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미래, 컬처 엔지니어링 - 질문하는 문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폴 김 외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하면 떠오르는게 뭘까. 혹자는 그 나라의 대표 이미지를 알고 싶다면 애국가를 보라고 한다. 그렇다. 애국가엔 한국을 대표하는 여러 이미지가 나와있다. 애국가에도 나와있지만 국가이미지로 한국정부가 밀고 싶은 것 혹은 외국인도 어느정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그리고 한국민도 자랑스레 내세우는건 아무래도 '다이나믹 코리아'가 아닐까 싶다. 한국이 매우 역동적인 나라라는 것인데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것. 농업국이 최첨단 기술강국이 된것, 스포츠에서 보이는 강인함, 독재국가에서 민주시민사회를 만들어낸 것, k pop을 비롯한 영화 게임산업의 한류 같은 단기간의 긍정적 급변화상은 실제 이 나라를 매우 역동적인 사회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내실은 그렇지 않다. 정치는 주로 보수쪽 때문에 중간영역을 허용치 않는 극한대립상태이며, 노동시장이 양극화해 대기업과 중소기업노동자간의 차이가 크며 비정규직 정규직 간엔 계급의식 마져 있다. 또한 농업과 중소제조업분야에서는 외국노동자에 의존할수 밖에 없으면서도 이들을 피부색과 국적, 그나라의 경제력에 따라 무시, 차별한다. 또한 자국내에서 소수인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에 대해 허용적이지 않으며 일부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들을 극단적으로 배척하기까지 한다. 산업분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말로만 규제혁파를 외칠뿐 기득권보장에 앞장서 어떤 신산업도 각종 규제와 대기업의 견제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 몇 있는 글로벌 기업과 각종 공공기관 내부에서도 유교적 질서에 입각한 관료제가 뿌리 깊게 박혀있으며 이는 창의성과 다양성을 말살해 각종 조직의 혁신성과 효율성을 갈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이런데도 한국을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여튼 이런 사회의 여러가지 의식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를 포함하여 전반적인 문화를 바꾸어나가자는 개념이 이 책의 제목인 '컬쳐 엔지니어링'이다. 컬쳐엔지니어링은 그 사회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확보하여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글로벌 시민을 양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지구적 관점에서도 중요하고 그 사회의 경쟁력과 건강함을 이룩하는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네 명의 전문가가 모여 여러문제를 다룬다. 몇가지만 살펴보겠다.

 우선 한국이 극심한 리스크 회피사회라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은 앞서 말한 것처럼 변화가 많고 역동성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며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무언가를 하기를 두려워하는 극심한 리스크 회피 사회다. 비교적 혁신적이어야 할 젊은 층과 기업에서 도전적 태도가 극히 업악되어 있으며 이는 유교나 전체주의에서 기원한 강력한 관료주의와 사회안전망이 지극히 부실한 것에서 기인한다. 현재의 글로벌 기업들은 인재를 뽑을때 쓸데없는 스펙보다는 이 사람의 도전 경험과 그로 인한 실패의 경험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미국의 스탠퍼드대학은 학생들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거의 모든 프로젝트를 지원하여 실패를 종용한다. 낭비같아 보이는 이 행동은 단 몇개만의 혁신적인 성공으로 모든 실패를 되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다음은 도시경쟁력에 관한 이야기다. 미래사회엔 글로벌 본사가 어디에 위치하는가가 매우 중요해지며 세계 각국의 도시들은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하지만 여러 당근에도 글로벌 본사들은 비교적 뻔한 기존유명한 도시들에 입점하고 마는데 이는 이들이 필요한 인재가 그곳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비싼 지가나 각종 세제혜택보다 인재의 중요성을 택한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도시경쟁력은 과거처럼 도시인프라가 아니라 얼마나 뛰어난 인재를 모이게 하느냐에 달렸다. 결국 도시를 사람중심으로 디자인해야 하고, 글로벌한 환경을 조성하는게 중요해진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이러니한 문제도 발생한다. 글로벌 본사의 도시 진입은 결국 기존 주민의 젠트레피케이션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주 피해자는 아무래도 젊은 층이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도시의 다양성과 역동성, 창의성을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게 한다. 여러모로 고려해야할 점이 많은 셈이다.

