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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민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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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제목으로 예상했던 내용은 나와 타인 사이를 헤아리고 공감하는 그런 이야기인가 했다. 그런데 번역 그 자체에 대한 얘기였다.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를 사랑하게 되고 2015년에 로마로 이주한다. 매일 그 언어로 말을 하고 새로운 표현에 친숙해지고 새로운 사람과 문화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그곳으로 이끌었다. 그곳에 도착한 날부터 어떻게든 자주 이탈리아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과연 외국어를 배우는데 최정석이 아닐까. 그런 여건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이 이야기는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번역을 사유한 글들의 묶음이다.

 



이 책에는 열 편의 에세이가 들어있다. 이탈리아어 연설문으로 작성했다는 왜 이탈리아어인가는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글을 쓸 때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았는데 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당혹감과 이탈리아어에 대한 사랑, 이탈리아어를 향한 자신의 꿈과 각오가 들어있다. 그저 이탈리아어를 어떻게 하면 자기의 언어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했지만 왜 이탈리아어를 선택했는지 스스로 질문한 적이 없었던 라히리는 그것을 사유하면서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쓰기에 이른다. 물론 이탈리아어로. 라히리는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고 했다. 언급한 이 책에는 세 가지 은유가 담겨 있는데 이탈리아 여성 작가 랄라 로마노와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 덕분이었다. 로마노의 첫 산문집 변신 Le Metamorfost에 나오는 Le Porte이라는 꿈 이야기를 통해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 과정을 사유한다. 인용하고 있는 문장이 너무나 공감되었기에 일부를 언급해 보겠다.

 



문은 아직 열려 있지만 곧 닫힐 참이다. 높고 육중한 한쪽 문짝이 천천히 다른 문짝 위로 떨어진다. 나는 뛰어서 틈을 통과한다. 문 너머에는 첫 번째 것과 똑같은 또 다른 문이 있다. 이 문도 닫히기 일보 직전이고, 이번에도 나는 뛰어서 통과한다. 다음 문이 있고 또 다음 문이 있다. (중략) 문은 하나씩 차례로 나타나는데, 모두 똑같은 문이다. 나는 아직은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부질없다. 항상 또 다른 문이 있을 테니.’(p32)(로마노의 에 나오는 꿈 이야기)

 



하나의 문을 통과하면 또 다른 문이 나오고 끝이 없이 빠져나가야 하는 악몽을 다룬 꿈이다. 이 꿈 이야기를 통해 라히리는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고 글을 써서 책이 나오면 독자라는 을 통과해야 하는 과정을 사유한다.

 



어떤 외국어든 그 언어를 정복하려는 사람은 두 가지 주요한 문을 열어야 한다. 첫째는 독해력, 둘째는 입말이다. 중간에 놓인 더 작은 문들, 이를테면 구문, 문법, 어휘, 의미의 뉘앙스, 발음도 무엇 하나 건너뛸 수 없다. 그것들을 통과하면 비교적 숙달된 수준에 도달한다. 나는 여기서 나아가 감히 글말이라는 제3의 문을 연 것이다.’(p33)

 



두 번째 은유도 랄라 로마노의 마지막 책 최후의 일기 Diario Ultimo를 거의 실명에 가까운 시력으로 유고집을 냈다는데, 자신도 새로운 언어로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실명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탈리아어를 선택하고 책을 썼지만, 태생적 한계에 대해 독자와 자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굳이 선택한 이유를 대답하자면 다른 눈을 키워보려고, 취약함을 실험해보려고한다고 라히리는 말한다. 세 번째 은유 접목은 엘레나 페란테의 세 번째 소설 잃어버린 사랑(2019년 번역본 출간됨)을 인용하며 이민 가정의 자녀로서 존재 자체가 아슬아슬한 지리적, 문화적 접목의 결실이라는 점, 글쓰기 주제도 그러한 경험과 트라우마였다. 접목이라는 단어는 줌파 라히리에게 있어 전진하게 해주고 자신의 과거, 시작점, 자신의 궤적을 서술해준다고 했다. 결국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문을 열고, 다르게 보려고, 다른 존재에 접목해 보려는 이유라고 글을 맺는다. 이 한 편의 에세이를 읽으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지적 통찰과 감성이, 그리고 언어에 대한 사랑,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 밖에도 병치는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작품에 발췌문과 서문으로 실린 글이고, 영문으로 쓴 에코 예찬, 기원문에 부치는 송가,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쓴나를 발견하는 곳, 앞서 언급한 스타르네노의 소설 트러스트의 후기인 치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이탈리아어 최신 완성판 출간을 기념해 에이나우디출판사와 그람시재단이 주최한 토론회의 발표문인 그람시의 트라두치온, 언어와 언어들, 이국의 칼비노가 들어있다. 모두 라히리의 열정과 진심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글이라 많이 소개하고 싶지만 읽을 독자를 위해 아껴 두려고 한다.

 



에세이마다 라히리의 이탈리아어에 대한 애정과 번역에 대한 사유가 진하게 묻어있다. 이중 그람시의 트라두치온에 대해 잠깐 언급해 보겠다. 이 글을 통해서 이름만 들었던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하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11년을 살았는데 그 당시 주고받은 편지 일기 등을 읽으며 라히리는 그람시의 삶을 조명하고 번역한다. 맞다. 번역이다. 낱낱이 해부하여 분석하고 해석하고 사유하는 과정은 그가 말하는 번역과 닮았으며 번역 그 자체였다. 이 글은 여러 핵심 단어를 주제로 하여 번역이 지니는 특성을 자신의 해석으로 설명해주는데 라히리가 얼마나 번역에 대해 열정이 있는지, 나아가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던 그람시를 향한 오마주라고 할 정도로 그와 그의 인생을 세세하게 되살려낸다. 번역이라는 텍스트를 얼마나 깊이 꿰뚫고 있는지 통찰이 엿보여서 전율이 일었다.

 



처음 읽은 줌파 라히리의 글 정말 좋았다. 이탈리아어를 사랑하게 되고 작품과 작가들과 친밀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얼마나 언어를 사랑하는지 외국어 공부에 진심인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스타르네노, 안토니오 그람시 등 작가의 작품과 편지글을 읽고 그들과 깊이 교유하는 모습은 한 편의 서정시를 보는 듯했다. 읽은 작품의 훌륭한 서평가였고 독자였고 번역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인간의 삶, 관계를 감지하는 통찰력에 정말 감탄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람시의 트라두치온에서 그람시가 옥중에 있었기에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기에 편지글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그람시의 사회적 존재를 번역이라는 텍스트로 사유한 문장이다.

