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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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때입니다. 

아마도 호승심에서였을 텐데, 두껍고 빽빽한 글자가 가득한 <백경>이라는 책을 덜컥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꺼운 책이 <백경> 하나는 아니었을 텐데 굳이 골랐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읽기 힘들지만 재밌었다는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백경>은 에이해브라는 포경선의 선장이 모비 딕이라는 향유고래를 잡으려다 한쪽 다리를 잃고 복수심으로 선원을 모아 출항했다가 죽음에 이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백경>의 원제목은 <모비딕>입니다. 이제부터 감상을 적을 책과 같은 이야기죠.


 <상실의 시대>와 <노르웨이의 숲>이 같은 책이듯, <백경>과 <모비 딕>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읽은 탓이었을까요, <모비 딕>을 읽는 건 망망대해 어딘가를 헤엄치고 있을 모비 딕을 쫓던 피쿼드호의 선원들이 느꼈을 막연하고도 막막한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모비 딕을 발견한 이후에는 그 막연하고 막막한 느낌이 사라졌으니, 역시 닮은 기분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앞서 <백경>을 이야기하며 적었듯 <모비 딕>은 복수심에 불타는 포경선 선장 에이해브가 다시 선원들을 모아 바다로 떠나, 모비 딕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래'라는 생물은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생물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신의 사자 혹은 괴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허먼 멜빌은 화자인 이슈마엘을 통해 고래에 관한 역사를 한 차례 훑어보인 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고래가 어떤 존재이며, 생태는 어떠하고, 인간과 고래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를요.

 이 이야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증명하고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해브 선장의 포경선 이름은 '피쿼드 호'입니다. 이 배의 선원을 모집한다는 이야기에 이슈마엘은 특별히 '어떤 일을 하겠다'는 목적도 없이 새롭게 사귀게 된 식인종 친구 퀴케그와 함께 찾아갑니다. 그런데 선원에 지원하러 가는 그들에게 한 남자는 '저 배는 저주를 받았다'며 그만두는 게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꺼림칙하기는 해도 두 사람 중에 저주가 두려워 배에 오르는 걸 그만둘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피쿼드 호는 선원 모집을 끝내고 출항을 준비합니다. 적당한 바람을 받으며, 항구를 떠난 배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배 안의 기름통을 가득 채워 돌아올 꿈에 부풉니다. 

 먼 바다에 나왔을 때 선장인 에이해브는 자신의 목적이 모비 딕에게 복수하는 것임을 선원들에게 밝힙니다. 일부 선원들은 반대하지만 결국에는 광기 어린 에이해브의 집념에 휩쓸려 모비 딕을 쫓기 시작합니다. 모비 딕만을 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선원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에이해브 선장은 다른 고래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사를 건 모비 딕과의 사투가 시작됩니다. 

 괴물, 귀신고래, 모비 딕에 붙여진 악명들은 현실이 되어 피쿼드 호와 선원들을 덮칩니다. 최후의 전투에서 결국 피쿼드 호는 에이해브 선장과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감상을 쓰면서 결말까지 적나라하게 밝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드물게 밝히는 경우는 결말을 알고 모르고 와 무관하거나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때 정도입니다. 

 <모비 딕>은 둘 다에 해당되는데, 세계 문학에서도 소문난 '비극' 안에 <모비 딕>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에이해브 선장과 피쿼드 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무모하지만 도전할만한 일과 터무니없는 도전은 엄연히 다릅니다. 냉정하게 맞서도 이길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맹목적인 흥분 상태, 광란에 가까운 정신으로 도전한다는 건 자살행위일 뿐입니다. 

 모비 딕에게 팔이나 다리를 잃은 이는 에이해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 항해에 나선 작은 아들과 그 아들을 찾아 배를 내린 큰 아들까지를 잃은 선장도 있었고, 몸 일부를 잃은 사람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복수보다는 생존을 선택합니다. 모비 딕의 터무니없는 강함과 교묘함, 영악함까지를 받아들이고, 바다의 신처럼 여겨 피해 다니기도 합니다. 에이해브는 그런 그들을 비웃지만 정말 에이해브 선장이 그들을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리 흔히 쓰는 말이 아님에도 '저주'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저는 "나는 너를 저주한다."는 말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그런데도 '저주'라는 말이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기이한 일이지만, 저주가 사람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저주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요.


