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
시가 아키라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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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어린 딸과 함께 도쿄로 도망친 다카요는 코앞으로 다가온 연립주택 강제 퇴거 때문에 전전긍긍합니다. 밀린 임대료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가 결국 퇴거 직전 개인 사채업자 미나미를 통해 급전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미나미라는 사채업자는 연체에도 관대하고 다카요의 갖가지 고충에 대해 상담도 해주는 등 사채업자의 포악함이나 잔인함 따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새 미나미에게 많은 걸 의지하며 야금야금 돈을 빌리다가 대출금이 위험수위를 넘어버린 다카요는 끝내 성매매까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연락처를 알아낸 남편이 연락을 해오자 다카요는 사색이 되고 맙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채업자는 뉴스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고객들을 모으고 관리합니다. 이른바 소프트 사채업이라 불리는데, 여윳돈이 있는 개인이 SNS를 통해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액의 돈을 빌려주곤 나름 적절한 - 그래도 연 100%에 가깝지만 - 수준의 이자를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협박조의 추심은커녕 위험도가 낮은 연체는 관대하게 눈감아주기도 하고, 고객의 고민에 공감하며 카운슬링도 해주는 등 말랑말랑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다 보면 고객은 사채업자가 내 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물론 언제라도 마음 편히 돈을 빌릴 수 있는 상대라고 여기곤 부담 없이 소액을 빌리다가 어느 새 큰돈을 빚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사채업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러니한 건 이들의 고객들은 냄비 속 개구리처럼 자기도 모르게 파멸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그리고 너는 속고 있다는 바로 이 아이러니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전반부 소제목이 속는 사람’, 후반부 소제목이 속이는 사람으로 구성돼있는데, 전반부가 사채를 쓰다가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드는 다카요의 사정을, 후반부가 다카요를 비롯하여 여러 고객들을 상대하는 개인 사채업자의 술수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도 다양하고, 업자가 고객을 관리하는 전략도 제각각이라 경각심을 품은 채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지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결정적인 이유는 이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는 피해자의 고백업자의 수법을 나열해놓은 장문의 기사 혹은 정직한 르포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다카요가 점차 늪으로 빠져드는 과정이나 업자가 고객들을 상대로 장난치는 일 모두 너무나도 익숙한 이야기라서 작가의 전작인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와 같은 궁금증과 긴장감을 전혀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소프트 사채업이라는 신종 사채의 특이함 외에는 딱히 눈길이 끌리는 대목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반전은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애매해서 맥이 풀렸고(이미 앞에서 다 공개된 정보들인데 막판에 마치 반전인 양 서술됐기 때문입니다), 교훈도 여운도 어중간했던 엔딩 역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의 재미를 기대하고 읽었다가 전작의 후광만 바란 티를 역력하게 느꼈던 후속작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소재를 너무 안이하게 활용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5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시가 아키라의 작품이라 꽤 기대를 했지만 아쉬움만 잔뜩 느끼게 돼서 그저 유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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