ 눈과 간에 좋은 영양제를 챙겨먹어야겠어요.
프레이야님도 눈 피로가 많으시다니 함께 챙겨먹어요 ㅎㅎ 저녁 식사 맛있게 드세요^^

yureka01 2015-09-1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리산히산할 때 늦어서 달빛에 걸어 본적 있죠.그냥 짜릿.ㅎㅎ요즘 말로 심쿵이라고도 합니다.눈은 몸이 백냥이면 구백냥...조심하셔야죠.

해피북 2015-09-16 18:17   좋아요 0 | URL
와~~ 달빛에 걷는 지리산길은 얼마나 멋질까요? ㅎㅎ 심쿵이란 단어가 참 설레이가 하는것 같아요^^
몸이 백냥, 눈이 구백냥 꼭 명심해야겠어요 ㅎ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저녁 식사 맛있게 드세요^~^

인디언밥 2015-09-1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때문은 아니지만.. 저도 인공눈물을 달고 살아요. ㅜㅠ 매일 웁니다

해피북 2015-09-16 18:18   좋아요 1 | URL
에궁. 인디언밥님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시겠어요.
인공눈물 사용하는것만 해도 눈이 피로해지는 느낌이더라구요 ㅜㅜ
인디언밥님두 결명자차와 블루베리를 많~~이 챙겨드시면서
구백냥짜리 눈을 지켜보아요 ㅎㅎ 맛있는 저녁식사 하세요^^

[그장소] 2015-09-16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빛에 글을 읽는다는 말을 실감하는 리뷰이지뭐예요?!^^

해피북 2015-09-16 18:20   좋아요 1 | URL
오호호호~ 눈빛에 리뷰를 읽으셨군요 ㅎㅎㅎ
저녁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장소님^^

hnine 2015-09-16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기 전에 한번도 눈여겨 본 적 없는 책이었는데, 안 읽어볼 수 없게 쓰셨네요. 저 지금 주문하러 가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제가 읽기 딱 좋은 책 같아요.

해피북 2015-09-16 18:23   좋아요 1 | URL
아궁 도움이 되셨다니 기뻐요 hnine님! ㅎㅎ
지난번 김서령님을 소개해주셔서 저 역시 정말 재밌게 읽고
좋았는데 hnine님께도 좋은 책이 되기를 바랄께요!!
맛있는 저녁식사 하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