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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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과 야만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요?

 새삼스레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언 맥과이어의 소설, '얼어붙은 바다'를 읽고 난 뒤에 말이죠. 먼저 소설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말해 본다면, 이 소설 정말 압도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야기에 심취하게 하더니 끝까지 몰입도를 유지시켰습니다. 19세기, 석유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포경 산업이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시기의 이야기가 이다지도 저를 빠지게 만들 줄 몰랐네요. 고래잡이 배가 배경이라 얼른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정말로 그 시기 고래 잡이의 아주 생생한 현장을 보여줍니다. 작품을 위해 정말 많이 자료 조사를 했다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작가의 고향을 보니 어느 정도 납득할 것 같더군요. 고향이 다름아닌 '헐(hull)'이었거든요. 근대 때부터 영국 포경 기지의 중심으로 포경에 있어선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하니까요. 고향과 고향 사람의 이야기인지라, 항구나 배의 묘사도, 선원에 대한 묘사도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합니다. 이런 생생한 리얼리티가 몰입도 높은 이야기와 만나니 끝가지 소설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울 수밖에요.



 그럼, 이야기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볼까요?

 소설은 두 인물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잔인한 성격이자 소아성애자인 작살꾼 드렉스, 또 하나는 인도에서 군의관으로 있었으나 세포이 항쟁 이후 알 수 없는 이유(여기에 대해선 소설 초반에 밝혀집니다만)로 지금은 영국에 와 왔는 섬너. 처음에는 전혀 접점이 없었던 두 사람은 곧 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볼런티어 호'라는 포경선이죠. 선주 벡스터의 유혹에 섬너는 '볼런티어 호'에 오르는 것이 세포이 항쟁 당시 큰 상처를 받은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하지만 곧 이 여행의 목적이 단순히 포경에 있지 않다는 게 드러납니다. 사실 '볼런티어 호'에는 선주 벡스터와 선장 브라운리 그리고 소수의 선원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볼런티어 호'의 고의 침몰. 날로 사양 산업이 되고 있는 포경업에서 더이상 이익을 얻을 게 없으니 배를 일부러 침몰시켜 막대한 보험금을 편취할 계획이었죠. 그러나 이 계획이 아니더라도 섬너가 얼마나 위험한 항해에 참여했는지는 곧 드러납니다. 그가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포경이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북쪽 바다는 그야말로 조금만 발을 잘못 디딛어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곳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야만과 위험으로 가득한 곳. 이성과 그것의 산물인 문명은 그야말로 바다의 거친 파도에 깨끗하게 실려가 버린 곳이었죠. 대화 보다는 폭력이, 사랑 보다는 증오와 죽음이 더 횡행하는 그 곳에서 섬너는 유일하게 문명의 대표자로 남습니다.


 바로 그것을 가늠하는 시험대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죠.

 소년 사환 하나가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된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남색가로 밝혀진 한 선원이 곧 범인으로 잡히는데, 섬너만이 유일하게 객관적이며 물리적인 증거로 그가 범인이 아니라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혀내지요. 바로 그 범인이,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섬너와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로 무조건 감정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완벽한 야만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렇게 작품은 이 소설의 진짜 테마가 다름아닌 문명과 야만의 관계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문명과 야만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이죠.


 이 질문에 대하여 섬너가 우연히 배에서 기르게 되는 곰이 주요한 상징으로 쓰입니다.

 그 곰은 우리에 갇혀 섬너가 주는 먹이를 먹고 사는데, 처음엔 약하고 온순했던 이 곰이 항해가 계속 될수록 자신의 야성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볼런티어 호'가 계획대로 침몰되고 섬너를 비롯하여 배의 선원 모두가 더이상 문명의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곰은 야생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 이 곰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 항해를 통해 섬너가 꾹꾹 누르고 싶었던 자기 내면 속 야성이라는 것을 요. 다시 말해 곰은 섬너가 가진 야만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밌기에 가급적 읽었을 때의 재미를 빼앗지 않기 위해서 핵심적인 사항들을 많이 숨기느라 잘 말하지 못했습니다만 '얼어붙은 바다'는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더 많이 폭발하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섬너가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 역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지요. 그러는 가운데 독자는 저절로 문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힘겹게 유지되고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떠올려보게 됩니다.