 



번역은 두 텍스트, 개념, 현실, 순간 사이에 맺는 친밀하면서도 불완전한 관계를 암시한다. 그람시의 편지를 읽다 보면, 부인, 어머니, 처형, 형제, 자식을 비롯한 가까운 인물들과 그람시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면서도 불완전한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람시의 편지를 읽으면서 모든 대인관계가 번역의 한 형태로 읽힐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p157)

 



뱅골어와 영어를 썼던 다섯 살 때부터 이미 언어와 번역의 딜레마를 경험했다는 라히리에게 어쩌면 이탈리아어 공부는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어를 배워서 그 텍스트를 번역하는 것과 그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까지도 공부하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번역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는 줌파 라히리에게 한없는 존경심과 경외감이 들었다.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살면서 더 주의 깊고 적극적이며 호기심이 많은 독자, 작가,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없는 세상에서 살거나 글을 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당당하고 결연하게 나아가는 줌파 라히히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일본어 번역에 뜻을 두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고 있는데 나는 이만큼 번역에 진심이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공부하는 여정에서 내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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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2-25 1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나리자 님이 흥미롭게 읽었을 책 같군요.ㅋ

모나리자 2023-12-25 20:46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줌파 라히리가 언어공부와 번역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게 되었어요.
12월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편안한 한 주 보내세요. 페크님.^^
 
[세트] 참선 1~2 세트 - 전2권 참선
테오도르 준 박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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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을 좋아한다. 그곳에서는 급할 것도 없고 서둘러야 할 것도 없고 시간의 흐름도 다르게 느껴진다. 반복되는 일상생활에서 지친 마음을 좀 내려놓고 평온한 시간을 가져보라고 산사의 바람도 속삭여주는 듯하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스님의 낭랑한 염불 소리나 목탁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는 것도 그렇다. 무엇이 그렇게 산사의 풍경 속으로 이끄는 걸까. 오래 전에 읽은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쓴 현각 스님이 떠올랐다. 오직 진리, 즉 베리타스(Veritas)를 찾기 위해 애쓰던 벽안의 외국인이 숭산 스님을 만나 불교에 입문하고 수행하는 과정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그곳도 끊이지 않은 마음의 번뇌가 일렁이는 다른 모습의 사회라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참선을 주제로 이 책을 쓴 저자 테오도르 준은 미국으로 유학한 한국인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재미교포 2세이다. 그는 환산 스님으로, 방송에서 오랫동안 참선을 가르치기도 했다는데 TV와 담을 쌓고 살아서인지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앞서 현각 스님의 경우와는 불교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좀 달라서 왠지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진리를 찾다가 숭산 스님의 설법을 듣고 스님이 되고 싶었다는 경우에 비하면, 그는 마음속에 들끓던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나 어렸을 때부터 쌓여온 온갖 마음의 고통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계속되어,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송담 스님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마음속을 꽉 채우고 있던 질문들의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마치 한 편의 성장 소설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관점으로 타인들을 바라보기 마련이어서 그럴까. 화려한 스펙과 안정된 진로가 약속되었을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호기심을 갖게 된다. 다른 분야보다 종교계에 대한 입문은 더욱 그런 것 같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보통사람들의 삶에 회의적이었다. 또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아웃사이더로서 정체성을 고민했고, 풀리지 않는 인간 존재의 목적과 본성에 관한 의문으로 고통 받고 있던 듯하다. 이민자인 부모님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안전한 보금자리에서 살아갈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당혹감을 느꼈다는 것을 보면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수성과 이타심도 보였고 강한 것 같으면서 여린 마음으로 내면의 고통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인간으로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인간은 정말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질적 존재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이 있을까?

육신이 죽은 뒤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냥 영원히 사라지는 것일까?

우리 몸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던 어떤 것이 있을까?

인간은 정말로 어떤 존재일까?(1권 p40~41)


  그의 내면에는 항상 이런 질문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도 한번 쯤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생각이지만 대개는 더 이상 빠져들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승려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고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할 생각도 아니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선불교 모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송담 스님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졸업하기만을 기다린다. 송담 스님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정신을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한 절박함 이었다.


  10년간 묵언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송담 스님을 향한 저자의 마음은 마치 인기 아이돌을 향한 소년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2년을 기다린 끝에 친견하던 날, 스님의 아우라에 완전히 압도되고 이후 출가하여 수행자 생활을 하는 내내 마음속을 지배하게 된다. 스님을 향한 존경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선불교 모임에 참여한 부류에 세련된 젊은 대학생들이 많았던 것을 생각할 때 딱히 종교라는 이미지보다는 문화로서 향유하지 않았나 싶다. 내면의 고통을 치유하겠다는 일념으로 송담 스님을 만났지만 스님은 그것을 말이나 개념으로 전달할 수 없고 참선 수행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도와 줄 수는 있다는 말을 듣는다. 어차피 세상의 어떤 공식 같은 삶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참선이라는 생각에 이르러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분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 삭발을 하고 절에서 발우 공양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불경을 소리 내어 일고 각종 의례를 진행하는 방법을 배워나간다. 한국어도 한자(漢子)도 몰랐던 상황에서 스님의 법문이나 전문적인 불교용어를 어떻게 다 익혀나갔을까. 배움에 대한 지원이 없어서 혼자서 터득해야 했기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일상의 활동들을 해나가면서도 종종 낯선 자신을 발견한다. 권위와 복종을 보았고 폭력적인 기운 속에 숨겨진 두려움과 절망을 발견하면서 동료애를 느끼기도 한다. 그들과 자신의 공통점이 있다면 세상이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 아파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밖에도 전통적인 종교 문화의 측면에서 알지 못하는 것믿는 것사이의 혼란으로 힘들어 하며 연극적으로 보이는 종교에 위선을 느낀다. 한 달에 한번밖에 볼 수 없는 송담 스님을 학수고대하며 보낸 순수한 마음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송담 스님에게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하는 부분에서 묘한 연민이 느껴졌다.


  참선, 하면 고요한 법당에 정좌하고 있는 수행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수계를 받은 지 2,3년이 지난 어느 날 방송실에 망연하게 앉아 있다가 송담 스님과 마주친다. 반갑기도 하고 내면의 갈등을 들킨 것 같아 복잡한 마음이 된 환산 스님은 자신을 바라보는 송담 스님의 표정을 감지한다. 흐뭇한 애정, 염려와 연민, 약간의 슬픔까지 깃들어 있는 그 표정을. 항상 제자의 내면을 꿰뚫는 듯이 간파하고 있던 송담 스님은, 뭐든지 배울 수 있는 세상이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 있다며 이야기를 꺼낸다.



속상할 때나 화가 날 때나 슬플 때나 두려울 때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때는 어떻게 해야 해?”

