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나이프 밀리언셀러 클럽 98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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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기억 속엔 명품으로 남아있지만 다시 읽었을 때 예전 그대로의 감흥을 전해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커피숍 점주인 히야마 다카시는 4년 전 3인조 강도에게 아내 쇼코를 잃은 상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금은 4살이 된 딸 마나미와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범인들은 금세 체포됐지만 13세라는 나이 때문에 제대로 된 처벌 없이 보호시설로 옮겨졌고, 히야마는 이 부당한 조치에 격분하여 국가가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제 손으로 직접 범인을 죽이고 싶습니다.”라는 인터뷰까지 한 바 있지만 결국 아무 보상도, 사과도 받지 못한 채 4년이란 시간을 허망하게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3인조 중 한 명이 히야마의 커피숍 인근에서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4년 전 쇼코의 죽음을 수사했던 형사가 찾아와 자신의 알리바이를 묻자 겨우 억눌렀던 히야마의 분노와 증오는 다시 폭발합니다.

 

천사의 나이프는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야쿠마루 가쿠의 데뷔작이자 그의 이름을 한국에 처음 알린(2009) 작품이기도 합니다.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하고 3년쯤 지났을 때라 기성과 신인을 구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던 시절인데, 생소한 이름이긴 해도 황금가지의 밀리언셀러 클럽작품이라 무작정 장바구니에 담았었고, 지금까지도 대략의 줄거리가 생각날 정도로 무척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후 야쿠마루 가쿠의 찐팬이 됐는데, 지금까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 19편 중 15편을 읽게 된 건 천사의 나이프가 남긴 첫 인상이 진심으로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미스터리 가운데 촉법소년 문제를 다룬 작품은 무척 많습니다. 최근까지도 그 기세가 이어지는 걸 보면 일본 내 촉법소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법을 조롱하듯 고의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촉법소년이 급증하고 있어서 엄벌만이 효과적인 억지력라는 주장과 갱생과 보호가 우선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부딪히고 있는데, ‘천사의 나이프2005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지금도 충분히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아내를 살해한 3인조 중 한 명이 살해당하고 자신이 용의자로 취급되자 히야마는 나머지 두 명의 범인을 직접 만나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아내를 살해하고도 기껏 보호시설에서 몇 년을 지내다 사회로 돌아온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갱생이란 게 가능하긴 한 건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히야마는 엄벌파보호파로 갈린 여러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한때 범인들을 직접 죽이고 싶다고 공표했던 그 자신 역시 이제는 무엇이 옳은 길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맙니다. 복수가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 와서 범인들에게 억지 사과를 받아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도 히야마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3인조 중 남은 두 명마저 습격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뜻밖에도 아내 쇼코가 숨겨온 비밀까지 알게 되자 히야마는 3인조를 공격하는 진범을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야 쇼코의 죽음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적잖은 부분은 가해자인 촉법소년에게 한없이 자비롭기만 한 사법 시스템에 대한 히야마의 분노를 그리고 있으며 가해자의 참회만이 유족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으며, 피해자의 용서만이 가해자의 진정한 갱생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주제의식을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아내를 죽인 3인조가 4년이 지난 현재 누군가에게 차례로 습격 받는 사건을 설정하고 그 진상을 알아내는 역할에 히야마를 배치함으로써 그의 분노와 작품의 주제의식을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리고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매특허나 마찬가지인 막판의 불꽃 튀는 연속 반전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 것은 물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여운을 더욱 깊고 묵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받은 대로 갚아 주는 복수의 쾌감을 좋아해서 고백이나 그리고 숙청의 문을처럼 복수의 대상이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낀 작품들도 있지만, 촉법소년의 처벌과 갱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정교한 미스터리 속에 풀어낸 야쿠마루 가쿠의 방식은 돌직구 스타일의 복수극과는 또 다른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듭니다.

개인적으론 엄벌파이자 복수파에 가깝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은 천사의 나이프덕분에 결론 없는 화두를 놓고 잠시나마 고민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통 미스터리에 촉법소년이라는 사회파 서사를 제대로 녹여 넣은 참맛을 만끽하고 싶은 독자라면 야쿠마루 가쿠의 데뷔작인 천사의 나이프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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