 에이해브 선장은 평화롭게 자기 삶을 살고 있던 모비 딕을 죽이려다가 다리를 잃습니다. 모비 딕은 정당방위로 스스로를 방어합니다. 그러다 다리를 잃자 에이해브는 저주를 퍼부우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죠. 결국 죽을 때와 자리를 찾아가듯 모비 딕과 다시 만난 바다에서 자신이 내렸던 저주는 이루어집니다. 둘 중 하나의 '죽음'으로요. 

 솔직히 아직도 에이해브 선장과 모비 딕의 대결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광기와 복수심으로 상대와 맞서는 건 자살행위일 뿐이다라는 게 그나마 얻은 교훈일 뿐이죠.


 지금도 포경선은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닙니다. 압도적인 화력과 발달한 기술력으로 모비 딕과 에이해브 선장이 벌였던 치열한 대결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래는 발견되고, 학살당할 뿐이죠. 끔찍하게도 인간적인 일입니다. 인간의 경제 사정이야 어떻든 고래가 죽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만은 에이해브 선장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죠. 상관없는 얘기를 해버렸네요. 


 <모비 딕>이라는 작품이 단순이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만 이야기했다면 지금까지 읽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슈마엘과 식인종 퀴퀘그의 우정이나 선원들 간의 갈등, 동료 혹은 가족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 말이 통하지 않는 고래와의 소리 없는 대화. '죽음'이라는 소재를 빼놓는다면 <모비 딕>은 낭만적이고, 조금 과장해서 목가적인 풍경까지 보여줍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인 고래의 이동과 죽음은 장엄하고도 엄숙해서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죠.


 거대함.

<모비 딕>은 바다의 거대함이나 고래의 거대함 뿐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운명의 거대한 흐름도 함께 보여줍니다. 곳곳에 심어진 복선이 때가 되면 마치 시한폭탄이 터지듯 차례차례 존재를 드러내는 거죠. 그 완성이 침몰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을 에이해브에서 모비 딕으로 옮기면, 모비 딕은 인간의 무수한 도전에도 꺾이지 않는 거대한 자연의 의지를 상징하는지도 모릅니다. 결코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맞서 도전자의 의지는 물론 생명까지 꺾어버리는 단호함, 모비 딕은 그 강함에 어울리는 카리스마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모비 딕에게 '저주'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주란 어딘가 치졸하고, 옹졸하며, 비겁한 데다 부자유스러우니까요. 


 모비 딕과의 대결을 읽다 보니 어느새 모비 딕을 응원하게 되더군요. 도전하는 인간을 응원해도 좋았을 텐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에이해브 선장이 다리를 잃지 않았다면, 운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피쿼드 호가 조금 더 빨랐거나 튼튼했다면 모비 딕이 패배하고 에이해브 선장이 승리했을까요.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모비 딕의 패배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바다의 신'인걸요.


 잠깐 이야기했지만 현대의 포경 기술은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생물인 고래를 압도합니다. 날카로운 작살은 강력한 발사기를 떠나 고래의 심장을 한 번에 꿰뚫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의 죽음이 인간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무모하지만 낭만적인 바다 위의 대결은 <모비 딕>에서 끝이 났고, 인간의 영원한 패배로 바다에 새겨져 있으니까요.


 이상한 얘기지만 에이해브 선장과 피쿼드 호 선원들의 광기 너머에는 낭만이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맞서지 않는다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와의 대결, 십중팔구는 패배할 대결에 나서는 무모한 용기가 있습니다. 

 현대는 감수할 위험도, 필요한 용기도 잃어버린 이 시대입니다. 무모한 도전자들의 광기, 그 너머로 그리움이 보이는 듯 느껴지는 건 바다의 신기루를 오래 마주한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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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청민 지음 / 첫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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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민들레 홀씨는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든 노여움도 슬퍼함도 없이 날아오릅니다. 

북풍이 분다고 시리다 말하지 않고, 남풍이 분다고 덥다 불평하지 않으며, 서풍이 분다고 서러워하는 일도 없습니다. 태풍 조차 민들레 홀씨를 두렵게 하지 못하죠. 

