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하루 일본문학 컬렉션 4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외 지음, 안영신 외 옮김 / 작가와비평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일본문학 대표작가라고 할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 여러 작가들의 수필 모음이다. 그중 하기와라 사쿠타로 등 몇몇 작가는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수록된 글이 많고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아서 시선을 끌기도 했다. 여기에 실린 수필들은 몇 가지 주제로 나뉘어 있는데 작가의 문학관이나 소소한 일상의 행복, 옛 추억, 인생을 살면서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철학,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핑크톤의 표지 디자인과 눈부신 하루라는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4월이라는 계절만큼 눈부신계절이 또 있을까. 겨우내 굳게 다물고 있던 나뭇가지의 눈은 앞다투어 연두색 새싹을 경쟁이라도 하듯이 밀어내고 있다. 작가들이 말하고 있는 그들의 일상은 언뜻 보면 눈부신 하루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창작의 고통을 에누리 없이 털어놓고 병상에서 깨달은 소소한 행복, 죽음에 대한 철학 등 작가들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숙연해지면서도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창작의 고통이란 작가로서 누려야 할 특권이며 작은 행복이 아닐까. 다자이 오사무는 의무를 수행하기위해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천재 작가가 한다는 말이 다섯 장 정도의 수필을 쓰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푸념한다. 나흘 동안 다섯 장 정도는 어떻게든 쓸 수 있고 써야 하고 그 의무감 때문에 살아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그의 귀여운 타박(?)에 웃음마저 흘렀다. 천재 작가가 그럴진대 보통의 작가들은 어찌하라고.

 



나의 최애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원래 뭔가를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거의 주변 지인에 의해 글도 쓰고 교사가 되고 유학을 떠나고 신문사에 들어가고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 이루어졌다면서 결국 라는 자신은 주위 사람들이 만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듣고 보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이것도 겸손이다. 여러 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책임감과 소명 의식이 있었기에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작품을 길이 남겼던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홀로 고독과 싸우며 많은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오랜 병상 생활도 작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마사오카 시키의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시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병상 생활을 하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현대인도 그렇지만 100년 전에도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나 보다. 그런데 병에 걸리고 나서 그러한 삶의 초조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욕심없는 마음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모든 의무감과 초조감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대고 염치없이 누워 있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작가의 말이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아 힘이 솟았다. 4월이 되자마자 내가 호되게 앓았기 때문이었다. 내 몸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고 보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꿈과 목표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평범함을 평범한 필치로 쓴다

지루함을 지루함의 느낌으로 쓴다’(p46)

 



이것은 시키를 비롯한 자연파 문학의 주장인데,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눈에는 도대체 무슨 흥미를 위해 이런 문학이 만들어졌는지 수수께끼였다고 한다. 동병상련이라고 병이 들어 아파보니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삶에서 건져 올린 시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단다. 큰 감동을 주는 것, 시적 정열이 불타는 것보다는 다실에서 들려오는 쇠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즐기게 되고 평범한 것에서 시적 풍취를 느끼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이치란 참 신기한 것 같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주변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고 어떤 것을 이해하는 계기도 되니 말이다.

 



에도가와 란포는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동생의 일기장>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았다. 혹시나 사랑도 못 해보고 스무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건 아닌가 싶어 동생을 그리워하며 그가 남긴 일기장을 읽게 된다. 동생이 먼 친척 유키에와 주고받은 편지를 마치 암호를 풀 듯 분석해서 결국 알아냈는데, 아뿔사! 자신이 너무나 이기적이었음을 통탄하며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친다.

 

시마자키 도손의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은 인생을 살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둡고, 불편하고 두려운 일들을 의인화 기법으로 쓴 글이다. 손님은 겨울’, ‘가난’, ‘늙음’, ‘죽음이다. 초대하고 싶지 않고 초대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불청객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슬기롭게 나이를 먹고, ‘죽음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며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않는다.

