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도 검정이 왔어요. ㅠ.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른 수염을 가진 귀족이 있다. 

그는 아내가 될 여자를 찾고, 어떤 여자들이 아내가 되기 위해 찾아온다. 

이제 아내가 된 여자에게 푸른 수염은 단 한 가지만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집 안에 있는 '어떤 방'에만 들어가지 마시오."

 여자는 그러겠다고 약속하지만 호기심이 여자의 약속을 이긴다. 어쩌면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약속을 어기고 '어떤 방'에 들어간 여자는 죽었으니까.

 푸른 수염의 귀족이 다시 아내가 될 여자를 찾는다.

아내가 되고, 약속하고, 약속을 어기고, 살해당하기를 반복한다.

 푸른 수염은 자꾸만 아내가 될 여자를 찾고, 여자들은 아내가 되려고 찾아온다. 

푸른 수염은 약속을 받아내고, 여자는 약속을 어기며, 죽는다.

 이쯤되면 포기할만 한데 푸른 수염은 한 번 더 아내가 될 여자를 찾는다. 

이번 여자는 만만치 않았다. 결국 오빠와 힘을 합친 여자는 푸른 수염을 죽이고 재산을 차지한다.

 이 이야기에는 사랑이 없다. 욕망, 어리석음, 어리석은 욕망, 욕망의 어리석음만 있을뿐.


<푸른 수염>은 동명의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해서 지어진 소설이다. 아멜리 노통브를 처음 읽었는데, 쉽고 빠르게 읽히는 속도에 깜짝 놀랐다. 


 소설에서는 동화 속 푸른 수염 대신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라는 귀족이 자신의 집에 세 들 세입자를 구하고 있다. 이번에 앞서 이미 여덟 번의 세입자 구하기가 있었고, 여자들이 세입자로 뽑혔으며, 세입자로 들어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이라고 했다. 귀족의 집에서 사라진 이후 두 번 다시 그 여자들을 만난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죽었다거나 살해당했다고 하지 않고 '실종'됐다고만 했다.

 세입자로 들어간 여자들 중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지만 세입자를 모집할 때마다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아홉 번째인 이번에도 열여섯 명이나 되는 여자가 찾아왔다. 

 벨기에 여자 사튀르닌 퓌이상도 열여섯 명 중에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싼 월세로 호화로운 집에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다른 누구도 아닌 사튀르닌이 새로운 세입자로 선정된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에서도 귀족이 제시한 금지 사항은 하나다. 

'암실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 것.'

그 외에는 집안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뭘 하든 자유였다.

 

 귀족, 엘레미리오는 돈 많고, 요리에 능하며, 바느질은 물론 사진까지 잘 찍는 만능 재주꾼이다. 그런 그에게도 나쁜 버릇이 있는데 자꾸만 사랑에 빠진다는 거다. 상대가 자신을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고백하고, 구애하기를 멈추지 않을만큼 뻔뻔한 태도로 말이다.

 사튀르닌은 이 변태에 살인마임이 분명한 남자를 경계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경계심이 자꾸만 누그러진다. 경계심은 호기심으로 바뀌며 엘레미리오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진실은 암실 안에만 있고, 암실 안에는 죽음만이 있다.


 푸른 수염과 엘레미리오의 공통점은 들어가지 말라고 금지했을뿐 방문을 잠그거나 막아두지 않았다는 거다. 엘레미리오는 말하기를 잠그거나 막는 건 의미가 없었을 거라 한다. 잠겨 있거나 막혀있어도 호기심을 멈출 수는 없었을 거라고 말이다. 호기심이란 녀석은 분명 무모하고 참을성이 없다. 왠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에 내재된 고질병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다. 

엘레미리오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선물 공세와 요리 뽐내기를 그치지 않는다. 급기야는 최대의 호의라고 할 수 있는 암실의 비밀도 알려준다. 하지만 엘레미리오가 어떤 호의를 베풀고, 희생을 감수한다 해도 그런 게 사랑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만든 착각. 늘 이야기하지만 그런 착각은 둘 모두를 비극으로 끌고 가게 된다. 


 사튀르닌은 자유를 만끽한다. 자신을 시험하고 구속하려는 엘레미리오도 적절히 이용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 신처럼 무책임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자유를 이용했다면 그 이용한 만큼 삶에 돌아오게 되는 거다.


 <푸른 수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튀르닌의 태도도, 엘레미리오의 비밀도 아닌 황금을 찬양하는 표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물질이라는 황금. 좀처럼 변하지 않아서 왕의 관이나 신의 형상을 짓는데 쓰인 황금을 다양하고도 적절하게 묘사해서 그려 보여주는 거다. 그 사치스러운 묘사라니.


