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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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5월도 끝.

여름은 시작도  했건만 자꾸 땀이 나고 낮에는 벌써 더위에 지친다. 

이런 날에는 시원한 얼음이나 추운 겨울을 떠올렸으면 좋으련만 실제로 떠올리는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혼자 지내기 좋은 계절이란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쩌면 한 걸음만 내딛는다면, 혹은 손만 내민다면 벗어날 수 있을 시간을 유예하고 있다. 마치 시간이 타버려서 재만 남기를 기다리듯, 마치 조금 뒤에는 시간의 재마저 흩어져 사라지기를 바라는 듯이. 
<미상> 시작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제대로  소설일 리가 없다. 그냥 꿈, 개꿈, 초여름밤의 신기루로 끝날 일이다. 하지만  꿈이 이유도 없이 괜히 꾸게   아니다. 이유는 있다.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느 소설?

하루키의 소설이다.

『상실의 시대』라고도 하고, 『노르웨이의 숲』이라고도 하는 소설이다.

지금도  이야기가 다른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해두지만, 같은 이야기다. 같은 작가가 쓴, 제목만 달리  같은 작품이다.


 처음과 두 번째는 『상실의 시대』로 읽었다.  2 무렵이 처음이었고, 찾아보니 2013년이  번째였다.

세 번째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었다. 같은 작품인데도 분위기가  다르다.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알아두면 좋을  같아 보태둔다.


 처음 읽었을 때의 기분, 생각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뭐, 보나 마나 섹스 장면마다 침을 삼키며 종이가 뚫어져라 읽었으리라. 하지만 섹스 장면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있었다. 

 화자인 '나', 와타나베의 성격과 태도다. 이런 인간이 현실에 존재할  없다고 생각될 만큼, 독특했다. 일종의 동경 효과겠지만, 그런 독특한 와타나베의 모습에서 나와 닮은 점을 발견했을  무척 반갑고 위안이 됐다.


 고등학생 때 와타나베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둘 있었다. 한 명은 기즈키다.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평범한 존재인 '나'와 기꺼이 어울리는 친구다. 둘도 없는 친구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다른 한 명은 나오코다. 기즈키의 여자 친구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냈으며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틀림없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거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비극이 찾아든다. 고 2, 열일곱. 기즈키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죽어버린다. 자살이었다. 

 그 후로 2년, 와타나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이유로 고향을 떠난다. 나오코와도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는다. 기즈키의 죽음이 와타나베의 일부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고, 와타나베는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쿨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우연이었을까, 어느  와타나베는 나오코와 재회한다. 기즈키의 죽음 이후 처음이었다. 우연한 만남 이후  사람은 오래, 많이 함께 걷는다. 도시 곳곳을, 여기저기를, 대화를 나누는 일도 없이 다만 걷고  걷는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뭐,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으며 떠올린 생각 하나는 확실히 기억한다. 그때의 나를 사로잡았던 최대의 화두이자 바람이었던 소망이었으므로. 

 와타나베와 재회한 나오코는  가지 부탁을 한다. 그중  번째 부탁은 이런 거였다.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줄래?"
『노르웨이의 숲』 중

그랬다. 

 열여덟 소년이었던 나는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나를 기억해줄 누군가를 찾고자 했다. 기억되는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바람을 잊고 살게 됐지만(정말, 기억되거나 잊히거나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잊고 지냈다), 그때는 그게  간절했다.


  다시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고, 예전으로 돌아가기도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고등학교 시절들. 뭔가 뒤죽박죽 엉망이라서  순간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기억의 홍수' 같은 거였다. 지나갈, 그런 혼란이었다.

  

 와타나베 주변에는 기이한 인물이 유난히 많은데 나가사와라는 인물도 무척 독특하다. 도쿄대 생으로 똑똑하고, 부유하지만 도덕성이 대단히 결여된,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물이다. 이기적인 동시에 완고하고, 누구를 신뢰한다거나 누구에게 의지할 줄도 모르는 그런 남자다. 

 와타나베와 나가사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음에도 서로에게 끌리는데, 나가사와는  이유를 둘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점이다.

