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종일토록 비가 내린다. 집 앞의 나무들이 오롯이 젖어가는 걸 보면서 시크릿 가든의 녹턴을 듣고 있다. 오늘은 6월의 신간 추천 마감일. 맥주 한 캔을 옆에 두고 잠깐 잠깐 목을 축여가면서 부랴부랴 써 나가도록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 권은 완전히 정해져 있었다는 것. 

                                      

  을유출판사에서 드디어 말로만 듣던 마오둔의 '식 3부작'이 나왔다. 중국 리얼리즘 소설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바로 그 책이다. 마오둔은 '모순'을 약간 변형시켜 만든 필명이다. 그는 이 이름을 바로 이 '식 3부작'을 쓰면서 사용했는데 그 만큼 이 3부작은 1920년대 중국 사회가 가진 모든 모순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중국에서는 루쉰과 더불어 중국의 2대 거장이라고도 불리는 그인데 슬프게도 신간평가단 중 아무도 주목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번엔 안타깝게도 선정되지 않을 듯 하다. 하지만 꼭 한 번쯤 읽어볼만한 소설이고 무엇보다 약간 말랑말랑해진 한국 소설들에 지쳤다면 이 소설을 통해 사회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거대한 서사에 한번쯤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여름엔 역시나 장르 소설이 딱이다. 이번에도 여름을 맞아 굉장한 작품들이 많이 나온 듯 하다. 벌써부터 좋다는 입소문이 자자한 루이즈 페니의 '스틸라이프'와 프로파일러를 소재로 한 발 맥더미드의 '인어의 노래'를 이번 신간 추천작으로 꼽아본다. 하나는 아가사 크리스티적 '후더닛'을 재현한다고 하니 급관심이 생기고(후더닛 소설은 나에겐 일종의 스포츠다. 정말 제대로 된 퍼즐러 소설을 만나 제대로 풀어보고 싶다.)  토니 힐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인어의 노래'도 골든 대거까지 받은 작품이라 마구 흥미가 동한다. 거기다 모두 시리즈의 첫 작품들이라니 더 읽어보고 싶다. 만일 이 두 책이 선정된다면 하루 날 잡아서 맥주 캔을 옆에다 마구 쌓아가면서 흠뻑 빠져서 읽고 싶다. 

 

  

 

 

 

  

 

 

 

 정말 사랑하는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도 이번에 나왔다.  

섬에 표류한 32명의 사람들, 거기다 여자는 단 1명. 예전에 유행했던 질나쁜 성적 농담을 그대로 따온 것 같은 설정이지만 놀랍게도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한다. 개인과 그 개인들을 엮어가는 사회에 대해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혜안을 보여주는 나쓰오인 만큼 폐쇄적이고 욕망의 해소는 철저하게 제한된 그 세계에서 과연 또 어떤 어둠을 보여줄 것인지 너무 기대가 된다. 되든 안되든 어쨌든 이 작품도 맥주를 벗삼아 마셔야 할 작품이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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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잠 재의 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0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하나의 리뷰를 빚어내는 동기는 다들 다르겠지요

  제게 있어서는 책을 읽다가 문득 들게 된 의문이 종종 리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제게 있어 리뷰란 그런 의문을 나름대로 풀어가는 과정이 되는 셈이죠. 그런데 그런 의문은 사실 작품 자체 내에 있다기 보다는 작가가 왜 하필이면 그렇게 했는지 그 동기에 대한 궁금증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지금 소개하려는 기리노 나쓰오의 이 '물의 잠 재의 꿈'이 특히나 더 그랬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 은 알려진대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외전입니다

  시리즈에서 잠깐식 등장하곤 했던 무라노 미로의 아버지 무라노 젠조의 이야기죠. 물론 나쓰오가 아버지 얘기를 썼다는 것이 저의 의문은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다른 곳에, 그러니까 왜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2부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쓰고 난 뒤 바로 1년 뒤에 그녀의 아버지 얘기인 '물의 잠 재의 꿈'을 내어놓았나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천사는 94년, 물의 꿈은 95년에 나왔습니다 .) 작가에게 있어 1년이란 참으로 짧은 시간 아닐까요? 그것도 연속된 시리즈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로 부터 무려 30년 전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 현실감 넘치는 생생한 묘사를 해온 나쓰오로선 그렇게 오래된 시대의 분위기를 상세하고도 세부적으로 살리기 위한 자료 조사만으로도 1년으론 벅찬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저로 하여금 이런 의문을 들게 합니다. 혹 '물의 잠 재의 꿈'은 애시당초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쓸 때 부터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렇게 보면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물의 잠 재의 꿈'은 참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한 소녀라는 점. 그리고 그 소녀가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같은 점은 그렇게 객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공들에게도 똑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으로 한 생명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점도 같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스포일러가 될 우려가 있어 여기까지만 말하려 합니다. 아무튼 이 두 작품이 우리나라에서 동시에 나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행운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두 권을 나란히 읽게 된다면 그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모습들이 더 잘 보이게 될 테니까요. 

 이 둘이 가진 비슷한 측면이 그렇게 많다면 이것은 애초 부터 두 작품이 모두 나쓰오의 머리 속에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물론 무리가 없진 않겠지만,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각을 더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나쓰오가 미리 같이 기획을 했다면 그건 분명 독자들에게 나란히 보이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러니 1년이라는 짧은 시차를 두고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요. 그리고 그렇게 유독 나란히 보이고 싶었다면 나쓰오는 이 두 작품 모두를 가지고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라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오래동안 이 두 작품을 함께 음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확신 같은 것도 들고 해서 이렇게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 확신은 이것이었습니다. 나쓰오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듣기 위해선 이 두 작품 모두를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고. 그러니까 두 작품을 동시에 읽을 수 있는 당신은 정말 행운인 것입니다.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94년에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전, 64년에 일본은 동경 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그건 2차 대전의 패배로 잿더미에서 시작했던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어 서서히 재건해가던 일본이 드디어 고도 성장의 시대로 돌입했던 60년대의 장밋빛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은 정확히 바로 그 1년전을 다룹니다. 그러니까 동경올림픽 개최가 확정되고 일본의 미래에 대해 온갖 장밋빛 전망이 넘쳐나던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30년 뒤의 일본의 모습을 나쓰오는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30년의 공백이 저는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30년은 바로 일본이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했었던 그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풍요, 선진국 진입, 미국마저 삼켜버릴 정도로 엄청났던 경제 대국. 미국 국민에게 있어 루즈벨트 시절이 일종의 유토피아로 남아있다고 한다면 일본인들에게는 아마 저 30년이 그러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90년대 부터 일본의 거품경제는 급속하게 몰락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물의 잠 재의 꿈'은 그 고도 성장기의 입구에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은 그 출구에 서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 나왔던 94년은 급속한 거품의 붕괴로 전후 최초로 대대적인 뱅크런이 일어나 은행이 도산하기도 했던 해였습니다. 그리고 '물의 잠'이 나왔던 95년 1월엔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었죠. 

