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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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창세기에 따르면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고 어둠과 빛을 분리한 것처럼 모든 걸 구분지었다. 언어의 구현과 같았던 빛은 분리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물에서 육지를 분리했고 육지에서 나무를 구분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물들을 개별로 갈라놓았다. 명령자는 자신의 화신과 같은 남성 존재를 통해 모든 분리된 개체들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작업을 완수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로 또 이름을 주는 자와 받는 이로 나뉜 것처럼 명명은 순수한 행위로만 남지 않았다. 그것은 권력이었다. 명명(命名)에 따르는 규정이 틀이 되어 명명 받는 자를 속박했으니까 말이다. 명명은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명령처럼 금지였다. 스스로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물의 결정인 눈과 같았다. 한없이 유동의 존재였던 그것은 규정에 포박되어 존재에 내포된 다른 모든 가능성을 잃고 단순한 객체로 고정되고 말았다. 그건 흡사 부검대 위에 올려진 생명이 떠나간 주검과 같았다. ‘도둑 자매’에 나왔던 엄마의 사체와 다름없는. 눈(snow)은 물의 사체(死體)였다. 명령과 금지 위에 세워진 에덴을 신은 누구도 자신의 허락없이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도록 화염검으로 둘렀다. 순응 아니면 추방일 뿐이었다.


 그런 엄혹한 독재 체제 안에서 은 최초의 저항자였다. 그는 속삭였다. 규정을 벗어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너의 바깥이 존재한다고. ‘1979’에서 교사가 본 ‘미숙한 거인’인 소녀가 교사에게 했던 것처럼, 네가 절대라고 믿는 세상이 실은 망상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뱀의 말에 현혹된 최초의 인류는 황무지로 추방되었다. 그 곳은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 나온 ‘스키타이족의 무덤’이었 ‘얼이에 대해서’에 나왔던 ‘반두’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곳. 최초의 여성 이브가 에덴에 머물러 있었다면 늘 신의 화신인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있어야 했을 것이다. 거기서 그녀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었다면 이브에게 추방은 마냥 형벌인 것일까 아니면 구원인 것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이브와 그리 다르지 않다.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정체성이 아닌, 주입된 혹은 강요된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때로 그 정체성이란 옷이 나와 맞지 않아 답답하거나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런 우리에게 뱀이 다가와 달리 살 수 있다는 바깥이 있으며 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까? 나는 이런 질문을 가진 가운데 '뱀과 물'을 읽었다.


 갑자기 창세기 이야기부터 하게 된 것은 ‘뱀과 물’의 첫 단편인,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가 그것을 많이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 단편에서 처음 소년으로 나왔던 아이는 소녀로 밝혀지는데, 그가 소년을 가장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밤마다 ‘눈 아이’라는 빨치산 소녀에 대한 책도 읽어주는데, 그것은 저항하다 화형 당한 소녀의 이야기다. 그렇게 소녀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의해 정체성을 규정당했고 저항은 곧 죽음이라는 메세지를 주입 당했다. 그런 아버지의 직업이 독립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눈 표범의 조련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소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존재라는 걸 더 뚜렷이 나타낸다. 더구나 에덴과 똑같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부재하고 있다. 그것은 선악과와도 같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야 할 존재로 보인다.

 