                                            (1권 p158)


  참선이 필요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참선은 수행자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정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속상해도 화가 나도 아닌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을 풀지 못해 앙금을 쌓으며 세월을 보내지 않았는가. 인간관계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감정의 상처를 수도 없이 받는다. 그때그때 바로 밀어낼 수 있다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정신의 건강을 온전히 지켜내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우리가 이뭣고?”를 읊조리며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은 마치 자동차를 타고 흙먼지 속을 달릴 때 먼지로 뒤덮인 유리창을 와이퍼로 한 번 닦아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정말 간단한 한 번의 작동으로 앞이 환해지듯이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을 참선으로 막을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참선에는 요중선(움직이는 참선)과 정중선(앉아서 하는 참선)이 있다고 하는데 일상생활에서도 참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 놓으면 스트레스, 충격 등 정신적인 안정을 빨리 되찾고 평화로운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명상법은 참선 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올바른 자세, 올바른 호흡, 올바른 생각 이렇게 세 가지면 어디서든지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원래 참선의 기본자세는 가부좌 자세지만 현대인이 실천하기에는 어려운 자세이므로 의자에 앉아 참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권한다. 이 자세는 학교, 직장은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도 스트레스와 불안한 마음을 제거할 수 있는 실시간 참선이며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참선법이라는 것이다.


  그 방법은, 준비단계로 감정 치유를 위한 호흡을 먼저 하고나서 본 호흡으로 들어가는데 복식호흡을 하면서 이뭣고라는 화두를 들어 질문하면 된다이뭣고이것이 무엇인가?’ 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이 화두를 던지는 이유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내면의 이것에 대해 알고 싶고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란다. 짧은 말의 이뭣고가 리듬감 있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도 모르게 이뭣고를 읊조리곤 했는데 뭔지 모를 붕 떠있는 듯한 불안한 마음들이 사라지고 평온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챙김 명상[ mindfulness meditation ] 이 떠오르기도 했다. 자신의 속마음이 변화되어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일상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뭣고는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화두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기 전에 그러지 않도록 막아주는 경고등처럼 말이다. 감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순간에 이뭣고를 말하며 현실로 돌아와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참선을 활용하면 좋을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문명의 혜택 속에 살고 있지만 그에 비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많은 업적을 올려야 대우 받는 세상이다. 삶이라는 과정 자체에서 마주하는 외로움, 우울, 불안, 중독적인 생활습관, 갈망과 혐오, 화와 집착 등 온갖 감정을 마음속에서 물리치는데 사용할 수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없애버릴 수 있는 예방 차원의 개인 맞춤형 정신 건강 프로그램이라고 하니 배워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마음에 남는 문장들>


우리는 건강을 위해 몸을 깨끗이 유지해야 한다는 건 알면서 왜 마음에 대해서는 그리지 않을까?”(P182)


'참선은 살아가는 방식이다.’(P248)


양동이가 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올바른 해결책은 안에서 구멍을 막는 것이다. 바깥에서 막으려고 해서는 소용이 없다.”(P315)


'참선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억누르는 대신에 그 불안의 에너지를 연료처럼 이용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면 이뭣고?” 화두에 더 강렬하게 집중할 수 있다. 사실 이 죽음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참선이 정말로 생명력을 갖게 된다.’(P320)

                                  -이상은 1-


참선으로 각자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참선을 통해 우리 모두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2P257)


  맑고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참선부터 사는 동안 두렵게 여겨지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참선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일상생활에서 조용한 참선과 활동적인 참선이 균형 있게 이루어지면 우리의 몸과 마음 정신은 평화롭고 맑은 상태가 될 것이고, 세상이 조화롭고 나아가서 우주와도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참선을 접하게 된 초심자라면 인내심을 갖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 매 순간을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수시로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마음의 평온을 유지 할 수 있으며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행복하면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는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작용으로 인해 베푸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 국가, 세계로 넓혀갈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평화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참선이 추구하는 미래상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 두 살의 청년은 송담 스님을 만나 영감과 감동을 받고 그분처럼 되고 싶었던 환산 스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30년 가까이 수행자 생활을 하는 중 7년 전에 활구 참선을 가르치라는 송담 스님의 권유로 TV방송을 시작하며 유명세를 얻고 성공적인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보다 앞서 이미 환산 스님의 마음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출가하게 되면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절의 운영방식에서 군대라는 조직의 모습을 보았고 비영리 중소기업에 취직한 것처럼 느껴졌단다. 자신이 싫어했던 세상의 모습을 피해서 왔는데 절에 와서 다시 만났다고 할까. 계파와 파벌이 생겼다 흩어지고 불만과 갈등, 경쟁과 논쟁, 동정과 연민의 감정들, 일반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나 싶다.


  TV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광대라 여기며 환멸을 느끼고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 했던, 원래의 자신의 삶으로 돌아 갈 결심을 한다. 당시 척추전방전위증이라는 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터라 여러 보직에서 물러날 이유도 타당했지만 심경은 복잡해 보인다. ‘물과 산소같은 존재였던 스님에 대한 애착과 추종자노릇을 그만 두고 떠나야 한다는 확신 사이에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다. 불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스님을 믿기 때문에 스님이 되었고 자신은 언제나 송담 교도였다는데. 믿었던 사람, 믿었던 세계에서 빠져 나오며 무엇을 보았을까. 마치 환상에서 깨어난 것처럼 황망하게 느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슬프면 이상하게 그 슬픔 한가운데서 기쁨이 느껴진다. 온 힘을 다해 꽉 붙들고 있던 뭔가를 잃어버리고 나니 아니, 놓아버리고 나니 비로소 주위의 모든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니었다.(2-p57)


그 정원에서 마침내 깨달았다. 성인이 된 후로 줄곧 엉뚱한 곳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기준과 관점에 연연해왔다는 것을. 더 나은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땅속에서 금을 찾다가 결국 그 땅을 놓쳐버린 꼴이다.(2-p75) 



  한때 무관심했던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 살아가기 위해 가게를 열고 출근을 하기 위해 서두르는 사람들을 보며 진짜 살아가는 모습을 느끼게 된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있을 때는 주위의 사정이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평범함에서 새로움을 발견한 것이다. 절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거기서 대부분의 청춘을 보냈으니 그 감회도 남다를 법하다. 요가를 배워 참선에 접목하기 위해 발리와 우붓을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린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오래 걸렸고 편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 등,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부모를 두고 떠난 긴 세월을 뒤늦게 안타까워하고 승려로 살았던 30년을 놓아버린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 여행의 과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삶을 맞이하여 앞으로의 삶을 새롭게 맞이하기 위해 치르는 통과의례의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자는 다소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종교에 귀의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에서 빠르게 회복하도록 돕는 참선을 우리의 삶에 포함시키는 방법을 나누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혁신과 자기 진화의 혜택을 누리도록 돕는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고도의 경쟁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도 없다.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상태에 처했을 때 참선을 배워서 실천한다면 위기도 극복할 수 있고 좀 더 행복하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진정한 참선은 일상생활을 벗어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것이다.” 