 "나와 와타나베가 닮은 점은 말이야, 자신에 대해 남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 점이 다른 인간들하고 달라. 다른 놈들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애를 태워. 그렇지만 나와 와타나베는 그렇지 않아. 이해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나, 남은 남이라고."
『노르웨이의 숲』 중

 확실히 둘은 닮았다. 나가사와가 말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특히.  역시 나가사와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강한 인간은 못 되는 존재였으니까. 재밌는  나가사와의 말에 와타나베가 보탠 말이  생각에 무척 가깝다는 거다.

"설마요.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도 이해 안 해줘도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상대도 있는걸요. 다만 그 외 다른 사람들한테는 별로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체념하는 거죠. 그러니까 나가사와 선배가 말하듯이 아무한테도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노르웨이의 숲』 중

 이 정도다.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정말 이해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할 때는 너무나 힘들고 쓸쓸해지고 마는 거였다.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많은 사람과 어울리려고 하고, 조금  참게   달라졌을 뿐이다.


 하루키 작품은 '가벼움'을 넘어 '경박하다'거나 '천박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인물이, 이야기가 그런 혹평으로 가치를 잃는 일은 없다. 

『노르웨이의 숲』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불완전함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종종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중요한 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다. 불완전한 타인 혹은 나를 동정하지 않는 거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사랑하는 거다. 


 사실 방법은 그것 하나다. 

사랑하는 것.

예전에는 사랑이라는 결론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다만 허덕이며, 기억에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시간은 멈출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래서   지나간  돌아오지 않는다. 억지로 되돌리려 해도 점점  멀어질 뿐이고,  빨리 지칠 뿐이고, 공허해질 뿐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오래 걸리더라도, 다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없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은  몰이해가 영원히 지속된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그대로 '순간'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당연히  순간은 지나간다. 그리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나가사와는 '이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넌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만한 때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받기를 바라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노르웨이의 숲』 중

 그랬다. 나가사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해는 '받고 싶다'라고 해서 받을  있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왔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인간인 이상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불완전한 존재라도 이해받고 싶다고 느끼는  자연스러운  아닌가? 

그렇게 바라는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바람은 잘못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몹쓸 짓이었다. 

 이해는 바라거나, 구하는  아니라는 사실로 돌아가면 간단히 결론이 나오는 문제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

전혀, 영원히 이해할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한순간 '그런 거였나?'하는 생각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경험. 그런 거다. 대부분의 이해는 그렇게 조금 늦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찾아든다. 슬퍼할 일도, 안타까워할 일도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바로 이해다.


  2013년에 감상을 남긴 나는 '10년 후에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를 궁금해했다. 

4년 후의 '나'가 느낀  지금까지 적어 두었다. 이제 2013년의 나에 이어 2017년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다시 6년 후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전혀 모르겠다. 감도 오지 않는다. 상상도   없다.

그런 거다. 

우리가 알거나 안다고 믿을  있는  모두 과거에 있다. 

미래를 걱정한다고 해도 달리 방법은 없다.

  

 기억해야    가지를 적어본다.

첫째,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

둘째, 불완전한 나지만 동정해서는  된다.

셋째,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지 말아라.

넷째, 이해는 받고 싶다고 받아지는  아니다. 

다섯째,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를.


 보통의 감상도 그렇지만  감상은 유난히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나를 위해 읽었고, 나를 위해 써낸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나의 편지와 다르지 않은 그런 이야기라는 얘기다.

  

 그나저나 『상실의 시대』는 애초에 의미가 전혀 달랐고, 『노르웨이의 숲』도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노르웨이 목재 가구' 정도의 의미라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솔직히 제목은 아무래도 좋다는 거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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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09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장물방울님,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독서모임 하루키가 책을 벌어다 주었네요 :>

대장물방울 2017-06-09 15:15   좋아요 0 | URL
오잉? 오, 몰랐는데 고맙습니당. ㅎㅎ
달궁독서모임 덕분이네요. :)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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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선택을 하는 날입니다. 