 결정적인 것은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소녀가 아버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여성 아동심리학자다. 그녀는 무엇보다 신체가 매우 장신인데, 이러한 길이는 아무래도 뱀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그녀가 소녀에게 주로 하는 것이 질문인 것도 그러하다. 창세기 속 뱀이 이브에게 주로 한 것도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뱀이 그렇게 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것처럼 여성 아동심리학자는 질문을 통해 독립적인 자기 존재의 인식을 가져왔던 선악과와 똑같이 소녀가 그때까지 잘 떠올리지 않았던 진정한 자신과 어머니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게 만든다. 그와 함께 여성 아동심리학자 소녀를 경찰로 상징되는 문명의 세계에서 추방하여 세찬 물살의 강이 있는, 물의 세계로 돌려보낸다. 뱀이 가져다 준 단절과 똑같이 말이다. 그 단절을 통한 탈주에 있어 뱀이 동기를 부여하는 새로운 인식의 근원이라면, 물은 지향점이 되는 새로운 존재의 근원이다. 이러한 닮은 점이 나로 하여금 창세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뱀과 물'의 단편들은('1979'에서 교사가  부동산 업자의 말 때문에 자신이 산 집이 실은 황무지에 있는데도 '과수원'에 있다고 믿은 것처럼.) 우리가 무엇보다 서사(敍事)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첫 단편이 창세기의 외양을 띠는 것은 창세기가 우리의 현재 정체성을 구현한 근원적인 서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뱀과 물'은 거기에 '1979'에 나오는 키 큰 소녀와 리우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구멍을 뚫고 균열을 일으키려는 것 같다. 뭐든 다 분명해 보이는 환한 대낮과 같은 세상에 구분과 분리가 불가능한 거무스름한 어둠을 가져온다. 그건 우리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어디에 서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지금의 자리가 스스로 선택한 의자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노인 울라에서'에 나온 사령관이 어디선가 가져와 앉힌 의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의자를 이루고 있는 서사가 어린 시절에 여겼던 것처럼 진실이라 믿었지만 그건 기실 애니메이션에 흔히 나오는, 발판이 있는 줄 알고 걸었는데 뒤늦게 자신이 허공 속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처럼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뱀과 물'은 바로 그것을 보도록 한다. 우리의 발 아래에 진짜 놓여 있는 것을.


 그런 세상은 생각한 것만큼 단일하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뱀의 존재들이다. 아버지가 사라지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그저 단단한 벽으로만 이 세계가 실은 '물의 결정'에 다름아니라고 얘기한다. 서사가 그것을 결빙시켜 벽처럼 여기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것이 아마도 대부분의 단편에서 학교가 공통된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원하는 규격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자발적으로 순응하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기관이 아니던가. 아버지에게서 주입된 서사는 그 곳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그럴수록 어머니로 상징되는 바깥의 존재는 사라지고 우리의 뇌리 속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 또한 옅어진다. '1979'에서 교사의 동생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을 고향이라 말한 까닭도 그것일 것이다. 어린 시절은 본래 무규정적이다. 남아 있는 미래의 시간만큼이나 가능성이 무한하다. 그것은 아무 것도 적히지 않는 페이지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입된 서사는 어린 시절을 하나로 고정해선 그것을 전부라 여기게 만들었다. 산포 가능한 것들을 모조리 붙잡아 억지로 한 줄로 세우곤 언제까지나 하나의 규정 속에 가둬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망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망상을 만든 이들이 형성한 세상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빛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그 빛으로 그들이 만든 것은 획일화된 세계일 뿐이었다. '도둑 자매'에 나오는 바다가 대표적이다. 그 단편의 두 소녀는 문명의 상징인 지프를 운전하는 남자에 의해 바다로 간다. 하지만 그 바다는 태고적 바다가 아니다. 유동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배출하는 곳이 아니라 현실의 모든 것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은 획일적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은 제철소가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그 곳은 아이들이 일률적으로 머리를 짧게 깎고 군인처럼 행동하는 곳이었다. 그들이 부리는 사냥개는 돼지 장수와 같은 이질적은 존재를 찾아다녔다. '도둑 자매'의 어머니가 그렇듯이, 그들과 닮지 않으면 매장된다. 그 세계는 결코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다. '뱀과 물'의 여교사는 그 세계에 순응하기로 한 이들의 미래에 단 하나의 가능성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타자들을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규격에 맞도록 길들이는 일이다. '노인 울라에서'에 나온 것처럼 남성이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연필이나 깎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뱀과 물'은 이런 세상을 흔들고자 한다. 그건 우리가 안주하려는 이 세상이 생각하는 것만큼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단편과 '얼이에 대해서'처럼 세계의 서사를 뒷받침 하고 있는 아버지가 어느 순간 훌쩍 사라질 수 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1979'가 그러하다. 소설이 왜 하필 이걸 제목으로 가져왔을까? 그 의도에 대해 소설은 딴 척을 한다. 소설은 이란의 레자 팔라비 국왕의 추방으로 그런 아버지의 사라짐이 소설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지만 정말은 다른 걸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1979년은 오랜 독재로 국민들을 이렇게 저렇게 멋대로 규정하면서 아버지로 군림한 박정희가 살해된 해이니까 말이다. 돌연한 아버지의 퇴장을, 그렇게 자기 세계의 뿌리가 잘려가는 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현실로 경험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망상을 진실로 간주하고 안주하려고 해도 거기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기필코 찾아오고야 마는 어스름의 시간처럼 우리를 구현하고 있는 서사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우리는 언제고 하게 된다. 단편 '뱀과 물'에서 기존 정체성의 연극을 중단시킨 콜레라의 창궐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확고할 수록 우리는 의심해야 하며,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에 맞서 분열된 자아로 남아야 한다. 한 쪽은 현실을 보면서도 다른 한 쪽은 그 너머의 바깥을 보아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노인 울라에서' 이후 '뱀과 물'까지 자아의 분열이 계속 나타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 나는 이 분열을 순응의 태도(어느 한 쪽이 사라지고 그 결과 남은 한 쪽이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인 울라에서'의 화자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자 남성 중심 문화에 저항하는 뱀과 같은 존재이기도 한 '흉노 마녀'가 화형을 당하자 자신이 그대로 사라졌다(p. 146)고 말한다. '도둑 자매'에서는 '포항 미스코리아 대회'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여성이 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뻐드렁니'를 숨긴다. '뱀과 물'에서는 아예 자신과 같은 여성을 남성 문화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여교사가 되어 있다. 그들에겐 모두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순응을 위해 그 순간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로 해석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분열은 어딘가에 다다르기 위한 매개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라졌지만 소멸된 것이 아니고 '도둑 자매'의 어머니 얼굴에 난 네이팜탄 자국처럼 그 잔영을 남긴다는 점에서 봉합은 끝내 실패하는 것으로 봐야했다. 그러므로 분열, 그 자체가 진짜 의미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하나로 여기지 않을 것. '얼이에 대해서'나 '뱀과 물'에서 시간이 선형적으로 나오지 않듯이, 자아 역시 다양체로 생각할 것.(연속된 시간에 대한 감각과 자아에 대한 감각은 유사하다. 모두 가장 획일화된 감각이니까 말이다.) 소설의 세계가 '노인 울라에서'에서 흉노 여왕에 대한 불길한 소문으로, '도둑 자매'에선 소녀들의 노래로 그리고 '뱀과 물'에선 이런 저런 공상으로 뒤덮이듯이, 그런 균열과 붕괴의 조짐 앞에 자신을 적극 내밀 것('뱀과 물'에서 전학생 길라가 우연히 만난 스님은 이 소문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맞다, 소문은 해치지 않는다. 거꾸로 탈주를 돕는다.). 이런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나 안의 타자를 생성하는 데 인색하지 말 것을 말이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화자가 시를 외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읊는 것처럼. 그런 그녀가 바랐던 그대로 여행자가 되는 것. '뱀과 물'은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는 여정이었다.