  까닭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모든 민들레 홀씨는 날아 올라야 하고, 모든 바람은 날게 할 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상은 적지 않고 민들레 홀씨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의 작가와 책 속 이야기들이 민들레 홀씨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죠. 왜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니 이유도 적어 두기로 합니다.

 작가 청민은 민들레 홀씨를 닮았습니다. 가볍고, 여리지만 충분히 고집스러우며, 잔 바람에도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처럼 민감하고 섬세하죠. 하지만 마음껏 날아오를 용기를 내기도 하는데, 그건 민들레 홀씨가 날아오를 하늘만큼이나 내려앉을 수 있는 넓은 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친 새가 날개를 쉬어갈 둥지의 존재를 아는 것처럼 말이죠.

 고작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라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읽은 작가 청민은 '혼자가 아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봅시다. 민들레 홀씨는 날아오르기 전까지 무수한 '가족'과 함께 합니다. 하지만 날아오르는 순간부터는 오롯이 혼자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이죠. 그러나 마침내 땅에 내려 싹을 틔울 때가 되면 다시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괜스레 앞에 말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를 읽는 동안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여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아직은 모두와 함께였던 시간의 그 넉넉하고도 여유로운 마음이 그리워졌던 거죠. 

 '어린 시절'을 잘못 적은 게 아닙니다. '여린 시절'이라 적은 게 맞습니다. 

 제게도 당연히 여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묘한 일이죠. 스물몇 살, 한참이나 어린아이의 글을 읽으며 오래된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는 일이 생기다니 말입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라는 제목과 핑크빛 표지를 보고 처음에는 애틋하거나 뜨거운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어보니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 이야기이기는 한데, 그 대상에 대한 예상은 한참이나 빗나가 있더군요. 가족과 친구와 지난 추억을 향한 애틋한 마음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이 책의 주연이었습니다. 


 오래전 '여린 마음'을 잃어버린 후로는 무덤덤하게 넘겼던 감정의 조각들조차 청민은 닦고, 모아,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로 묶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 마음 사이를 오갔는데, 하나는 낯간지럽다고 느끼는 마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사람과 사랑을 신뢰하고 기대하는 모습에 대한 부러움이었습니다. 

 그 연약하고도 섬세한 마음이 오래오래 지켜지기를, 마지막 잎새라도 지켜보듯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죠. 

 저는 이런 마음들을 '고운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여린 마음'과 비슷한 의미인데, '고운 마음'은 '여린 마음'이 단단해지고, 상처가 시간이 지나며 흉터가 된 후에도 망가지지 않고 온전한 상태를 이를 때 씁니다. 

 한참 겨울이 깊어지는 이 날에, 이 밤에, 시간이 지나도 고운 마음이 온전하기를 빌게 되는 그런 따뜻한 온기가 담긴 이야기와 만나다니 이것도 나름의 인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온기'라고 해야겠습니다. 수식어가 허락된다면 '고운 온기'라고 하고요. 

 잃어버리고 나서야 존재를 알게 되고,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여린 마음'도 한 때는 치기라고, 순진함이라고 얼른 내려놓고 싶었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랬건만 이제는 그리워하고 있으니 웃을 수도 없습니다.


 옛날 옛날의 말, 고리타분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한 마디만 더 적기로 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많은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을 충분히 느끼세요. 모든 순간이 우리의 삶이며, 모든 순간이 삶의 의미일 테니까요.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인 걸 써버리고 말았습니다만, 이 역시 이 책이 남긴 흔적이 되겠지요. 또 이것은 이것대로 좋지 아니한가 합니다. 잠시나마 잃어버린 여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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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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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어린아이를 위해 씁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만 읽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어른을 위해 씁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도 읽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어린아이를 위해 씁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더 많이 읽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어른을 위해 씁니다. 그리고 어른들만 읽습니다.

 

 세상의 이야기들을 이런 식으로 나눠보면 그 종류는 열 가지도 넘을 겁니다. 그러다가 이런 결론에 닿게 되겠죠.

 "어른만을 위한 이야기나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네, 일단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아마도'라는 말을 적을 셈이지만, 거의 확실히 그럴 겁니다. 