 누구나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있을 테죠. 하지만 내가 선택한 후보가 반드시 당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내가 선택한 후보가 내가 기대한 결과를 보여줄 거라는 확신도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선택이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든, 명분을 따른 것이든, 다른 사람을 좇은 것이든 선택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책임을 다한 셈이기에 나름의 권리를 갖습니다. 

 이런 분들도 계시죠. 

"나는 선택하지 않는  선택했다."라고 하시는 분들.

솔직히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이야기죠.

"난 포기했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후보가 없으므로, 누구에게 표를 던지든 의미가 없기에 행사하지 않겠다.'거나 '누가 되든 결국 도진개진인  아니냐,  선택에 의미가 없는  아니냐'라고 그럴듯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역시 허튼소리인  마찬가집니다. 

 후보는 개인인 동시에 집단이죠. '나와 일치하는 후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맹목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습니다. 이해 가능 여부를 떠나서 이유와 명분이 있기에 그들은 당당할  있죠.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발언권도 가질  없습니다.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소중한 권리,  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경제학 카페>라는 책에 감상문을 쓰면서 시작하며 '선택'을 이야기한  오늘이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어서만은 아닙니다. 유시민 작가도 말하고 있지만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죠. 이미  알고 계신 것처럼 대통령 선거 역시 경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번의 선택이 적게는 5년, 길게는 수십 년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제학이 정치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고, 관련이 크기에 <경제학 카페>에서도 여러 차례 정치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부분을 공유합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온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빈부격차와 불황을 비롯한 온갖 경제적인 악을 제거할 것처럼 큰소리치는 정치가를 믿지 말라. 무식한 돌팔이가 아니면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 틀림없으니까.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중


 우리는  선거 때마다 '저를 뽑아주시면'으로 시작해 '무엇 무엇하겠습니다'하는 약속을 무수히 받았습니다. 

믿지 못하면서도 찍고, 믿고 싶어서 찍고, 믿을  없어서 찍지 않는 일의 반복이었죠. 

 '저는   있습니다'는 믿기 어려운 말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경제의 문제, 외교의 문제, 정치의 문제라는  나만 잘한다거나, 내가 잘하고 싶어서 잘할  있는  아니라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행보와 태도, 의지를 보고 결정하려고 하게 됩니다.   나은 결과를 기대하면서요.


 때로 우리는 마법사의 출현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많은 순간에 그런 마법적인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만능의 마법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을  없을 만큼 좋은, 바라 마지않는 공약은 언제나 공허한 약속으로 끝이 난다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오래된 질문입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죠. 

 물음에 대한 답은 '이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전에는 '희망'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나도 부자가   있다'는 희망에서라고요. 기이한  그런 희망이 거듭 좌절되는 경험을 하면서도 마치 이제는 '포기'할  없어서,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 잘못된 선택이라는  알면서도 계속하고 있다는 겁니다. 잘못인  알면서도, 의심하면서도 계속할  있는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없습니다. 

 어떤 이득일까요?

'나만 이런 좌절, 실패, 분노,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이기심, 타인의 실패를, 좌절을, 분노를, 가난을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되는 위안. 그런 뒤틀리고 비틀린 이득.


 지나친 생각일  있다는  압니다. 

사실은 나아지고 싶다, 나아질  있을 거다,  나아짐을  후보가 이루어줄 거다라는 기대에서 선택하고 있을 겁니다. 믿을  없지만, 여러 차례 배신당했지만 그럼에도 이젠 미운 정이 들어서라도 계속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을  있습니다. 혹은 해소되지 않은 연고주의, 지역주의, 사상과 이념의 문제를 용납할  없는지도요.


 중요한 건, 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의 상당 부분이 '이기심'이라는 겁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므로 자기의 부를 희생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목격한 바, 생명에 치명적이어도 로비를 통해 판매 허가를 받고, 노동자가 위험에 노출될 걸 알면서도 외면하며, 실제로는 거의 같은 비용이 들더라도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 하청업체를 통해 비정규직을 운용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저마다가 자유롭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곳. 그곳이 바로 시장입니다.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은 그런 곳입니다. 개인, 기업의 이기심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기에 예측도 조정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세계화, 국제화라는 불확정 요소가 더해지면 통제는 불가능에 가까워집니다. 

