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소위 386 출신 인사들이 5.18 전날 광주에서 술판을 벌인 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임수경이 전모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촉발된 이 사건은 많은 언론들의 비난을 받았다. 언론들은 사설로 그들의 도덕성을 질타했고, 넓게 보아 5공에 부역한 언론인인 전여옥은 큼지막한 칼럼으로 그들을 비아냥댔다. 그건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돌팔매를 던지는 데 동참했고,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386 의원들에게는 '5.18 전야 술파동'이란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들이 잘한 건 아니지만, 난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좀 황당했다. 우리 언론들이 5.18 항쟁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숭상한단 말인가? 보수언론의 대표인 조선일보는 아직도 5.18을 '폭도들이 간첩의 사주를 받고 일으킨 난동' 쯤으로 생각하는 듯하고, 그들의 자매지인 <월간조선>은 여전히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쓴다. 네티즌은 다를까? 조선일보 독자마당에 오르는 글들을 보면 '광주사태는 빨갱이들이 일으킨 참극'이란 표현이 버젓이 등장한다. 모든 이들이 그에 동조하는 건 아니겠지만, 5월 17일날이 광주항쟁 전날이니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술같은 건 마시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광주항쟁은 광주 사람들만의 외로운 투쟁이었고,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승격된 이후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광주항쟁 전날 술을 마셨다는 보수언론의 공격은 광주를 숭고히 여긴다는 증거가 아니라, 의회에 갓 진입한 개혁적인 386 의원-물론 실제로 개혁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는 거다-들의 도덕성을 실추시키기 위해 광주를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이승연이 소위 '위안부 누드'를 찍어 궁지에 몰렸다. 오늘 신문을 보니 연예계를 그만두니 어쩌니 하는 말도 나오고 있단다. 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을 신인도 아닌데 왜 그리 생각없는 짓거리를 했는지 솔직히 안타깝다. 이승연의 누드에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 중 한가지가 평소 그녀가 정신대 할머니둘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가, 때마침 몰아닥친 누드 열풍에 편승해 돈을 좀 만져보고자 하는 상업적 목적에서 위안부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정신대 할머니들은 이승연의 행위에 극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며, 그건 이승연이 백번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내가 좀 뜬금없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러면 이승연을 비난하는 네티즌들은 평소에 정신대 할머니들을 얼마나 생각했는가 하는 데서 비롯된다. "정신대? 그거 지나간 역사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난 여러번 봤고, 심지어 "짜증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할머니들이 일본을 상대로 재판을 하는 등 계속 투쟁 중이라는 사실을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할머니들을 돕자며 모금운동을 벌일 때 우리가 얼마나 관심을 보였을까? 그 할머니들이 과연 어떻게 사는지에 관해 우리는 알고 있는가?

변영주 감독이 정신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몇편 찍은 적이 있다. 그게 바로 <낮은 목소리> 시리즈다. 하지만 관객은 물론 우리 언론들은 그 영화에 대해 무심했고, 그 영화는 제대로 상영되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려야 했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승연을 욕하는 걸까. 원래 연예인들은 돈되는 일이라면 다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목청을 높여가며 이승연을 욕하는 사람들은 그 사건을 빌미로 잘나가는 이승연을 매장시키려는 음험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드 파문을 통해 정신대 할머니의 존재를 다시 한번 부각시킨 것, 그것이 이번 사건의 긍정적인 면이리라.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많은 정신대 할머니들이 살아 계신다. 젊은 시절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광복 이후엔 '환향녀'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어렵게 목숨을 부지해온 분들이다. 많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뜨셨고, 남은 분들도 살 날이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이제라도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어떨까. 친일인명사전 발간비용을 모금하는 데 보인 열성의 일부만 그분들에게 관심을 돌렸으면 좋겠다. 그분들을 돕는 것도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니까 말이다.