                                                           -본문 중-



  나는 1년 반 전부터 108배 운동을 하고 있다. 무릎에 무리가 오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지만, 심신 건강에 탁월하다는 한의사의 체험 이야기를 읽고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했던 때는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7월이었는데 약 100일 정도를 하루도 쉬지 않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내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의식적으로 일주일에 세 번 정도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횟수는 세지 않고 15분 내외로 몸을 굽혔다 펴는 동작을 반복 하다보면 몸도 따뜻해지고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마음의 평온은 물론 근육 단련에도 좋은 효과를 보았다. 참선은 복식호흡을 하며 내면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생각되는데, 두 가지를 적절히 활용한다면 심신의 건강에 더욱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30년 가까이 한 사람과 한 세계를 믿고 따르며 살아가다가 그 세계에서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믿고 사랑했던 스님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그의 끝과 시작을 아름답다고 혹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가볍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 사람이 인생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선택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고 각자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에게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추종자로서 살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곳에서 살아가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았을 것이다. 참선을 화두로 이 책을 쓴 것도 자신의 지난날을 통해서 변화된 삶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계획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영감과 사랑을 받았던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지금은 21세기 도시 수행자가 되어 참선을 가르치고 강연을 하는 등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굽이굽이 세월을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앞으로의 삶이 더욱 의미 있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보통사람들의 행복은 물론 온 인류의 안녕을 위해 참선을 널리 알리고 소통하는데 이바지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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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집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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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선생님께

 

  우연히 선생님이 나쓰메 소세키의 열혈 팬이라는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관심작가가 되었습니다. 일종의 친밀감에 이끌려 편지를 써 봅니다. 만약 나쓰메 소세키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선생님과 함께 얼마나 훌륭한 이야기 친구가 되었을까 엉뚱한 상상도 했답니다. 작고 얇은 사이즈의 책을 받고는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몹시 궁금했습니다. 책 표지의 노부부와 고양이 두 마리가 고원 숲 속 오솔길을 걸어가는 장면은 참 평화로워 보입니다. 부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일본의 알프스로 불리며 여름의 휴양지로도 각광을 받는 곳이라는 얘기를 듣고 전부터 가보고 싶었거든요. 서문과 역자 후기를 읽어보다가 다 읽고 말았네요.

 

  서문에서 마마보이라는 단어를 접하며 웃음이 났고, 어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먹먹해졌습니다. 재일교포 1세의 삶에 대해서는 시대극이나 책에서 접한 정도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차마 짐작도 할 수 없겠지요.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수집한 고철이 조국의 형제들을 살상하는 탄약으로 바뀌는 아이러니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밤에는 눈물 흘리며 친척을 걱정해야 했다는 부모님의 삶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아렸습니다. 당시 수많은 재일교포들의 삶이기도 했겠지요. 이런 혹독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사람은 걸어 다니는 식도라는 신념으로 가족들을 위해 제철음식을 마련하는 과정은,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생명력을 나눠주신 어머니 덕분에 건강하게 살고 계시다고 하셨지요.

 

사람은 말이데이, 알몸으로 태어나가 알몸으로 죽는기라. 너거 아부지도 그랬고 나도 그렇데이.”

글자를 읽을 수 없었던 어머니가 남긴 말과 표정은아니, 어머니에 관한 모든 기억은 1만 권의 책 이상으로- 비유하자면 나쓰메 소세키나 막스 베버 이상으로- 지금의 나를 지탱한다. 닥쳐올 겨울을 어떻게 대비할지는 어머니에게 배우면 되는 것이다.(P9)

고난 속에서도 어머니의 헌신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전에 읽은 선생님의 저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통해서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겪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역시나 이 글 곳곳에도 그 슬픔의 얼룩이 가득했습니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요. 기억도 나지 않는 언니가 있었다는 것을 철든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번 씩 들렸던 엄마의 통곡소리가 떠올랐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슬픔이 자식을 가슴에 묻은 슬픔이 아닌가 합니다.

 

  한 땅에 온전히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쪽과 저쪽에 발을 걸치고 마음이 분산되는 삶, 고단하신 삶을 살아오셨구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20대 독일 유학중에 무고하게 희생되어 죽어가는 광주시민을 보고 마음 저리며, 이러저런 상황에 맞닥뜨렸던 차별을 견뎌야 했던 삶, 정치인들의 보복이 되풀이되는 한국의 현실을 마음 아파하고, 한일관계, 남북관계 악화의 분위기에서도 마음을 졸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생을 살얼음 위를 걷듯 살아오신 인생이 아닌가, 평범한 우리로서는 나라 걱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으면서도 나만 힘든 것처럼 무사안일하게 살고 있었구나 싶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틈에서 눈치를 보며 갈피를 못 잡는 어린아이의 심정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요. 선생님을 비롯하여 고국의 안위를 걱정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이 만큼 사는 나라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나쓰메 소세키와의 인연이 되었던 이야기는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소세키가 교직생활을 했던 제5고등학교(현 구마모토대학)에서 놀았고 산시로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연구실에서 15년을 보냈으며 같은 안과까지 다녔다니요. 저도 작년에 도쿄 대학의 산시로의 연못과 소세키의 산방 기념관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겨진 장소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 같아요. 중학교 친구들과 가출하여 도쿄를 보고 산시로에 묘사된 것과 비슷한 느낌을 경험하며 환희를 느끼고, 그리하여 소세키가 그린 주인공들과 동일시하면서 위안을 찾고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하셨지요. 구마모토의 오아마 온천을 무대로 했다는풀베개를 어렵게 읽은 적이 있는데 역시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라고 인정해주시니 읽었다는 자체만으로 뿌듯한 마음이 됩니다.

 

  고원의 풍경 중 떠오르는 하나가 하얀 안개로 둘러싸인 몽환적인 세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짙은 안개를 싫어했는데 나중엔 안개 끼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언론매체의 난도질을 피해가지 못했던 거죠. 세상은 이미 관음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기는커녕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보도에 아까운 생명이 스러지는 경우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한편 고원의 숲 속에 살게 된 이유도 알고 보면 마음 아픈 일을 겪고 나서 비롯되었다니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안개의 속성을 생각할 때, 마음의 피난처를 찾고 싶었던 선생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고원에 살면서 도심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박하게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면서 사유하는 모습이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을 통해서 클레머티스라는 꽃을 처음 알았습니다.

