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의 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토 내해에 자리 잡은 기이한 모양의 비탈섬.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인 어느 날, 유명 출판사 사이다이지 대표의 유언장 공개를 위해 가족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모여듭니다. 그중에는 유언장 공개를 맡은 변호사 야노 사야카, 20여 년간 연락이 끊겼던 고인의 조카를 찾아내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도 포함돼있습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유언장 공개가 마무리된 그날 밤, 저택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태풍으로 인해 밀실이 돼버린데다 새벽에 빨간 도깨비 얼굴을 한 남자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는 한 목격자의 진술까지 더해지자 섬에 갇힌 가족과 방문객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진실 찾기에 나선 변호사 사야카와 탐정 다카오는 뭔가를 감추는 듯한 사이다이지 가문 사람들의 태도에 더 큰 의혹을 품습니다.

 

지금까지 19편이나 되는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히가시가와 도쿠야지만 속임수의 섬으로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읽진 않았어도 일부 작품은 제목을 외울 정도로 낯익은 작가지만 유머 미스터리 소설의 1인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제 취향과 거리가 너무 멀어 보여 읽을 생각조차 안 했던 탓입니다. 하지만 속임수의 섬은 유머보다는 밀실 트릭과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가 더 강하게 느껴져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에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비탈섬은 표지에서 한눈에 느낄 수 있듯이 모양새 자체만으로 불길함을 내뿜는 절해고도입니다. 날씨가 좋을 때도 쉽게 접안하기 어렵게 만드는 암초들로 둘러 쌓여있고, 섬 꼭대기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단애절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기이한 섬에 지어진 자 모양의 저택은 구조나 설계가 워낙 특이해서 처음 방문한 사람들에게 놀라움 이상의 감정을 품게 만듭니다. 굳이 이 섬의 저택에서 자신의 유언장을 공개하라는 고인의 뜻도, 또 직계도 아닌데다 20년 넘게 소식을 끊었던 조카를 탐정을 통해 찾아내 섬에 데려오라고 한 고인의 속셈도 이 섬과 저택의 생김새처럼 불길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때맞춰 섬을 덮친 두 개의 태풍이 요동치는 밤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仕掛島’(사괘도)입니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仕掛특수하게 고안된 장치또는 속임수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속임수의 섬이라는 번역제목은 언뜻 타인을 속이겠다는 인간의 의지나 속셈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읽은 뒤 원제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실은 이 섬 곳곳에 갖가지 특수하게 고안된 장치가 존재한다는 점을 예고하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변호사 사야카와 탐정 다카오는 지난한 추리와 탐색 끝에 비탈섬과 저택에 감춰진 의외의 장치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속임수의 섬2022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와 시마다 소지가 맹활약했던 80년대의 신본격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기발한 트릭과 추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는 역시나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몇 번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억지 유머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밀실이 돼버린 섬을 배경으로 한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만큼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신본격의 작품들에서 느끼곤 했던 위화감 가득한 작위적인 트릭이 종종 목격되기도 했지만, “도대체 이런 설계를 하려면 얼마나 특이한 뇌구조를 지녀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거기다가 몇 겹의 포장을 덧댄 트릭과 미스터리가 빈틈없이 전개돼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두 주인공 사야카와 다카오의 조사는 현재 벌어진 사건뿐 아니라 23년 전 비탈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에까지 다다르는데 두 사건의 연관성은 물론 그동안 은폐됐던 진실들까지 파헤치는 과정에서 히가시가와 도쿠야가 완성한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설계도가 거듭 빛을 발하곤 합니다. 덕분에 작위적인 트릭의 위화감 같은 건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고, 마지막 장에 이를 때까지 미스터리 자체와 비극적인 서사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속임수의 섬은 한국에서 2011년에 출간된 저택섬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정 다카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경찰과 탐정으로 저택섬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유머 미스터리는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속임수의 섬에서 만끽한 매력 때문에 언젠가 저택섬에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혹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의 유머 미스터리 대표작인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시리즈에도 눈길이 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