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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망설임이나 굴곡 없이 한길로만 가는 탄탄대로의 그것이라면 거칠 것은 없겠지만 재미는 없을 것이고,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어느 길로 가야할 지를 몰라 좌충우돌 망설인다면 그건 또 너무 가벼워서 경박할 것 같다.

그렇게 그렇게 적당히 흔들리고 좌절하기도 하고,

퍼질러 앉아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떨고 일어나 앞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는 게 인지상정일게다.

한때 김탁환을 정말 좋아해서 김탁환의 그것이 나오는 쪽쪽 읽어댔지만,

어느 순간을 경계로 애정이 식었었다.

그때가 아마 백탑파들이 등장하는 소설이었던거 같은데,

그속의 박지원이고 이덕무, 이옥 등의 글들이 인용되는 것을 보고는 창작이 아닌 모방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프로필 란에 붙는 소설가 말고 이야기수집가라는 수식의 의미를 이해 못했던 셈이다.

 

이제는 어설프게나마 그의 독서 방법과 글쓰기 방법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

'책을 부르는 책'이란 소제목도 그렇지만,

<아비 그리울 때 보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겠다.

세상엔 책상에 앉아서 엉덩이의 뚱뚱함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별을 보기 위해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는 행위를 해야 하는 법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책을 읽기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를 개인적인 체험에서 세대의 경험으로 확장시켜 소통과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하는듯 보인다.

세월호 관련 행사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고,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과의 SNS에 적극 참여하고,

핵폐기물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는데, 탈핵의 입장만이 아니라 친핵의 논리에도 관심을 보인다.

서민의 기생충열전을 읽으며 생물에 감정이입(54쪽)을 얘기하길래,

이 모두가 정치적 활동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드래곤'의 '삐딱하게'와 '강산에'의 '삐딱하게'를 대조하면서,

작가란 공직자들의 공적인 발언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말들을 믿지 않고 되살필 운명을 타고 났으며,

정치에 관심이 많거나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정치적 활동들이 아니고 작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않는 이들의 삶을 조사하고 관찰하여 정리한 후 이야기로 담는 이가 또한 작가다.(63쪽)

법칙을 이끌어내는 건 경험이다.(109쪽)

 

필사의 핵심은 공감과 자발성(82쪽)이라고 하며,

결혼한 딸이 아우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친정에 와서 '임경업전'을 베끼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아버지가 소설 애독자인 딸을 위해 종남매와 숙질까지 불러 함께 필사를 마친 뒤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단다.

'아비 그리운때 보라'

 

아무래도 감동적이었던 것은, 혜초의 여정을 그대로 되밟아 그려낸 소설 '혜초'의 그것과,

'글도 춤도 결국 발바닥으로 시작하는 것이다'의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을 위한 그의 행보였다.

 

굳이 이 책을 분류 하자면 책을 읽은 서평이나 독후감 모음집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뿐만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느낄 수 있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 한종류로 통일한다고 하여 논란이다.

김탁환 같은 소설가도 글을 개인적인 삶을 고백하는 사소설 형식으로는 쓸 자신이 없다고 하는걸 보면,

글은 어떻게 쓰이고 읽혀야 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글들이 세대의 경험을 감당할 수 있는지, 의 여부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몫은 아닐 것이다.

빛이 있어야 그림지가 있고, 새벽이 있어야 황혼이 있으며,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다 경험해야 하듯이,

개개인의 삶이 모인 역사라는 것도 한 종류로는 제대로 된 역사라고 할 수가 없다.

 

 

김탁환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를 인용하며 책을 이렇게 끝맺고 있는데,

읽는 내내 같이 아프다.

 

ㆍㆍㆍㆍㆍㆍ 츠바이크는 그림자를 앞세워 지나갔고, 나는 이제 내 그림자를 돌아보려 하는 것이다. 갈 길이 멀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갑자기 내 앞에 나의 그림자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이번 전쟁의 뒤에 지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음을 보았던 것과 같았다. 그 그림자는 내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밤낮으로 나의 모든 생각 위를 떠다녔다. 아마도 그 그림자의 어두운 윤곽은 이 회상의 書의 많은 페이지 위에도 드리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그림자는 궁극적으로 빛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벽과 황혼, 전쟁과 평화, 상승과 몰락을 경험한 자만이, 그러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의 세계』,551~552쪽

  

 

 

                     

 아비 그리울 때 보라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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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5-11-24 13:51   좋아요 0 | URL
김탁환 작가는 제목도 참 잘 지어요.
 
