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의 살인
모모노 자파 지음, 김영주 옮김 / 모모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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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우주항공사가 기획한 1인당 3,000만 엔의 초저가 우주여행에 여섯 명의 고객이 참가합니다. 나이도, 직업도, 성별도 제각각인 그들은 높은 경쟁률을 뚫고 행운을 차지했는데 그중엔 무료초대권에 당첨된 여고생도 포함돼있습니다. 베테랑 기장인 이토의 지휘 하에 부기장 겸 가이드를 맡은 하세 호마레는 우주로의 첫 비행에 마음이 들뜹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무사히 도착한 우주호텔 스타더스트에서 그는 최악의 악몽과 마주합니다. 무중력상태인 창고에서 목을 맨 채 숨진 사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살, 살인, 사고 등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가운데 여행을 계속 할 것인지 지구로 돌아갈 것인지를 놓고 격론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스타더스트에선 우연이나 사고로 볼 수 없는 일들이 잇따라 벌어집니다.

 

우주라는 공간이나 SF물과 친하진 않지만 밀실상태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미스터리라는 출판사 소개글에는 눈길이 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폭설에 갇힌 산장이나 태풍으로 고립된 섬과 달리 우주는 그 자체가 특별한 밀실이라 더 흥미로웠고, 특히 무중력 상태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목을 맨 사체라는 설정도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창고에서 발견된 기이한 사체 외에도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휩싸이게 만드는 불길한 일들이 잇따라 벌어집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그 일들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우주라는 공간에서 겪을 법한 온갖 극한상황을 떠올려보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일들이 자연재해나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고의적으로 벌인 일이란 점입니다. 또한 창고에서 발견된 사체 외에도 명백히 인명을 노리는 범인의 행각은 스타더스트에 머무는 사람들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나 독자 서평에는 스타더스트에서 벌어진 일들이 꽤 상세하게 공개돼있는데 가급적이면 소개글 첫 머리 정도만 참고할 것을 권합니다.)

 

미스터리를 푸는 역할은 부기장인 하세가 맡고, 당찬 돌직구 여고생 사나다가 하세의 조수 혹은 조력자로 활약합니다. 하세는 초반부터 난감한 벽에 부딪힙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게 범인의 목적이라면 지구가 훨씬 편했을 텐데 왜 하필 우주에서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인지, 또 이 우주여행이 1만 명의 지원자 가운데 단 5명만 추첨을 통해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범인이 사전에 희생자를 정하고 범행을 계획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 등 범인의 의도와 계획 자체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중반부 정도까지는 누가?’보다 ?’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미스터리 못잖게 작가가 힘을 준 부분은 스타더스트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과 사연들입니다. 지구평면론을 주장하는 괴짜부터 우주장()을 치른 가족들의 기일에 우주에 오고 싶었다는 사연남, 소식이 끊긴 친구에게 우주에서의 라이브공연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소녀, 갑자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다가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는 사람 등 적잖은 돈을 내고라도 우주에 꼭 오고 싶었던 다양한 사연들이 그려집니다. 때론 그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가 아닌 상황에서도 개개인의 사연이 소개되곤 해서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이 대목은 작가의 절대 포기 못할 고집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주에 관한 방대한 지식과 자료조사 덕분에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영상물을 보듯 마지막 장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독자에 따라 반응이 제각각일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의도 역시 우주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게 설정됐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작가가 나름 쉽고 친절하게 묘사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문과생이라서 이과 미스터리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다 보니 일부 과학적 장치에 관한 묘사에서는 역시나 장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한 작가의 데뷔작 노호잔몽’(중국 송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무술 고수가 밀실살인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이야기)이 무척 궁금해졌는데 별에서의 살인이 호응을 얻는다면 이 작품 역시 머잖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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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번째 밀실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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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의 신진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밀실 미스터리의 거장 마카베 세이치가 매년 자신의 별장에서 개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동갑 친구인 범죄사회학 교수 히무라 히데오를 데려갑니다. 추리소설가, 편집자, 가족 등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 열린 파티는 사소한 충돌과 뜻밖의 발표 등 몇몇 해프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별일 없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아침, 마카베 세이치는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밀실 트릭의 희생자가 돼버립니다.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완벽한 밀실에서 벽난로에 상반신을 집어넣은 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현경까지 출동한 상황에서 히무라와 아리스는 밀실 트릭을 깨고 진범을 특정하려 하지만 예상외의 난관들이 등장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지고 맙니다.

