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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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 하라리! 그가 우리에게 21가지 제언을 했다. 그의 제언들은 대부분 정확한 정답을 던져주기 보다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었다. 마치 현명한 교사와 부모가 학생과 자녀의 질문에 정답을 가르쳐주기 보다 스스로 더 많은 탐구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질문으로 되받아치는 듯했다. 그의 책은 쉬우면서도 한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발 하라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직업이 사라진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전에서 이세돌이 무참히 패배했을때,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충격적으로 느꼈다. 터미네이터를 떠올리며, 인공지능 '스카이넷'이 지구를 멸망시킬수도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커다란 혼란이 우리들 머릿속에 불어닥쳤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멸종시킨다는 설정이 다소 과장된 상상이라면, 인공지능 시대가 나의 직업을 위협할 것이라는 추정은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직업이 사라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유발하라는 기본소득을 하나의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육아와 같은 새로운 일자리를 발견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의 이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자를 중심에둔, 인간중심의 정책을 마련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노동에 인간이 종속된 사회가 아니라, 어쩌면 인류가 그토록 원했던 '노동으로 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겪어보지 못한 '노동 없는 시대'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동으로 부터의 버림받음'으로 느끼고 있다. 어쩌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우리가 두려움만 먼저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노동 없음은 축복일 수도 있다. 하라리가 예로 들고 있는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의 약 50%는 일을 하지 않으며, 성경공부와 종교의식 수행을 하면서 살고 있다. 공부하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백수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말했던가? 노동이 사라지고, 노동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하는 시대가 사라지고, 진정한 '백수의 시대'가 도래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백수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백수로서의 창조성'을 우리는 지니고 있는가? 고미숙이 말하듯이,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펼쳤던 백수의 향연! 그 백수의 향연은 새로운 창조성의 발현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듯이 우리의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100년후, 어떠한 삶이 펼쳐질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맞이하면서 두려워하기 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며 새로운 창조성으로 전지구적 관점으로 새시대를 준비해보자.

 

2. 지구적관점에서 생각하라!

  우리 세계는 '문명의 충돌'을 겪고 있는가? 아니면 '문명의 교류' 시대를 살고 있는가? 사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유행하면서 이슬람 문명과 크리스트교 문명을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해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교류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는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 "단일 문명 내 형제들끼리의 투쟁"이라고 단언한다. 우리 지구문명은 서로 다른 것 보다는 같은 것이 많다. 형제가 서로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많듯이, 우리 지구문명안에 이슬람문명을 비롯한 기독교 문명, 불교 문명 등의 다양한 문명이 있고, 이들은 형제라 주장한다. 갈등이냐 교류냐는 패러다임을 뛰어 넘어 '지구 문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라는 하라리의 주장은 탁월한 생각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민족', '국가'의 패러다임으로는 환경문제, 핵문제와 같은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민족'이라는 상상의 관념은 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라는 행성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종교'는 어떠한가? 유발 하라리는 '종교는 민족주의의 시녀'라고 단언한다. 대부분의 종교는 사랑과 자비, 평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종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자국의 영광을 위해서 타국을 무참히도 도륙하는데 봉사한다. 유발 하라리는 극우 기독교인의 가짜뉴스 또한 과감히 비판한다.

  지구적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하지만, 우리의 머릿속은 아직도 '민족'과 '종교'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너무도 멀어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민족'과 '종교'의 좁은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유발 하라리는 "당신의 종교, 이데올로기, 세계관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무엇을 잘못했지요?" 라고 물으라고 한다. 이 물음에 심각한 잘못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하라리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말한다. 극우 기독교인들이 우리 민족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현실은 '종교가 민족주의의 시녀'라는 하라리의 주장이 가슴이 와닿게 한다. 극우 종교인들이 나에게 특정 종교를 강요한다면, 나는 유발 하라리의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당신의 종교는 인류에게 저지른 해악을 말할 수 있는지를....

 

3. 모든 것에는 댓가를 지불해야한다.

  호주를 여행하던 일본인이 GPS를 믿고 가다가 바다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일본인은 GPS가 시키는데로 운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알고리즘에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의 모습이다. 알고리즘의 주인이 되지 못한 인간의 비참함을 미리본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모습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실패하지 않는 결정을 위해서 알고리즘을 이용할 것이고, 실패를 두려워할 수록 알고리즘의 노예가 되어갈 것이다. 교육의 관점에서 본다면, 실패는 학습의 한과정이다. 불필요해보이는 실패가 사실은 학습을 위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장자가 말한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 없음의 쓰임을 인간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래교육이 알고리즘의 노예에서 벗어나, 알고리즘의 주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실패 경험의 중요성을 깨달아야한다. 물론, 실패의 경험이 자산이 될 수 있으려면,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로 우리사회가 변모해야한다.

  모든 것에는 댓가가 필요하다. '디지털 독재', '커지는 불평등' 속에서 컴퓨터는 날이 갈수록 업그레이드된다. 반면 인간은 다운그래드되고 있다.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운전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 컴퓨터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어령 교수는 말과 경쟁하려하지 말고, 말에 올라타라 강조한다. AI와 경쟁하려하지 말고 AI에 올라타라한다. 알고리즘과 컴퓨터에 올라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면, 미래사회는 축복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재앙일 것이다.

  미래사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할 또다른 조건에는 무엇이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한다."라고 말한다.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이에 못지 않게 가짜 정보도 범람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믿을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한다. 그리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한다. 중요한 이슈라면 그것에 관한 과학적 문헌들을 찾아 읽는 노력도 필요하다. 공짜 무가지에 현혹되어 수구신문을 구독했던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수구 신문은 아직도 살아남아 한국사회를 뒷걸음질치게했다. 진실한 언론에 돈을 지불하고 구독하고,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느덧 이 사회의 꼰데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는 공짜 이메일 서비스와 동영상의 댓가로 '개인정보'를 내주는 것을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 비유하고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화려한 구슬과 싸구려 담요를 댓가로 주고 온나라를 넘겨 받은 일화이다. 어쩌면 우리는 어느 아프리카 원주민들 처럼 화려한 구슬에 현혹되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정보를 팔아 넘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메일 써비스를 사용하기 위해서, 각종 사이트에 가입하기 위해서 나의 개인정보를 제공해야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지 않는 자연인으로 살라는 말인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4. 종교의 허구성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일침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이 있다. 사피엔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창조론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는 유대교를 믿고 있는가? 자신의 지식과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종교가 불일치할때, 유발 하라리는 어떠한 사고를 할까? 이 책에 비친 유발 하라리는 종교를 사실로 믿지 않는다. 하나의 믿음일 뿐이다. 심지어 시온주의자들이 "땅없는 사람의 사람 없는 땅으로의 귀환"을 비판하기 까지 한다. 유대인인 그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그가, 이스라엘 탄생의 원천인 시온주의를 비판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뿌리를 부정하는 말을 한다면, 대중으로 부터 몰매를 맞을 것이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고 그가 유대교의 효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부인권 사상'이 진실이 아니지만, 천부인권에 대한 믿임이 인류를 행복하게 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경전 내용이 진실이라 믿지는 않지만, 경전을 믿음으로써 유대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실에는 유발 하라리는 동의할 것이다.

