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왕 화장실 얘기를 한김에, 전에 썼던 글을 여기다 올립니다.

---------------------------------------------

평소 화장실 문제에 천착해온 나, 어젯밤 술을 먹다가 우리나라 화장실에 내재된 심각한 문제에 부닥쳐 좌절해야 했고, 이에 분개해 여기다 글을 쓴다.

<봉추>라는 닭집에 앉아 술을 먹다가 닭만 먹기 뭐해서 공기밥을 하나 시켰다. 그게 좀 부담이 되었는지, 설사가 나오려 했다. 그래서 주머니에 휴지가 있는 걸 확인하고 화장실로 갔는데, 남녀공용에, 큰일을 볼 수 있는 변기는 딱 하나다. 많은 식당, 술집에서 돈을 아끼려 남녀공용 화장실을 만들지만, 사실 그건 야만스러운 일이다. 남녀가 유별할진대 어떻게 화장실을 같이 쓴단 말인가?

하지만 급할 땐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는 법, 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웬걸, 곧바로 노크가 이어진다. 누군가 있단 얘기, 난 다시금 자리로 와 술을 마셨다. 화장실 문을 계속 응시하면서. 하지만 20분이 지나도 화장실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다시 노크를 해봤는데, 아까와 같은 노크 소리가 응답한다. 그 사람은 그러니까 20분이 넘도록 그 안에 버티고 있는 거였다. 안나오는 사람이 얄미운 건 둘째문제고 급한 불은 꺼야 했다. 난 인근 지하철 역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방은 만원이었고, 세면대에 서있던 사람이 날 보고 긴장한 듯 굳게 닫힌 문 주위를 돌면서 기득권을 주장한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기에, 난 쭈뼜쭈뼜 걸어 다른 곳으로 갔다. 아주 다행스럽게, 내가 잘가는 서점 근처에 비밀스런 화장실이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다시금 술집으로 돌아갔다. 아까 있던 멤버는 다 그대로고, 추가된 사람은 없다. 그러니 그 사람은 그때까지도 화장실 안에 앉아있던 것이다. 그사람이 나온 건 내가 돌아온 후 십분쯤 후였는데, 긴머리를 가진 그녀는 마치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일행과 합류한다. 평소처럼 웃고 술을 마시는 그녀를 난 말없이 째려봤다. 그녀로 인해 내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아마도 변비일 것이다. 변비란 신호가 올 때 바로 일을 봐야지, 안그러면 300그램짜리 물체를 계속 몸안에 담고 살아야 한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화장실에서 십분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비 환자들이 화장실의 변기를 모두 독점하는 게 옳은 일일까? 단지 먼저 왔다는 이유로? 변비의 고통은 변과 더불어 사는 거지만, 제때 화장실을 확보하지 못한 설사 환자에 비하면 그 고통은 약과다. 설사 환자의 실수는 패가망신으로 이어진다. 옛날의 삼각팬티는 그런 고통을 어느정도 막아줬지만, 사각은 대책이 없다. 실수를 해버리면 당장 쪽팔리는 것도 그렇지만, 실수한 그를 태워줄 택시도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더 못할 짓, 축축함, 찝찝함, 이런 것들을 이겨가며 집까지 걸어가야 한다. 새 팬티와 바지를 사면 되겠지만, 문제는 대개 옷가게가 이미 문을 닫은 후에 생기는 법이다.

변비 환자들에게 제안한다. 그대들의 고통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화장실을 나누어 쓰는 지혜를 발휘하자고. 신호가 와서 화장실에 들어가는 건 좋은데, 아이낳는 것과 무관한 거짓산통처럼 그 신호가 대변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면, 미련없이 화장실을 나와주면 안될까.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신호가 나면 그때 들어가야지, 지금처럼 신호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오기로 뭔가를 밀어내 보려는 건 모두의 고통이다. 변비 환자 자신은 물론 밖에서 변을 참느라 온갖 기묘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 설사 환자에게도. 변비도 아니면서 쓸데없이 늦게 나오는-신문을 본다든지, 담배를 피운다든지-사람은 더더욱 반성할 일이다. 화장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슈퍼곰돌이 2004-02-19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이리뷰도 짱많이 쓰셨고!! 마이페이퍼의 달인같네요!! +_+ 그리고 제가 꼬릿말 단지 얼마 안됬는데 답방 정말 신속하네요!!킼키킼 펌프. 디디알에서 좀 변형된거예요 ㅋㅋ 제 친구하고 맨날 하는데 친구가 이사가서.. 청춘..아직 청춘까진 아니구요 ㅡㅡ;; 이제 중학교 들어가요 ㅋㅋㅋ 제 페이퍼 정말 재미 없는데 꼭 답방 오지 않으셔도 되요 ^^ㅋ