 

2020년에 읽은 자물쇠 잠긴 남자이후 4년 만에 다시 만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입니다. ‘자물쇠 잠긴 남자는 일본에서 2015년에 발표된 이 시리즈의 27(자선단편집을 제외하면 24)인데, ‘46번째 밀실은 그로부터 무려 23년 전인 1992년에 발표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한 책들을 구하는 게 올해 독서목표 중 하나인데, ‘46번째 밀실4년 만에 읽게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인데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첫 편이라 나름 의미 있는 구하기가 될 것으로 기대됐습니다.

 

다소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범죄사회학 교수 히무라 히데오가 셜록 홈즈를 닮았다면, 아직 신진 작가의 티를 못 벗은 털털한 성격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왓슨의 캐릭터와 닮은 인물입니다. 히무라의 경우 이미 경찰의 사건 수사에 여러 번 협력했을 정도로 현장에 익숙하지만 아리스는 이번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실제살인사건과 마주칩니다. 히무라가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절대 공개하지 않는 불친절한 명탐정 스타일이라면, 아리스는 자신이 알아내고 추리한 것을 일일이 독자와 히무라에게 설파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재미있는 건 아리스의 이런 역할이 실은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란 점입니다. 즉 아리스의 말만 듣고 따라가다가는 작가의 의도대로 엉뚱한 곳에 헤매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두 주인공에 대한 소개가 여러 번 언급되는데, 꽤 흥미로운 조합이라 그런 대목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밀실 미스터리의 대가가 더 이상 밀실 미스터리를 쓰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직후 완벽한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 굳이 밀실이 필요하지 않았는데도 범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간과 공을 들여 애써 밀실을 만든 이유, 일반인에게는 쉽지 않은 밀실 트릭을 구사할 수 있기에 용의선상에 오른 여러 명의 추리소설가와 편집자 등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끄는 설정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거기에다 별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미묘하게 갈등을 벌이거나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등 예상치 못한 관계를 보여주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그런 관계들이 살인사건과 어떻게 이어질지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다만 이야기의 규모나 미스터리의 심도로 볼 때 중편 정도에 어울린다는 인상이 강해서인지 마지막에 히무라와 아리스가 진실을 밝히는 대목에서 큰 반전이나 충격을 맛보기 어려운 점이 아쉬웠습니다. 페이지는 금세 휙휙 넘어가지만 거듭 뒤바뀌는 용의자라든가 별장의 사람들을 더욱 큰 공포로 몰아넣는 사건이라든가 소소하더라도 연이어 일어나는 반전 등 독자를 유인하는 장치들이 부족해보인 게 사실입니다. 범행수법은 밀실 트릭의 맛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줬지만 히무라와 아리스가 범인을 특정하게 된 결정적인 단서는 너무 단순해보였고 범인의 동기 역시 기대했던 것보다는 약했습니다. 좀더 세고 독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에 아쉬움이 더 컸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4년 전 자물쇠 잠긴 남자에게 야박한 평점을 주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라고 단언했던 걸 보면 이 아쉬움은 이미 예정됐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직 제 책장에 방치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으로 작가 아리스 시리즈’ 8편인 주홍색 연구학생 아리스 시리즈’ 3편인 쌍두의 악마가 있습니다. 저와 잘 안 맞긴 해도 언젠가는 두 편 모두 꼭 읽을 생각입니다. 바람이라면 한 편이라도 제 취향을 만족시켜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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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의 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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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 내해에 자리 잡은 기이한 모양의 비탈섬.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인 어느 날, 유명 출판사 사이다이지 대표의 유언장 공개를 위해 가족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모여듭니다. 그중에는 유언장 공개를 맡은 변호사 야노 사야카, 20여 년간 연락이 끊겼던 고인의 조카를 찾아내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도 포함돼있습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유언장 공개가 마무리된 그날 밤, 저택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태풍으로 인해 밀실이 돼버린데다 새벽에 빨간 도깨비 얼굴을 한 남자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는 한 목격자의 진술까지 더해지자 섬에 갇힌 가족과 방문객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진실 찾기에 나선 변호사 사야카와 탐정 다카오는 뭔가를 감추는 듯한 사이다이지 가문 사람들의 태도에 더 큰 의혹을 품습니다.