 

 여기서 이 의문은 이제 보다 본질적이 됩니다

 나쓰오는 왜 하필 아버지의 얘기를 그 입구에 그리고 딸의 얘기를 그 출구에 세웠던 것일까 하고 말이죠. 일본 최대의 풍요로운 시기였던 그 30년을 마치 괄호치듯이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것은 아무래도 그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거기엔 당연히 작가의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의문이 좀 더 근원적으로 명확해지면서 저는 드디어 두 작품이 펼쳐보이는 내용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물의 잠 재의 꿈'에는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하나는 '소카 지로'라고 하는 폭탄 테러범이 일으키는 사건과 다른 하나는 무라노 젠조의 죄책감으로 작용하는 '다키' 살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혀 다릅니다. '소카 지로'는 일본 사회 초유의 관심사이지만 '다키' 살인 사건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무라노 젠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오로지 '소카 지로'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키가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거절해 버린 것이고 결국 그것이 그의 인생 전체를 뒤엎을 만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죠. 이것은 무라노 미로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에서도 똑같습니다. 무라노 미로도 여기의 무라노 젠조 처럼 하나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와타나베의 죽음입니다.(물의 잠 재의 꿈에서도 와타나베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동일하게 언론쪽 일을 합니다.) 그녀가 살해당할 때 미로는 자신이 끌렸던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죠. 그렇게 젠조와 미로가 모두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 충실할 때 그들이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결국 초래해버린 죽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30년의 시차를 두고도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의 하나의 방증이자 사실 그 불변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고자 함입니다

  즉 거기에는 하나의 무관심이 있습니다. 저마다 보다 더 큰 것을 쫓느라 한 개인의 삶엔 무관심한 것이죠. 나쓰오는 무리노 미로와 젠조의 반복된 죄책감을 통해서 30년 동안이나 일본이 고도성장을 거쳤지만 결국엔 파국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은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무관심했던 결과가 아니었겠느냐고 은밀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암시는 시리즈의 최종작 '다크'에서도 반복됩니다. 나쓰오는 버블의 확장으로 겉으로는 가장 풍요로웠던 80년대의 일본의 가장 가까웠던 한국에서 일어난 '광주 학살'을 가져옴으로써 그 바로 이웃한 나라에서 죽음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데도 거기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자신의 풍요로움에만 취했던 일본을 질타합니다. '다크'에서 미로는 '김'이 들려주는 광주에서 학살당한 무수한 시체들이 마구 매장당하던 그 거대한 검은 구덩이에서 어떻게 살아돌아왔는지에 대한 생존담을 들으면서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갈등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절감합니다. 그 광주의 거대한 검은 구덩이는 '물의 잠 재의 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곳이 바로 젠조의 고향이자 다키가 살던 곳인 '스미다 강 건너편'이죠. 

  시궁창 악취가 풍기는 스미다 강을 건너자마자 갑작스레 번화가가 자취를 감추며 거리의 불빛도 쓸쓸해졌다. 어둑한 불빛이 오랜만에 옛 집에 있던 곳으로 가는 자신을 맞이하느 가족들의 영혼 같았다. (P.110) 

  이 문장은 젠조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핵심이자 작품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번화가가 사라진, 거리의 불빛 마저 쓸쓸해진, 시궁창 악취로 가득한 스미다 강의 어둑한 저 편은 앞서 사카이데 파티가 열렸던 '하야마마치'와는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바다 냄새가 강렬해졌다. 차는 하야마마치에 들어섰다. 무라노는 길 왼편에 차를 세우고 사카이데가의 위치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물을 것도 없었다. 해변에 포드며 뷰익 등 외제차가 줄줄이 서 있는 집이 보였다. 아마 저 속이 사카이데이리라. 황실 옆의 값비싼 땅에 위치한 저택 주변에는 높다란 담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정원과 맞닿은 해변을 전용 해수욕장 처럼 이용하는 듯 했다. 저택 옆쪽 산에는 수 그루의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P.88) 

   이렇게 나쓰오는 문장의 배열 까지 섬세하게 똑같이 맞추어 가면서 그 둘의 묘사를 강렬하게 대비시켜 보여줍니다. 그것도 후각 시각을 총동원해서 말이죠. 어둔 밤과 환한 대낮, 악취가 나는 강과 푸른 바다, 불빛 조차 쓸쓸한 거리와 외제차로 빽빽한 거리. 거기다 물어 물어 찾아가야 하는 다키의 집과 한 눈에 척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사카이데 집과의 대비는 그야말로 나쓰오가 이것을 통해 중심이 되는 공간과 그로 부터 밀려나 무관심속에 버려진 공간을 말하려하고 있음을 무엇보다 확신케 합니다. 그렇게 소카지로에 의해 사회적으로 밀려난 관심 밖의 존재들은 그렇게 공간적으로까지 밀려난 어둡고 냄새나는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젠조는 그 스미다 강의 건너편으로 갈 때 오랜 옛 집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더구나 쓸쓸한 불빛들 마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들의 영혼처럼 보입니다. 이 묘사는 정말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미로도 그렇지만 젠조 역시 그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방황하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직업이 있지만 '특종꾼'으로 그러니까 잡지사에서 정규직들이 제대로 기사를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고용하는 이른바 비정규직입니다. 거기다 자신을 거기로 끌고들어왔고 절친 고토와 함께 잘 뭉쳐서 일하던 '군단'는 지금 거의 와해직전입니다. 그는 그렇게 자꾸만 경계선 밖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늘 집 밖을 떠돌아 다니는 그에게 그 어디서도 안식을 가질수가 없는데 그 밤 다키를 데려다 줄 때 그는 비로소 가족들의 환영을 받는 것 같은 안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젠조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나쓰오가 현재의 일본이 정말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디에 눈을 돌려야 하는가 혹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 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곳은 바로 '스미다 강 건너편'이죠.  