  유대교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태도는 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데까지 나아간다. 단지 합리화하는 도구라 말한다. '종교는 개인의 온순함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뻔뻔한 집단적 오만함을 뒤섞는다.' 아울러 '언제나 자신을 극도로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서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라고 일침을 가한다.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 종교에서 결혼 사실이 문제가 되고, 교회를 세습하고, 잦은 성추문으로 몸살을 알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유발하라리의 지적은 참으로 날카롭다.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조심하자. 종교의 탈을 쓰고 신도 위에 군림하며 신도의 고혈을 빨아 먹으며 종교에 기생한는 자들을 조심하자.아울러,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신'이라면 섬길 수 있으나, '분노를 유발하는 신'이라면 우리는 그 신을 경계해야할 것이다. 맹목적으로 특정 종교를 믿는 신도들에게 유발 하라리는 깊이 있는 경고를 하고 있다.

 

5. 유발 하라리! 그의 창조성의 원천은?

  유발 하라리! 그의 창조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한국에 번역된 그의 책들을 모두 읽으면서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내가 생각하는 혹은 하라리가 밝히 창조성의 근원을 탐구해보자.

  유발 하라리와 미셸 푸코의 공통점을 아는가? 비슷한 외모를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둘은 동성애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두사람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남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의 엄청난 저작들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철학을 넘어 역사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창조의 영감을 주었다. 유발 하라리도 20대에 방황을 했다고 한다. 타인과 다른 자신을 보면서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이다. 결국 타인과 다른 자신을 긍정하면서 남들이 긍정하는 세계를 다른 눈으로 보게되었다. 그의 명저 '사피엔스'는 이러한 고통의 산물이었다. 전병근 번역자는 유발 하라리가 '동성애'에 대해서 하나의 주제로 다루지 않은 점이 놀랍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자신이 동성애자이기에 겪었던 방황을 끝마친 것으로 보인다. 끝나버린 방황 때문에 하나의 장을 할애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방황을 마치고 유발 하라리에게는 나와 다른 남을 긍정하고, 남과 다른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창조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윤활류였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발 하라리 자신이 말하는 창조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는 '비파사나'라는 명상법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진리를 알고 싶다는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있을때, 친구의 권유로 시작한 '비파사나'라는 명상법은 집중력의 비결이라 말한다. 아울러, 명상을 통한 자기 관찰의 필요성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21세기, 미래 기술 사회의 도래를 논하면서 전통적인 불교 명상의 효용성을 강조한점이 무척 흥미롭다. 문화재지킴이 혜문 스님이 책을 읽으면 모두 기억하는 비결을 참선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고용히 자신의 내명을 들여다보는 명상이 인간의 뇌를 집중시킨다는 사실이 놀랍다. 유발 하라리는 하루에 2시간씩 비파사나를 하며, 일년에 한두달 정도는 비파사나를 하기 위해서 수련에 들어간다고 한다. 나도 이제부터 명상을 통한 정신탐구, 자기애해를 위한 여정을 시작해야겠다.

 

6. 사피엔스를 위한 제언

  사피엔스가 침팬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도덕성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하라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침팬치 사회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 침팬치를 우두머리 침팬치가 거두는 모습이 관찰된다. 승자독식의 시대, 노블레스 오빌리쥐가 지켜지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비추어 본다면, 침팬치는 보다 도덕적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사피엔스가 특별한 이유는 첫째,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믿기 때문이다. 종교, 민족, 이데올로기가 그러한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공유하는가가 우리사회를 바꿀수 있다는 말이된다. 과연 21세기를 준비하는 한국사회는 어떠한 믿음을 준비하고 있는가? 승자독식의 신회를 믿으며, 약자를 짓밟는 자들을 위한 믿음을 공유할 것인가? 분단을 고착화시켜, 전쟁의 위험속에 살도록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를 고수할 것인가? 평화와 사랑을 위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21세기를 위한 한국사회의 준비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대규모로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전례 없는 능력'이다. 뉴턴이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올려다 보았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사피엔스의 문명은 어느 특출한 사피엔스 개인의 결과물이 아니다. 집단 지성의 결과물이다.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유해야할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깨어있는 개개인이 함께 우리사회를 깨어있게하는 담론을 만들어가야한다. 특정 보수 언론이, 특정 보수 세력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우리사회를 병들게 하지 못하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한다.

  이러한 사피엔스의 능력은 그들을 지구별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허구를 진실로 믿고, 집단으로 사고하는 무시무시한 사피엔스의 질주를 막을 수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유발 하라리는 '우주와 삶의 의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은가?'라고 묻는다. 그리고는 '고통을 관찰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관찰'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민족', '국가', '정의'가 인간을 고통스럽게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것을 막는 방법은 '고통'을 직면하는 것이다. 좌와 우라는 도그마에 갖힌, '일베'들이 세월호 피해자들이 단식투쟁하는 현장에서 '폭식 투쟁'을 한적이 있다. 그들은 자식잃은 고통으로 시름하고 있는 이웃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자. 그것이 허구적 이야기의 노예가 되어 폭주하는 우리에게 냉정한 진실을 보게할 수 있다.

 

 

이제 유발 하라리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의 책이 나오면 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얇지 않은 두께의 책을 미친듯이 읽으면서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려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길 기대한다. 이번 책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라는 말은 고 신영복 교수의 '변방에서'를 떠오르게했고, 세계 권력의 중심부에 있지 않은 한국이 새로운 창조성의 중심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했다. 또한 새로운 종이 출현할 수도 있는 현실에서 하라리는 나노기술 등의 조작으로 자신을 업그래이드하는 일에 섣불리 도전하지 않겠다고 한다. 새로운 종이 실패할 수도 있다. 지름길이 황천길일수도 있는 법이다. 새로운 21세기!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새로운 사회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새로운 기술의 주인이 되기 위한 능력을 길러 놓아야한다. 그러나 섣불리 새로운 기술을 적용했다가 불행한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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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10-14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의 변방에서, 하라리의 탈중심주의 공감합니다.
정희진의 탈식민주의도 떠오르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강나루 2018-10-14 19: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을 읽다보면 석학들의 공통된 의견이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붕붕툐툐 2018-10-14 2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죄송해요~ 너무 읽고 싶은 책이라 스포 당하고 싶지 않아서 글을 읽지 못했어요~ ㅋㅋ
책 읽고 와서 이 글 읽을게요:)

강나루 2018-10-14 21:34   좋아요 0 | URL
^&^
하라리의 매력에 빠지셨군요
천천히 읽으세요~~
 
제프스터디 영어명언 100강 - 나를 위한 하루 10분 영어 선물 제프스터디 시리즈
Jeff 지음 / 길벗이지톡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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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양의 '논어'를 읽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영어 명언 읽기'가 이제 두번째 권을 마치게됐다. 다양한 서적중에서 원어민의 목소리와 제프강사의 강의를 함께 들을 수 있는 '영어명언100강'을 선택했다. 하루에 한문장씩 읽고,6번씩 쓰면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아울러 영어 공부도 덤으로 해보았다. 'when you have faults, do not fear to abandon them.-Confucius-'이 명언이 공자의 어떠한 말을 옮겨 놓은지 알겠는가?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이다. 허물이 있다면, 고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공자의 말을 영어로는 이렇게 옮길 수 있다는 재미도 주는 책이다.