 아직 올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앞으로 읽게 될 소설들이 참 많이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얼어붙은 바다'는 올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으로 만날 것이라고. 마치 선혈이 낭자한 생고기를 입에 넣는 것 같은 날 것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이언 맥과이어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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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
캐서린 M. 밸런트 지음, 아나 후안 그림,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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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9년 네뷸라 수상작(네뷸라 상 중에는 'Andre Norton Award'라고 해서 영 어덜트를 대상으로 한 과학 소설과 판타지 소설에 주는 상이 있는데 '페어리랜드'는 바로 그 상을 수상했습니다.)이기도 한 캐서린 M 밸런트의 '페어리랜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 드디어 나왔네요.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라는 부제를 달고 말이죠. 2011년, 클라우드 펀딩의 일환으로 온라인에서 연재되었던 이 소설이 5년이 지나 드디어 완결된 것입니다. 캐서린 M 밸런트는 이 소설을 시작할 때 이미 '페어리랜드'가 다섯 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결국 그 약속을 지키고 말았네요.


 저자 자신이 고백했듯이, 원래 이 소설은 별 기대없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은 이 셉템버(9월)라는 열 두살 꼬마의 요정 나라 여행기가 오랜 시간 이어졌을 뿐만아니라 다섯 권 모두 멀리 있는 우리나라마저 번역 소개될 정도로 커다란 인기와 좋은 평가를 얻었으니 아무래도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다섯번째 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페어리랜드'와 만났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권만으르도 왜 '페어리랜드'가 그만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 좀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일단 굉장이 독특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판타지 소설을 읽어보셨더라도 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페어리랜드' 같은 소설은 절대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흔히 판타지 소설은 현실 세계에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일들이 가능한 세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정의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 '페어리랜드'는 진정한 판타지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정말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소금 한 알갱이 보다도 더 안 나오거든요. 당신의 상상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마음껏 변화시켜 보세요.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모조리 그려 보세요. 그런 세계가 바로 '페어리랜드'입니다. 한 마디로 'ALL THAT FANTASY!'인 것이죠. 그래서 저 역시 그랬습니다만, 처음엔 좀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의 문장마저 현실에선 물과 기름처럼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들이 간단히 섞이고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따라 잡는데 애를 좀 먹게 되더군요. 그러나 차츰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페어리랜드'의 스타일에 점차 적응하고 보니 무척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매혹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제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겠군요. 여기엔 뭔가 자유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정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유를 꿈꿉니다만 그것을 실현하긴 어렵죠. 살다 보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일에 얽매이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 자체가 알고보면 그런 중력의 산물이죠. 거기에 진정한 나는 없습니다. 오직 사회화를 통해 사회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동화될 수 있도록 사회가 형성한 정체성의 '나'가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이죠. 라캉이 왜 이렇게 말했나 하면 그는 생각 자체를 언어의 산물로 보았는데 그 언어라는 게 진정한 자아를 사회의 식민지로 만드는 대표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아닌 것이죠.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지게 되는 욕망 역시 이러한 언어의 연장선 상에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욕망하기 보다는 남들이 다들 좋아하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고 라캉은 말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는 많은 돈, 좋은 집, 커다란 차, 어여쁜 이성에 대한 욕망은 사실 우리 스스로 형성한 고유의 욕망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에 잘 순응하도록 사회가 주입한 욕망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사회가 자아를 끌어당기는 힘, 그것을 저는 중력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중력에, 우리가 피로를 느끼면서도 기꺼이 끌려가는 것은 많은 것들이 그 중력을 정당화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면서 흔히 만나게 되는 온갖 학문이 그러하죠.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등. 이처럼 학문으로 촘촘하게 만들어진 그물망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우리는 더욱 사회가 가하는 중력을 진리라 여기고 행여나 거기서 달아날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채 진정한 나가 아니라 남과 닮은 나가 되기 위해 오늘도 기를 쓰고 더 잘 돌아가는 사회의 톱니바퀴로 있는 것입니다.


 '페어리랜드'는 바로 그 중력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게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성이 만든 규칙 따위 여기서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며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여도 자연 법칙이 되고 절대 명제가 되며 실정법이 되기 때문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자유 분방하다는 건 아닙니다. 여기의 이야기는 명확한 주제에 따라 일관된 흐름을 엄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주된 줄기는 부제에 나왔든 '경주(race)'입니다. 셉템버는 여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도전하는 많은 존재들과 경주를 해야 하죠. 이 경주조차 제멋대로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는 경로도 없고 내가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알 도리도 없으며 내가 가진 탈것에 기대기도 어렵고 경주를 주관하는 심판이 내키는 대로 경주자의 자리를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이토록 자유분방한 경주에서 셉템버가 승리하는 길을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페어리랜드'의 심장을 찾는 것. 이제는 왜 부제에 '심장'이 있는지 아시겠죠? 심장과 경주. 이것이 바로 이번 책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경주를 하면서 셉템버가 거쳐가는 곳이 의미심장해요. 셉템버는 도서관이나 바다 등을 지나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빼앗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서관을 다스리는 그리니치라는 놋쇠 공은 이런 말을 하죠.