 

 ‘장미처럼 가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커다란 꽃을 피우지만 결코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으며, 그윽하고 고상하다. 그러면서도 나름 존재감이 분명하고 사람의 마음을 달래준다. 클레머티스는 실제로는 꽃잎이 없는 모양인데 그럼에도 변형된 꽃받침이 마치 꽃잎처럼 보이는 점도 내게는 매력적이다. ‘여행자의 기쁨이라는 꽃말은 현대식으로 보자면 이민과 난민을 비롯해 자신의 처소를 방문하는 에트랑제’, 즉 이방인을 따뜻하게 반기며 위안을 준다는 뜻이라고 할까.’(P161)

 

  꽃을 보면서도 사람이 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여행자의 기쁨이라는 꽃말처럼 이민과 난민들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이상적인 국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세계는 급변하고 몰려드는 이민과 난민들로 인해 시끄러운 상황입니다. 정착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처지와 받아들이는 쪽의 조건 사이에 갭이 크기 때문에 팽팽한 형국이지요.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국적의 문제도 마찬가지겠지요. 살아오는 동안 겪어야만 했던 차별에 대한 아픔이 아련하게 전해집니다. 아첨하지도 않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치미를 떼지도 않는, 그저 가느다란 덩굴에서 하늘을 향해 담백하고 커다란 꽃을 피워낸다는 클레머티스처럼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그런 나라는 요원한 걸까요?

 

강상중 씨, 꽃이 왜 피는지 압니까? 인간이 10만 명이 죽든 100만 명이 죽든, 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어날 거예요. 이렇게 아름다운 색으로 말이에요.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로 사람들을 위로해준단 말이에요. 그저 그것만으로도 사는 의미가 있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도 꽃은 피는 거예요.”(P186)

……

꽃은 핀다.

그저 사람을 달래기 위해 꽃은 핀다.

말기의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이 꽃이라면, 게다가 우리 집 뜰의 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고원에 살다 보니 점점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정원 한구석에 뼈가 되어 흩어져 꽃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P187)

 

  꽃이 피는 이유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아무리 힘든 고난을 겪었더라도 온 인생이 고난 자체인 삶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평범한 우리에게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큰 힘을 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아내와 채소를 가꾸며 땀을 흘리고, 커피를 마시며 함께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평화로운 정경이 보기 좋았습니다. ‘강아지 파였던 선생님이 고양이 루크를 받아들이고 적응해 가는 과정은 마음 따뜻해지는 한편의 동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소세키의 작품에 나오는 그 고양이의 후손이 아닐까하는 재미있는 상상도 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떠났어도 산 사람의 마음을 통해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리고 상기하는 것으로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자세를 곧추세우게 됩니다. 어쩌면 치열했다고 할 수 있는 삶, 잘 견뎌내며 훌륭하게 살아오셨습니다. 선생님의 70여 년의 삶을 돌아보는 여정에서 우리 어머니, 할머니 세대의 지난한 인생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의 겨울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표현은 당치 않으십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이며 정신적인 지주이셨던 어머니 덕분에 건강한 몸을 물려 받으셨으니 선생님의 제2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자연으로 둘러싸인 숲 속의 보금자리 만년의 집에서 앞으로가 더욱 행복하고 편안한 삶이기를 기원합니다.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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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 - 좋은 것들을 모으러 떠난 1년
조민진 지음 / 아트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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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그림을 갖고 산다. 그 그림들은 어제의 회고이거나, 오늘의 일기이거나, 내일의 희망이거나, 먼 미래의 꿈이다. 산다는 건 수많은 그림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남기는 일이다. 런던에서 보낸 하루하루는 이제 내게 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벌써 그날의 그림들이 무척 그립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그리운 마음이 새로운 오늘을 떠받치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꼭 런던이 아니어도 된다. 벌써 그리워졌거나 언젠가는 그리워질 나날들을 자신도 모르게 그림처럼 그려서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채 새로운 하루를 살고 있을 누군가가 이 책을 읽어주면 좋겠다. 비슷한 그림들을 품고 산다면, 그 마음들이 이어져 서로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

-서문에서-

 

 저자 조민진은 기자 생활 14년 만에 런던에서 1년을 보낼 수 있는 안식년을 얻는다. ‘좋은 걸 최대한 모아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각오로 수없이 걷고 걸었던 런던의 풍경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들어있다.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부러움이었다. 1년의 안식년이라니. 출퇴근 시간에 동동거리지 않고 오늘 저녁은 뭘 먹어야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연결되었던 관계의 울타리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자신만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기회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고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관계 속에서의 가 아닌 본연의 와 진지하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꿈꾸는 미래일 수도 있다는 설렘과 기대를 안고 읽어나갔다.

 

 길치에 마흔이 되도록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저자가 낯선 런던의 삶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은 마치 나의 성취감이기도 한 것처럼 뿌듯한 미소를 짓게 했다. 런던에서의 첫 목표는 길 잘 찾기였다. 걱정하는 남편에게 구글 지도 읽는 법을 배워 갈 곳을 정하고 매일 외출을 한다. 그 간절한 노력은 보름 만에 길 찾기 능력자가 되어 자신감으로 보상받는다. 낯선 곳이 점점 익숙한 곳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스스로 대견하지 않았을까.

 

 새벽부터 밤까지 치열하게 살아야했던 직장인의 삶을 내려놓고 시간의 자유를 얻은 기분은 어떨까. 나 같으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겠다. 물론 가끔씩 찾아오는 외로움도 없진 않겠지. 런던 사람들의 친절함에 감동을 받고 기다리는 것이 일상인 그들의 시간에 익숙해져 간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기사를 쓰면서 바쁘게 살았던 그녀가 갑자기 더 이상 일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런던에서 일어난 어떤 일을 보고도 관여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소외감을 느끼고 허전해 한다.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이 기자라고 소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람은 소속감을 느끼는 존재라고 했던가. 이런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현지 뉴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뉴스 생산자였다가 소비 주체로 살면서 뉴스가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고.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적, 물리적 자유를 얻었지만 외로움은 감수해야 할 자신의 몫이었다.

 

 그림이 있는 미술관을 좋아한다고 했다. 모네의 그림만이 아니라 여러 화가들의 그림이 들어있다. 역시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는 글은 술술 읽힌다. 낯익은 그림들이 많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림을 선택하고 글을 쓴 것인지, 글을 먼저 쓴 다음 적당한 그림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조화로움에 감탄했다. 오랫동안 정제된 글을 써 온 기자라는 직업의 내공일까. 역사와 정치, 문화가 적절히 어우러진, 마치 취재한 듯 생생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고 그림이 쉽게 읽혔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No Woman, No Cry

 

 영국 화가 크리스 오필리(Chris Ofili)의 작품이다. 인종차별 범죄의 희생자였던 18세 흑인 청년 스테판 로렌스의 죽음 앞에 바친 그림이란다. 자메이카 출신 음악가 밥 말리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그림의 주인공은 희생자 청년의 어머니의 모습이다. 사건의 배경을 알고 나면 그림의 의미가 환해지고 비로소 공감하게 된다. 그림 한 점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알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걸으면 많은 게 좋아졌다. 가끔씩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있었고, 낯선 곳을 찾아내는 성취감도 생겼으며, 글쓰기에 좋은 소재나 새로운 계획들이 번뜩 떠오르기도 했다. 지도를 보고 걷는 건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가능했다. 하늘과 구름과 강처럼 언제나 주변에 있는 것들을 새삼스럽게 쳐다보게 됐고, 목적지를 찾으려는 의지를 담담하게 실천하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믿게 됐다. 내가 가는 길을 스스로 찾는 건 내가 나를 믿는 일이었다. 나는 길치가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 지도를 읽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을 뿐.(P93)

 

로런 킬리 「모두 함께 걷기」

 

I walk so much that my calf muscles have become strong and well defined.