 때로 세상엔 너무 환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어스름 가운데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다. 진실은 명확한 문자가 아니라 암호처럼 해독 불가능한 문자들 사이에서 보다 더 드러날 때도 있다. 유동하는 물과 같은 세상에선 뭐든 가능하다. 우리의 존재도 그러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잊고 있었다.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서사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에 맞게 멋대로 이리저리 잘라내고 비틀어 그 바깥은 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뱀과 물'은 새로운 서사를 주려 한다. 그것은 '얼이에 대해서'와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선로에 가로 누워 있던 것처럼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온전히 인정하고 놓아두는 서사이다. 개체를 특정 범주에 넣지 않으며, 개체 그대로 존중하는 서사이다. 자기가 원하는 옷을 타자에게 입히는 서사가 아니라 직관 속에서 타자의 나신(裸身)이 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서사이다. '뱀과 물'은 그런 이종(異種)의 서사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태초의 서사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그건 마지막 단편에서 화자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에서 구현되어 있다. 그런 서사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혐오와 적대가 날로 깊어가는 이 시대에, 어디서나 나보다 더 큰 것에 기생하여 그들의 권력에 힘입은 정주(定住)의 열망을 가열차게 드러내는 이 시기에, 거기에 반대하여 점이 아니라 흐름이 되라고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말하길, 글쓰기엔 흐름 이외에 다른 기능이 없고 흐름은 돌연변이를 만드는 것이라 했다. '뱀과 물'도 바로 그것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뱀의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것 같다. 예외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환영하는 세상. 보다 많고 다양한 돌연변이의 출현이 가능한 세상. 새로이 만난 뱀의 말에 설득된 나는 그런 세상이 얼른 오기를 기꺼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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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어런스 - 우주에서 보낸 아주 특별한 1년
스콧 켈리 지음, 홍한결 옮김 / 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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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주는 소년의 로망이다.