 시간은 모두 못됐어. 가져가기만 하고 돌려주지는 않으니까.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하는 때는 쏜살같이 흐르고 쏜살같이 흘렀으면 싶을 때는 굼뱅이처럼 기어가지. 시간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뚱하니 흘러가. 수천 번 방향을 꺾어도 되련만. 일단 시간이 가져간 건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어.(p. 165)


 그리고 원래 바다 요정인 세터데이(나중에 셉템버의 연인이 되는 소년이죠.)는 자신의 할머니 바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할머니가 항상 따뜻한 물살이나 상냥한 고래 같은 건 아니야. 나이가 아주 많아서 자기만의 방식이 굳어져 있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집을 관리하지. 바다는 모든 걸 쌓아두기만 하거든. 파도가 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훔쳐 와. 그리고 동전 하나라도 다시 내놓는 법이 없지.(p. 209)


 시간과 바다. 이렇게 둘은 가지기만 하고 내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둘 모두 다른 것을 끌어당기기만 할 뿐,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중력과 닮아있는 것입니다. 셉템버는 그런 곳을 횡단하며 심장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심장이란 존재가 참 특이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일상 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심장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장은 태초의 모습을 뜻합니다. 소설 속 거대한 도서관은 원래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거대한 도서관을 꿈꿨기에 그런 도서관이 된 것이죠. 그 도서관의 심장은 오두막입니다. '페어리랜드'의 심장 역시 태초의 페어리랜드의 모습인 것이죠. 이것은 그대로 사회화 되기 전의 개인이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과 닮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셉템버는 현실 사회처럼 중력을 발산하는 존재들이 은폐한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 다니는 것이죠. 이러니 제가 라캉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죠. '페어리랜드'를 두고 철학 동화라고 평가하기도 하던데, 이것으로 저도 그 말을 납득했습니다.


 여지없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융합의 움직임 또한 있습니다. 여기서의 자유는 이분법적 사고에서의 자유이기도 합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천방지축과 진지함, 미성숙과 성숙, 실제와 환상, 책임과 방종이 쉽사리 구분되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하나를 내세우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리는 일 따위, 이 소설에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경주에 임하는 셉템버의 상황에서 드러납니다. 셉템버는 한 편으로 여왕이 되어 자신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철부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지만 한 편으로는 왕관이 주는 책임의 무게에서 자유롭고도 싶습니다. 그 왕관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면 셉템버는 자신이 떠나온 현실 세계의 집을 그리워 합니다. 그런데 그 집으로 쉽게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결투에서 지는 것입니다. 각자 다른 세계에서 경주를 하는 경주자들이 어쩌다 만나게 되면 무조건 결투해야 하는 게 경주 규칙인데, 그 결투에서 지면 자신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이 정말 그립다면 셉템버는 결투에서 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심장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왜 그러는 걸까요? 그런데 이 상황이 굉장히 아이러니 합니다. 페어리랜드는 자유이고, 현실 세계는 의무입니다. 원래 셉템버가 현실 세계를 떠나올 때 세계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참전하고 있었죠. 그만큼 현실 세계는 중압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셉템버를 '페어리랜드'로 데려온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 가지는 의미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페어리랜드와 현실이 가지는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현재의 셉템버에게 '페어리랜드'는 의무이고, 현실 세계는 자유입니다. 이 작품에선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를 소설은 세터데이와 셉템버의 관계를 통해 넌지시 일러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확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우리 삶 자체가 무한한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삶의 속성이 천변만화(千變萬化)이기에 우리는 고정된 의미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고 이분법적 사고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며 완전히 다른 타자와의 융합에 있어서도 거리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태도를 하나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아마도 자유가 되겠죠.. 자유, 그건 무엇보다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페어리랜드', 그 곳은 세터데이에게 시간이 그러하듯이 자유의 대지입니다. 펼쳐보시면 산에서 맞는 아침의 안개처럼 오롯이 들어찬 자유의 운무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동화적인 외양을 가지고 있지만 한 켠엔 깊은 철학적 사유도 슬쩍 감춰둔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어릴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하듯 읽을수도 있더군요. 찾아냈을 때의 기쁨도 아울러. 특히 환상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께, 정말로 독특한 환상 소설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페어리랜드'를 살짝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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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시즌 모중석 스릴러 클럽 44
C. J. 박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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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명성을 익히 들었던 작품을 이제야 만나네요. 바로 미국 작가 C.J 복스의 '오픈 시즌'이란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가입니다만 미국에선 꽤나 유명합니다. '조 피킷 시리즈'의 작가로 말이죠. 스릴러의 대표적인 시리즈 중 하나죠. 조 피킷은 물론 주인공 이름입니다. 이 사람, 여러모로 특이한 주인공입니다. 일단 직업부터 그래요. 스릴러 소설에선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수렵 감시관이거든요. 


