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진
이동은.정이용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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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는 부모 없이 혼자 일을 하며 동생 학비를 번다. 낮에는 청소. 밤에는 대리운전. 동생만은 대학교에 보내고 싶다. 소식이 끊긴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사망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동생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망 신고가 되어야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단다. 사망 신고서를 받기 위해 병원에 찾아가지만 밀린 병원비를 갚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수진은 친언니와 식당을 운영한다. 남편 없이 아들을 혼자 키웠다. 단골손님으로 온 임소장과 관계를 가졌는데 임신을 하고 말았다.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상황. 난감한 수진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임소장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은 정관 수술을 했다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공무원에 합격한 아들은 여섯 살 많은 여자와 사귀고 있다. 어느 날 아들이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이동은·정이은의 만화 『진, 진』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정을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한숨이 나온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 세상을 경험해 본 사람이 분명하다. 가을장마에 축축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고 음악을 틀어 놓고 등이 아파서 누워 있었다. 업무에 관련된 책을 펼쳐만 놓은 채. 밑줄도 긋고 암기도 하면서 읽어야지 하는 마음뿐.


에라. 모르겠다. 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실제로 어떻게든 되는 걸 오늘에야 경험했다. 그러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라고 쓰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드러누워서 내일 일을 걱정하고 있다. 책을 읽자. 숫자 가득인 책이 아닌 어둡고 칙칙한 그림체와 짤막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진, 진』을 펼쳤다. 순식간에 읽을 줄 알았는데 세 시간 넘게 걸려서 읽었다.


진아와 수진은 딱 한 번 만난다. 진아가 대리운전을 하고 차가 없어 한밤중 길에 서 있는 걸 수진이 발견한다. 차에 탄 진아와 수진이 대화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걸로 끝이다. 이후 둘은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이름에 진이 들어가는 두 여자의 삶을 담담하게 『진, 진』은 펼쳐 놓는다. 두 여성 다 사는 게 녹록하지 않다. 전문적인 직업 없이 그날 벌어 그날을 사는 삶.


나 자신도 버거운데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삶. 그게 힘들고 어려울 걸 알기에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돈이 좀 생기면 책을 사고 굿즈를 고르고(장바구니를 털어 장바구니를 얻었다. 무려 고흐의 그림이 프린트된 장바구니다!) 책을 받는다. 읽고 싶은 책이 한가득. 그거면 됐다. 상황 대처 능력이 떨어져 바보 같은 행동을 종종 한다. 자책을 하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


책을 읽으면 좀 낫다. 『진, 진』 같이 현실의 단면을 예리하게 잘라내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나 혹은 당신의 이야기를 읽으면. 나만 바보처럼 사는 건 아니었고 그건 틀리지 않고 다르다는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을 보내주는 책. 『진, 진』은 그런 책이다. 공무원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마친 수진의 독백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그때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된다.'


『진, 진』에 등장하는 여성의 삶은 서글픈데 꿋꿋하다. 타인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자격이 되지 않으니까. 당사자는 그걸 바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 오늘도 나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읽는다. 이야기가 내 안에서 시와 소설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면접을 볼 때 딱 두 가지를 말했다. 주말에는 쉬고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는 삶.


고비가 나의 삶이라고 말하는 수진. 그때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되는 걸 경험한 진아.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진, 진들이 살아가고 있다. 매일 하나씩 경험하는 무시와 홀대를 견딜 수 있는 건 집에 돌아와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진, 진』을 읽은 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현명하게 굴지 못 했던 것에 대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진, 진』이 곁에 있어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두 여성이 헤쳐 나가는 허구 속 삶이 진짜라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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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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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어서 취준생으로 살기 쉽지 않더라. 사람은 자기 힘든 것 밖에 보지 못하니까. 나는 그 시절이 힘들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그래도 괜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걸 의식하기에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게 함정.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나만 나를 미치도록 신경 써서 괴롭게 한다. 쓸데없는 걱정을 만들어서 고달프게 만든다. 직업이 있든 없든. 놀고먹든. 매일 누워서 책만 읽고 그러다 잠이 들든 말든.


나는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데 나를 아는 극소수의 몇몇 사람은 젊다고 여긴다. 놀랍다. 나이 많다고 면접 볼 기회조차 쉽게 얻지 못했다. 겨우 본 면접에서는 나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운전면허증이 없다는 말에 그 나이 먹도록 뭐 했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빙자한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아, 애증의 운전면허증. 딸지 말지는 추후에 고민해 보는 걸로.