 

1. The greater danger for most of us lies not in setting our aim too high and falling short; but in setting our aim too low and achieving ou mark.(michelangelo,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목표를 높게 정하고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너무 낮게 잡고 그것에 안주하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높게 잡아라, 대통령을 목표로 삼으면 하다못해 군수라도 하지 않겠니?'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말씀이다. 그때는 그말이 설득력있게 들렸다. 미켈란젤로도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말씀과 비슷한 말을 한다. 그러나, 과연 거대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나에게 의미있을까? 실패도 학습된다. 너무 높은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다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실패를 학습하게 되고, 결국은 좌절하게된다. 교육학에서는 '성공경험'을 중시여긴다. 학생에게 알맞은 적당한 난이도, 즉, 그학생의 능력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문제를 학생 스스로 해결하도록해서, 성공의경험을 높이도록 해야한다. 목표를 거대하게 잡으라는 위대한 미켈란젤로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러한 능력이 충분히 있는 미켈란젤로에게 알맞은 말이다. 위인의 말이라할지라도 나에게 맞는 명언인지 생각해보게한다.

 

2. The best way to change the world is to change yourself -Anonymous-(세상을 바꾸는 최고의 방법은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한다. 혁명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의 삶을 혁명하는 사람은 드물다. 혁명은 우리 주변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자신도 혁명하지 못하면서 어찌 세상을 혁명하겠는가? 안희정 전지사를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많이든다. 차기 대권후보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었던 그가, 스스로를 혁명하지 못했기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려서부터 혁명을 하겠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혁명하지 목하고 다시 일어설수 없는 길로 가고 말았다. 스스로를 혁명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으며,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재레드 다이야몬드 교수의 '문명의 붕괴'라는 책이 생각난다. 문명이 붕괴하는 요인 6가지를 제시하고 지구상의 다양한 문명이 붕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재레드 다이야몬드 교수의 탁월성은 그러한 사례와 원인 제시에서 그치지않고, 문명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는 우리 문명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을 바꾸어야하고, 기업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개인이라 말한다. 깨어있는 개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깨어있는 개개인이 스스로를 혁명해야 사회는 변화한다.

 

3. The future depends on what we do in the present. -Mahatma Gandhi-(바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곧 우리의 미래이다.)

  미래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라! 간디가 외치고 있는 듯이 나의 귓가를 쟁쟁하게 울리는 명언이다. 나는 우리반 사물함과 책상에 이 명언을 적어서 붙여 놓았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학생들에게 오늘을 뜻 깊게 살라는 의미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명언은 의역보다는 직역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의역은 '바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곧 우리의 미래이다.'이지만, 직역은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이다. '현재란 과거의 연장이요, 미래란 현재가 쌓여서 만들어진다'는 진리를 직역이 더 절실하게 우리에게 전해준다. 과거, 현재, 미래! 이러한 분절적 사고를 극복하고, 과거는 오래된 오늘이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라는 사실을 하는 연속적 사고의 중요성이 느껴지는 명언이다.

 

4. Success is never permanent, and failure is never final. -Mike Ditka-(성공은 절대로 영원하지 않고 실패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살고 있는 자와 인생의 바닥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명언이다. 인생의 황금기에 겸손하며, 주변에 인덕을 배풀어 덕을 쌓고, 인생의 바닥에서도 아직 게임을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게해준다. 그러나, 이 명언이 한국사회에서 유효하려면, '승자독식의 사회',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라는 오명부터 씻어야한다. 한번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지며, 한번 패배한자가 재기할 수 없는 사회라면 성공의 오만과 실패의 좌절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성공은 절대로 영원하지 않고 실패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언이 한국사회에서 유효한 명언이되길 바래본다.

 

5. Sometimes by losing a battle you find a new way to win the war. -Donald Trump-(어떤 때는 전투에 패배하게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당신은 아는가? 그를 어떠한 사람으로 생각하는가? '무식쟁이?', '미치광이?', '평화의 사도?', '단순한 사업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를 '곰의 탈을 쓴 영리한 여우'라고 본다. '어떤 대는 전투에 패배하게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라는 명언을 할 정도로 그는 현명하다. 그는 사업가로도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스스로를 탁월한 협상가라고 말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한 학생이 나에게 말했다. "트럼프가 전쟁을 일으킬지 몰라요. 전쟁이 일어나면 선생님은 무엇을 하실거에요?" 학생의 질문에 어이가 없었다. "전쟁은 쉽게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하자, "트럼프는 달라요."라고 말하는 학생이 얼굴은 어두웠다. 트럼프는 부동산 사업을 하면서 고객의 마음을 읽고 주무르는 방법을 깨달은 사람이다. '블럼핑'을 잘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블럼핑'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김정은과 대화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겉으로는 전쟁을 말하면서 뒤로는 한국을 통해서 북한과 접촉했다. 그의 평화 프로세스는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싸우면서 한국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그는 세계에서 미군의 발을 빼고 놓고 있다. 물론 군산복합체 세력의 만만치 않은 견제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는 이를 슬기롭게 헤처나갈 것이다. 그는 '어떤 때는 전투에 패배하게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새로운 방법'을 아는 현명한 여우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었던 길면서도 짧았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것을 깨닫게해준 시간이었다. 물론, 친절한 제프 강사덕문에 영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덤으로 얻었다. 몰론, 몽골제국의 징기즈칸을 '원나라 황제'라고 설명한다던지, 'Our greatest glory is not in never falling but in rising every time we fall(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절대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에 있다.)'라는 명언의 원문을 제시해주지 않은 아쉬움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아직도 깊은 감동과 삶의 의미를 주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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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전쟁 - 말을 상대로 한 보이지 않는 전쟁, 말과 앎 사이의 무한한 가짜 회로를 파헤친다
이희재 지음 / 궁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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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난 이후, 나는 더이상 책의 읽기 전의 내가 아니다. 단순히 번역을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지적하는 책으로 생각하고 책을 펼쳐든 순간! 이 책은 나의 상식을 가차없이 박살내버렸다. 때로는 혼란스러웠다. 세계의 역사에 대해서 남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의 자존심은 땅바닥에 내평겨쳐졌다. 그리고 세계사를 다시 공부하고, 역사관을 재정립하라는 강력한 망치가 나의 머리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초강력 태풍이 대지를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생명들이 다시 꿈틀 거리듯이, '번역전쟁'이 할키고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한번 넓어진 시야와 가치관은 나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과연 '번역전쟁'은 나에게 어떠한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을까?

 

1. 언어가 사유를 지배한다.

  언어는 사유를 지배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결정한다. '포플리즘'을 '인끼 영합주의'로 번역할 것인가? '서민주의'로 번역할 것인가? '포플리즘'에는 두 의미가 다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에서는 '포플리즘'을 인끼 영합주의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사실 남아메리카의 페론정권을 비롯해서 진보적인 정권에서 실시하는 정책들을 '포플리즘'으로 매도하고 그들의 정책 때문에 남아메리카의 여러나라 경제가 혼란에 빠졌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차베스 정권을 비롯하여, 페론 정권에서 실시한 정책들은 '서민주의' 정책이었고 경제를 망친 것은 그들이 들어서기 전에 정권을 잡았던 독재자들과 그들이 정권에서 물러난 이후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독자자들 이었다.