피에스: 나 역시 그분들의 삶에 무관심했다. 이승연 누드는 내게 그 사실을 반성하게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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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04-02-17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글에 적었지만서도, 이번에 엄청난 여론으로 위안부 논쟁에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며,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저조차 평상시에 얼마나 위안부에 관심을 가졌었는가란 생각에 부끄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조금 지나고 보니, 평상시에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이번의 사태역시 나몰라라 하는 것도 적당치 않은 행동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마태우스님 말씀처럼 이 사건의 긍정적인 면(?)인 잊혀져 가던 위안부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겠죠. 사실 보면, 그 동안 오히려 무관심 했었기 때문에, 그동안 잊고 살었던 문제이기에 갑자기 드러난 상황에 당황한 사람들이 부끄러운 나머지 더더욱 열을 올리며 그녀를 비판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들의 과오를(저를 포함하여) 모두 그녀에게 물리려고 그러는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갈대 2004-02-17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연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은 본문의 글과 어긋나는 느낌입니다. 명백한 잘못을 앞에 두고 '우리도 평소에 잘한 것 없으니 너무 비판말자'라는 주장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비판이고 반성은 반성, 확실히 구분해야겠지요.

마태우스 2004-02-1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ird나무님/'자신들의 과오를 모두 그녀에게 물리려고 그러는 건 아닌지'란 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갈대님/말씀을 듣고보니 제목이 좀 그러네요. '이승연, 그리고 반성' 쯤으로 했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상품은 받으면 기쁜 거다. 하다못해 다이아반지라도 내가 노력해서 받은 것이라면 얼마나 뿌듯한가.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서재를 열심히 꾸몄다고 알라딘에서 준 아차상이 그런 경우다.

아차상의 상품은 <아침형 인간>과 <한국의 부자들> 중 하나를 택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두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며 열심히 일할 것을 강요하는 <아침형 인간>이나
'자수성가한 알부자 100인의 돈버는 노하우'라는 부제를 가진 <한국의 부자들>은 내 기준에 의하면 좋은 책은 아니었다. 수만권, 혹은 수십만권이 팔린 베스트셀러이긴 해도, 난 그런 책들이 내 정신수양에 무슨 도움을 주는지 의문스럽다.

돈버는 노하우가 담겨 있다고 해도, 그대로 따라한다고 부자가 될까? 방 한구석에 팽개쳐 놓았던 <한국의 부자들>을 펴봤다. '부자들의 기상시간'이라는 그래프가 그려져있다. 알부자 100인들 중 21명이 4시 전후에 일어나고, 67명은 5-6시 사이에 일어난다. 6시 이후는 단 11명. 부지런함을 배우란다. 그래? 4시에 일어나면 부자가 된다고 해도, 난 그냥 많이 자고 가난하게 살련다.

98쪽엔 이런 말도 있다. "무자비함을 배워라" '인생 자체가 전쟁이'란다. 삶은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워나가는 과정이지, 그게 왜 전쟁인가? 책은 말한다. "착하기만 한 부자는 없다"고. 누가 그걸 모르나? 이런 걸 굳이 책으로 쓰다니, 나무가 아깝다.

<한국의 부자들>에서 내가 빠졌다고 이러는 건 물론 아니다 (강력히 항의한 결과 내가 103위였다며 다음 2권에는 꼭 포함시켜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모두가 앞으로만 달려나가려는 이때, 책은 우리에게 현재 사는 세상은 옳은 게 아니라고, 더 나은 미래를 함께 고민해 보자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지는 못한 채 거기 편승해 "더, 더 빨리 달려라"고 채찍질을 하는 게 어떻게 책일 수 있을까.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침형 인간> 역시 마찬가지일 듯 싶다. 동아일보의 서평이다. "한마디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책이다. 아침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건강도 없다는 것" 역시 한숨이 나오는 말이다. 모르긴 해도, 알라디너들처럼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그러는 건 아닐게다. 책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세상에 대해 회의해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번 상품은 좀 뜬금없다. 알라디너들이 별로 읽지 않은 책을 고르다보니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상품을 받고 "책 읽지 마. 돈이 최고야"라는 비아냥을 느꼈다면 내가 오버하는 것일까?

방법이 있었다면 난 상품 수령을 거부했을 테지만, <한국의 부자들>은 우리집 한구석에 흉물스럽게 놓여있다. 다음에 상품을 준다면 아예 안받을 권리도 줬으면 좋겠다. 그 책은 내게 쓸데없는 책이지만, 그렇게 버려지느니 그 책을 필요로하는 누군가에게 읽히는 게 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주위 친구들에게 가지라고 했더니 다들 싫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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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16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받았습니다. <한국의 부자들>... 혹시나 남편이 읽고 크게 느낀바 있어 부자가 되면, 부자 마누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갖은 생색을 다 내며 선물로 줬지만...
책 알러지인 우리 남편...별로 고마워 하지도 않았고, 아마도 안 읽을 것 같습니다.