오늘 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또라는 부사를 쓴 까닭은 이상한 이야기를 자주 듣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라는 것이 있단다. 국적을 불문하고 한 번 죽었다 다시 깨어난 이들의 증언이 유사하다는 것. 고로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으면 어딘가로 가게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말이지만 사후 세계가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찍 죽은 소설가 박지리가 못다 쓴 소설을 쓰고 있으면 어떨까. 10년만 더 살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도 그곳에서 아프지 않게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독특한 소설이다. 희곡과 소설의 갈래가 섞여 있다. 소설의 첫 부분은 희곡의 무대장치를 설명하는 해설로 시작한다. 마흔여덟 번째 면접을 보러 가는 M. 취준생으로 살기 전에는 이런 말은 전부 과장인 줄 알았다. 이력서를 100통 넣었다. 몇십 번째 면접을 보러 간다. 이런 이야기들. 내가 겪어보니 알겠다. 그건 과장이 아닌 축소일 수도 있겠다는.


M이 보러 가는 면접장의 풍경은 서글프다. 취준생은 누구나 겪었을 모습. 면접을 보러 가서 한없이 기다리다 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면접을 봤는데 알고 보니 사장이 아니었다는. 괴담이 아닐까 의심 되는 에피소드. 그 후에 M은 출제자의 의도가 궁금하고 나아가 출제자의 인성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을 받고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고 합격한다. 그걸로 끝? 그러면 너무 재미없지. 이건 소설인데. M은 연수를 하기 위해 합숙소에 들어간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며 M은 변해간다.


전자책으로 읽어서인지 대화가 잘렸다. 어떻게든 종이책의 원문대로 보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M이 착각한 부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연수원에서 M은 평가표 하나를 본다. 13번에게 적힌 X를 보면서 자신이 13번이 아닐까 고민한다. 결국 M은 자신이 13번이라고 믿는다. 합격을 목표로 조장을 맡고 집 짓는 일에 공을 들인다. 아침밥까지 하면서. 사는 거. 참 어렵다. 취업이 되어도 문제인 게 업무 파악하고 인간관계 맺는 일이 만만치 않다.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은 박지리는 어떤 마음으로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를 썼을까이다. 생전에 인터뷰했던 기사를 찾아보니 대학에서 공부한 행정학이 어려워 소설을 썼다고 한다. 취업 공부하기 전에는 문학이 가장 어려웠다. 능력은 안 되는데 글은 잘 쓰고 싶었다. 열등감이 먼저 생겼다. 책을 읽기 전 작가의 나이를 먼저 봤다. 어리다. 나보다. 이제 이렇게 되는구나. 먹고살려고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아, 문학의 언어는 얼마나 다정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쉽게 쓰자는 마음.


변해가는 M의 모습은 소설 속 인물이라기보다 현실 세계 모두의 모습이다. 망상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나에게 단 한 명의 누구라도 위로와 용기의 말을 줄 수 있다면 망상의 지점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들어주는 누군가. 언젠가는 죽을 나. 살아있는 동안 책 많이 읽을 거다. 사후 세계에 가서 작가들과 신나게 떠들려고. 그곳에서 쓴 작품들도 읽어야지. 죽어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그런 망상으로 버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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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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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처음 들었던 말은 커피를 사 오라는 것이었다. 그게 취업을 하기 위해 8개월이 넘는 시간을 학원 다니기, 시험공부와 불면의 결과라니. 믿어지지 않으니 일단 믿는 척과 납득한 척 굴었다. 나는 나에게만 혹독하지 남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구는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까. 취향을 한껏 드러낸 커피 심부름은 놔두고 일을 배워야 했다. 잊지 않고 틈틈이 자신의 커피 취향을 알리는 사람들. 이 정도야. 술을 사 오라고 하지 않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나는 술을 사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야 만다.