사부의 요리 - 요리사 이연복의 내공 있는 인생 이야기
이연복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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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가 나에게 좋아하는 요리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박찬일이라고 대답하지만,

제대로된 대답이 되지않는 이유는 그가 만든 요리고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끔 백년식당이란 책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그가 추천하는 식당들을 가서 먹어보기는 했지만,

솔직히 맛이 있을때도 있고 내 입맛에 영 아닐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쓰는 글만큼은 언제나 맛깔스러워서 혹하게 되는데,

이 책도 본문보다 '아이고, 형, 연복이 형'이라는 '추천의 글'을 더 열심히 읽었다는 걸 조심스레 밝힌다.

 

텔레비전에서 그를 몇번 보고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며 멋지다고 생각했었지만, 박찬일이 쓴 '추천의 글'을 볼때까지만 해도 나의 선택을 신뢰할 수 없었다.

요리 뒤로 그가 인사를 나왔다. 꾸깃꾸깃한 싸구려 조리복 상의에 아무렇게나 입은 낡은 청바지, 요리 모자 삼아 대충 눌러쓴 게리슨모, 게다가 앞주머니에는 누런색 말보로 담배가 떡하니 꽂혀 있었다.(5쪽)

그와의 첫만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데,

나를 혼란스럽게 한건 꾸깃꾸깃한 싸구려 조리복 상의나, 요리사의 자존심이라는 모자를 아무거나 대충 눌러쓴 때문은 아니었다.

음식을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감각이 그렇지만 미각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라, '앞주머니에 꽂힌 누런 말보로 담배란 단어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이 둘의 첫 만남이 십년도 더 전의 일이고, 담배를 끊은지가 13년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계속 그랬다.

책을 읽으면서 이십대에 축농증 수술을 잘못 받아 후각이 마비되어 냄새를 못 맡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요리사로서 그가 지키는 철칙에 관해 읽고나서야 '역쉬~, 나의 사람보는 눈은 틀림없구나. 음화화화~'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가 요리사로서 지키는 철칙은,

아침밥을 먹지 않는다. 내 배가 부르면 미각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예전에는 피웠는데 어느 날인가 담배가 혀를 텁텁하게 만드는 느낌이 들어 끊어버렸다.

폭음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3가지인데 다 미각과 연관된 것들이다.

 

언젠가 김제동의 모친이 '가식도 10년이면 예절로 봐주어야 한다' 고 했다던게 떠올랐다.

처음엔 가식이었다 하더라도, 몸에 익어 버릇이나 습관이 되어버리면...성격이나 본성으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의미 일텐데,

그런 의미의 연장선 상에서 이 책이 참 좋았었다.

다른 요리책들처럼 레시피를 공개한 책이 아니어서 좋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가 직접 썼다고 폼잡지 않고 녹취했다고 고백해주어서 더 좋았었다.

솔직히 중화요리라는게 레시피가 있고,

그 레시피를 고대로 따라 한다고 해서 맛이 똑같이 나는 요리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ㅋ~.

 

 

암튼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엿본 것은,

43년 경력을 넘어 이 시대가 기억해야 할 땀과 맛을 일깨워준 중화요리사 이연복의 인생이야기 였다.

물론 세월이 세월이니 만큼 생략되고 미화되고 각색되었겠지만,

그래도 한가지 일을 43 년동안 했다는 것은,

기술자 장인의 경지를 넘어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자의 내공이 느껴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난 개인적으로 달인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게 숙련된 자의 매너리즘으로 비춰져서 였다.

그런데, 이연복 님이라면 달인이 아니라 달관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그가 하는 얘기들이 요리와 관련된 얘기들인데도 불구하고 삶 전반에 관한 얘기로 읽혔고,

그렇기 때문에 주방의 후배들이 그를 지칭할 때 사용한다는 '사부'란 호칭으로 나도 불러보고 싶어졌다.