 형사도 아니고 사립 탐정도 아니며 변호사나 검사도 아닌, 수렵 감시관이라니! 얼른 동물을 함부로 사냥하는 자들 뒤나 쫓아다닐텐데 스릴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이야기가 너무 빤하니까요. 사실 수렵 감시인의 이야기는 스릴러 보다 서부극에 더 어울리죠. 조 피킷이 일하고 있는 와이오밍 주 자체도 그렇구요. 미국에서 10번째로 커다란 영토의 주이지만 인구는 미국에서 가장 적습니다. 남한의 두 배가 넘는 크기인데 인구는 58만 정보밖에 안된대요. 사람이 없는 빈 공간을 대자연이 채우고 있는거죠. 사실 와이오밍은 문명이 아니라 광활한 대지의 자연 경관으로 유명한 곳이죠. 이 곳을 배경으로 한 '브로크벡 마운틴'이란 영화를 보셨다면 이 말을 금방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조 피킷은 그런 곳에서 일합니다. 불법 수렵을 감시하여 야생 동물을 보호하죠. 이러니 서부극과 더 잘 어울린다는 말인데, 그런데 조 피킷은 서부극 영웅다운 면모를 그리 보여주지 않아요.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불법 수렵을 하는 이를 적발했는데 오히려 그에게 역습을 받아 총을 뺏겨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니까요. 싸우는 능력이 별로 없는 편이죠. 거기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제외하면 가진 것도 쥐뿔도 없고. 그저 우리 주위에 흔한 보통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토록 평범한 조 피킷이란 캐릭터가 그런데 왜 시리즈가 계속될만큼 인기가 있을까요? 능력도 모자라고 흙수저이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는 신념 때문이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무리 상황이 불리하고 어려워도 타협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반드시 관철하고야 마는 신념, 뚝심. 바로 그것이 그에게 서부극 영웅다운 면모를 가져다주어 인기를 얻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 조 피킷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이번에 나온 '오픈 시즌'이죠. 그리고 현재 17권까지 나온 조 피킷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오픈 시즌'은 명불허전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뛰어난 스릴러입니다. 읽어보니 왜 이 시리즈가 이토록 유명한지 잘 알겠더군요. 와이오밍 주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스릴러에 서부극적인 분위기를 잘 융합시킨 작품입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말해볼까요? 앞서 말했던 조 피킷이 목숨을 잃을뻔한 일이 프롤로그처럼 지나가면 드디어 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 역시 프롤로그만큼이나 눈길을 확 잡아끕니다. 조 피킷이 아침에 출근하러 집을 나서자마자 자기 집 앞에 놓여져 있는 한 구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프롤로그에서 자신에게 총구를 겨눴던 불법 수렵인이었으니까요. 조 피킷이 그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이미 소문이 날대로 나서 잘못하면 살인 누명까지 뒤집어 쓸 수 있는 상황입니다.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죽은 사람과 같이 수렵을 하고 있는 일행을 찾아내야 하죠.  그 일행이란 '아웃 피터'란 이름의 수렵 그룹으로 지금 죽은 자와 빅혼 산에 있는 '엘크 캠프'에서 함께 야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절친한 동료 웨이시 그리고 보안관 부관인 매클라너핸과 함께 거기로 찾아가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한 남자가 텐트에서 나오며 총을 쏩니다. 그에게 대응하다 어디서 날아온지 모를 총알까지 얼굴에 스친 조 피켓은 결국 동료와 함께 그를 제압하고 텐트 안을 들여다 보니 '아웃 피터'의 나머지 일행은 모두 총을 맞고 죽어 있습니다. 그것도 이틀 전에.


이것이 체포된 남자가 저지른 일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모두 살해당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은 전자로 마무리하려 하고 수사에 미진한 부분을 남겨두기 싫은 조 피킷은 혼자 그 사건을 계속 파보려 합니다. 그러던 차에 조 피킷에겐 거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자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수렵 감시관'이란 자리까지 온갖 난관을 뚫고 마련해준 '번'이 찾아와 이렇게 제안합니다. 자신이 빅혼 산에 천연 가스 수송관을 매설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참인데 수입도 좋고 명예도 높은 확실한 일자리 하나를 줄테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이죠. 혼자라면 수렵 감시관으로 남겠지만 자기 때문에 늘 고생하는 아내와 딸 때문에 그는 갈등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장모는 앞길 창창했던 자기 딸의 인생이 자신 때문에 완전히 망쳐졌다고 원망하고 있던 상황이었거든요. 결국 자신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그는 번의 일자리를 수락하려고 하는데, 그 즈음 사냥 하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던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됩니다. 최근 산 일대에서 멸종 위기 종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멸종 위기 종이 발견되면 법에 따라 그 동물을 해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전면 금지됩니다. 사냥은 물론 개발도 말이죠.