 사회적 신뢰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한국은 여기서도 저신뢰 사회로 규정된다. 저신뢰사회는 개인적 연고, 혈연적 연고 등 사적 신뢰에 기반한 사회이다. 한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저신뢰 사회이면서 노력없는 보상이 상당히 많기까지 한데 노력에 기반해 사회적 신용이 쌓이는게 아니라  학연, 지연, 혈연같은 사적 특수성이 많이 작용한다. 반면 신뢰를 위해 구축한 객관적 시스템과 사회적 프로세스는 작용하기 어렵다. 문제는 미래 사회의 한 축인 공유 플랫폼 경제가 결국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신뢰성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경우 신뢰성 축적을 위한 사회적 공정성의 확보, 정보공유, 신뢰평가가 중요해진다.

 사회적 규제도 같이 이야기한다. 일본 후쿠시마는 동일본 지진이 일어나기전 지진에 대한 메뉴얼과 훈련이 상당히 갖춰져 있었는데 이로 인해 정작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사태는 메뉴얼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메뉴얼로 대피소로 이동했다 쓰나미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은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로 규정했는데 현대 사회가 모든게 연결되어 있어 효율성이 매우 높지만 위험도도 굉장히 높아지기 때문이다. 미래 사회의 연결성은 극도로 높아질 가능성이 높으며 이로 인해 위험이나 급격한 변화도 메뉴얼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사회나 교육 전 영역에서 세부지침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positive list를 만들기보다는 폭넓은 자율성을 주고 판단을 개별주체에 맡기는 negative list가 중요하다고 한다. 개인의 책임감과 윤리의식도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마지막은 교육이다. 결국 컬쳐엔지니링의 완성을 교육에 의한 것이니 교육의 개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두려움을 조장하는 교육시스템으로 책은 규정한다. 한국의 교육엔 무엇보다 학생들의 주도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자기 주도성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도전하고 실패의 경험을 갖는 다는 것이다. 학교가 다양한 것도 매우 중요한데 한국은 초, 중, 고, 대학이 모두 중앙조직의 하부구성물처럼 존재하고 몰개성하며 자기 비전이나 독자성이 크게 부족하다. 학교마다 자율성과 독자모델을 갖추기 위해 책은 교장과 교사의 자율성을 높이고 교장에게 필요한 인재를 수급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읽으면서 미래 사회와 한국사회의 문제점, 글로벌 시민, 지향점등 여러면에서 생각할 거리와 식견을 주는 책이었다. 깊이 있는 대화집이었지만 아무래도 양적으론 부족해 각 저자들의 저서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이 나온지도 벌써 10년이 다되어 간다. 제법 무서워보이는 벽돌책인데, 이런 벽돌책이 집에 몇 개 있으면서 인테리어 기능만 하고 있다. 책읽기를 좋아해도 벽돌책을 잡기엔 무언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황 요소가 필요한데, 이번엔 얼마전 읽었던 '소득의 미래'란 책과 '미국의 미래'란 책이 동기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날 내린 빗소리와 들고 있던 커피향도 무언가 작용을 했다.

 다 읽고나니 현재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원인에 대한 파악, 그리고 해결책으로 기본소득등의 논의 및 제시가 이 책에 기반한 것으로 여겨졌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일수 있다. 책은 좀 두껍고 시계열적 경제상황변화를 다루어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러다보니 지난 200여년간 온전한 자료가 남아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내용의 중심이 된다. 논의를 풀어내는 과정이 좀 지루하지만 많이 어렵진 않았고, 약간의 인내력과 경제에 대한 관심과 큰 불만이 있다면 누구나 읽어낼 책으로 보인다.