소설의 결말이야 어떻든 만약 나에게 단 하나의 열려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게 허락된다면 단 하나의 금지를 지키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을 얻은 다음에는 만족하게 될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 밖에 안 하게 된다고 한다. 그 방에만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절대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걸까. 


 이 절대 지키라고 하는 말을 절대 어기고자 하는 뒤틀림과 사랑을 엮어서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억지로 사랑에 빠질 수도, 억지로 사랑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논리가 떠오르고 마니까 말이다.


 책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즐겁게 읽고, 읽고 싶을 때 읽고, 읽고 싶은 걸 읽어 나가면 계속 읽게 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어수선하니, 쓰는 일에도 드러난다. 어수선하고, 어지럽고, 어설프다.


엉뚱한 결론을 내려볼까.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런 게 아닐까.


"사랑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 복잡한 세상, 나를 지키는 자유의 심리학
마이클 해리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는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찾아야 할 필요도없고,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마주하는 '고독'을 회복해야만 한다. 고독은 자발적인 홀로있음이며,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나는 흩어지고 지워진 나의 조각들을 되찾아야 한다. 내가 아닌 그 무엇으로도 나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어떻게 다른가?

이 물음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외로움이 불러 일으키는 비참함이었다.  

고독은 찬란할 수 있지만 외로움은 비참하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이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감옥에 붙은 낭만적 이름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고, 연락 없이도 지인들의 근황을 알게 되며, 계정 하나만 만들면 낯모르는 무수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세상.

 이토록 다양한 연결 속을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풍요 속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왜 자꾸 외로워지기만 하는 걸까.

 함께 있지 않기에 외로운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다. 그때는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연결되기만 하면 외로움이 사라질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기만 하면 외로움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거라고 말이다.

 

 심심함은 게으르고 나태한 쓸모없음의 증거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쉼 없는 근면과 부지런함이 미덕으로 칭송받던 시대는 저물었다.


 시간은 많은 걸 바꿔 놓았다.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다. 사람은 혼자일 수 없기에 외로움을 느낀다.

심심함, 게으름, 나태함을 철저하게 박살냈듯 관계, 성공,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고독을 외면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다.


 사람은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타인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사르트르처럼 '타인은 지옥이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다. 타인의 존재가 고통을 주는 건 나 자신보다 타인이 존재 우위에 있을 때다. 주체성, 독립성을 잃고 휘둘린다면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나에게는 타인이 필요하다.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수용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나의 존재를 긍정해줄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해도 외로움이 나를 집어삼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에서는 얕은 존재 의식, 깊이도 무게도 없는 사교 행위로써의 관심을 '소셜 그루밍'이라고 칭한다. 잠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쓰다듬 말이다. 지속될 거라는 확신보다 언제든 그칠 수 있다는 불안이 더 큰, 목이 말라 바닷물을 들이켜듯 점점 더 관계의 갈증을 키우는 노력이 SNS와 커뮤니티의 모습으로 확장되고 장려된다. 넓고 얕은 관계에 휩쓸려 나도, 우리도 잃어간다. 마침내 우리는 조금 더 외로워진다.


 어떻게 지독한 외로움을 끝내고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소로처럼 오두막을 짓고 홀로 지낼 수도 없는, 정보와 연결의 홍수 속에서 무엇으로 우리를 건져낼 수 있을까.


 이 시대에 연결을 거부한다는 건 덜하게는 괴짜로, 심하게는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기를 자처하는 게 된다. 다들 읽는 책을 읽어야 하고, 다들 본 영화를 봐야 하며, 다들 아는 건 나도 알고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시달림이 차츰 나를 갉아 들어온다. 적극적으로 혼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잠시라도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루야 안녕 - 190만 팔로워가 사랑한 시바견 마루의 하루
오노 신지로 지음, 하진수 옮김 / 경향미디어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스타그램에 욱일승천기를 당당히 그려 올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책이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니 씁쓸한 기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한 일요일 오후였다. 

1시 32분. 

날씨는 조금 흐림. 

특별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는 시간. 

1시 33분이 되기도 전에 잊어버릴 의미 없는 한때였다.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이쪽 편에 두 명, 건너편에 네 명. 일곱 명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27초 후에는 초록불이 켜질 테고, 이쪽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저쪽 사람들은 왼쪽으로 엇갈리듯 도로를 건널 거였다. 