 



<한신 견문록>은 여기 실린 다른 수필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오사카와 고베를 여행한 소회를 밝히는 이야기인데 100년 전의 당시 문화 수준을 엿보게 한다. 오사카에서 전차를 탔는데 아이에게 소변은 물론 똥까지 싸게 했다는 엄마 이야기가 나온다. 신문을 들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빌려가고 돌려주지도 않는 등 예의없는 오사카 사람들을 신랄하게 흉을 본다. 도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얘기라면서. 작가들의 기록이 있었기에 알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지 않은가.

 



위대한 작가들도 모두 나름대로 고민거리가 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힘겹고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괴롭다고 한다. 의무감이나 사명감이든 생활을 위해서건 어떻게든 삶을 꾸려나가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가 눈부신 하루는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하는 눈부신 하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들의 일상을 엿보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는 건 왜일까. 특별한 존재일 것 같은 작가들의 삶도 한 발 더 들여다보면 자연인인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0개의 단상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서제인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서 읽은 세라 망구소의 망각 일기와 세트로 나온 책이다. 이 글들은 짧은 생각을 표현한 300개의 단상을 모은 글이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200개의 글은 15년 동안 쓰려고 애쓰던 다른 책의 집필을 미루는 과정에서 쓰였다고 한다. 여기에 100개의 단상이 더해져 이 책이 된 셈이다. 주제는 대략 자아, 타인들, 욕망, 예술, , 실패, 죽음이라는 일곱 가지 주제로 분류할 수 있다. 유머와 재치가 느껴져 공감할 수 있는 문장도 있지만 당혹스러운 얘기도 만날 수 있다. 또 한 번 읽는 것으로 의미가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있다. 어쩌면 약간은 격언처럼 들리는 강렬한 글도 있어서 그런 문장은 따로 적어두고 되새겨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내게 좀 더 다가왔던 문장들을 소개해 보겠다.

 



우리 집 근처에 사는 물새들은 마치 중학생 같다.

검둥오리들은 목소리가 갈라졌고, 갈매기들은 오리들을

못 살게 굴고, 방금 치아 교정기를 낀 듯한 백로는 자존심

상한 얼굴로 혼자 서 있다.’(p8)

 



우리가 지닌 최악의 모습을 남들에게 보일 때의 문제는 그 모습을 남들이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기억하게 된다는 사실이다.’(p25)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서 놓여나자 내가 가진 두려움들은 더 이상 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들을 짐이 되게 만든 건 희망이었다.’(p25)

 



나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를 통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를 갖는 일을 사랑할 뿐이다.’(p27)

 



천천히, 천천히, 나는 문장들을 쌓아 올린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그렇게 쌓아 올리다 보면 갑자기 이야기가 거의 완성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다.’(p28)

 



우리가 처음으로 들은 아름다운 노래는 시간이 흘러도 아름답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보다 좋은 건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한 기억이기 때문이다.’(p31)

 



나는 사관학교 학생들이 게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그저 두려움 없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쟁에 나가려고 준비 중인 그들은 낭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심이다.’(p39)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자기 삶 한구석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여기저기로 골고루 분배한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다.’(p41)

 



친구는 선택할 수 있지만 친구와 어떤 관계가 될지는 선택할 수 없다.’(p45)

 



의지가 있으면 우리는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다만 의지를 쏟을 만한 일이 어떤 일인지 알아내는 데 의지를 다 써버리게 된다.’(p74)

 



엄마가 되고 나서 나는 더 외로워지는 동시에 덜 외로워졌다. 내가 덜 외로울 때는 이 특별한 외로움을 함께 느껴온 이름 없는 타인들, 알려지지 않은 수십억 명의 여성들을 떠올릴 때다.’(p99)

 



우정, 결혼, 부모 됨, 자기 자신의 삶, 이런 것들처럼 끝나는 지점이 어딘지 알려져 있지 않은 일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헌신이다.’(p103)

 



