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소위 386 출신 인사들이 5.18 전날 광주에서 술판을 벌인 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임수경이 전모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촉발된 이 사건은 많은 언론들의 비난을 받았다. 언론들은 사설로 그들의 도덕성을 질타했고, 넓게 보아 5공에 부역한 언론인인 전여옥은 큼지막한 칼럼으로 그들을 비아냥댔다. 그건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돌팔매를 던지는 데 동참했고,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386 의원들에게는 '5.18 전야 술파동'이란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들이 잘한 건 아니지만, 난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좀 황당했다. 우리 언론들이 5.18 항쟁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고 숭상한단 말인가? 보수언론의 대표인 조선일보는 아직도 5.18을 '폭도들이 간첩의 사주를 받고 일으킨 난동' 쯤으로 생각하는 듯하고, 그들의 자매지인 <월간조선>은 여전히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쓴다. 네티즌은 다를까? 조선일보 독자마당에 오르는 글들을 보면 '광주사태는 빨갱이들이 일으킨 참극'이란 표현이 버젓이 등장한다. 모든 이들이 그에 동조하는 건 아니겠지만, 5월 17일날이 광주항쟁 전날이니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술같은 건 마시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광주항쟁은 광주 사람들만의 외로운 투쟁이었고,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승격된 이후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광주항쟁 전날 술을 마셨다는 보수언론의 공격은 광주를 숭고히 여긴다는 증거가 아니라, 의회에 갓 진입한 개혁적인 386 의원-물론 실제로 개혁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다는 거다-들의 도덕성을 실추시키기 위해 광주를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이승연이 소위 '위안부 누드'를 찍어 궁지에 몰렸다. 오늘 신문을 보니 연예계를 그만두니 어쩌니 하는 말도 나오고 있단다. 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을 신인도 아닌데 왜 그리 생각없는 짓거리를 했는지 솔직히 안타깝다. 이승연의 누드에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 중 한가지가 평소 그녀가 정신대 할머니둘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가, 때마침 몰아닥친 누드 열풍에 편승해 돈을 좀 만져보고자 하는 상업적 목적에서 위안부들을 이용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정신대 할머니들은 이승연의 행위에 극심한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며, 그건 이승연이 백번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내가 좀 뜬금없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러면 이승연을 비난하는 네티즌들은 평소에 정신대 할머니들을 얼마나 생각했는가 하는 데서 비롯된다. "정신대? 그거 지나간 역사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난 여러번 봤고, 심지어 "짜증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할머니들이 일본을 상대로 재판을 하는 등 계속 투쟁 중이라는 사실을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 할머니들을 돕자며 모금운동을 벌일 때 우리가 얼마나 관심을 보였을까? 그 할머니들이 과연 어떻게 사는지에 관해 우리는 알고 있는가?
변영주 감독이 정신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몇편 찍은 적이 있다. 그게 바로 <낮은 목소리> 시리즈다. 하지만 관객은 물론 우리 언론들은 그 영화에 대해 무심했고, 그 영화는 제대로 상영되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려야 했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승연을 욕하는 걸까. 원래 연예인들은 돈되는 일이라면 다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목청을 높여가며 이승연을 욕하는 사람들은 그 사건을 빌미로 잘나가는 이승연을 매장시키려는 음험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드 파문을 통해 정신대 할머니의 존재를 다시 한번 부각시킨 것, 그것이 이번 사건의 긍정적인 면이리라.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많은 정신대 할머니들이 살아 계신다. 젊은 시절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광복 이후엔 '환향녀'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어렵게 목숨을 부지해온 분들이다. 많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뜨셨고, 남은 분들도 살 날이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이제라도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어떨까. 친일인명사전 발간비용을 모금하는 데 보인 열성의 일부만 그분들에게 관심을 돌렸으면 좋겠다. 그분들을 돕는 것도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니까 말이다.
피에스: 나 역시 그분들의 삶에 무관심했다. 이승연 누드는 내게 그 사실을 반성하게 만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