세상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은 결국 '우리', '사람들'과 전혀 무관할 수 없을 테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이야기'를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자기의 경험과 사고의 범위 안에서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다섯 편의 단편을 묶은 단편집입니다. 기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아주 보통의, 평범한 이야기도 담겨있어서 '이 책은 이런 책입니다'하고 똑 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운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로 묶인 다섯 편의 공통점 말입니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모두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사랑하는 이성을 향한 것이든, 아버지를 향한 것이든, 어머니를 향한 것이든, 불특정의 누군가를 향한 것이든 그 마음은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에 대한 것을 좀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표제작이자 첫 번째로 실린 작품입니다. 어느 날 자신이 벽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벽을 뚫는 남자'라는 뮤지컬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줄거리는 평범한 공무원인 뒤티유욀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된 후, 능력을 시험하고자 범죄를 저지르기를 거듭하던 중에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는 식입니다. 

 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뒤티유욀의 능력은 그를 유명하게 하고,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지만 그 결말이 어떨지는 끝까지 읽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겠죠.


 뒤티유욀의 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보면서 사실 제법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정말 그처럼 가로막는 무엇이든 통과할 수 있다면 세상의 아주 많은 제한에서 자유로울 테니까요. 하지만 벽으로 드나드는 뒤티유욀의 능력을 보며 정말 바라게 된 건 벽 너머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벽이나 강처럼 물리적으로 뚫거나 건너는 게 불가능하기에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는 한 영원히 닿을 수 없으니까요. 


 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에 대한 생각이나 하고 있어서야 모처럼 벽으로 드나들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별 의미는 없을 겁니다. 그깟 콘크리트 벽쯤 통과할 수 있는 능력으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 뿐일 테니 말입니다.

 

 <생존 시간 카드>는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생존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잉여인간'에게는 생존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정책이 그 시작인데, 그 실행과 과정을 따라가며 상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리고 결말, 이건 또 아주 인간적이죠.


 <속담>은 전제적인 가장인 자코탱 씨와 아들 뤼시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인데, 제목이 <속담>인 이유는 뤼시앵의 국어 숙제가 '잰 놈 뜬 놈만 못하다'는 속담을 주제로 한 작문이기 때문입니다. 결말이 훈훈하기는 한데 정말 이렇게 끝난 게 최선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칠십 리 장화>는 이 책에서 제일 감동적으로 읽은 이야기입니다. 미혼모인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의 이야기로, '칠십 리 장화'는 한 걸음에 칠십 리를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의 장화입니다. 이런 마법의 장화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겨울에는 한 번 발명해도 좋겠더군요.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실린 이야기는 <천국에 간 집달리>인데, '집달리'는 주인을 대신해 집세를 받아내거나 하는 부동산 관리인을 칭하는 말인 듯하더군요. 직업이 집달리다 보니 매정한 일도 많이 저질렀던 말리코른은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어느 날 죽습니다. 그런데 죽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하늘에서 천국과 지옥의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판사의 실수 덕분에 지옥행을 면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얻어 지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야말로 '여분의 삶'을 부여받은 거죠. 말리코른은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선행과 자선을 베풀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선행과 자선은 모두 자발적이지도 마음에서 우러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한 선행 쌓기의 방편이었던 거죠. 과연 말리코른은 천국에 가게 될까요?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니 다음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간추려 적다 보니 괜스레 긴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이야기를 다시 '마음'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들, 벽을 뚫는다거나, 한 걸음에 칠십 리를 달린다거나 하는 건 분명 편리할 수 있습니다. 비생산적인 존재들의 생존을 제한하거나, 억지스럽기는 해도 표면적인 선행을 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과 자식들 앞에서 언제나 권위와 위엄을 잃지 않는 뛰어난 가장이 되는 게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는 눈에 보이는 것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적인 인간'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믿으려 애쓰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정말 넘어서고 싶은 건 가로막힌 당신의 마음이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열리기를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할 셈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마르셀 에메가 꿈꾸었을 세상 역시 '사람의 마음' 그 따뜻한 온기가 살아있는 세상이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소외되고 핍박받는 영혼들, 비참하고 비통한 처지의 이웃들을 찾아가는 기적.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며 퍼져가는 온기가, 깊어가는 겨울의 한기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이 밤 기도합니다.