 자본주의는 생긴지 200여년 가량 됐다. 그 사이 엄청난 기술변천과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이 자본주의의 변화를 이끌어내었고, 우린 이로 인해 자본주의가 심화할수록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해지고 그 폐해가 쌓여만 간다는 인상을 갖는다. 당연히 지금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고 빈부격차가 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피케티가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해본 결과 자본주의가 오래될수록 빈부격차나 부의분배 문제가 악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이 같은 문제들의 원인은 자본주의 자체의 심화 발전보다는 정치, 사회적 문제가 보다 관련이 있으며 결국 지금의 상황이 악화된것도 이 때문이었. 이것이 피케티의 진단이며 그러므로 지금의 문제 역시 글로벌 누진세라는 정치적 결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게 그의 결론이다.

 피케티는 딱 두 가지 공식을 제시하는데(아마도 경제학계에선 공인된 항등식인듯 하다) 하나는 자본/소득 비율(국가경제에서 자본이 연간 국민전체소득에 비해 얼마나 되는가)은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비중과 자본수익률의 곱이라는 것이다. 자본/소득 비율은 오늘날 대부분의 부유한 선진국에서 6-7정도이며 자본수익률은 보통 5%이다. 그러므로 국가국민소득중 자본소득은 연 30%정도가 된다. 또 다른 식은 자본/소득 비율이 성장률 나누기 저축률과 같다는 것이다. 즉, 저축률이 연간 12%이고 성장률이 2%라면 자본/소득 비율은 6이된다. 저축률이 높을 수록 자본/소득 비율은 커지며 성장률이 낮을 수록 이는 낮아진다. 여기서 저축률이 높아 자본이 쌓일 수록 빈부격차가 확대되며 성장률이 높을 수록 자본이 흩어져 빈부격차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변화는 단기간에 지속되는게 아니며 수십년의 시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된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책에 의하면 경제성장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1인당 생산이 증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구증가다. 두 가지가 다 극도의 정체기였던 1800년이전까지는 세계의 경제성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 기간중 여러부침은 있었지만 세계의 인구성장률은 0.06%, 1인당생산증가도 0.02%로 사실상 제로성장시대였다. 하지만 산업혁명이후 1700-2012년까지 세계GDP성장률은 무려 연간 1.6%로 0.8%는인구증가, 0.8%는 생산량증가에 기인한 것이었다. 1%정도의 성장은 당장 몇년간은 눈에 띄는 변화를 낳지 않지만 수십년간 누적된다면 그 사회는 완전히 다른 사회로 탈바꿈한다. 그야말로 폭발적 성장이있던 셈인데 이중 피케티는 인구성장이 21세기에 사실상 제로로 수렴함으로써 성장률이 크게 정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자본/소득 비율은 지금은 선진국에서 5-6으로 나타나지만 100여년전인 19세기 말에는 무려 7-8에 달했다. 당시 대부분의 자본은 자본가 계층이나 상류계층이 쥐고 있었고, 나머지는 극도의 노동착취와 위험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깨부순 것이 경제공황과 세계1-2차대전, 그리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경제정책 변화였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재산을 주식이나 채권, 자산의 형태로 보유하고 있었는데 양차대전은 이를 극심하게 파괴했고, 경제공황은 주식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으며,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세율 강화와 임대료 안정, 통화남발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이들의 재산을 크게 감소시켰다. 또한 세계대전의 결과 주요식민지국가들이 독립하였는데 여기에 투자한 부유층들은 그 재산을 몰수당했다. 결국 1950년에 주요 선진국의 자본/소득 비율은 2-3까지 떨어졌는데 이는 엄청난 감소였다. 즉, 통념적으로 경제공황의 케인즈주의식 성공적 극복이 시장자본주의의 폐해를 끝내고 새로운 경제시대를 연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충격이 자본의 강제적 재분배를 낳았고, 이것이 인구회복 및 성장과 더불어 이례없는 경제성장을 낳았던 셈인 것이다.  

 이후 회복기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강력한 부의 재분배가 시작되었다. 유럽인들이 황금기라 여기는 1950-1980년 정도까지의 시기인데 인구의 회복과 더불어 연간 5-6%수준의 상당한 경제성장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 역사중 유일하게 경제성장률이 자본의 수익률을 넘어선 시기였다. 이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무려 인구의 40-50%가 유의미한 재산을 갖춘 중산층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또한 이들의 사회보장을 위해 막대한 세금이 들어가는 공공자산의 확충과 의료 및 교육으로 대변되는 사회보장책들도 완성되었다. 이는 많은 재원을 요구하는 것들이었지만 꾸준한 인구성장과 경제성장률이 이를 상쇄해주었다.