ㆍㆍㆍㆍㆍㆍ내가 만들었던 음식들은 한식, 일식, 중식이 섞여 있는 스타일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바로 중식이 갖고 있는 장점 때문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세계 어느 나라에나 중국 음식이 자리 잡고 있다. 누구나 쉽게 배달해 먹는 만큼 중식은 어떤 환경에서든 변형이 쉬운 음식인 것이다. 한식이나 이탈리아 음식만 해도 확고한 자기 스타일이 있는데 중식은 상대적으로 응용이 빠르다. 전 세계적으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고 많은 사랑을 받는 것도 그 이유가 클 것이다.ㆍㆍㆍㆍㆍㆍ일본에서 직접 가게를 운영하면서 크게 느낀 것은, 열심히 하려고 시작했으면 사람들의 성향에 맞춰서 메뉴를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ㆍㆍㆍㆍㆍㆍ

일본에 있으면서 사람 대하는 법도 많이 배웠다. 친구 고르는 법부터 사람을 파악하는 법, 배짱 있게 사람들을 대하는 법까지 다양하게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욱하던 성격도 많이 죽었다. 대사관에서 일하던 시절만 해도 48킬로그램에 눈에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운 모습이라, 대사에게 웃는 연습을 좀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한번은 대사가 자기처럼 아침, 점심, 저녁에 거울을 보면서 미소 짓는 연습을 해보라고 했다. 2~3개월 동안 내가 제대로 연습했는지 확인할 정도였다.(82쪽)

그가 일본에 있으면서 사람 대하는 법을 배웠다는 부분은,

나를 포함하여 사람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배우고 적용시켜야 할 덕목이다.

하지만, 이게 그의 자존심이나 자신이 만드는 음식에 대한 자부심과 관련한 올곧음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한다.

음식을 팔아서 매출이 오른다는 건 당연히 재료비도 예전보다 더 든다는 뜻이다. 그래도 매출이 엄청나게 올랐으니, 전보다 훨씬 많이 남기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런 걸 생각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장님이 그랬다. 나는 말해봐야 소용없는 사람들과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세히 이야기해봤자 이 사람에게는 변명밖에 되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73쪽)

 

'주방사람들의 뒷모습만 봐도, 앞에 들고 있는 음식 온도가 몇 도인지 훤히 보이는 나로서는 호통을 칠 수밖에 없다.(117쪽)'는 대목 같은 경우는 연륜이나 내공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그의 정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내 몸이 조금 편하자고 변칙을 쓰면, 그건 요리사가 아니다.ㆍㆍㆍㆍㆍㆍ그건 막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청결이 몸에 배야 하기 때문이다.(176쪽)

ㆍㆍㆍㆍㆍㆍ

"음식 만들때 가장 중요한게 뭐라고 생각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 있게 '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뒤이은 친구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간도 중요하지만, 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나는 그때까지 그런 말을 입밖에 내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 그게 기본이었지.ㆍㆍㆍㆍㆍㆍ그러면서  내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음식을 대하는 마음을 표현하자면 '정확하게, 정직하게'이다.(177쪽)

 

음식 만드는 사람이냐, 장사하는 사람이냐?(242쪽)

 

간혹 병원이나 약국 등도 이익을 내기 위해 존재한다. 학교나 학원도 수업료나 강의료를 내야한다...따위의 얘기를 한다.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하지만 이연복을 흉내내어 한 마디만 하고 싶다.

사람 몸으로 가는 거,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거 갖고 장난치지 말자.

음식이 사람 몸에 들어 가서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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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5-10-07 18:36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이 제대로 보신 분이라면~~두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책 재미나겠어요~~
근데 오랜만이어요?
양철나무꾼님!!^^

양철나무꾼 2015-10-19 14:21   좋아요 0 | URL
제가 사람을 제대로 보는 눈이 있는게 아니라,
인생의 간난신고를 겪은 사람들 끼리 통하는 일종의 `찌찌뽕`같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데 잘 지내세요, 책 읽는 나무 님~?

세실 2015-10-07 20:53   좋아요 0 | URL
모든 요리사가 음식=정직한 마음으로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요리는 영 젬병이네요...