 

 그렇게 나쓰오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어둠을 그들의 목을 잡고 억지로 바라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나쓰오는 그 어둠, 그 안에 억눌린 약자들의 삶 이야말로 진정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크'에서 미로가 결국 젠조를 죽이러가는 것은 그 30년을 지워버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나쓰오가 가장 일본의 고도성장기였던 그 30년에 대해 내리는 직접적인 평가이기도 합니다. 즉 그것이 아무리 풍요로운 것이었다 해도 약자들의 삶을 무관심하게 방치한 만큼 그냥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이며 '물 속으로 익사당한 잠'이며 문자 그대로 '다크'한 지옥일 뿐이었다는 거죠. 

  제목 '물의 잠 재의 꿈'은 사실 소설 속에 나오는 두 개의 죽음을 그대로 상장화한 것과도 같습니다. 익사당한 다키는 그야말로 '물의 잠'(사실 여기엔 또 하나의 죽음인 '요시코'가 있으나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스터리적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기 위해 그것은 말하지 않겠습니다.)이며, 재의 꿈 또한 죽은 자의 말에서 가져온 것이죠. 소설에서 이들은 모두 '피해자들'입니다. 물의 잠을 자게 된 인물도 재의 꿈을 꾸었던 인물도 정말 바라는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목숨을 빼앗겼기 때문에 피해자들이고 누군가의 의해 그 꿈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입니다. 의미심장하게도 나쓰오는 이 둘에게 죽음과 박탈을 가져다 주었던 주체들을(그 둘에게 있어 죽음을 준 자와 박탈을 준 자는 서로 다릅니다.) 비슷한 존재로 묘사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 둘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나쓰오는 언급하지 않은 또 하나의 죽음까지 더해서 모두 셋에 대한 피해자의 계보학을 써내려 갑니다. 

 푸코가 말했듯이 계보학적 접근을 취하는 것은 그 궁극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은 그저 원인이 아니라 그것을 일으키게 한 하나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장본인'인 것입니다. 나쓰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 또한 그렇게 해서 궁극적 장본인을 밝힙니다. 그 장본인이 바로 30년 동안 고도 성장기간을 거쳤으면서도 변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본이 파국적으로 전락하게 만든 존재입니다. 그 존재는 수많은 약자들의 죽음을 또한 초래한 존재이기도 하니 당연히 범죄자입니다. 때문에 나쓰오는 그들을 당연히 소설 속의 범죄자들로 등장시킵니다. 이것은 무라노 미로의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또 똑같습니다. 이렇게 자꾸만 드러나는 이러저러한 공통점으로 인해 저는 어쩔 수 없이 원래 이 모두가 나쓰오의 계획 속에 있던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결국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과 '물의 잠 재의 꿈'에서 등장하는 범죄자는 똑같습니다. 물론 존재론적이 아니라 계층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나쓰오는 두 작품 모두에서 그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로 명확하게 하나의 계층만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부러 바로 하야마마치와 스미다 강 건너편을 병치시킨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계층 자체만을 단순히 공격하기 위해서 나쓰오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고도성장기를 거치는 동안 열린 과일을 가장 많이 따먹은 계층이기 때문에 상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으로 부터 오는 과일을 먹어치웠다는 것은 곧 계속화된 성장일로를 걷던 그 30년 동안의 일본 자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나쓰오가 그 계층을 범죄자로 잡은 것은 바로 그 죽음을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일본' 자체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일본 자체가 그들의 성장을 지속시키기 위해 계속적으로 약자들의 삶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었고 결국 그 죄업은 부메랑이 되어 일본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물의 잠 재의 꿈'의 결말은 조금은 해피엔딩인 것 같지만 '다크'에서 결국 그 해피 엔딩의 요소가 거꾸로 젠조의 죽음을 원하게 된다는 것은 정확히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물의 잠 재의 꿈'이 나왔던 95년엔 앞에서 얘기했듯이 전후 최대의 지진이라 불리었던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해였습니다

 그것은 안그래도 거품이 붕괴됨과 동시에 나날이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일본에 내리는 모든 게 끝장났다는 파국적 종지부이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대지진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기리노 나쓰오의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여기에 어떤 운명적인 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도 만듭니다. 아마도 나쓰오는 그것을 일종의 '신벌'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소설에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 처럼 말이죠. 

  놀라운 소설입니다. 더구나 어떻게 이렇게 두 개의 작품으로 그렇게 하나는 30년 동안의 일본 고도 성장기의 입구에다 다른 하나는  출구에다 세워 둠으로써 30년 동안 '그렇게 풍요를 구가했던 일본이었건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것은 오로지 오욕 뿐인가'를 되돌아볼 생각을 했는지 정말 놀랐습니다.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아무래도 나쓰오가 이렇게 두 개의 작품을 나란히 세상에 내어놓았던 것엔 보다 깊은 의도가 있는 것 같아 그것을 밝히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무척 수다스러워졌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매력적인 깊이인지라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더군요. 정말 마음에 드는 시리즈인데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니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가장 먼 이웃이기도 한 일본을 보다 깊이 음미할 수 있을만한 작품으로도 감히 추천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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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소설은 평범한 중년 가장 K의 갑자기 바뀌어 버린 기묘한 일상의 '3일간'을 그린다

  소설이 시작되는 토요일 아침. K는 문득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지만 토요일에는 자신이 단 한번도 자명종을 미리 맞춰놓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내고는 문득 낯선 이질감을 느낀다. 그저 즉흥적인 기분 정도로 생각했던 그 이질감은 그러나 알몸으로는 절대 자지 않는 자신이 일어난 지금 완전히 알몸이라는 사실과 세면대에서 스킨이 자기가 쓰던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것임을 발견하고는 더욱 더 커진다. 그렇게 이질감은 점점 더 커져간다. 이제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에게 까지 번져 아내와 딸도 어쩐지 예전에 자신이 알던 존재들이 아닌 것 같고 그 날 있었던 처제의 결혼식에선 도통 낯선 사람들 무리에 자신이 잘못 끼어있다는 느낌마저 가지게 된다. 