그리하여 요즘 내가 듣는 말은 문예창작학과, 줄여서 문창과. 처음에는 넘겨 들었다. 문예창작학과 나왔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글을 써야지. 아무 말도 안 했다.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안내문을 만드는데 문창과 나왔으니 나보다 잘해야 하지 않아?라고 하기에 웃었다. 나는 어이가 없거나 황당할 때 웃는 버릇이 있는데 제발 고치고 싶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리를 피했고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이제는 안다. 악의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문창과 나왔다고 내가 있는데도 이야기하길래 그러려니 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이니까. 특징 없는 나를 소개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는 것 같아서. 심지어 나를 뽑아준 사람은 내가 국문과를 졸업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정정해 주었다. 문창과입니다.


강화길의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으며 환호했던 순간은 그런 순간이었다. 쉽게 쓰여서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온 나를 굳이 힘들게 하지 않고도 소설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 앞부분을 내가 이해했나 자꾸 더듬게 되면서 시간을 끌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한 듯한 문장으로 쓰였다는 것. 그걸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 단박에 알았다. 민원 전화를 받느라 귀가 너덜너덜해지고 공부했던 부분과 실무가 달라서 당황하고 등 한 번 바로 펴지 못하느라 집에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허리를 펴는 시간을 보내고 온 나를 『대불호텔의 유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은 아직 한창이고 가을이 오면 찐따, 병신 같은 행동을 덜하게 될까. 의문하는데 저녁의 하늘은 계절을 넘겨주는 게 서운한 듯 파랗기만 하다. 『대불호텔의 유령』 속 화자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앉으면 들리는 목소리들 때문이었다. 화자는 상황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들어간 곳에서 맞닥뜨린 악의 때문이라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모든 걸 망치는 사람이다. 너는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는 목소리들.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인 보애 이모가 살아온 서사를 마주하면서 이야기는 풀려나간다.


여자가 여자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고 결국에는 서글프게 만드는 서사는 소설 속에나 펼쳐지는 게 아니다. 『대불호텔의 유령』은 몇몇을 제외하고 여성들로 인물을 꾸린 소설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 특별할 게 없다. 당신도 나도 아는 여성들의 이야기. 학교에 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동경하고 결혼과 동시에 삶이 이상하게 꼬여가고 망쳐지는 걸 보기만 해야 했던 그 여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못한 채 타인의 이야기에 감응하며 살아가는 소설가 화자를 통해 강화길은 오늘의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조건을 제시한다.


'결국 이야기를 쓴다는 건, 살아가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냥 계속 살아가는 것. 삶은 그런 식으로 지속되는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이 결국은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이라 믿는다.'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中에서)


문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는 2021년의 여름이다. 문창과라는 말을 하는 것도 조롱이지 않을까 단정하여 쓸데없는 상처를 받고서 돌아오기도 한 시간이었다. 이제 아니까. 그건 글을 쓴다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게 신기해서 괜히 말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의 일부라는걸. 매일 사는 것은 매일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 대불호텔의 유령』은 알려주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전화를 걸어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무슨 내용의 시를 쓰고 있냐는. 전화가 오면 말해주고 싶다. 전화는 오지 않겠지만 나는 그런 상상 속 가정을 즐겨하니까.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었어요. 글이 안 쓰여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다행히 미치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를 수집하며 돌아다니며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를요. 오래전에 산 노트의 비닐을 뜯어서 시를 썼고요. 이건 비밀인데 저는 제가 쓰는 글이 좋답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아직 쓰이지 않을 이야기는 놔두고요. 간신히 쓰지만 간신히 살지 않는 제가 쓰는 글이잖아요. 소설 속 셜리 잭슨의 말처럼 이해하고 사랑받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눈치챘기에 글을 읽고 씁니다. 우리, 삶을 살기로 해요. 아직은 죽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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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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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어떻게 될까. 길을 걷다 그런 질문을 했다.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죽는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아, 나는 죽는구나. 이제 어쩌지. 막막하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것. 죽음의 순간을 자각하는 상상이 죽음이 무섭게 여겨진다고. 질문을 받은 이의 대답은 명쾌했다. 죽으면 끝.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거라는 단호한 대답.