마태우스 2004-02-1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곰돌이님/앗! 외모로 보아 고교생 정도로 생각했었는데...으음... 그렇군요. 앞날이 창창하시군요. 혹자는 고생길이라고 하지만, 순수함이 있고 많은 추억을 만들수도 있는 때인 건 사실입니다. 전 별로 추억을 못만들었지만요 T.T

비로그인 2004-02-19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장실을 오래 독점하는 사람들 덕에, 전 화장실이 한칸인데를 가면 마음이 불안하구...다음엔 안가게 된답니다. ^^;;

갈대 2004-02-1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각의 패가망신.. 안돼!! 상상하지말란 말이야!!

_ 2004-02-2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상상해 버렸습니다. ( __);;

마태우스 2004-02-20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상상의 힘은 참 위대하죠?

sooninara 2004-02-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팬티에 그런 비밀이 있군요...삼각과 사각이라..당연히 상상이 됩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귀신이 그림을 보니.."노란종이 줄까? 파란종이 줄까?"물어보는 귀신이 상상된다는..

젊은느티나무 2004-02-21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사 환자의 실수는 패가망신으로 이어진다.'ㅋ 뒤로 넘어갈 정도로 재밌네요....갑자기 '목포는 항구다'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설사환자의 실수.. 화장실 안에서 벌어진 일이긴 해도.. 보면서 너무 찝찝해서 토할뻔 했지요.....ㅠ.ㅠ
 

 

 

 

 

 

우리 회사의 화장실은 방이 두 개씩 있다. 거기 앉아 일을 볼 때마다 난 화장실을 왜 이렇게 개방된 구조로 만들었는지 의문스럽다. 위, 아래가 터졌으니 안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밖에 들리지 않는가. 난 그런 것에 워낙 민감해서, 옆방에 누군가 있으면 다른 층으로 내려가곤 한다. 내가 안에 있는데 다른 이가 소변을 보러 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난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어떤 것도-고체나 기체 모두-내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내가 내는 소리를 그가 듣는다면 속으로 이럴 거 아닌가. "에이, 재수없어!"

오늘도 그런 일이 생겨 온몸의 힘을 줬다. 그런데 세상에, 나도 모르게 방귀를 뀐 것이다. "뽀옹" 소변을 보던 이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역시나 화장실은, 폐쇄된 구조로 만들어져야 한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밖에 전달되지 않도록 말이다. 물론 그러다보면 냄새에 질식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환기 시설을 잘 갖추면 되지 않을까?

하기사, 남자끼리 쓰는 화장실이라면 별의별 소리가 나도 에라 모르겠다, 라고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남녀공용 화장실의 경우다. 난 우리나라 술집의 화장실은 왜 죄다 남녀공용인지 모르겠다. 내가 소변을 보는데 뒤로 여자가 왔다갔다 하는 것도 민망하기 짝이 없고, 여자와 좌변기를 같이 쓴다는 게 미안해 죽겠다. 내가 큰일을 보는데 여자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도 쑥스럽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내가 무슨 죄를 짓는 기분이다. 왜 이런 야만의 상황을 만드는 것일까. 이왕 짓는 거 좀 크게 만들어 남녀를 구분한다면, 테이블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더 자주 갈텐데.

