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늘의 계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그늘의 계절’은 개인적으로 일본 미스터리 최애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첫 번째 소설집(1998년 일본 출간)이자 ‘D현경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최애 작가로 꼽으면서도 그의 첫 소설집을 이제야 읽은 건 좀 ‘이상한’ 이유 때문입니다. 2년 전쯤인가, 한국에 출간된 그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은 마당에 신간 소식은 너무나도 뜸하다 보니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을 두고두고 아껴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데, 그렇게 아껴둔 작품들이 ‘그늘의 계절’, ‘동기’, ‘루팡의 소식’입니다. 이제 ‘그늘의 계절’을 읽어버렸으니 신간이 나오지 않는 이상 제 손에는 두 편밖에 남지 않게 됐고, 그마저 다 읽고 나면 예전에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D현경 시리즈’(일본출간연도)는 ‘그늘의 계절’(1998) - ‘동기’(2000) - ‘얼굴’(2002) - ‘64’(2012)로 구성돼있습니다. 장편인 ‘64’를 제외하곤 모두 D현경을 무대로 한 단편집인데, 기자 출신인 요코야마 히데오가 세밀하고도 냉정한 시각으로 경찰 조직을 바라보며 직조한 독특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엄격한 조직의 룰이 적용될 것만 같은 경찰 조직이지만, 그 안에서도 개인의 욕망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뿜어내는 부조리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요 동력이 된다.” (‘옮긴이의 말’ 中, p272)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그늘의 계절’의 주인공들은 경무부 소속입니다. 인사담당 조사관 후타와타리 신지, 감찰관 신도 다카요시, 여경 담당계장 나나오 도모코, 비서과의 쓰게 마사키 등 현장에서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부가 아니라 조직 관리가 주 업무인 경무부의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이 기존의 경찰 미스터리와 확실히 다른 서사를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주인공들의 공통점이라면 내부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문제를 은밀하고 조용히 처리함으로써 어떻게든 조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주력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쟁자나 경쟁부서를 가차 없이 짓누르거나 치밀한 계획 하에 자신의 공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말하자면 개인적인 욕망과 정치적 야망에 무척이나 솔직한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옮긴이의 말’의 부제처럼 전형적인 호모 폴리티쿠스라고 할까요? 탐정 역할을 맡아 조직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그걸 기회 삼아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현실적인 속물들이란 뜻입니다.
이들의 욕망과 야망은 대부분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씁쓸한 엔딩을 맞이하지만, 때론 누군가의 지나친 욕망과 야망을 보기 좋게 꺾어놓으며 권선징악의 여운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바로 이런 민낯 그대로의 인간들이 풍기는 다양한 욕망과 야망의 냄새가 독자의 구미를 더욱 자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편집이지만 수록작에 대한 소개 없이 거의 총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족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표지만 보고 코믹하거나 가벼운 미스터리로 오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요코야마 히데오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던 즈음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 출간된 작품들('종신검시관', '동기’) 모두 표지 때문에 오해받기 쉬운 작품들인데, 실은 그 어느 경찰 미스터리보다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니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중고로라도 구해서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