 넘어서고 싶은 게 있나요? 

꼭 그곳에 닿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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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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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을 즐겨 읽습니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이야기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나 역시 좋아합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넘게 읽었으므로, "나는 하루키의 친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한 일도 몇 번인가 있습니다. 물론, 제 생각일 뿐이지만.


 습관처럼 책을 샀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되어버렸다'라고 하면 역시 무책임한 게 되겠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게 사실이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걸 어느 정도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바빠서'라며 핑계를 대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더는 그럴 수 없겠다'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바빠서' 달릴 수 없다고 말하게 되면 언제까지나 달릴 수 없다고 하는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나가겠다는 결심을 새삼 다시 하게 된 거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은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하루키 답다고 할까요. 잘 어울리는 제목입니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회고록'이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소설과 글쓰기, 달리기와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 삶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고, 추구해 온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읽힙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하루키는 스스로가 '재능 있는 소설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하루키의 말을 들어보면 납득할만한 이야기들이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게 됩니다. 하루키를 롤모델로, 목표로 하고 글을 쓰는 이들에게는 뭔가 '신격 모독'처럼 들릴지 몰라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소설은 하루키의 말처럼 분명 재능보다는 경험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걸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라도 이유 혹은 근거를 대보라고 하면 이렇게 말할 셈입니다.

하루키의 작품은 천재적인 발상의 전환보다는 내면으로의 침잠과 들여다보기를 주요 소재로 삼고 세계를 만들고 확장해가고 있다고 말이죠. 그런 하루키의 작품이 일본에서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건 제게는 작지 않은 충격을 안겨줍니다. 그보다 얼마나 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야 '문학성'을 갖추게 되는 건지.

 하루키는 오히려 수상에 대해 담담한 태도를 보입니다. 

"받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하루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할 법한 그런 생각이라 역시 하루키 답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납득할 수밖에 없어지죠.


 야구를 관전하다 '이제 소설을 써야겠다'라고 생각했다는 점, 자리를 잡은 가게를 접으면서도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한 점, '실패하면 돌아갈 수 없으니 필사적으로 썼다'는 점. 

 하루키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작품 속 인물들과 닮아 보이는 것 역시 우연은 아니겠지요.


 저보다 먼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은 이는 추천하는 말에 붙여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때 읽으면 좋겠다."

 정확히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제게는 그런 말로 기억됐으니 어쩔 수 없겠죠. 

2017년이라는 미지의 해, 시작, 출발점에 읽기에 알맞겠다는 생각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기에, "오늘은 뭘 읽을까?"하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이 책이다!"라고 답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무엇을 시작할 때, 어떤 계기가, 운명적인 계시가 필요하다며 기다리는 건 다만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핑계 안에는 '바빠서'라는 흔히 써왔던 말도 들어있고, '얼마나 더 해야 해?'라는 볼맨 마음도 포함됩니다. 하고 싶으면 그저 하면 되는 것뿐이죠.


 이만큼이나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은 주제에 이제 와서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하루키는 자신이 '좋아서'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말이죠. 

 누가 '시켜서'라거나, '어쩔 수 없이'하는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서문에서 하루키가 '마라톤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며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 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달리기를 '하라'고 하는 책도, '글을 써라'라고 하는 책도 아닙니다. 다만 하루키 자신이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왔고, 이루고자 했던 것들에 대해 담담하게 적어나가고 있을 뿐이죠.


 하루키에는 전혀 못 미치지만 한때나마 꾸준히 달리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10킬로만 달리려고 해도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숨을 가누기 힘들었죠. 그래도 계속하다 보면 점점 더 수월하게 달릴 수 있게 되더군요. 다만 다음에 발을 디딜 자리, 곧 돌게 될 코너, 마음으로 정해둔 목표, 그 외에는 생각하지 않던 시간이 문득 그리워졌습니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하루키가 달리기 때문이 아니라, 달리기를 하던 그 날들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말이죠.


 하루키는 마라톤으로 치면 베테랑 러너입니다. 하지만 그런 하루키조차 그날의 레이스에 대해 '확신'을 갖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달려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라는 겁니다.