 

지금까지 19편이나 되는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히가시가와 도쿠야지만 속임수의 섬으로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읽진 않았어도 일부 작품은 제목을 외울 정도로 낯익은 작가지만 유머 미스터리 소설의 1인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제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보여 읽을 생각조차 안 했던 탓입니다. 하지만 속임수의 섬은 유머보다는 밀실 트릭과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에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비탈섬은 표지에서 한눈에 느낄 수 있듯이 모양새 자체만으로 불길함을 내뿜는 절해고도입니다. 날씨가 좋을 때도 쉽게 접안하기 어렵게 만드는 암초들로 둘러 쌓여있고, 섬 꼭대기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단애절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기이한 섬에 지어진 자 모양의 저택은 구조나 설계가 워낙 특이해서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놀라움 이상의 감정을 품게 만듭니다. 굳이 이 섬의 저택에서 자신의 유언장을 공개하라는 고인의 뜻도, 또 직계도 아닌데다 20년 넘게 소식을 끊었던 조카를 탐정을 통해 찾아내 섬에 데려오라고 한 고인의 속셈도 이 섬과 저택의 생김새처럼 불길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때맞춰 섬을 덮친 두 개의 태풍이 요동치는 밤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仕掛島’(사괘도)입니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仕掛특수하게 고안된 장치또는 속임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속임수의 섬이라는 번역제목은 언뜻 타인을 속이겠다는 인간의 의지나 속셈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읽은 뒤 원제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실은 이 섬 곳곳에 갖가지 특수하게 고안된 장치가 존재한다는 점을 예고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변호사 사야카와 탐정 다카오는 지난한 추리와 탐색 끝에 비탈섬과 저택에 감춰진 의외의 장치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속임수의 섬2022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와 시마다 소지가 맹활약했던 80년대의 신본격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기발한 트릭과 추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는 역시나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몇 번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억지 유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밀실이 돼버린 섬을 배경으로 한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만큼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신본격의 작품들에서 느끼곤 했던 위화감 가득한 작위적인 트릭이 종종 목격되기도 했지만, “도대체 이런 설계를 하려면 얼마나 특이한 뇌구조를 지녀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거기다가 몇 겹의 포장을 덧댄 트릭과 미스터리가 빈틈없이 전개돼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두 주인공 사야카와 다카오의 조사는 현재 벌어진 사건뿐 아니라 23년 전 비탈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에까지 다다르는데 두 사건의 연관성은 물론 그동안 은폐됐던 진실들까지 파헤치는 과정에서 히가시가와 도쿠야가 완성한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설계도가 거듭 빛을 발하곤 합니다. 덕분에 작위적인 트릭의 위화감 같은 건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미스터리 자체와 비극적인 서사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속임수의 섬은 한국에서 2011년에 출간된 저택섬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정 다카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경찰과 탐정으로 저택섬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속임수의 섬에서 만끽한 매력 때문에 언젠가 저택섬에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혹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의 유머 미스터리 대표작인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시리즈에도 눈길이 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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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 후에 죽는다
사카키바야시 메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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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예 미스터리 작가들의 기발하고 독특한 작품들이 한국 독자들을 찾는 일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통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이라 기성 베테랑 작가들의 작품에 더 관심을 갖기는 하지만, 간혹 특별한 간식처럼 신예들의 개성 넘치고 독창적인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도 있습니다.

사카키바야시 메이의 ‘15초 후에 죽는다는 일단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는데, 고백하자면 “‘피해자가 죽기 직전의 15라는 상황 속에서 피해자와 범인의 독특한 공방을 그린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고 우선은 살짝 고개가 갸웃거려진 게 사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초라는, 다소 한계가 명백해 보이는 설정을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냈을지 한 번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든 수록작이 피해자와 범인의 공방을 다룬 건 아닙니다. 또한 ‘15가 죽음까지 남은 시간을 의미하는 건 맞지만 각 수록작마다 서로 맛과 느낌이 다르게 설정돼서 대체로 엇비슷한 흐름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라는 근거 없던 기우를 보기 좋게 날려버리기도 했습니다.

 

15

죽기 전 15초 동안 어떻게든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주인공과 완전범죄를 이루기 위해 15초 동안 사력을 다하는 범인의 대결을 그린 작품으로, ‘옮긴이의 말의 표현대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특이한 재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다음 충격적인 결말이

시청자 참여형 추리드라마의 마지막 회 엔딩 15초 사이에 여주인공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필 그 장면을 놓친 는 누나와 함께 드라마 첫 편부터 복기하며 여주인공의 죽음의 진상을 추리합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형식으로, 연이은 반전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불면증