 20초, 5초 후에는 보행 신호의 초록 불이 점멸 신호로 바뀔 테고, 다시 15초 후에는 이쪽 신호에 불이 들어올 거였다. 건너편에 묘한 생물  마리가 어슬렁 거리는  발견한  그때였다. 

 비둘기.

어떤 이에게는 혐오의 대상으로, 어떤 이에게는 공포로, 어떤 이에게는 놀잇감으로, 어떤 이에게는 먹이.. 흠흠, 흔한 도시의 비둘기  마리였다.

 산만하게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도는 비둘기들. 흔히 보이는 비둘기인데 묘하게 시선이 갔다. 

'먹이라도 찾은 건가?'

 보행 신호가 켜졌다. 차들이 멈췄다. 생각도 멈췄다. 기다리던 이들은 건너기 시작했다. 

'음?' 

 비둘기 한 마리의 움직임이 변했다. 

길을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렇게 보였다. 

 오른쪽에서 앞으로, 앞으로. 종종 거리는 걸음으로 건너편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럴 리가?'

길을  건너고도 비둘기에게서 시선을  수가 없었다. 

중앙선을 넘어서는 중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비둘기는 길을 건넜다.   

보행 신호가 꺼졌다.

솔직히 놀랐다. 스쳐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 싶었다. 

그 설마였다. 

'신호를 받아서 길을 건너는 비둘기라니.'

  놀랐다. 

비둘기는 새다. 새는 난다. 새에게는 날개가 있다. 나는  새다.

'모처럼의 날개를 쓸모없게 만들다니.'

또 한 번 놀랐다.

 번째 놀람의 이유는 '의외성'이었다. 

 번째 놀람의 이유는 '멍청함'이었다.

지금 새삼스럽게 놀라워하게   하나  있다.

'신호를 받아서 건너는 비둘기  마리가 뭐라고 가던 걸음을 멈추고 넋 놓고 쳐다볼 정도로 놀랐던 걸까?'

모를 일이다.


 꾸준히 참여하는 독서 모임이   있다.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독서 모임 전부 같은 책을 읽고 모이는 형태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보통  가지 때문에 놀라게 된다.

 번째는 비슷한 부분, 표현에 공감하고 닮은 생각을 떠올린다는 거다. 

나이도, 성별도, 상황도 저마다이건만 유사성은 언제나 드러난다.

 번째는 너무나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는 거다. 같은 작품을 읽었는데 어떻게 그럴  있을까 싶을 만큼 다르다. 

  

 첫 번째와  번째는 모순된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언제나' 유사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너무나'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있을  없는 일은 아니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기에 그런 것뿐이다.


 사람은 사람을 오해하고 후회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옳고 그름'이나 '알고 모름'에 있어서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오직 신만이 '옳고 그름'과 '알고 모름'에서 자유롭다. 신이 모든  알고, 절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는 전지전능을 말하려고 하는  아니다. 흔히 인간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나 '알고 모름'이라는 개념이 신에게는 없을 것이기에 자유롭다는 거다.


 <풀베개>는 나쓰메 소세키 장편 소설 가운데서 가장 회화적인 작품이다. 

색채, 정경의 묘사, 인물의 행동. 

날씨와 풍경, 계절까지 눈으로 보듯 그려낼  있을 만큼 감각적인 표현으로 그득하다. 

묘사만 기가 막혀서는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울리게  거다. 

문장마다 섬세한 사유가 차고 넘친다.  놀라운 건, 표현 자체만 두고 봤을  어렵거나 난해한 부분이 거의 없다는 거다. 쓰는 사람도 즐기기 위해 쓰고, 읽는 이도 즐기며 읽을  있는 이야기.

그게 <풀베개>다.


 페이지를 인용한다.

이지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중략)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가까운 이웃들과 오가는 보통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해서 옮겨 갈 나라는 없을 것이다. 있다면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일 뿐이다.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욱 살기 힘들 것이다.
<풀베개> 

소세키가 이야기 속에 그려낸 100년  일본에서도 일본이 살기 힘들다고 이야기한 이들이 있었나 보다. '보통 사람들', '이웃들'이 만든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나 보다. 소세키는 그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가까운 이들, 보통의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모르는 이들, 낯선 사람들이 만든 세상살이는 쉬울  같으냐고.

  

 <풀베개>는 어느 서양화 화공의 이야기다. 일본인 이면서 동양화가 아니라 서양화를 그리는 화공. 

그림을 그리겠다고 화구를 챙겨 메고 산을 넘어왔으면서 실제로는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는 화공. 

