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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그래서 내가 처음 들었던 말은 커피를 사 오라는 것이었다. 그게 취업을 하기 위해 8개월이 넘는 시간을 학원 다니기, 시험공부와 불면의 결과라니. 믿어지지 않으니 일단 믿는 척과 납득한 척 굴었다. 나는 나에게만 혹독하지 남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구는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까. 취향을 한껏 드러낸 커피 심부름은 놔두고 일을 배워야 했다. 잊지 않고 틈틈이 자신의 커피 취향을 알리는 사람들. 이 정도야. 술을 사 오라고 하지 않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나는 술을 사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야 만다.
그리하여 요즘 내가 듣는 말은 문예창작학과, 줄여서 문창과. 처음에는 넘겨 들었다. 문예창작학과 나왔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글을 써야지. 아무 말도 안 했다.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안내문을 만드는데 문창과 나왔으니 나보다 잘해야 하지 않아?라고 하기에 웃었다. 나는 어이가 없거나 황당할 때 웃는 버릇이 있는데 제발 고치고 싶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리를 피했고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이제는 안다. 악의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문창과 나왔다고 내가 있는데도 이야기하길래 그러려니 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이니까. 특징 없는 나를 소개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는 것 같아서. 심지어 나를 뽑아준 사람은 내가 국문과를 졸업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정정해 주었다. 문창과입니다.
강화길의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으며 환호했던 순간은 그런 순간이었다. 쉽게 쓰여서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온 나를 굳이 힘들게 하지 않고도 소설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 앞부분을 내가 이해했나 자꾸 더듬게 되면서 시간을 끌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한 듯한 문장으로 쓰였다는 것. 그걸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 단박에 알았다. 민원 전화를 받느라 귀가 너덜너덜해지고 공부했던 부분과 실무가 달라서 당황하고 등 한 번 바로 펴지 못하느라 집에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허리를 펴는 시간을 보내고 온 나를 『대불호텔의 유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은 아직 한창이고 가을이 오면 찐따, 병신 같은 행동을 덜하게 될까. 의문하는데 저녁의 하늘은 계절을 넘겨주는 게 서운한 듯 파랗기만 하다. 『대불호텔의 유령』 속 화자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앉으면 들리는 목소리들 때문이었다. 화자는 상황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들어간 곳에서 맞닥뜨린 악의 때문이라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모든 걸 망치는 사람이다. 너는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는 목소리들.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인 보애 이모가 살아온 서사를 마주하면서 이야기는 풀려나간다.
여자가 여자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고 결국에는 서글프게 만드는 서사는 소설 속에나 펼쳐지는 게 아니다. 『대불호텔의 유령』은 몇몇을 제외하고 여성들로 인물을 꾸린 소설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 특별할 게 없다. 당신도 나도 아는 여성들의 이야기. 학교에 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동경하고 결혼과 동시에 삶이 이상하게 꼬여가고 망쳐지는 걸 보기만 해야 했던 그 여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못한 채 타인의 이야기에 감응하며 살아가는 소설가 화자를 통해 강화길은 오늘의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조건을 제시한다.
'결국 이야기를 쓴다는 건, 살아가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냥 계속 살아가는 것. 삶은 그런 식으로 지속되는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이 결국은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이라 믿는다.'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中에서)
문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는 2021년의 여름이다. 문창과라는 말을 하는 것도 조롱이지 않을까 단정하여 쓸데없는 상처를 받고서 돌아오기도 한 시간이었다. 이제 아니까. 그건 글을 쓴다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게 신기해서 괜히 말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의 일부라는걸. 매일 사는 것은 매일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 대불호텔의 유령』은 알려주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전화를 걸어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무슨 내용의 시를 쓰고 있냐는. 전화가 오면 말해주고 싶다. 전화는 오지 않겠지만 나는 그런 상상 속 가정을 즐겨하니까.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었어요. 글이 안 쓰여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다행히 미치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를 수집하며 돌아다니며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를요. 오래전에 산 노트의 비닐을 뜯어서 시를 썼고요. 이건 비밀인데 저는 제가 쓰는 글이 좋답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아직 쓰이지 않을 이야기는 놔두고요. 간신히 쓰지만 간신히 살지 않는 제가 쓰는 글이잖아요. 소설 속 셜리 잭슨의 말처럼 이해하고 사랑받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눈치챘기에 글을 읽고 씁니다. 우리, 삶을 살기로 해요. 아직은 죽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