 하지만 이 황금시기에 대한 영국과 미국, 유럽국가들의 인식은 다소 다른다. 유럽국가들은 전쟁의 직접 피해로 파괴가 극심하여 이 기간에 주로 회복하고 성장한 반면, 영국과 미국은 전쟁으로인한 직접 파괴가 적어 회복이 일어날 만한 여지가 적었고 상대적으로 낮은 경제성장률로 자신들이 많이 성장하지 못하고 다른 국가들에 따라 잡힌 쇠퇴의 시기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기간에 영국과 미국도 긍정적 성장을 했음에도 이런 인식의 차이는 영국과 미국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하는 주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하여튼 이런 자유화로 인해 1980년대 이후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른부 100여년전에 있었던 세습자본주의가 부활하게 된다. 이는 장기적으로 인구 정체로 인한 성장률의 둔화로 부의 재분배 효과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며, 이 기간에 주요 공공자산이 민영화 되었고, 부동산과 주식시장이 장기적으로 크게 반등하여 자산을 보유한 부유층에 유리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1980년대 이후 미국에선 소득불평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는데 상위 10%의 국민소득비중이 과거 30-35%정도였던게 2000년대에는 무려 15-50%까지 폭등했다. 더 세부적으로 살피면 그 중 상위 1%는 9%에서 20%로, 다음 상위 4%는 11%에서 12%로, 그 다음 상위5%는 12%에서 16%로 상승했다. 최상위일수록 부가 더욱 집중한 것이다.

 소득의 두 가지인 노동소득과 자본소득 중 당연히 부유층으로 갈 수록 자본자산이 많아 자본소득이 커진다. 하지만 19세기엔 상위4-5%만 되어도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많았던 반면 오늘날에는 상위1%수준이 되어야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많아진다. 이는 자본/소득 비율이 오늘날5-6정도의 과거의 7-8수준에 이르지 못할정도로 자본의 집중화가 덜 이루어진 측면도 있지만 수퍼경영자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과도한 급여와도 관련이 있다. 1980년이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등 영미권 국가들은 자유주의로 전환하며 법인세등을 크게 낮춘다. 미국의 법인세는 거의 반세기동안 70-80%에 달할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25%수준으로 유럽국가들에 비해서도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이 같은 남는 돈이 수퍼경영자의 몫으로 대부분 돌아갔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하여튼 인구의 정체와 경제성장률의 둔화는 전세계적 현상이며 성장률을 높이며 세계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중국, 인도등의 개도국도 결국은 선진국과 수준이 비슷해지며 인구정체와 성장정체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21세기는 전체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낮은 것이며 이로 인해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장기적으로 높은 시대가 될것으로 피케티는 판단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습자본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며 이것이 발생시킬 극도의 불평등은 민주사회의 주요합의인 능력주의에 의한 합리적 불평등과 타인들의 그것에 대한 수용을 뿌리채 흔들게 된다. 이것의 해결을 위해 피케티가 제시하는 것이 글로벌 누진세다.

 누진세는 사실 오래된 생각이지만 오랜 기간 법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실현이 되지 못했다. 중산층과 하위층은 대부분의 자산이 주택 및 약간의 현금, 주식으로 양도 적고 파악이 간단하다. 또한 이들의 소득 역시 대부분 노동소득으로 원천징수의 대상이 된다. 반면 부유층은 재산의 포트폴리오가 매우 복잡하고 자산자체가 투자자산으로 잡혀 면세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누진세율을 적용하여 매우 높은 세율이 적용되어도 그들의 실제재산이 100이라면 면세대상이 너무많아 사실상 2정도에만 높은 세율이 적용되어 누진세가 무력화된다. 또한 부유층은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조세피난처를 적극 활용한다. 전세계 재산은 현재 장부상 균형이 맞지 않는 마이너스 상태인데, 이는 조세피난처로 상당자금이 흘러들어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세계GDP의 10%수준으로 엄청난 금액이다.