와이오밍 주의 빅혼 산 풍경.


 조 피킷은 이번 사건이 혹시 소문의 멸종 위기 종과 관련있지 않을까 하여 그 쪽을 파고 들어 가는데 이게 또 만만하지 않습니다. 지금 피킷이 있는 마을은 몰락을 거듭하고 있는 중인데 천연 가스 수송관이 빅혼산에 설치되면 마을 경기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존재하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멸종 위기 종 때문에 마을의 사활이 걸린 사업이 없어져야 하냐며 해대는 타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보다 보니 절로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던 사건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바로 '천성산 도룡뇽' 말이죠. 천성산엔 멸종 위기 종인 도룡뇽이 서식하고 있는데 거기에 한국철도공사가 KTX 터널을 뚫으려고 하자 지율 스님이 천성산을 보호하기 위해 단식 투쟁까지 불사했던 일 말이죠. 그 때도 한낱 도룡뇽 때문에 국책 사업이 좌절되어야 하느냐난 목소리와 인간의 편의 때문에 한 종의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목소리로 나뉘어 뜨거운 찬반양론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개발 이익과 환경 보호. 그 중 무엇을 더 우선시 해야 하는가는 MB 정부의 4대강 산업이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죠. 해마다 만나게 되는 녹조 라떼와 가뭄을 보면 말이죠.


 그러니 '오픈 시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결코 우리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조 피킷의 선택에 응원도 하게 되는 것이구요. 사회가 하나로 똘똘 뭉쳐 그에게 반대하고 나서는 데도, 그는 뜻을 굽힐 마음이 없습니다. 그 일을 하면 모처럼 찾아온 안정된 일자리가 날아갈 게 명약관화인 데도 불의에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렇게 소설은 많은 반전들을 선사하면서 피킷을 정면 대결의 순간으로 데려갑니다. 소설의 후반부는 정말 굉장합니다. 특히 피킷의 딸이 악당에게 쫓길 때의 긴장감은 정말.


 제목의 '오픈 시즌'은 수렵이 허용되는 기간을 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에선 오히려 사람이 사냥 당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죠. 아무리 강한 포식자라 하여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언젠가는 피식자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제목의 '오픈 시즌'은 그런 아이러니를 담고 있습니다. 보다 현명한 포식자는 언젠가 자신이 피식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때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자일 겁니다. 환경 보호도 그런 준비 같은 게 아닐까요? 눈에 보이는 잠깐의 이익을 취하느라 생태계의 섭리를 무시했을 때 오래지 않아 우리가 어떤 대가를 받는지는 이미 많이 보아왔으니까 말입니다.


 '오픈 시즌'의 '오픈'이 타자를 해하는 오픈이 아니라 타자와의 공존을 위해 기꺼이 내 마음을 여는 '오픈'의 시즌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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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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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드디어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 '팬텀'이 나왔습니다. 여덟 번째인 '레오파드'가 우리나라에 나온 것이 2012년이니,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 작품을 빨리 읽고 싶었던 제겐 그만큼 고통의 시간이었죠. 이제 그 시간이 끝났네요. 그러나 해리 홀레는 아직 고통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더 깊어집니다.


 해리 홀레가 정말 살아있었다면 요 네스뵈를 아주 증오했을 것 같습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그의 고통과 비애는 깊어지고 격해지기만 하니 말이죠. '레오파드'의 리뷰를 썼을 때 저는 해리 홀레를 단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지옥을 여행하는 순례자로서 말이죠. 단테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옥의 더 심층부로 내려갑니다. '스노우맨'에서 '레오파드' 그리고 '팬텀'으로 이어지는 여정도 그러합니다. 해리 홀레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더 심한 죄악과 더 커다란 아픔과 절망을 겪으니까요. '팬텀'의 마지막에서 당신은 보게 될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차라리 이대로 유령이 되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고통을 겪는 것을... 그가 시리즈 초반부터 내내 트라우마로 짋어지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동생 죽음만큼이나 거대하고 끈질긴 트라우마를 다시 한 번 가지게 될 순간을...

 '팬텀'은 지옥을 배회하는 유령의 절규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전작 '레오파드'와 유사하게 '팬텀'에서도 해리 홀레는 누군가 때문에 다시 노르웨이를 찾아옵니다. '레오파드'에선 아버지가 곧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죠. '팬텀'에서는 자신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올레그가 살인 누명을 쓰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 그의 죄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해리 홀레는 노르웨이로 온 것입니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동생의 죽음이 남긴 트라우마의 기억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해리 홀레는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갔다가 동생을 잃게 되었죠. 그러므로 해리 홀레를 부른 것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신이 지고 있는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생 억누르고 회피해왔던 고통스런 기억과 마주하라고 말이죠. 아마도 그런 이유로 '레오파드'에서 해리 홀레가 노르웨이로 오게 되는 것이 소환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일 겁니다. 심판에 회부되는 것과 비슷하게.