인용 문장에서 보듯이 세라 망구소는 다양한 주제의 단상을 글로 썼다. 그중에서도 사물을 보고 느낀 생각은 물론 글쓰기에 대한 생각, 기억에 대한 생각, 여성으로서 삶을 꾸려가며 느낀 통찰은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읽었던 계속 쓰기의 작가 대니 샤피로 등 여러 작가들과 매체의 추천의 말도 실려 있다. 이런 글쓰기도 책이 될 수 있구나, 참신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편안한 에세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약간의 호불호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요즘은 유튜브 등 영상의 발달로 인해 긴 글을 읽기 어려운 시절이기도 하다. 곁에 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부담이 없는 분량의 책이다. 물론 거기에 담긴 단상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을 기꺼이 즐기려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오 2023-01-06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천천히 문장들을 쌓아 올린다˝는 말이 좋습니다.
<망각 일기>부터 사야하는데... 이 페이퍼 읽고 <계속 쓰기> 검색해보니까 이것도 재밌어보이네요. 저는 근데 은근 아포리즘이 안 맞더라구요. 몰입해서 계속 이어 읽고 싶은데 짧으니까 오히려 더 집중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ㅋㅋㅋ

모나리자 2023-01-06 23:52   좋아요 1 | URL
네, 긴 글, 짧은 글 읽기에도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아포리즘 성격의 글은 글쓰기 할 때 인용 문장으로 적절하게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계속 쓰기>는 참 좋았어요. 공감하고 좋은 문장들도 많았지요.
반갑고 감사합니다. 은오님.^^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3-01-06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물새들 비유에서 빵 터집니다. ㅎㅎ

모나리자 2023-01-06 23:53   좋아요 0 | URL
그쵸.ㅎ 정말 재치 있어요.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바람돌이님.^^

젤소민아 2023-01-08 0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를 통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를 갖는 일을 사랑할 뿐이다.’(p27)===>정말이지, 공감해요. 글을 쓰면 없던 문제도 막 생겨...아니 떠올라서요 ㅎㅎ 좋은 책 리뷰 감사해요! 사러 갑니다~~

모나리자 2023-01-10 07:31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지요. 마음이 복잡할 때도 글을 쓰다보면 풀리기도
하는 경험을 자주 하니까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리뷰가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기쁘네요.ㅎㅎ
감사합니다. 젤소민아님.^^
오늘도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망각 일기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양미래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일기가 아닐까. 그런데 망각 일기라고? 망각 일기란 어떤 일기를 의미하는 걸까. 25년 전부터 일기를 썼다는 세라 망구소의 망각 일기에 대한 에세이다. 이 책을 읽기 전 흔히 보통 사람들이 쓰는 일기를 떠올렸었다. 하지만 읽어나가면서는 통념적인 일기와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 또한 초등학교시절부터 오랜 시간 일기를 써왔고 기록하는 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기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녀가 강박적으로 치열하게 써왔던 일에 대해서는 의아하고도 어떤 열정마저도 느껴졌다.

 



일기 없는 삶을 상상하면, 단 일주일이라도 일기 없이 사는 삶을 상상하면 순식간에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p7)

 



이 정도면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집착하고 목숨을 걸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녀는 왜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일기 쓰기에 사활을 걸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일기를 써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쓰지 않고는 시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을 단 한 가지도 떠올릴 수 없었다.’(p8)

 



일기 쓰기는 무엇을 생략할지, 무엇을 잊을지를 솎아내는 선택의 연속이다.’(p10)

 



어쨌든 일기를 계속 써나갔고, 계속 쓴 이유는 일기를 쓰지 않는 편이 더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의 악습인 셈’(p14)이라고.

 



잊지 않기 위해서 쓰는 일기지만 오래전에 쓴 일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자주 없다. 그런데 망구소는 전에 쓴 일기를 다시 읽으며 고쳐쓰기도 했단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일기를 썼다. 흔히 나를 포함하여 보통 사람들이 쓰는 일기란 쓰다 보면 넋두리가 될 때도 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낄 때도 많다. 그래서 쓰지 않는 것보다 계속 쓰는 편을 택했던 망구소의 말에 공감하는지도 모르겠다.