  이희재는 '민영화'라는 말과 '사유화'라는 말 중에서 어느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현명한가? 라는 물을 제기한다. 사실 남아메리카를 비롯해서 아프리카의 여러 진보적 정권에서 추진한 '서민주의 정책'들을 '인끼 영합주의'라고 매도하면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이 추진했던 경제정책은 '사유화'였다. 그리고 그들은 '민영화'라고 외쳤다. 현명한 시민이라면, '민영화'라 쓰고, '사유화'라고 읽어야한다. '인기 영합주의'와 '서민주의'와의 대결, '민영화'와 '사유화'의 대결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었다.

  공자의 정명사상이 떠오른다. 자로가 공자에게 위나라 군주가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을 먼저하실지를 물었다. 공자가 가장 먼저하려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공자는 놀랍게도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라고 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공자는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에 맞지 않고,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으며, 일을 이룰 수 없으며 예악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공정할 수 없으며, 형벌이 공정하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조차 둘 곳이 없게된다. 그래서 군자는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게 되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실천하게 된다.(君子於其所不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故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 必可行也)"라고 했다. 어떠한 사람과 일에 정확한 말을 사용해야함을 이미 2천여년전에 공자가 말하고 있다. 지금의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부당한 용어를 사용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세력들과의 기나긴 싸움을 하는 시기이다.

  이희재는 강력히 이러한 현실을 비판한다. '극우'라는 개념은 자민족 자국민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타국민, 타민족을 증오하는 일본의 재특회와 같은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한국의 '극우'라고 불리는 사람은 친일 반민족 세력으로 자국민을 죽이고 타국에 아부하는 세력이라며, 그들을 '극우'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일갈한다. 또한, 한국의 언론들은 대자본의 자유와 안전을 지상과제로 생각하는 금융 족벌 세력들의 편에서서 원/달러 환율 약세라는 부정적 표현을 사용해서 철저히 대기업 위주의 생각을 하도록 한다고 지적한다. 공자가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이름을 바로 잡는 일을 가장 먼저하겠다고 말했듯이, 이희재는 금융재벌들의 편에선 잘못된 말들을 바로 잡으려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2. 현대사를 바로 보는 키워드 '금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역사관'이라한다.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을 대학시절 많이들었다. 저자 이희재는 '금융재벌' 즉, '금벌'이라는 키워드로 현대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영국은 신사국이 아니라 금벌국이라고 주장하며, '1, 2차 세계 대전의 전범은 영국'이라고 주장한다. 처음 이주장을 읽었을 때, 기존 학계의 통설과 너무도 달랐기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미국이 군산 복합체 국가이며, 전쟁을 필요로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 군산 복합체, 아니 '금벌'의 뿌리가 근대 영국으로 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웠다.

  이희재는 한발자국 더 나가서, '금벌'은 미국도 장악했다고 주장한다. '금벌'들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으며, 이들은 주기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는 지도자들은 철저히 제거된다고 주장한다. 소련과의 군축협상을 추진하며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던 스웨덴의 팔메 대통령이 1986년 8월 28일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암살당했으며, 소련과 평화 공존을 추구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델레스에서 암살되었다. 심지어는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도 암살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가 미국 민주주의가 우뚝서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알고 있는 워터게이트 사건도 '닉슨 독트린'과 '베트남 철수'를 추진하여 평화 정착을 위해서 노력하던 닉슨 대통령을 낙마시키기 위한 금권세력의 검은 그림자였다. 가공할 금권세력의 힘앞에 진정으로 평화를 추구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금벌세력들은 언론도 장악했다. 서구의 진보지라 자청하는 신문조차도 금벌의 이익에 봉사한다. 서구 금벌들이 장악하던 자원들을 푸틴이 국유화하고, 서구의 금벌세력에 대항하려하자, 푸틴을 악마로 그리고 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하고 있는 'RT'라는 언론사를 푸틴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이희재가 들려주는 '금벌'이라는 키워드로 본 현대 세계는 충격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이희재의 주장을 어디까지 믿어야될 것인지를 고민했다. 내가 알고 있는 '군산복합체'라는 개념과 '세계의 큰손 유대인 자본'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이희재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 결과 '금벌' 이라는 키워드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다. 이희재는 말한다. "언론을 맹신하면 악의 세력에게 박수를 배내기 십상'이라고.... 한국의 조,중,동만을 보고서, 한국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 처럼, '금벌' 중심의 세계관으로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럼, '금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예는 없을까?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개인의 씨앗 교환을 금지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할까?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는 '위험 작물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씨앗 교환을 금하고, 자립 공동체인 '에덴 동산'에 경찰 특공대를 난입시켰다.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자본가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금벌'의 나라! 그곳에서는 소비를 하지 않고 자립하여 스스로 지속 가능한 삶을 살려는 개인들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있다.

  이희재가 주장하는 '금벌'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두번째 예로 '인턴'과 '팁'이라는 용어를 들 수 있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사회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인턴'이라는 제도가 '무급 노동'을 강요당하고, 자본가들의 인건비 절약을 위한 제도로 이용되고 있다.  유럽의 '레스토랑'에서는 써빙을 보는 사람에게 업주가 월급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손님의 팁으로 먹고 산다. '팁'이라는 제도는 사업주의 노동비를 절감하기 위한 제가 된지 오래다. '금벌'의 이익을 무한대로 증대하려는 무서운 신자유주의 사회 곳곳에서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기 보다는 '열정 패이'라는 명목으로 착취를 강요당하고 있다. '매너'가 남을 끌어 안으려는 예법이라면, '에티켓'은 신흥 부르주아지를 차별하려는 구 귀족들의 배제 예법에서 나온 것이다. '매너'가 사라지고, '에티켓'이 자리잡은 무서운 신자유주의 사회! 금벌 사회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3. 사막을 건너는 방법

  소련이 붕괴했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주장했다. 모두가 공산주의가 사라지면 장미빛 천국이 우리를 향해 문을 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경쟁자가 사라진 자본주의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부의 규제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민영화'가 '사유화'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많은 산업들을 '민영화'시키려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비정규직',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고, 공부방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정규직'이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리석은 친구보다 현명한 적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현명한 적'이 없고, '어리석은 친구'만 있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폭주가 얼마나 우리 사회를 황폐하게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친구들'!!  그렇다면 '어리석은 친구들'과 함께, 신자유주의라는 사막을 건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우선, '생각하자! 깨어있자!'라는 말을 하고 싶다. 아프리카 북부 말리에는 투아레그 민족해방운동 조직이 있다. 알제리 정보부는 급조된 극렬 이슬람 무장 조직을 침투시켜 투아레그 민족해방운동 조직을 과격화 시켰다. 이들은 결국 민중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결국 하층부의 말단 행동대원들은 자신의 행동을 순교라 생각하며 목숨을 바치지만, 진실은 상층부의 극렬 테러리스트와 그들의 사주한 자들에 이용당한 희생양일 뿐이다. 이 책에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조직에 '금벌'이 침투시킨 공작원들이 활약하며, 그 조직들을 와해시키고, 혹은 혼란을 가중시켜 서구의 '금벌'이 아프리카의 자원을 안전하게 수탈할 수 있도록 만든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며,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려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 의해서 '순교'를 강요당할 수 있다. 스스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금벌'의 실체를 바로 보아야한다. 깨어있자! '금벌'의 실체를 바로보고, 현명하게 삶을 살아가자!