 소년이라면 한번쯤 우주에 가봤으면 하는 꿈을 꾼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가 높은 인기를 얻었던 까닭은 그러한 소년의 로망을 비록 간접 체험이지만 한껏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철이는 둘을 모두 떠나 보낸다. 하나는 '999'라는 열차고 다른 하나는 동반자 메텔이다. 이건 소년의 로망을 둘 다 떠나보내는 것과 같다. 메텔과 같은 아름다운 여인 또한 소년의 로망이니까 말이다. 소녀는 그렇게 로망과 결별하면서 어른이 된다. 철이 든다는 것은 그래서 매우 슬픈 일이다. 나 또한 언젠가 소년이었기에 우주에 대한 꿈을 꿨다. 지금도 가장 커다란 소망은 우주에 한 번 나가 보는 것이다. 거기서 나는 '무한'을 경험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무한한 공간을 보고, 그 속에 있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그걸 한 번 느껴보고 싶다. 그러나 이루기가 어려운 꿈이다. 민간 우주 여행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많은 돈과 건강이 받쳐주지 않으면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낙담 혹은 체념이 이 책과 만나게 한 것 같다. 바로 스콧 켈리의 '인듀어런스'란 책이다.




 스콧 켈리는 우주인이다.

 외계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ISS, 즉 국제우주정거장에서 1년 넘게 있었다. 정확히 340일을 우주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그 체험을 오롯이 기록한 책이 바로 '인듀어런스'다. 제목 그대로 우주에서 1년 동안 버터낸 날들의 기록이다. 어떻게 우주정거장으로 갔으며 또 어떻게 거기서 1년의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해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 놓치지 않고 온전히 기록하고 있기에, 소년의 로망을 아직 품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겐 꽤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아주 생생하고 현실감 넘치게 우주 생활을 간접 체험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 이 책은 간접 체험의 목적을 가득 충족시켜주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정보들이 정말로 가득했다. 특히나 스콧 켈리는 이번 여행이 우주 공간에서의 생활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나도 처음 알았는데, 우주 공간에서 지내는 것은 인체에게 더러 안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무엇보다 시력이 저하된다고 한다. 아직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인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특별히 스콧 켈리를 선발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쌍둥이 형제로, 대조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생 마크는 지구에 있고 켈리는 우주로 가, 그 둘의 상태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현재 스콧 켈리의 표본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 중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 중의 하나는, ISS에서 대원들이 무중력 상태에서 함께 보여 '그래비티'라는 영화는 보는 장면이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 과연 어떤 자세가 될까? 뭔가 지구에서 볼 때와 다른 자세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지구 위에서와 똑같이 무중력 상태에서도 옆으로 누워 보게 된다고 한다. 그건 사실 외부 환경 때문은 아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어떤 자세를 취하든 편하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의 머릿속에 누우면 편하다는 생각이 박혀 있어 무중력 상태에서도 누워 보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ISS의 우주인들에게 '그래비티'는 꽤나 섬뜩한 공포였다고 한다. 영화 중에 ISS가 불타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건 곧 자신들이 있는 집이 타는 것과 같았으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우주의 삶이 아주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소변을 처리하여 물로 만드는 것이라든가, 작업을 위해 정거장 내에 물건들을 치우다 보면 둥둥 떠다니는 작은 조각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자주 누군가 흘려 놓거나 숨겨 놓은 초컬릿이라 생각하고 넙죽 받아먹는데 알고보니 쓰레기라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말이다. 그 모든 걸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에 우주 생활에 관심이 있는 이에겐 어느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이 없다. 아주 현실적인 우주 생활을 알고 싶었다면 이 책,'인듀어런스'만큼 좋은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ISS(국제우주정거장)의 모습


 스콧 켈리는 책의 마지막에 우주에 있을 때 가장 그리워했던 것들에 대해 적어놓고 있다.

 그가 가장 그리웠던 것은 지구에서는 아주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일상이요 감각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주에서의 그의 일상이란 하루하루가 내일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느낌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 밥 먹는 것이 가장 그리웠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별 것 아니라 생각하는 일상이 실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정말로 소중한 것이기에 그리도 자주 영화에서 함께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스콧 켈리는 화성에 가기 위한 일환으로 이번 1년의 우주 생활을 치뤄냈다고 한다. 그가 바란대로 언젠가 화성에도 갈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러면 그의 책을 통해 또 한 번 간접 체험을 할 수 있을테니. 화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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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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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란 무엇일까?