기차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그건 전부다 남녀공용인데, 그래서 난 웬만하면 기차 화장실을 안쓰려고 한다. 힘이 들 땐 허벅지를 휴대폰 안테나로 찔러가며 참는다. 하지만 언젠가 한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기차 화장실을 갔다. 먼젓번 사람이 그랬는지 변기에 대변이 강력하게 달라붙어있다. 두 번이나 물을 내렸지만 안내려간다. 그냥 앉아서 일을 본 뒤 물을 내렸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웬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낭패였다. 그녀는 아마도 변기에 붙은 대변이 내 소행인 줄 알겠지. 나 아닌데. 정말 아닌데.....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슈퍼곰돌이 2004-02-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겨찾는 서재인데요 마태우스님의 글은 정말 재밌고 읽기 좋아요 너무 재밌어요 ^ ^♡ 앞으로 재미있는 페이퍼 많이 올려주세요 ^ ^*

2004-02-19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02-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곰돌이님/아, 네.... 감사합니다. 역시 화장실 얘기가 제일이라니깐요^^

비로그인 2004-02-19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마지막 너무 웃겨요~ 여자끼리 써도 별의별 소리 다 날까 신경쓰이던데요? 공용이면... 한층 더 민망하지만. 특히, 들어갈땐 아무도 없었는데, 나올땐 남자분이 볼일 보고 계실때. 참, 전 남녀 따로 된 술집도 많이 봤는데요~

stella.K 2004-02-19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많이 웃었습니다. 우리나란 그게 문제라니까요. ㅎㅎㅎ!

진/우맘 2004-02-1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유행하던 유머가 생각나는데요. 그럴 땐, 잔뜩 째리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짜샤, 김나나 봐!"
(혹여 이해 안 되는 분들을 위해 --- 모락모락 김이 나지 않으므로 이미 오래 전 버려진 응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강렬하고 당당한 짜샤!를 통해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가을산 2004-02-1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전 엘레베이터에서 방귀 냄새로 인해 마태우스님과 같은 오해를 받았을 것이 확실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보다 앞서 탔던 사람이 참 원망스럽더군요... 가만, 그 사람도 억울했던것은? ^^

_ 2004-02-2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 역시 마지막 압권이었습니다~ 이러다 마태우스님 팬 되겠습니다 그려 ^^

마태우스 2004-02-20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ird나무님/부끄럽사옵니다. 팬이라뇨...
가을산님/제 생각에는 그사람(앞서 탔던 그 사람 말이죠)이 뀐 거 같습니다.

마태우스 2004-02-20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요즘은 수세식이라 김이 잘 안나더군요...

sooninara 2004-02-20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장도가 아니라 휴대폰 안테나로..참아야하느니라..콕콕 찌르는 모습을 상상만해도..^^
그리고 변기에 묻은 흔적을 볼때면 기생충쪽 전문가이신 마태우스님은..여러가지 기생충이 상상될것 같네요. 화장실 유머도 이렇게 격이 있구나 느끼고 갑니다^^
 

 

 

 

 

 

기차역으로 가려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웬일인지 차가 너무 막힌다. 예약해둔 시간을 불과 20분 남겼을 때, 버스가 간 거리는 전체의 3분의 1도 못되었다. 앞을 내다보니 끝없는 차량행렬이 숨을 막히게 한다. 안되겠다 싶어 기사 아저씨께 말했다. "저...기차 시간 때문에 그러는데 좀 내려 주시면 안될까요?"

내리는 것과 동시에 난 뛰기 시작했다. 500미터쯤 달렸을 무렵 아뿔싸, 길이 뚫렸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렸건만 결국 난 버스에게 추월을 당하고 말았다. 달리다 버스를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해 있다. 내가 달리는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한치앞을 못보고 내려버린 나를 비웃는 것일까? 결국 난 뒤따라오는 버스를 집어타고 기차역에 겨우 당도했는데, 일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기차가 5분 연착한단다. 괜히 내렸다...