  그는 아무래도 그 원인이 자신의 기억속에 공백으로 남아있는 금요일 밤의 몇 시간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도대체 그 시간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려 최선을 다하지만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더욱 오리무중에 빠질 뿐이다. 결국 K가 토요일날 확인하는 것은 자기가 알고있던 세상이  도대체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완전히 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망상인지 아니면 정말 현실인지 가늠할 수 없어현재 아내에 대한 원망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정신과 의사인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는 그에게 두가지 처방을 내려준다. 

  하나는 다시 아내와 한 번 잠자리를 가져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를 만나보라는 것. 토요일 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잠자리를 시도하지만 결국 확인하게 된 것은 아내가 이전과는 완전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다. 급기야 여기엔 무언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누군가의 어떤 의도가 있으며 아내는 그것을 위해 잠입한 '고정간첩'이라 여기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주위 모든 사람들이 분명 낯이 익은 존재들이지만 사실은 '타인'들일 뿐임을 절감하며 그 밤을 보낸다. 

 

  다음 날, 일요일. 그는 마지막 남은 친구의 처방을 마저 따르려 현재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인 누나를 찾는다. 

  오래도록 왕래가 없어 누나의 현주소를 알수없던 K는 결국 이혼한 전남편 P교수를 찾게되고 그가 은밀히 여장을 즐긴다는 것을 알게된다. P의 도움으로 누나와 만나게 된 K는 누나가 다시 재혼한 남편이 바로 자신의 장모와 이혼했다던 그 장인임을 알고는 당황하지만 다행히 누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안도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용솟음치는 누나를 향한 근친상간적 욕망에 곤혹스러워진다. 자신이 보내지 않은 하지만 자신의 필적이 틀림없는 편지 때문에 누나가 자꾸만 사과를 하자 K는 그 편지를 받아오고 정말 그 편지를 자신이 보냈는지 아니면 자신은 아닌 다른 존재가 보냈는지 알아보려 한다. 편지에 나와있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건다. 들리는 건 놀랍게도 자기와 똑같은 이름과 목소리. 만나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상대방은 자기는 지금 아무 할 일이 없으니까 아무때나 만나서 술이나 같이 하자고 말한다. 

  한 편 점점  커지는 성적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던 K는 그것을 해소하려 어젯밤 대리 기사에게서 건네받은 명함에 적혀있던 성인방을 찾아간다. 거기서 그는 세일러문을 코스프레하고 있는 여성을 만나 그녀의 노래와 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한번도 간음의 욕망을 가진 적이 없었던 문자 그대로 바람직한 신자의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 그러한 욕망과 그곳으로의 찾아감은 커다란 죄책감을 일으켰고 그는 결국 성당에서 고해를 하고 미사에 참석하나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한다. 그 뒤 그는 그 사내를 찾아간다. 

  미스테리적 구성을 가지는 소설이기에 아무래도 나중에 읽을 이의 즐거움을 위해서 내용의 소개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저 만큼도 너무 많이 말한 것은 아닐까 살짝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아무튼 소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K는 토요일 문득 자신의 일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일요일 결국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한다. 그러니까 K에게 있어 토요일이 이질감을 확인해가는 여정이었다면 일요일은 그것을 다시 완전히 '낯익은' 것으로 바꿔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다른 말로 '치유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런 표현을 썼지만 사실 소설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속시원히 해결되는 건 없다. 

  여전히 금요일 밤 그 지워져버린 기억 속의 시간에 K가 무엇을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으며 정말 누군가의 의도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일요일의 결말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어쩐지 조금은 뜬금없이 느껴질 정도다. 도대체 왜 그 얘기가 거기에 나와야 했었는지 얼른 납득하기가 어렵다. 주인공의 이름이 K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슷한 결말로 결국 미완성으로 남아버린 카프카의 '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그토록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보려 헤메이고 다녔던 K는 그대로 성으로 들어가려 애쓰던 '성'에서와 K와 너무도 닮아보인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카프카의 '성'처럼 현대인이 어쩔 수 없이 그림자처럼 껴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론적 슬픔을 그린 것인가? 

  하지만 다행히도 카프카의 '성' 만큼은 난해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최인호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가는 조금쯤은 헤아려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렇게 주인공 K는 풀지 못했던 미스터리를 제3자인 나는 한 번 풀어볼 수 있을 듯 하다. 

 

  왜 이런 서양 농담도 있지 않은가? 

  처음으로 운전을 배우던 여자의 얘기다. 그녀가 운전을 가르쳐주는 남자와 함께 차에 올라 운전을 하는데 도통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 자꾸만 실수를 연발하는 그녀를 향해 옆에 있던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럴 땐 네가 잘 하듯이 얼른 뒷좌석으로 건너가서 생각해 봐 ." 남자는 늘 자기가 운전할 때 뒷좌석에 앉아서 시시콜콜 운전에 참견하던 그녀를 빗대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정작 그 상황에 몰입해 있으면 잘 모르게 되더라도 그것으로 부터 물러나 바라보면 더 잘 알게 되는 경우는 있는 법이다. 그렇게 '뒷좌석'의 잇점을 빌어 한 번 풀어보려 한다. 

 

  우리는 가장 먼저 최인호가 직접 쓴 서문에서 그 힌트를 찾아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는 현대소설을 다시 쓰면서 '타인의 방'과 '술꾼'을 쓰던 때의 단거리 주법을 되찾고 싶다고 했었다. 힌트는 그 주법이 아니라 바로 인용한 작품에 있다. '타인의 방'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술꾼'은 그가 작품을 통해 추구하는 것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즉, '타인의 방'이 하나의 그릇이라면 '술꾼'은 거기에 담긴 작품의 영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타인의 방'과 '술꾼'이 저마다 다른 하나의 영역을 차지하면서 이 소설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타인의 방'이 토요일을 '술꾼'이 일요일을 차지하고 있다고. 토요일이 '타인의 방'에서 그랬듯이 개체의 실존이 사회의 규정성 속에 함돌되어 가는 이야기라면, 일요일은 '술꾼'에서 그랬듯이 그렇게 사회에 함몰되어 가는 척 하면서 사실은 그것에 저항하여 새로이 본연의 자신 모습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토요일이 현상이라면 일요일은 대안이고 토요일이 사회가 구축하는 자아를 가두는 미로라면 일요일은 그 안에서의 길찾기라고... bla bla bla... 이렇게 이 작품은 토요일과 일요일이 서로 '명제'와 '반대명제'로 기능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여 이른바 '종합명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바로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마음 속'이다. 이를테면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도대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란 무슨 이야기인가? 

