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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번째 밀실 ㅣ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32살의 신진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밀실 미스터리의 거장 마카베 세이치가 매년 자신의 별장에서 개최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동갑 친구인 범죄사회학 교수 히무라 히데오를 데려갑니다. 추리소설가, 편집자, 가족 등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 열린 파티는 사소한 충돌과 뜻밖의 발표 등 몇몇 해프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별일 없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아침, 마카베 세이치는 자신이 평생을 바쳤던 밀실 트릭의 희생자가 돼버립니다.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완벽한 밀실에서 벽난로에 상반신을 집어넣은 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현경까지 출동한 상황에서 히무라와 아리스는 밀실 트릭을 깨고 진범을 특정하려 하지만 예상외의 난관들이 등장하면서 오리무중에 빠지고 맙니다.
2020년에 읽은 ‘자물쇠 잠긴 남자’ 이후 4년 만에 다시 만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입니다. ‘자물쇠 잠긴 남자’는 일본에서 2015년에 발표된 이 시리즈의 27편(자선단편집을 제외하면 24편)인데, ‘46번째 밀실’은 그로부터 무려 23년 전인 1992년에 발표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한 책들을 구하는 게 올해 독서목표 중 하나인데, ‘46번째 밀실’은 4년 만에 읽게 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인데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의 첫 편이라 나름 의미 있는 ‘구하기’가 될 것으로 기대됐습니다.
다소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범죄사회학 교수 히무라 히데오가 셜록 홈즈를 닮았다면, 아직 신진 작가의 티를 못 벗은 털털한 성격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왓슨의 캐릭터와 닮은 인물입니다. 히무라의 경우 이미 경찰의 사건 수사에 여러 번 협력했을 정도로 현장에 익숙하지만 아리스는 이번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실제’ 살인사건과 마주칩니다. 히무라가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독자에게 절대 공개하지 않는 불친절한 명탐정 스타일’이라면, 아리스는 자신이 알아내고 추리한 것을 일일이 독자와 히무라에게 설파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재미있는 건 아리스의 이런 역할이 실은 독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란 점입니다. 즉 아리스의 말만 듣고 따라가다가는 작가의 의도대로 엉뚱한 곳에 헤매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래도 시리즈 첫 편이다 보니 두 주인공에 대한 소개가 여러 번 언급되는데, 꽤 흥미로운 조합이라 그런 대목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밀실 미스터리의 대가가 “더 이상 밀실 미스터리를 쓰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직후 완벽한 밀실에서 살해당한 사건, 굳이 밀실이 필요하지 않았는데도 범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시간과 공을 들여 애써 밀실을 만든 이유, 일반인에게는 쉽지 않은 밀실 트릭을 구사할 수 있기에 용의선상에 오른 여러 명의 추리소설가와 편집자 등 초반부터 독자의 눈길을 끄는 설정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거기에다 별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미묘하게 갈등을 벌이거나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등 예상치 못한 관계를 보여주는 경우도 적지 않아서 그런 관계들이 살인사건과 어떻게 이어질지 무척 궁금하게 만듭니다.
다만 이야기의 규모나 미스터리의 심도로 볼 때 중편 정도에 어울린다는 인상이 강해서인지 마지막에 히무라와 아리스가 진실을 밝히는 대목에서 큰 반전이나 충격을 맛보기 어려운 점이 아쉬웠습니다. 페이지는 금세 휙휙 넘어가지만 거듭 뒤바뀌는 용의자라든가 별장의 사람들을 더욱 큰 공포로 몰아넣는 사건이라든가 소소하더라도 연이어 일어나는 반전 등 독자를 유인하는 장치들이 부족해보인 게 사실입니다. 범행수법은 밀실 트릭의 맛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줬지만 히무라와 아리스가 범인을 특정하게 된 결정적인 단서는 너무 단순해보였고 범인의 동기 역시 기대했던 것보다는 약했습니다. 좀더 세고 독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에 아쉬움이 더 컸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4년 전 ‘자물쇠 잠긴 남자’에게 야박한 평점을 주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저와는 잘 안 맞는 작가”라고 단언했던 걸 보면 이 아쉬움은 이미 예정됐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직 제 책장에 방치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으로 ‘작가 아리스 시리즈’ 8편인 ‘주홍색 연구’와 ‘학생 아리스 시리즈’ 3편인 ‘쌍두의 악마’가 있습니다. 저와 잘 안 맞긴 해도 언젠가는 두 편 모두 꼭 읽을 생각입니다. 바람이라면 한 편이라도 제 취향을 만족시켜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