붓으로 화폭에 풍경을 담기보다 펜으로 일본의 단가, 하이쿠를 읊는 화공. 

밖에서 보면 태평스럽기만 하고 전혀 화공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화공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묘한 분위기와 행동을 거듭하는 나미라는 여성. 

 여성은 화공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자, 시와 그림의 주제가  '재료'다.

어떻게 사람을 '재료'라고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대답은 '그럴  있다'다. 


인간,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도구로, 재료로 삼는 건 그릇된 일이다. 하지만 <풀베개>에서 화공이 거듭 강조하는 경지, '비인정(非人情)'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며, 오히려 권장되는 자세다. 

곤란과 기쁨 심지어는 고통에서조차  걸음 떨어져 객관화시키는 일.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신의 시선으로 시간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그것이 '비인정(非人情)'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접했을 가르침이다. '곤란함, 어려움에 함몰되어 당황하기보다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해결책이 보이기 마련이다라는 식의 가르침' 말이다.

간단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들어본  없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흔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비인정(非人情)이라는 개념을 몰라도 <풀베개>를 읽는 데는 거의 지장이 없다. 

 <풀베개>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과도 결을 달리 한다. 줄거리에 얽매이기보다 작품  문장과 표현, 묘사를 즐기기를 바라며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어느 페이지를 펼쳐 읽든  페이지가  편의 그림으로 머릿속에 그려졌다면 그걸로  거'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소설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몰인정한 게 아닙니다. 비인정(非人情)하게 반하는 겁니다. 소설도 비인정으로 읽기 때문에 줄거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겁니다. 이렇게 제비를 뽑는 것처럼 착 펴서 펼쳐진 곳을 멍하니 읽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풀베개> 

  

소세키 작품에서는 드문 일인데, 작가가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줄거리 같은  아무래도 좋'다.

'제비를 뽑는 것처럼  펴서 펼쳐진 곳을 멍하니 읽는' 재미를 즐겨달라. 

이렇게 해주기를 바란 게 아닐까.


그런 이야기다 보니 <풀베개>를 읽으며 느낀 감상을 구구절절이 적을 수도 없다. 

적을  없지만 이대로 끝내버리면 여기까지 읽은 이를 깜짝 놀라게 하고 말 테니,  곳을  발췌해 적기로 한다.


사람들은 기차를 탄다고 한다. 나는 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기차로 간다고 한다. 나는 운반된다고 한다.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 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한 사람 앞에 몇 평의 지면을 주고 그 지면 안에서는 눕든 일어서든 멋대로 하라는 것이 현재의 문명이다.
<풀베개> 


앞서 태평해 보이는 화공의 이야기라고 적었던 걸 정정한다. 
인용한 '현재의 문명'은 100년도 더 된 과거의 '현재'다. 

현재의 '현재'와 다르지 않은 풍경, 과거의 '현재'보다 더 가혹할 현재를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놀라고 만다.

마치 "이것이 문명의 속성이다. 내가 소세키다."라며 무력시위라도 하는 듯하다. 

읽을 가치를 보장한다고, 어느 곳을 펼쳐 읽어도 재밌을 거라고 말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처음 <마음>을 읽은 날부터  편애하는 작가라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는 말할  없다. 하지만 누구에게 권해도 실패하지 않을 작가라고 믿는   되는 작가  하나 이기도 하다. 


소세키의 이야기  무엇이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이야기"라는 문장을 이끌어 냈는지, 읽은 의미가 있었는지 저마다의 대답을 들려줬으면 한다. 

 대답에 다시 한번 놀랄  있었으면 한다. 

함께 하면 즐거운  속에 같은 작품을 읽고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는 일이 있어서 행복하다. 


 나란 인간만의 문제일지 모르지만 그게 무엇에든 달관하기가 쉽지 않다. 

달관하기 쉽지 않은 인간이지만 묘하게도 책 이야기만은 달관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 

 달관은 무척 달다.


 비인정(非人情)은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소설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이야기, 지금의 이야기지만 소설이기에 조금은 차분히, 조금  깊이 받아들이고 생각할  있다. 

다른  아닌 이것이야말로 달관이 아닐지.


 좋은 이야기를 나눠주는 이는 언제든 환영이다.

다음에는 어떤 이야기와 누구의 이야기와 만나게 될지 벌써 가슴이 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7-09-11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책에서 읽었는데, 《풀베개》는 실제로 잘 안쓰는 한자나 옛말 같은 것이 팍팍 들어있는, 고풍스럽고 아름답지만 도리어 일본인들한테는 읽기 어려운 책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는 헷갈리지만요;;