…… I an the boss of me.

(나는 너무 많이 걸어서 종아리 근육이 점점 강해지고 뚜렷해졌다.

…… 나는 나의 보스다.)(P95)

 

 보는 걸로 만족했던 그림을 배우기 위해 미술학원에 등록하고 패션쇼를 본다. 영어공부를 하고 처음으로 책 집필을 결심하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 피트니트센터에 등록한다.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40만원 하는 오페라를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한 가지씩 경험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언어 실력을 키운다. 놀라운 건 직장에 다닐 때의 루틴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는 습관을 런던에 가서도 유지했다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알차게 1년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한정된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방법은 이런 것이 아닐까 . 기자생활을 하면서 철저하게 굳혀진 부지런한 습관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처음 간 런던에서 처음 쓴 책으로 생생하게 런던을 보여준다. 정확하고 반듯한 글을 써야 하는 기자인 저자에게 이런 감성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그리움 가득 품은 유려한 글을 읽노라면 런던으로 막 달려가고 싶어진다.

 

 그림에 관심이 생긴 내게 시선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미술사학자 제임스 엘킨스의그림과 눈물을 언급하면서 작품과 강렬한 만남을 나눌 수 있는 비결을 소개한다. “미술관에는 혼자 가라” “모든 것을 보려고 노력하지 마라등 마지막 조언은 충실하라는 것이었는데 일단 그림 한 점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보러 오겠다고 자신과 약속하라고 했단다. 그림을 보고 사진 한 장 찍고 휙 지나가는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림 한 점을 보는데 28초면 끝난다고 했다. ‘다시 보러 오겠다는 약속’, 정말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자주 생각하고 들여다보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테니까.

 

귀스타브 카유보트 「파리 거리, 비 오는 날」

 

 읽는 내내 부러운 마음 일색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런 휴식을 누릴 만했다. 런던에서 1년은 그녀에게 더 큰 꿈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제대로 힘써 본 적이 있었을까 돌아보게 했다. 간절함이 부족해서 인지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 미루던 나를 본다. 역시 좋은 기회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부러워만 하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 나도 정신 바짝 차리고 좋아하는 일을 모으면 된다. 아직 내게 정해진 1년은 없으니까 우선은 내 자리에서 그림을 그려보려고 한다. 켜켜이 쌓인 그림들을 언젠가 쫙 펼쳐 볼 수 있게...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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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제3판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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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초판이 나오던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기사를 접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20대에 감옥살이를 시작하여 40대가 되어 나온 저자의 삶이 어떤 사연인지 궁금했고 아마도 제목에서 사색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읽게 된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신영복 선생이라는 한 인간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고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도 어울리려고 하는 열린 마음, 부단히 학문에 정진하는 올곧은 지식인의 면모 등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속박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고 있으면서도 소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다 볼 수 있었다.


 영인본엽서의 서문에서 20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타난 선생을 본 친구들은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2020일을 견디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족들의 끊임없는 헌신과 사랑도 물론이거니와 선생의 견고하고 담대한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27년 감옥살이를 하고도 대통령을 지낸 넬슨 만델라를 떠올렸다. 어떤 것에든 감사하는 마음을 붙여서 견뎌냈다는. 모두 자신 앞에 던져진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면서 어떻게든 결국 살아남겠다는 초월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신영복의 엽서에서 뽑은 230장의 내용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썼다는 사색노트가 추가된 이 증보판으로 20대와 30대 초반의 선생의 사색을 접하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실린 모든 글은 연월일의 순서로 편집하였으며 1969년부터 1988년까지 20년 동안의 기록이 거의 망라된 것이다.

 

 

 ‘오늘은 다만, 내일을 기다리는 날이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지금 현재를 충실히 살라고 하는데 단지 내일을 기다리는 날이라니. 또 희망적이어야 할 내일은 어제의 내일일 뿐이다. 내일도 또 내일의 오늘일 뿐이라는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처한 20대 청년의 고뇌가 이 그림에 너무도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조금 서투른 듯 보이는 그림은 뒤로 갈수록 솜씨가 붙어 제법 감탄하게 하는 그림으로 나타나 미소 짓게 한다.(전에는 그림을 본 적이 없었는데 깨알처럼 빼곡히 쓴 단정한 글씨와 엽서의 그림을 보게 된 것도 내겐 큰 행운이다.) 마치 옥살이의 달인이라도 된 것처럼 삶에 달관한 듯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선생의 저력을 느낄수 있었다.

 

…… 수인의 군집 속에서 흙처럼 변함없는 인정(人情)를 만난다. 이러한 인정의 전답에 나는 나무를 키우고 싶다. 장교 동()에 수감되지 않고 훨씬 더 풍부한 사병들 속에 수감된 것이 다행이다. 더 많은 사람, 더 고된 생활은 마치 더 넓은 토지에 더 깊은 뿌리로 서 있는 나무와 같다고 할 것이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작은 기쁨이 이룩해내는 엄청난 역할이 놀랍다.’(P53,55) -니토(泥土) 위에 쓰는 글 -


 수감 직전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었지만, 거칠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교도소에서 일반 사병과 함께 지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햇볕 좋은 자리를 선택할 수 없는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신에게 내려진 벌을 달게 받겠다는 굳은 다짐이 엿보인다. 참담한 슬픔도 아주 작은 기쁨으로 위로받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알고 보면 우리는 작은 기쁨으로 힘을 얻어 삶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불모의 영토마다 자리 잡고 있는 과거라는 이름의 숲은 실상 한없이 목마른 것입니다. 그늘도, 샘물도, 기대앉을 따뜻한 바위도 없습니다. 머물 수 있는 곳이 못 됩니다. 나는 벽 앞에 정좌하여 동공을 나의 내부로 열기로 하였습니다. 내부란 과거와 미래의 중간입니다.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현재를 자위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색이 머릿속의 관념으로서만 시종(始終)하는 것이고 보면, 앞뒤도 없고 선후도 없어 전체적으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 

 이 나무는 과거에다 심은 나무이지만 미래를 향하여 뻗어가야 할 나무입니다. 더구나 나는 이 나무에 많은 약속을 해두고 있으며 그 약속을 지킬 열매를 키워야하기 때문에 당장은 마음 아프더라도 자위보다는 엄한 자기 성찰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67~68)- 고성 밑에서 띄우는 글 -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 등 갑작스런 상황에 처한 선생과 가족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현실을 잊고 싶어 과거를 회상해 본다고 해도 나아질 건 없다. 오히려 더욱 큰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이전의 나와 다른 나를 만나려고 한다. 자신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심고 그 나무와 수많은 대화를 하고 약속을 하며 실행하는 과정에서 숱한 세월을 견뎌낸 것이다.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며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無邪)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P100)- 생각을 높이고자-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지만 밖에 나가서 실행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힌다.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내실을 다지고자 한다. 무작정 책을 읽으면서 권수를 채우려는 맹목적인 독서법을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친다.