  둘째, "문명국은 시련에 처한 제 나라를 안 떠나려는 젊은이가 많은 나라"이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면서 '만약 임용고사에 떨어지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절박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이다. 임용고사에 떨어져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조달하며 힘겹게 살아가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도 낮아지고 있었다. 힘들때는 이민 정보를 찾았다. 결론은 '죽어도 대한민국에서 죽고 살아도 대한민국에서 살아야한다.'였다. 백인 우월주의 사회에서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생존이 가능할지가 의문이었고, 내가 공부했던 '한국사'를 그곳에서는 더 이상 활용할 수도 없었다. 남들이 일궈 놓은 옥토를 탐내기 보다는, 나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타국으로 떠나는 독립운동가가 아닌바에는 대한민국을 떠나서 살 수 없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시절에 'Hell 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민가고 싶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내주변에도 많았다. 그때 '당신들 처럼 이땅을 떠나려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둠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두려워서 도망친곳에 천국이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 가서도 또다른 천국을 찾으려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떠나지 않으려는 비율이 타국보다 높다는 점을 떠올리며, 나의 이웃에게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라고....

  셋째,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풍요를 늘리려는 소비자가 아니라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이다. "경축!! 아파트 안전진단 통과"라는 플랫카드가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 내걸렸다. 많은 사람들은 아파트가 안전하다는 뜻이구나!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아파트가 안전하지 않기에 재건축허가가 났다는 뜻이었다. 집의 안전조차도 자본의 논리에 따라서 '불안전이' 축하의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컬한 현실이다. 약탈적 다국적 기업과 화석연료의 한계, 신자유주의의 폭주 속에서 더 많은 부와 풍요를 얻기 위해서 소비를 장려하고 있고, 황금만능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집값이 올라 돈을 버는 지인들을 보며서 배아파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돈의 노예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닫는다. 그러나 사피엔스라는 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살리는 것은 풍요를 늘리려는 소비자가 아니라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이명박 정권시기에 야만적 황금만능주의는 용산 재개발을 막는 서민들에게 전투경찰을 투입시켰다. 전투경찰과 시민들이 죽어나갔지만, 전투경찰을 무모하게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몬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비정한 사회를 살아온 우리는 다시한번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를 수호하려는 몸부림을 쳐야한다.

  넷째, "오늘이 내일을 바꾸고 내일이 어제를 바꿉니다."(이희재)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반면에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과거를 호출하는 이유는 오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 이희재와 조지 오웰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들말의 공통점을 아는가? 바로 "오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우리의 내일을 바꾸고 결국에는 우리의 과거를 바꾸게 된다. 그리고 오늘을 개혁하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과거 사실을 호출한다. 우리가 오늘! 지금 당장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바뀌게 된다. 우리의 미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오늘에 있다.

  무시무시한 '금벌'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폭주시대를 살아가지만, 현실을 회피하기 보다는 현실을 바꾸려 노력하며 오늘을 살아가자! 풍요를 늘리려는 소비자로 살기보다는 자립을 지키려는 자유인으로 살아가자! 금벌세력의 외곡된 정보에 속아 그들의 희생양이 되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아 주인으로 살아가자! 이것이 '어리석은 친구들과' 신자유주의의 사막을 건너는 방법일 것이다.

 

4. 동의할 수 없는 이희재의 주장

  저자 이희재는 나의 상식들을 많이 깨뜨렸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를 인도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첫째,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용인하라는 주장이다. 이희재는 '한국은 일본 정부 각료들이 야스쿠니 참배가 불편하더라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나가서 '한국인 피해자이기에 오히려 대답하게 일본을 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전범은 천황의 총알받이가 된 가엾은 사람들이라는 여유를 억지로라도 가질 필요가 있지 않'냐는 주장을 한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이희재가 한일관계 만큼은 그러한 식견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강자의 여유는 인자함으로 보이지만, 약자의 여유는 만용일 뿐이다. 일본은 세계 경제 2,3위를 다투는 강국이다. 언제라도 재무장을 한다면 강력한 군사대국으로 침략전쟁을 펼칠 수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나라의 정치인이 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너그럽게 이해한다면, 이는 일본의 침략야욕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자는 억지에 불과하다. 현재는 '우리가 과거를 호출하는 이유는 오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라는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면서 재무장화 팽창주의를 노골화하는 일본을 합리화하고 있다. 우리가 약자이기에 강자인 일본의 팽창주의를 좌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제2의 선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이희재는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은 없었으며, 유대인 600만명이 희생되었다는 숫자는 과장된 것이라 주장한다. 팔레스타인지역에서 무고한 파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패로 '가스실'과 '유대인 600만명 희생'이라는 신화를 지키려한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내가 기존에 읽었던 수많은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얻은 상식과 대치되는 주장이기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600만명'이라는 숫자는 통계사의 실수로 오차가 날 수는 있다. 그러나 '가스실'이 없었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 많은 자료를 읽고 판단해야겠다.

  셋째, '김일성을 소련땅으로 불러들인 것이 일본의 반발을 고려해서'일 것이라는 주장도 동의할 수 없다. 당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만주에서 활동했다. 중국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이 장기적 항전의 역량을 보전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이 소련땅으로 이주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일본은 노몬한 전투 패배 이후, 공격진로를 남방으로 결정한 이후이다.

  넷째, 선량한 독재자는 선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해본다. 저자 이희재는 카다피를 비롯한 많은 독재자들을 소개하며, 이들을 권좌에서 몰아낸 금벌세력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카다피의 경우, 최고 소득세율을 90%로 올리며 금벌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민주주의대 독재의 구도로 볼 것인가? 금벌대 반군벌의 대결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카다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금벌로부터 독립하려는 선량한 독재자는 설혹 그가 장기간 집권을 했다고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 질문에 이희재는 무어라 답변할까?

  신이 아닌, 인간이기에 완벽함을 바래서도 안된다. 또한 생각의 자유가 있기에 저자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강요해서도 안된다. 저자 이희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면도 있지만,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5. 동북아 현실을 직시하다.