 

 독재라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사람의 명령에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시스템이라면 마법처럼 문제를 해결할  있을 겁니다. 정확히는 아주 잠시 동안은 그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어려움, 문제들을 만든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독재라는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법은 없습니다. 마법사도 없죠. 

변화를 만드는  마법이 아니라, 변화된 선택입니다.


 시장에서는 선택받은 상품, 기업만이 살아남습니다. 기업은 선택받을 수 있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개발하며 생산합니다. 외부의 개입이 없는 이상적인 상태라면 결과적으로 최선의 상품과 기업만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소비자는 선택에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선거에서 유권자가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왕이듯, 정치에서는 유권자가 왕이다. 만약 그 왕이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정치가 엉망이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중


 유해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소비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기업이 있습니다. 소비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당연히 해당 기업의 상품을 불매함으로써 업계에서 추방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소비자에게는 그렇게   있는 힘이 있죠. 하지만 기업도 살아남아야 하기에 방법을 찾습니다. 상품 가격을 낮추고, 이미지를 회복시키는 광고를 내보내며, 소비자를 유혹하는 이벤트도 기획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수천 명의 소비자, 잠재적으로는 수만 명의 소비자를 위험에 빠뜨린 기업은 무사히 위기를 극복합니다. 


 정치도 닮아있습니다. 

나라를 혼란과 분열에 빠뜨린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위기에 책임이 있는 정당이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유권자라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런 정치인들과 정당을 퇴출시켜야 합니다. 선거에서 뽑아주지 않음으로써 유권자의 분노와 뜻, 힘을 보여줘야 하죠. 하지만 정당도, 정치인도 살아남아야 하기에 방법을 찾습니다. 우선 책임이 가장  사람들을 분리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새로워졌다고 말합니다. 다음으로는 오래된 논란, 논쟁을 끄집어내서 반대를 위한 반대, 반감을 되살립니다. 우리 밖에는 그들을 막을  없다고 호도합니다. 의외로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납득합니다. 스스로는 대견하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경건한 마음도 먹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부패와 부정이  만연하는  지켜보며 힘든 삶을  힘겹게 견뎌냅니다.


경제학은 '선택'의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정치는 선택을 받는  최대의 문제죠.

둘은 무척 닮아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정경 유착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일 테죠.(웃음)


 경제학은 최대의 만족, 최대의 효용을 이끌어내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이 연구를 하더라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최선이라는  단지 방향을 제시하고,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뿐이죠. 

 

 앞에서도 적었지만 선택의 핵심은 '이기심'입니다.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하는  소비자의 기본적인 심리죠. 적어도 해가 되는 선택을 의도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이득이 되지 않아도 이기심은 작동할  있습니다.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에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선택은 하는 쪽도, 받는 쪽도 최대의 효용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최대의 효용의 기준과 요소는 저마다 다르더라도 말이죠.


 소비의 문제에서 소비자는 어느 상품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해당 상품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면 단지 그뿐으로 자기 삶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정치의 문제는 다릅니다. 


더 나은 나라, 더 좋은 사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듭 투표를 했지만, 거듭 실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는 나아지지 않을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결국 '선량한 유권자', '선의의 유권자'는 점점 투표의 의지를 잃습니다. 


그럴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어 질  있고, 희망도 기대도 없을  있습니다.

하지만  순간에도 다른 유권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지하는' 후보에게 표를 던져 권력을 안겨줍니다. 

결국 절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던 후보가 당신의 삶을 좌우할  있는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자유라면 선택하지 않은 결과에 시달릴 의무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항의 명분도 분노의 이유도 없습니다. 선택을 포기한 사람은 권리는 잃고, 의무만을 지게 된다는 겁니다.


경제학에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결국 정치로 귀결된 이유는 경제학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정치와 닮아있고, 떼어놓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권을 가진 사람들이 주권을 올바르게 행사하고, 행사된 주권이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더디더라도 우리 사회는 나아질  있습니다. 


 오후 1시를 넘어서고 있으니 이제 6시간 남짓의 시간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아직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투표소로 향하시기를 권합니다.