  이것은 사회의 억압과 개인의 욕망 실현이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그런 이야기이다. K에게 초점을 두어 말한다면 사회로 부터 규정된 자신의 모습을 탈피하여 본연의 자신이 가진 욕망에 충실해져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하게 욕망의 이야기이다. 라고 쓰니 정말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정말 그런 이야기니까. 

  수수께끼들이 풀리는 건 '일요일'이니 그렇게 거기에 집중해서 말하려 한다. 그렇다면 먼저 그 일요일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얘기했던 '술꾼' 부터 소개해야 되리라. 

 

  '술꾼'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술집을 이리저리 전전하는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결말에 가서 아버지 찾기는 아이가 술을 마시기 위한 단순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즉 술꾼은 아이였고 그는 술집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어른들이 재미삼아 주곤하는 술을 마시기 위해 그런 핑계를 대었던 것이다. 실로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욕망의 억압과 그 개인이 그러한 사회에 저항하는 그 '원형'과도 같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 참으로 절묘하게도 아이는 아버지를 찾는다는 핑계를 댄다. 밤마다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술집을 떠돌아다니는 아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어른들에게 효자처럼 보여졌을 것이며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아버지를 찾아 헤메이는 바람에 분명 그가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여 그를 위해 이런저런 술잔을 건네는 것이다. 즉 아이는 사회가 바라는 '효자'를 연기하여 자신의 욕망을 은밀히 충족시키는 것이다. 라캉식으로 본다면 아버지를 찾는 척 하는 아이의 모습은 그대로 자신이 가진 은밀한 욕망을 숨기며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아이는 아이는 술을 대놓고 마시면 안된다는 사회가 가하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억압을 그렇게 사회가 원하는 모습을 연기함을 통해서 거꾸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이가 사회에 대하여 맞서는 저항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렇게 '술꾼'은 욕망을 두고 벌이는 사회와 개인간의 치열한 싸움에 대한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것이 그대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나는 본다. 왜냐고 혹시나 물으실 분들을 위해 근거를 밝혀두자면 일단은 그 무엇보다 소설 전체에 걸쳐 노골적이든 은밀하든 성적 묘사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뭐든지 넘칠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다면 주목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며 아직 식견이 좁은 탓이겠지만 성적 묘사를 욕망의 충족 문제와 과연 관계없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 의문이다. 아무튼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만 얘기하고 얼른 다음으로 넘어가련다. 어차피 얘기하다보면 결국엔 다 나오게 될 것이다. 

 

  이제 여기에 맞추어서 생각하면 K가 겪었던 3일간은 전혀 다르게 읽힌다. 

  결말의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재주껏 얘기해야 할텐데 그러기가 참 쉽지가 않다. 아무튼 죽이되든 밥이되든 어떻게든 밀고나가보자. 일단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주목을 끄는 것은 소설에서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넘쳐 흐르는 성적 묘사이다. K는 토요일에서 부터 일요일까지 가는 곳곳마다 성적인 것을 본다. 거기다 토요일 K가 갑자기 일상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계기 또한 결국은 성적인 것이다.  그는 이질감의 근원을 쫓아가다 그것이 금요일 밤, 그러니까 그들이 '전야제'로 부르던 그 밤에 안았던 아내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생기없었다는 걸 기억한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속임수의 시작은 오늘 아침 부터가 아니라 어젯밤 부터 비롯되었다. 어째서 아내의 몸이 냉동된 시체처럼 느껴져 정욕이 아닌 섬뜩한 살기를 느끼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아내가 마치 스킨처럼 다른 상표의 여인으로 바뀐 것일까?(P.29) 

  K에게 금요일의 정사 '전야제'는 정해진 불문율이었다. 단 한번도 그른 적이 없었던 절대적 일상의 규칙. 그는 늘 충실하게 스스로가 속한 일상의 규칙들을 지켜가는 자였다. 그런데 그 일상의 견고했던 틀이 그만 금요일 밤엔 깨어졌다. 늘 채워왔던 성적 욕구를 그 날만은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 독백은 지금 K가 느끼고 있는 이질감의 원인이 그 밤의 성적 불만족에 있는 것이라 슬며시 유도한다. 견고했던 일상이 결정적으로 탈구되었던 원인이 성적불만족이라는 사실은 이 3일간의 K의 헤매임을 이렇게도 해석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니까 금요일날 충족시키지 못했던 성적 욕망을 결국 완전하게 충족하기 까지의 여정이라고. 

  이렇게 보자면 소설에서 왜 그리도 성적 묘사들이 많이 나오는지도 이해가 간다. 뭔가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 눈엔 언제나 그것에 관계된 것만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법니다. 결국 그가 일상에 성적 장면이나 충동들을 가장 많이 보고 느낀다는 것은 그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그 모자른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성적 불만족이 결정적으로 그의 견고했던 일상을 탈구시킨 원인이라는 것을 볼 때 이렇게 그의 채우지 못한 성적 욕구를 채운다는 건 다시 그 견고했던 일상을 다시 찾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애시당초 그가 3일간 자신의 일상을 제대로 되찾기 위해 벌이는 그 추적은 사실 자신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과 상황이 가짜라서가 아니라 그 균열을 가져온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발악에 다름아니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K의 상황을 더욱 더 강조하고자 가장 친한 친구 H 마저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묘사한다. H는 지금 불륜을 벌이고 있는 아내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분노는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주도권을 빼앗겼다는데 있다. 그는 그 주도권을 다시금 되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간호사와 불륜을 저지른다. 이 상황은 K와 똑같다. H가 마구 아내에게 내뱉는 욕설은 사실 욕구불만인 K의 아내에 대한 지금 심정과도 같으며, H가 간호사와 불륜을 맺음으로써 상상적으로 충족시키려 들듯이 K 역시도 지금 그것을 충족시켜줄 다른 무언가를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H와 K는 동일한 인물, 도플갱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엔 참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사실은 K만의 1인극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그렇게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K가 각각 다른 가면, 페르소나를 쓴 것과도 같이 해석된다. 사실 이 1인극에 대한 얘기는 작가가 왜 이런 원색적인 욕망을 소설에다 과도하게 주입하고 있는 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가 여기서 보게되는 것은 '술꾼'에서 했었던 것과 같은 교묘한 저항인 것이다. 그런면에서 K의 보다 완전한 성적 충만을 위한 여정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회가 K에게 부여한 규정에서 벗어나 보다 본질적인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드에 따르면 사회로 부터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은 언제나 사회의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변장을 한다고 한다. 직설적인 욕망 충족 행위는 곧바로 사회의 처벌을 받기 때문에 사회가 허용하는 방식인 것 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즉, K가 아내가 딸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은 사실은 그러한 사회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연기인 것이다. 그렇게 거기에 나오는 K가 자신의 적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인물들 장인, 자꾸만 만나게 되는 악취 나는 여인, '을' 같은 인물들은 사실 그의 적이 아니라(그가 그들을 '적'으로 인지하는 것은 사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전략이다.) 사실은 그의 욕망을 충족시켜 보다 더 진실된 자아가 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들인 것이다. 그렇게 '술꾼'에서 술을 얻어먹기 위해 교묘하게 거짓말을 했듯이 K가 보다 은밀한 차원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쓰는 가면인 것이다. 