가을산 2004-02-16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서점에 가보면 한숨만 납니다. '한국의 부자들'은 그래도 고상한 축에 드는 것 같습니다.
왠 경영, 처세술 책이 그리 많은지... 그리고 그런 책이 '팔리는' 현실이 참..
어제도 집근처의 중형(대형은 아니고, 점방도 아닌)서점에 갔는데, 20대 남자 두명이 책을 한아름 사가더군요. 무슨 책을 저리 많이 샀는지 잠시 구경했는데, 한 질 빼고는 죄다 처세, 경영, 경제 관련 서적이었습니다. 그 한질도 '지전'이라는 소설이었구요. 애휴~~

soulkitchen 2004-02-16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부자들 2>는 사뭇 다른 책이 되겠구만요. 기대만땅입니다. ^^

chaire 2004-02-1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부자들 2권이 아마 나왔을걸요... 가서 마태우스 님 찾아봐야겠다~~~

쎈연필 2004-02-1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받자마자 훑어보았더니 착하게 살면 부자가 될 수 없다. 착하게 살지 마라... 뭐 이런 문구보고 인상 찌푸리곤 책을 덮었죠. 마태우스님 말씀마따나 너무나 흉물스러운 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책받은 날 그 책이랑 딱 어울리는 친구가 있어, 줘버렸습니다. 저도 안 받고 싶었는데 말이죠. 전 알라딘과 했던 인터뷰에서도 경영, 처세 관련 책들을 병적으로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말예요 허허 참...

_ 2004-02-16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알라딘마을 이벤트 하기전에 두 책을 욕하고(!) 있었는데, 부자관련 책이랑, 아침형인간 채이었는데, 어찌된 인연인지 택일 상품이 두권중 하나더라구요. ^^; 아침형 인간이 전혀 될 생각도 없을 뿐더러, 무조건 일찍 일어나는 세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는 요즘이라 크게 구미가 당기지 않아 책장을 펼쳐들지 못하고 있는데, 만약 서평을 써도 악평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

가을산 2004-02-1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 글올린 사람들 중에는 '한국의 부자들 10권'에도 들 사람이 하나도 없겠구만요. ^^

paviana 2004-02-16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가 불쌍하다에 박수 세번입니다...도대체 왜 그런책을 그많은 사람들이 사 보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베개로 쓰기에도 베개에게 미안할 따름인데...비슷한 생각을 가진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좋군요^^

마태우스 2004-02-1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viana님의 말씀처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을 만난다는 게 참 좋습니다. 코멘트 남겨주신 가을산님, Bird나무님, 진우맘님, 라스꼴리니꽃님께 감사드립니다
soulkitchen님, 카이레님/윽, 2권이 벌써 나왔어요? 거짓말 한 게 들통나겠군요T.T

마태우스 2004-02-17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글쎄요,10권까지도 포함이 안될까요? 사실은 제가 매주 4천원씩 로또를 사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마 그 전에는 포함이 될 것 같군요^^ 잘 거 다자고, 농땡이 피면서 로또만 열심히 사서 부자가 됐다, 이게 못자고 못쉬면서 된 부자보다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mannerist 2004-02-18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 선생의 예리한 글 조금 붙입니다. "이런 류의 책은 한마디로 '현대판 주술'이다. 말하자면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잠시나마 허구적으로 실현하고, 현실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자본주의적 인간의 미신이다. 물론 이 책을 읽고 실제로 도움을 받는 사람도있을 것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 경우,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주술도 아주 가끔은 사람들을 돕는다고 ... 이 책의 저자들은 여러분들을 부자로 만들어준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진리는 그 반대다. 실은 이 책을 사서 읽는 여러분들이 저자를 부자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일부. 시칠리아의 암소 중에서...