 만약 해리 홀레가 심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분명 해리 홀레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라켈과 올레그와 가족이 되지 못하는 이유와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레오파드'가 은연 중에 보여주는 것은 억압과 회피였죠. 그는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고 그동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고통이 자기 옆으로 흘러가게 내버려뒀습니다.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를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것은 이것이 노르웨이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레드 스패로우'에서 요 네스뵈는 2차 대전 때의 노르웨이 과거를 빌려와 현재의 노르웨이가 죄악의 땅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노르웨이는 거기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이 그저 억압과 무시의 암막으로 가려두기 바빴습니다. 정면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고개를 돌리고 못본 척 해버린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죠. 이처럼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를 지금의 노르웨이가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던 결과를 바로 이 '팬텀'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레오파드'일 때만 해도 노르웨이의 죄악은 화려한 외관 아래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팬텀'에선 더이상 아닙니다. 위장막은 이미 걷혀져 죄악으로 일그러진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 네스뵈는 '바이올린'이란 '마약'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르웨이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마약 유통 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산 국가까지 되었다고 말이죠. '팬텀' 소설 초반은 그렇게 마약에 깊이 오염된 노르웨이란 지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엔 우리가 생각했던 노르웨이의 모습은 더이상 없습니다. 오히려 전 세계에 고통을 퍼뜨리는 만악의 근원입니다.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토르 슐츠가 그것을 암시하죠. 그는 국제선 항공기 기장인데 러시아 마피아와 손잡고 다른 나라로 마약을 몰래 운반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노르웨이로 다시 돌아온 해리 홀레는 '레오파드' 보다 훨씬 더 깊은 지옥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실을 나타내듯 그에게 가장 끔찍한 비극과 조우하고 말죠. 아들과 다름없는 올레그가 구스토란 십대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는 비극을.


 그와 같이 일했던 동료말고는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해리 홀레는 자신의 조국에서 이제 완전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는 걸 느끼며 홀로 올레그 사건의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것은 더이상 손쓸 수 없게 망가져 버린 노르웨이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올레그 자신이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죠. 전작에서 그토록 죄와 멀어보였던 올레그가 어느새 마약에 중독되어 마약을 중개하는 일을 돕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므로 해리 홀레에게 올레그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곧 노르웨이의 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건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아무래도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습니다.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대한 해리 홀레의 태도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으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해리 홀레의 모든 시도와 노력이 결국 좌절하게 될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단서는 해리 홀레만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홀레가 싸우는 거대한 마약 조직의 수장 두바이가 가진 과거 신분 역시 이를 보여줍니다. 그가 신부였다는 사실 말이죠. 한 때 신부였던 사람이 지금은 마약을 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얼른 떠오르는 것은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일 겁니다.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건, 종교가 아편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은 현실을 스스로의 의지로 변화시키기 보다는 방관과 회피를 일삼게 만들기 때문이었죠. 


 결국 해리 홀레와 두바이는 닮은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올레그의 비극과 구스토의 죽음은 해리 홀레와 두바이가 속한 아버지 세대의 죄악을 미래 세대가 대신 속죄하는 것이라 해야겠죠. 정말 의미심장한 것은 소설에 유령이 된 구스토의 독백이 장마다 삽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홀레의 이야기 곳곳에서 구스토는 햄릿 앞에 홀연히 나타난 아버지 유령처럼 끼어들어 그와 똑같이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햄릿이 그랬듯 이렇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들려주는 것은 그 책임을 묻기 위함입니다. 내 죽음이 누구의 책임이고 이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다시 말해 구스토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당한 비극은 계속 반복될 거예요.'


 '팬텀'이 정녕 놀라운 것은 이런 구스토의 예언이 현실로 이뤄졌다는 겁니다.

 '팬텀'이 나온 2011년, 세상 전체를 놀라게 만든 대학살이 노르웨이에서 일어났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청소년 여름 캠프로 가장 유명한 우퇴위아 섬에서 76명의 십대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건 말이죠. 그 범인은 극우주의자에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였습니다. '레드 스패로우'에서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의 병폐로 지목한 바로 그런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학살이 일어난 우퇴위아 섬의 모습


 노르웨이가 은폐하고 있는 죄악을 이대로 방관한다면 미래 세대가 커다란 비극을 당할 것이다라는 요 네스뵈의 예감은 이렇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처음부터 나타나 곳곳에서 등장하는 쥐에게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쥐 역시 해리 홀레, 두바이와 똑같이 아버지이고 자신에게 딸린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오직 이 쥐만이 다른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눈 앞에 나타난 장애물을 피해가려 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관통하려 합니다. 이러한 회피가 아닌 정면 대응이야 말로 미래 세대를 위한 아버지 세대의 제대로 된 처사가 아니겠느냐고 쥐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조는 위험이 닥치면 그 빠른 발로 얼른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머리를 처박는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해리 홀레와 두바이가 한 것은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까지 노르웨이가 취했던 태도이기도 했었죠. 이제 그런 것을 끝낼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져오는 건, 다음 세대가 더 커다란 고통을 당하는 것밖엔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제목처럼 유령이 아니라 실체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닥쳐오는 위험과 죄악에 온 몸으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총구를 정면으로 응시한 것처럼. '팬텀'은 그런 직시를 위한 지옥의 순례입니다.