  "일본은 독립국이 아니다." 저자 이희재의 말이다. 물론, 이희재는 한국도 독립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일본과 한국을 미국이 부리는 장기알과 같은 존재로 보고 있다. 특히 '미국이 노리는 것은 일본이 한국, 중국, 러시아 같은 주변 나라들과 반목하면서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샌프란 시스코 조약에 독도를 비롯한 영토 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하여 분쟁의 씨앗을 남겼으며, 1955년 일본이 소련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려하자, 미국이 압력을 행사하여 협상을 결렬 시켰다. 미국은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가 출범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서 하토야마 전 총리가 낙마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주변 이민족을 상대할 때,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사용했다. 미국은 중국이 사용하는 전술을 동아시아에 사용하고 있다. 달리보자면, 로마가 속주를 통치할 때 사용했던, '분할하여 통치하라(Divide and rule)'라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외교 전략을 펼쳐야할까? 소설가 복거일은 '핀란드화하는 한국'이라며 걱정어린 눈빛으로 한국의 외교정책을 바라보고 있다. 이희재는 핀란드화란 '러시아, 중국 같은 인접국에게 적대적 외교 국방 정책을 추구하도록 미국이 설득하거나 위협했을 때 순순히 따르지 않는 핀란드, 한국 같은 소국이 미국한테 찍혀서 듣게 되는 소리'라고 정의한다. 복거일은 한국의 핀란드화를 자주성이 훼손되는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보았으나, 이희재는 약소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추구하는 자주적 외교로 평가하고 있다. 보수의 입장에서 한국의 외교를 바라볼 것인가? 진보의 시각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서 '핀란드화'를 나쁘게도 볼 수 있고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다.그렇다면, 핀란드의 역사가 어떠했기에 '핀란드화'라는 말이 생겼을까?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후 벌어진 적군과 백군의 내전에 개입했다. 2차 세계대전 직전에 영국이 자신을 지켜줄 것을 믿고 소련군과 대결했다가 모스크바조약을 맺고 영토의 10%를 소련에 내어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핀란드의 외교정책에 많은 교훈을 준다. 사람이 범을 두려워하나, 범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두려운 법이다. 핀란드 입장에서는 소련이 두렵지만, 소련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요충지를 가지고 있는 핀란드가 두려운 법이다. 그래서 핀란드는 소련을 되도록 자극하려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토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 일변도의 종속적 외교가 아닌, 핀란드를 중심에 놓고 실리적 외교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핀란드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한국의 핀란드화'는 걱정해야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문재인 정부의 3차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남북이 대화하고 하나될 때,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에게 외교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목도했다. 강대국의 '이이제이'에 대항 할 수 있는 우리의 외교전술은 '한국의 핀란드화' 즉, 남북의 자주적 실리외교일 것이다.

  한편에서 중립국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이희재는 '제 나라를 제 손으로 지킬 힘이 있는 나라만이 진정한 중립, 지속 가능한 중립을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조선 고종시기에 '조선 중립화론'이 유길준과 부들러에 의해서 제기됐다. 그러나 자주 국방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중립화 논의'나, 중립외교를 통한 조선을 지키려는 노력은 허망하게 끝났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다면, 그 어떤 외교 전략도 성공하기 힘들다.

 

  이 책에는 로힝야족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지금은 미얀마 인들에게 쫓겨나 보트피플이 되어버린 로힝야족! 이들에 대한 박해를 저지르는데 이를 막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아웅산 수지 여사를 세계 언론들이 비판한다. 그러나 영국의 지배속에서 5등 국민으로 살아야했던 미얀마인은 로힝야족에게 집단 학살까지 당했다. 과거부터 뿌리 깊은 로힝야족과 미얀마 인들의 반목이 오늘의 로힝야족 사태를 만들었다. 미얀마 나쁜 나라, 로힝야족 불쌍한 종족 이라는 등식이 일방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을 이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다양한 시각에서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식견을 이 책은 제공하고 있다. '금벌'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현대세계를 바라보고,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좋은 책은 새로운 독서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책이라고 한다. '금벌'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명확히 바라보기 위해서 '화폐전쟁'이라는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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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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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월한 명강의가 가슴에 와 닿지 않을때가 있다. 대학에서 젊은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 참! 열정도 많고 많은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느낌은 들지만, 깊이있는 깨달음을 얻지는 못해 아쉬울 때가 있다. 반면, 노련한 노교수님의 강의는 많은 내용을 말하지 않는데도 많은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에 새기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들은 그러한 교수님의 강의를 '명강의'라고 말하며 후배들에게 추천했다. 사회에 나와서 배움의 열의가 시들지 않았다.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연수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다양한 강의를 찾아 듣는다. 그렇게 알게된 교수님과 저자들 중에서 고 신영복 선생은 단연 많은 것을 깨우치게한 명강의를 나에게 선사해주었다. 너무도 강렬했던 '강의'에 이어서, 신영복 선생의 '마지막 강의'가 되어버린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담론'을 펼쳐들었다. 신영복이라는 문을 통해서 진리의 화원에 들어가 보자.

 

1. 신영복을 읽는 키워드 '관계'

  '나의 고전 독법 강의'를 읽으면 신영복 선생 고전독법의 키워드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관계'를 중시여기는 그의 인생철학은 '담론'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 출소하면서 '이 사람은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것야!'라고 신영복에 예측하면 번번이 그 예측이 빗나갔다. 반면 노인들은 그 사람이 다시 들어올지, 사회에 나가서 잘 살게 될지를 잘 맞추었단다. 신영복은 뒤늦게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신영복이 그 사람됨만을 보았던 반면, 노인들은 사람과 처지를 함께 보았다. 나무는 홀로 설수 없다. 흑과 물과 돌과 나무와 어우러져야 하나의 나무가 우뚝 설 수 있다. 신영복이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이다. 아무리 세상과 단절하고 홀로 독야청청하리라 마음먹어도, 보통 사람들은 '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관계'를 우리는 잊고 산다. 신영복이 재소자에게 이응노 화백에 대한 일화를 들었다. 이응노 화백은 감옥에서 사람을 부를 때, 수인 번호로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불렀다한다. 한 젊은 재소자에게 이름을 묻고는 "뉘집 큰아들이 감옥와 있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들은 재소자는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이 홀로 서있는줄 알았으나, 자신은 이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와 누이가 보고 싶어졌고 그들을 생각하며 밤을 지세웠다한다. '관계'를 깨닫자 젊은이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관계'로 이어져있다. 자신의 존재를 '관계'를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치유가 시작된다.

  '관계'가 치유의 작용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 때문에 상처받고 슬퍼하기도한다. 그러나 외딴 섬에 홀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문에 "땅에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라는 말이 있다. ''관계'에 상처받은자, '관계'를 딛고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싶다.  

 

2. 세상을 살아가는 키워드 '사랑'

  셍떽쥐베리는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강신주는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눈부처'란, 연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뜻한다. 사랑은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는 것일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일까? 신영복 선생은 사랑은 '삼께 맞는 비'라고 표현한다. 세월호 사건의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어설푼 위로보다는 같이 눈물흘려주는 것이 그들의 치유에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었다. 고통도 슬픔도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 함께할 때만이 서로의 눈부처를 보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도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볼 수도 있다.

  때로는 사랑이 고통을 주기도 한다. 신영복은 '사랑'을 이용한 고문방법을 경험한다. 전기고문을 받다가 신영복은 탈진을한다. 그러자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어 딸아이의 감기약을 부탁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신영복은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야지. 저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를 난들 어떻게 할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무자비한 취조관이 사실은 딸을 사랑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지독하리만치 크지만, 인류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치도 없는 잔혹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신영복은 얼마나 환멸을 느꼈을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딸아이의 감기약을 부탁하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고문의 일환으로 연출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고도의 고문방법이었다. 잘못된 사랑이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인간에 대한 환멸을 주기도한다. 그렇다면, 올바른 사랑의 모습은 무엇일까?