 

  그렇게 여기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은 K가 쓰는 가면에 따라서 나눌 수 있다. 

  즉 사회가 허용한 자아로서 쓰는 인물군, 자신의 욕망이 정말 원하는 인물군 그리고 조력자 이렇게 말이다. 가장 전자에는 자신이 가짜로 여기는 모든 인물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인물군엔 일요일날 만나는 모든 이들이 포함될 것이다. 특히 일요일에 만나는 인물군들이 토요일 인물군과는 다르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 날 만하는 인물들은 P교수를 비롯하여 자신의 욕망에 전적으로 충실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사회가 부여하는 '규정적 외피'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존재들이다. 오로지 과감히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려는 인물들이다. 결국 K가 누나를 만나 근친상간적 성애를 느낀다는 것은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이다. 근친상간을 금히는 것은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모든 사회가 질서를 세우기 위해 가장 근본적으로 설정하는 금기이니까 말이다. 즉 근친상간적 성애를 K가 갖는다는 것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무너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개인적 욕망을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나가려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표층적 차원에서 K의 보다 진실한 일상 찾기 혹은 보다 진정한 자아 찾기라고 읽히는 이 소설은 사실 다 읽고나면 지금까지 완전히 거꾸로 독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그런 면에서 참으로 기묘한 소설이라 할 만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았던 그의 혼란은 사실 세계가 달려져서 느끼게 된 혼란이 아니라 문득 사회가 부여한 옷이 아닌 자기 스스로 진정한 자아의 옷을 입어야겠다는 내부의 욕망으로 비롯된 혼란이었으며 그 가짜인 세계를 벗어나 진짜인 세계를 되찾고자 벌였던 방황은 사실 진짜 세계가 아니라 진짜 자아로 돌아가기 위한 일종의 구도의 과정 같은 것이었음을 소설을 덮고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 후반에 K가 궁극적으로 하게 되는 깨달음은 정말 이 소설이 던지고 싶은 화두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기묘한 독서 경험은 소설에도 나오고 있는 그야말로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은 것이다. 에셔의 그림 처럼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뫼비우스 띠의 안쪽을 걷고 있는 개미들이라 생각했는데 소설을 읽고나니 사실 우리가 걸었던 쪽은 그 바깥쪽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K 처럼 낯익지만 사실은 타인들로 가득한 도시를 여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은  그 타인들에게서 진정한 자신의 '낯익음'을 발견하는 것으로 가득한 도시를 여행하는 것인 것이다. 소설의 가장 마지막 월요일 K가 지하철 역 에스컬레이터에서 보는 마치 영화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처럼 묘사된 그 장면은 정확히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최인호가 제목에서 정말 드러내고 싶었던 도시는 바로 그러한 도시였던 것이다. 

 

  이질감은 낯선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보다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계기이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한 만큼 사회가 입혀놓은 외피에 함몰되어진 우리의 자아를 그것을 찢고 다시 드러내어 되찾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질감은 기피나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환호와 힘껏 껴안아야 되는 대상인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문득 완전히 거꾸로 읽어왔었구나 깨닫게 되는 것도 사실은 이러한 이질감을 소설 자체에서 부터 느끼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도 생각된다. 그렇게 이 소설은 온전히 이질감으로 충만한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바로 그 이질감 자체가 최인호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주려는 진정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노래 가사의 삽입이라든지 테이프 레코드 버튼을 임의적으로 삽입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소설은 자주 고다르가 '점프 컷'을 통해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주려했던 것 처럼 똑같이 종종 우리로 하여금 소설에 거리감을 가지게 한다. '거리감'이란 '이질감'의 또다른 표현이다. 더구나 뭔가 약간씩 어귀가 맞지 않는듯한 문장들의 배열은 더더구나 이러한 느낌을 가속화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소설에서 드러나는 문체적 특징도 꼭 언급하고 싶은데 그것을 쓰자면 너무나 길어지므로 할 수 없이 생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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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남매맘 2011-07-1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전체에서 물어보는 문장 뒤에 물음표가 빠져 있는 게 첨엔 오타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읽다보니 작가의 의도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미덕의 불운 열린책들 세계문학 159
싸드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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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덕의 결정(結晶)은 인내다. 

 꾸역꾸역 순간마다 발현되는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고 오래 참는 것. 

 인내란 참으로 고독한 투쟁. 

 겉으로는 잔잔한 수면과 같아서 바깥 사람들은 휘몰아치고 있는 내면의 현재를 모른다. 

 착한 이들이 때로 백치의 표정을 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스스로의 얼굴을 무표정의 투명한 거울로  만들어 내면으로 파고드는 타인의 시선을 반사시키기 위해서다. 

 때문에 바보를 가장함은 내면의 움직임을 조금도 바깥으로 내어주지 않으려는 끈질긴 방어의 욕망이다. 이 모든 고독한 투쟁이 바로 미덕의 실천이다. 

 미덕은 그렇게 온전히 자기 안에서 자기를 위해 치뤄지는 제의.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어놓는 제의인 것이다. 

 그런데 왜 참지? 
 무엇이 그토록 그녀로 하여금 참게 만드는 거지? 

 신에게 사랑받기 위하여 그녀는 늘 바보같은 미소를 짓는다. 