양철나무꾼 2015-10-19 14:23   좋아요 0 | URL
세실 님처럼 미모로우신 분이라면,
요리 정도 젬병인거... 용서할 수 있습니다~ㅅ!

저라면 세실님 얼굴만 쳐다보고 살아도 배부를 것 같거덩여~^^

세실 2015-10-19 17:05   좋아요 0 | URL
호호호 울 신랑은 전혀 그리 생각안하는게 문제죠?

해피북 2015-10-08 09:04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세요~~양철나무꾼님^~^
저희 엄마두 어릴때부터 냄새를 맡지 못하셔서 엄마 코대신 식구들이 냄새를 맡아서 말해주곤 했는데 이연복님 사연듣고 엄마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ㅎ 43년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것. 저는 물질적 부유함보다 그런 가치관이 더 멋져보이더라구요 ㅋㅂㅋ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양철나무꾼 2015-10-19 14:25   좋아요 0 | URL
전 달인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지만,
삶이 배어있고 생활이 녹아있는 그런걸...이길 것은 없겠죠~?^^
 
상(차리는)남자? 상남자! - 삶이 따뜻해지는 다섯 남자의 밥상 이야기
조영학.유정훈.강성민.이충노.황석희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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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요리사는 남자였고, 사옹원에 소속되어 숙수라고 불렸다는 얘기는 새로울것도 없거니와,

그러고보면 그 당시엔 단순히 음식이라기 보다는 치료의 개념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쿡방, 먹방이라고 하여 쉐프라는 이름의 남자 요리사가 대세이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럭셔리한 요리의 반대 급부로 엄마의 집밥에 대한 그리움이 회자되기도 한다.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조영학 님과  글항아리 강성민 님이 필진이어서 망설이지 않았는데,

읽다보니 메디치출판사다.

메디치출판사의 책만드는 감각이 나의 독서 취향이랑 비슷한가 보다, 비껴가지 않게 된다.

띠지를 따로 만들지 않고 띠지처리한 겉표지도 맘에 들고,

작가들의 얼굴을 세밀화로 그려낸 것도 맘에 든다.

 

이 책은 여는글에 적힌대로, 요리책이 아니다.

상남자 5인방의 솔직한 가족사이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한 끼의 식사'를 정성스럽게 차려내는 평범한 사내들의 무용담이다.(8쪽)

 

이 책의 필진이 작가들만 있는 것도 아닌데,

글이 하나같이 군더더기가 없고 그래서인지 오히려 큰 감동을 준다.

요리의 솜씨나 내용으로 내공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일을 하다가 아내를 위한 밥을 짓는다는 조영학 님은 아무래도 보통이 아니지 싶다.

텃밭농사를 지어 식재료를 조달하는 것도 그렇지만,

당신 손으로 직접 맥주와 막걸리를 빚는다는 것은,

솜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좋은 재료로 정성껏 빚기 때문이라고 겸양을 부려도,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어릴때부터 야한 비디오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리를 하기 위해 엄머의 외출을 기다렸다는 강성민 님의 글도 맛깔스럽다.

 

먹는 일은 즐겁다.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먹는 일에는 정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배를 채우는 것 이상으로 가꾸는 것이리라. 뭐가 그렇게 바쁜지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일에 마음을 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해서 환경 자체가 음식에 친화적이다. 책 속에도 있고 책 만드는 사람들 속에도 항상 음식 이야기가 있다. 음식을 빼고 글이 될 리가 없지 않은가. 문학도 음식이고 역사도 음식이다.(108쪽)

 

강성민 님의 글은 맛깔스러울 뿐만 아니라 소박하고 정겹다.

ㆍㆍㆍㆍㆍㆍ"민어가 민물고기야?"라는 소리를 들었던 민어매운탕 등 요리하는 일은 창조였으며 재료와 소통하는 일이었다. 맛내기에는 자주 실패했지만 사람들이 즐겁게 동참해줘서 요리하는 일이 즐거웠다. 어느 날 부지런히 음식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나를 보고 아내는 "그걸 왜 먹을 때마다 찍어?"라고 묻는다. 내 대답은 "곧 사라지니까. 한시적인 존재잖아." 모든 음식은 아름답다. 한시적인 존재인 인간이 그런 것처럼.(120쪽)

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음식 이야기를 돌아보면, 음식을 통해 대단한 뭔가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음식은 삶이기도 하고 역사이면서 시이기도 하다. 음식이라는 카테고리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거기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느낌을 받는다(124쪽)고 하고 있는데,

이쯤되면 글도 음식만큼이나 정갈하다.