  신영복 선생이 '강의'와 '담론'이라는 책에서 강조하는 말이 있다. '석과불식(碩果不食)!! ' 씨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씨과일로 큰 열매를 먹지않고 남겨 놓는 모습! 까치밥이라면서 가장 큰 감을 남겨 놓는 시골 농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까치밥으로 가장 큰 과일을 남겨 놓으면 새가 날아들어 그 과일을 먹는다. 그리고는 어느 곳에 그 과일 씨앗을 배설물과 함께 떨어 뜨린다. 그래서 새로운 과일나무가 어느 곳에선가 자라기 시작한다. 나만을 사랑하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자연과 우리 모두를 사랑할 때만이 참다운 사랑은 이뤄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무엇일까? 신영복은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한다. 머리로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고 이를 발로 실천할 수 있다면 최고의 공부가 아닐까? 이것이 가장 진실된 배움이지만 이것이 가장 힘든 배움이기도 하다. 좁은 가족의 사랑을 인류의 사랑으로 실천하는길! 가장 힘들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여행이다.

 

3. 오늘을 생각하고 깨우친다.

   신병교육대에서 훌련을 받다가, 한 훈련병이 제대로 훈련에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교는 그 훈련병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야, 너 서울대 나왔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네, 그렇습니다."라는 훈련병의 답변이 나왔다. 순간, 주변에서는 "야~~ 제가 서울대 나왔어?"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교관은 주변을 의식했는지, "놀랄것 없어, 예는 공부 못해서 서울대 간거야! 안그래?"라고 말했다. 훈련병은 "네, 그렇습니다."라며 군기든 대답을 했다.

  서울대 나왔다는 말에 '내가 서울대 다니는 사람을 보다니...'라는 생각을 하며 감탄을 하는 주변의 수많은 훈련병이나, 서울대 다니는 훈련병을 공부못해서 서울대 갔다고 말하는 조교 모두가 서울대에 대한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신영복 선생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변방이 창조의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적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랙스가 없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서울대 컴플랙스' 집단 감염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서울대 애들이 나보다 똑똑하니까, 내가 굳이 그들을 이기려 노력할 필요가 있어?"라고 말하는 패배주의자들도 여러명 보았다. '서울대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서울대'라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 '변방의 창조성'을 가지려면 그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야한다고 신영복 선생은 '담론' 곳곳에서 외치고 있다. 그럼, 나는 또다른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컴플랙스를 직시하려 노력해보았다. 그 컴플랙스를 직시하며 그 컴플랙스가 사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변방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곡돌사신(曲突徙薪)이라는 말이 있다. 굴뚝을 돌려 놓고 장작을 옮겨 놓아 불이 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묵자'에 나와 있듯이, 불을 끄려 동분서주한 사람은 환영을 받지만, 곡돌 사신을 해서 불을 사전에 예방한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병을 고친 사람은 명의라 칭송받지만, 병을 미연예 예방한 사람은 칭송을 받지 못한다. 인간은 소 도둑을 잡은 사람에게는 칭송하지만, 소도둑이 들지 않도록 외양간을 튼튼히 지은 사람에게는 칭찬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우뫼한 일을 지금 우리는 하고 있지 않는지 반문해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3차 정상회담을 하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한 많은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를 두고서 비판하는 일부 수구 정당과 그를 추종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보면서 서글픈 생각이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전쟁이 벌어지는 길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미연에 전쟁을 예방하여 평화의 길을 여는 길을 원하는 것인가? '곡돌사신'의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만큼 지금 이순간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너무도 소중한 기회이다.

 

4. 배움에 더해서...

  좋은 책은 책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하는 책이다. '담론'에는 책을 뛰어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많다. 그중 몇가지를 살펴보자.

  거꾸로 읽으면 의미가 살아나는 말들이 많다. '객관'이라는 말을 거꾸로 읽으면 '관객'이 된다는 신영복선생의 말은 '객관적이어라.'라고 말하는 언론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기계적 중립에 치우쳐서 박근혜 정권에서 행해지던, '한국사 국정화'도 관객의 시선에서 구경하듯 보도했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관객'이 되지 말아야한다. 그들과 '관계' 맺었음을 깨달아야한다. 이러한 단어가 '자살'이다. 자살을 거꿀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부단히 외치고 있다. '살고 싶다.'고 .... 단지 우리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다케시마'라는 말도 거꾸로 읽으면, '마시케다'가 된다. 일본은 침략주의적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독도를 '마시케다'며 넘보고 있다. 벼가 있는 언어 유희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톨레랑스'를 아는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말이며, 우리사회에 '톨레랑스'가 필요함을 많은 사람들이 외쳤다.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톨레랑스는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합시다.'라는 뜻으로 근대사회의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갈 것을 당부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시작이어야합니다.' 단순한 공존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나가자! 새로운 사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한발자국 더 나가자! 신영복은 외치고 있다. 목수는 집을 그릴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는다. 주춧돌부터 그린다. 톨레랑스라면 서로 인정하면서 공존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신영복은 자신의 부족한점을 깨닫고 목수의 그림을 배우려한다. 자신을 변화시킨다. 톨레랑스를 뛰어 넘으려한다. '톨레랑스'를 말할때, '톨레랑스'그 너머를 보자! 신영복은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신영복은 공자와 귀곡자의 말을 대비해서 설명한다. 두가지를 대비해서 설명하는 신영복 특유의 설명법은 우리에게 탁월한 이해와 영감을 준다. 공자는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사람을 어질지 못하다고 했으니, 말잘하는 공자가 얼마나 말잘하는 사람을 싫어했는지 짐작할 수있다. 반면 귀곡자는 '언어는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이라 말한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 갑자기 '문질빈빈연후군자(文質彬彬然後君子)'라는 '논어'구절이 생각났다. 겉모습과 속이 빛나야 군자라는 공자의 말을 말에 적용시켜보자. 말의 내용 뿐만 아니라, 그 말의 포장도 잘되어야 참다운 말이 아닐까? 말의 내용과 수사가 잘 갖추어져있다면 그 사람을 어진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보면 대화할 때, 대화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대화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그사람의 입장에서 대화해주는 방법을 강조한다. 수많은 논리적 근거보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문질빈빈'이라는 말은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당신은 사실을 뛰어넘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 신영복 선생은 '사실이란 작은 레고 조각에 불과하고 그 조각들을 모으면 비로소 진실이 된다.'고 말한다. 단편적인 레고조각 한두개를 가지고 전체의 진실을 알기는 매우 힘들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레고조각을 모으는 수고로움을 회피하며 한두개의 레고 조각으로 진실을 본듯이 말한다. 많은 레고 조각을 모았다고 하여 모두가 진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공룡뼈 화석을 발굴한 고고학자가 몇십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공룡뼈를 잘못 맞추어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로운 발굴을 통해서 알았다는 일화는 질실을 알아간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말해준다.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꿰뚤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자!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시는 언어를 뛰어 넘고 사실을 뛰어 넘는 진실의 창조'활동이라 신영복은 말한다.  우리 사실을 뛰어 넘어 진실을 창조하자! 그리고 그 길을 모색해보자!!

 

5. 신영복 선생님 이의 있습니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신영복 선생님이지만, 그의 견해 모두를 동의할 수는 없다. 신영복 선생님 질문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대학생을 '계급을 스스로 선택하는 계급'이라 말한다. '대학 4년은 계급을 고민하는 시기'라는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과연 계급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대학생이 몇 퍼센트나 될까? 극히 일부 명문대, 몇몇 학과에서는 가능할 수 있으나, 자본의 냉혹함 속에 내몰려 혹독한 취업준비를 해야하는 고민을 하는 이 시대의 대학생들이 '계급을 선택'할 수 있을까? 과거 개발독재 시절에는 대학만 나오면 취직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생각할 시간을 박탈당하고 취업준비에 내몰린 대학생들에게 '계급 선택'의 자유는 없다.