 어쩐지 뻔한 얘기 같지만, 삶 역시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제를 살았다고 내일이 어떨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중요한 건 막무가내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꾸준히' 살아내는 일.

 그런 태도야말로 자신의 삶에 진지하게 임하는 성실한 사람의 삶일 겁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너무 많은 '외부 세계'의 정보에 휘둘립니다.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된 만큼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하고,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것까지 '해야 할 것 같아서'라거나, '어쩔 수 없어서'라며 어중간한 태도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묻는 일은 계속해야만 합니다. '그때' 최선이었던 것이 '지금도' 최선인지 말이죠.

  

 알 수 없다는 건 두려움이 되기도 하지만, 설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네, 뻔하고 흔한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 익히 들어온 말들, 얼마만큼 스스로의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지요.


 우리 삶에 있어 우리는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레이스를 치르는 러너입니다. 저마다의 레이스를 치르는 것이기에 결승점 또한 달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함께 달리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혼자만의 레이스이기도 합니다. 

  

 하루키가 묘비명으로 삼고 싶다고 적은 말은 이렇습니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단순히 마지막까지 살아내겠다는 결심이었다면 이렇게 적을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하루키는 마지막까지 '러너'로 살아내겠다고 결심했기에 이렇게 적고 싶다고 말했을 겁니다.

 흐지부지 살지는 않겠다는 거겠죠. 하루키의 이야기 속 하드보일드 한 삶을 추구하는 인물들처럼 말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자주 걸었습니다. 걷는 것도 아주 천천히 거의 멈춰 서듯 걸었던 날도 적지 않습니다. 사실은 멈췄던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제까지의 일입니다. 달라지지 않을 이유, 달라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작할 때, 혹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면 좋을 이유는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 사람 역시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올해를 특별한 한 해로 만들고 싶습니다.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베테랑의 러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루나 이틀 무리해서 달려봐야 남는 건 근육통과 부작용뿐이죠. 진지하게, 성실하게, 꾸준히 해나가렵니다. 

 이유요,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선을 '안으로' 돌리세요. 거기가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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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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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나는 부끄러운 게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창피한 게 많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우냐고 물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답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모르거나 모른 척 지내왔고, 지금도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다."라고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학살자에 대항하여 자유와 권리를 지키고자 맞섰던 이들의 이야기. 

 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잘 알려진(정말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의 과정, 그 한 장면이 담겨있는 작품입니다. 

 이미 서너 번이나 추천을 받고도 읽기를 미루다 이제야 읽은 것이 또 부끄러워집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장 절실했던 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어렴풋이 혹은 막연히나마 그날의 일을 알고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자 기만이었다는 걸 깨달았던 겁니다.

 내 안에서 무언가 깨어져 나가는 느낌,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과거가 기어코 제 앞에 마주 서서 비켜서지 않는 것만 같은 답답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나자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책에 대해, 이 책 속에 담긴 이야기에 대해 무엇을 쓸 수 있을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을 보낸 오늘에야 그나마 적을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모르는 나이기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모르는 소리라도 끄적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읽고 나서 느낀 부끄러움은 하나나 둘이 아닙니다. 그중 가장 컸던 건 '모른다'였고, 그다음 혹은 그 다음다음으로 부끄러웠던 게 서툰 글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과거의 시간, 과거의 사람들을 현재로, 미래로 몽땅 이끌고 와서 현실의 나와 미래의 나를 일깨우건만, 저는 고작 끄적이기를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오늘도 못 되는 '지금'을 낙서처럼 휘갈기기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떤 이는 현재의 우리를 과거의 시간으로, 과거의 사람들 속으로,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다 놓건만, 저는 그나마 끄적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일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청산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친일파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고, 군부의 독재와 폭력을 청산하지 못했고, 비리를 저지른 재벌과 권력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가 만들어낸 현실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당면한 현재의 모습입니다. 수십 년 전에 납치되고 살해되어 사라진 후 그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여전히 매일매일의 깨어있으면서 마주하는 악몽을 견뎌야 하는 가족들의 외침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비명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권력의 정점에 있는 존재, 대통령이라는 자가 권력에 부역하는 자들과 함께 저지른 범죄행위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혐의를 부정하고, 부정하는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이 외쳐대는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 과거로, 과거로 끌고 가려는 듯 보입니다. 망령처럼 간단히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분노와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는 아수라장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듯 말입니다.