  미래 세대. 우리는 그 말을 곧잘 언급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진정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선 잘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그 말을 할 뿐. 그러면서도 현실 문제에 대해선 나만 당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태도로 그 해결의 책임을 다음 세대로 얼른 넘겨버리죠. 자기 중심주의가 낳은 방관과 회피는 우리 역시 노르웨이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수 많은 적폐가 뿌리는 내리고 쑥쑥 자라나 미래 세대의 생기와 희망을 흡혈귀처럼 쭉쭉 빨아들이고 있으니 요 네스뵈가 '팬텀'에서 강조한 태도는 우리 사회에도 참으로 절실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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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스토리콜렉터 59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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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야마 시치리.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핫한 일본 미스터리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작년엔 벌써 몇 번째 만나는 그의 작품인지조차 얼른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나왔으니까요. 어쨌든 나카야마 시치리는 2009년, 48세의 나이로 '안녕, 드뷔시'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을 받으면서 일본 미스터리 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는데, 실은 그 때 또 다른 그의 작품 하나가 최종 본선에 올랐더랬습니다. 다시 말해 데뷔한 그 해, 시치리는 두 작품을 발표했고 모두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을 놓고 다투었다는 것이죠. 해마다 많은 작품이 출간되는 일본 미스터리 세계에서 하나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두 작품이나 오른 것도 모자라 결선에서 치열에서 경쟁했다니 이 정도면 '대단한'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별 상관 없을지 않을까 합니다.

 그 작품이 바로 이번에 나온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안타까운 게 뭔지 혹여 아실까요? 그건 제가 아직 '안녕, 드뷔시'를 읽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시치리의 두 작품 중 과연 어떤 것이 대상을 받을만 했는지 나름 평가할 수 있었을 텐데요. 여하튼 '안녕, 드뷔시'가 만일 대상을 받을만 했다면 그 작품은 분명 엄청난 걸작일 게 틀림 없습니다. 경쟁작 '개구리 남자 연쇄살인마'를 읽어봤는데, '와우!' 정말 뛰어난 작품이었거든요. 올해도 많은 일본 미스터리를 읽어봤습니다만, 근래 읽은 일본 미스터리 중 최고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바로 저번에 읽은 '속죄의 소나타' 보다도 훨씬 더 좋네요. 그리고 이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개구리 남자 연쇄살인마'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 세계에서 하나의 근원이 되는 소설입니다. 지금 그의 소설 중 대부분은 바로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에서 파생된 게 분명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직 '안녕, 드뷔시'를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만.


 만일 당신이 잔혹한 연출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면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는 단언컨대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최상의 만족감을 줄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높은 퀄리티를 가진 미스터리 소설에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가의 모든 것들이 들어 있으니까요. 공감이 가며 응원하고 싶은 캐릭터에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 전개 그리고 충격 속에서 몇 번이나 거듭되는 반전 등등. 반전이 마구 펼쳐지는 후반부의 페이지는 불길에 타들어가는 마른 종이처럼 거침없이 넘어가 버립니다. 덕분에 '속죄의 소나타'를 읽었을 때도 못 느꼈던 것을 '개구리 남자 연쇄살인마'를 통해 하게 되네요. '이제라도 이렇게 좋은 작가를 알게 되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말이죠.


  이미 지나가버렸습니다만 가족과 연인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넘치는 크리스마스 연휴에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작품의 배경이 크리스마스 시즌이거든요. 현실적 시간과 비슷하다면 소설 속 이야기가 뭔가 더 실감나게 다가올테니까요. 모두 네 명의 사람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소설을 그 때 읽는 게 참 어울리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또한 이걸 자꾸 강조하면 그렇다면 1년 가까이 기다려서 이 소설을 읽으란 말이냐 나무라실테니, 얼른 이렇게 정정하겠습니다. 아무 때나 시간 나실 때, 아니 나지 않으면 만들어서라도 꼭 읽으시라고 말이죠. 도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이렇게까지 호객 행위를 하느냐구요? 그럼, 줄거리부터 간단하게 소개해 볼까요?