 미덕은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면서 실현되지만 

 그것은 오히려 더 큰 신으로 부터의 보상을 바라는 더 큰 자기애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미덕이란 더 큰 자기애적 욕망의 실현을 위하여 자기애적 욕망을 억누르는 행위인 것이다. 때문에 여기엔 그 어떤 이타애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미덕은 타인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만을 고양시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목적 없는 욕망이며 오로지 욕망만을 위한 욕망이다. 

 그래서 도착적이다. 

 수전노가 돈에 대해 가지는 욕망과 동일하게 도착적이다.  돈은 오로지 물질로 교환되어야 그 가치가 있지만 수전노는 물질을 줄여 돈을 모은다.  물질을 줄이니 삶은 궁핍해지고 사람들의 무시와 비난마저 덤으로 얻지만  돈만을 축적하려는 욕망에 그것은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이 돈에다 투사하는 욕망을 그 어느 때든 실현할 수 있지만 수전노는 기꺼이 그 충족을 지연시킨다. 그 지연 때문에 돈이 타인에게 불러일으키는 부러움이 오히려 비난이 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돈이 있는 한 언제든 그 상황을 전복시킬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미래에 존재할 전복의 가능성 때문에 그는 기꺼이 현재의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전노는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가능성을 먹고 사는 존재다. 하지만 이미 도착이 되어버린 욕망은 한없이 그 가능성의 실현을 지연시킨다. 어쩌면 영원히 그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으로 남아있을 지 모른다. 수전노가 그 도착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건 오로지 그의 죽음을 통해서 뿐이다.  그래서 죽음은 그에게 일종의 구원이기도 하다. 

 미덕의 욕망도 이와 같다. 수전노가 미래의 실현가능한 가능성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무릎쓰듯이 미덕의 욕망에 빠진 자도 미래에 주어질 신의 보상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수전노가 그 가능성의 구현체인 돈만으로 만족하듯이 미덕의 욕망에 빠진 자도 신의 보상을 확고히 해 줄 그 미덕의 실천을 통해 얻는 자기만족감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사람들이 수전노를 욕했듯, 그렇게 자신을 아무리 바보라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어도 상관없다. 미래를 사모하는 자에게 현재란 그저 사라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부재'의 공간이고 그 공간에 있는 타인들 역시 찰라에 사라질 하루살이의 운명들이니까. 그렇게 타자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애로 뒤덮인 견고한 껍질은 그 어느 것 하나 상처입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이 지나치면 때로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신의 명령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힘들기만 하냐고... 

 그녀는 사람에게 하소연하지 않는다. 간원의 대상은 오로지 신 뿐이다. 당연하다. 타인은 그저 자신의 미덕을 발휘할 때만 의미있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타자들이 괴롭히면 괴롭힐 수록 겉으로는 아픈 척 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타자들의 행동은 자신이 미덕을 실쳔하고 있음의 외부로부터의 확인이며 훗날 신에게 보상을 받을 때 내어놓을 수 있는 근거가 되아주니까.  더 많은 고난은 신으로 부터 더 많은 인정을 받게 한다. 그렇게 '착한 자'들은 스스로 매저키스트가 되어간다. 그리고 그러한 매저키스트적 욕망은 '순교'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순교의 욕망은 역설적이다. 자기를 완전히 지움으로써 자기애의 극한을 완성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신에게 하는 간원은 자신의 고난을 평가에 고려해달라는 호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고통의 호소 또한 보다 더 큰 자기애적 욕망 충족을 위한 발화인 것이다. 더 큰 쾌감을 얻기 위해 일부러 꾸며내는 신음 소리와도 같이... 

 그래서 사드는 이 미덕의 화신을 처벌한다. 새디즘을 만든 장본인 답게 아주 가학적으로... 

 하지만 미덕의 화신, 쥐스띤느는 사드가 가해오는 그 고통을 오히려 더 환호할 뿐이다. 당연하다.  그녀는 이미 뼈 속까지 매저키스트이니까. 고통이 크면 클 수록 신으로 부터의 상급으로 구체화될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는 강도는 더욱 더 커다래지니까... 

  그렇게 '미덕의 불운'은 새디스트 사드와 매저키스트 쥐스띤느의 교합과도 같다. 

  사드는 가학이 고조되는 선율을 작곡하고 쥐스띤느는 온 몸으로 그 볼레로를 표현한다. 

 

  제목처럼 미덕이 불운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를 고통에 빠뜨려 감으로 밖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죽여감으로 밖에는 충족될 수 밖에 없는 욕망... 

  보다 완전한 충족을 위해선 보다 완전히 스스로를 지워야만 하는, 그렇게 미덕의 실천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그 매커니즘 자체가 미덕의 불운인 것이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불행이 아니라 불운이란 말을 제목으로 썼다. 불운이란 단순히 운수가 좋지 않은 것. 그렇게 운명이 아니라 단순한 상황적인 것. 따라서 마음먹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아니한가. 마치 표층적인 차원에선 고통이었으나 심층적인 차원에선 쾌감으로 받아들였을 쥐스띤느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라도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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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실로 2018-04-04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글이네요.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ICE-9 2018-04-12 01:30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쓴 글을 일부러 읽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누런개 매그레 시리즈 5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누런 개'는 일종의 단절이고 그렇기에 새로운 시작이라 할 만합니다. 

   (보다 자세한 것은 이 페이퍼를 참조 http://blog.aladin.co.kr/748481184/4879544)

   뭣보다 여기에서는 심농이 천착해 왔던 '타인의 삶'이 한 개인에서 한 사회 전체로 보다 넓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확장 속에서 심농은 이제 그 사회 전체를 불안과 공포로 몰고가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포착해내려 합니다. 이전의 네 작품에서는 과거의 상처에서 환기되어 막연한 불안감으로만 남아있던 것이 '누런 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공포로 나타나고 결국엔 그것이 쓰고 있었던 가면 마저 벗겨집니다. 