가을산 2004-02-18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nnerist님의 인용문처럼 어떤 '돈벌기'계통의 책에 대한 서평으로 '다른건 몰라도 이런 알맹이 없는 내용으로도 팔리는 책을 낸 저자는 돈을 벌었겠다'고 썼더니, 리뷰로 채택되지 않았답니다. --;; - 아, 이게 가장 첨으로 쓴 리뷰였네요.
 

난 좋은 영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두번 봤을 때도 재미있는 영화. 두번째로 볼 때가 오히려 더 재미있었던 <매트릭스 1편>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영화고, 처음엔 재미있게 봤지만 비디오로 빌려볼 땐-그때가 초저녁이었음에도-졸리기 그지없던 <매트릭스2>는 그저 그런 헐리우드 액션 영화인 거다. 한달 전, 난 <실미도>를 보면서 '이런 재미있는 영화가 있다니' 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 이후 그 영화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글들을 읽었던 터라, 두번째로 본다면 영화에 몰입되어 느끼지 못했던 비판받을 부분들을 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내가 <실미도>를 다시본 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1천만이 봤으니 대한민국 영화관객의 거의 대부분이 봤을 터이지만, 어제 만난 사람들은 웬일인지 한명도 그 영화를 안봤다. 보고싶은 영화가 <말죽거리>밖에 없었던 난 그쪽으로 몰아가려 분위기를 띄웠지만, 남은 세명 중 두명이 그 영화를 봤다기에 인간성 좋은 내가 대승적으로 양보해 버렸다. 극장에서 한 영화를 두번 보는 건, 여러 여자를 사귈 때인 90년대 초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난 또다시 그 영화에 몰입되었고, 쉴새없이 밀려오는 감동의 물결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처음 볼 때와 달리 부대원들이 죽을 땐 눈물까지 났다. 술을 먹고 봐서 그런가... 버스 안에서 서로 나가라고, 그러니까 자기들의 협박에 의해 끌려온 걸로 하자고 얘기할 때,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한다. "한번 쫄다구는 영원한 쫄따구죠" 그러자 2조 조장이 설경구에게 이런다. "야, 저새끼들 못만나고 뒤졌으면 억울해서 어떡할 뻔했냐" 그게 감동적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에 못만났으면 억울했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 넓게 보자면 내가 알고지내는 대부분의 사람이 해당되겠지만, 어려울 때 나와 운명을 함께해줄 사람에 한정한다면 그다지 떠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하긴,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고, 나만이 가진 운명에 왜 남들이 동참한단 말인가.

세상이 실미도를 욕할지라도, 내게 그 영화는 '좋은 영화'다. 실미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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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1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인상적인 대사에서 나와 운명을 함께해줄 사람은 누가 있을까- 까지. 전 왠지 한숨이 나오는데요. ^^ 실미도를 보면서, 울릴려고 한 장면에서는 울고, 웃길려고 한 장면에서 웃는 나를 보며, 어쩜 이렇게 기획의도대로인지 부끄럽기도 했지만. 어쩔수 없던걸요~하지만 두번 보긴 좀 무서워요~^^;
 

취지: 전 직장에 있던 사람이 결혼해서 간만에 오비들이 모였다

과정

-2시, 예식장 피로연, 소주 한병 마심

-3시 반, 인근 맥주집서 7명이 피처 8000cc 나누어마심

-6시, 대학로 극장서 <실미도> 관람(이하 남2, 여2)

-8시 반, 횟집 가서 소주 1병반 마심

-11시,  귀가, 정신이 얼떨떨해서 새벽 두시까지 맞고치다 잠, 아침에 무진장 후회하고 맞고를 은퇴하기로 함

종합: 소주 두병 반, 맥주 1500cc 정도?

의의: 화요일부터 시작되는 죽음의 5연전에 앞서 몸을 푸는 의미가 있음

좋았던 점: 짝 맞춰서 노니 오붓하고 즐거웠다.

 

나빴던 점

-술김에 횟집서 카드로 그었다. 아침에 명세서 보고 잠시 망연자실.

-엄마가 "니가 인간이냐"며 야단침. 술먹고 야단맞은 거라 별 가책이나 고통이 없었음.