나의 미래, 우리 아이의 미래, 우리 가족의 미래,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을 정하는 일을 포기하지 마세요.


 투표는 승리자를 정하는  쓰일 수도 있지만, 국민과 시민의 뜻을 전하는   수도 있습니다. 

마법사를 다른 곳에서 찾지 마세요.

모든 마법은 당신의 손에서 시작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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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종교적인 의미에서 던진 질문은 아닙니다. 

육신의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다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 조금씩 때 묻어가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질문을 던진 이유는 이제부터 선함의 회복, '부활'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레프 톨스토이, 거장의 작품다운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부활>_첫 문장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공작 가문 상속자로 부족함 없이 자라온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입회한 재판에서 어린 시절 함께 자랐고, 한때 사랑했던 마슬로바와 재회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이 재회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로 마슬로바가 이 상황에 놓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마슬로바와 네흘류도프는 신분이 달랐죠. 순수했던 사랑의 감정은 한순간의 욕정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습니다. 거기에 더해 네흘류도프가 집을 떠나 있던 동안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들킨 마슬로바는 쫓겨나고 맙니다. 마슬로바는 아이를 낳지만 오래지 않아 아이는 죽고 맙니다. 이후 가정부와 매춘부 일로 삶을 이어가던 마슬로바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고, 진범들의 공모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던 겁니다. 
 네흘류도프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씻기 위해 마슬로바와 결혼하여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시베리아 형무소든 어디든 이제부터는 함께 하며 평생 속죄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 겁니다. 네흘류도프가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습니다. 매력적인 여성을 굴복시키는 게 자랑처럼 여겨졌고, 젊은 혈기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서 순수함을 잃었던 겁니다. 네흘류도프는 마치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으려는 듯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속죄를 시작합니다. <부활>은 심경의 변화와 내면의 갈등, 외부 세계와의 마찰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봄이 되면 세상의 만물이 깨어납니다. 얼어붙은 땅이 녹고, 말랐던 가지에 꽃이 피고, 잎이 나죠. 

길었던 겨울을 생각하면 기적처럼 느껴지는 부활의 시절, 회복의 시기에 매년 놀라게 됩니다. 자연의 섭리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겨울처럼 차고 메마른 마음도 부활과 회복의 시간은 찾아오는 걸까요? 


 네흘류도프는 처음에는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와 태도를 거부하고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투쟁합니다. 세상은 선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에게는 악처럼 느껴지는 가치들을 받아들이지 않죠. 하지만 결국 네흘류도프는  투쟁에서  패배합니다. 패배한 이후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도, 스스로를 믿는 일도 없이 세상이 원하는 것, 세상이 믿는 것을 행하며 껍데기처럼 살아가죠.  

 마슬로바와 재회하게 되면서 껍데기로 덮여있던 네흘류도프는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외면했던 농민과 민중의 고단한 삶에 눈을 돌리게  거죠. 잃어버린 선함과 순수함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 겁니다. 

  

 네흘류도프의 노력은 이중의 장애물에 부딪힙니다. 하나는 귀족 사회의 조롱과 비난이었고,  하나는 농민과 민중의 의심과 욕심이었습니다. 귀족 사회의 지인들은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라며,  혼자만의 노력으로 달라지는  아무것도 없다고 충고합니다. 

 농민과 민중은 네흘류도프의 저의를 의심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게 되기를, 빼앗기지 않기를 바라는 추한 욕심을 드러냅니다. 팍팍한 삶이 그들로 하여금 그악스럽게 만들었던 거죠.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의 거절과 의심과도 마주칩니다. 자신을 버린 남자,  년이나 천하고 더러운 삶을 감내하게  남자를 다시 믿기 어려웠습니다. 거기에 더해 마슬로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를 사랑했기에 곤란한 처지로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었죠.  선한 사람들입니다.


 네흘류도프 안의 선함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순수함도 그날 함께 죽었죠. 어떻게 생각하면 네흘류도프의 변화는 회복이 아니라 변덕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권위와 특권을 내려놓고, 속죄하는 모습은 감동마저 느끼게 합니다.