  여러면에서 심농의 '누런 개'는 조지 오웰의 '숨쉬러 나가다'를 연상시킵니다. 쓰여진 시기는 비록 누런 개는 32년 숨쉬러 나가다는 39년으로 7년이라는 시차가 있지만 둘 다 뭔가 변하고 있는 시대적 공기를 포착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하나의 범죄로 상징화 시켜서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심농의 '누런 개'에서는 '누런 개'로 오웰의 소설에서는 그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사체로 나타난 한 여성의 잘려진 다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범죄로 상징되어 나타났기 때문인지 '누런 개'는 매그레 시리즈중(물론 제가 다 읽어본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읽어본 것만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만)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추리소설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Who done it? 을 파헤치는 '퍼즐러'식 추리소설 말이죠. 그렇게 '누런 개'는 범인 찾아내기를 거대한 줄기로 해서 교묘한 알리바이 공작이라든지 반전과 반전 끝에 밝혀지는 범죄자의 의외성이라든지 아무튼 우리가 전형적인 추리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을 빠짐없이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농이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이전까지 해오던 작업을 포기하고 갑자기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그가 이제 천착하는 주제가 달라짐으로써 거기에 맞도록 서술의 방법이 달라진 것 뿐입니다. 그렇게 심농이 '누런 개'에서 집요하게 미스터리적 기법을 취하는 것은 그가 '누런 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암암리에 불안으로 물들여 점점 가위눌리게 만들었던, '그 것'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체를 밝히는 데 있어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지게 하려면 미스터리적 기법 만큼 적합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농은 '누런 개'에서 매그레의 추적 끝에 드러난 한 사람의 얼굴을 통해 그것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웰 자신도 맡았던 그 변화된 공기가 궁극엔 가져올 얼굴이기도 했습니다. '숨쉬러 나가다'에서 오웰은 이제 세상이 점점 예측불가능해질 것임을 예감합니다. 한 치 앞도 헤아리기 어려운 세상이 곧 펼쳐지리라는 두려움이 그로하여금 모든 내일이 명약관화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도록 만들었고 결국엔 그것을 다시 찾고자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일상으로 부터의 일탈 마저 감행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웰을 그토록 두렵게 만들었던 그 '예측불가능성'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전쟁으로서 강요하게 될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전체주의'의 핵심을 '예측불가능성'으로 파악한 것이죠. 왜 오웰이 그렇게 생각했느냐면 그는 전체주의가 무엇보다도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전체주의란 무엇보다도 사유하지 않는 괴물이라는 것이죠. 때문에 그것엔 지금까지 인간이 해왔던 대로 어떤 이해의 시선도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적인 불가해한 존재이기에 그는 예측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죠. 이렇게 서로 부르는 명칭만 다를 뿐, 오웰 역시 아렌트 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파시즘이 가지고 있던 핵심을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농 역시 그 오웰 보다 7년 전에 이미 그러한 핵심을 눈치채고는 작품에 새겨놓았습니다. 바로 그 산물이 '누런 개'인 것입니다. 

   '누런 개'가 이전 작과 무엇보다도 차별화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심농이 파악한 전체주의의 핵심을 한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인물 묘사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얼굴에서 확인한 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철저히 자기 이해관계에만 집착하고 타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머리는 있으나 가슴은 없는 무심한 얼굴인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얼굴이 전적으로 심농에게 혐오스러운 것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라면 문제랄 수 있는데 어쨌든 파시즘은 심농에게 야누스적인 존재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니까 사이렌의 노래소리를 돗대에 밧줄로 묶인 가운데 듣고 있는 오디세우스 처럼 말이죠. 그렇게 파시즘은 심농에게도 역시 공포이자 매혹으로 동시에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공포로써의 징후를 '누런 개'에서 확인할 수 있고 매혹으로써의 징후를 '타인의 목'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후일 심농이 나치 동조자의 혐의를 받았던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야누스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어쩌면 심농이 그렇게 된 것은 파시즘이 과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정확히 예측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오웰 이 그랬듯이 당시는 온갖 예측불가능성의 대기로 넘쳐있었으니까요. 심농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전의 작품에서 일련의 공간 묘사를 통해 시대가 완전히 예전과 다르게 흐르고 있고 그 흐름 또한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 바 있었습니다. 그렇게 심농에게도 동시대는 전혀 예측불가능성으로 다가왔기에 파시즘에 대한 태도 역시 이중적이었을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러한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누런 개'는 정말로 뛰어난 심농의 시대적 감식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치밀하게 적용된 미스터리적 기법은 그야말로 범죄 소설이 시대적 공기를 담아내는 데 있어 얼마나 성공적인 그릇이 될 수 있는지 또한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러니 저러니 따지지 않고도 미스터리적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이 작품에 대한 얘기를 '스누피'로 유명한 찰즈 슐츠가 '피너츠'에서 언젠가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끝맺으려 합니다. 

   '그저 이것만 기억해. 네가 일단 언덕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그 뒤 부터는 속도가 저절로 붙을테니까...' 

   '누런 개'는 바로 그 언덕의 정상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이제 당신에게는 그 다음 작품으로 정신없이 빠져드는 일만 남아있는 셈이죠. 그것도 가속도가 점점 붙은 채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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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7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8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E-9 2011-06-28 00:27   좋아요 0 | URL
역자님께서 이렇게 칭찬의 말씀을 해 주시니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저 역시 읽으면 읽을수록 심농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시대의 예민한 공기를 담아내고 있으리라고는 몰랐습니다 그것도 아렌트 보다 수십년 전에 파시즘의 실체까지 정확하게 파악할 정도로 말이죠.하지만 역자님의 좋은 번역이 아니었다면 그런 면을 쉽사리 간파해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누런개'는 다른 번역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이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린 것 같았으니까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좋은 번역으로 심농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해 주신것에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

ICE-9 2011-06-28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 '누런개'에서 레옹과 엠마의 관계는 저 역시 인상깊었습니다. 저는 왠지 뤽 베쏭의 영화 '레옹' 이 정말 많이 떠오르더군요. 이름이 같기도 하지만 세 남자에게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있는 엠마의 처지가 왠지 레옹에서의 '나탈리'를 연상시켰어요. 그리고 소설의 레옹이 오로지 개 하나만을 벗하고 살아가는 고독한 처지가 식물 하나만 벗하고 살아가는 영화속 레옹과 또 겹치기도 하고... 어쩌면 정말 뤽 베송이 '누런개'에서 레옹의 영감을 얻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조사도 해봤지만 인터뷰 기록은 찾을 수 없더군요. 그래도 왠지 정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이것도 이전에 읽었을 때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던 연상이었는데 역자님의 좋은 번역 덕분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의 독서는 그래서 정말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금 많이 느끼게 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번역이니 이번에야말로 심농의 작가로서의 진정한 면모가 재평가를 이루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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