 피케티는 부유층의 대해 글로벌 누진세의 형태로 글로벌 자본세를 제시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부유층의 연간 소득은 상당히 파악하기 어렵다. 때문에 피케티는 비교적 낮은 세율로 그들의 전체재산이 평균적으로 벌어들일 만한 소득에 일괄적으로 같은 세율을 적용하는 글로벌 자본세를 주장한다. 이런 낮은 글로벌 자본세는 연간 국민소득의 3-4%정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며 생각보다 작지만 큰 의미를 지닌다. 우선 부의 불평등을 막을 것이고 금융 및 은행제도에 효과적인 규제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 글로벌 자본세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제적 공조가 필수다. 자본의 이동이 세계적으로 자유로운 만큼 세계 은행간 자본의 이동 및 흐름에 대한 고도의 투명성을 갖고 협력하지 않으면 결국 자본은 조세피난처 같은 곳으로 피난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위기를 겪은 이탈리아는 고도의 누진세를 정치적으로 고려했지만 자국내 자본의 대규모 이탈을 우려한 나머지 구상에만 그치고 만 전례가 있다.

 21세기가 새로운 세습자본주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자본에 대한 역사적 자료 고찰을 통한 자본주의의 변화,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자체의 속성으로 신자유주의와 관련이 결국 깊지만 보다 정치사회적 요소와 관련이 깊었다는 것, 글로벌 자본세에 대한 생각은 이 책을 통해 많이 배운 요소였다. 하지만 10년정도 전의 책이어서인지 4차산업혁명과 관련한 생산력의 급격한 증대 가능성을 다루지 않은 것은 다소 의외의 측면이다. 성장률이 인구증가와 생산력의 증가로 이루어진다면 인구의 정체엔 동의할수 있으나 생산력의 증가역시 정체할지는 미지수다. 피케티는 이에 대해 그간 자본주의 생산력이 산업혁명 초기만큼의 큰 급격한 변화없이 완만히 증가했음므로 그런 추세가 유지될 것으로 보았지만 지나치게 추세에만 의존한 보수적 시각이란 생각이다. 물론 4차산업혁명자체가 일자리를 많이 만들지 않을 것이 자명해보이고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한 생산력의 증가는 결국 자본의 몫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기에 성장률이 피케티의 예상을 웃돌더라도 그게 부의 재분배에 기여할것 같지는 않다.

 이런면은 감안하더라도 좋은 책이었고 자본주의의 역사적 일관성과 변천을 많이 배울수 있는 책이었다. 그의 다른 책이 곧 출간한다니 기대해본다. 새로운 시류를 잘 담아내지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실 속으로 간 이해중심 교육과정 이론과 실천이 만나다 1
온정덕 외 지음 / 살림터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해라는 말은 다른 말처럼 넓은 층위를 가진다. 보통 상대방의 말이나 상황을 받아들이면 이해했다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교육에서 이해는 개념이나 원리를 알았음을 의미한다. 교육에서 가장 안좋은 이해의 의미는 어찌보면 선다형 문제의 원리는 이해하지 못한채 문제만 풀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데 우리는 이 경우도 오랫동안 이해로 인정해왔다.(복잡한 수학공식을 외우고 혹은 문제풀이 방법만 외워서 해결한 경우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교육계의 이해의 의미는 변했다. 지금의 이해는 개념이나 원리를 파악하고 내면화한 후 더 나아가 새로운 상황이나 맥락에 적용하여 활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능력을 역량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하여튼 지금 이런 수준의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인재를 미래사회는 원하고 있고, 이에 맞추어 교육과정도 이해중심교육과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이해중심교육과정은 1998년 미국의 위긴스와 맥타이가 창안했는데 이 책은 그 이론적 배경과 실제사례로 이루어졌다.

 이해중심교육과정은 미국에서 학생들이 교육과정을 이수 한 후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실증적 질문에서 출발했다. 교육과정을 이수하긴 했고, 점수도 어느정도 얻긴 했는데 당최 뭘할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뾰족한 답이 없었던 것. 그래서 교육과정 이수후 도달행동수준으로 성취기준이란게 등장했다. 성취기준이란 기본적으로 문제해결, 즉 수행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이를 평가하기 위해 당연히 수행평가란 개념도 등장했다. 이게 98년의 일로 우리의 7차교육과정도 이를 즉각도입했다.