 

쿨해서 멋지다는 느낌을 받은 사람은, 실은 이충노 님이 아니고 아들 은규였다.

다행히 은규는 양평 일진들에게 쉽게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선후배는 물론, 친구 하나 없이 아빠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중3 아이의 모습은 몹시 안쓰러웠다.

"쪽 좀 팔린다고 여기서도 그러면 안 되죠."

"비굴해지더라도 피해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얘들이 너무 세게 나올까 봐 걱정이에요."(144쪽)

 

글에서도 로맨틱함이 베어나는 사람은 영화 번역가 황석희 님이었다.

그는 요리가 즐거운 건 맛있게 같이 먹어줄 아내가 있기 때문이란다. 배가 차는 알약 하나만 있어도 그만 이고 평생 라면만 먹으며 살아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그는, 혼자가 된다면 당장 요리를 그만 둔다고 선전포고를 할 정도로,

즐거운 무엇도 아내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You say, it's done.(당신이 원하면 뭐든지 이루어 드리리.)"는 조영학 님이 "사랑해"와 함께 입버릇처럼 아내에게 들려주는 얘기란다. 근데 이게 립서비스가 아니라 아내를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란다.

이쯤 되면, 이 책이 요리책이 아니라, 솔직한 가족사이고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일에 마음을 내는 사람들의 진솔한 얘기라는 것을 알겠다.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하고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동안의 난,

궁금한게 많아서 먹고싶은게 많다고 할 정도로, 식탐도 많았었고,

들이는 책이 읽는 책의 속도를 훨씬 앞지르는데도,

신간이나 베스트셀러를 보면 괜히 셀레여서 어쩌지 못하곤 했었다.

 

체증에 보대끼더라도 젊었을 때는 치기로 극복할 수도 있었던 것들이,

이젠 상호적이고 어울려야 한다는걸,

말이 안 통하는 재료와도 소통을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겠다.

 

다른 사람이나 사물, 나와 다른 것들을 욕심내지 말고,

내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내 자신의 속도로 살라고 가르쳐 준다.

나름의 속도를 찾으니,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도 않게 되고, 체기가 무서워서지만...맛있다고 과식하지도 않게 된다.

 

이 책이 모든 이들에게 나만큼의 감동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하고,

나름대로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살면 된다고 가르쳐준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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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0-05 16:27   좋아요 1 | URL
한번 읽어 봐야겠네요..
저도 ..와이프가 저녁 늦게 일하는 직업이라서 늘 야식꺼리가 고민이었습니다..

매일 늦게 힘들어 일하는 아내에게 늦게 먹는 음식이 건강에 좋지 않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배고프게 잠자는게 늘 아쉬워서..

양철나무꾼 2015-10-06 11:09   좋아요 1 | URL
그러시군요~^^
전 먹고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속담을 신봉하는지라~, 언제든 배곯지 말고 먹어야 한다는 주의 입니다여~! 가볍게라도 드셔야 잠이 잘 오지 않을까요?@@
 
거인들의 몰락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4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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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 'Fall of Giants'를 우리말로 '거인들의 몰락'으로 번역해 놓았는데,

2권까지 다읽은 지금 드는 생각은 '제(대)국들의 멸망'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 중에 거인이라 불리울 정도로 굵직한 거물들도 있긴 하지만,

몰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살아남아 성장하는 사람도 있어서, 

제목으로 삼을만큼 일반화시키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싶은 반면,

Giant의 의미를 나라로 확장시키게 되면,

하나 같이 강대국이라 불리우던 나라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어떻게 쇠락하고 멸망하여 가는지 하는 과정을 보는데 무리가 없는듯 여겨져서 이다.

 

암튼 한세기 전의 일들인데,

오늘날의 현실이 묘하게 오버랩되어서,

읽는 내내 분노를 삭히고 열을 식히느라고,

책을 제법 오래 붙들고 있었다.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를 '제국'이라고 한단다.