 기이한 일이 자꾸만 벌어집니다. 

 당사자들은 누구를 용서하지도, 용서할 생각도 없건만, 전혀 무관한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죄인들을 용서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어쩌겠느냐고, 용서하지 않으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말합니다. 부끄럽게도 저 역시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수 있나?'하고 속으로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그 반문은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동의'가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포기'에서 나왔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과거가, 잘못이, 과오가 청산되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약해서'라는 걸요. '어쩔 수 없다'는 타협의 말은 '내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는다면 눈감을 수 있다'는 '비겁한 변명'이었다는 걸요.


 『소년이 온다』에서 한강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체머리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소년이 온다』45쪽.

'용서'는 미덕이라고, 용서하는 자가 이기는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용서하면 이기게 되는 걸까요. 영원히 패배하는 게 아니라요? 용서를 종용하는 분들께, 그토록 마음이 넓고 큰 분들께 묻습니다. 

"당신의 일이라도, 당신이 경험한 일이라도 그렇게 말하시겠습니까?"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아니면, 그날의 일을 '안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날 죽어간 이들의 가족이건, 친구건, 그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니고는 '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날의 일들이 사진으로, 영상으로, 소문으로 보고 들은 게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안다'라고 말해왔던 걸까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어쩌면 그들의 말이 '거짓' 혹은 '과장'이라고 믿으면서 어떻게 '안다'라고 고개를 숙일 수 있던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중대한 사태가, 비극이 그처럼 태연히, 조용히, 오래도록 묻혀 있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마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의 몸처럼, 그토록 무력하게 침묵해 왔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습니다. 오늘날에 벌어지고 있는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을 보니 이제는 알겠습니다. 다시 이대로 침묵한다면 앞으로도 같은 일이 계속될 테지요.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또 알겠습니다.


  한강은 '온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오느냐, 한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소년이 온다』174쪽.

누구인지, 누가 오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 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그 누군가는 지치지도 않고 거듭 걸음을 옮겨 오늘로, 내일로 나아옵니다. 네, 가지 않고 오고 있는 겁니다. 


『소년이 온다』 속 '너'는 열다섯 살 학생인 '동호'입니다. 군인의 무자비한 총격에 숨진 아직 애티를 다 벗지 못한 소년입니다. 

 어떻게 군인이 어린아이에게 총을 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쐈습니다. 한 명, 두 명에게도 아닌 무수히 많은 소년들에게 총을 쐈습니다. 

 '악의 평범성',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처리'했던 독일의 나치와 아이히만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이 땅에도 몇 번이나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럴 리 없는' 사람들이, '그럴 수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고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태연히 증언하는 일도 거듭, 거듭 일어났습니다.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자도,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

이 말을, 정말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들의 기만입니다. 비웃음입니다. 그들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고, 복수할 기회를 찾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있으면서 막지 못했던 이들, 의심하면서 명령에 복종한 이들, 마지막까지 거부한 이들은 마음의 병을 앓았습니다. 누가 때린 자이고, 누가 맞은 놈인 겁니까. 누가 다리를 뻗고, 누가 웅크리고 자게 됩니까.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한 없이 길어지고, 앞뒤를 갖추지 못한 글은 점점 더 부끄러워지기만 합니다. 


 한강의 다른 작품은 모르겠습니다. 고작 맨부커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와 단편 몇 편을 읽어봤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 『소년이 온다』는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누가 오는 건지, 왜 오는 건지, 와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건지, 읽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책 내용을 더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쓰고 나면 조금은 후련해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건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앞으로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적어도 두 가지는 있습니다. 

 하나는 용서하지 않는 겁니다. 

강요당하고 종용당하더라도 진정한 청산의 날까지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잊지 않는 겁니다.

기억한다면,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를 향해 오는 그들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만남이 우리를 다시 내일로 이끌어 줄 겁니다.


 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안다고도 이해한다고도 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기억에 새겨볼 뿐입니다. 그들이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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