 세상이 점점 살기가 어려워질수록 우리는 그저 믿을 곳은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나 이번 추석과 같은 명절 때 함께 있다 보면 가족처럼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도 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이라면 한바탕 퍼부어주었을 일도 가족이란 이유로 꾹 참고, 남이라면 거침없이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일도 가족이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할 때 마음 속 한 켠에 기타노 다케시가 슬며시 나타나 기분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속삭이는 게 들려오는 것이다.

 "거 봐, 내가 뭐랬어? 가족이란 건 남이 안 보면 슬쩍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잖아."


 알다가도 모를 존재인 가족.

 생각해 보면 이제는 일본 영화의 거장이라고 평가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내 가족에 대해 말해왔다. 그 시작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아무래도 '아무도 모른다'(개인적으로 두 번은 절대 볼 수 없는 두 편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타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 나는 정말 이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오빠가 없을 때 어린 여동생 혼자 하루를 보내는 장면을 보며 엉엉 울었다. 그래서 도저히 두 번은 볼 마음이 안 난다. 그런데 내가 이 얘기를 왜 여기서 하고 있담?)일 것이지만 본격적인 개진은, 나 역시 그의 최고작이라 평가하는 '걸어도 걸어도'가 될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가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걸 이렇게 저렇게 여러 방향으로 굴러보며 고찰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나온,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좀도둑 가족'은 뭐랄까 지금까지 가족에 대해 말해왔던 것을 좀 집대성한 느낌이다. 나는 그가 소설까지 쓴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 영화의 바탕이 되었던 소설이 나왔다. 어느 것이 먼저인 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영상으로 잘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의 속살들이 선명하게 나와 있어 좋았다. 가족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헤아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감독의 생각이겠지만.







 아무튼 '좀도둑 가족'이 전하는 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다. 가족은 딱히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태어났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결과가 아니며 과정 속에 형성되며 그래서 선택으로도 얼마든지 가족은 가능하다. 이런 걸 보여주는 '좀도둑 가족'의 구성은 이러하다. 할머니 하쓰에(78세), 아들이자 집안의 가장인 오사무(47세)와 그의 아내 노부요(38세). 큰 딸인 아키(21세)와 둘째 아들인 쇼타(11세). 그리고 오사무가 데려와 가족이 되어버린 린(5)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가족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첫 장면은 오사무가 아들 쇼타와 함께 평소 자주 훔치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광경이다. 아버지 오사무는 아들 앞에서 물건 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잘 훔친다면서 자랑하는데 그건 그가 평소 가지고 있는 '가게에 진열된 상품은 아직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라는 신념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생각에 물들어 어린 쇼타 역시 거리낌 없이 물건들을 슬쩍한다. 아니, 가족 모두가 필요한 것은 훔쳐서 마련하는 걸 자연스러워 하기에 처음엔 절로 '뭐, 이런 가족이 다 있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별종으로써의 가족 모습은 그들이 사는 공간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그들의 집은 한창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에 마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한다. 주위는 온통 유행의 첨단을 걷는 신축 아파트이지만, 그들의 집만은 오래 전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다.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져 있으며 또한 그만큼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읽다보면 점점 더 이 가족만큼 가족다운 가족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당장 내일 먹을 것이 늘 걱정이고 벽장 속에서 잠자야 하는 쇼타나 할머니 하쓰에와 늘 같이 잠자야만 하는 아키가 잘 보여주듯 한없이 빈궁한 삶이라 어쩔 수 없이 사소한 다툼이 있지만 그보다 더 따스하고 강한 유대감이 서로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린이라는 존재를 통해 한층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진짜 가족과 살았지만 가족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던 린은 진짜 가족이 아닌 이 가족에게서 오히려 진짜 딸처럼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형성된다'라고.