내가 Giant를 제국이라고 해석한 것은 영국은 국왕이, 러시아는 짜르가 다스린 나라였지만,

그런 나라들 말고도 오스트리아나 독일, 프랑스 또한 그런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식민지를 거느리고 지배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런 강대한 제국들을 멸망시킨 요인은 편견과 선입견, 독선, 망상 등이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실제 힘을 가늠할 수도 없으면서,

헛된 상상이나 자존심을 내세워,

사람들을 오지로 내몰고 있는데,

 

자본주의 국가라서 돈 앞에 평등하다면 할말이 없지만,

자신이 선택하여 태어날 수도 없는 신분 체계나 남녀 성별 따위로 그리한다는 것은 한참 잘못된 것이고,

바로 그런 요인들이 제국들을 쇠락시킨 요인이지 싶다.

 

"이 나라 모든 남자에게는 원칙적으로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을 할지 말지 결정을 내릴 때는 모두가 참여하지 못합니다."ㆍㆍㆍㆍㆍㆍ"오만 명의 사상자 가운데 이만 명은 죽었습니다."ㆍㆍㆍㆍㆍㆍ

"누가 잘못했다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전쟁을 벌이자는 결정을 내릴 때 참여 못한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 학살당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겁니다."ㆍㆍㆍㆍㆍㆍ"또다시 우리가 전쟁에 나갈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모든 사람의 찬성 없이는 안 될 겁니다."(27쪽)

 

역사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다소 복잡하지만, 적당히 통속적이어서 잘 읽힌다.

하지만 그런 통속적인 설정마저도 하나의 장치이지, 그냥 재미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는 두 명의 여자가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피츠허버트 백작의 동생 '모드'와 빌리 윌리엄스의 누나 '에설'이다.

러시아에서 온 피츠허버트 백작의 아내 비 같은 경우는 다소 소극적이고 전형적인 인물로 묘사되는데 반해,

모드와 에설은 그런 의미에서 남녀 평등과 계급철폐를 부르짖게 되는 적극적인 여성으로 나온다.

물론 모드와 에설 사이에도 신분 차이 등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나중에 에설과 결혼하게 되는 버니의 경우,

'직관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이지적이었다.(132)' 라고 묘사될 정도의 인물인데도,

자신이 추대될 줄 알았던 자리에 아내 에설이 추대되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세기 전의 일이라면 이마저도 파격적일 수 있겠다~--;

 

지난 토머스 하아디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를 읽으면서 영국사를 공부해서 영국에 대해서는 좀 나은데,

러시아가 지뢰밭이었다, 하나도 아는게 없었다.

 

책 속에서 뜨문 뜨문 레닌을 만나게 됐는데, 매력적이었다.

폼만 잡고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는 책속의 수많은 거물들의 탁상공론보다는,

다혈질이고 드세더라도 무엇인가 실행하려는 레닌 같은 인물이 훨씬 멋지게 느껴졌다.

 

그런데, 레닌은 나같은 소음인이 봐야만 매력적인 것이지 실상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켄폴릿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혁명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투쟁위원회는 트로츠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에 압도당했다. 그는 큰 코에 이마가 넓고 테 없는 안경 너머로 툭 튀어나온 눈이 노려보는 듯한 인상을 풍기는 잘생기지 않은 남자였지만,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레닌이 소리를 지르고 약자를 괴롭힐 때 트로츠키는 설득하고 달랬다. 그리고리는 트로츠키가 레닌만큼이나 억세지만 그걸 더 잘 숨기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360쪽)

암튼 레닌을 자세히 알고싶어 '러시아 혁명사'라도 읽어 보고 싶게 만드는데,

그전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아는게 먼저이지 싶다가도,

읽다보면 현실과 비교되어 눈물 날 것만 같다.