 <부활>은 개인의 회복, 속죄라는 의미에 머무르는 작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와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대한 담론을 담고 있죠.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하는 많은 사건들이 실제로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관행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차별과 부당한 대우, 그릇된 인식에 더는 면죄부를 줘서는  됩니다. 

'다 그렇게 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는 억지 논리가 망치는  현재만이 아닙니다. 미래까지도 어둡게 하죠.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너무 많은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시작하기 주저하거나 어렵게 여기는    자체가 어려워서  수도 있지만,  일을 세상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할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수없이 되묻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올바른 선택인가?"하고요. 

그러다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는 이러한 어러 가지 문제들을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고 모든 것이 너무나 단순한 데 놀랐다. 그 이유는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아무리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으나 남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활> 중

 이 깨달음은 부처나 예수 같은 성인의 깨달음과 닮아있습니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하찮게 여기고, 세상과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보통의 사람에게 이런 경지를 요구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선 생각,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고 또 삶에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저부터도 늘 두려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

"이것을 한다면, 혹은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나를 어떻게 볼까?"

솔직히 이겨내거나 떨쳐버리기 어려운 질문임을 고백합니다. 

얽매이지 않는 게 얽매이는 일보다 어렵다는 건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애쓰는 중입니다. 그래서 작은 변화라도 실감하는 날에는  기쁨을 얻고는 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나는 걸까요? 

죽어가기 위해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나는 거겠죠. 

나만을 위한 삶과 욕망에 충실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나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삶이 결코 행복한 삶이   없다는 걸요.


 봄이 깊어갑니다. 

산과 들, 숲과 내가 깨어납니다.

우리의 마음도 오래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죽은 듯했고, 너무 늦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변화와 회복의 시기를 앞에 두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계, 타인이 만들어 둔 가치와 체계를 무조건 적으로 따라가며, 나의 생각, 나의 바람을 버리고 살던 삶과는 그만 이별해야겠습니다. 

 지금은 봄, 계절에 부끄럽지 않게 깨어나고 자랄  있도록 조금  애써보겠습니다.

바야흐로 부활, 오늘은 부활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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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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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불평이나 개인적인 불만의 시대가 저물어 갑니다. 

근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하니 '징조'라고 부를만한  하나 예로 들어야겠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치가나 일부 시민이 아니라 다수의 시민이, 거의 누구나가 던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오래된 질문은 아니지만 과거에도 '국가란 무엇인가'와 유사한 의문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문의 뿌리 혹은 기대하는 결과는 지금과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질문은 한탄, 원망, 좌절, 무력함에서 시작되어 어떤 변화도 만들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지금의 질문은 시민의 힘이 국가를 변화시킬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정당한 '분노'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힘이 있습니다. 단순한 한탄에서 그치지 않고 변화를 완성할  있는 힘이요.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는 스스로에게 던져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유시민 작가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정의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진보주의자 유시민이 생각하는 국가를 담고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국가란 이것이다'가 아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유시민 작가는 자기의 생각을 정답이라고,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개인 유시민을 위한 나라가 아닌 시민 모두를 위한 나라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 <국가란 무엇인가>는 결론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은  지난해 12월이라,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적으려다 보니 부실해질  분명한지라 짧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남겨둔 메모를 보니  줄이 적혀 있었습니다.


"단순한 불평이나 개인적인 불만의 시대가 저물다."


어떤 의미로 적었을까 곰곰 생각해봤습니다. 

'불평'이나 '불만'이라 함은 무력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없을  그나마   있는  불평하는 일입니다. 불만을 표하는  조금  적극적이기는 하지만 상대방이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마찬가지죠. 

 시민이 국가에 어떤 요구를 했을 때, 지금까지는 국가가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어쩔  없다며 포기해왔습니다. 어차피  되는  신경 써서 무엇하냐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시민들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겪으며 무관심해졌을  국가가 얼마큼 부패할  있으며, 무능해질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국가의 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 시민이야 말로 국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기에 과거와 결별하는 시기를 맞게  겁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서  군데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없어서 보수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중

 '보수적'이라는 말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지금 상태에 불만이 없고,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자연스러운  당연합니다.  해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오래전부터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있는 질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것, 가진 것까지 잃어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죠. 그래서 변화를 일으켜 가난에서 구제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도 쉽게 믿지 않습니다. 보수 집회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고도 말합니다. 마찬가지 이유인데,  나은 삶을 기대하기보다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는 거죠.