 



일기를 통해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꼭꼭 씹어 소화하고 차곡차곡 정리해. 그 시간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만일 내가 모든 시간을 과거에 대해 생각하는 데 써버린다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 나 자신이 생각만으로 시간을 멈출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니,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믿음인가.’(p89)

 



강박적으로 써나갔던 일기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은 완만한 여유를 찾은 듯 보인다. 임신과 출산으로 변화의 시기를 겪기도 한다. 보통 일기라 하면 지극히 사적인 고유의 영역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 에세이는 더 폭이 넓다. 출생, 결혼, 질병, 애도, 모성, 예술 등 삶과 죽음 등을 아우른다. 작가에 대한 어떤 고백록이나 회고록 성격의 감성 일기를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뒷부분에 <추천의 말> 들에서는 이 에세이의 성격에 대해 잘 대변해주고 있다.

 



망각 일기는 일기 쓰기를 실천하는 일에 대한 명상이다. 세라 망구소는 무언가를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추적한다. 망구소의 예술은 적은 단어로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그는 문장에 대한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 가디언’(p111)-추천사

 



일기 쓰기를 실천하는 일에 대한 명상이란 말에 무척 공감할 수 있었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일기는 무엇을 생략할지 무엇을 잊을지 솎아내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의 일기 쓰기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편적인 기록만 계속하고 있는 건 아닌지. 조금씩 시야를 밖으로 돌려 확장의 시선을 갖고 다른 테마의 글쓰기를 추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지금은 무엇이든 쓰는 시대다. 글쓰기가 브랜딩이 되는 시대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쓰며 살고 있을까, 궁금하고 배우고 실천하고 싶은 독자들이 읽으면 기록하는 일의 나아갈 방향을 안내해 줄 것 같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오 2022-12-30 0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이거 저를 위한 책인 것 같은데요? 궁금해집니다.

모나리자 2022-12-31 22:30   좋아요 1 | URL
앗, 반갑습니다! 은오님.^^
일기에 대한 얇은 분량의 에세이인데 글쓰기로서의 일기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주제의 글쓰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우리들의 일기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는 일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은오님.^^

그레이스 2022-12-30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는 무엇을 생략할지 무엇을 잊을지 솎아내는 일의 연속이라는 말!
끄덕끄덕, 감동입니다.

모나리자 2022-12-31 22:32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보통 일기를 쓰다가 넋두리를 쏟아놓다가 다른 길로 새는 경우도 많거든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레이스님.^^

억울한홍합 2022-12-31 0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까지 일기같지 않은 일기를 쓰고 있는데 일기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어요~~

모나리자 2022-12-31 22:33   좋아요 1 | URL
누구나 보통 사람들의 일기는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글쓰기 훈련이라 생각하고 그동안 쓰지 않았던 주제의 일기를 써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억울한홍합님.^^

서니데이 2022-12-31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님,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예요.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모나리자 2022-12-31 22:35   좋아요 1 | URL
네~서니데이님~
정말 1년이 금세 지나갔어요.
편안한 밤 되시고 새해 검은 토끼 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보초Veglia
치마 콰트로, 1915년 12월 23일

하룻밤 내내
학살당한 동료 병사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위협적인 입은
보름달 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 P99

퉁퉁 부어오른 손은
내 침묵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사랑이 가득한
편지를 썼다.
그처럼 삶에 꼭 매달린
적이 없었다"

주세페 웅가레티의 시 - P1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대인의 정체성을 정면에서 파악하려고 애쓴다. 부정, 신성 모독, 아이러니가 경건한 신앙의 태도를 대신한다. 그는 정의의 형태들을 모방한다. 성경 구절들은 왜곡되고 전도되어 구절들끼리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첼란은 절망의 근원, 모든 사물에 깃든 부재에 다가간다. 첼란의 <부정의 신학>에 대해 많은 말이 있어 왔다. 그것은 시편Psalm」의 첫 연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아무도 다시는 흙과 진흙으로 우리를 빚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의 먼지를 논하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는 그대를 찬미한다. 아무도 아닌 자여그대를 위해 우리는활짝 피어나려 한다.
그대를향하여. - P95

아무것도 아닌 것,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활짝 피어나며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 P96

 결국 첼란의 절망은 너무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그리하여 세상은 첼란에게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므로 더는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당신은 나의 죽음,
모든 것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나는 당신을 붙들 수 있으리라. - P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