그렇구나. 죽으면 끝. 두렵고 무서운 기분을 느낄 새도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은 별것 아닌 게 될 수도 있겠구나. 생일을 며칠 앞두고 길을 걸으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가 박지리를 나만 늦게 알게 된 걸까. 나름 한국문학 애호가라고 비밀리에 떠들고 다녔는데. 무지렁이였다. 나는. 부지런한 독자가 아니었다. 좁고 편향된 세계를 살아가는 독자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나만 그런 것 아닌 것 같다는 추측으로 박지리를 늦게 알게 된 걸 위로해 보지만 위로해보아도 소용없는 게 소설가 박지리는 세상에 없다. 일찍이도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가 남긴 책의 목록을 보면서 그중에 한 권을 읽기 위해 책을 펼치면서도 생각하게 되는 의문. 왜 죽었나. 안다. 사람은 죽는다. 그건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세상에 단 하나의 진실만 남게 된다면 사람은 죽는다는 것.


그래도 의문과 의심과 의구심은 남는다. 왜 죽었을까. 살아 있었다면 더 좋은 작품을 써냈을 텐데. 처음으로 읽은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읽는 내내 안타깝고 서글펐다. 소설을 읽어보면 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소설가의 죽음이 이토록 마음이 아픈 이유를. 내가 뭐라고 평가를 하겠느냐만. 박지리의 문장은 대단하다. 공선옥 이후에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써내는 작가는 박지리가 처음이다. 물론 내가 읽은 작품에 한해서. 더 잘 쓰는 작가도 있겠지만 내가 제일로 여기는 작가는 공선옥이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제일의 낙으로 여기는 김영일, 양춘단 부부. 평생 농사를 지으며 마을 사람들과 도란도란 살줄 알았다. 어느 날 덜컥 영일이 큰 병에 걸렸다.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로 상경을 한다. 살던 집은 마을 사람에게 잠시 내주고 영일, 춘단은 아들이 사는 곳으로 간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병원에서 알게 된 인연으로 춘단은 대학교에 미화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청소 일이지만 대학에 가는 것을 큰 자랑으로 춘단은 여긴다.


자신이 아는 모든 이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에 가게 됐노라고 어린 시절 학교에 가지 못한 설움을 한풀이하듯 자랑으로 풀어낸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시대를 앞서간 소설이다. 시대를 정확히 읽어내기 위한 노력이 담긴 소설이다. 청소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 시간 강사의 비애, 노동 운동의 현실이 소설 안에 총망라되어 있다. 석공의 딸로 태어난 양춘단의 시선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파고든다.


춘단은 대학에 청소하러 가게 된 것이 생애 가장 큰 행운으로 여긴다. 그곳에서 춘단은 자신이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뜬다. 시간 강사 한도진과의 우정은 춘단을 성숙하게 만든다. 참, 사는 거 별거 아닌데. 너무 어렵게 산다. 별거 아니라고 쓰는 건 진짜 별게 아닌 게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 먹으면 어려운 일은 없다는 뜻이다. 조급해 하지 말고 욕심부리지만 않으면 오늘은 고마운 시간이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간지럽지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할 순 없었을까.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하면서 문제의식조차 슬프게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으면서. 왜. 도대체. 왜. 춘단의 결의는 대단했다. 미화원들이 농성을 벌일 때 자신은 그저 시급이 깎여도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하면서 혼자 청소를 했던 춘단이었다. 같이 점심을 나눠 먹던 한도진이 세상을 등지고 그가 남긴 공책에 적힌 일기를 화장실 벽에 쓰면서 춘단은 각성한다.


하나의 계기가 필요할 뿐이다. 한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건. 나의 얄팍한 경험으로 볼 때 계기가 만들어지는 건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죽음을 목도하는 순간 나의 세계는 이동한다. 불온하고 위험한 세계 쪽으로. 박지리의 세계는 끝이 아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했지만 박지리의 세계는 끝나지 않았다. 그가 두고 간 절박하고 서늘한 세계는 남았다. 위험한 그곳을 알게 되어서 살아 있는 나는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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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몬스터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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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 『시소 몬스터』를 주문해 놓고 책을 받아서 머리맡에 놓는다. 며칠 그래 놓고 바쁜 척 잊어버린 척하다가 책을 펼친다. 내가 왜 이걸 지금에서야 읽고 있는 거야. 좀 더 빨리 읽어야 했던 거잖아. 왜 그랬는지 안다. 아까우니까. 아까워서. 이제 나는 알거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현실로 건너올 수 없는 이사카 월드라는 게 존재하거든. 그러니 최대한 빅재미를 남겨 놓고 싶다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감춰 두고 심신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기어 들어가 꺼내서 방전된 나를 충전해야 할 때를 위해서 킵 해 놓은 거지. 『시소 몬스터』를 신나게 읽고 리뷰를 쓰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해 놓고 딴짓을 하고 있네, 이게 뭐 하는 거임? 십수 년 전 겨울에 신춘문예에 응모해 놓고 떨어진 거 알고도 산 한국일보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준다는 문학 기사 '무낙'을 구독하고. 그때는 신문 가판대를 돌아다녔는데. (언제 적 이야기하는 거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다는 이야기.)