심인성 난청을 앓고 있으며 매일 비슷한 꿈(15초 후에 교통사고가 일어나는)을 반복해서 꾸는 13세 소녀 마쓰리와 어딘가 비밀스럽고 애틋한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그녀의 어머니 요우가 이끌어가는 슬프고 애잔한 호러풍 이야기입니다.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는 우리의 머리 없는 살인 사건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더라도 15초 이내에 붙이기만 하면 생명에 전혀 지장이 없는 수탈(首脫)이라는 기괴한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 축제날 밤에 벌어진 의문의 습격사건을 추리하는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죽음 직전의 15는 무척이나 다루기 힘든 설정이지만 사카키바야시 메이는 판타지, 액자소설, 본격 미스터리 등 다채로운 장르와 이야기 속에 그 설정들을 맛깔나게 잘 녹여 넣었습니다. 그야말로 신인의 패기가 아니라면 도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인데, 그 과감함에 정교한 설계까지 가미돼서 흥미진진하게 읽힌 작품입니다. 만점까지 주진 못했지만 색다른 미스터리를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2021년에 출간됐으니 사카키바야시 메이의 두 번째 작품이 나올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 일본에서도 출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어쩌면 난산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데뷔작에 버금가는 두 번째 작품으로 독자들을 찾아와주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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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피리 꽃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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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제목이 바뀐 개정판(‘비둘기피리꽃’)이 나온 걸 보고 예전에 중고로 구매했던 게 기억나서 , 읽어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게 벌써 8년 전의 일입니다. 2024년에는 책장에 오래 방치해놓은 책들을 일부라도 소화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미야베 미유키의 구적초입니다.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괴담 시리즈 미야베 월드 2을 두 번씩 읽을 정도로 미미 여사의 광팬이긴 하지만 실은 현대물 중에는 안 읽은 작품이 훨씬 더 많기도 하고 심지어 읽다가 포기한 경우도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구적초라는 어딘가 고색창연한 제목에 끌려서 현대물이란 것도 모르고 구매했고, 읽기 전에도 앞뒤 표지의 소개글을 일부러 보지 않았는데 예상치도 못한 초능력 이야기가 펼쳐져서 잠시 당황한 게 사실입니다. 다 읽고 앞뒤 표지를 보니 초능력을 지닌 세 명의 여성을 둘러싼 세 가지 이야기라는 소개글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이 소개글을 먼저 봤다면 구매는 물론이거니와 읽는 것도 꺼려했을 게 분명합니다. 아무리 미미 여사라도 초능력이나 SF물은 사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록된 세 개의 단편은 무지한 상태에서 이 작품을 구매하고 읽은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기게 할 만큼 매력적이고 애틋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능력이라도 편리함이나 즐거움 뒷면에는 반드시 혹독함이며 괴로움을 감추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이 책이 태어났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예지몽을 꿀 수 있는 도모코, 불을 일으키고 조종할 수 있는 염화(念火) 능력을 가진 준코, 타인의 몸이나 소지품에 손을 대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다카코 등 세 편의 주인공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제대로 통제하고 조절하려면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전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능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자랑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 절대 들켜서도 안 되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선지 흔히들 초능력 서사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스러질 때까지

21살 도모코는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집을 정리하다가 뜻밖의 유품을 발견합니다. 그건 8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모가 남긴 비디오테이프들입니다. 당시 사고로 그 전의 기억들을 모두 잃어버렸던 도모코는 비디오테이프들을 보다가 큰 충격에 빠집니다.

 

번제(燔祭)

여동생 유키에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를 포착하고도 경찰이 증거와 단서 부족으로 머뭇거리자 가즈키는 반드시 자기 손으로 범인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그때 가즈키를 돕겠다는 한 여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즈키의 눈앞에서 직접 염화 능력을 선보입니다.

 

구적초(개정판에선 비둘기피리꽃’)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경찰이 됐고 이제 형사과의 어엿한 일원까지 된 다카코는 최근 들어 자신의 능력이 점차 소멸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크게 당황합니다. 능력 없이도 자신이 과연 형사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과 함께 말입니다.

 

앞선 두 편의 주인공 도모코와 준코가 자신의 능력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또는 그 능력을 저주하는 캐릭터라면, 표제작의 주인공 다카코는 그 능력의 소멸 가능성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물입니다. 미미 여사는 서로 처지는 달라도 결국 특별한 능력이란 것이 마냥 편리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특히 그것을 신기하고 부러운 눈으로만 지켜보는 제3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특유의 애틋하고 안쓰러운 문장들을 통해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선지 “SF라는 형태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미스터리나 연애소설 속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의 깊이와 절실함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SF나 판타지 쪽은 꺼려지는 게 사실이지만, 이 작품을 읽고 보니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 정도는 파악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설정이라면 힘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의외의 재미와 여운을 맛볼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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