 이해는 무언가를 파악하고 내면화한 후 적용까지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추론과 전이, 패턴화한 지식 세가지의 단계로 구성된다. 추론은 첫단계로 교과의 구조를 이해하는 단계다. 학습자는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고 패턴이나 구조를 파악하는 사고과정을 거친다. 이를 하려면 기존의 선경험과 선지식이 중요한데 그래서 각 교과엔 무언가를 배우기전에 기존 경험과 관련하는 부분이 있다. 전이는 배운것을 새롭게 적용하는 과정이다. 습득한 지식, 기능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결과물을 산출하는 것이다. 패턴화한 지식은 더 나아가 배운것을 완전히 자기것으로 만든 상태로 일반화의 상태에 도달했다. 때문에 이 부분에선 자기만의 언어나 방식으로 배운 것을 표현하는 과정을 거친다. 법칙이나 원리도 만들어볼만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해의 대상으로는 각 교과의 학습내용 즉, 사실과 정보, 개념이나 기능, 원리나 법칙, 일반화가 있다. 이중 이해중심교육과정의 목표는 학생이 개별적 사실을 잊어도 그 핵심원리를 잊지 않는 영속적 이해에 도달하는 것으로 당연히 그 대상을 일반화 및 원리, 법칙의 이해다. 개념이나 기능은 사고를 불러일으키고 학생을 영속적 이해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며, 사실과 정보는 개념이나 일반화의 예에 불과하다. 기능은 교육내용으로 가르쳐야 할 것이며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으로 중요하다.

 하여튼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해중심교육과정에서는 핵심질문이란 것을 구성한다. 이는 학생의 사고를 촉진하고 핵심개념과 일반화에 비추어 의미구성을 돕는 것으로 학습자들이 단원전체에 걸쳐 논쟁하고 탐구하며 결론을 도출하도록 이끈다. 형태는 당연히 개방적이다. 핵심질문을 만드는 방식으로 7가지를 제시하는데 우선 가르치고자하는 핵심내용에서 추출하는 것이다. 예로 삼권분립이란 핵심개념을 가르치기 위해 '권력의 남용은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라고 핵심질문을 만들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성취기준에 제시된 동사와 명사를 구분하여 만들기, 학생이 도달하기 위한 이해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만들기, 학습자의 오개념을 고려하여 만들기, 이해의 여섯가지 측면을 생각하여 만들기가 있다.

 이해중심교육과정을 통해 핵심질문과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평가를 제기했다면 마지막 단계는 학습활동의 구성이다. 학습활동은 WHERETO로 구성한다.

Where/why-단원의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은 무엇인지

Hook-관심을 집중시키고

Explore/ebable/equip-과제수행에 필요한 지식, 경험, 노하우를 갖추게 하고

Reflect/rethink/revise-핵심아이디어들을 다시 생각하고, 반성, 수정하며

Evaluate-과제의 진행을 스스로 평가할 기회를 주고

Tailored-학습자 개개인의 강점, 재능, 흥미를 적합한 방식으로 다양화하고

Organize-깊이 있는 학습을 최적화하도록 조직

 마지막으로 이해중심교육과정에서 교사의 역할이다. 교사는 개념적으로 사고하여 학생이 무엇을 이해할수 있어야 하고, 가르칠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즉, 이해의 대상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안내자이나 촉진자로 활동해야하며, 학생의 사고와 오개념을 중간에 드러내고, 평가설계자처럼 항상 사고하고 단원을 설계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학교 내부자들 - 민주적인 학교를 위하여
박순걸 지음 / 에듀니티 / 201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교사집단은 교육공무원으로 관료제 성격을 강하게 지닌 집단이지만 그러면서도 자율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폭넓은 자유를 누리는 이완적 집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사집단은 두 상반된 성격중 확실히 관료제 성격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데 이는 근원적으로 자율성과 전문성보다는 중앙집권적 통제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교육부와 교육청을 통한 정부의 강력한 통제때문이고, 학교 내부적으로는 이들의 충실한 시녀인 관리자들 때문이다.