  '다수가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라는 신영복 선생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 말은 신영복 선생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전체주의 사상이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많다. 다수의 횡포! 중우정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다수가 힘', '다수 그 자체가 정의'라는 말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리가 될 수 없다. 다수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과거 상당수의 국민이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뽑았다. 그렇다면 이에 당신은 박정희와 같은 정치인이 다시 나타나길 바라는가? 참다운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도 존중할 때만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민주주의는 인내심이 많이 필요한 제도이다. 신영복이 '모두가 위반할 수 밖에 없는 규칙은 고쳐야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다수가 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정의이기 때문이다.' 라는 그의 주장에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통일신라는 개방화되고 속국화됩니다.'라는 표현도 동의할 수 없다. 신영복 선생이 통일 신라 시기를 주권이 침해된 시기로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통일신라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권이 침해된 속국은 아니었다. 한예로 김춘추의 묘호를 '태종'이라고 짓자 중국이 당태종 이세민과 묘호가 겹친다하여 고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서 신라는 당당히 김춘추가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초석을 닦은 엄청난 업적을 이뤘다고 주장하며 당나라의 요구를 물리쳤다. 신영복은 '자주'와 '개방'이라는 2분법을 축으로 해서 우리역사를 단순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는 역사 이해를 쉽게할 수는 있으나, 역사 인식의 외곡을 가져올 수 있다.

 

 

  20여년이라는 기나기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며 20여년이라는 기나기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며 언제 밝은 세상에 나올지도 모르는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는 감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담론'에는 신영복 선생이 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적혀있다.

  신영복은 '우리가 작은 추억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추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뜻밖의 밤길에서 만나는 다정한 길동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청구회 추억'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으며, 감옥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추억을 머릿속에 담으려했다. 그리고 감옥에 비치는 한줄기 햇볕을 보았다. 신영복은 햇볕을 보면서 죽지 않는 이유를 찾았고, 깨달음과 공부를 통해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했다. 자신의 추억뿐 아니라, 타인의 추억 속에서 깨달음과 공부를 했다. 빅터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의미치료'라는 치료방법이 있다. 그에게서 '추억'은 '깨달음과 공부'를 가능하게하는 힘을 주었고, '깨달음과 공부'는 신영복에게 살아야하는 '의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의 깨달은 그의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명필은 장수해야 한다.'라고 신영복은 말한다. 추사는 71세를 살았으며, 이광사는 73세를 살았다. 그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지 않았다면, 그들의 서체는 완숙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오래 살아서도 안된다. 부단히 인생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아는 노력을 해야한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고, 세상을 달관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 우리에게 '강의'와 '담론'을 들러주었기에 그는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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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10-06 2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강나루님.~
편안한 주말밤 되세요^^

강나루 2018-10-06 20:26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0-06 2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다 읽꼬나면 이렇게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완독부터 해야할텐데요 ㅎㅎ

강나루 2018-10-06 20:36   좋아요 1 | URL
천천히 읽으시면 되요
좋은 책이라 생각하며 느끼며 읽어야하기에 천천히 꾸준히 읽으세요^^
 
약산과 의열단 - 김원봉의 항일 투쟁 암살 보고서
박태원 지음 / 깊은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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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과같아라! 물과 같아라! 산과 같아라! 별처럼, 물처럼, 산처럼 그들은 이 땅의 독립을 위해서 살았다. 이여성, 김약수, 약산 김원봉!! 이 세사람은 젊은 시절 자신의 젊음을 조국을 위해서 바치기로 약속하고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나는 그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제세히 소개해 놓은 책들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중에서 그래도 약산 김원봉의 삶은 영화와 책으로 소개되어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를 알 수 있는 책을 찾던 중에 약산 김원봉의 삶과 의열단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을 펼쳐 들었다.

 

1. 김원봉의 육성을 듣는 듯한 책!

  이 책은 소설가 박태원이 의열단원들의 활약을 소개한 신문기사와 김원봉을 인터뷰한 자료를 근거로 쓴 책이다. 책 곳곳에서 김원봉이 먼저 죽어간 의열단원의 죽음을 기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을 먼저 보냈는가? 그들을 사지로 떠나보내면서 김원봉 그도 얼마나 슬펐을까? 조국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젊을 바치는 수 많은 별들!! 그 별들의 삶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았다.

 

2. '밀정'과 '독립운동가' 사이

  영화 '밀정'을 본사람들은 송강호가 연기했던 '황옥'이 과연 독립운동가인지, 일제의 밀정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것이다. '황옥' 경부가 과연 밀정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인 이책 속의 김원봉은 황옥은 밀정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당시를 살았던 많은 의열단원들도 황옥을 밀정이라 보지 않는다. 그런데, 꾀 많은 역사학자들은 황옥을 밀정으로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황옥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다.

  반면,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했던 박용만을 이 책에서는 밀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일본군함 출운호를 폭파하려했다가 추방당한 그를 밀정으로 보기에 너무도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역사학자들도 박용만을 밀정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 박용만이 국내에 귀국해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만났다는 사실은 그를 밀정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면도 있다.

  밀정과 의사 사이에는 생각보다 작은 강이 있다. 때로는 밀정이 의사로 추앙받기도하고, 의사가 밀정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황옥과 박용만 이 두 인물은 밀정과 의사 사이에 있는 강이 얼마나 넘기 쉬운 강인지를 알려준다. 과연 그들은 의사일까? 밀정일까?

 

3. 나혜석과 의열단의 만남

  수원을 대표하는 인물로 나혜석을 꼽는 사람들이 있다.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가 있고 많은 연인들이 그 거리를 걷는다. 내가 수원에 살았던 시절, 수원지역의 역사를 탐구하며 수업자료를 모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여성 나혜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최린과 바람피며 자유롭게 살아간 여성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냐는 논리였다. 그당시 3.1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느냐? 나혜석이 그것 빼고 독립운동을 한적이 있는가? 그 남편이 일본의 대단한 친일파 아니냐?라는 반론에 나는 별반 반론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나혜석과 의열단의 흥미로운 일화가 소개되있다. 의열단원 박기홍이 나혜석에게 총한자루를 맡겼다. 박기홍이 계호기한 일이 사전에 드러나 그는 감옥에 갔다. 출옥후, 우연히 나혜석을 만났는데 그녀가 총을 도로 내주었단다. 단동현 부영사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총을 베갯속에 넣어 이를 배고 잤다고 한다. 그녀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뜨거웠었다. 그런데, 조국을 배신한 그녀의 남편을 어떻게 이해햐야할까? 조국을 사랑하나, 사랑하는 남편은 조국을 배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최린과 외도를 한다.

 

  너무도 재미있는 책이다. 이틀만에 책을 다 읽을 정도로 책은 재미있다. 약간은 고어투의 말이 있어 읽기에 불편한 점도 있지만, 약산 김원봉의 뜨거운 조국애를 느끼며, 열정적으로 시대를 살아간 가슴벽찬 의열단원의 삶을 알고자하는 분들은 반드시 일독을 해보길 바란다.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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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8-09-18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구보씨가 이런 책도 쓰셨군요~~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