 

봄철, 가을철은 징역 살기로도 좋은 계절입니다만 이곳에서는 봄 , 가을이 바깥보다 유난히 짧아서 춥다에서 바로 덥다, ‘덥다에서 바로 춥다로 직행해버립니다. 징역 속에는 춥다덥다의 두 계절만 존재합니다. 직절(直截)한 사고, OX식 문제처럼 모든 중간은 함몰하고 없습니다.’(P109)- 봄철에 뛰어든 겨울 -

 

 웃으면 안 되는데 웃음이 났다. , 가을은 원래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하는데 징역 살기로도 좋다니. 힘든 현실에서 얼른 벗어나려고 안달하기보다는 상황을 인정하고 좀 더 의미있는 삶을 계획하고 자꾸만 침잠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긍정의 마음이 이것을 견디게 했으리라. 더운 것과 추운 것으로 심플하게 바뀌는 것이 징역살이의 애환일까. 이것뿐이 아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버님, 어머님께

꽃과 나비는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게 자라지 않느냐.”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의 자애로 담뿍 적신 저는, 꽃보다 나비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P121)-꽃과 나비 -

 

늦은 5, 흠씬 비를 맞은 신록이 미리 여름의 웅장함을 선보이려는 듯, 방금도 키가 크는 것 같습니다.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 쉬운 이치를 생활의 골목골목마다에서 확인하면서 여름 나무처럼 언제나 크는 사람을 배우려 합니다.’(P162)-슬픔도 사람을 키웁니다 -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님, 형수, 계수 등 온 가족들의 옥바라지를 받는 선생은 더욱 각오를 새롭게 다진다. 꽃과 나비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리라고. 어디 선생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오직 인간만이 과잉보호를 받으면서 점점 나약한 정신이 되는 건 아닌가 싶다. 기쁨이 아니라 슬픔도 한층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무엇이든 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화단의 맨 앞줄에나 앉는 키 작고 별로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지만, 열두 시의 나비 날개가 조용히 열려 수평이 되듯이, 팬지꽃이 그 작은 꽃봉지를 열어 벌써 여남은 개째의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한 줌도 채 못 되는 흙 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어 있는지…….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럽습니다.‘(179)-한 송이 팬지꽃 -

 

좁은 거처에서도 예쁘게 꽃을 피우며 제 할 일을 해내는 한 떨기 꽃들과 풀들을 보면서도 부끄러워하는 순수하고 맑은 마음.

 

어머님을 뵙고 난 어젯밤에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죽어서 망우리 어느 묘지에 묻혀 있다면,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쯤에는 어머니의 아픈 마음도 빛이 바래고 모가 닳아서 지금처럼 수시로 마음 아프시지는 않고 긴 한숨 한번쯤으로 달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만, 그러나 어제처럼 어머님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머님께서 손수 만드신 점심을 먹는 모습을 보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추석에 마음 아프시고 겨울에는 추울까 여름에는 더울까 한밤중에 마음 아프시기는 하지만 역시 징역 속이지만 제가 살아있음이 어머님과 더불어 마음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나 하시는 말씀처럼 부디 오래 사셔서 여려 가지 일들의 끝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P189)-어머님 앞에서는 -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말 밖에는. 매인 몸의 아들을 끊임없이 걱정하는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사모곡이 들려오는 듯하다.

 

나한테 묻는다면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불빛이라고 하겠습니다. 새까만 연탄구멍 저쪽의 아득한 곳에서부터 초롱초롱 눈을 뜨고 세차게 살아 오르는 주홍의 불빛은 가히 겨울의 꽃이고 심동(深冬)의 평화입니다.

천 년도 더 묵은, 검은 침묵을 깨뜨리고 서슬 푸른 불꽃을 펄럭이며 뜨겁게 불타오르는 한겨울의 연탄불은, 추위에 곱은 손을 불러 모으고,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젖은 양말을 말리고……, 그리고 이따금 겨울 창문을 열게 합니다.’(P206)-불꽃 -

 

 ‘덥다춥다로 함축되는 교도소의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불꽃... 

아름다울 수밖에 없겠다. 모두를 따뜻한 난로 옆으로 불러 모을 것이며 지난 추억을 이야기하며 꽃을 피우겠지. 모진 세월의 징역살이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힘도 참 컸겠다 싶다.

 

이기(利器)를 생산한다기보다 필요그 자체를 무한정 생산해내고 있는 현실을 살면서 오연(傲然)히 자기를 다스려 나가기도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은 그 속이 빔()으로써 쓰임이 되고 넉넉함은 빈 몸에 고이는 이치를 배워 스스로를 당당하게 간수하지 않는 한, 척박한 땅에서 키우는 모든 뜻이 껍데기만 남을 뿐임이 확실합니다.‘(P212)-나막신에 우산 한 자루 -

 

 문명의 이기로 물질이 넘치는 시대에 아무려면 보통의 인생살이를 하는 사람만큼 많이 가진 사람이 있을까. 징역살이에서도 방을 옮기면서 힘듦을 겪고 빈 그릇의 미학을 떠올린다. 어디서든 사람은 홀가분한 삶을 원하면서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저께 밤중의 일이었습니다. 여태 없던 서늘한 바람기에 눈을 떴더니, 더위에 지친 동료를 위하여 방 가운데서 부채질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엄상(嚴霜은 정목(貞木)을 가려내고 설중(雪中)에 매화 있듯이 고난도 그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을 묻고 있는가 봅니다. 이러한 인정을 보지 못하고 지레 미움을 걱정함은 인간의 선성(善性)의 깊음에 대한 스스로의 단견(短見)외에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P219)-고난의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 -

 

 여름의 감옥살이의 고충을 말한 바가 있다. 그저 존재 자체로 증오하게 된다는 여름살이의 힘듦을 말이다. 동료들을 위해 부채질하는 선행을 목격하고 선생은 자신의 좁은 소견을 깨닫기도 한다. 고생을 해 본 사람이 같은 처지의 사람을 이해하는 아량도 있을 것이다. 어디가 되었든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옛날에 수염이 길고 지혜 또한 깊은 어느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짙게 서린 무기(霧氣)를 보고 이곳에는 훗날 큰 절이 서리라는 예언을 남기고 표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예언이란 엇비슷이 적중하는 데에 묘()가 있는가 봅니다. 수천의 청의삭발승(靑衣削髮僧)(?)들이 고행 수도하는 교도소는 가히 큰 절이라 하겠습니다.