 교사집단은 다른 일반 공무원들과는 다르게 어찌보면 상당히 수평적인 집단이다. 경력이 쌓이면 꾸준히 급수가 올라가며 직위가 변하는 일반직에 비해 교감이나 교장으로 승진하는 트랙외에는 경력이 아무리 쌓여도 여전히 평교사이기 때문이다. 경력차와 호봉차는 꽤 나겠지만 30년차 교사와 처음 임용된 신규교사는 같은 평교사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장, 교감의 지휘아래 일사불란하게 수직적으로 움직인다.

 문제는 이런 관료적이고 수직적인 성격이 민주시민을 길러내야 하는 학교 현장에 정작 민주주의가 꽃피우지 못하게 하고, 교육본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감, 교장이라는 관리자들 역시 이전엔 20여년의 경력을 가진 교사였다. 하지만 이들은 관리자가 되는 순간 놀랍게도 탈바꿈하며 교사들과의 동료성과 연계성, 수평성, 민주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 원인으로 저자는 관리자의 소통능력 상실, 공동체를 담아내는 리더십의 부재, 교육적 소신의 부재, 교장실로 중앙집권화하려는 성향을 꼽는다.

 교감, 교장이라는 관리자가 교육부와 교육청의 말에 순응하게 되는데는 또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교육청이 교감과 교장의 승진과 중임에 대한 권한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교감의 경우 교장승진을 위한 근무평가 성적을 교장과 교육청으로부터 받는다. 각각 50%씩 받게 된다. 이 경우 교감은 대부분 교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기에 만점을 받아오게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실상 변별력은 교육청이 쥐게 된다. 때문에 각 학교의 교감들은 교육청의 사업추진이나 연수, 교사동원 요구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이는 학교 현장에 부담으로 가중된다. 교장역시 마찬가지여서 중임을 위해 교육청의 요구에 민감할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책은 학교 민주화와 교육 본연의 목적을 살리기 위해 결국은 승진제도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감, 교장의 승진 및 중임에 과감히 같은 학교 교원의 점수를 반영시켜 보다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를 만드는 것이 방법이고, 또 다른 방법은 순환보직제다. 학교내부에서 교직원, 학부모, 학생등의 의견 수렴을 통해 교장이나 교감을 보직제처럼 선발하고, 일정 임기후 다시 교원으로 돌리는 제도다. 역시 상당한 민주성과 수평성을 담보할수 있는 방법이다. 교장공모제의 확대도 주장하는데 연구결과 일반 중임교장과 초빙교장, 내부형 교장 공모중 가장 교육만족도가 높은 형인 내부형 공모교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자율학교로 지정된 학교만이 이것이 가능해 상당한 한계가 있다.

 학교본연의 목적을 살리지 못하는 이유중 또하나는 바로 교사가 교사 본연의 목적인 교육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초중등 교육법에 의하면 '교사는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한다.'라고 되어 있으며 학급담당교원은 학급을 운영하고 학급에 속한 학생에 대한 교육활동과 그와 관련된 상담 및 생활지도 등을 담당한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 어디에도 학교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행정업무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다. 초중등교육법상으론 학교에서 발생하는 행정업무는 행정실에서 처리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학교의 성격상 교육과 그 외의 것이 딱 부러지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 경우 행정실과 교사간 줄다리기가 벌어지며 대개 승자는 관리자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법령에 의거하여 교육청의 질의하면 그들은 결국 애매하고 안타깝지만 각 단위학교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는 비겁한 답변만 내놓는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교육당국과 청이 확실한 입장을 그어야 한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교육청엔 교수학습지원과와 행정지원과가 있는데 교수학습지원과에서 오는 공문은 교사가 모두 처리하지만 행정지원과의 공문은 행정실에서 모두 처리하는게 아닌 교사가 처리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내용을 정리하면 학교교육 본연의 목적을 살리기 위해선 교감과 교장이 변해야 하며 자율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기에 결국 승진제도와 교직문화가 바뀌어야 하고, 교육청, 교육부단위에서 교원을 행정업무로부터 해방시켜 교원업무를 정상화해야한다는게 골자다.