 인구 8만의 한노시(city). 소설은 마치 꺼져버린 부동산 거품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점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한적하고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서 시작합니다. 거기 13층에서 거대한 도롱이처럼 매달린 시체가 발견되는 것이죠. 한 오라기의 실도 걸치지 않은 나신의 여성 시체가. 거기엔 범인이 남긴 다음과 같은 쪽지도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 개구리를 잡았다. 상자에 넣어 이리저리 가지고 놀았지만 점점 싫증이 났다. 좋은 생각이 났다. 도롱이 벌레 모양으로 만들어 보자. 입에 바늘을 꿰어 아주아주 높은 곳에 매달아 보자.(p. 12)


 이제 왜 하필이면 제목이 '개구리 남자'인지 아시겠죠? 살해당한 시신이 발견되는 장소마다 범인이 살해한 정황 그대로 개구리에 대한 글을 놓아두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모두 5장으로 되어 있는데, 모든 장의 소제목은 '매달다', '으깨다', '해부하다, '태우다' 등으로 모두 범인이 살해한 방식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범인은 두 번째는 70대의 노인을 폐차장의 차량 압축기로 시신을 으깨버렸고 세 번째는 일곱 살의 아이를 낱낱이 해부했으며 네 번째는 40대의 변호사를 불에 태웠습니다. 이렇게 계속 연속 살인을 저지르는데도 수사는 난황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희생자들 사이에 아무런 접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별도, 연령도, 직업도, 거주지도 모두 다양합니다. 소설에서 한 형사는 그냥 살인보다 연속 살인이 훨씬 더 잡기가 쉽다고 말합니다. 그건 살인이 거듭될 수록 단 한 번 이뤄지는 살인과 달리 희생자들 사이에 공통점이 발견되어 용의자를 특정하기가 더 수월해지는 까닭이죠.


 그러나 '개구리 남자'의 연속 살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희생자를 고르는 지조차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 것입니다. 살인이 반복될수록 점점 더 '무차별 살인'이라는 게 확산되어가고 때문에 '한노시'에 사는 모든 시민들은 패닉에 빠져 버립니다. 언제라도 나나 내 가족이 다음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용의자 정보 공유를 하지 않는 경찰서로 몰려가 거센 폭력 시위를 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이 사건의 한 가운데에 우리의 주인공 '고테가와' 형사가 있습니다. 아마도 나카야마 시치리의 소설을 읽어본 분이라면 이 이름이 친숙하지 않을까 싶네요. '속죄의 소나타'에도 조연으로 등장했던 형사니까요. 물론 '속죄의 소나타'에서 놀라운 추리력을 보여준 와타세 형사 역시 이 소설에 등장합니다. '개구리 남자' 이후로 나카야마 시치리는 이 '와타세 - 고테가와 형사 콤비'를 자신의 작품에 계속해서 출연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제가 '개구리 남자'를 그의 작품 세계 원형이라 보는 것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개구리 남자'에서 주역은 고테가와 형사입니다. 그는 이제 막 부임한 초짜 형사로 아직 형사의 의무가 무엇인지 또 정의는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개구리 남자' 사건을 통해 그것들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실은 작가가 이 소설에서 그에게 부여한 임무인 것이죠.


 '스스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인 단어를 하나 꼽는다면 바로 이 말이 될 것입니다. 누가 알려주는 게 아니라 오직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답을 찾아가는 게 이 소설에서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 후반에 폭발적으로 표출되는 대중의 공포와 혼돈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렇게 한노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압도적인 두려움 속에서 급기야 중세의 마녀 사냥과 다름없는 폭동을 벌이게 된 데는 근본적으로 순전히 스스로 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기대서만 그 답을 구하려 했던 데 있었으니까요. 이 소설은 언론에 대한 비판도 많이 담겨져 있는데, 언론이야 말로 이제는 국어 사전에도 올라야 할 것 같은 '기레기'란 말 그대로 제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모르는 이들을 그릇된 방향으로 호도하는 대표적인 존재가 아니었던가요? 이처럼 이 소설은 타인에게 기생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많은 이들의 어리석음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를 당신도 보신다면 분명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이제야 확연히 깨닫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체성'이라는 걸. 내 삶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니, 삶을 대하고 살아가는 태도 역시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 바로 나카야마 시치리가 작품을 통해 내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걸 말이죠. 사실 요즘처럼 온갖 가짜 뉴스들과 댓글 부대가 활개치는 때엔 더욱 필요한 태도이기도 해서 그 마음까지 오롯이 전해지니 더욱 추천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오늘은 눈이 내렸고 한파도 다시 찾아온다 합니다. 이런 시간엔 따뜻한 방구들에서 흠뻑 빠져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 소설만큼 좋은 피한(避寒)도 없을 듯 합니다.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는 거기에 딱 어울리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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