 흔히 하는 말로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중

  줄에 불과한  문장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없는  현재 대한민국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벌어졌지만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없는 일,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는 믿음을 져버린 일, 위안부 합의와 싸드 배치로 대표되는 굴욕적이고 기만적인 일. 

 하이에나에게 양 떼를 맡기는  낫지 국가를 믿고 우리 삶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유시민 작가가 말하는 건 국가의 미래가 아닙니다. 국가를 규정하는 정체성,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죠.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거쳐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한민국에는 이데올로기 대결 구조가 고질병처럼 뿌리를 내렸습니다. 나날이 커지는 빈부 격차도 불안을 키우고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바람직한 국가상을 그리는 동시에 시민들의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망각과 용서, 진보와 보수, 국가와 정치.

어디에서든 국민, 시민들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에서 자유로울  없습니다. 

'모든 국가는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게 된다'는 말을  어느 때보다 무겁게 여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라를 탓하고 정치인을 탓할  있는 시기는 단순한 불만이나 개인적인 불평의 시대와 함께 끝을 맞이했습니다. 

주권자로서 시민은 감시하고, 요구하며 관심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갈등을 조장하고 지속하기보다 이해하고 화합할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시민이 국가를 두려워할  아니라, 국가가 시민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화해와 용서를 이유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자'라고 말하는  갈등의 골만 깊어지게 할 뿐입니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는 언젠가 곪아   상처가 됩니다. 깨끗이 도려내고 씻어내는 일,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피해갈  없는 과정입니다.


 30년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답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지금도 국가가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 확실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어떠해서는  되는지는 알아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국가는 국민 위에, 시민 위에 군림해서는  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됐죠. 

 앞으로도 이 물음을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곧 국가이며, 우리가 곧 주인이기에 살고 싶은 나라를 고민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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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틈에 2017-04-20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몸이 안좋아서 일을 쉬게 되었는데 미뤄두었던 유시민 대표저서 읽기를 해볼까 합니다. 할까 말까 어제까지 고민했는데 이 글이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장물방울 2017-04-20 07:56   좋아요 0 | URL
건강이 정말 중요한데 몸조리 잘하셔서 좋은 책 많이 읽을 수 있게 되길!
계기가 되었다니 미흡하나마 영광이네요.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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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대신하여.
한 남자가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의 사랑을 독차지할 운명을 타고난 남자죠.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여자의 내면은 임계점까지 분노로 가득합니다. 신화 속 비극의 여주인공들. 키르케, 메데이아, 안티고네를 잇는 저주받은 운명이 만들어낸 분노를 형벌처럼 품고 살아가죠. 여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불타버리거나 불태우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죠. 여자는, 태우는 쪽을 선택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요. 그런 여자가 사랑에 빠집니다. 오직 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지금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여자는 모든 것을 걸죠. 사랑이 여자를 구원할지 아니면 완전히 파괴시킬지. 신이 부여한 운명에 맞서는 한 인간의 분노가 600페이지에 이르는 지면을 뜨겁게, 순식간에 불살라 버립니다.

<운명과 분노>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였던, 누구보다 서로에게  충실했던 두 남녀의 운명과 분노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미리 경고하자면, 완벽한 사랑, 순수한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결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사랑은 한 사람의 전부 혹은 그 이상을 내놓기를 요구할 때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목숨까지도 요구하죠. 그래서 겁쟁이들은 사랑에 빠지지 못합니다.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 사람도 그러하죠.

 

 두 사람은 예외입니다. 너무나 똑똑한 두 사람이 사랑 앞에서는 눈이 멀어 버리죠. 주인공 남자와 여자, 로토와 마틸드는 그야말로 '미친 사랑'을 합니다. 어리석다고 말하는 세상도, 타협을 권하는 사람도 외면한 채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죠. 