옛날 생각이 난다. 보건원에서 열리는 테니스대회에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가 "밀린다"는 내 경고를 무시하고 기어이 북부간선도로로 집어들었다. 택시는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엄청난 차량의 물결에 묻혀 버렸다. 그때만 해도 공사가 완공되지 않아 출구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앉아서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난 시종 기사 아저씨를 째려봤고-거봐. 막힌다잖아요-기사 아저씨는 내 눈이 무서워 창밖을 내다봤다. "아저씨!" 난 그를 불러 내려달라고 했다. 그 뒤 난 차량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조금 뒤뚱거리지만 그때의 난 아주 날씬했고, 흡사 한 마리 비호 같았다. 결국 난 출구를 내려와 좌회전을 했는데-거기서부터 보건원은 1.5킬로다-빵빵 하는 클랙션 소리가 났다. 옆을 보니 세상에, 아까 그 택시다! 달리기가 아무리 빨라도 택시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고, 내게 미안한 맘을 갖고있던 기사 아저씨가 결국 날 찾아낸 거다. 성격 좋은 사람 같으면 다시금 거기 탈텐데, 난 너무나도 부끄러워 가게 안으로 숨었고, 다시금 골목 깊숙이 숨어 버렸다. 이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난 하마터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뻔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가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원래 실력도 없는데다 달리느라 지쳐서, 그날 난 전패를 하고 말았으니까. 성급한 자는 두 번 기다린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태우스 2004-02-1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인터넷 고쳤습니다!!!! 이젠 집에서도 알라딘을!

비로그인 2004-02-1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고치셨다니 축하드려요~ 이 글을 읽고나니, 화장실 줄 서 있다 눈치쓴다고 옆줄로 샤샥~ 옮겼는데, 원래 있던 줄이 더 빨리 짧아질때의 허탈함이 생각나네요. 하하~

_ 2004-02-20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한참을 웃었네요. 마태우스님의 부끄러운(?) 기억에 이렇게 웃어 제껴도 되는건지...그런데, 그 택시 기사 아저씨도 마음이 따뜻하셨나 보군요. 제 성격상 가지말라고 한 길 들어서서 밀렸더라도 내릴수 없지 않을까 싶지만 막상 마태우스님의 상황에 접하다보면 저도 가게안으로 숨지 않았을까 싶네요 ^^

아, 그리고 인터넷 소생을 감축드리옵니다. ^^

 

 

 

 

 

 

2월 18일, 지옥의 5연전 중 이틀이 지났다. 오늘과 내일이 최대 고비인데, 잘 넘길 수 있을까?

마신 술: 소주 한병 반과 삼겹살-->2차 친구집서 맥주 두병

좋았던 점: 소주 다섯병을 마시는 친구인데, 요즘 맛이 가서 많이 못마시더만. 음하하

나빴던 점: 집에 가다가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노래방에 끌려갔다. 1시간 반동안 고생했다. 아저씨는 왜 자꾸 서비스 시간을 넣어 주는지...난 노래가 싫은데...집에 오니 새벽 한시, 지금도 졸려 죽겠다.

 

어제 술을 마신 친구-알파락 하자-는 나와 정말 친한 친구다. 90년대 후반, 내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언제나 같이 술을 마셔준 고마운 친구이기도 하다. 그러던 것이 3년 전 결혼을 하면서 연락이 뜸해졌고, 아이가 생기면서는 1년에 두세번, 행사가 있을 때나 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따지고보면 그가 처음은 아니었다. 나와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 하나-얘는 베타다-는 97년 결혼한 이후 인간이 변해 버렸다. 일이 끝나면 총알같이 집에 갔고, 술같은 건 마시지도 않는 듯했다. 그때 우린 만나기만 하면 베타를 비난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베타가 우리를 불러모으더니 <까르네스테이션>에 데리고 갔다.

"니들이 하도 뭐라고 해서 오늘 밥 산다!"