 글쓴이는 경상남도의 현직교장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관리자들에게 시달린 끝에 더 큰 선한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승진을 결심했다고 한다. 저자는 교감이면서도 교원들이 수업에 전념할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방과후나 돌봄등 교육외적이라고 생각되는 즉, 교사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무부장이 하고 있는 각종 행사의 진행을 본인이 담당해 교무부장 교사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었으며, 내빈 접대 및 교육과정 설명도 자신이 한다고 한다.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는데, 사실 칭찬과 격려의 대상이 되는게 마땅하다. 저자의 말처럼 언젠가 그럼 교감과 교장의 모습이 일반화되고, 지금의 비상식적 교육현장이 과거 어렵던 야만의 시대처럼 느껴질 날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자와 생쥐가 한 번도 생각 못 한 것들
전김해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이솝우화에 사자와 쥐이야기가 있다. 초원의 왕 사자가 쥐를 우습게 보았다. 왕인데 한낱 쥐가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그냥 먹기도 고까웠는지 쥐를 도와줬는데 쥐는 사자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한다. 왕이 천민하나 도와줬다고, 천민이 은혜를 갚는다하면 오히려 우습지 않겠는가. 딱 그격이었다. 그런데 쥐는 인간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어찌할바 모르는 사자를 이로 그물을 갉아 구해준다. 이 동화는 여기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좀 달라서 사자와 쥐가 나온다. 그런데 이솝우화와는 반대로 사자가 쥐에게 관심을 보인다. 쥐가 워낙 풍모가 대단한 사자에 눌려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사자가 '사자와 쥐' 이야기를 한다. 나도 못끊는 그물을 끓을 수 있는건 바로 너라고, 쥐는 이말에 낚여 이 이상한 사자와 함께 하기로 한다. 한때 자신을 먹으려고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이 사자는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이 사자는 매우 이상해 쥐와 함께 하며 바다를 보더니 바다엔 끝이 없을 것 만 같다고 한다. 해와 달이 계속 돌아오듯. 물이 떨어지는게 아니라 다시 솟구치는게 아닌가하는. 그래서 우리도 배타고 가면 그걸 볼수 있지 않을까라고 한다.

 그래서 둘은 뗏목을 만들어 막상 떠난다. 가다가 바다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바다에도 사자가 있다니 둘은 대단한 상상을 하며 바다사자를 보고 싶어 한다. 누구나 바다사자의 이름만 듣고 어릴적 대단한 상상을 한적이 있다 실망하곤 했을텐데 둘도 그러했다. 미끌거리고 까만 몸에 몸이 뒤룩뒤룩 살찌고 기름이 많아 범고래에게 쫓기기만 하는 녀석은 실망스러웠다. 바다사자는 범고래에게 쫓기는 것도 지겹고 이들의 여행이 재미나 보여 하늘사자가 있다고 거짓말하고 길안내를 해주겠다며 합류한다.

 그래서 이 책은 사자로 계속 가나보다 했다. 왜, 하늘사자에 , 사막사자에 이런식으로. 그런데 뜬금없이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로 전환한다. 아무래도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오래도록 항해했더니 한국에 닿았나보다. 여기서 부터 두이야기가 묘하게 짬뽕되는데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에 바다사자, 사자, 쥐를 곁들이며 이야기를 다소 각색한다.

 결론은 사자와 쥐가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좀 아쉽다.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애매한 느낌이 들었고, 동서양의 두 이야기의 콜라보도 좋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차라리 사자가 계속 다른 사자를 찾아다니며 삶과 우주에 대한 교훈과 이야기를 얻는 만남으로 구성하는데 더 낳지 않았을지 싶다. 이 동화엔 삽화가 적지 않게 있는데 무척 독특해서 처음엔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았지만 자세히 보니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삽화가를 따로 쓴게 아닌가 싶었는데 글그림작가가 동일인이었다. 이야기도 그림만큼 독특했으면 좋았을듯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5-14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4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