편안한 만족감이 그리고리의 온몸을 휘감았다. 전선에 있을 때 그가 꿈꾸던 광경이었다. 작은 방, 음식이 있는 식탁, 아기, 카타리나. ㆍㆍㆍㆍㆍㆍ" 이런 게 얻기 힘들면 안 되는데."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나 나나 멀쩡하고 튼튼한 몸으로 열심히 일하잖아요. 내가 원하는 건 이게 다예요. 방, 먹을 것, 하루 일이 끝나면 쉬는 것. 매일 이런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해요."(51쪽)

책 속에서 한세기 전의 일을 묘사한 부분인데 오늘날의 현실이 오버랩 되어 어쩌지 못하겠는 걸 보면 말이다.

음식이 있는 식탁, 아기, 하루 일이 끝나면 쉬는 것...따위는 얻기 힘들면 안 되는데,

청년실업이니 조기명퇴니 해서 인구론이니 사오정이니 하는 신조어가 생겨나는 요즘 우리의 세태를 보면,

역사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세상은 영원한 도돌인가 보다.

 

역사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세상은 영원히 되풀이 되는 것이라면,

제국을 쇠락시킨 바로 그 요인으로 오늘날의 우리를 몰락시킬 것이니,

명심하고 경계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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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의 몰락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4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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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에선가 일본의 안보법안과 관련, '평화주의를 버리고 항시 전쟁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다.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한번도 평화주의를 수호한적이 없지 않나, 항상 전쟁을 도발한 호전적인 나라가 아니었나 싶다.

 

항상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뿐,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띠지에 '20세기 3부작, 그 웅장한 시작'이라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고,

제목도 '거인들의 몰락'이라고 해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재밌는걸 보면,

역시 켄폴릿은 거장이다.

 

내가 켄폴릿을 좋아하는 것은 내용이 재밌기만 해서는 아니다.

관점이나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가고,

다방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이 좀 많아서 좀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라는걸 알게 되면 그 웅장함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책은 웨일스 탄광촌에 사는 빌리가 열세살이 되자 아버지처럼 탄광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어느날 안전사고를 겪게 되고,

그 사고 수습의 선봉에 서게 된다.

1권의 비교적 앞부분에 빌리가 많은 사람 앞에서 처음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척 감동적이다.

탄광에서 안전 사고를 직접 겪고, 그 사고 수습의 선봉에 섰던 빌리에게는, 

아버지가 예배에서 호흡보조장치와 양방향 환기장치에 대한 법률을 어긴 탄광 경영진의 부정을 용서할 수 있도록 넓은 아량을 달라고 기도하는걸 보고, 그저 치유를 구하기만 하는 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듣기 좋은 말과 성경 구절을 들먹이며 마치 설교라도 하는 양 기도를 올리지만,

그는 늘 진심에서 우러난 단순한 기도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며 예배가 끝날 무렵 마음속에서 말과 문장을 구체화 (118쪽)하여 사람들에게 전하는 식으로 기도하게 된다.

이게 계기가 되어, 빌리는 아버지와 언쟁을 벌이게 되나 보다.

 "더 굳센 신앙심을 달라고 기도하는 편이 좋았을 거다. 그럼 머리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믿게 되니까."(122쪽)

머리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믿게 되는 굳센 신앙심이란,

맹목적이란 말과 바꾸어 쓸 수 있겠고,

절대적인 위안과도 바꾸어 쓸 수 있겠으나,

열세살난 아들에게 강요하기엔 좀 가혹하지 않나 싶다.

"사람에게는 감정이란 게 있어요, 아버지." 거침없는 말투였다. "아버지는 항상 그걸 깜박 잊으시죠."

아버지는 할말을 잃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그만해!"

에설은 빌리를 보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옜지만 빌리는 놀라고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에설은 용기를 얻었다. 코를 훌쩍이고 눈가를 손등으로 훔친 다음 말했다. "아버지와 노조, 안전 수칙, 성경 말씀 모두 중요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가 사람들 감정까지 없앨 순 없어요. 저도 언젠가 사회주의 덕분에 노동자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때까지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필요해요."(124쪽)

빌리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빌리의 누나 에설의 성격을 한번에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다.

 

굳센 신앙심, 맹목적, 절대적인 위안은 동의어로,

이건 책이나 글을 읽으면서 때때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책이나 글을 읽다보면 어려운 말로 적어놔 폼나기는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아 먹을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삶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미사여구를 쓰거나 책 속의 구절을 인용했을 경우,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폼나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말로 풀어 설명하는 과정에서 늘어지게 마련이다.