 하지만 이 사랑의 이면에는 여자, 마틸드에게 내려진 저주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세상의 모두가 마틸드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저주 가요. 마틸드는 사랑으로 빛나는 존재인 로토를 이용해 저주를 풀고자 합니다. 그렇게 될 테고, 그럴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고 살아가는 거죠.


역사와 신화 속 무수한 이야기가 증거 하듯, 인간은 운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이루지 못할 꿈이었던 거죠. 모든 인간은 병들고, 나이 들어 죽음에 이릅니다.  언제든, 덜컥, 불쑥 들이닥쳐 깜짝 놀라게 하죠.


 사랑받은 적 없는 마틸드와 사랑으로 가득했던 로토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몹시 '고독하다'는 거죠.

고독.


 어떤 이들은 나이 들면 고독에도 익숙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고독은 결코 나이 들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 건 사람뿐이죠. 때문에 사람은 고독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고독 앞에 무력해져 갈 뿐인 거죠. 

 더 좋지 않은 건 고독이 나이 들지 않듯 분노 역시 사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존재가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은 물론 주변의 존재들도 분노에 휩쓸리게 되는 거죠. 통제되지 않는 분노는 재앙 혹은 저주가 되어 모두를 파멸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나이들 지도 사멸하지도 않는 고독과 분노만큼이나 어려운 상대가 있습니다. 

그 상대의 이름은 '기억'입니다. 

기억은 망각에 덮여 흐려지거나 지워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국 저절로 흐려지거나 병 혹은 사고로 지워지기 전까지는 고되고 치열한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숨을 곳조차 없는 내면에서 매일 기억과 마주치는 일은 작고 왜소한 자아를 피폐하게 하죠. 이 피폐함, 고통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용서하는 거죠.

  말은 쉽지만 용서하기란 간단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타인을 용서하는 일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더 힘이 듭니다. 타인이 모르는 것까지 '나'는 알고 있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왠지 어렵고 복잡하게 적고 말았는데 사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모든 건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사랑은 주기만 할 수도, 받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말도, 먼저 사랑을 주지 않으면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말도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운명'의 장난이라고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큐피드의 화살 이야기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갑자기 이 무슨 낭만주의인가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낭만적인 상상도 없이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운명과 분노>를 먼저 읽어본 지인은 제게 "이 얘기는 딱 네 얘기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솔직히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온통 물음표 투성이었죠. 

'이 소설의 어디가 내 얘기란 말인가?' 

 초반을 넘기고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제 모습이 있더군요.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 한쪽이 아니라 둘을 합쳐둔 모습. 분명 제 이야기였습니다.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저주나 운명을 이겨내는 방법은 완전히 무시하거나, 철저하게 믿거나 하는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운명이, 나 자신조차 무시하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거죠.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죠.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걸 무시한다면 삶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남은 건 '믿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친구를 믿고, 가족을 믿는 거죠. 이 방법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믿는다고 해도 어디까지, 어떻게, 누구를 믿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큐피드의 화살이 주는 내 눈에 콩깍지도 필요하죠. 


고독은 '나' 홀로 존재할 때 생겨납니다. 

'나'를 그 혹은 그녀에게 준다면, '나'가 없기에 고독도 생겨날 수 없죠. 

사랑이라면 그런 낭만, 환상, 불가능을 꿈꿔도 좋을 겁니다. 

삶 동안 한 번쯤이라면요.


이번에는 기필코 정리해서 적겠노라 마음을 먹었건만, 사랑 이야기라면 젬병이라 역시 정리되지 않은 혼란과 어수선함만 잔뜩 늘어놓고 말았네요. 


 한 번쯤은 "너는 내 운명"이라 믿는 사람을 만났거나,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운명의 사람인 그에게도 "참을 수 없이 분노하게 되는 날"이 찾아올 거예요. 

그럼에도 "너는 내 전부"라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사랑 아닐까요.   


역시, 사랑해야 합니다.


+ 더하여.

<운명과 분노> 곳곳에 삽입된 셰익스피어 희곡과 신화를 읽다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질 겁니다. 이번 기회에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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