이제는 클릭 한 번에 내 메일함에 문학 기사가 줄줄이 꽂힌다니. 메일 주소만 적었는데 이름도 알아내서 구독해 주셔서 고맙다고 보내네. 참으로 신기하고도 이상한 인터넷 세상.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생전 보지도 못하는 이에게 이름이 불린다. 번잡한 인간관계에 엮이고 싶진 않지만 문학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나에게 인터넷은 그럭저럭 유용하다.


싸움에 재능이 없다는 건 일찌감치 알아챘다. 어떤 사건인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뒤에 앉은 아이에게 수업 시간 내내 욕설이 담긴 이야기를 ASMR처럼 듣는데도 대꾸 한 마디 하지도 못한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될 기미가 보인다. 피하거나 숨거나 인과 관계도 따지지 않은 채 사과하는 식으로. 살아왔다. 상대가 욕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이상 무례한 행동을 해도 참는 식으로. 살아간다.


『시소 몬스터』는 대립과 갈등, 싸움에 대한 이야기다. 써놓고 보니 유의어를 나열해 놓은 식이네. 문장력 없는 티를 내고 있다. 이사카 고타로를 읽는 독자들은 공감할 거다. 왜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는지. 모를 수도 있으려나.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이 글을 쓰는 인간은 소심하고 결정을 못 내리고 남의 말에 끌려다니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라는 걸 간파하셨을 거다. 그러니 리뷰도 이따위로 쓰는 거고.


논리적이고 유용한 『시소 몬스터』의 해석을 기대하셨을 텐데. 어쩌나. 신간이 나올 때마다 놀라 자빠지는 작가가 둘인데 한 명은 스티븐 킹이고(정말 정말 대단하다. 먹고 자는 것 이외에는 소설만 쓰는 건가. 스티븐 킹은.) 다른 한 명은 이사카 고타로이다. 이사카 고타로에 꽂혀서 그가 쓴 책을 전부 읽고자 목록을 만들었다. 목록을 만들 정도로 쓴 양이 방대했다. 무서운 건 계속 써 나가고 있을 예정이라는 거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상 두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이 있다, 있다. 아싸.


일본의 거품 경제 시대를 배경으로 얼핏 보면 고부 갈등이 핵심으로 읽히는 첫 번째 이야기 「시소 몬스터」. 제약 회사의 영업직으로 일하는 나오토는 술자리에서 선배에게 일미 무역 갈등보다 첨예한 자신의 집에서 펼쳐지는 고부 갈등을 상담한다. 상성이 맞지 않아 충돌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는 후반으로 가면서 놀라운 비밀이 드러난다.


지금으로부터 몇 십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미래를 다룬 「스핀 몬스터」는 정보란 믿을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파고든다. 뉴스라고 말해지는 것. 사건은 사건이 될 수 있는가. 인터넷으로 모이는 정보를 신뢰할 수 없는 이들에 의해 생겨난 신종 직업인 인간 비둘기 미토는 신칸센에 오른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운전을 할 수 없는 미토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달한다. 사소한 정보라도 인터넷에 퍼지면 악용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한다. 손수 쓴 편지를 사람 대 사람으로 전하는 미래가 배경이면서 과거지향적인 시대의 이야기, 「스핀 몬스터」.


신나고 재미있게 읽었다는 걸로 끝나면 좋겠다. 이상한 음모에 엮여서 고생하는 인물들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현실에서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대 환장의 모험을 보면서 모든 것의 파괴로 끝나지 않은 결말을 마주하면서 다행이다고 안도하는 걸로 말이다. 하루 종일 숫자를 보면서 대체 어디서 틀렸을까. 설명해야 하는데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을 안고 돌아오는 관점만 다르게 보면 별것 아닌 일인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없어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 이사카 고타로. 나의 고민이 별것 아닌 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인물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는 것으로 『시소 몬스터』는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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