잠 에너지로 어제의 피곤을 가신 이곳의 우리들은 새벽의 청신한 공기를 양껏 들이마시며 기차처럼 어느새 지나가버릴 쾌청한 가을 날씨를 차마 아까워 어쩌지 못하고 있습니다.’

(P222)- 청의삭발승(靑衣削髮僧) -

 

 지난한 옥살이의 세월을 이렇게 이야기로 토해낼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앞에서 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 외에 선생의 강인한 정신력을 더 높이 생각했는데 리뷰를 위해 다시 보면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수님, 계수님에게 이렇게 자신의 일상을 털어놓을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고통을 치유하는데 한 몫을 했을 터였다. 세상에 나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다림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유머가 느껴져서 더욱 아련한 마음이 된다.

 

이번 이사 때 가장 두고 오기 아까웠던 것은 창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능선과 오뉴월 보리밭 언덕이 내다보이는 창은 우리들의 메마른 시선을 적셔주는 맑은 샘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창문보다는 역시 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조용히 서서 먼 곳에 착목(着目)하여 스스로의 생각을 여미는 창문이 귀중한 명상의 양지(陽地)’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연히 문을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보(進步)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형수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의 발전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P230)- 창문과 문 -

 

창문으로 토막 난 하늘을 보다가 문으로 걸어 나가서 본 하늘의 느낌은 어땠을까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은 실천의 현장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창문의 차이를 이렇게 멋지게 해석하는 선생이었구나!

 

 

육순 노인에서 스물두어 살 젊은이에 이르는 스무남은 명의 식구(?)가 한 방에서 숨길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바짝 몸 비비며 살아가는 징역살이는 사회 , 역사의식을 배우는 훌륭한 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도덕적 분식(粉飾)이나 의례적인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벌거숭이의 이() , () , () , ()가 알 몸 그대로 표출됩니다. 알몸은 가장 정직한 모습이며, 정직한 모습은 공부하기에 가장 쉽습니다.’(P266)-감옥은 교실 -

 

 배우려는 자세만 있다면 어디서든 어떤 사람에게서든 배울 점 한 가지는 있을 것이다. 자신의 중심을 꽉 붙잡고 긴 세월 동안 사색을 멈추지 않은 선생의 깨어있던 정신에 마음이 아득해진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P298)-함께 맞는 비 -

 

 남에게 호의를 베풀면서도 언젠가 되받으려는 마음을 가진 적은 없는지. 아니면 상대의 굴종을 담보로 훗날을 위한 흑심은 없었는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으로 공감과 연대가 확장되는 것이라는 말이 뜨끔한 일침을 준다. 누군가에게 내민 도움의 손길이 결국 자신을 위한 위선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현상은 그것이 개인이든 사건이든, 하나의 단절된 객체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여러 가지의 계기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변용의 가능한 방향에 긍()하는 총합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더욱이 과거란 완성되고 끝마쳐진 어떤 불변의 것이 아니며, 반대로 역사인식은 언제나 현재의 갈등과 관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에 투영된 현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계속 새롭게 씌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어떠한 종류의 매스컴이나 미니컴이라도, 그것은 어떤 층을 대표하는 기관지인 법이며, 문제는 그것이 기관지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대표하는가에 있다는 그의 간결하고 적확(的確)한 사회인식이라든가, 어느 사회의 진상을 직시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라는 소박한 민중의식은 뛰어난 것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P301~302)- 과거에 투영된 현재 -

 

 선생은 징역살이 초기에 부친과의 편지에서 단지 염려스러운 아들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사상과 개성을 가진 한 사람의 청년으로 이해되고 싶다는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단순히 옥에 있는 아들을 염려하는 편지보다는 대화의 편지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선생의 사물을 대하는 감성적인 부분 외에도 사회, 세상을 바라보고 사색한 그분의 생각이 많이 들어있다. 개인이나 사건 등은 단절된 객체가 아니므로 총합적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개인은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역사인식은 언제나 현재의 갈등과 관심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고 한 사회의 진상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직접 방문하여 민중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사색한 선생의 이 육성이 두루두루 읽혀져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에 제가 정작 부러워하는 것은 객관적인 처지의 순역(順逆)이 아닙니다. 생사별리(生事別離) 등 갖가지 인간적 고초로 가득 찬 18년에 걸친 유형의 세월을 빛나는 창조의 공간으로 삼은 비약(飛躍)’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비약은 그 어감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곱셈의 논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P318)-독다산(讀茶山) 유감(遺憾) -

 

 유형의 세월 동안 놀라운 업적을 이룬 정약용의 비약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신영복 선생도 옥중에서 많은 책을 읽고 출옥 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다수의 저서를 남긴 것도 자신의 내면에 나무를 심고 키웠던 결과가 아니겠는가. ‘온몸으로 세상을 겪으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에 흠모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진정한 지식인은 역시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도 다르다.

 

비단 갇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튼튼한 연대감이야말로 닫힌 공간을 열고, 저 푸른 하늘을 숨 쉬게 하며……, 그리하여 긴장과 갈등마저 넉넉히 포용하는 거대한 대륙에 발 딛게 하는 우람한 힘이라 믿고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P347)- 닫힌 공간, 열린 정신 -

 

 그렇다. 갇혀 있건 나와 있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다. 무관심은 인간의 정을 메마르게 하고 증오를 낳고 나아가서는 범죄를 부르기도 한다. 신영복 선생의 20대 후반부터의 인생 20년을 읽었다. , 이때 나는 몇 학년 이었지? 이때 나는 무얼 했더라? 기억을 떠올리며 읽어나갔다. 다 읽고 나서는 마음이 헛헛했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그분의 출옥을 보셨을까, 옥바라지에 20년을 보낸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등등. 그리고 선생도 세상에 안 계시다. 첫 책을 읽었을 때는 몰랐던 청구회모임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어린이에게 다가가 대화를 할 줄 알았던 열린 마음의 선생의 순수한 마음을 다시금 엿볼 수 있었다. 출간된 지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많이 읽히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아픔이자 우리 시대의 고뇌와 절절한 양심에 공감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감옥이나 바깥세상이나 매 한가지가 아닐까. 어디서든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루어져있지 않은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출구와 입구가 어디인지 모를 만큼 넓은 교도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 너무 심한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자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있는 걸 보면 무리도 아니지 싶다. 그렇기에 『감옥으부터의 사색』은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음에도 진실로 소중한 것이 무언지 모르고 나태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정신을 번쩍 깨워준다. 어쩌지 못한 세월을 원망하기보다는 글을 쓰고 공부하며 본연의 삶을 살면서 귀한 저서들을 남겼으니 우리에겐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의 다른 책들을 진작 만나지 못한 나의 게으름을 탓하면서 앞으로 그 헛헛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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