 뒤이어 더 커다란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좀도둑 가족'이 전하고픈 진짜 주제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가족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누구도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스포일러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에 그만 밝히고 말았다. 여하튼, 오사무는 하쓰에의 아들이 아니다. 노부요는 오사무와 정식으로 혼인한 적이 없다. 아키 역시 하쓰에가 데려온 존재다. 쇼타는 오사무가 자동차에 갇힌 그를 꺼내 데려왔다. 이처럼 모두가 린과 같았다. 그들 모두 혈연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가족이란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제목처럼 그렇게 가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가족의 모습은 그 어떤 가족보다 더 가족답다. 따스하고 끈끈하다. 그런데 혼자 떼놓고 보면 그렇지 못하다. 믿음이 가지 않고 뭔가 모자라며 어딘가 어긋나 있다. 대표적으로 하쓰에가 그러하다. 하쓰에는 자신을 버린 남편의 집을 기일마다 찾아가 거기 살고 있는 전남편 아들 부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돈을 뜯어낸다. 그렇게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힌 존재에게 복수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어딘가 낯이 익다. 맞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자기 아들을 죽인 이를 아들의 기일마다 억지로 불러선 곤란을 겪게 했던 어머니의 모습이다.(공교롭게도 이 때 어머니를 연기한 배우와 하쓰에를 연기한 배우가 같다. 얼마 전 작고한 키키 키린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포스터.


 이처럼 혼자는 비틀어져 있다. 강하지 못하다. 린이 그렇듯 말이다.

 그런 그들을 오늘까지 버티게 만들고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은 '함께'라는 경험, 그 속에서 절로 형성되어갔던 '가족'이었다.


 존재가 아니라 선택으로 형성되는 가족.

 '좀도둑 가족'은 이런 가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잔잔한 감동 속에 보여준다. 물론 거기엔 노부요가 린을 위해 생계를 위해서 꼭 해야 했던 일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처럼 결단한 것에 상응하는 정도의 사랑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런 것을 우리는 흔히 '책임'이라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좀도둑 가족'은 이런 것도 보여준다고 하겠다. 권리가 주가 아니라 책임이 주가 되는 가족을. 그리고 그럴 때야 말로 진짜 가족이라는 것을.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좀도둑 가족'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금까지 영화를 통해 '가족'에 대해 사유했던 것의 집대성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집대성 끝에 내놓은 가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현재 일본 사회에 보내는 메세지라고도 여겨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사회를 두고 자폐의 사회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일본 사회가 너무 폐쇄적이라 타자라는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일본 사회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 그걸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고 헤아리려 노력하기 보다는 위기로 단정하고 배척하여 자신의 것만 고수한다는 의미다. 그런 일본 사회의 모습은 이런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선택은 무슨! 존재가 전부다!'


 현재 일본 우익 정부는 이것을 노골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그들이 '좀도둑 가족' 영화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천명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의 것을 말하는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만이 아니다. 존재를 모든 것으로 여기는 움직임은 전세계에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는 이주자들에 대한 차별을 대놓고 나타내는 우익 세력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인종과 종교 그리고 성별에 따른 적대도 심해지고 있다. 마치 많은 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리는 세상을 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미 인류의 역사가 저멀리 떠밀어 보낸 것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좀도둑 가족이 살았던 시대에 뒤쳐져 보였던 공간은 거꾸로 가장 시대를 앞서 나가는 현장으로 해석되어야 하리라.) 그런 시대의 움직임에 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좀도둑 가족'은 반대의 말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존재는 과정과 행위 그리고 책임의 분여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라고.


 아마도 이런 진심이 통했기에 '좀도둑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탄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여기에 지지의 한 표를 보태고 싶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숨막히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존재가 전부였던 중세의 어둠을 몰아냈던 르네상스의 빛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태어난 모습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신념의 불길에서 나온 것이었다. 더 큰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좀도둑 가족'이 소지(燒紙)가 되어서라도 빛을 더 밝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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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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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지에 나와 있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스티븐 킹의 강력 추천이라는 말 또한 마찬가지다. 뭐, 한 두 번 속아봤어야지. 장르 소설계의 펠레 아니던가. 그러니 그런 띠지를 보면 '범죄도시'의 악역 장첸의 억양으로 '니 내가 호구로 보이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정말 예외 없는 법칙은 없나 보다. 띠지에 나와 있는 말도 순도 100%의 진실일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책을 만났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바로 C.J 튜더의 '초크맨'이다.