그 말을 듣고 조금은 서운했다. "이걸로 떼울테니 더이상 나 볼 생각 하지 마!"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원한 것은 약간의 관심이지 밥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땐 내가 뭘 잘 몰랐다. 자기 아내가 친구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예컨대 친구만 챙기고 맨날 늦게 들어간다면, 그래서 아내와 불화가 생긴다면 좋은 건 아니잖는가? 술 잘 사고 그러는 게 우리야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콩나물값도 아끼는 아내가 본다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가정과 사회, 이 두가지를 모두 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은 집에서 욕을 먹고, 가정적으로 너무 잘하는 사람은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된다. 하지만 친구가 밥을 먹여줄 수는 없는 법, 굳이 둘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한다면 가정을 택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우쳤기에, 알파가 출산을 한 후 연락이 뜸한 게 그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았다. 아니, 내 쪽에서 의도적으로 연락을 안한 측면이 더 클지도 모른다. 어쨌든 알파는 한번 만나자는 내 전화에 무척이나 반가워했고, 지난 몇달간의 일을 얘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 예상대로 알파는 애와도 잘 놀아주는 자상한 아빠가 되어 있었고, 그걸 보면서 난 흐뭇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oulkitchen 2004-02-1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이렇다할 가정을 이루지도 못했고, 지금 몸 담고 있는 가정에선 제거 대상 1호인 저를 비롯한 알파, 베타, 감마 떨거지들이 우글우글 모여 늘 하는 말도 그겁니다. 우린, 결혼해도 절대 서로 배신하지 말자. 그러곤 술 한 잔 털며 덧붙이죠. 쓰벌..배신할 건덕지라도 생겼음 좋겠네. 제가 봤을 때, 결혼만 했다 하면 싸그리 배신할 것들입니다. 그럼 저도 마태우스님처럼 그 애들 보면서 흐뭇해 하겠죠. ^^

paviana 2004-02-19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도 그리고 알파분도 좋은 분들이시네요...변할 줄 아는 사람과 변해버린 친구를 이해할줄 아는 사람..두분다 훌륭하십니다.

비로그인 2004-02-19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정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둘다 잡기가 참 애매한 거 같아요. 연애를 하더라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너무 좋아하면 애인이 싫어하고, 애인하고만 너무 놀면 친구들이 서운해하고...^^ 그래도 가정을 꾸리면, 가정쪽으로 무게가 조금 더 기울어야 될꺼 같아요. 그래서 이해해주시는 마태우스님의 모습도 흐뭇~하네요. ^^

진/우맘 2004-02-19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좋은 해결책은...술친구 중의 한 명을 골라 결혼하는 것입니다! 매번 같이 술자리에 나가지는 못해도(그러면 가정이 유지가 안 되겠지요^^) 대표로 한 명만(?) 나가게 되는 경우에도 집에서 별로 걱정이 안 되거든요. 대충 그 술자리의 성향과 코스가 그려지니까요.
뭐,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마태우스 2004-02-19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키님/우린 절대 배신하지 말자... 넌 배신하면 안돼!... 알파 등과 여러번 했던 얘기지요. 우정이냐 사랑이냐, 그것이 문제지요^^

파비아나님/ 님께서 그러시니 제가 제 자랑만 한 것 같은 느낌이..... 제가 원래 그런 놈은 아니랍니다. 별명이 밴댕이라니까요!!

마태우스 2004-02-19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늘 좋은 조언을 해주시는 님을 알게 되어, 제가 더 흐뭇합니다.

진우맘님/술친구와 결혼하셨군요! 제가 언제나 꿈꾸던 일인데... 그래서 진우맘님이 그렇게 멋지게, 재미있게 사시는군요.
 

* 제 홈피에 어느 분이 쓰신 글인데요, 마음에 들어서 퍼왔습니다.

----------------------------------------
지난번 '과학책 추천' 관련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
좀 성급한 일반화를 시키는 감은 있지만
일본인이 쓴 과학(?)관련 서적은
절대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 아침형 인간?
: 저녁 5시 이후의 생활이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회식하자고 할 때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날이 어두워 져야 독서할 맛이 나는
나같은 사람은 어쩌고?
(난 운동도 주로 밤에 한다.)
사람이란 각자의 생체 리듬이 있는 법인데
이를 무시하고 획일화를 강요하는 것은 범죄이며,
내일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생업에 힘쓰는
동대문, 남대문 시장 상인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이다.
어느 일본 의사의 편집광적인 주장 하나에
일본국민 뿐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주, 그 밑의 직원들까지 현혹되어
놀아나고 고생하고 있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음이다.

# 바보의 벽?
: 사람은 각자의 성장과정에서 각자의 성격과 취향을
가지게 되고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각자의 취향과 경향이 생기고
이는 웬만해선 잘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세대간 갈등, 좌우익간의 갈등.. 등등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
이는 불가피하다.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된다.
상대방을 자신의 가치관대로 함부로 바꾼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또한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일종의 인권유린이니까.
그 갈등이 그렇게도 안타까운가?