-<말죽거리> 보고싶었는데 다른 애가 이미 본 상태고, <실미도> 본애는 나밖에 없어서 두번째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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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16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죽음의 5연전을 앞둔 몸풀기라니요...얘기만 들어도 무섭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무척 오래까지 버티셨군요!! 죽음의 5연전에서 생존확률이 높을수도...ㅎㅎ

paviana 2004-02-1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의 서재에서 잔술이야기가 나와서 왔어요..잔술이라면 역시 일식집에서 마시는 히레사케가 최고지요..복어지느러미 태운 따끈한 정종한잔.. 오늘은 그게 땡기네요..이술의 안주는 오뎅이 좋겠지요..

마태우스 2004-02-17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viana님/그래요, 정종은 오뎅이랑 마셔야죠^^ 투다리에서 먹는 정종을 전 좋아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술은 참이슬이구요.

마태우스 2004-02-1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님의 격려가 늘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죽음의 5연전, 시작입니다!
 

 

 

 

 

 

관성이란 "물체가 현재의 운동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이다. 사람 중에는 관성이 강한 사람이 있고, 별로 없는 사람도 있는데, 난 전자의 대표적인 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난 열심히 공부만 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애들도 다 그랬다. 우린 동료가 아닌, 자신이 남기 위해 남을 제껴야 하는 경쟁자였다. 그런 우리한테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예과 때 놀아야지!" 심지어 이런 노래도 가르쳐 줬다.

'노세 노세 예과때 노세/ 본과 가면 못노나니/ 예과는 천국이요 본과는 지옥이라/얼씨구 얼씨구 차차차/지화자 좋구나 차차차/예수도 공자도 아니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이런 말들에 세뇌된 탓도 있을 테지만,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자 다들 긴장이 풀려버린 우리는 그야말로 노는 데 전념했다. 별 이유없이 수업을 제꼈고, 대낮부터 술을 퍼마신 걸 무슨 무용담처럼 떠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을 놀고 우리는 본과에 갔다. 많은 친구들이 공부만 하는 학생으로 잽싸게 변신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본과 때 노니까 더 재밌네!" 이래가면서 허우적대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3학년이 어느정도 지나간 무렵이었다 (그래서 난 3학년 때 성적이 가장 좋다).

졸업 후 난 4년간 조교 생활을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까지 일하는 고달픈 삶을 난 용케도 잘 견뎌냈다. 그러다 군대를 갔다. 운이 좋게도 난 국립보건원에서 3년간을 있게 됐다. 소속과로 가서 과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이틀을 보냈다. 사흘째가 되니 좀이 쑤셨다. 과장님께 찾아갔다. "저...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커피를 마시던 과장님은 매우 당황하신 눈치였다. "벌써 일하려고? 좀 쉬었다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그날 난 나처럼 할일없는 애들을 모아 노는 모임을 만들었고, 3년을 내리 놀기만 했다. 밤마다 술을 마셨고, 낮엔 테니스를 쳤다. 제대 때가 되자 사회에 복귀할 날이 슬슬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불안감을 씻기 위해 더욱 악착같이 노는 데 매달렸다. 사회에 복귀해 직장을 구한 뒤에도 난 2년 정도는 더 '관성의 법칙'에 시달려야 했다.

꼭 나쁜 관성만 있는 건 아니다. 언젠가부터 시작한 독서는 이제 내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내가 읽은 책들은 벽돌이 되어 황폐해진 내 정신을 재건해 주고 있으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읽고 싶고, 해마다 읽는 책의 양이 많아지는 걸 보면 '관성'이라기보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좀더 가까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난 그걸 내가 관성이 강한 놈이라서, 라고 우기련다.

좀더 일찍 독서에 취미를 붙일 걸, 하는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술 대신 몇배 더 큰 관성을 가진 책을 대학 시절부터 취미로 삼았다면, 아예 졸업도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1월과 2월 읽은 책의 권수를 보건대, 올해도 작년 기록을 깰 수 있을 것같다. 지금 난 관성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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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1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책도 안 읽다보면 영 안 읽게 되지만, 읽다보면 계속 읽게 되죠. 저두 관성여행에 동참하고 싶네요~ ^^

진/우맘 2004-02-1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글 머리에 관련된(어떤 식으로든^^) 책 한 권 골라넣는 솜씨...거의 경지에 오르신 듯 하네요!

마태우스 2004-02-1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그러시죠. 아주 즐거운 여행이랍니다.
진우맘님/아, 네.............(으쓱으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