 재판에 증인으로 불러나온 것처럼 선서라도 하고 싶다. '본인은 본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거짓을 말할 시 위증의 죄를 달게 받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이 소설에 한해선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띠지에 나와 있는 말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스티븐 킹 강력추천!'밖에는 없으니 괜히 변죽만 올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다. 어쨌든 스티븐 킹이 강력 추천할 만하다. 아니, 이런 작품을 추천하지 않으면 어떤 작품을 추천할까 싶기도 하다. 내가 아는 스티븐 킹이라면 이 작품이 쏙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의 설정은 여러 모로 스티븐 킹 적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당신 역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면 '초크맨'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스탠 바이 미'라든가, '드림 캐처' 혹은 '그것' 같은. 그렇게 이 소설은 어린 시절 친구인 다섯 명이 주역이며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살인이 있고 시체가 있으며 누명을 받아 죽음에 이른 자가 있으며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비밀들이 곳곳에 산재하며 놀라운 반전도 마련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의 가치를 재미에 두고 있다고 한다면 당장 읽어볼 것을 권한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말한다. '초크맨'은 올해 읽은 스릴러 중 가장 재밌는 소설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읽은 보람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에 재미만 있다고 하면 너무 실례일 것 같다. 하지만 그 주제에 대해 자세히 말해버리면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어 그러지도 못하니 유감이다. 그러니 소설의 주제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말하기로 하자. 이 소설의 주제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설에 직접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래 안다. 많이 들어 본 말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삶도, 사람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미숙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은 이걸 자꾸 까먹는다. 보이는 것을 전부라 여기고 쉽게 속고 오판하며 엄청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니 이 세상이 아직 사기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이야 말로 우리가 여전히 보이는 그대로를 믿고 있다는 거의 방증이다. 그게 자신에 대해서라면 스스로 머리를 몇 대 쥐어박거나 술잔이나 기울이며 울화를 삭히면 되겠지만 타인에 대해서라면 다르다. 보이는 그대로 판단했다가 그들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주게 되었다면 그 죄는 또 어떻게 풀어야 한단 말인가? '초크맨'은 바로 여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삶에서 우리가 쉽게 하는 잘못들이 여기에 아주 진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타인의 삶을 온전히 알고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만큼은 할 수 있다. 쉽사리 비난하고 정죄하지 말고 먼저 보이는 것과 다른 사연은 없는지 먼저 물어보고 알아보는 정도의 노력은 할 수 있는 건 아닌가? 어쩌면 타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 역시 근본에는 남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칸트는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했겠지.


 쓰다보니, 이런 '초크맨'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 했네. 표지에 나와 있는 그림이 바로 '초크맨'이다. 그림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바닥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 소통하는 걸 말하는 것이다. 마을의 아웃사이더인 다섯 아이들은 그렇게 분필로 바닥에 그림을 그려 서로와 연락한다. 그런데 누군가 그 '초크맨'을 통해 사건을 일으킨다. 얼마 전 축제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한 금발 소녀가 숲속에서 살해된 것이다. 그것도 머리가 사라진 채로. 그 사건을 계기로 화자이자 주인공인 에드의 삶은 결정적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 후, 한 통의 편지가 에드에게 도착한다. 30년 전, 살인 사건의 범인은 따로 있다는. 다시 찾아온 과거가 일으키는 회오리 바람 안에서 새로운 살인이 벌어지고 30년 간 묻혀 있었던 비밀들도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비밀은 웅변한다. 모든 게 보이는 대로 믿는 바람에 일어난 비극이라는 것을.


 나는 쓰면서도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 있을까 싶다. 이 소설에 이런저런 말은 쓸데 없다. 그저 읽으면 된다. 그러면 절로 알게 된다. 이 책의 가치는.

 문답무용! JUST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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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0-06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킹이 강력 추천했다는 말은 정말일까요 갑자기 그게 진짜인지 알고 싶기도 하네요 그걸 알려줄 사람은 없군요 스티븐 킹 이름이 있어서 관심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스티븐 킹 소설 별로 못 봤군요 제대로 봐야 할 텐데, 보이는 게 있다 해도...


희선
 
거울 속 외딴 성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서혜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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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 있었던 자신의 일을 소설로 풀어내는 게 아닐까 생각되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일본 작가인, 츠지무라 미즈키이죠. 이 말은 제가 그의 작품을 아직 딱 하나밖에 읽지 못해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 저는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만 읽었는데요, 거기에 묘사된 십대 아이들의 일상이나 심리가 아주 생생하게 그려져서 아무래도 작가가 직접 겪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죠.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긴 작가라 이름을 뇌리에 새겨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그의 작품을 또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이 바로 '거울 속 외딴 성'입니다.