이것이 뇌의 기능과 연관시켜서 설명할 문제인가?
그리고 가역적인 것이라 생각하는가?

정말 이 책의 저자가 의사인지
다시금 확인하였었다.

좋게 보면 "편견을 버리라"는 의도겠지만,
한 페이지 정도면 충분히 표현할 그런 주장을
이렇게 지면을 낭비하면서 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편광 현미경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다면
이 책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인지 금방 파악이 될 것이다.
물 떠놓고 '사랑해, 사랑해' 되뇌이고나서
사진 찍으면 아름다운 결정체가 나온다고?

분명히 저자는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자기가 주장하는 게 옳다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다.
믿는 건 자유지만
이렇게 대중들에게 공표하는 용기가 가상할 뿐.

아름다운 결정체로 나타난 똑같은 물을
각도만 달리해서 찍으면
다른 모양이 나올텐데도
이에 대한 해명은 없다.

차라리 사진으로 나타낸 일종의 시라고 했으면
좋았을 걸...
왜 과학이라고 주장하는지..
이런 사이비 과학이 우리나라에도 먹힌다는 사실은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 뇌 호흡? 두뇌체조?
: 기가막힌 조어능력이다.
뇌가 호흡을 한다?

# 왜 일본책들은 하나같이...
이럴까?
1) 축소지향의 국민성이라 그럴지도...
축소 지향 내지는 혼자서 방안에 틀어박혀
어떤 주제를 깊게 파는 경향이
유달리 강한 민족이다 보니
오다쿠가 나오기도 하고, 편집광적인 경향도
쉽게 도출되는 것이 아닐까?
이는 동료들에 의해 서로 비판을 주고 받으면서
편견이 되지 않도록 자체 조절이 필요할 것인데
혼자 파다보니
이 과정이 생략되어
얼핏 그럴듯 해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사이비 이론이 만들어 지는게 아닐까?

2) 일본은 유달리 미신이 많다.
귀신 수만 300만명이라고 할 정도이고,
생활 하나하나에 미신이 깃들어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 황당한 생각들을 쉽게 하는게
아닐런지.

3) 획일적이고 전체주의 취향이 잔존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주장하는 건 좋은데 남에게도 강요하는 걸로 봐서...

# 책으로 출판된 것이라고 신임하진 말자.
: 베이컨 식으로 보면 저자는 '동굴의 우상'에 취한 것이고,
우리는 '극장의 우상'에 현혹되는 것이리라.
책으로 나온 것이라면 검증된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쉬운데,
결코 현혹되지 말아야 할 지어다.

내 개인적으로 세운 감별 기준은 다음과 같다 :
1. 책 표지등이 상당히 예쁘다.
2. 제목이 매우 단정적이다.
3. 서문을 읽어보면 주장하는 바를 강요하는 느낌을 준다.
4. 원저자가 일본인이다.
5.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기준에서 적어도 3개가 해당되면
절대 피하는 것이 좋겠다.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은 많고
습득해야 할 지식도 넘치는 반면에
우리 인생은 그리 길지 않지 않은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진/우맘 2004-02-1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여기저기에서 '아침형 인간'을 신나게 흉보고 다녔는데... 아... 흉보기 전에 한 번 읽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갈등이 되기까지 하네요.
물론, 갈등하는 척만 하고 읽을 계획은 여전히 없습니다. -.-

갈대 2004-02-19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학서적을 고를 때 출판사를 우선적으로 고려합니다. 괜찮은 과학서적을 이미 낸 적이 있는지를 꼭 살펴봐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까지글방의 과학서적들이 좋더군요

마태우스 2004-02-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교보에 갔더니 그 책이 수백권 정도 쌓여 있더군요. 어지러웠습니다.

갈대님/까치글방이라...앞으로 과학서적 고를 때 참고하겠습니다.

sooninara 2004-02-21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형인간"이 음모론이라고 하는분이 계시더군요..맞는말 같아요
새벽부터 밤까지 부려 먹으려는 음모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