어느 경우 더 쉽게 이해될 수 있고, 그리하여 더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단정짓지는 어렵다.

그러니까, 머리와 마음의 관계 또한 그렇게 유연하게 접근하고 이해되어야 하겠다.

빌리는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여자들이 탄광에서 남편을 잃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남편도 없는데 집까지 없는 신세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회사가 이럴 수 있어요, 아버지?" 누추한 잿빛 거리를 따라 탄광 쪽으로 향하며 빌리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우리가 그래도 된다고 용인할 때만. 노동자는 지배계급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힘이 있어. 지배계급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기대고 있지.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집을 짓고 옷을 만드는 건 우리야. 우리가 없으면 그들은 죽어버릴걸. 우리의 용인 없이 지배계급은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항상 그걸 명심해라."ㆍㆍㆍㆍㆍㆍ"하지만 그래서 폭발이 일어나거나 광부들이 죽은 건 아니지." "폭발이 일어나고 광부들이 죽은 게 위반사항 때문이라고 입증하지 못했을 뿐이죠."(176~177쪽)

또 한군데, 빌리의 아버지가 도덕 교과서적으로 사는 것 같아 안타까웠던 부분이다.

노동자가 지배계급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서 힘이 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책을 읽다보면 경과와 결과가 나오지만 스포일러가 될까봐 생략하겠다.

 

"한 달 전 자살 기도를 했어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정말이니까. 스스로가 너무 하찮게 느껴지면서 내가 죽는다 한들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죠. 그때 당신이 현관에 나타났어요. 당신은 정말 다정하고 정중하고 사려 깊었죠. 내게 사는 게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어요. 당신은 나를 소중히 여겨주었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캐롤라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키스했을 때 당신은 행복해했어요.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니, 나도 아주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 생각 덕분에 계속 살아갈 힘을 얻었어요.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렸어요, 거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빌어요."

거스는 거의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럼 나한테는 뭐가 남죠?"

"추억이죠. 남은 추억을 소중히 간직해줬으면 해요. 나도 그럴 테니."(221~222쪽)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어쩜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면으로는,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확인'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 나를 가치있게 생각하고, 나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리하여 내가 아주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면,

사람은, 특히 여자는 그 추억만을 간직하면서도 남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아직 1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내가 이렇게 리뷰를 쓰는 까닭은 켄폴릿을 믿기 때문이라는 게 하나이고,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제목이 암시하는 '거인들의 몰락'에 우리나라의 요즘 현실이 겹쳐져서 앞날을 예견하겠어서...씁쓸해서라고 해야겠다.

(거인들도 고모양 고꼴로 몰락하니, 예비를 하라고 까진 못하겠다~--;)

 

평상시 책을 만드느라고 베어넘겨진 나무를 생각해서 별점에 과한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엄지손가락이 두개뿐인게 못내 아쉬워서,

엄지발가락까지 꼬물거리게 만든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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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9-21 17:40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보는 이름의 작가인데 양철나무꾼님 리뷰를 읽다보니 마구마구 관심이 생기네요~~
제 기도도 듣기에만 그럴듯하건 아닌지 반성도 하게 되구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양철나무꾼 2015-10-05 16:23   좋아요 0 | URL
켄폴릿은 저도 우연히 알게 된 작가인데, 정말 좋아요.
누구든지 붙잡고 막 추천하고 싶어진달까요~^^

cyrus 2015-09-23 03:35   좋아요 0 | URL
소설 속 배경이 웨일스라고 하기에 아버지의 모습이 영국탄광노동조합원의 성격과 비슷한 것 같아요. 탄광노동조합이 마거릿 대처 정권에 맞서서 파업투쟁을 벌인 적이 있을 정도로 과거에 노동에 대한 자부심이 컸었어요.

양철나무꾼 2015-10-05 16:2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 책 속에선 제 1차 세계대전이 주무대인데,
언제 어디서인지,를 막론하고 앞장서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쩔 수 없이 뒤따르는 무리도 있게 마련인가 봐요.

근데, 이 책 속 아버지는 너무 반듯하고 고지식해서 좀 불편해요~^^

2015-09-26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5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05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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