 2018년 서점 대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서점 대상은 점수제로 운영되는데 역대 최고 점수를 받았다고 하니 도저히 찾아 읽지 않을 수 없더군요. 표지까지 예뻐서 더욱 소장 욕구를 높였구요. 




제목에서 판타지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과연 설정은 판타지였습니다. 제목 그대로 거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외딴 성이 나오거든요.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판타지와는 결이 좀 달랐어요. 외부의 적을 물리치거나 세계를 구원하는 거창한 것은 아니고 세상에서 이렇게 저렇게 상처 받은 아이들이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고코로란 아이가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현재 학교에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에게 거의 집단 따돌림에 맞먹는 엄청난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죠. 가뜩이나 예민한 나이에 타인에게서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집단으로 아무 이유 없이 공격을 당하다 보니 세상이 잔뜩 무서워져 버린 것입니다. 그는 매일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신 거울에서 빛이 나는 걸 발견합니다. 호기심에 거울 쪽으로 손을 뻗었는데, 거울에 손이 닿자마자 그만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립니다. 거울 속으로 들어와버린 고코로 앞에 나타난 것은 늑대 가면을 쓴 여자 아이. 그 아이로 인해 고코로는 외딴 성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자신과 똑같이 학교에 가지 않고 있는 여섯 명의 아이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성 깊은 곳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소원의 방'이 있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소원을 이루는 자는 한 명 뿐이야. 빨간 모자들."

 "빨간 모자?"

 "(...) 너희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빨간 모자들이지."(p. 51)


 그렇게 일곱 명 중 한 명이 성에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열쇠를 찾을 때까지 내년 3월을 기한으로 계속 성으로 오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물론 강제는 아닙니다. 찾고 싶을 때만 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에 있는 동안은 뭘하든 자유입니다. 굳이 열쇠를 찾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다만 밤에는 올 수 없습니다. 성에 올 수 있는 시간은 학교에 있어야 하는 시간과 일치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외딴 성은 일곱 명의 아이들에게 학교에 가지 않는 동안 있을 수 있는 아지트가 되어 버립니다. 아이들은 성에 와서 게임을 하고 이런저런 수다도 떱니다. 그러면서 혼자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또래와의 관계를 맺어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타인을 대하는 법,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법 등등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 관계란 어떤 것인지 하나하나 배워나가죠. 인용한 말에 나왔듯, 이 소설은 그림형제의 유명한 '빨간 두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빨간 두건 소녀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고 딴 짓을 하다가 길을 잃고 그만 늑대에게 희생당하고 말았죠. 하지만 이 소설에서 늑대는 길을 잃은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돕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변형이 재밌게 여겨지더군요. 아, 그러나 무서운 늑대도 있습니다. 금지된 시간에 성에 있게 되면 정말로 무시무시한 늑대가 나타나 아이를 잡아가 버리니까요. 어쨌든 환경의 변화로 별안간 세상의 거센 공격을 받아 자신만의 외딴 방에 갇혀버린 아이들이 외딴 성을 통해 그런 세상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도록 치유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함께 한다는 경험이, 서로를 소중히 여긴다는 마음이 자신 또한 얼마나 현명하고 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고, 결국 자신의 마음이 강해지지 않으면 어디에 있더라도 지옥을 만난다는 걸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세계 혹은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곳엔 많은 세계와 길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마음 또한.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 나왔듯이 네트(세계)는 광대하니까요.


 이 소설은 직접 읽으면서 느끼는 게 최고의 독서법 같기에 책에 대한 말은 이 정도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우리나라에도 요즘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홀로 지내는 아이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저 약간 다르게 오늘의 시간을 지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리고 혹시 그런 삶에 상처를 받고 싶다면 위로와 그런 상처따위 전혀 받을 필요 없다고 말하고픈 마음으로 이 책을 그들 곁에 놓아주고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비슷한 나이의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도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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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0-06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아이들이기에 서로 알았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세상에는 비슷한 생각이나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렇다 해도 자신이 가장 힘들다 생각하지만... 비슷한 사람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아쉬워하지 않고 다들 무언가 아픔이 있겠지 생각하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여러 권 만났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쓰는 듯해요 여자 친구들 이야기, 읽지 못했지만 결혼하려는 사람과 그 둘레 사람 이야기도 있고(이건 드라마로 봤군요), 죽은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츠나구, 이건 영화로 만들었더군요), 지난해에는 입양...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